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02:45:18

만세일계

[[일본 황실|
파일:십육엽팔중표국.svg
일본 황실
관련 문서 · 틀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CA600><colcolor=#FFF> 신위 천황 ( 역대 천황 · ) · 황후 () · 황태후 · 태황태후 · 상황 () · 상황후 · 섭정 () · 황사 [황태자 · 황태손] · 황사비 \ 황태자비 · 황태손비] · 친왕 · 친왕비 · 내친왕 · 왕 · 왕비 · 여왕
칭호 어칭호 · 미야고
분가 미야케 () · 구황족 () · 세습친왕가 ()
가계도 황실 전체 가계도 · 구황족 전체 가계도 · 내정 가계도 · 아키시노노미야 가계도 · 미카사노미야 가계도 · 다카마도노미야 가계도
상징 십육엽팔중표국 · 니시키노미하타
거주 일본의 어소 () \ [고쿄 · 교토고쇼] · 일본의 이궁 ()
능묘 쓰키노와릉 · 후카쿠사북릉
신화 신대 ( 역대 신 틀) \ [아마테라스 · 지신오대 · 히무카 삼대] · 아라히토가미 · 이세 신궁 · 천양무궁의 신칙
의식 · 행사 즉위의 예 · 대상제 · 가가쿠 · 일반참하 · 황기 2600년 봉축곡
보물 삼종신기 () · 정창원
축일 기원절 · 천황탄생일
기년법 연호 () · 황기
제도 황실전범 \ 구 황실전범] · 황적이탈 ()
조직 궁내청 · 내대신부 ( 역대 내대신 틀) · 추밀원 ( 역대 의장 틀) · 황궁경찰본부 · 황실회의 ( 의원 틀)
역사 결사팔대 · 남북조정윤론 · 만세일계 · 북조 천황 () · 인세이 · 추존 천황 ()
문제 후계자 대책 }}}}}}}}}



1. 개요2. 역사
2.1. 전근대2.2. 일본 제국2.3. 현대
3. 유사 사례 비교4. 둘러보기

1. 개요

만세일계([ruby(萬世一系 , ruby=ばんせいいっけい)])는 일본 황실이 1대 진무 천황 이래 단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2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는 관념을 말한다.

오늘날 일본을 비롯한 주류 역사학계에선 일본 황실이 한 번도 단절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낮게 보지만,[1] 고대부터 일본 민중들은 ' 황실은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일본의 권력자들은 천황의 자리를 찬탈할 능력을 가졌더라도 명분상 큰 페널티를 안고 싶지 않아 직접 빼앗는 것은 꺼렸고, 황실 내부에서는 원정, 귀족들은 관백 섭정, 무사들은 쇼군같은 직위를 통해 천황의 권력을 인수해 우회적으로 통치했다.[2]

근대에 이르러서는 메이지 유신을 거쳐 일본 민족주의 국수주의 확립에 이용되어 현재의 만세일계 관념으로 발전했다. 만세일계라는 단어는 1867년 이와쿠라 도모미가 처음 만든 용어이다.

2. 역사

2.1. 전근대

'만세일계'라는 단어는 메이지 유신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일본이 역성혁명이 없이 왕조가 이어졌다는 인식은 옛날부터 일본 안팎에 널리 퍼졌다. 고사기를 비롯하여 육국사가 그러한 관점에서 쓰인 역사서이다. '일본은 왕조가 바뀌지 않는 나라'라는 관점은 외국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송태종 재상에게 반포했다는 칙어(勅語)를 통해 알 수 있다.
上 聞 其國王 一姓傳繼 臣下 皆 世官 因歎息 謂 宰相 曰 "此島夷耳 乃 世祚遐久 其臣 亦 繼襲不絶 此 蓋 古之道也. 中國 自唐季之亂 宇縣分裂 梁·周 五代 享歷尤促 大臣世胄 鮮能嗣續. 朕 雖 德慚往聖 常夙夜寅 畏講求治本 不敢暇逸 建無窮之業 垂可久之範 亦以爲子孫之計 使大臣之後 世襲祿位 此 朕之心焉."
이 그 나라 임금이 하나의 성으로 이어지고[3] 신하 세습함을 들음에 지즐어 탄식하며 재상[4]에게 이르기를 "이들은 섬오랑캐일 뿐인데 도리어 임금의 자리가 세습됨이 아득히 오래고 그 신하도 또한 세습이 아니 끊기니 이는 아마도 옛날의 도로다. 중국 당나라 끝의 부터 천하가 분열되고 후량 후주를 비롯한 왕조가 존속한 기간이 더욱 잘아졌고 대신을 세습하는 후예도 이어짐이 드물었다. 짐이 비록 덕이 지난 성인에게 부끄럽지만 늘 밤낮으로 삼가 고마하며 다스림의 바탕을 살펴 구하며 조널이 아니 겨르로와 다함이 없는 업을 세워 오랠 수 있는 법을 드리우고 또한 자손의 계책으로 삼고자 하며 대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녹과 자리를 세습하게 하리니 이것이 짐의 마음이로다."
송사 Vol. 491』, 「 열전 No. 250」, <외국 7>, 일본

