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1:08:30

비스마르크 추격전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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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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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비스마르크 추격전
Last battle of the battleship Bismarck
독일어 : Letztes Gefecht des Schlachtschiffes Bismarck
파일:external/www.maritimequest.com/39_bismarck_firing.jpg
▲ 주포를 발포하는 전함 비스마르크
1941년 5월 18일 ~ 1941년 5월 27일
장소
북대서양
교전국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나치 독일|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지휘관
-함대사령관
파일:영국 국기.svg 존 토베이
-로드니 함장
파일:영국 국기.svg 프레더릭 달림플해밀턴
-함대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귄터 뤼첸스
-비스마르크 함장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에른스트 린데만
전력 항공모함 2척
전함 3척
순양함 4척
구축함 7척
전함 1척
피해 규모 전함 1척[1] 격침
구축함[2]1척 격침
전함 1척[3] 중파
경순양함 1척 손상
함상 전투기 2기 손실[4]
1,477명 전사[5]
5명 부상
전함 1척 격침
2,200여 명 전사
111명 포로[6]
결과
영국 해군의 승리
비스마르크 침몰
영향
독일 해군의 수상함 통상파괴전 위축
1. 개요2. 서론3. 배경
3.1. 독일 해군의 지원 준비3.2. 당시 영국 해군의 반응
4. 전개
4.1. 추격 시작4.2. 덴마크 해협 전투와 후드 침몰
4.2.1. 영국 함대의 선공4.2.2. 독일 함대의 반격4.2.3. 후드 격침4.2.4.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철수4.2.5. 해전의 평가4.2.6. 해전 이후
4.3. 비스마르크와 유보트 부대와의 공조 시도4.4. 재추격
4.4.1. 웨이크-워커 제독의 추격 함대4.4.2. 비스마르크의 라인 연습 작전 포기4.4.3. 다른 영국 함대의 활동4.4.4. 비스마르크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2차전4.4.5. 빅토리어스의 비스마르크 공습과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의 3차전4.4.6. 비스마르크의 도주4.4.7. 사라진 비스마르크와 영국 해군의 수색4.4.8. 발각4.4.9. H 함대 본대의 비스마르크 공격4.4.10. 표류하는 비스마르크4.4.11. 제 4구축함 전대의 비스마르크 공격
4.5. 독일 해군의 유보트 배치4.6. 비스마르크의 최후
4.6.1. 교전 시작4.6.2. 파괴되는 비스마르크4.6.3. 비스마르크의 자침 시도와 영국 해군의 뇌격4.6.4. 해전 이후4.6.5. 독일 공군의 보복
5. 여담6. 관련 영상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라인 연습 작전(Operation Rheinübung)에 따라 크릭스마리네의 대형 전함 비스마르크가 출항하자 영국 해군이 추격에 나서면서 1941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서양에서 벌어진 작전이다. 결국 영국 해군이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키며 종료되었다.

참고로 비스마르크 추격전은 크게 "덴마크 해협 해전"과 "비스마르크 추격전" 두 부분으로 나뉘며,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두 해전의 문단을 따로 분리하여 서술하였다.

2. 서론

<rowcolor=white> 비스마르크를 격침하라(Sink the Bismarck)
In May of 1941 the war had just begun. The Germans had the biggest ship, they had the biggest guns. The Bismarck was the fastest ship that ever sailed the sea. On her deck were guns as big as steers and shells as big as trees. Out of the cold and foggy night came the British ship, the Hood. And every British seaman, he knew and understood. They had to sink the Bismarck, the terror of the sea. Stop those guns as big as steers and those shells as big as trees.

1941년 5월 전쟁이 지속된 즈음에 독일은 거포가 달린 거함을 가지고 있었어. 비스마르크 전함은 현재까지 바다를 항해한 배 중 가장 빠른 배였고 그 배의 갑판에는 거대한 함포와 포탄들이 있었어. 춥고 안개가 자욱한 밤 중에 영국 전함 후드가 나타났어. 모든 영국 선원들은 알고 있었지. 그 공포의 비스마르크 함을 격침시켜야 한다는 것을. 그 거대한 함포와 포탄들을 막아야 하니까.
비스마르크를 격침하라(Sink the Bismarck) 가사 중.

1941년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통상파괴전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이 통상파괴전의 목적은 영국으로 향하는 상선들을 파괴해 영국을 말라 비틀어지게 만드는 것이었고 대체로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둬내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던 와중 신예 독일 전함이자 당대 최대 전함 중 하나인 비스마르크가 전장에 투입되게 되었고 영국은 이를 알아채자 마자 영국 본토 함대를 투입해 추격을 하기 시작했다.

1941년 5월 24일 영국의 상징적인 전함인 후드와 신예 전함이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비스마르크를 마주치고 연료 탱크를 타격해 손상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나,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무력화되고 후드가 격침되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영국 해군의 상징격이던 후드가 격침당하자 분노한 대영제국 전역의 30척이 넘는 양의 항모전단급 군함들이 모여들어 비스마르크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5월 26일 집요한 추격 끝에 비스마르크는 영국군의 뇌격으로 인해 조타 장치가 손상되어 키가 꺾인 상태로 고정되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고 다음 날 아침 영국 해군의 집중 포화를 맞고 침몰하였다. 이 전투에서 비스마르크라는 가장 중요한 전함 중 하나를 잃은 독일의 통상파괴전 수행 능력은 약화되었지만 드라마틱한 추격전의 전개는 후대에도 기억되고 있다.

3. 배경

1941년을 기준으로 영국은 추축국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항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유럽국가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연방국 일찌감치 먹혀버렸고 기존 동맹국들인 폴란드 제2공화국,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마저 독일에게 먹혀 버린 상황[7] 나머지 국가들은 독일에 대항할 국력도 못 되었으며 스웨덴이나 스위스는 아예 중립을 표방하는 입장이었고,[8] 스페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있었고 그는 아돌프 히틀러가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국내의 사정을 핑계로 뻐기기만 했다. 소련은 그때까지만 해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폴란드 땅을 나눠먹고서 가만히 대기만 타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영국은 전통적으로 섬나라였고 세계 굴지의 해양강국이었기 때문에 고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수많은 상선들을 이용하여 물자와 원료, 군수물자들을 영국 본토로 가져오거나 또는 주요 전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독일 역시 이러한 영국의 해상보급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보트와 소수의 수상함들을 이용하여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영국을 완전히 말려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다.[9]

1941년 3월, 전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의 통상파괴작전이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1941년 5월에는 중순양함 어드미럴 히퍼까지 가담하여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막 취역한 대형 전함 비스마르크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등도 참여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와 비스마르크, 프린츠 오이겐으로 구성된 4척이 동시에 출항해서 전대를 구성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렇게 출격할 경우 영국 해군이 수송선단을 전함으로 호위하더라도 이를 제압하고 수송선단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이는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출격했을 때 수송선단에 영국 전함이 호위함으로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격을 포기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수상함선에 의한 수송선단 공격이 계속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귀환 후 영국 공군의 폭격을 맞거나 기관수리에 시간이 걸리는 등의 사유로 인해 예정대로 출격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작전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력의 저하를 각오하더라도 공격전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우선 출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3.1. 독일 해군의 지원 준비

이같은 작전 목표에 의해,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지휘를 맡은 해군 대장[10] 귄터 뤼첸스 제독은 "비스마르크의 목표는 영국의 함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상선을 공격하고 군함과 마주쳤을 때는 가급적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적 목표를 위해서는 대서양에서 작전중인 유보트 전력과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1941년 4월 8일, 뤼첸스 제독은 오랜 친구이자 해군사관학교 동기인 잠수함대 사령관 해군 중장 카를 되니츠 제독과 파리[11]에서 만나 회의를 갖고 비스마르크 투입에 따른 유보트 지원을 논의했다. 잠수함대 선임장교가 연락 장교 역할로 비스마르크에 승함, 별도 주파수를 이용한 함대 사령관과 잠수함 전대장과의 상시 교신 등이 결정되었지만, 모든 유보트의 작전 행동은 잠수함 사령부의 명령이나 뤼첸스 제독의 요청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그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후 독일 해군은 두 군함에 연료와 군수물자, 탄약 등을 보급해줄 수 있도록 래브라도 해협 근처와 포르투갈 카보베르데 섬에 보급선단을 배치하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고, 5월 18일에 라인 연습 작전이 시작된다.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2척이 고텐하펜에서 출항하였다. 5월 19일에 린데만 함장이 승조원들에게 북대서양으로 나가 보급 선단을 타격할 것이라고 알린다. 이날 11시 25분에 Z-23과 Z16 프리드리히 에콜트가 함대에 합류하였고, 밤 22시 30분에 Z10 한스 로디가 합류하여, 총 3척의 구축함 호위를 받게 된다.

함대는 20일 13시에 영국 해군이 기뢰를 잔뜩 깔아둔 덴마크의 카테가트(Kattegat) 해협에 도달한다. 뤼첸스 제독은 제 5 소해함대(the 5th Minesweeping Flotilla)의 지휘관 Fregattenkapitän Rudolf Lell에게 소해 작업을 지시한다. 좀더 북쪽 노르웨이 방향의 스카게락크 해협에는 기뢰가 없었지만, 뤼첸스 제독은 영국 해군의 잠수함이 매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후 소해된 해역을 따라 17노트의 속도로 지그재그로 이동하며 그날 오후 16시에 기뢰 지대를 통과한다. 그리고는 다시 서쪽으로 변침해서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의 기뢰 지대를 통과했다. 이번에는 소해 없이 구축함 3척을 앞장세우고 27노트로 돌격했고, 22시에 기뢰 지대를 돌파한다.

이들은 5월 21일 오전 9시에 노르웨이 베르겐에 도착했다. 비스마르크는 외곽의 Grimstadfjord에 닻을 내렸고, 프린츠 오이겐은 북서쪽의 Kalvanes 만에 닻을 내린다. 구축함들은 재급유를 위해 베르겐 항에 입항했다.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승조원들은 루프트 바페 전투기들의 항공 엄호를 받으면서, 현지 징발한 상선들을 어뢰를 막기 위한 고기 방패로 함선 옆에 정박시켜두고, 발트해 위장 도색을 지우고 대서양에서 사용한 표준 회색 도색으로 선체를 새롭게 칠했다. 이때 프린츠 오이겐은 유조선으로부터 재급유를 받았지만, 비스마르크는 재급유를 받지 않았다.

3.2. 당시 영국 해군의 반응

뤼첸스 제독의 기뢰지대 돌파는 시간을 낭비하는 큰 실책이었다. 영국 해군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20일 아침에 스웨덴 항공대는 가테가트 해협까지 정기 정찰 비행을 수행하다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발견한다. 이 정보는 스톡홀름의 스웨덴 해군 사령부에 즉시 보고 되었다. 그날 오후 13시에 스웨덴 해군의 순양함 고틀란드(Gotland)가 다가와서 이들 함선들을 육안으로 확인한다. 19시에 노르웨이 망명 정부의 스톡홀름 주재 무관으로 있던 Alfred Roscher Lund 육군 대령(Colonel)이 영국 해군의 주재 무관 Henry Denham 대령(Captain)에게 2척의 대형함이 가테가트 해협에서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넘겼다. 20시 58분에 헨리 대령이 런던으로 이 소식을 타전했다. 22시쯤에는 Viggo Axelssen을 포함한 노르웨이 레지스탕스들도 해안가에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무전으로 런던의 영국 해군성에 제보했다. 영국 정부는 헨리 대령의 첩보를 교차 검증할 수 있게 되었고, 대응에 나서기로 한다.
파일:bismrhein4.jpg
파일:bismrhein6.jpg
<rowcolor=white> 노르웨이로 항해 중인 비스마르크 Grimstadfjord의 비스마르크와 Kalvanes 만으로 향하는 프린츠 오이겐(우측)
21일 오전 11시에 스코틀랜드에서 2대의 스핏파이어가 출격해서 노르웨이 해변을 수색했다. 조종사 Michael F. Suckling[12]이 13시 15분에 고도 8천미터에서 사진을 촬영한뒤 14시 15분에 기지로 귀환했다. 필름은 런던으로 빠르게 옮겨져 인화되었고, 해군 사령부 전체에 '5월 21일에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비스마르크 급 전함과 애드미럴 히퍼급 순양함이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공유된다.

이 사실을 파악한 영국 해군 사령부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이 두 군함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본토함대(Home Fleet)는 막 건조된 전함 HMS 킹 조지 5세 함(KGV),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 함과 순양전함 HMS 후드, HMS 리펄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와 10척의 순양함, 12척의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 정도의 대형 전함은 보유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HMS 후드 함의 경우는 영국 해군 최대의 함선이지만 함령이 20년을 넘고 제대로 된 대개장도 못받아서 낡고 속도도 떨어진데다가 순양전함이라 장갑이 빈약하므로 비스마르크 함을 상대로 비슷한 속도로 추격해서 전면에서 함포를 주고받을 수 있는 후보로는 KGV만이 거론되고 있었으며, 동급인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 함은 막 취역한 상황에다가 민간인 조선소 기술자들이 동승하고 출항할 정도로 포탑작업이 마무리 되지 않아서 효과적인 화력을 제공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기대를 걸 수 있는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 함 역시 막 취역하여 함재기를 딱 한 번 발진시켜봤을 정도[13]로 준비가 부족하였다. 빅토리어스는 비스마르크에게 공습을 가한 시간 기준으로 취역 10일이 되는 날이었다고 한다.[14] 21일에 출항 준비를 할때는 취역한지 막 1주일된 차였다.

4. 전개

4.1. 추격 시작

5월 21일 19시 30분이 되자, 비스마르크는 닻을 올리고 칼바네스 만으로 나가서 프린츠 오이겐과 3척의 구축함과 합류한다. 이들은 20노트로 Hjeltefjord 를 통과했다. 이들이 피요르드를 통과하자마자 영국 공군의 항공기 5대가 칼바네스 만으로 들이 닥쳐서 조명탄을 쏘고 폭탄을 떨구며 비스마르크를 찾았다. 물론 비스마르크는 이미 그곳에 없었고, 날씨가 악화되어 많은 비가 내리는 구름이 가득낀 탓에 영국 공군은 비스마르크를 놓치고 만다.

같은 날 자정 즈음에, 존 크로닌 토비 제독(Admiral Sir John Cronyn Tovey)은 랜슬롯 어니스트 홀란드(Vice-Admiral Lancelot Ernest Holland)에게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포함한 함대를 지휘해서 북위 62도 이북의 해역을 순찰하라고 지시하였고, 제독 본인은 킹 조지 5세와 빅토리어스를 포함한 함대와 함께 스카파 플로우에서 대기하기로 했다.[15] 중순양함 서포크와 노포크는 윌리엄 프레드릭 웨이크-워커 제독(Rear-Admiral William Frederick Wake-Walker)이 기함 노포크에 승함하여 덴마크 해협[16]을 수색하였다.

