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19:26:07

두증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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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杜曾
(? ~ 319)

서진 말기 반란자. 형주 남양군(南陽郡) 신야현(新野縣) 출신. 남중랑장 두유(杜蕤)의 사촌동생.

2. 생애

어릴 때부터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나, 갑옷을 입고도 물 속을 헤엄칠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 진남대장군, 신야왕 사마흠의 참군으로 임관하여 화용(華容) 현령, 남만사마(南蠻司馬)를 역임하였다. 전투가 벌어질 때면 두증은 진영 내에서 가장 용맹히 싸워 무력으로 3군의 병사들을 압도하였다.

영가 6년(312년) 정월, 일찍이 신야왕 사마흠 장창의 난을 진압하다가 전사하였고, 형주는 영가의 난을 거치면서 황폐화되었다. 죽은 사마흠의 아문장이었던 호항(胡亢)은 서진 정권에 불만을 품은 무리를 모아, 경릉(竟陵)에서 스스로 초공(楚公)을 칭하고 형주를 노략질하였다. 이때 두증은 호항에 의해 경릉태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호항이 후에 부하들을 의심하여 용맹한 장수 수십명을 주살하자, 두증은 자신도 주살될 것이 두려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에 두증은 은밀히 호항을 제거할 마음을 품고 자신을 극도로 낮춰서 호항을 진심으로 섬기는 척하니, 호항은 아무런 의심없이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건흥 원년(313년) 8월, 당시 형주에는 왕충(王沖)이라는 도적이 형주자사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 역시 호항 못지 않게 강성하였다. 왕충이 여러 번 군대를 보내 호항을 위협하자, 호항은 이를 근심하여 두증에게 계책을 물었다. 두증은 호항에게 적을 영격해야 하며, 이를 위해 무기고에 있는 칼과 창을 모두 꺼내 갈 것을 권하였다. 호항이 두증의 제안을 그대로 실행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을 때, 두증은 몰래 왕충군을 유인하여 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호항은 정예병을 모두 성 밖으로 내보내 왕충군과 싸우게 하였고, 이 기회만 노리던 두증은 호항을 참수한 뒤에 그 무리를 병합하였다. 호항의 세력을 장악한 두증은 스스로 남중랑장, 영 경릉태수를 자칭하였다. 그는 과거 남군태수 유무(劉務)에게 그 딸과의 혼인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일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자신만의 세력을 갖추자마자 유무의 집안을 멸하였다.

건흥 원년(313년) 9월, 형주자사 도간의 참군 왕공(王貢)이 왕돈을 만나고 돌아오던 중, 경릉에 들러 도간의 명령을 사칭해 두증을 전봉대도독으로 삼고 왕충을 토벌하게 하였다. 두증은 그 명령이 진실된 것이라 믿어, 진격하여 왕충을 참수하고 그 무리를 전부 항복시켰다.

건흥 원년(313년) 10월, 왕충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도간이 왕공과 두증을 소환했지만, 두증은 응하지 않았다. 왕공 또한 명령을 사칭한 죄로 다스려질 것이 두려워, 오히려 두증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도간을 대파하였다. 도간은 겨우 목숨만 구한 채 왕돈에게로 달아났다.

건흥 3년(315년), 장안의 민제 사마업이 시중 제오의(第五猗)를 안남장군, 형주자사로 삼아, 무관(武關)을 거쳐서 형주로 나아가게 하였다. 두증은 양양(襄陽)에서 제오의를 맞이하고, 자신의 조카와 제오의의 딸을 혼인시킨 뒤, 제오의와 함께 면수(沔水)와 한수(漢水) 일대를 각기 나누어 점거하였다.

건흥 3년(315년) 8월, 두도의 반란을 진압한 도간은 승세를 타고 나아가 두증까지 정리하려 하였다. 이때 사마 노염(魯恬)이 도간에게 간했다.
"옛 사람들은 전투를 할 때, 그 장수를 헤아리고 싸웠습니다. 지금 사군(使君)의 장수들 중 두증에 미치는 자가 없으니, 그를 압박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증을 가벼이 여긴 도간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계속 진군하여 두증군이 머물고 있는 석성(石城)을 포위하였다. 당시 두증의 군대는 대부분 기마병이었으나, 도간의 군대는 기마병이 한 기도 없었다. 두증이 기마부대를 이끌고 성에서 나와 도간의 진영으로 돌격하자, 도간의 병사들은 당해낼 방도가 없어 제대로 반격도 못해보고 완벽히 돌파당하고 말았다. 도간의 진영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돌파한 두증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도간은 대패하여 면수에 빠져 익사한 자만 수백에 달했다. 두증은 순양(順陽)까지 도간을 추격하다가, 말에서 내려 도간을 향해 절을 올리고 군대를 돌려 완(宛)을 포위하였다.