송태종의 탄식은 후술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의 역사관과 같다. 역사적 실체야 어떻든 야마토 왕조(정권)가 세워진지 얼마 안 된 송나라보다 더 오래되고 잦은 왕조 교체가 없는 건 참이니 송태종으로서는 야마토 왕조의 오랜 존속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천황이 권력을 완전히 잃은 가마쿠라 막부 이후에도 이러한 인식은 여전히 존재했다. 일본 남북조시대의 역사학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는 자신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중국은 혼란의 나라다. 복희 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서른 여섯 왕조가 있었고 여러 필화와 수많은 동란이 일어나왔다. 단지 우리만큼은 천지가 비롯한 이래 황통이 불가침이다."라는 글귀를 남겼고,[5] 스페인에서 파견된 필리핀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 이 아베루사(Rodrigo de Vivero y Aberruza) 역시 "일본인의 특이한 점은 2260년 동안 같은 왕가의 혈통이 이어져왔다는 것이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같았다. 조선시대 지식인이 남긴 글에서 만세일계를 다루는 구절이 그리 드물지 않으니 다음과 같다.
自開闢以來 一姓相傳 到今不易.
개벽부터 하나의 성[6]이 서로 전해 여태 아니 바꿨습니다.
간양록』, 강항(姜沆) 출처
自開闢以來 一姓相傳 到今不易.
개벽부터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 여태 아니 바꾸다.
난중잡록』, 조경남(趙慶男) 출처
賴朝以後 一姓相傳 垂四·五百年 此 卽 賴朝 貽厥之遠謨也.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뒤로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 사오백년을 드리웠으니 이는 곧 요리토모가 ( 일본 황실에) 끼친 먼 꾀로다.[7]
동사록』, 강홍중(姜弘重) 출처
自開闢以來 一姓相傳 始於周幽王 到今不易.
개벽부터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하니 주유왕에서 비롯하여 여태 아니 바뀌다.
동명해사록』, 김세렴(金世濂) 출처
自開闢以來 一姓相傳 到今不易.
개벽부터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 여태 아니 바꾸다.
월봉해상록』, 정희득(鄭希得), 출처
日本天皇 始立 於周平王之世 一姓相傳 至今不絶.
일본 천황 주평왕의 치세에서 처음 세워져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 여태 아니 끊기다.
지봉유설』, 이수광 출처
倭人 雖 曰 島蠻 立國 幾三千餘載 一姓相傳 則 其規模 蓋可知也.
왜인은 비록 섬오랑캐라 말하지만 나라를 세운지 거의 삼천년이고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지니 곧 그 규모를 아마도 알 만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李圭景) 출처
起自周幽王 十一年 至今 皇一百十二世 一姓相承
주유왕 즉위 십일년부터[8] 일어나 금상까지 일백십이세가 하나의 성이 서로 이었다.
『부상록(扶桑錄)』, 「부상일록(扶桑日錄)」, 9월 12일( 계사) 남용익 출처
休誇一姓傳無缺 自是他人不食餘
하나의 성이 전해짐이 아니 이지러졌다고 자랑하지 말지어라. 남은 네 먹던 나머지도 아니 먹으리.[9]
Ibid. 9월 15일( 병신)

보다시피 만세일계란 말을 안 썼지 일본이 유사이래 하나의 왕조가 이어졌다는 생각은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만세일계란 뜻으로 일성상전(一姓相傳)·일성상승(一姓相承)·일성전무결(一姓傳無缺)이라고 썼다. 가장 많이 쓰인 건 일성상전으로 이것이 만세일계보다 더욱 뿌리가 깊은 말이다.