22일 새벽 4시 20분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구축함들의 호위를 해산하고, 단 2척이서 북상하며 작전을 진행한다.

같은 날 저녁에 Noel Goddard 소위는 전날 날씨가 나빴던 베르겐 상공으로 출격해서 정찰 비행을 했고, 독일 전함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올린다. 토비 제독은 그 소식을 듣고 22시에 스카파 플로우에 있던 모든 함대[17]와 함께 출항했다. 순양전함 리펄스는 호송전단 WS20B을 호위하고 있었지만, 이 임무를 해제하고 다음날 아침에 토비 제독의 함대에 합류하기로 했다. 순양함 아레투사는 아이슬란드 주변을 초계중이던 순양함 맨체스터, 버밍햄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국군 지휘부는 비스마르크의 침로를 3개 중 하나로 보고 세 루트 전부에 항공 정찰을 실시하였다. 최종적으로, 토비 제독은 홀란드 제독의 함대를 Hvalfjordur로 향하도록 하고 북위 62도 이북의 해역을 맡으라고 지시한다. 토비 제독 본인은 그 남쪽 해역에서 비스마르크에 대응하기로 했다.

그 동안 독일 함대는 23시 22분에 서쪽으로 침로를 변경하였다. 비스마르크의 기상학자 Heinz Exterbrink 박사는 아침이 되기 전에 날씨가 맑아질 것이라고 경고했고, 뤼첸스 제독은 노출되는 위험을 줄이면서 북대서양으로 더 빨리 진출하기 위해 유조선으로 부터 재급유를 받지 않기로 한다. 결과적으로 비스마르크는 재급유를 받을 모든 기회를 놓쳤다.

그날 밤 뤼첸스 제독은 루프트바페가 스카파플로우를 정찰하고 얻은 정보를 전달받았는데, 4척의 전함, 1척의 항공모함(추정), 6척의 경순양함과 많은 구축함이 항구에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였다. 이 정보는 악천후 때문에 정확하지 않았고 사진도 찍지 못했지만, 뤼첸스는 자신들이 영국 해군에게 들키지 않고 북대서양에 진출했다는 착각을 하고 만다.

23일 19시 11분이 되자 독일 함대의 레이더에 함선이 발견된다. 독일 함대는 지그재그 기동을 시작했다. 19시 22분이 되자 견시가 12800미터 떨어진 중순양함 1척을 찾아냈다. 프린츠 오이겐은 해당 함선이 보내는 무선을 가로채서 해독했으며, 서포크라는 호출 부호를 확인한다. 같은 시간, 서포크의 견시도 비스마르크를 발견했다.[18] 그러나 서포크는 다시 곧 안개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프린츠 오이겐이 가로챈 무전은 서포크가 비스마르크를 발견했다는 보고였던 것이다.

20시 즈음에 홀란드 제독의 함대가 아이슬란드 남서쪽 해안을 지나가며 해당 보고를 받는다. 제독은 프린츠 오이겐이 함께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다. 비스마르크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기에, 홀란드 제독은 T자 대형으로 요격하기로 결정한다.

20시 30분에는 노포크가 비스마르크에게 발각되어서 5차례의 일제 사격을 받는다. 3차례는 협차되었으며, 노포크에게 지근탄 피해를 입혔다. 그와 함께 프린츠 오이겐 역시 불명의 함선에게 포격 당했다고 보고한다. 뤼첸스 제독은 함대 전속 전진을 지시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주포 사격의 후폭풍으로 후미의 FuMO27 레이더가 고장나는 바람에, 함대는 선도함을 프린츠 오이겐으로 바꾸었다. 비스마르크에게 포격당하는 동안(20시 32분) 노포크의 함장은 대담하게도 '전함 1척과 순양함 1척이 방위 330, 6마일 거리에서 침로 240으로 항해중'이라고 협차당하는 와중에 상부에 보고했다.

비스마르크는 곧 이어 전기 버튼 방식의 조타기가 고장났고, 우현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프린츠 오이겐과의 충돌 코스로 달려들기 시작했으며, 프린츠 오이겐이 우현 40도로 전타하며 회피해 위기를 모면했다.

독일 함대 본부는 스카파 플로우에 영국 주력함들과 중순양함이 그대로 있으며, 뤼첸스 제독의 함대는 발각되지 않았다고 제독을 안심시켰지만(...), 뤼첸스 제독이 보기에는 2척의 영국 해군 중순양함에게 발각된 것이 매우 분명했다. 노포크는 독일 함대 후방에 위치한 비스마르크의 좌현에서, 서포크는 우현에서 30노트의 속도로 쫒아오고 있었다.

같은 시간,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가 있는 곳으로 함대를 변침시키고 27노트로 속도를 올리라고 지시했고, 21시에는 홀란드 제독도 함대의 속도를 27노트로 올리라고 지시한 뒤, 독일 해군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모든 레이더를 끄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비스마르크는 22시부터 영국 중순양함들에게 들이닥치기 위해 수차례 180도 급선회를 하며 달려들었는데, 서포크와 노포크는 매번 레이더로 이 시도를 감지하면서 도망갔다. 이 과정에서 서포크와 노포크는 비스마르크와 10~14마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엇는데, 야간의 숨바꼭질에 시달리면서 서포크는 5차례, 노포크는 1차례 비스마르크를 레이더에서 놓쳤지만, 2척이 동시에 놓치진 않았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를 끝까지 쫒아다녔다.

그날 밤에서는 아이슬란드에서 날라온 PBY 카탈리나가 비스마르크 머리 위를 지나치기 까지 했다. 그런데도 독일 함대 본부는 '아직까지 적 해군은 의미있는 함대 전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정보를 뤼첸스 제독에게 주었다. 제독은 이를 듣고 약간의 위안을 얻었으나,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홀란드 제독은 이때쯤 정북쪽으로 침로를 변경하고, 25노트로 속도를 줄이며 원하는 조우 타이밍을 재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는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의 역량이 눈에 띄게 벌어져 있었으며, 비스마르크가 전함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결론이 났을법한 독일 해군의 일방적인 열세였다.

4.2. 덴마크 해협 전투와 후드 침몰

덴마크 해협 해전
Battle of Denmark Strait
독일어 : Schlacht an der Dänemarkstraße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일부
1941년 5월 24일
장소
그린란드 해 덴마크 해협
교전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지휘관
-함대사령관
파일:영국 국기.svg 랜슬롯 홀란드†
-프린스 오브 웨일스 함장
파일:영국 국기.svg 존 리치
-후드 함장
파일:영국 국기.svg 랄프 커†
-순양함 전대 사령관
파일:영국 국기.svg 프레더릭 웨이크워커
-함대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귄터 뤼첸스
-비스마르크 함장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에른스트 린데만
-프린츠 오이겐 함장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헬무트 브링크만
병력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중순양함 2척
전함 1척
중순양함 1척
피해 규모 순양전함 1척 격침
전함 1척 손상
1,428명 전사
9명 부상
전함 1척 손상
5명 부상
결과
독일 해군의 승리
후드 격침
영국 해군 함대 후퇴
영향
영국 해군의 비스마르크 추격
비스마르크 통상파괴전에서 이탈

4.2.1. 영국 함대의 선공

공격명령을 받은 홀랜드 제독은 즉시 덴마크 해협 남쪽으로 향하였다. 5월 24일 새벽 2시경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남남서쪽(200)으로 변침했고, 구축함들은 수색을 위해 정북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새벽 3시 40분 즈음에 영국 전함들은 서서남쪽(240)으로 변침했고, 28노트로 전투 기동에 돌입한다.
5시 25분에 프린츠 오이겐의 수중 청음기(hydrophone)에서 20마일 거리에서, 고속으로 터빈을 돌리고 있는 2척의 함선이 식별되었다. 프린츠 오이겐들의 장교들은 견시로 확인하려 하였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비스마르크의 레이더는 여전히 고장난 상태였다. 27분에 프린츠 오이겐의 전방 사격 관측소에서 수평선 너머의 연기 2개를 발견하였고, 독일 함대에 전투 경보가 발령된다. 32분에 독일 함대는 남서쪽(220)으로 침로를 변경하며 28노트로 전투 기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프린츠 오이겐은 영국 함대가 경순양함일 것으로 착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영국 해군 역시 5월 24일 새벽 5시 37분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발견하였으나, 어느쪽이 비스마르크인지 식별할 수 없었고, 앞에 있는 배가 비스마르크라고 판단하였다. 영국 함대는 이미 240으로 기동하고 있었고, 독일 함대는 220으로 침로를 잡았으므로, 마주보고 기동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포격전을 벌일 수 있는 거리로 접근할 터였다. 그러나 홀란드 제독은 서서북(280)으로 침로를 지시했고, 영국 함대는 독일 함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5시 41분 경의 서포크와 노포크의 거리는 독일 함대 후방 27킬로미터였으며, 전투에는 참여할 수 없는 먼 거리였다. 5시 49분 양측은 포격전을 벌일 수 있는 위치까지 접근하였고, 홀란드 제독은 북서쪽(300)으로 기동하라고 지시했다.

후드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홀랜드 제독은 그대로 전방을 바라보면서 비스마르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로 인해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방 함포만으로 공격하게 되었는데 만약 모든 포문을 열었다면 독일 함대에 비해 함포 위력에서 앞설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이후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 함대가 동원할 수 잇었던 최대 화력은 후드의 15인치 주포 8문(2x4 = 8)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14인치 주포 10문 (4x2+2 = 10)으로, 독일 함대의 비스마르크의 14.9인치 8문(2x4 = 8)과 프린츠 오이겐의 7.9인치 8문(2x4 = 8) 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홀란드 제독이 T자 대형을 구상을 할때도, 아군의 18문 VS 비스마르크의 4문으로 계산했었으니, 이런 의문은 무척 합당하다. 그렇게 홀란드 제독은 T자 대형을 의도하고 고속 기동했지만, 정작 본인이 처한 상황은 역 T자로 몰린 상태였다.

어쨌든 23㎞까지 접근한 후드에서 5시 52분에 제일 먼저 사격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나머지 군함들도 일제히 포문을 열고 함포사격에 나섰다.

홀란드 제독은 전방에 위치한 독일 군함이 기함인 비스마르크라고 생각하고, 함대에게 앞에 선도하는 함선을 사격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그 위치에 있었던 것은 비스마르크가 아닌 프린츠 오이겐이었다. 원래 기함인 비스마르크가 전방에 위치하는 것이 정상적인 배치였으며[19] 독일 함대도 본래 이 배치를 따르다가 앞서의 레이더 고장 건으로 위치를 바꾼 것이다.

홀란드 제독은 첫 사격이 끝나자 마자 우측 함선이 비스마르크인 것을 깨닫고 목표를 변경하라고 지시했으나, 결국 실행되지 않았고 후드는 프린츠 오이겐에게 계속해서 사격했다. 반면,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리치 함장은 우측이 비스마르크라고 알아보았고, 좌측 함선에게 포격하라는 홀란드 제독의 명령에 불복종하면서 자신의 함선은 우측의 비스마르크에게 포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5시 53분에 첫 사격을 마치자 마자 A포탑(1번 포탑)의 4연장 14인치 주포 중에서 1번포가 고장나서, 가용할 수 있는 14인치 주포가 5개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아직 주포의 조정이 완전하지 않아서, 4번째 일제 사격까지도 탄착군을 형성하지 못해서 5발이 1640야드(1500미터) 거리에 흩어져서 착탄하는 문제까지 생겨버렸다.

4.2.2. 독일 함대의 반격

프린츠 오이겐의 함장 브링크만과 비스마르크의 함장 린데만은 왜 후드가 프린츠 오이겐을 공격하는지 어리둥절해했다. 어쨌든 후드의 첫번째와 2번째 일제 사격은 꽤 가까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비스마르크의 전방 사격 지휘소 장교였던 Adalbert Schneider 소령은 적에게 협차당하고 있지 않냐고(...) 함교에 함내 전화로 항의하면서 사격 요청을 했지만, 마찬가지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엉망진창인 일제 사격을 보고 있었을 뤼첸스 제독은 당연히 쌩깠다. 독일 함대는 침로와 속도를 유지하며 직진했다.

6분간의 포격전이 끝난 후 5시 55분이 되자 홀랜드 제독은 모든 함포문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좌현으로 20도 변침을 명령하였다. 영국 함선의 실루엣이 드러나자, 독일군은 그제서야 상대 함선이 후드와 킹 조지 5세급 전함인 것을 식별하였고, 킹 조지 5세급 전함이 취역했다는 사실에도 놀랬다.[20]

당시 뤼첸스 제독은 레더 제독의 훈령대로 비스마르크의 주임무를 상기하면서 반격을 하지 않고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떨쳐버리려고 했으나,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 이하 비스마르크 승조원들이 이를 곱게 볼리 만무했다. 결국 린데만 대령은 뤼첸스 제독에게 "내 배 꽁무니에 포탄이 날아오는 것을 놔둘 순 없습니다!"라고 말했다.[21]

뤼첸스 제독은 JD 깃발을 올리라고 지시했고, 프린츠 오이겐은 함장 헬무트 브링크만[22] 대령의 지휘하에 선두 함선인 후드에게 사격을 개시했다. 프린츠 오이겐의 첫 사격에 이어서 비스마르크의 38cm 주포도 후드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했다. 그 직후 후드의 4번째 일제 사격이 떨어졌고, 프린츠 오이겐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역시 비스마르크를 향한 5번째 일제 사격을 했고, 여기서 4연장 A 포탑의 또다른 14인치 주포가 고장났다. 이제 4개만 쏠 수 있었다.

