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3:38

문벌귀족(중국)

1. 개요2. 형성3. 쇠락4. 주요 문벌귀족
4.1. 군성(郡姓)4.2. 노성(虜姓)4.3. 교성(僑姓)4.4. 오성(吳姓)4.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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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門閥貴族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이후 형성된 중국의 지배 계층.

이들은 이전부터 지방과 중앙에서 세력을 갖춘 호족들이 구품관인법으로 관직을 세습하면서 형성되었다. 위진 이래 문벌귀족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들은 상류층으로 여겨졌으며 경제적으로도 최대의 지주였고, 정치적으로는 최고위급의 관료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장 큰 지주라고 해서 모든 문벌귀족이 대지주라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어떤 문벌 귀족은 심지어 가난하기 까지 했다. 그렇지만 대체로 문벌귀족 집단을 보면 대지주 집단이었다. 그들은 부곡과 소작인을 생산에 사용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컨대 당시 부곡을 소유하고 소작인이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문벌귀족들이었고, 제도에 따라 그들은 부곡과 소작인을 점유할 권리가 있었다.

2. 형성

2.1. 후한 시대

이들의 형성은 후한(동한)시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당시에는 대대로 고관(大官)이었던 가문이 많았으며, 그들은 곧 호족으로 지방에서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후한 시대에는 토지겸병이 매우 성행하였고, 지방 호족 내에 특히 강력한 대지주가 출현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이른바 '명사(名士)'가 또 등장했다. 동한 각급 지방관리들은 중앙에서 파견되나 주, 군, 현의 속관은 통례에 따라 지방장관이 현지인을 임명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의 소위 대성호족의 자제들이었다. 후한말 군벌 공손찬이 유주자사를 할 때 호족 자제들을 쓰지 않자 이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었는데, 그는 "내가 호족의 자제들을 임명하면 그들은 당연한 줄 알고 고마워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이 일을 보면 동한 말기에 호족 자제들은 지방에서 천거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공손찬이 이런 관례를 일부러 어긴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지방정권은 보통 현지의 대성호족들이 장악했고, 조정은 자사나 태수를 임명했을 뿐, 이들 관리들은 현지의 대성호족에 의존해 백성들을 통치했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문벌귀족의 시초가 되는 대지주를 통한 대성호족, 세족들의 흥성은 동한 때 이미 모습을 보였으며 이 기초 위에서 비로소 위진남북조시대의 문벌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시기에 문벌제도가 확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대대로 벼슬을 하는 집안이 등장했지만, 그들의 지위는 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양한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도 그랬고, 동한 말기에도 지위가 낮았던 이른바 한문(寒門)은 높은 자리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사실 위진시대 일류 문벌 중에선 적어도 일부는 동한 시대의 대성호족이 아니라 동한 말기의 한문이었다. 위진의 일류 명문 중 일부는 한문 출신이다보니 동한에서 삼국시대, 나아가 서진대까지는 문벌제도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당대 한문은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고, 지방의 대성호족들도 정치적 지위가 이후의 문벌귀족들에 비하면 떨어졌다.[1]

또한 양한 시대에는 모든 관리들이 부역을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다는 점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관리의 동족이나 심지어 직계 자손까지 역조를 면제 받을 수 있는지, 면제의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는 문벌제가 확립된 이후와 크게 달랐다. 전한 때는 승상의 아들까지 역조를 면제받지 못했다. 동한 초년에 사공이자 승상인 왕량은 2천석급의 큰 벼슬이었는데, 죽을 때 광무제가 직접 병을 물었고, 왕량이 죽은 후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왕량의 아들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큰 벼슬을 한 공신이 죽은 뒤에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아들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으니, 당시 일반 관리의 자손은 면역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관리들의 자손들이 모두 성실하게 복무를 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실제로 자기 세력을 믿고 무조건 부역을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법적 보장도 없었다. 요컨대 동한에서 삼국시대까지 문벌은 정치적으로 관직을 독점할 수 없었고, 그들의 자손은 물론 종족까지도 부역을 면제받지 못했으며, 그 땅은 자주 이전되었다. 따라서 동한시대에는 대성호족들이 분명 존재하였으나 문벌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2.2. 위진남북조시대, 수당시대

