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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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ce5b6><colbgcolor=#850000> 안동 장씨 시조 장정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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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안동(安東) |
품계 |
삼중대광(三重大匡) 대상(大相) |
공신호 |
통합삼한보사벽상아부공신 (統合三韓保社壁上亞父功臣)[1][2] |
삼사 | 태사(太師) |
성씨 | 장(張) |
이름 | 정필(貞弼) / 길(吉)[3] |
생몰연도 | 888년~몰년 미상 |
※ 시호는 품계-공신호-삼사 순으로 읽으며, 품계나 삼사 등이 그 안에서도 여러 직책 겸직일 경우 더 높은 대우나 명예직급을 더 먼저 놓는다. 그러므로 정식 호칭은 ‘삼중대광 대상 통합삼한보사벽상아부공신 태사’가 된다.
[clearfix]
1. 개요
안동 장씨의 시조이며, 옥구 장씨, 단양 장씨, 울진 장씨, 결성 장씨의 도시조이다. 족보 전승에 따르면 길(吉)이 초명이라고 한다.2. 상세
장정필[4]은 당나라 시기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장군을 지냈던 장원의 아들로, 신라 진성여왕 4년에 신라로 망명왔다.[5] 그러나 # 링크를 참고하자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절강성 소흥(= 사오싱시)은 소 자로 '紹'자를 쓰는 것과 달리, 아예 절강성이 아닌 강소성에 있는 소주(= 쑤저우시)에 쓰이는[6] '蘇'자가 쓰인 '소흥'이란 지명은 아예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사오싱시의 그 소흥은 당나라보다 후대인 남송 시대의 연호로부터 유래한 지명인데, 당나라 때에 있을 리도 만무하다는 이유로 조상의 세계(世系)를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삼태사 중 다른 두 명은 확실히 신라계 김씨로서 한국계 토성인 점과 대조된다고 하겠다. 즉, 수많은 성본들과 마찬가지로, 안동 장씨의 시조 설화도 숭화 사상에 입각한 것이기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후 18세가 되던 해 다시 중국으로 가 과거를 준비했고 문과 장원을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는 중국 전역에 학술과 덕망이 뛰어나다며 소문이 나게 된다.
그의 나이가 24세가 되던 해, 그의 소문은 천자에게까지 들어가고 이부상서에 올랐다.
하지만, 경순왕 4년에 다시 신라로 돌아와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며, 안동에서 인재를 양성한다.
후백제를 상대로 서기 930년 고창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며 왕건에게 공을 인정받았다.
[1]
현재는 고려왕조실록 및 고려초기 역사서나 사료들이 모두 망실되어, 안동을 본향으로 하는 삼태사의 정확한 전체 시호를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안동 태사묘나, 전국에 흩어져있는 관련 유적지의 비석들과, 삼태사 묘지석, 족보들, 관련 문헌들에도 시호가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안동 삼태사의 관련 유적지 숫자가 전국적으로 꽤 많기에, 각 유적지 비석에서 공통되는 부분을 취합하여 전체의 온전한 시호를 추론할 따름이다.
[2]
현재 태사묘 위패에 모셔진, 기존에 알려진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이라는 시호는 조선 광해군 때 태사묘를 중건하면서 삼태사의 정확한 전체 시호를 상고할 수 없어서, 그 때 당시 세 가문의 종손이 합의하에 추론한 시호이다. 요즘 세상에는 인터넷으로 전국의 삼태사 관련 유적지 비석들을 모두 볼 수 있으므로, 조선 광해군 때 추론하여 추합한 시호보다는 현재의 정확도가 더 올라갔다 하겠다.
[3]
초명이다.
[4]
대종회에 따르면
장보고의 현손이라고 한다.
[5]
당시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치명타를 받아 왕조 존속이 오늘내일 하고 있었다.
[6]
애초의 강소성의 소가 쑤저우의 그 쑤(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