5시 56분에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6번째 일제 사격이 작렬했고, 비스마르크의 동체에 명중했다. 좌현 선수를 뚫고 들어가서 우현 선수로 빠져났으며, 전방 구획이 침수되면서 비스마르크의 연료가 새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 역시 후드에게 2번째 사격을 개시했고, 빗나갔다. 프린츠 오이겐의 2번째 일제 사격은 후드에 명중했으며, 중순양함의 8인치 포탄이라 장갑이 관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해당 포탄은 후드의 보트 갑판에 튕긴 후에 대공포용 탄약과 UP 대공로켓 포대 사이에서 작렬해서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수준의 절호의 사격목표물로 작용하였다. 이후 프린츠 오이겐의 3번째, 후드의 5,6번째,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7,8번째 사격은 빗나갔다.
5시 57분, 양측은 17~18킬로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비스마르크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부포도 사격을 개시했다. 프린츠 오이겐의 4,5번째 일제 사격은 모두 빗나갔다. 비스마르크의 3번째 일제 사격은 후드의 마스트에 명중했고, 사격 지휘소 인원들이 전멸했다. 후드는 더 이상 중앙 통제에 따른 사격을 진행할 수 없었다. 프린츠 오이겐의 6번째 사격은 후드의 전방 상부 구조물 갑판에 명중해서, 후드에 또다른 화재를 일으켰다. 후드의 7번째 일제 사격은 빗나갔으며,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9번째 사격은 16,690미터 거리에서 비스마르크에 다시 명중했다. 이 수선하 명중탄으로 비스마르크의 4번 발전실과 2번 보일러 룸에 침수가 발생했고 연료가 추가적으로 새기 시작했다.

5시 58분, 뤼첸스 제독은 프린츠 오이겐에게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프린츠 오이겐은 후드에게 6번째 일제 사격을 가했으나 빗나갓고, 그 이후에 뤼첸스 제독의 지시에 따라 목표를 변경한다. 이후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향한 첫 사격인 7번째 사격도 빗나갔다. 비스마르크의 4번째 일제 사격도 빗나갔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15.56킬로 거리에서 비스마르크에게 10, 11번째 사격을 진행했으나 비스마르크 앞으로 빗나갔다. 이 사격부터는 후방의 4연장 주포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후방의 주포도 1개가 고장났다. 이제 7문이 남았다.

아이슬란드에서 쇼트 서덜랜드 정찰기가 날라와서 포격전을 확인했으며, 정찰기는 후드의 브릿지와 후미[23]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을 발견했다. 후드는 8, 9번째 사격을 진행했지만, 프린츠 오이겐에게 명중하지 않았다.

4.2.3. 후드 격침

5시 59분,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향한 프린츠 오이겐의 8, 9번째 사격도 빗나갔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12, 13번째 주포 사격을 진행했고, 13번째 사격이 비스마르크에 3번째 명중탄을 냈다. 그러나 불발탄이었고, 비스마르크는 외부에 달아둔 보트에만 손상을 입었다. 후드의 10번째 사격은 또 빗나갔다. 홀란드 제독은 10번째 사격이 빗나가자, 좌현으로 20도 추가 변침을 지시해서 침로 260을 지시했다.(비스마르크는 계속해서 220)

6시가 되자, 후드가 변침을 마치기도 전에 비스마르크의 5번째 일제사격이 후드에 명중하였다.
최소한 2발 이상의 피탄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비스마르크의 15인치급 주포탄들은 머피의 법칙처럼 이미 약점으로 지목된 지 오래인 갑판장갑이나 후드의 측면장갑 상부에 있는 얇은 경사장갑 및 측면장갑 아래 지점인 흘수선 아래의 함체를 뚫고 들어갔고 그 중에서 흘수선 아래를 관통한 주포탄이 4인치 양용포 탄약고를 관통한 후 유폭시켰으며 양용포 탄약고가 유폭한 충격으로 후방 주포 탄약고도 연쇄폭발하면서 후방 마스트와 3번 주포탑 사이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배가 두동강 났다.

원래 후드의 방어력 문제점은 건조 당시부터 있던 태생적인 문제점이었다. 유틀란트 해전의 경험을 적용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러기에는 건조 단계가 너무 진행된 바람에 장갑 두께를 늘리는 선에서 재설계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개장을 통해 장갑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서 방어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마침내 순번이 와서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대개장을 하려고 하니 이미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이라 취소된 것이다. 대개장이 늦어진 이유도 있었으니 1차대전 종전 후 후드는 최신형 전함이어서 전훈을 반영한 개량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 해군을 대표하는 배인 만큼 행사와 식민지 순방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군축분위기에서 후드보다 못한 배를 개량하며 후드가 일선에서 구르고 있었고, 이제 후드 차례가 오려고 하는데 그때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결국 무기한 연기라고 읽고 사실상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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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당시 상황 스케치[24] 프린츠 오이겐에서 촬영한 후드의 굉침 장면
6시 1분이 되자, 후드는 후방 주포의 탄약고가 유폭하면서 엄청난 폭발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고 후미가 잘려나가면서 두 동강이 났다. 곧이어 전방의 A 포탑(1번)도 대폭발을 일으켰고, 배의 앞쪽 조각이 중앙과 선수부로 또 두동강이 났다. 배는 결과적으로 세 동강이 났고, 3분 만에 침몰했다.

워낙 빠르게 침몰한 까닭에 홀랜드 제독 이하 1,400여명의 승조원 가운데 딱 3명(윌리엄 J. 던대스(William J. Dundas) 사관후보생, 로버트 어니스트 틸번(Robert Ernest Tilburn) 장포 수병, 테드 브릭스(Ted Briggs) 신호수병)만 살아남았다. 이들 3명은 각자 부유물 위에 올라타서 서로 잡으면서 구조대가 올때까지 버텼다고 한다. 침몰 직후에는 생존자가 더 있었으나 같이 이동하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마저도 공격받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 구조할 틈이 없었고. 2시간뒤 구축함 일렉트라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후드의 생존자들은 대부분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닷물 때문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고 3명만 구조할 수 있었다. 홀랜드 제독도 살아남지 못했는데, 함교 근무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브릭스 수병에 의하면 그는 후드가 가라앉는 동안 자신의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으며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드가 격침되자, 상공의 쇼트 서덜랜드 정찰기도 격렬한 대공 사격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서덜랜드는 구름 속으로 숨어야 했다. 반면 독일 군함들의 주포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포화를 집중시켰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14, 15, 16번째 주포 사격은 빗나갔고, 프린츠 오이겐의 10, 11번째 사격도 빗나갔다. 비스마르크는 6번째 사격의 제원을 수정하지 못하고, 침몰한 후드의 자리에 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후드의 900미터 후방에 있었기에, 후드를 피하기 위해서 우현으로 변침해야 했다. 거리가 프린츠 오이겐의 어뢰 최대 사거리인 12킬로미터 근처까지 왔고, 프린츠 오이겐은 뇌격을 준비한다.

비스마르크의 7번째 사격, 프린츠 오이겐의 12, 13번째 사격,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16, 18번째 사격은 빗나갔다.

4.2.4.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철수

6시 2분, 비스마르크의 8번째 일제 사격이 14킬로미터 거리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함교 항해실에 직격했다. 불발탄이었지만, 이 직격으로 함장 리치 대령과 조타사 1명은 살아남았지만 다른 함교 근무자들 대다수가 전사했다. 함교가 관통당했을 때 바로 밑 층에 있던 항해장이 전성관을 통해서 무사한지 물어봤는데 얼마 후에 전성관을 통해서 피가 흘러내려왔고 해도를 물들였다고 한다. 함교 근무자 대다수가 전사하고 계속되는 포탑 문제로 더는 전투 속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리치 대령이 전장 이탈을 명령하여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사망 13명, 부상 9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25] 도망치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향해 프린츠 오이겐의 14번째 사격이 발사되었으나 빗나갔다. 노포크는 20킬로미터 거리까지 비스마르크를 따라잡았고, 첫 일제 사격을 시작했으나 빗나갔다.

6시 3분,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남남서쪽(160)으로 변침하며 연막을 쳤다. 비스마르크는 9번째 일제 사격을 쐈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2발이 명중했다. 한 발은 선미의 수선하 명중탄이었으나 불발이었다. 다른 한 발은 우현의 제 2 사격 지휘소에 명중했고, 지휘소는 기능을 멈췄다. 프린츠 오이겐은 16, 17번째 일제 사격을 했고, 또다시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선미에 수선하 명중탄 1발을 냈다.

그 순간, 프린츠 오이겐의 견시가 프린츠 오이겐에게 달려드는 어뢰의 항적을 갑자기 발견했다는 보고를 올랐다.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 모두 서쪽(270)으로 변침하며 회피 기동을 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19번째 일제 사격을 했으나, 비스마르크에 명중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10번째 사격을 했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또 다시 명중했다. 명중탄은 함선 중앙에 떨어졌고, 좌현의 크레인과 구명정을 파괴하고 2번째 굴뚝에 관통 구멍을 내면서 비행정도 부쉈다.

프린츠 오이겐의 18번째 사격이 진행되었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2발이 또 명중했다. 한발은 선미의 수선하 명중탄이었고, 다른 한발은 우현의 4번 5.25인치 부포의 탄약고에 직격했다. 다행히도 불발탄이었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순양함에게 후드처럼 격침당하는 운명을 면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후방 Y포탑만으로 20번째 사격을 했다. 이제 후방 주포는 3개의 주포가 작동 불량이었고, 단 한 발만 발사되었다. 이 포탄은 비스마르크 선미 근처에 떨어졌다.

6시 5분이 되자, 비스마르크의 11번째 사격과 프린츠 오이겐의 19번째 사격,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21번째 그리고 마지막 사격이 진행되었고, 4번 모두 명중탄이 없었다.

6시 6분이 되자 독일 함대는 220 침로로 복귀했고, 6시 9분에 뤼첸스 제독이 사격 중지를 선언해서 해전이 끝났다.

독일 함대의 완승이었다.

4.2.5. 해전의 평가

비스마르크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게 3번 피격당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비스마르크에게 4번, 프린츠 오이겐에게 3번 피격 당했다. 후드는 명중탄을 내지 못했고, 비스마르크에게 2번 피격당하고 격침당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13명의 사망자를 냈고, 이후 부상자들이 추가로 사망했다. 후드는 1415명 중에서 3명이 생존했다. 독일 해군은 5명이 경상을 입은 것이 전부였다.

비스마르크는 14~20킬로미터 거리의 교전에서 진행한 11번 일제 사격에서 5차례 명중을 기록하고, 한 차례는 격침, 나머지 4번도 상대 전함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는 경이적인 사격 기록을 남겼다. 이 실적을 바탕으로 2000년대 들어서 일본, 미국의 해군 함선 매니아들이 실전 기록보다 카탈로그 스펙을 더 중요시하는 추세를 이끌기 전까지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러나 3발의 피격 기록 중에서 바이탈에 닿은 것은 1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 바이탈의 피격으로 연료가 유출되면서 이후에 격침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설계 결함을 노출하였다. 또한 카탈로그 스펙에 한참 미달되는 분당 1발(!)의 사격 속도, 그리고 사격 제원 수정 지연으로 일제사 1번을 대서양에 버리는 처참한 승조원 숙련도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후드의 문제는 취약 부위 개장만이 아니었으며[26] 이는 후드의 격침 원인이 후드가 순양전함이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캐슬형으로 바뀌지 못한 함교, 1차 대전기에 머무른 구형 기계식 사격지휘 컴퓨터, 대공포가 아닌 대공 로켓까지 모든 면에서 총체적인 난국을 보여주며 후드 자신이 격침되는 원인이 되었다. 잘 만들어진 1차 대전기의 전함이라 할지라도 개장받지 못한다면, 2차 대전기의 기술력이 반영된 '평가가 낮은 전함'에게도 짓밟힌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영국의 최신예 전함 답게 숙련된 승조원들의 역량을 잘 보여주었다.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보다 더 빠른 사격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다.[27] 7번의 유효타를 당하고도 십수명의 사상자만 낸 방어 구조도 고평가를 받는다. 물론 프린츠 오이겐에게 굉침당할뻔한 위기가 있긴 하였으나, 2차 대전기의 ∩자형 장갑 구조는 현측에만 장갑이 배치되고 선수, 선미에는 장갑을 두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크게 논쟁이 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좋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 배는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4.2.6. 해전 이후

후드의 생존자들은 구명정에 올라탔고, 3시간 후에 구축함 엘렉트라에 구조되었다. 생존자들은 5월 24일 오후 늦게 아이슬란드로 이송되었고 하루 동안 치료받았다. 그리고 나서 상선을 타고 영국 본토로 귀환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리치 함장은 노포크와 서포크를 기다려서 합류했다. 불과 8분 만에 후드가 침몰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손상을 입고 홀랜드 제독까지 전사하는 바람에 두 중순양함을 지휘하던 해군 소장 프레데릭 웨이크-워커 경이 현장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지휘관이 되어버렸다.

웨이크-워커 제독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상태를 점검했고, 10문의 주포 중에서 3문만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28] 후방 주포는 회전이 불가능했고, 브릿지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400톤의 물이 후미에 들어차서 속도가 27노트까지 내렸다. 상황을 파악한 웨이크워커 제독은 사령부에 "후드 격침"이라는 아주 짤막한 보고를 올리고, 리치 함장과 대화한 다음 다시 비스마르크를 추격하기로 한다.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게 이들의 결론이었다.

4.3. 비스마르크와 유보트 부대와의 공조 시도

후드 격침 소식은 독일 해군 본부에도 알려졌다. 5월 24일 오전 되니츠 제독은 서부 해역 사령관인 해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잘베히터(Alfred Saalwächter) 제독[29]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유보트를 서부 해역 사령부의 의도대로 배치시킬 것을 요청했다.

비스마르크 지원 작전의 총책임자이던 잘베히터 제독은 이에 동의, 뤼첸스 제독의 의도를 파악한 후 유보트 세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뤼첸스 제독은 같은 날 오후 가용한 모든 유보트 전력을 그린랜드 남쪽 해역에 집결시켜 줄 것을 잘베히터 제독을 통해 되니츠 제독에게 요청했다. 그는 비스마르크를 추격할 영국 군함들을 유인하여 유보트와의 협동 작전으로 무력화하려 했으나, 연료유 유출로 인한 계획변경 탓에 성과를 보지 못했다.

4.4. 재추격

잡아라!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영국 해군의 자존심을 건 일전이다. 그 놈을 놓친다면 더 이상 영국 해군은 없다.
- 영국 본토함대 사령관, 해군대장 존 크로닌 토베이 제독
한편, 오랫동안 영국 해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후드가 격침되고 신예 전함이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 마저 심각한 손상을 입고 간신히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 해군은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당시 대부분의 영국 해군 장병들은 1차 세계대전 때의 군 홍보물을 보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전함 후드는 단순한 군함이 아니라, 대영제국 해군의 꿈 그 자체였다.[30] 그런데 그런 후드는 하필이면 자신들의 적국이 그렇게 자랑하던 전함의 킬 카운트로 전락해 버렸고, 이 소식은 영국인들에게 엄청난 절망을 안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절망은 분노로 변했으며, 명령을 받았던 안 받았던 간에 대서양에 있던 거의 모든 영국 군함들이 후드의 복수를 하자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1차 대전 당시, 그리고 1년 전에도 해군성 장관을 역임했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놈만큼은 반드시 격침시키시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4.4.1. 웨이크-워커 제독의 추격 함대

5월 24일, 6시 10분이 되자, 쇼트 서덜랜드가 다시 나타나서 독일 함대를 정찰했다. 함대는 격렬하게 대공 사격을 해서 내쫒았다. 독일 함대는 프린츠 오이겐이 32.5노트로 가속해서 다시 선두에 섰다.