2.2.1. 조위, 서진

이후 위진남북조시대 문벌의 형성과 확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구품관인법의 확립이다. 구품관인법, 혹은 구품중정제는 문벌 귀족이 정치적으로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했다. 이후 서진에서 점전제가 확립되면서 각급 관리들이 품급에 맞게 토지를 점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북위 균전제는 지방관이 공전(公田)에 분배하여 녹봉으로 삼게 했고 이를 나중에는 직분전(職分田)으로 발전시켰다. 즉, 대대로 벼슬을 하면 대대로 많은 땅을 차지한다는 보장이 있고, 사족들은 자기 땅이 없어도 그에 따라 땅을 차지하거나 지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서진정부도 바보는 아니라 서진에서 시행한 점전제는 각급 관료들의 점전 할당량 수준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점유한 토지는 종종 정량을 초과하곤 했다.

둘째는 삼국시대에 이르러 각국 통치자들이 체제의 안정을 위해 대부분 지주 호족 출신인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의 의부민 점유를 인정하기 시작했던 점에서 비롯된다. 이들 세가대족은 광활한 농지를 점유한 대지주였으며, 자신의 재산보호나 정치 사회적 권위 확보를 위해 일정 정도의 사적무력을 보유한 세력이었다. 삼국 통치자들은 그 세력 확장을 위해 이들의 지지가 불가피했으며, 그들의 지지에 대한 대가가 바로 세가대족들에게 그들의 장원 경작을 위해 필요한 일정 정도의 의부민을 점유하도록 승인하는 방법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세가대족의 발전 및 문벌 통치제도의 확립 결과 서진은 진무제 태강(太康) 원년(280년)에 음객(蔭客)에 대한 법령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규정은 법령이라는 형식을 빌려 관품 고하를 기준으로 관료들에게 부역(賦役)이 면제되는 일정 수의 의부민을 점유할 수 있도록 승인하는, 즉 의부민 점유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현(先賢) 이후 선비(士人)의 자손이 국가의 관리처럼 소작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자신이 벼슬을 하면 소작인을 비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선현 선비(先賢)와 선비(士人)로 여겨지면 음객, 전객을 비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벼슬을 하면 면역 특권을 누리는 것은 진한 이래의 관례로 위진 때의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법적으로는 명문화되지 않았고, 특히 자신이 벼슬을 하지 않아도 선비, 선현이라면 그 혈통에 따라 휘하 소작민을 숨길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규정은 위진남북조 때의 특징이다. 관리가 많을수록 음객의 수가 많아진다. 소작인인 객은 독립된 호적이 없으면 부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데, 이는 주인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주인에게 봉건적인 의무를 지며, 주인에게 지세를 납부하고, 다른 부역을 부담하고, 주인의 명령을 따르며, 싸울 때는 주인의 가병이 되어 언제든지 주인의 노역을 받아야 했다.

물론 서진의 법령에 규정된 관리의 음객의 숫자는 크지 않았고, 최고급 관등의 음객조차도 50호 수준이었다. 그러나 서진 치세의 법령이 잘 지켜지지는 않아 실제로는 당시 대지주, 귀족 관료들이 그 이상의 객을 차지했으며, 태원 지역에서는 소작인으로 흉노 사람들을 삼는것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이는 숫자 천을 십으로 오기한 실수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흉노 소작인이 수십 명이고 한족까지 합친다고 해도 법령에 정해진 50가구의 제한을 넘는 경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음족 음객제는 음족이 많으면 9족으로, 고조부터 현손 9대까지 부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매우 넓은 범위였다. 객은 주인의 비호를 받아 주인에게 지세를 납부하고 국가에 의무를 지지 않고 기타 봉건적 의무를 부담할 수 있었다.