2.2. 일본 제국

저들은 혈족끼리 혼인한 우두머리를 두고[10] 스스로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말하며 자랑하고 있거니와
『소앙집(素昻集)』, 조용은 출처
만세일계(萬世一系), 현인신이라는 황당한 그 피막을 찢고 나오지 않는 이상 그 땅에는 진실이 존재할 수 없고 지식인은 말라버린 샘터와도 같은 심장을 안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토지 Vol. 14』, 박경리, 312p, 열 여섯 째 줄 #

이렇게 전근대에 존재했던 관념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하고 근대적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크게 중시되어 현대의 만세일계 관념으로 변모하였다. 일본 제국 대일본제국 헌법의 제1조에서 만세일계라는 용어를 기술하여 법적으로 강조하였다.

일본 제국은 만세일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불경한 비국민으로 몰아 철저하게 탄압했다. 천황의 신성성과 절대성, 만세일계는 국체(國體)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 공화제 사회주의 혁명을 부정하는 근거로 널리 쓰였다.

2.3. 현대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 일본국 헌법으로 개정되는 과정에서 천황의 신성성과 만세일계에 대한 법적 규정은 전부 삭제되었다. 현대 일본 정부는 천황의 신성성이나 만세일계에 대해 아무런 공식 견해를 나타내지 않는다.

현대 일본의 주류 역사학자들은 만세일계가 사실이었을 가능성을 낮게 보며, 천황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으로 해석한다. 현재 학계의 주된 논쟁은 만세일계가 사실성 여부보다 천황의 가계가 언제 단절되고 언제 다른 가문으로 교체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1954년에 역사학자인 미즈노 유는 일본 황실이 2번 교체[11]되었으리라고 추정하여 제3왕조설을 주장했고 1967년에는 에가미 나미오가 기마민족국가에서 일본 황실의 조상이 대륙( 만주)으로부터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도래하여 야마토를 세웠다는 기마민족 정복왕조설(기마민족설)을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케이타이 천황 이전까지는 야마토에 왕권은 있어도 왕조는 없었다는 설이 대두되었으며, 아예 다이카 개신 전까지는 케이타이 천황 직계[12] 소가[13]가 서로 번갈아가면서 대왕 자리를 이어졌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물론 정황상의 근거만 존재할 뿐, 명확한 사료가 부재한 가설이기에 만세일계가 무조건적으로 틀렸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지만 그럼에도 주류학계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오늘날 만세일계의 역사적 신빙성은 회의적으로 평가되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 만세일계 관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령 쇼와 천황
日本の 皇室は 昔から 國民の 信賴に よって 萬世一系を 保って いたのであります.
일본의 황실은 예로부터 국민의 신뢰에 의해 만세일계를 유지해왔습니다.
- 1977년(쇼와 52년) 기자회견에서

라고 언급했다. 만세일계의 사실 여부를 떠나 송태종의 칙어에서도 볼 수 있듯 그러한 관념 자체는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기 때문에 뿌리 뽑기 어렵고 어쨌든 왕조가 오래된 건 사실이라서 이것만으로도 권위가 크다. 한나라가 향력(享歷)이 406년(또는 449년)이라 일본왕조보다 훨씬 짧고 14년 공백기가 있건만 위무제 선양을 빙자한 찬탈을 못 하고 위문제가 할 수 있도록 바탕을 닦기만 했을 뿐인데 향력이 천년을 가뿐히 넘는 일본왕조는 실권이 어떻든 무너뜨리기 어려운 권위가 얼마나 클까.