6시 14분이 되자, 프린츠 오이겐은 잘못된 어뢰 경보를 받고 다시 회피 기동을 했다. 뒤에서 웨이크-워커 제독이 이끄는 순양함 노포크와 서포크가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함께 여전히 추격중이었기 때문이다.

6시 17분에 프린츠 오이겐은 좌현으로 변침해 반대 방향인 100도로 반전해서 서포크에게 달려들었다가 다시 220도 돌아서 직진했다. 서포크는 프린츠 오이겐이 달려드는 것을 발견하고 발포했다. 그러나 레이더 데이터는 19.8킬로미터로 잘못 표시되었으나, 실제 거리는 27킬로미터였고, 포는 닿지 않았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역시 연막 차장에서 빠져나와서 비스마르크를 향해 30킬로미터 거리에서 일제사격을 했다. 포탄은 빗나갔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다시 연막 속으로 숨었다.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50도 침로로 반전했다가 다시 220으로 변침했다. 서포크는 3번의 일제 사격을 다시금했으나, 10킬로 가량 빗나갔다. 서포크는 6시 24분에 2번의 일제 사격을 진행했고, 이후로는 중단하고, 해군성에 비스마르크의 거리와 침로를 보고했다.

4.4.2. 비스마르크의 라인 연습 작전 포기

5월 24일, 뤼첸스 제독은 6시 32분에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시켰고, KGV 혹은 리펄스에게 피해를 입혀 되돌려보냈으며, 2척의 중순양함과 접촉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독일 함대의 순항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고 보고했다.

순항 속도가 줄어든 이유는 비스마르크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게 받은 피해를 복구하고 있었는데, 배가 좌현으로 9도 기울어서 우현 스크류가 수면 밖으로 나올 정도였다. 린데만 함장은 일단 급한대로 배의 우현 부분을 침수 시켜서 균형을 맞추라고 지시했고, 동시에 잠수부들을 보내서 연료 탱크들을 연결, 유실되는 연료를 줄여보려고 시도했지만 2번의 시도가 모두 실패한다. 린데만은 뤼첸스 제독에게 허가를 구해서 함대의 속도를 22노트까지 줄이고[31] 2번 보일러실의 침수를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보일러실이 폐쇄된다.

결국 이로 인해 비스마르크의 속도가 느려진데다가, 연료의 유출도 매우 심했다. 비스마르크 측에서는 프린츠 오이겐의 승조원들에게 연료 유출을 확인해보라고 시켰는데, 기름띠가 워낙 선명해서 눈에 띄는 것은 물론, 기름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연료의 유출이 매우 심해서 통상 파괴를 진행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그 이전에 항공 수색만으로도 금방 발각될 터였다.
파일:bismfinalbattle5.jpg
<rowcolor=white> 비스마르크가 갈 예정이었던 생나제르의 드라이 독
이 시점에서 뤼첸스 제독은 작전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육지로 향하기로 한다. 작전을 포기한 이유는 함선의 침몰로 기록이 소실되어 알 수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연료 유출 관련이 유력하다. 또한 2천 노티컬 마일 떨어진 프랑스의 생나제르(Saint-Nazaire)의 '노르망디' 드라이 독[32]으로 가기로 했는데, 이 이유도 알려지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운 브레스트(Brest)는 영국 공군의 활동범위 안에 들어갔으며,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이미 도크에서 수리 중이어서 가지 않았다고 추측되지만, 정작 노르웨이의 트론하임과 베르겐은 각각 1300 노티컬 마일과 1150 노티컬 마일로 더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지 않았다. 추측하기로는 뤼첸스 제독은 수리 이후에 계속해서 라인 연습 작전을 속개하기 위해서 프랑스로 가려 했던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또한 비스마르크의 생존자들에 의하면, 린데만 함장은 '이 배는 계속해서 수적 열세에 처하며 싸우기에는 너무 좋은 배'라는 이유로 베르겐 회항을 건의했지만, 뤼첸스 제독이 묵살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14시 20분에 프린츠 오이겐만 브링크만 대령의 지휘하에 예정대로 통상파괴전을 수행키로 하고 15시 40분에 분리하려 했다. 분리 신호는 '후드를 처형하라!'였다.[33] 그러나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는 중순양함이 아직 존재했기에 분리를 취소한다. 독일 함대는 이때가 돼서야 자신들을 추격하던 중순양함 2척이 아직도 2척 모두 자신들을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4.3. 다른 영국 함대의 활동

이때까지 토비 제독의 KGV, 빅토리어스 부대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 서포크, 노포크 추격 함대를 제외한 함대의 현황은 다음과 같았다.

5월 22일에 호송전단 WS20B 호위 임무가 해제된 리펄스는 토비 제독의 함대와 합류했지만, 5월 25일 아침에 연료가 고갈되어서 비스마르크 추격 작전을 중단하고 다시 돌아가야 했다.

순양함 에딘버러는 스페인 서북부의 Finisterre 곶 근처에서 초계중이었는데, 비스마르크가 비스케이만으로 진입할때 추격하기 위해서 비스케이 만으로 이동하도록 명령받는다. 5월 22일에 비스메이만 근처에서 독일 해군의 SS Lech 함선을 나포하고, 이후 브레스트로의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급파되지만, 비스마르크는 에딘버러가 기다리는 근처에 오지 못했다.

5월 23일, 리벤지급 전함 라미예즈가 HX 127 호송 전단 호위 임무를 해제 받고, 그린란드 남동쪽 해상에서 비스마르크 수색 임무를 부여받았다. 라미예즈는 비스마르크가 침몰하는 순간까지 독일 해군의 함선과 조우하지 못했고, 노포크, 서포크가 먼저 발견해서 후드 격침으로 이어진다.

5월 24일, 17시 22분에는 사령부로 부터 순양전함 리나운, 항공모함 아크 로열, 순양함 셰필드가 지브롤터에서 출항했는데, 목적지는 모른다는 소식까지 뤼첸스 제독에게 전해졌다. 순양전함인데다가 노르웨이 전역에서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과 맞대결한 리나운이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행을 저지하기 위해 출항하는 것이라면, 비스마르크는 이 교전을 피하는게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정보는 꽤 정확했고, 서머빌(Somerville) 제독이 이끄는 H 함대(Force H)에는 리나운, 아크로열, 셰필드 외에도 구축함 6척이 추가로 있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이 H 함대에게 공격받아 발목을 잡히게 된다.

중순양함 런던도 지브롤터에서 영국 런던으로 향하는 호송 전단을 호위하고 있다가 비스마르크 추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동년 3월에 개장받아 추가한 레이더, 주포, 장갑이 과도한 무게를 가졌던 탓에 전투 기동 중에 함선 상부 갑판과 선체에 균열이 발생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H함대와 합류하지 못한채 임무를 포기해야 했다. 이후 런던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2월까지 민간 조선소에 입고돼서 개장으로 추가된 것들을 덜어내는 추가 개장을 받는다.

그 외에는 전함 로드니는 개장을 위해 미국 보스턴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겸사겸사해서 상선 MV Britannic을 호위하며 캐나다 헬리팩스로 가는 중이었다. 이 여정에는 로드니와 상선을 호위하기 위한 4척의 구축함이 함께 했다. 그러나 후드 격침 직후인 24일 아침에 호송전단 임무를 해제받고, 선단에 에스키모(Eskimo)만을 Britannic 호위를 위해 남겨둔 채, 구축함 소말리(Somali), 마쇼나(Mashona), 탈타르(Tartar)를 대동하고 비스마르크 추격을 시작한다.

25일에는 중순양함 도셋셔가 호송선단 호위를 중단하고 비스마르크 추격을 시작했고, 26일 새벽에는 제 4구축함 전대도 주력함 호위 교대를 명령받으면서 비스마르크와의 교전을 위해 달려온다.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격침되던 27일에는 영국 해군의 잠수함 6척이 유보트의 초계를 돌파해서 브레스트와 생나제르와 비스마르크 사이에 일렬로 배치되어 최종 저지선을 펴고 있었다. 유보트들과 독일 공군은 비스마르크와 영국의 주력함들에 정신이 팔려서 프랑스 서부 해안선을 돌파당한 사실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4.4.4. 비스마르크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2차전

파일:독일 비스마르크 마지막 사진.png
<rowcolor=white> 독일 측이 기록한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사진. 프린츠 오이겐에서 촬영되었다.
18시가 되자 안개가 짙어졌고, 다시 한번 뤼첸스 제독으로부터 프린츠 오이겐에게 '후드를 처형하라!'가 전달된다. 비스마르크는 우현으로 선회해서 서쪽으로 침로를 잡았다가 북쪽으로 향했고, 영국 순양함들에게 달려들며 주포를 쐈다. 영국 함대가 비스마르크에게 신경이 쏠린 사이, 프린츠 오이겐은 들키지 않고 대서양 방향의 유조선들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이후 프린츠 오이겐은 24노트로 항해를 지속한 뒤, 5월 26일 아침 6시 6분에 유조선 Spichern 과 랑데뷰해서 재급유를 받고, 28일에는 Esso-Hamburg와 랑데뷰해서 연료, 물, 8인치 탄약을 보급받는다. 그러나 호위 구축함들은 오래전에 항속거리 문제로 회항했으므로, 비스마르크는 상처 입은 몸으로 홀로 돌아가야 했다.

5월 24일 18시 47분이 되자, 비스마르크에게 역추격 당하던 서포크는 뒤늦게 따라오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 근처로 갈 수 있었고, 돌아온 KGV급 전함을 발견한 비스마르크도 다시 남쪽으로 선회해서 프랑스로 향한다.

18시 56분까지 비스마르크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교전하지 않다가, 양측 사이의 거리가 17킬로미터로 좁혀지자 교전을 시작한다. 양측 모두 명중탄이 없었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복구한 A 포탑(1번)의 4연장 주포 중에서 2문이 다시 고장난다.

19시 14분이 되자, 뤼첸스가 항해 기록을 남긴다. 'KGV와 특이사항없는 짧은 교전 수행. 프린츠 오이겐은 재급유를 위해 분리됨. 적과의 접촉이 지속중'. 서포크는 이때쯤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기함 노포크가 있는 함대로 다시 복귀하였고, 영국 함대는 비스마르크의 좌현에 자리잡았다. 이 기동은 비스마르크가 수시로 반복하던 반전 돌격을 의식한 것이었지만, 비스마르크의 우현을 텅 비워버리는 문제를 낳았다.

20시 56분, 뤼첸스 제독은 서부해역 사령부에 연료 부족과 프랑스 생 나제르 행 계획을 보고한다.뭔가 이상하다 느껴지겠지만, 뤼첸스가 늦게 보고한 것은 실제로 벌어진 내용이다.

4.4.5. 빅토리어스의 비스마르크 공습과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의 3차전

다시 시간을 돌려서 5월 24일 15시 9분. 토비 제독은 함대에게 비스마르크에게 접근하는 침로를 잡으라고 지시하고, 빅토리어스에게 비스마르크에 대한 공습 준비를 지시한다.

빅토리어스는 5월 24일에 취역한지 고작 열흘째 되는 날이었고, 함재기도 정규 전투 편성의 1/4 수준으로만 간신히 본토에서 생산해 적재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어스에서는 공습 준비를 시작했고, 토비 제독의 영국 함대는 비스마르크로부터 120마일 거리까지 접근하기 위해 전투 기동을 시작한다.

24일 밤 22시 10분이 되자, 빅토리어스는 속도를 15노트까지 줄인뒤, 맞바람을 받는 방향으로 선회해서 직진을 시작한다. 그리고 9대의 페어리 소드피시가 어뢰를 장비하고 모함으로부터 날아올랐다. 편대의 지휘관은 유진 에스몬드(Eugene Esmonde) 소령이었다. 23시에는 빅토리어스로부터 3대의 페어리 풀머가 발진했고, 25일 새벽 1시에 페어리 풀머 2대가 추가로 발진했다.

영국 해군의 항공기 편대는 웨이크-워커 제독의 중순양함 함대를 찾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일단 찾고 나면 그 앞에 비스마르크가 있을 터였다. 소드 피시는 후일 유보트를 상대하는데 더 유용하게 쓰일 신형 해상 감시(ASV : air-to-surface-vessel)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드 피시 편대의 레이더는 비스마르크를 먼저 찾았다. 서쪽 해상 15마일 거리였다. 소드 피시 편대는 비스마르크에게 바로 들이닥쳤지만, 비스마르크는 곧 안개로 숨어버렸고, 편대는 원래 예정대로 북동쪽으로 다시 날아가서 웨이크-워커 제독의 함대와 합류한다. 웨이크-워커 제독의 기함 노포크의 참모들은 정남향 14마일 거리에 비스마르크가 있다고 편대에 알려주었다.

편대는 날아가다가 그린란드 근해 초계에 종사하던 미합중국 해안 경비대 탐파급 경비함(Tampa Class Cutter) WPG-46 USCGC 모독(Modoc)함을 발견했는데, 비스마르크로부터 6마일 거리였다. 이 배는 비스마르크가 페어리 소드피시에게 발사한 대공포화가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것에 휘말리기도 했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미 해안 경비대 함정인 것을 식별해서 말리기 직전에는 독일 함선으로 오인한 노포크에게 경고없이 포격당할 뻔하기도 했다. 모독은 독일 영국 양측의 격렬한 해전 한가운데 내던져져서, 승조원들 본인은 원치 않던 직관을 23일부터 27일의 비스마르크의 격침 순간까지 쭉 하게 되었지만, 덕분에 비스마르크의 격침에는 영국과 독일 외에 제 3자의 기록이 남게 되어서, 이후의 기록에 공신력을 더해주게 된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모독은 총알 한 방 맞지 않고 무사히 돌아가, 이때 목격한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해 미합중국 해군과 공유한다. 아직까지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비스마르크도 이 중립국 해경함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소드피시 편대는 구름 속에서 1대가 미아가 되고 말았고, 나머지 8대는 비스마르크를 향한 뇌격 코스로 돌입한다.