이는 삼국시대 초기에는 법적 근거가 없었으며, 조조 때에는 한 대족이 객을 숨겨놓고 군복무를 하지 않자 지방관은 그를 찾아다가 군대에 보내도록 했다. 따라서 삼국시대 초기 음객은 법적 근거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후 손오 조위는 둔전객은 물론 일반인까지 문무 관료에게 하사하여 그들을 사속으로 인정하고 국가에 의무를 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그것은 특별한 은전이었다. 이후 서진에서 음객제를 반포한 이후 각급 관료와 선비들이 인구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다만 서진때까지만 해도 한문과 사족의 통혼이 있었고 한문이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것의 예시가 보이기 때문에 계급간의 구분은 이 시대만 하더라도 크지 않았다. 실제로 위진시대에는 사족과 한문의 통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이들의 혼인에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일례로 당시 태원군 사람인 왕제는 진무제의 매제였는데, 그는 한 병사(兵家)가 뛰어난 것을 보고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왕제의 어머니가 그를 직접 보려고 하자, 왕제는 이 병가를 데리고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머니는 훔쳐보았다. 그 병사가 떠난 후 왕제는 어머니의 의견이 어떠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아깝게도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때까지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아 기다릴 수 없다는 뜻을 보였고, 딸을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이 일은 위진 때 문벌제도가 이미 확립되었지만, 한문은 여전히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고, 낮은 신분의 병사들도 사족 대열에 오를 기회가 있었으나 단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당시 사족과 한문 사이에 혼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2.2.2. 남북조시대, 수당시대

문벌귀족이 가장 세가 강했던 시기는 위진남북조시대 말인 남북조시대 부터 수당시대이다. 남북조시대에는 구품관인법 시행 이후 이른바 '상품에는 한문이 없고, 하품에는 사족이 없다(上品無寒門下品無士族)'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점점 문벌의 정치적 특권을 보장했다. 왜냐하면 이 시기 구품중정제에서 중정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고위 문벌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품을 자신의 등급으로 통제하고, 한문을 배척하여 고품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청관과 탁관의 구분이 있었는데, 한문은 9품 중 2품 이하의 등급으로 탁관으로만 평가될 수 있었고, 사족만이 상품 즉 2품으로 평가되어 청관의 자격이 있었다. 청관 출신만이 점차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고, 문벌 귀족만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계급간의 구분 역시 위진 때는 그다지 없었으나 이후 서진이 멸망하고 남북조 때는 엄격해졌다. 남북조시대만 하더라도 사족은 사족과만 통혼하고, 한문은 한문과만 통혼하며, 이들간에는 통혼하지 않았는데 이 점은 남북조 때 특히 엄격했다.

이들은 이 시기에 이르러 사실상 중국 중세 역사의 대표 집단들로 성장했다. 구품관인법 청담사상까지 곁들어진 조합을 지닌 문벌귀족들은 위진남북조, 수당 내내 중국의 통치계급으로 군림했다.[2] 이 시기 문벌귀족들과 다른 기득권 집단과의 차이는 왕조는 망해도 세력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벌귀족 중에서 역사가 오래된 집안은 한나라부터 고위관료직에 오른 기록이 있을 수준이었다.[3] 과거제가 시행된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도 과거제가 하급관리만 뽑던 상황에 구품관인법이 완전히 임자제로 퇴보함에 따라 위세가 계속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서 자신들의 최전성기가 지나가 버린 당나라 시기조차도 황제도 벼락출세한 한미한 가문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문벌귀족의 격을 따지는 씨족지를 편성할 때마다 항상 당 황제들은 아니 왜 황실이 최고 등급 가문이 아닌 건데? 하고 따지고 들면서 억지를 부려야만 최고 가문 자리로 끼워넣어 줄 정도였다.

다만 이렇다 보니 위진남북조시대와 수당시대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위진남북조 시대를 막장으로 이끈 것이 구품관인법, 청담사상, 오석산 그리고 문벌귀족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는 이렇다. 구품관인법은 끼리끼리 인사로 돌아가기 쉬웠고 그리고 여기서 유리한건 가문의 세가 큰 집안 즉 문벌귀족이었기에 구품관인법은 문벌귀족에게 유리한 제도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품관인법으로 고위직을 차지한 문벌귀족들은 높은 품계에 있는 자신들을 특별하게 여기며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하는데 이것이 청담사상이다. 그리고 이 청담사상에서 빠질 수 없는게 오석산이다. 그런데 오석산은 마약이고 청담사상은 학문연구를 가장한 잡담이나 다름없어서 최고위 지배층이 일은 안 하고(애초에 일하는걸 천하게 여겼다.) 마약빨며 잡담이나 하고 앉아있는데다 구품관인법으로 인해 능력은 있으나 가문의 힘이 약한 한문 출신들은 출세의 희망이 없으니 부패의 길에 빠져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막장이 되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윗대가리들이 부패하지 않았던건 아니다. 부패한 것은 둘 다 똑같았다.