한국에선 천황이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상징적인 꼭두각시 또는 허울뿐인 상징적 존재)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도 대부분 기간 동안 그랬던 건 사실이지만 고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천황의 권력과 권위가 드높았는데, 이 시절의 일본은 같은 시기 신라 발해처럼 임금이 실권이 있고 율령제가 작동하는 고대국가였다. 그러다 후지와라 씨가 섭관 정치로 권력을 잡으면서 슬슬 천황가의 권위는 강해지되 권력은 약해졌다. 그리고 실권은 후지와라에서 쇼군에게 넘어가고, 천황가는 고다이고 천황 치세 때 잠깐 저항했다가 패배했다. 이런 이중적인 정치가 장기화되고 천황이 점차 허수아비로 남게 되자, 오히려 천황가가 그 긴 시간동안 이어질 수 있었다. 실권이 없지만 권위가 높으니 교체할 필요도, 교체할 수도 없었다. 전근대 일본에서 천황가에 대해 '신벌(神罰)을 내릴 수 있는 두려운 귀신 비스무리한 무언가'로 취급하는 풍조도 있었다. 몇몇은 아예 현대까지 그 믿음이 내려오는데, 대표적으로 스토쿠 천황이 있다.

일본회의, 신사본청 등의 일본 기성 극우파나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 5ch를 위시한 넷 우익 계열 신 극우파 등은 지금도 만세일계를 공인된 역사적 사실로 인식한다.

혈통적인 의미는 아니더라도 일본에서 천황제는 3천 년 동안 계승되어 온 일본의 상징이라는 전통적인 의미가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보다 더욱 강하다. 일본회의 등이 황위의 남계상속에 굳이 집착하는 것도 황실의 규율(전통)을 바꿀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보통 서양의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군주의 가문이 바뀌어도 합법적이기만 하면 그러려니 했고, 남녀평등의 대두로 인해서 왕위계승법을 수정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 입장에서 일본의 천황제는 계승법을 수정하면 더 이상 2천 년간 계승된 그 '천황'이 아니게 된다.[14]

3. 유사 사례 비교

4. 둘러보기

일본 보수주의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주요 이념 내셔널리즘 · 보수주의
연관 이념 가부장적 보수주의( 새로운 자본주의)자민당 · 국가주의 · 국민보수주의 · 반동주의일부 · 불교 민주주의공명당 · 사회보수주의 · 온건 보수주의일부 · 자유지상주의유신회 · 초보수주의일부
과거 이념 민족주의( 야마토 민족주의)* · 자유보수주의 · 쇼와 국가주의( 대동아공영권 · 팔굉일우)
연관 개념 국가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 · 군주주의 · 아시아적 가치 · 울트라내셔널리즘( 우익사관)일부
주요 정당 전전 일본 국민동맹 · 대정익찬회 · 동방회 · 입헌정우회
전후 일본 일본의 마음 · 일본민주당(1947년) · 일본 유신회(2012년) · 일본민주당(1954년) · 자유당(1950년)
현존하는 정당 공명당 · 일본보수당 · 일본 유신회 · 일본제일당 · 자유민주당( 지지 기반 · 파벌) · 참정당
정치인 고노에 후미마로 · 고이케 유리코 · 기시 노부스케 · 기시다 후미오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도조 유코 · 도조 히데키 · 스가 요시히데 · 스기타 미오 · 아베 신조 · 요시다 시게루 · 이나다 도모미 · 하토야마 이치로 · 히라누마 기이치로
인텔리 고 젠카 · 나카가와 쇼이치 · 미노베 다쓰키치 · 미시마 유키오 · 오카와 슈메이 · 햐쿠타 나오키
언론 니혼게이자이 신문 · 사쿠라 TV · 산케이 신문 · 요미우리 신문
단체 과거 겐요샤 · 다테노카이
현재 덴츠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 일본경제단체연합회 · 일본회의 ·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
그 외 55년 체제 · 국민 · 국체 · 넷 우익 · 만세일계 · 반미보수 · 보수본류 보수방류 · 신토( 신사본청 · 국가신토) · 아베노믹스 · 야마토 나데시코 · 역코스 · 우익단체 · 대일본제국 · 일본의 보수정당 · 우경화 · 일본인론 · 재무장 · 폴크(Volk) 민족(民族)( 민족파)
* 21세기 현대 기준 일본에서 Ethnic nationalism이 아닌 단순 Nationalism을 지칭할 때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라는 용어보다는 '내셔널리즘'(ナショナリズム)이라는 용어가 선호된다. 일본에서 '민족주의'는 전적으로 Ethnic nationalism을 의미하는데, 이는 과거 천황제 파시즘과 결합해 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웠던 극우 민족주의를 연상시키는 데다가, (야마토 민족이 아닌) 류큐인이나 아이누인같은 전통적 일본 내 소수민족까지 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주류 보수우익에서 거리를 두는 편이다.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분파
}}}}}}}}}