24일 23시 33분, 비스마르크 좌현의 3번 3.7 cm/83 SK C/30 대공포대에서 경계 근무 중이던 게오르그 헤르조그(Georg Herzog) 수병장(Matrosengefreiter)이 저공으로 진입 중인 적 항공기를 발견했다. 3.7cm 대공포대는 즉각 발포를 시작했고, 슈나이더 소령의 대공 통제에 따라 38cm 주포와 15cm 양용포 부포도 최저 양각(-8도)로 두고 소드 피시에게 쐈다. 나치 전쟁해군의 교리는 일본 해군과는 달랐기에, 주포의 발사 의도는 3식 통상탄 같은 대공 탄막을 뿌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38cm 주포는 해수면에 격돌하면서 거대한 물기둥을 만들었고, 뇌격기들이 직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운이 좋다면 투하된 어뢰에 맞아서 폭파시킬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비행 속도가 느렸던 소드피시들은 눈앞에 나타난 물기둥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뇌격 코스를 유지했고, 물기둥을 지나친 이후에 7발의 388파운드 18인치 MK XII 어뢰를 투하했다. 2차 대전 당시 영국의 어뢰는 미국, 독일 과는 달리 아무런 스캔들이 없는 정상 작동하는 어뢰들이어서, 항공어뢰이긴 하지만 맞으면 작게나마 손상을 입을 터였다.

린데만 함장은 배의 속도를 27노트로 끌어올리라고 지시하면서, 조타수 한스 한센(Hans Hansen) 최고조타병장(Matrosenhauptgefreiter)에게 좌현 전타를 지시했다. 비스마르크는 좌현 방향에서 일렬로 쇄도하는 항공 어뢰 사이로 빠져나가기 위해 좌측으로 선회를 시작한다. 이 급기동으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게 당한 선수부의 땜질이 전부 뜯겨져 나가버리면서 다시 바닷물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주포 사격의 진동이 가해진 결과 2번 보일러실의 파공도 다시 터져버렸고, 2번 보일러실이 완전히 침수되면서 증기가 아닌 액체 상태의 물이 4번 발전기의 터빈에 밀려들어올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액체 상태의 물이 들어오면 터빈 블레이드가 부러질 것이고, 그 결과 발전기도 완전히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6발의 어뢰를 피했지만, 한 발을 우현에 맞고 말았다. 함체에 입은 경미한 피해였지만, 승조원 중 쿠르트 키르크베르크(Kurt Kirchberg) 갑판 원사(Oberbootsmann)가 전사하고 6명이 부상당했다. 키르크베르크 원사는 비스마르크의 첫 전사자였다. 또한 어뢰 자체보다 회피기동으로 인한 함선의 피해가 훨씬 컸기 때문에(...) 린데만 함장은 비스마르크의 속도를 16노트로 줄이고, 파공을 다시 땜질하면서 4번 발전기도 수리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보조 보일러를 발전기에 연결해서 복구에 성공했다. 파공은 12노트까지 속도를 줄인 다음, 잠수사들을 투입해서 임시로 메워야 했다. 그와 함께 전방 연료 탱크에 호스를 연결해서 후방 연료 탱크로 잇는 작업을 마침내 성공시켰고, 겨우 백여톤의 연료를 가까스로 뒤쪽에 옮길 수 있었다.

뤼첸스 제독은 5월 24일 23시 38분부터 25일 새벽 12시 37분까지 서부 해역 사령부에 3차례에 걸쳐 '공습 당할 것 같고, 우현을 맞았고, 추가 공격이 예상된다'는 무전을 차례대로 보냈다.

1시 31분에는 거리를 좁혀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15킬로 미터 거리에서 2차례 일제 사격을 주고 받았고 양측 모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뤼첸스는 24일 19시 14분에 기록한 내용을 서부 해역 사령부에 그대로 보고했다. 'KGV와 특이사항없는 짧은 교전 수행. 프린츠 오이겐은 재급유를 위해 분리됨. 적과의 접촉이 지속중'.재탕

1시 53분에는 뤼첸스가 '대수롭지 않은 어뢰 피격'이 있었다고 서부 해역 사령부에 보고했다. 25일은 뤼첸스 제독의 생일이었기에 함내 방송으로 생일 축하를 받았다.

2시 30분 경, 소드피시 편대가 빅토리어스에 복귀했다. 최종적으로 2대의 페어리 풀머를 연료 부족으로 잃었다. 비가 내려서 시야가 좋지 않았는데 빅토리어스의 유도 신호기(homing beacon)마저 고장났기 때문에 페어리 풀머들이 모함을 찾아 헤마다 끝내 추락한 것이었다. 페어리 풀머는 복좌기였기 때문에 4명의 조종사가 바다에 빠졌는데, 1명만 상선에 구출되었다.

에즈먼드 소령은 이 공습으로 공로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을 받았다. 이후 중령이 되어 페어리 소드피시 편대를 이끌고 독일 해군의 영국 해협 돌파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1942년 2월 12일에 격추되어 사망하고, 빅토리아 십자 훈장(Victoria Cross)에 사후 추서되었다.

4.4.6. 비스마르크의 도주

소드피시가 복귀하던 25일 새벽 2시 반 경, 웨이크-워커 제독의 함대는 비스마르크를 쫒고 있었지만, 유보트 위험지대에 진입한 상태였다. 서포크와 노포크는 비스마르크의 좌현 후방에서 30분마다 방향을 바꾸며 지그재그로 기동하기 시각했고, 서포크는 결국 비스마르크를 레이더에서 놓쳤다. 뤼첸스 제독은 우현으로 변침해서 추격자들을 따돌리기로 결심한다.

새벽 3시가 되자, 뤼첸스는 비스마르크의 속도를 27노트로 올리라고 지시했고, 3시 6분에 우현으로 변침해서 서쪽으로 가도록 지시한다. 그 다음에는 북서쪽, 그리고는 북쪽으로 향했다. 비스마르크의 우현 변침은 서포크가 지그 재그 기동을 하면서 좌현(동남쪽)으로 최대한 갔을 시점에 맞춰서 시작되었고, 서포크의 함장은 3시 30분 쯤에 우현으로 지그 재그 방향을 바꿨는데도 비스마르크가 레이더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비스마르크는 시계 방향으로 큰 원을 그리면서 기동했고, 최종적으로는 서포크와 노포크의 뒤쪽을 통과해서 남동쪽(130)으로 침로를 잡은 상태였다.

서포크의 함장은 비스마르크가 레이더에 나타나길 고대했지만, 결국 4시 1분에 웨이크-워커 제독에게 접촉이 끊겼다고 보고한다. 제독은 서쪽에서 남쪽으로 크게 선회하며 비스마르크를 찾으라고 지시했지만, 두 순양함들은 비스마르크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노포크는 서쪽으로, 서포크는 남서쪽으로 직진하며 비스마르크를 찾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토비 제독의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세 척 모두 비스마르크를 찾는데는 실패한다.

비스마르크를 놓쳤다는 보고가 토비 제독에게 올라갔고, 이때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장소에서 100마일 남동쪽 해상에 있었다. 토비 제독은 서쪽 방향을 수색하기로 결정하면서 모든 가용한 영국 해군 함선들은 비스마르크를 잡으라(ordered all other available Royal Navy ships to hunt the Bismarck)고 지시한다. 지상의 공군기지와 빅토리어스에서 항공기가 발진해서 비스마르크를 수색하기 시작했고, 미군에게도 도움 요청을 보냈다.

4.4.7. 사라진 비스마르크와 영국 해군의 수색

아이러니하게도, 뤼첸스 제독은 영국 해군의 추격을 따돌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5월 25일 아침 7시, 뤼첸스 제독은 서부 해역 사령부에 '1척의 전함, 2척의 순양함과 접촉 지속중'이라는 보고를 올린다. 영국 해안가의 감청소에서 이 메시지를 가로챘고, 방위각을 산출한다. 물론 메시지는 해독하지 못했지만, 동일한 패턴의 암호화된 문구가 후드 격침 시에 발송되었기 때문에, 이 문구가 비스마르크의 콜사인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방위각 추정을 통해서 비스마르크의 위도를 추정했지만, 경도는 거의 확실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에서 동쪽이었다.

8시 46분, 서부 해역 사령부는 뤼첸스 제독에게 영국 해군을 따돌렸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8시 54분, KGV에 승함중이던 토비 제독에게 방위각 산출 정보가 전달되었다. 본토 함대 사령관이었던 제독 본인이, 참모들과 함께 비스마르크가 이동할법한 항로를 직접 추측해서 결정해야 했다. 발견된 정보들을 취합해서 해도에 점으로 찍고, 이를 방위각 산출 정보와 조합한 결과, 비스마르크가 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도 정보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토비 제독과 참모들은 비스마르크가 함대의 북동쪽으로 가고 있으며, 그렇다면 덴마크 해협이거나 혹은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 사이로 향해서 노르웨이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 이 경로가 더 가까운 경로였고, 비스마르크는 영국 해군이 북위 62도로 보낸 함대를 박살내놓은 상태였으니, 적이 없고 더 가까운 북동쪽으로 갈 것이라는 점은 상식적인 판단이었다.[34]

9시에 뤼첸스 제독은 후드 및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의 교전과 그 전훈을 요약하는 긴 무전을 보냈다.
영국 해군은 레이더를 장비했으며, 탐지 범위는 최소 35,000야드 추정. 이 레이더는 대서양 통상 파괴 작전을 크게 방해할 것이다. 기상이 유리했는데도 적 함선을 따돌리지 못했기 때문. 후드는 폭발굉침시켰고, KGV는 몇차례 명중을 관측한 후 연기를 뿜으며 몇 시간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후로는 극단적으로 먼 거리에서만 교전을 걸어왔다. 이 교전에서 탄약 93발을 소모함. KGV에게서 2발 피격 당했으며 부위는 13~14, 20~21. 속도가 줄어들었고, 배가 좌현으로 기울었으며, 연료 탱크에서 손실이 발생함. 프린츠 오이겐은 전함이 적 순양함과 전함과 교전하는 사이에 안개를 통해서 탈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레이더 탐지 세트는 장애를 겪고 있으며, 특히 발포할때 그러하다.

10시 47분, 토비 제독의 함대는 북동쪽(55도) 방위로 27노트로 고속 순항하고 있었고, 비스마르크의 반대 방향이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에게는 다행히도 서머빌(Somerville) 제독의 H 함대는 지중해 쪽의 지브롤터에서 출항해서 비스마르크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이는 비스마르크의 잘못된 위치 추정을 전제하고도 여전히 비스마르크와 만나는 코스였다.

또한 중순양함 도셋셔(Dorsetshire)는 프린츠 오이겐에 대비하기 위해 시에라리온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SL670 호송 선단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함장의 결정에 따라 호위를 중단하고 비스마르크가 있는 장소로 향하기로 한다.[35]

넬슨급 전함 로드니는 토비 제독의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항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퍽과 비스마르크의 접촉이 끊겼다는 소식을 받고, 함장 Dalrymple-Hamilton 대령은 자신의 참모들 및 동승한 미 해군 장교들과 논의해서 독일 함선이 브레스트로 향할 것이라는 독자적인 결론을 내렸고, 동쪽으로 직진하기로 한다. 로드니는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엔진 출력을 올린 탓에 이론상 최대 순항 속도를 2노트 초과한 22노트를 냈고, 그 결과 함선에 기계적인 고장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토비 제독의 지시를 받았지만, 무시하고 계속해서 직진하기로 한다.

같은 시간, 독일 서부 해역 사령부는 뤼첸스 제독이 왜 추격을 따돌렸다는 사령부의 연락을 무시하고, 무선을 계속 보내면서 자신을 노출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당황했다. 한편 영국 해군성도 의아한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자신들이 보낸 위도 경도 정보에 따르면 비스마르크가 남동쪽으로 간다고 생각했는데, 본토 함대 사령관께서는 왜 그 정보를 가지고 북동쪽으로 가기로 결정하셨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당황하고 있었다.[36]

해군성은 11시 40분에 로드니의 함장에게는 비스마르크가 브레스트나 생 나제르로 갈 것 같다는 의견을 전달한다. 그러자 로드니의 함장은 갑자기 비스마르크가 스페인으로 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남동쪽으로 침로를 바꿨고, 14시 30분에는 차라리 북동쪽으로 가라는 해군성의 갈굼을 들었지만 16시 20분까지 계속해서 남동쪽으로 갔다. 그런데 천운이었던 것인지 이 남동쪽으로 향해하는 동안, 비스마르크가 수평선 너머 25마일(46킬로미터) 거리를 통과해서 지나갔다. 만약 약간이라도 엇갈렸다면 로드니는 정상적으로 기동하는 비스마르크와 1:1 대결을 했을지도 모른다.

25일 정오, 뤼첸스 제독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에게 연설을 한다.
비스마르크의 승조원 제군! 자네들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순양전함 후드의 격침은 단순한 군사적인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좀 더 도덕적(moral)인 가치도 품고 있다. 왜냐하면, 후드는 영국의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적은 이제 세력을 모아서 우리에게 보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프린츠 오이겐이 대서양에서 통상 파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어제 내보내 주었다. 프린츠 오이겐은 적을 잘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함선에 입은 손상 때문에 프랑스 항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7] 그 여정 속에서, 적들은 부대를 모아서 전투를 강요해올 것이다. 독일 민중이 제군과 함께 하니, 우리는 포신이 붉게 달아오르고 마지막 포탄을 쏠 때까지 사격할 것이다. 우리들 수병에게는 이제 단 하나만의 구호가 남아 있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25일 오후 동안, 린데만 함장은 비스마르크에 가짜 연돌(굴뚝)을 하나 더 만들어 세우라고 지시하며, 연돌의 색깔이 비스마르크의 원래 연돌과 같은 색이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침을 일일이 내리며 잔소리를 했다. 장교들은 흡연자들이 여기서만 담배를 피워야한다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통신실의 당직자들은 영어로 된 모스 부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토비 제독은 15시 48분에 동쪽(80도)로 변침 지시를 하면서 북동쪽이 정말일지 의구심을 가졌고, 16시 21분에는 '비스마르크가 페로 제도로 갈 가능성은 검토했는지(Do you consider that enemy is making for Faeroes?)'에 대해 해군성에게 문의했다. 즉, 해군성도 비스마르크가 북동쪽으로 갈 가능성을 검토한 것인지 물어본 것이었는데, 해군성으로부터 별 답변을 듣지 못했다.

토비 제독은 저녁 즈음에 항해 장교인 프랭크 로이드 대령(Captain Frank Lloyd)에게 아침에 받은 해군성의 비스마르크 위도 경도 정보를 다시 한번 계산해달라고 요청했고, 몇분 후에 남동쪽으로 계산했어야 했으나 실수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토비 제독 역시 왜 해군성이 자신의 실수를 정정하려 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했다. 제독은 처칠과 더들리 파운드에게도 돌직구로 직언하는 강직한 성격이었는데, 그것이 반대로 독이 되어서 부하들이 눈치를 본 것이었다.