이 문제는 양나라 시기에 가장 극심했는데 본디 양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다 북제로 건너간 안지추라는 이는 이 시기의 남조 문벌귀족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4] 그 내용이 매우 심각하다.
양나라 전성기에는 사족 자제들은 모두 널찍한 옷을 입고 높은 모자를 썼다. 그리고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옷에는 향을 뿌렸으며 얼굴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후에 분과 연지를 발랐다. 집을 나설 때는 차양이 긴 수레를 탔으며 집에서는 비단방석에 앉았고 양옆에는 골동품을 진열해놓은 다음 공리공론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겉보기에는 신선과 같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시험을 보게 되면 대신 시험볼 사람을 찾아 시험을 치르게 하고, 조정의 연회가 있으면 미리 사람을 시켜 좋은 시구를 짓게 한 후 그걸 외우기만 해서 현장에서는 앵무새처럼 그대로 말하기만 했다. 그리고 관직에 나가서는 실무가 없는 청관만 하려 했다.

밭을 갈고 풀을 뽑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수확을 하는지도 몰랐다. 피부는 연약하고 뼈는 약해 잘 걷지도 못 하고 몸이 약한 데다 기운도 없어서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지 못 했다.[5]

한 마디로 나라의 가장 높으신들끼리 멋부림과 쓸데없는 공리공론만 일삼고 출사할 때는 부정행위, 출사해서는 능력이 없으니 실무를 기피하고 제스스로 시를 짓는 능력이 없으며 현실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서 심지어 파종과 수확의 시기조차 모르는 지경에 여기다가 오석산 때문에 사람 꼴도 말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리고 문벌귀족이라고 위진남북조 시기 내내 전성기를 누린건 아니라서 팔왕의 난 시기에는 자신들보다 아래에서 유리천장에 갇혀있던 중소귀족들은 이 시기에 황위를 탐내는 황족들에게 붙었고 때문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황족들이 정권을 차지할 때마다 문벌귀족에 대한 울분을 풀었다. 또한 양나라 말기 남조를 뒤흔든 후경의 난 시기에도 남조의 문벌귀족들이 많이 갈려나갔다.

3. 쇠락

그러나 당 말기 오대십국의 혼란으로 중앙 귀족들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날아가 버렸고 특히 주전충이 당나라 고관들과 문벌귀족들을 싸그리 강에 쳐박으면서 문벌귀족 그 자체는 이 시점에서 끝장나 버려 일단은 쇠퇴하게 된다. 하지만 과거제도에 적응한 집안은 옛 권리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송 시대 심지어는 명나라 시대까지도 관료가문으로 살아남아 통치층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런 집안들은 관료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주류를 형성하였다. 북송 사마광 서진의 황족이었던 하내 사마씨이고, 명나라 때의 왕양명은 낭야 왕씨이다. 물론 이 때쯤 되면 어디까지나 가문 개별적으로 살아남은 것이지 문벌귀족으로서 살아남은 건 아니다. 즉, 이들은 송나라 때까지 거슬러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사대부 가문이지 송나라 대의 문벌귀족인 건 아닌 것이다.[6]

4. 주요 문벌귀족

위진남북조시대가 매우 혼란스러워서 가격(家格)이 일정하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연고지가 바뀌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까지 모든 귀족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고 아래와 같다.

4.1. 군성(郡姓)