[1] 다만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사실이다. [2] 한편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다보니 이에 대해서 들은 송태종은 이를 듣고 저들은 섬오랑캐에 불과하지만 옛날의 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3] 일본 황실은 성이 없으나 성은 부계로만 이어지는 게 국룰이므로 성이 셋인 게 애비셋이란 뜻으로 쓰이듯 부계혈통의 대유로 보면 된다. [4] 983년의 일인데 이때 재상은 평장사고 조보(趙普)에서 송기(宋琪)로 경질되었다. [5] 송나라도 야마토 왕조처럼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송태종과 달리 일본이 왕조가 아니 바뀌었으니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자랑이 묻어나지만 역사관은 같다. [6] 여기서도 성씨=부계혈통이다. [7] 쇼군 권신이 되어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굳이 찬탈할 흥미를 못 느끼게 해서 왕조가 유지되었다는 거다. [8] 이때는 기원전 771년인데 일본서기에서 진무 덴노가 창업한 해는 역산하면 기원전 660년이다. [9] 고나라 덴노 문서를 읽으면 알겠지만 처지가 꽤 궁했다. [10] 이때쯤이면 천황 종친 족내혼을 한다고 해도 촌수가 매우 멀기에 동성동본 금혼이 폐지된 현재로서는 천황이 촌수가 먼 황족과 혼인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조용은은 성균관 유생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11] 스진 천황 ~ 진구 황후(제1왕조), 오진 천황 ~ 부레츠 천황(제2왕조), 케이타이 천황 ~ 현재(제3왕조). [12] 제2왕조의 여계 후손. [13] 도래인 계통으로 제1왕조의 여계 후손. [14] 1867년, 메이지 천황 즉위 이후 구 황실전범에서조차 "황위는 직계 황실 남성 중 장자가 이어받는다."고 대문짝만하게 명문화했기 때문에 추후 남은 남성 중에 히사히토만 있는 상황에서 양자라는 제도를 이어서라도 직계를 이을 것이 자명한 수순이다. [15] 혈통 자체는 8세기 말~ 9세기 초에 카롤루스 대제를 보좌했던 에스바이 백작 로베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카페 왕조라는 명칭은 987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위그 카페에서 유래했다. [16]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축출된 루이필리프 1세가 카페 왕조 혈통의 마지막 프랑스 군주다. [17]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등은 어디까지나 영지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는 것일 뿐, 부계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위그 카페라는 하나의 조상이 나오는데, 실제로 루이 16세 단두대에서 처형될 때 불린 이름은 '루이 드 부르봉'이 아니라 '루이 카페'였다. [18] 다만,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의 장녀인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가 즉위한다면 그녀의 다음 대부터는 부계혈통상 카페 왕조가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만약 레오노르가 이사벨 2세처럼 카페 왕조 부계 남성과 결혼한다면 부계혈통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현재 유럽 왕족들은 다른 왕족이나 귀족들보다는 평민과 결혼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다. [19] 사보이아 백국 - 사보이아 공국 - 사르데냐 왕국 - 이탈리아 왕국 순서로 계승되었기에, 백작가에서 공작가를 거쳐 왕가로까지 신분이 상승한 가문이기도 하다. [20] 그 기간 동안 에티오피아에는 구디트 여왕, 자그위 왕조 등이 있었다. [21] 여담이지만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라마 5세도 오히려 수코타이 왕조부터 700년 내내 단일왕통으로 이어왔다는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수코타이 왕조와 짜끄리 왕조 사이에는 아유타야 왕조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아유타야가 멸망한 뒤 잠시 톤부리 왕조가 들어섰다가 이를 무너뜨린게 짜끄리 왕조인지라 그런 윤색이 먹히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22] 다만 가문 내에서 독일 황제 프로이센 군주를 배출한 분가는 일개 성주 가문이었다가 14세기 말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차지했기에 왕조로서의 역사는 조선왕조보다도 짧고, 루마니아 왕위를 차지한 분가는 왕조로서의 역사가 수십년에 불과하다. 반면 진짜 부르크하르트 시대부터 단절 없이 이어진 호엔촐레른 본가는 19세기에 이미 영지를 상실했다. [23] 독일 11월 혁명, 루마니아 공산화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852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852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