16시 20분이 되자, 로드니는 남동쪽으로 가는 것을 멈추고, 해군성의 명령을 따르기로 하면서 북동쪽으로 침로를 잡는다.

18시 5분에 KGV에서는 해군성이 로드니에게 북동쪽으로 가라는 (토비 제독의) 지시를 취소하는 명령을 듣는다. 토비 제독도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확신하고, 18시 1분에 함대를 반전해서 다시 남동쪽(117)으로 24노트로 순항하라는 지시를 한다. 그때 비스마르크와 영국 본토함대의 거리는 약 160km였다.

19시 24분에, 영국 해군성은 정보망을 통해서 최종 확인한 정보를 해역의 모든 함선에게 전달한다.
Information received graded A1 that intention of Bismarck is to make for the west coast of France.
A1급 첩보 확인. 비스마르크의 의도는 프랑스 서부 해안가로 향하는 것이다.

정작 로드니는 18시 5분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21시까지 북동쪽으로 수색을 지속한다. 그리고 나서 별 성과가 없자, 명령에 따라 남동쪽으로 침로를 바꾸기로 한다. 이제 로드니도 브레스트로 직행하는 침로를 잡고 있었다. 다만 북동쪽의 침로를 지속한 것은 마냥 불복종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로드니는 토비 제독의 함대와 합류할 때까지 이들 구축함의 호위를 받을 수 있었다.[38]

5월 26일 새벽 1시 59분, 해군성은 주력함들을 호위하던 구축함들의 연료가 고갈되자, 제 4 구축함 전대(The Fourth Destroyer Division) 등등에 지시해서 전함 호위 역할을 교대하도록 지시했다. 4전대의 코사크(Cossack), 마오리(Maori), 줄루(Zulu), 시크(Sikh)와 폴란드의 구축함 ORP Piorun은 480킬로미터 거리에 있었지만, 즉시 코비 제독의 함대 혹은 H 함대와 함류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한다.

또한 영국 해군성에서는 아침이 밝자마자 항공 정찰을 재개하기 위해 스케줄을 조율했다. 미 해군은 서경 30도를 경계로 감시망을 펼쳤고, H 함대의 항공 모함 아크 로얄에서 소드피시를 출격시켜서,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서 영국쪽으로 있는 비스케이 만(Bay of Biscay) 안쪽의 항공 정찰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대의 PBY 카탈리나를 내보내서 프랑스 서부 해안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훝는 정찰 비행을 준비했으며, 이는 비스케이 만의 켈트해쪽 외곽 방면을 훝는 동시에 비스마르크가 브레스트나 생 나제르로 향할 가능성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새벽 4시 30분에 비스마르크의 함교에서는 함내 방송을 내보냈고, 함선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우리는 아일랜드에서 생 나제르까지의 여정 중에서 3/4를 지나쳤다. 정오 쯤에 유보트의 세력권으로 진입한다. 좀 더 들어가면 독일 공군의 보호도 받는다. 12시가 지나면 콘도르 비행기( Fw 200)가 우리 상공에 나타날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21노트의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4.4.8. 발각

5월 26일 새벽 3시 45분, Dennis Briggs가 조종하는 PBY 카탈리나, 코드네임 Z가 북아일랜드 Loch Erne의 육상 기지에서 이륙한뒤, 아일랜드 서쪽 해안가에서 남서쪽으로 직진하며 500피드 상공에서 수색을 시작했다. 해가 뜨자 미 해군 소위 J. E. Johnson가 조종하는 코드네임 M이 Z가 비행한 곳에서 더 북쪽의 영역을 2차로 훝기 시작했다. Z는 9시 45분이 되자 예정된 수색을 모두 마쳤으나 이후로는 반전해서 동일한 코스를 계속해서 정찰하기 시작했다.

8시 35분에는 아크로열에서도 정찰을 위해 페어리 소드피시 2대를 발진시켰다.

10시 쯤에 PBY 카탈리나 Z의 브릭스는 휴식을 위해서 좌석을 뒤로 눕혔고, 미 해군 소속 부조종사 Leonard B. 'Tuck' Smith가 조종간을 잡았다. 10시 10분에 스미스는 왼쪽 8마일쯤 거리에서 무언가를 간신히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했고, 브릭스를 깨웠다. 브릭스는 좌석을 제까닥 일으켰고, 비스마르크를 발견했다. 비스마르크의 견시도 비행정을 발견하고 즉각 대공 사격을 해왔다. 비행정은 대공 사격에 쫒겨서 도망쳐야했고, 험한 날씨 때문에 비스마르크를 놓쳤다.

10시 25분에, 서부 해역 사령부에서는 뤼첸스 제독에게 해변 근처가 아니면 비스케이 만에서의 항공 지원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바람이 시속 40~50마일로 불고 있었고, 비가 많이 내려서 시야도 6~8마일로 제약된 상태였다.

10시 26분 경에, 브릭스는 비스마르크의 발견 사실을 보고했다.
One battleship bearing 240° five miles, course 150°, my position 49° 33’ north, 21° 47’ west. Time of origin, 1030/26
방위 240에서 전함 1척 발견. 5마일 거리, 침로 150도, 발견 위치 북위 49도 33분, 서경 21도 47분. 발신 시각 26일 10시 30분.

카탈리나 M이 Z에게 합류했고, 아크로열에서 내보냈던 페어리 소드피시 2대도 카탈리나가 있는 위치로 향했다.

11시 14분이 되자 페어리 소드피시 1대가 비스마르크 주변 상공에 나타났고, 비스마르크를 육안으로 확인한다. 뤼첸스는 아군의 항공 지원은 기상 때문에 불가한데, 영국 해군기가 머리 위에 나타났다는 것에 노발대발하면서 서부 해역 사령부에 적 항공기 발견 보고를 올린다.

11시 21분에는 나머지 한 대의 페어리 소드피시도 나타나서 비스마르크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이들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장거리 비행용 대형 연료 탱크를 장비한 2대의 페어리 소드피시가 아크 로열에서 발진한다.

영국 해군은 31시간이 지나서야 비스마르크와 다시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토비 제독의 함대는 비스마르크로부터 북쪽 135마일(217킬로미터) 거리에 있었고, 로드니는 북쪽 125마일(201킬로미터) 거리에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항해하는 것을 멈추기 전에는,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4.4.9. H 함대 본대의 비스마르크 공격

5월 26일 오후 12시, H함대는 너무 빨리 이동해서 비스마르크의 침로를 지나쳐서 북쪽으로 순항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현으로 크게 선회해서 비스마르크의 예상 진행 경로와 평행으로 남동쪽 침로를 잡는다.

13시 26분, H 함대의 서머빌 제독은 Charles Larcom 대령이 지휘하는 셰필드를 함대에서 분리시켜서 남쪽 176㎞ 거리에 있는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의사 소통에 실수가 생겨서, 아크 로열의 항공대에는 이 사실이 공유되지 않았다.

14시 50분, 항공모함 아크 로열에서 15대의 페어리 소드 피시가 스튜어트-무어 중령(Lieutenant-Commander J. A. Stewart-Moore)의 지휘 하에 52마일 떨어진 거리의 비스마르크를 공습하기 위해 발진한다.

15시 20분에는, 로드니와의 합류를 위해 21노트로 속도를 줄인 토비 제독의 함대에 넬슨급 전함 로드니가 합류했다. 제독은 아크 로열의 공습에 올인한 상태였고, 여기서 소드 피시가 발목을 잡지 못하면 KGV가 아무리 내달려도 어차피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럴 상황이라면 그냥 로드니와 합류해서 로드니에게 대잠 초계를 제공하고, 소드피시의 활약으로 비스마르크가 멈추길 비는게 더 나았다. 로드니를 호위하는 구축함들은 전부 연료가 부족한 상태였고, 토비 제독은 3척의 구축함 모두에게 재급유를 받으러 복귀하라고 지시한다.

15시 50분, 소드피시가 우측 20마일 거리에서 출현한 배를 발견했다. 출격 전의 브리핑에서 영국 함선이 있다는 정보를 받지 못했기에, 스튜어트-무어 소령은 해당 함선에 대한 공습을 준비한다. 그때 동승한 헌터 소위(Lieutenant H. de G. Hunter)가 해당 함선이 셰필드라고 소리를 질렀다. 셰필드는 연돌이 2개인 경순양함이어서, 비스마르크와는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드피시에는 무전기가 없었고, 스튜어트-무어 소령은 뇌격을 중단하면서 날개를 흔들었지만, 다른 소드피시들은 전달받지 못한채 뇌격을 개시해버렸다.

셰필드의 대공포대는 소드피시가 아군 항공기인 것을 알았기에 대공포화를 뿌리지 못했고,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어뢰를 보면서 그저 멘붕하고 있을 뿐이었다. 함교에 머무르던 함장 Charles A. Larcom 대령은 조타수와 함께 어뢰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총 11발의 어뢰가 투하되었는데, 2발은 투하되자마자 폭발했고, 3발은 셰필드가 일으키는 파도에 격발되어서 폭발했다. 나머지 6발은 셰필드가 전부 피했다. 영국의 자기기폭뇌관 항공어뢰의 뇌관인 Duplex Coil Rod (DCR)은 신뢰성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39] 다행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덕분에 5발은 회피기동 없이도 피할 수 있었다.

17시 20분에 소드 피시 편대가 모함 아크 로열로 복귀한다. 셰필드의 보고를 전달받은 아크 로열의 무장사들은 2번째 공습을 위해 항공어뢰의 뇌관을 자기 기폭식에서 직접 접촉식으로 또 다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후 토비 제독의 보고서에서는 H함대의 아크 로열에게서 다음과 같이 보고받았다고 이야기했다.
I was told only no hits were scored on Bismarck.
비스마르크에게 명중하지 못했다고만 전달받았다.

셰필드의 승조원들은 그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The reaction of Sheffield's crew has not made its way into the official records[40]
셰필드 승조원들의 대응도 공식 기록에 명중하지 못했구 말이죠.

다만, 스튜어트-무어 소령은 오폭 직후에 수신호로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17시 40분에 비스마르크는 셰필드의 존재를 눈치챈다. 하지만 반전해서 돌격할만한 시간도 연료도 없었다.

19시 3분에 뤼첸스는 서부 해역 사령부에 연료가 부족하다는 보고를 올리고, 언제쯤 보급이 가능할지 질문한다.

19시 15분에 아크 로열에서 T. P. Coode 중령이 이끄는 두번째 소드피시 편대가 발진한다. 1차 공격대와 항공기는 동일했지만 파일럿의 인원 변동이 다소 있었다. 편대는 셰필드의 위치를 기준점(a reference point)으로 결정하고, 셰필드 상공에 집결하기로 했다.

19시 48분에 H 함대는 제 4 구축함 전대와 합류하기 위해 비스마르크의 침로 쪽으로 좀 더 다가간 상태였는데, 이 랑데뷰 포인트에서 진을 치고 있던 U-556이 호위할 구축함이 잠시 없는 동안의 리나운과 아크 로열을 어뢰 사거리 안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HX-126 호송 선단을 사냥하는데 어뢰를 전부 써버렸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격침을 구경만 해야 했다. 함장 Herbert Wohlfahrt 대령은 H 함대 본대의 위치를 폭로하고 침로와 좌표, 속도를 계속해서 보고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19시 55분에, 소드피시 편대가 셰필드 상공에 집결한 뒤, 셰필드의 인도에 따라 전방 약 19㎞ 가량에 위치한 비스마르크를 향해 돌격했다. 해가 지고 있었기에, 이번 뇌격이 영국 해군의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당시 상공에 불고있던 엄청난 바람으로 속도가 느렸던 소드피시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밀려나버려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집결지로 돌아왔다. 다시 순양함 셰필드 상공에 집결한 소드피시 뇌격기들은 비스마르크를 찾아서 떠났으며, 이번에는 제대로 날아간 뒤 초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비스마르크에 뇌격을 가했다.

슈나이더 소령은 빅토리어스의 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주포와 양용포를 해상에 사격하도록 지시하고, 대공포들은 대공포화를 쏟아부었다. 주포와 양용포의 해수면 사격은 소드피시의 뇌격을 방해하고, 운이 좋다면 투하된 어뢰에 직격해서 제거할 수 있을 터였다. 비스마르크의 대공포에 피격된 소드피시들이 있긴 하였으나, 단 1대도 격추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소드피시의 항공 어뢰들이 비스마르크에 명중했다.

어뢰의 명중 위치는 증언이 엇갈려서 확실하진 않다. 1~2발이 좌현 중앙 7번 구획에 직격했다. 그리고 나서는 우현 후미 혹은 좌현 쪽의 키에 명중했다. 좌현 키에 명중했다는 의견이 영미권의 다수설이며, 후미에 맞았다는 것은 뤼첸스 제독의 보고에 기반한 독일 쪽의 의견이다.

좌현 중앙에 명중한 항공 어뢰의 피해는 작약의 크기 문제로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다. 보수반원들이 부서진 격실벽과 파이프를 폐쇄하면서 데미지 컨트롤을 완료했다.
파일:no21993-pic2.jpg
<rowcolor=white> 피터슨 중위의 뇌격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항공어뢰의 피격 위치[41]
그러나 뒤에 맞은 어뢰는 그렇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함미에 맞은 어뢰는 원래 약한 항공어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하필이면 교체하기 직전 상태라 항구에 새 키가 대기할 정도로 낡은 키분명 1937년에 진수해서 4년밖에 안됐는데가 어뢰를 회피할 목적으로 크게 꺾인 상황에서 명중한게 문제였다. 회피기동을 하던 비스마르크의 키에 이 어뢰가 명중하면서 두 키가 좌현 12도로 꺾인 상태로 고정되어 버린다. 배의 속도가 13노트로 확 줄어버렸고, 반시계 방향으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키를 움직이는 기어가 있는 스티어링 기어 룸과 주변 격실이 침수되어 버렸고, 우현의 엔진 룸이 폐쇄되면서 비스마르크의 전력 공급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우현 대공포와 부포의 승조원들이 달려들어서 우현 후미의 침수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우현 후미가 완전히 침수된 상태에서, 키를 풀기 위해 침수된 스티어링 기어룸으로 진입해서 기어를 빼서 방향타와 키의 연결을 해제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기어룸으로 향하는 상부 해치를 열 때마다 바닷물이 밀려나왔고, 심지어는 보수반원들이 빨려들어갈뻔한 사고까지 벌어지면서 결국 실패한다.