영가의 난이 일어나고도 강북에 남아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귀족이다. 군성이라 부르는 까닭은 자기가 사는 군에서 확실하게 살기 때문이다. 북위부터 강북 귀족의 핵심이다. 산동귀족이나 하북귀족이 이들이다. 가장 순수한 한족 문화 전통을 대표한다고 자처하였다. 북위에서 귀족의 가격을 정하면서 6등급을 매겼는데 3대 이상 삼공을 지냈으면 고량(膏梁), 상서령이나 상서복야를 지냈으면 화유(華腴), 상서나 영군이나 호군 이상의 벼슬을 한 집안을 갑성(甲姓), 구경이나 방백을 지냈으면 을성(乙姓), 산기상시나 태중대부를 맡았으면 병성(丙姓), 이부낭관을 맡았으면 정성(丁姓)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450년, 최호의 국사 필화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근본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귀족들이었으므로, 이민족 귀족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최호의 예에서처럼 정계에서 축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격이 높은 집안은 당나라를 기준으로 농서이씨(隴西李氏) 돈황선공파(敦煌宣公派)[7], 태원왕씨(太原王氏) 장사백파(長社伯派)[8], 형양정씨(滎陽鄭氏) 첨사공파(詹事公派)[9], 범양노씨(范陽盧氏) 고안혜후파(固安惠侯派)[10]·별가공파(別駕公派)[11]·사군파(使君派)[12], 청하최씨(淸河崔氏) 부군파(府君派)[13]·탁지랑공파(度支郞公派)[14], 박릉최씨(博陵崔氏) 합하파(閤下派)[15], 조군이씨(趙郡李氏) 시어사공파(侍御史公派)[16]이며 이들은 칠성십가(七姓十家)라 하여 조정에서 지정한 최고 귀족이다. 이씨, 최씨, 노씨, 범씨, 왕씨 5개 성과 농서, 조군, 청하, 박릉, 범양, 형양, 태원 7개의 본관을 오성칠망(五姓七望)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만 결혼했고 외부 귀족가문과 결혼할 때는 막대한 '빙재(聘財)' 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명망은 최고 수준이고 배타성도 높아서 당나라 황실도 이들보다 격이 낮은 벼락 출세자 가문으로 여겼다.[17] 이들은 5대 10국 시절까지도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았으나, 후손들의 유학 실력이 형편없음이 드러나면서 그 후광도 빛이 바랐고, 과거제가 확대 실시되면서 서서히 묻혀갔다. 하지만 위에서 기술했듯이 이들 중에서 물려받은 가산을 후손들의 교육에 투자해서 과거제도에 적응한 집안들은 관료 가문으로서 생존해서 명문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4.2. 노성(虜姓)

낙양이 있는 하남군에 본관을 두었다. 위의 군성과 달리 4등급이 매겨졌는데 북위의 건국 공신 문중인 팔씨(八氏)[18]가 1등급, 북위 황실과 뿌리가 같은 십주(十胄)[19][20]가 2등급, 세력과 존비를 따져서 3등급에 36족, 4등급에 92성을 매겼다. 이주영이 하음의 변을 일으켜 이들을 살육했지만 여기서 살아남은 귀족과 무천진 군벌이 연합하여 산서귀족, 즉 관롱집단을 이루었다. 우문태에 의한 서위 건국부터 대두되었다. 특히 우문태와 동향 가문인 무천진 출신 가문들이 8주국 12대장군을 독점하면서 관롱귀족의 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서위, 북주, 수, 당의 정치적 중추 세력이었고, 특히 군권을 장악하여 무력과 정치력을 한데 아울렀지만 측천무후의 등장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배타성도 낮은 편이여서 한족 국가가 아닌 국가의 왕족, 귀족과도 통혼하고 혼혈하여 문화를 받아들이는 호한융합적 성격을 띄었다. 황실, 당 황실도 이쪽에 속한다. 수나라는 홍농양씨를, 당나라는 농서이씨를 자칭하였지만 진인각(陳寅恪)이 거짓임을 밝혔다.

위의 군성 6등급과 노성 4등급은 류방(柳芳)의 성계론(姓系論)이 1차 출처이고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이 2차출처이고 유수원의 우서 제9권 이형상의 원파기 병서가 3차출처이다. 칠성십가의 출처, 훈신팔성의 출처, 제실십성의 출처는 하남원씨 빼고 위키문고 참고

4.3. 교성(僑姓)

강남 지역의 귀족으로 오호십육국시대에 남쪽으로 내려간 피란민에서 시작된 집단. 교성이란 이름도 원래 살던 군에서 떠난 귀족이라서 붙은 거다. 그만큼 배타성은 가장 강했다. 원래는 산동사성집단이 강남귀족안에 있었으며, 남조의 실권을 움켜쥐고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했으나, 양나라 말기의 후경의 난을 겪고, 통일이 수나라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대타격을 연이어 받은 탓에 정치군사적 힘은 약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개발된 강남의 부를 독점하였기에 가장 부유한 귀족 집단이였다.

대표적인 교성 귀족 가문으로는 낭야 왕씨(琅琊王氏), 진군 사씨(陳郡謝氏)[21], 진군 원씨(陳郡袁氏), 난릉 소씨(蘭陵蕭氏) 등이 있다.

4.4. 오성(吳姓)

강남의 토착 귀족이지만 동진이 세워지면서 강남에 유입된 교성에게 밀렸다. 다만 이들도 강남의 부를 독점하여서 부유하기는 하였다. 이들의 기원은 오의 사성 참고.