당시 완성을 수비하던 평남장군 순숭은 성 안에 병력이 적고 양식이 다해, 어린 딸 순관을 양성태수 석람(石覧)에게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석람은 남중랑장 주방에게도 이를 알렸고, 주방은 아들 주무와 3,000 병력을 파견해 순숭을 구원하였다. 이에 두증은 포위를 풀고 후퇴한 뒤, 순숭에게 서신을 보내 단수(丹水)의 도적을 무찌름으로써 용서 받기를 구하였다. 두증을 완성의 외부 지원 세력으로 만들고자 한 순숭은 도간의 반대를 무시하고 흔쾌히 수락하였다. 두증은 2,000명을 거느리고 양양을 포위했지만, 수일 동안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여 그냥 귀환하였다.

그 무렵, 왕돈이 심충과 전봉(錢鳳)의 참언에 따라 도간을 광주자사로 좌천시키고 사촌동생 왕이를 형주자사로 삼았다. 도간을 따르던 형주의 장수와 관리들은 반발하여 왕돈에게 서신으로 도간의 유임을 청했으나, 왕돈이 불허하였다. 도간의 장수였던 정반(鄭攀)과 마준(馬雋)은 분한 마음에 3,000명을 이끌고 운구(溳口)에서 두증을 영접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왕이가 정반과 두증의 습격을 받고 강안(江安)으로 달아나니, 정반은 제오의를 끌어들여 왕이를 막았다. 왕이는 군대를 이끌고 다시 정반 등을 공격했지만, 두증에게 공격받고 또 패하였다.

건무 원년(317년) 8월, 정반 등의 무리는 비록 반란을 일으켰으나, 내부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점차 하락하고 있었다. 이에 정반이 아예 두증에게 소속되고자 무리를 이끌고 황상구(横桑口)에 이르렀을 때, 대장군 왕돈이 무창태수 조유와 양양태수 주궤(朱軌)를 보내 이들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정반, 마준 등은 바로 투항을 청했고, 때마침 두증 역시 제오의를 쳐 이전의 행적을 속죄받기를 청하였다. 왕이는 정반과 두증의 투항을 믿고, 형주 치소가 위치한 강릉(江陵)에 부임하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양구(揚口)에 보루를 세워 장사 유준(劉浚)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건무 원년(317년) 9월, 과연 왕이가 강릉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두증이 또 배반하여 정반의 무리에서 갈라져 나온 마준과 함께 양구루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나아가 여관호(女觀湖)에서 조유와 주궤를 패사시켰다. 두증이 승세를 타고 면구(沔口)로 진격하니, 그 위엄에 장강 일대가 크게 흔들렸다. 이에 예장태수 주방은 왕돈의 명을 받고 군사 8,000명을 이끌고 돈양(沌陽)에서 두증의 진격을 막았다. 주방은 두증군의 예기가 자못 날카로운 것을 보고, 장수 이항(李恒)에게 좌익을, 허조(許朝)에게 우익을 맡긴 후, 본인은 중군을 직접 지휘하였다. 두증이 먼저 돌격하여 좌, 우익을 공격하였고,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혈전을 벌인 끝에 주방군의 양익이 모두 궤멸당하였다. 그때 주방이 중군에서 장수와 병사 800명을 친히 선발하여 두증군을 향해 돌격하게 하니, 아침부터 이어진 전투로 지쳐있던 두증군은 붕괴되어 1,0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주방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밤새도록 계속 나아가 두증군을 연이어 격파하였고, 두증에게 빼앗겼던 한수와 면수를 일대를 수복하였다. 두증은 근거지를 죄다 잃고 무당(武當)으로 들어가 숨었다.

대흥 2년(319년) 4월, 마침내 제오의를 죽이고 양양을 빼앗은 주방이 이어서 무당에 있는 두증의 무리를 토벌하였다. 누차 공격해도 두증을 이기지 못 하던 주방은 적의 배후로 우회할 수 있는 산길을 발견하고, 그곳을 통해 두증을 습격하여 그 무리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마준, 소온(蘇溫) 등 두증의 장수들은 두증을 배신하고, 그를 사로잡아 주방에게 투항하였다. 주방은 두증을 무창(武昌)으로 압송해 왕돈에게 그 처분을 맡기려 했으나, 죽은 조유의 아들 조윤(趙胤)과 주궤의 아들 주창(朱昌)이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자 하여 그 자리에서 참수하고, 두증의 시체를 그들에게 넘겼다. 조윤과 주궤는 두증의 살을 씹어 먹음으로써 한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