21시 5분이 되자, 멘붕한 뤼첸스가 서부 해역 사령부에 보고를 올린다. '후미에 어뢰 맞음'.

21시 15분에 뒤이은 보고가 이어진다. '배를 더 이상 조작할 수 없음'.

4.4.10. 표류하는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이제 시속 40~50마일로 부는 남동풍에 떠밀려서 북서쪽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린데만 함장은 3개의 스크류를 이용해서 배를 조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뤼첸스 제독이 함내 탄약고에서 폭약을 빼와 키를 폭파시켜서 분리하는 방안을 고민했으나, 스크류도 손상될 것이어서 기각되었다. 항공기 격납고 도어를 떼어내서 우현 15도 방향에 12도로 용접해서 고정된 키와 마주보도록 설치하는 제안도 나왔다. 바다가 너무 거칠었기 때문에, 이 제안도 기각되었다. 이 제안을 무리해서라도 실행하기 위해 잠수부들이 내려와서 우현 방향타를 아예 분리하는 작업도 시도했지만, 커플링이 너무 심하게 손상돼서 우현 방향타를 수작업으로 분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편, 아크 로열은 셰필드가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비스마르크 상공에 2대의 페어리 소드피시를 남겨둔 상태였다. 그런데 그 중 1대로부터 비스마르크의 침로가 동쪽(90도)라는 보고를 받는데, 아크 로열의 함장은 비스마르크가 뇌격을 회피하기 위해 선회했기 때문에 해당 침로를 잡고 있었을 것이고 곧 동남쪽(120도)로 진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21시 22분, 소드피시로부터 아크 로열에 또다른 무선 메시지가 전달된다. '적 침로 000도(Enemy course 000°)' 함장은 또 다시 이 메시지를 무시했다. 비스마르크가 뭐가 아쉬워서 북쪽으로 가겠는가? 그런데 6분 후에 또다른 메시지가 전달된다. '적 함선이 좌현으로 변침 중(Enemy changed course to port.)'. 2분이 지나자, 아크 로열의 함장에게 다른 메시지가 전달된다. '적 침로 340도(Enemy course 340°)' 비스마르크는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뒤이어서 보고가 들어왔다. '적 함선에서 연기가 난다.(Enemy laying smoke.)'

5분 후인 21시 35분에 소드피시로부터 추가적인 보고가 들어왔다. '적 침로 330도(Enemy course 330°)'

그로부터 1분 후인 21시 36분에는 셰필드가 소드피시에서 들어온 보고를 육안으로 교차 검증해서 재확인한다. 셰필드는 비스마르크가 340도로 변침하는 것을 마찬가지로 확인하였으며, 그후 4분 동안 좌현으로 선회하면서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크 로열의 Maund 함장은 비스마르크가 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확신했다.

21시 40분이 되자, 최고 사령부로부터 뤼첸스가 21시 15분에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신이 온다.
우리 모두는 그대와 그대의 함선만을 생각하고 있소. 절망적인 투쟁에서 성공하길 비오.
- 에리히 레더 해군 원수
우리는 우리의 승리자 동무들(victorious comrades)만을 생각하며 행운을 빌고 있소.
- 서부해역사령관 알프레트 잘베히터 제독
우리는 여러분을 떠올릴 때마다, 충성과 긍지라는 단어를 함께 생각합니다.
- 북부해역사령부관 롤프 칼스(Rolf Carls) 제독

독일 해군 수뇌부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5월 26일 21시 42분이 되자, H함대의 공습 결과 보고를 받은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와 마주치는 정남향(180도)로 함대의 침로를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4시간 후면 KGV가 로드니와 함께 비스마르크가 발이 묶인 해역에 도달할 것이었다.

함께 하던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 순양전함 리펄스,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중순양함 서포크는 모두 연료 부족으로 재급유 받기 위해 회항한 상태였다. 제독은 실전에서 신형 함선들인 KGV급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빅토리어스가 아직 미완성인 것을 확인했으므로, 이미 훈련을 오래 했던 함선과 함께 하길 원했다. 그래서 KGV가 로드니에 맞춰 항해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순양전함 후드의 격침도 겪었던 탓에, 제독은 순양전함 리나운을 아크 로열과 함께 비스마르크 북서쪽에서 머무르도록 조치했다. 그래봐야 비스마르크와의 거리는 50마일(92킬로미터) 정도였고, 일이 꼬일때 불러낸다면 1시간 반이면 리나운이 비스마르크와 교전하기 위해 재전개할 수 있는 거리였다. 영국 해군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U-556의 함장은 리나운과 아크 로열만 보고 그 둘이 전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와 독일 서부 해역 사령부는 예고없이 영국 전함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4.4.11. 제 4구축함 전대의 비스마르크 공격

21시 45분이 되자, 셰필드가 9마일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비스마르크의 주포 일제 사격을 받았다. 2번째 사격부터 협차로 떨어졌다. 이후 8번째 사격까지 이어졌지만, 직격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1명이 파편에 맞아서 사망했고, 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부상자 중에서 2명은 결국 사망했다. 레이더도 마스트로 날라든 파편에 맞아서 고장났고, 파편 때문에 수면 위 선체에 40여개의 파공이 생겼다. 셰필드는 반전해서 연막을 치고 숨었지만 비스마르크를 추격할 수 없게 되었다.

22시 경에 셰필드는 제 4 구축함 전대와 합류했고, 구축함 전대는 비스마르크 감시 임무를 인계받는다.

22시 5분에는 비스마르크를 타격한 2번째 소드피시 편대가 아크 로열로 복귀했다.

22시 38분, 비스마르크를 향해 최대 속도로 순항하던 제 4 구축함 전대가 약 1시간 만에 비스마르크와의 접촉을 복원했다.[42] 폴란드의 구축함 ORP Piorun[43]이 처음으로 비스마르크를 다시 확인한 배였다. 구축함대는 일렬로 펼쳐친 횡대로 좌우로 나란히 늘어서서 북서쪽에서부터 비스마르크 방향으로 다가갔다. 좌측 부터 줄루, 시크, 기함 코사크, 마오리, Piorun 순서였다.

22시 42분이 되자, 비스마르크의 부포가 구축함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비스마르크는 선회 도중에 동쪽에서 비스듬하게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100도)에 선수를 두고 있었고, 현측 전개가 가능한 Piorun과 마오리가 주 목표가 되었다. Piorun의 갑판에 무수한 파편이 쏟아졌지만, 폴란드 구축함은 연막을 치고 4.7인치 주포로 독일 전함에게 반격했다.[44] 구축함 마오리가 비스마르크에게 다음 공격을 받았고, 비스마르크가 기동을 시작하면서 반시계로 돌기 시작하자 23시 30분 즈음에는 기함 코사크도 마오리와 함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마오리와는 달리 코사크는 손상을 입지 않았다. 공격받지 않은 시크는 회피 기동 중인 코사크, 마오리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줄루의 뒤쪽을 통해서 비스마르크에게 멀어지는 방향으로 기동한게 전부였고, 그냥 직진만 한 줄루도 마찬가지였다.

구축함 전대는 연막을 피운 피오룬을 제외한 4척이 계속해서 남하했고, 이후 동쪽으로 침로를 바꾸면서 자정 즈음에 공전(?)을 멈추고 북북서쪽(330도) 쪽으로 선수를 향한 채 떠내려가기 시작한 비스마르크 남쪽 10마일 거리 해상에서 재집결한다. 그러고는 비스마르크의 후미를 노리고 북상한다.

23시 6분, 토비 제독은 새벽에 비스마르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비스마르크가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실루엣을 드러내도록, KGV와 로드니를 비스마르크의 서쪽으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한다.

23시 35분에는 비스마르크 위를 떠돌던 소드 피시들도 귀환해서 아크 로열에 착함했다. 파일럿들은 비스마르크가 2번 원을 그리며 돌았다고 보고했고, 그제서야 영국 해군 제독들도 끝나지 않는 불운 끝에 자신들에게 비로소 다가온 행운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정쯤에는 륀체스 제독이 비스마르크의 키 복구를 포기하고, 승조원들에게 키를 복구하라는 지시를 철회한 다음, 배의 복구를 알아서 도우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나서 서부 해역 사령부에 '배의 무장과 기계 장치들은 완전하지만, 조향할 수 없다.'는 보고를 보냈다.

구축함 전대장 필립 비언(Philip Vian) 준장은 원래 비스마르크를 감시만 할 생각이었지만, 씐나게 독일 전함의 부포 세례를 받고 나서 비스마르크의 후미에 자리잡은 다음에는, 21인치 어뢰로 공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45] 기함 코사크가 앞장서서 비스마르크의 북동쪽을 크게 돌아서 기동했고, 줄루, 시크, 마오리 순으로 그 뒤를 따라 비스마르크의 남서쪽에서 접근했다. 이후 4척의 구축함들은 각개전투로 비스마르크를 습격하기 시작한다.

27일 새벽 1시 즈음, 비스마르크는 구축함들의 도전을 즉시 알아차렸고, 슈나이더 소령은 15cm 부포로 구축함들에게 반격했다. 기함 코사크가 비스마르크의 부포에 협차당했고, 마스트의 전자 시스템(Aerials)[46]이 파편에 맞아 완전히 파괴당했다. 비언 제독은 공격을 취소하고, 코사크는 좌현으로 선회하며 비스마르크가 떠내려가는 방향과 반대로 남동쪽 침로를 잡는다.

줄루는 1시 21분까지 비스마르크의 좌현에서 독일 전함과 나란히 기동하며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코사크를 쫒아내고 나서는 주포 일제 사격으로 줄루에게 공격했고, 첫번째 주포 일제 사격이 협차되면서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쯤 비스마르크에게 줄루로부터 4발의 어뢰 공격이 쇄도했으나 전부 빗나갔다. 줄루는 20분 가량 비스마르크를 공격하며 비스마르크 좌현의 부포와 대공포의 포탄들 사이에서 곡예을 벌이고 있었지만, 뜨거운 주포 일제 사격의 협차 맛을 한번 맛보고는 결국 퇴각해야 했다. 줄루는 이후 비스마르크 좌현에서 시계 방향으로 크게 선회하며 재접근하면서 또다른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 4전대가 공격을 포기하고 비스마르크 북쪽 해상으로 물러날때 서쪽으로 반전해서 물러난뒤 함께 철수한다.

비언 제독이 이 첫 시도에서 비스마르크에 준 피해가 0이라는 결과는 토비 제독에게도 전달되었는데, 토비 제독은 오히려 거기에 영감을 받아서, 구축함들의 도움을 통해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완전히 확정하려고 했다. 위치를 알고 서쪽으로 미리 기동하면, 기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비언 제독에게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다.

구축함 마오리는 두 구축함들에게 무자비하게 반격하는 비스마르크를 보고는, 북서쪽에서 크게 돌아 북동쪽으로 직진하면서 떠내려가는 비스마르크의 침로(?) 앞을 가로막는 자리로 전개한 상태였다. 이 위치에서는 최소한 현측 전개를 당할 위험은 없었다.

기함 코사크는 마스트가 파괴될때 좌현으로 반전해서 도망치는 척 하다가 그대로 계속해서 좌현으로 선회해 다시 비스마르크의 우현에서 평행선을 그리는 북서쪽 침로를 잡고 있었다.

구축함 코사크와 마오리는 토비 제독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 각각 비스마르크의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백색 알루미늄 분말이 담긴 예광탄을 쏴갈겨서 비스마르크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1시 40분 경에 코사크는 좌현으로 다시 변침해 비스마르크에 돌격하며 예광탄을 쏴갈기면서 비스마르크의 우현을 향해 3발의 어뢰를 사출하고는, 좌현 변침을 지속하면서 원을 한바퀴 그린뒤 다시 북쪽으로 도망간다. 같은 시간, 마오리는 비스마르크의 침로와 교차될 예정인 장소에서 주포로 예광탄을 3,200야드(2,926미터) 거리에서 난사하며 우현으로 비스마르크의 선수부를 향해 2발의 어뢰를 사출했다. 어뢰는 모두 빗나갔고, 마오리는 살아남기 위해 급가속해 도망가서 코사크가 있는 북동쪽으로 합류한다.

구축함 시크는 최초의 돌격시 비스마르크 후미로 돌격하려다가 포기하고 좌현으로 변침해 남남서쪽으로 멀어졌던 상태였다. 이후 비스마르크가 북동쪽의 두 구축함에게 잠시 정신을 팔린 틈을 타서, 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며 접근해 2시 10~20분 경에 비스마르크를 향해 돌격한뒤, 비스마르크의 좌현에 4발의 마지막 어뢰 공격을 했으나 또 실패한다. 시크는 즉시 반전해서 다시 남서쪽으로 잠시 내려가다가 비스마르크의 침로와 평행선을 만드는 북서쪽 침로를 잡았지만, 그대로 4전대가 퇴각할때 함께 이탈한다.

코사크와 마오리는 2시 30분에 한번 더 좌현으로 변침하며 비스마르크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코사크는 이날 밤 내내 그렇듯이 좌현 변침을 유지하면서 빙글 돌아 북쪽으로 물러난 뒤에 새벽 3시 즈음에 비스마르크와 멀리서 충돌하는 서쪽으로 향하는 침로를 잡았고,[47] 마오리도 좌현 변침을 유지하며 동쪽으로 가려는 척 하다가 우현으로 급선회하면서 새벽 3시 경에 비스마르크에게 들이박는 침로를 다시 한번 잡는다.

결과적으로 비스마르크의 사격은 구축함대의 사령관과 함장들이 예상한 이상으로 엄청나게 정확하게 날아들었고, 구축함들은 된통 데였다. 하지만 비언 제독과 구축함들은 새벽 3시가 되어서까지 도전을 반복했고, 그제서야 구축함들만 가지고는 비스마르크를 어찌해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구축함들도 평범한 배들은 아니었던 것이, 이 추격전을 통틀어서 전대 전체에서 사망자 및 부상으로 인한 이후의 사망자는 모두 합쳐 겨우 3명이 나왔다.

결국 포기한 비언 제독은 무선으로 비스마르크의 좌표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비스마르크의 부포 사격으로 전자 기기가 모인 마스트가 완파되었고, 다른 구축함들과 거리가 있었던 탓에 제대로 무선을 보내지 못했다.

제 4 구축함 전대는 비스마르크 북쪽 해상으로 물러나서 비스마르크를 감시하는데 만족하기로 한다. 통신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언 제독의 기함 코사크가 북쪽으로 물러나는 것을 본 다른 구축함의 함장들도 제독의 성격을 감안해서 그냥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북쪽으로 물러난다.