4.5. 기타

태산 양씨 참고.

위 항목에 언급된 가문 외에도 삼국지 팬들에게는 조위 사마진 황위를 배출한 패국 조씨, 하내 사마씨가 유명하고, 원소 원술의 집안인 여남 원씨(汝南袁氏)[22], 제갈량 3형제의 낭야 제갈씨(琅邪諸葛氏), 양표, 양수 부자의 홍농 양씨(弘農楊氏), 순욱 순유를 배출한 영천 순씨(潁川荀氏) ,진식.진군.진태를 배출한 영천진씨등도 익숙할 것이다. 단, 이들 가문은 대체로 문벌귀족의 형성기인 후한~위진대에 전성기를 누린 가문들로 문벌귀족의 전성기라 할 남북조시대에는 그 위세가 위에 언급된 대가문들만은 못했다.[23] 단, 홍농 양씨 한정으로 이 모든 문벌귀족들 중 후대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양귀비.

[1] 양한(전한, 후한)시대에는 지방에 중앙에서 황제의 신임을 받은 권신이나 환관들의 권력이 엄청나게 강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후한의 경우 잘쳐줘도 광무제 이후 3~4대, 심하게는 광무제, 명제 단 2명을 제외하고 황제라고 할만한 이가 없었고 당연히 후한의 황제들의 무능으로 전한의 경제 등이 보여주었던 3~4대 지배자의 공신 숙청이 없었기에 강력해지는 호족+사대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환관+외척의 발호가 필연적이었다. 즉, 후한 시기는 후일 문벌화 이전 환관과 경쟁하던 시기였기에 문벌귀족들만큼의 지위는 없었다. [2] 고려시대의 문벌귀족과 비교한다면 이쪽은 과거제가 있어서 문벌귀족에게 혈연이 있다면 과거 급제자들에게는 학연이 있어 인맥이 인맥을 견제하는 기묘한 기류가 흘렀는데다가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음서+과거를 베스트로 쳐서 이들은 벼슬을 시작하는건 음서로 할지언정 거기서 더 출세하려면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는데 제일 빨랐다. 더군다나 중국의 문벌귀족이 몇백 년 간 지속된 것과는 달리 이들은 무신정변으로 갈려나갔다. [3] 이들 중 가장 뼈대있는 가문 중 하나가 한(韓)씨인데 이름에서 볼 수 있듯 한씨는 전국칠웅 중 한나라의 왕족 출신이다. 처음 한씨를 쓴 사람이 곡옥환숙의 아들인 한만으로 곡옥환숙이 기원전 8세기 사람이니 한나라가 들어섰을때에도 이미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었던 셈이다. [4] <안씨가훈>이라는 책이다. [5]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마약의 일종인 오석산의 영향이 크다. 오석산은 주로 황화수은 결정인 주사와 함께 가루로 섭취하는데, 수은의 부작용으로 피부가 창백해지고 신경 조직에 피해를 입게 되어 결국 다리를 절게 되며, 오석삭 속 비소의 영향으로 여러모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에는 최적화되어있었다. 문제는 이 극약을 먹으면서 담론하는게 청담사상의 로망이었다는 것이다. [6] 상술한 대로 당 시절의 문벌귀족들은 당나라 국성인 이씨 가문조차도 문벌귀족들 중에서는 최고위 가문이 아니라고 비웃었고 당고조 이연은 온갖 핑계로 이 최고위 가문에 이씨 가문을 끼워넣으려 했다. 하지만 당나라가 망하고 문벌귀족도 세를 잃은 후에는 당연히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송나라대가 되면 호족도 문벌귀족도 아닌 사대부가 대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7] 파조(派祖)는 보(寶)다. [8] 파조는 경(瓊)이다. [9] 파조는 온(溫)이다. [10] 파조는 도세(度世)다. [11] 파조는 보(輔)다. [12] 파조는 부(溥)다. 사군은 자사 및 사절에게 쓰는 경칭. 노부는 유주자사를 지냈다. [13] 파조는 종백(宗伯)이다. 부군은 태수에게 쓰는 경칭. 최종백은 청하태수로 추증되었다. [14] 파조는 원손(元孫)이다. [15] 파조는 의(懿)다. 합하는 삼공에게 쓰는 경칭. 최의는 태위를 지냈다. [16] 파조는 해(楷)다. [17] 당나라 황실은 스스로 농서이씨라 일컬었는데도 보다시피 농서이씨가 다른 귀족의 위에 서기는커녕 오히려 씨족지에서 농서이씨는 세 번째로 나오기까지 하였다. 농서이씨 자체가 다른 가문에 비해 연원이 좀(?) 짧기도 하다. 다른 가문들은 못해도 춘추전국시대까지 기원이 추적가능한데 비해 농서이씨는 후한 말에 와서야 등장한 가문이기 때문. 예를 들면 조군이씨는 조나라 명장 이목의 후예이며, 형양 정씨는 정나라 백작의 후예이고(고대식으로 표현하자면 희성정씨(姬姓鄭氏)쯤 될 것이다), 청하 최씨와 박릉 최씨는 제나라 공족 최씨의 후예 뭐 이런 식이다. 물론 농서이씨는 서한의 명장 이광의 후손을 자처했지만 이미 당대에 별로 신빙성 없는 얘기라고 의심받았을 정도. [18] 훈신팔성(勳臣八姓)이라고 하며 보륙고(步六孤)→하남육씨(河南陸氏), 하뢰(賀賴)→하남하씨(河南賀氏), 독고(獨孤)→하남유씨(河南劉氏), 하루(賀樓)→하남누씨(河南樓氏), 홀뉴우(忽忸于)→하남우씨(河南于氏), 구목릉(丘穆陵)→하남목씨(河南穆氏), 흘해(紇奚)→하남혜씨(河南嵇氏), 울지(尉遲)→하남울씨(河南尉氏)가 속한다. 선비족 부락 이름에서 유래한 성씨들인데 효문제 시절 한화의 일환으로 바뀐 것이다. 이중에 독고씨는 효문제의 어명에도 극소수가 기존 성인 독고를 유씨로 바꾸지 않고 버티기도 했으며 우문씨가 지배했던 북주시대 때 선비족과 한족 혼혈 집단의 귀족들 일부가 우문씨의 호성복귀 명령으로 이전 성으로 복성할 때 유씨에서 다시 독고씨로 복성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19] 제실십성(帝室十姓)이라고 불리며 북위 황실과 뿌리가 같아서 혼인이 금지되었다. 발발(拔拔)→하남장손씨(河南長孫氏), 흘골(紇骨)→하남호씨(河南胡氏), 보(普)→하남주씨(河南周氏), 달해(達奚)→하남해씨(河南奚氏), 이루(伊婁)→하남이씨(河南伊氏), 구돈(丘敦)→하남구씨(河南丘氏), 후(侯)→하남해씨(河南亥氏), 을전(乙旃)→하남숙손씨(河南叔孫氏), 차혼(車焜)→하남차씨(河南車氏), 독발(禿拔)→하남원씨(河南源氏) [20] 이 중 독발씨는 북위 황실의 성씨 탁발(拓拔)과 소리가 같았다. 하남원씨는 성이 일본에서 유명한 그 성인데 우연이 아니다. 북위가 효문제 시기에 성씨를 탁발에서 원(元)으로 바꾸면서 소리가 같은 원(源)을 성으로 삼았는데 사가 천황이 이 일을 본떠서 신적강하를 해도 뿌리가 같음을 나타내려고 같은 성을 내려주었다. [21] 진군 양하현이 본적이라 양하(陽夏) 사씨라고도 한다. [22] 춘추전국시대 진(陳)나라 공자인 원도도(轅塗濤)가 시조라 순임금의 후손이며 제나라의 전씨와도 좀 멀지만 같은 규성 혈통이다. 다른 문벌귀족들에게 전혀 꿀릴 것이 없던 셈. 게다가 4대에 거쳐 삼공을 배출해내기까지 했다. 이를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원(袁)씨 가문의 출신 인물 중에는 참칭 황제가 둘이나 나오는데 그 둘이 바로 중(仲)의 황제를 칭했던 삼국지의 원술과 중화제국의 위안스카이(홍헌제). [23] 특히 여남 원씨 본가는 동탁에 의해 멸족 되었기에 원소와 원술을 제외하면 네임드가 전부 날라가면서 이후 원소와 원술을 제외하면 사실상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다. 물론 남북조 시대에도 남조에서 나름 고귀한 신분인 북방계 교성 귀족으로 대접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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