토비 제독도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8시 30분에 완전히 동이 틀때까지 대기하기로 한다. 순양함 노포크는 KGV와 로드니가 비스마르크에 접근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서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비언 제독의 구축함대에게 시달리다가 자포자기한 뤼첸스 제독과 비스마르크의 승조원 들은 최후를 준비했다.

승조원들이 유가족들에게 전할 편지와 장교들이 작성한 비스마르크의 항해 일지가 탑재된 공군[48] Ar 196 수상기를 프랑스로 내보내려 했으나, 날씨가 너무 나빠서 이륙할 수 없었다. 수상기는 연료를 가득 채워둔 상태여서 피격되면 불이 붙을 것이었으므로, 뤼첸스는 편지를 실은 수상기를 바다에 버리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잠수함을 통해 항해일지만이라도 회수해달라고 사령부에 요청한다.독쟁이답다; 이들 공군 파견대 인원들은 최후의 전투의 와중에 정비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했다.

그리고 나서 새벽 2시 58분에 뤼첸스 제독은 본국으로 "우리는 끝까지 싸우겠다. 총통 각하 만세!"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슈나이더 소령이 후드를 격침하는 공을 세웠다면서 기사십자 철십자장 서훈을 상신했다.

히틀러는 잠들어 있었기에 그의 전속부관들 중 하나인 니콜라우스 폰 벨로브(Nicolaus von Below) 공군 대령이 대신 답장을 보냈다. 뤼첸스에게는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보냈고,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에게는 '온 독일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답신을 보냈다. 승조원들은 이 메시지를 돌려보았다.

구축함들이 떠나자, 대부분의 승조원들이 구축함에게 시달린 끝에 피로에 찌들었던 탓에 전투배치 장소에서 그대로 잠에 들었다. 지난 5일간 낮밤 없이 싸운 탓에 다들 지쳐있었다.

3시 51분에, 에리히 레더 원수는 히틀러로부터 슈나이더 소령의 기사십자 철십자상 서훈 승인을 받았다고 답변을 보냈다. 또한 2대의 Fw 200이 3시 30분에 발진했으며, 51대의 폭격기가 새벽 5시 20분에서 6시 45분 사이에 비스마르크 상공에 도달해서 지원할 것이라고 위로했다.[49]

아침 5시가 되자, ORP 피오룬은 연료가 부족해졌고, 비언 제독이 급유를 위해 회항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함장 플라우스키(Plawski) 소령은 배의 어뢰를 쏘지 못했다고 거부하다가, 결국 1시간 후에 영국으로 회항한다.

새벽 6시 11분, 중순양함 도셋셔가 도착했고, 제4 구축함 전대의 기함 코사크와 합류한다.

6시 30분, U-556은 비스마르크와 영국 함대에 대한 정보를 마지막으로 발신했다. 연료도 부족했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U-556은 칼 되니츠 제독으로부터 뤼첸스가 요청한 비스마르크의 항해 일지를 회수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으나, 연료 부족으로 실패했다.

그 대신 U-556의 함장은 U-74의 함장 아이텔-프리드리히 켄트라트(Eitel-Friedrich Kentrat) 대위에게도 관련 정보를 제공하였고, 연료와 어뢰가 남아있었던 U-74이 비스마르크가 있는 해역으로 이동하지만, 기상이 나빠서 비스마르크를 육안으로 확인하는데는 실패한다.

아침 7시가 되자, 구축함 마오리가 남은 어뢰 2발을 가지고 비스마르크에게 다시 뇌격을 했고, 비스마르크로부터 무시무시한 보복 사격을 받았다. 그리고 비언 제독의 기함인 코사크가 마지막으로 남은 어뢰 1발을 마저 쐈다. 결과적으로 비스마르크 한 척에게 구축함 4척이 보유한 도합 16발의 어뢰를 전부 때려박았는데, 결국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린데만 대령은 승조원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밤부터 아침까지 이어진 교전을 통해 구축함 1척이 격침되고 2척이 대파되었다고 거짓 정보를 공유했다.

비언 제독은 이후에 27일 새벽 내내 보여준 용감함을 인정받아서,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에 이어서 2번째 공로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을 수여받는다. 이후 HMS 코사크가 격침될 때는 이미 소장이 되어서 알렉산드리아 주둔함대의 순양함대 사령관을 하고 있었다. 이후 1944년 1월에 영국 태평양 함대가 재건되었을대 함대의 항공모함과 항공작전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고, 포미더블을 기함으로 삼아 활동하면서 USS 새러토가를 지휘 하에 두기도 했다. 이후 1945년 5월 8일에 중장이 된다. 이후 제 5해군경이 되었고, 1948년 11월에 대장이 된 뒤, 뱅가드를 위시한 전함 함대의 사령관으로 재직하다가 1952년 6월 1일에 제 1해군경이 되지 못한 대신 해군 원수로 영전하고, 은퇴한다. 이후 1968년에 사망했다.

아침 7시 26분, U-74가 영국 순양함과 구축함들에게 발각되어서 폭뢰 세례를 받았다. 이후 9시 22분에 간신히 재부상했을 때는 해역에 아무 배도 없었다. 함장은 로리앙의 U보트 사령부로부터 비스마르크의 KTB(Kriegstagebuch; 항해일지)를 회수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함장은 '비스마르크의 항해 일지 회수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이라는 답장을 했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었다.

4.5. 독일 해군의 유보트 배치

독일 해군 서부 해역 사령부에서는 비스마르크가 대서양 항구 중 한 곳으로 대피하는 데 대비해 유보트로 초계선을 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고, 연료가 부족한 구축함과 순양함들이 급유를 위해 이탈하면서 대잠방어가 취약했던 영국 해군은 대형 군함들이 잠수함에 농락당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잘베히터 제독과 되니츠 제독의 지시로 초계선을 전개한 유보트 다섯 척은 만일의 경우 비스마르크를 지원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상태였다. 로베르트 가이제 대위가 지휘하는 U-98은 어뢰가 한 발도 없었고 아이텔프리드리히 켄트라트 대위의 U-74는 영국 해군 구축함의 폭뢰 세례를 받아 제 속력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제 시간에 비스마르크의 전투 해역에 도착하여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유보트는 U-556이었으나, 이 배 역시도 어뢰 발사관이 텅 빈 상태였다. U-556의 함장 헤르베르트 볼파르트 대위는 비스마르크의 교전을 지켜보면서[50] 어뢰를 보유한 유보트를 현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애썼으나, 오직 기동불능 상태에 가까웠던 U-74만이 간신히 접근했을 뿐이었다.

U-보트 비밀일기[51]에 따르면, Type-9B급 U-보트 U-109가 초계에서 돌아오던 도중 기관의 상태도 좋지 못하고 잠항도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함장 피셔 대위의 독단[52]에 무리해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고 나와있다. U-109는 초계 내내 단 두발의 어뢰만을 발사했기 때문에 어뢰는 충분했지만, 기관장의 실수로 잠항심도 신기록을 깰 정도로 깊이 잠수했다가 선체와 엔진이 큰 피해를 입어 결국 큰 도움이 못됐다.

4.6. 비스마르크의 최후

비스마르크의 최후
Last battle of the battleship Bismarck
독일어 : Letztes Gefecht des Schlachtschiffes Bismarck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일부
1941년 5월 26일 ~ 1941년 5월 27일
장소
북대서양
교전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지휘관
-함대사령관
파일:영국 국기.svg 존 토비
-로드니 함장
파일:영국 국기.svg 프레더릭 달림플해밀턴
-함대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귄터 뤼첸스
-비스마르크 함장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에른스트 린데만
병력 항공모함 1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7척
전함 1척
피해 규모 전함 1척 손상
경순양함 1척 손상
5명 사상
전함 1척 침몰[53]
2,200여 명 전사
111명 포로[54]
결과
영국 해군의 승리
비스마르크 침몰
영향
독일 해군의 수상함 통상파괴전 위축

4.6.1. 교전 시작

5월 27일 8시 8분, KGV가 14마일 전방의 노포크와 무선으로 접촉했다. 웨이크-워커 제독의 기함 노포크에서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전달했다.'적 전함 방위 130(동남쪽), 16마일 거리'

8시 33분, KGV와 로드니가 침로를 110도로 바꾸고 로드니의 전투 기동 속도인 19노트로 순항을 시작한다. 영국 해군의 일기예보가 전달되었고, 바람은 북서풍에 34-40노트, 파도는 높을 예정이었다.

8시 43분, 로드니와 함께 동쪽으로 비스마르크를 향해 달려가던 KGV의 견시가 25,150야드(23킬로미터) 거리에서 비스마르크를 확인한다.
파일:비스마르크 격침당일 영국군 첫 포탄 착수.jpg
<rowcolor=white> 전함 로드니가 쏜 초탄 착탄장면. 이날 전투의 첫 포탄이다.
8시 47분이 되자, 로드니의 전방 16인치 함포 3개 중에서 앞의 2개가 21,870야드(20킬로미터) 거리에서 비스마르크에게 첫 일제 사격을 열었다. KGV도 그 뒤를 이었다. 첫 일제사격은 8시 48분이 되어서야 비스마르크 앞 해상으로 떨어졌다.

비스마르크 역시 8시 49분에 반격을 했다. 그렇게, 2차대전에서 굉장히 보기드문 전함 간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때 후방 포탑을 영국 전함들에게 돌릴 수 없는 각도였기 때문에, 린데만 함장은 좌현 엔진만을 켜서 무리해서 배를 시계방향으로 돌려 북쪽으로 향하게 두었다. 그 결과 양측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면서 2만 야드(18,288미터)까지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서 비스마르크는 선수부를 북쪽에 둔 채로 북북서쪽으로 떠내려간다.

비스마르크는 뒤이어 2번째 현측 일제 사격을 수행했고, 그중 한 발이 로드니의 함교 60피트(18미터) 앞에 떨어져서 덱 전체가 바닷물을 뒤집어 썼다.

넬슨급 전함 로드니는 개장을 받지 못해 노후화가 무척 심한 상태여서 함내에서 누수가 발생했고, 그래서 일부 격실이 이미 폐쇄되거나 땜질한 상태였다. 그래서 바로 직전까지 미국으로 개장 받기 위해 가려다가 불려온 차였다. 그런데, 자신의 첫 일제 사격의 반동으로 로드니 함내의 해수 파이프가 터지고, 덱의 타일이 떨어져나가고, 땜질하려고 걸쳐둔 강철 빔에 금이 가는등 난장판이 되었다. 사방에서 볼트와 리벳이 튕겨져 나가고, 장교 휴게실의 가구가 뒤집히고, 복도의 전구와 화장실의 세라믹 변기가 깨졌다.(...) 그리고 나서 비스마르크의 2번째 일제 사격으로 물기둥을 한번 더 뒤집어 써야 했다.

KGV 역시 프린스 오브 웨일즈처럼 기능 부전에 시달렸다. 4연장 A 포탑(1번)이 30분간 기계적 고장으로 멈춰서 4문 전부가 사용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후방의 4연장 Y 포탑도 마찬가지로 몇분간 기계적 고장이 발생했다. 개별 포에도 고장이 빗발쳤는데, 장전기(shell rammer), 방염문(flash doors ), 양탄기(shell hoist) 등, 고장나는 부위도 다양했다. 일부 부위는 깨져나가거나 부품이 사라졌다. 장약이 불발이 난 포도 있었고, 30분 가량 해당 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8시 54분, 노포크 역시 10마일 거리에서 8인치 주포로 사격을 시작했다. KGV는 비스마르크의 남쪽으로 이동하며 현측 전개를 하고, 이후 반전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며 비스마르크에게 현측 전개를 하기로 한다. 로드니는 비스마르크의 서쪽 방향에서 동쪽으로 직진하면서 전방 포문으로 사격을 계속하기로 했다.

4.6.2. 파괴되는 비스마르크

9시 2분, 로드니의 16인치 주포 일제 사격이 비스마르크의 전방 상부 덱에 직격했다. 상부 구조물에 화염이 치솟았고, 수백명의 승조원이 몰살당했다. 로드니는 직후 우현으로 선회하면서 정남향으로 침로를 잡았고, 다음 사격을 비스마르크의 좌현 중앙에 또 명중시켰다. 함교에 명중탄을 맞은 비스마르크에서는 화염이 치솟았고, 뤼첸스 제독과 참모진이 몰살당하고 함장 린데만 대령이 부상당했다. 비스마르크의 연돌에서는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지휘귄은 부장 한스 욀스(Hans Oels) 중령이 인수했다.

9시 4분, 순양함 도셋셔도 전장에 도착했고, 남서쪽 2만야드(18킬로미터) 거리에서 비스마르크에게 포격을 시작했다.

9시 8분, 비스마르크의 전방 레인지 파인더가 고장났다. 모든 포탑이 후방 레인지 파인더와 사격 지휘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후로 비스마르크는 이 체제 하에서 4번의 일제 사격을 KGV에게 한다.

9시 13분, KGV의 14인치 주포가 비스마르크 후미의 사격 지휘소에 직격했다. 이제 비스마르크의 모든 포탑이 각자 조준해서 발포해야 했다. 같은 시간 로드니가 비스마르크에게 6발의 어뢰를 사출했지만, 뇌격에 성공하지 못했다.
파일:넬슨급 로드니 비스마르크와 교전.jpg
<rowcolor=white> 비스마르크와 교전중인 넬슨급 전함 로드니. 킹 조지 5세급 전함 1번함 킹 조지 5세 갑판 위에서 전투 중간에 촬영.
9시 17분, 로드니는 KGV의 주포 사격각에 걸치는 위치에 오게 되었다. KGV의 사진사가 위의 사진처럼 로드니와 비스마르크를 동시에 찍을 수 있을 정도였다. 로드니는 반전해서 북동쪽으로 가는 침로를 잡고, 비스마르크가 떠내려가는 침로 앞을 가로지르기로 한다. 비슷한 시간, KGV도 반전해서 북쪽으로 다시 침로를 잡고, 우현으로 현측 전개를 하고 비스마르크의 좌현을 포격했다.

9시 21분, 비스마르크의 D포탑(4번)의 우측 포문에서 포탄이 포신 내부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났다. D 포탑이 침묵했다.

9시 27분, 비스마르크의 A, B 포탑이 마지막 사격을 진행하고, 이후로 침묵했다.

9시 31분, 비스마르크의 C 포탑이 마지막 사격을 진행했고, 이후로 침묵했다. 부포들은 이후로도 잠시나마 사격을 계속했으나 9시 40분 즈음에는 전부 침묵했다. 포탑들은 피격당해서 침묵된 것도 있고, 탄약이 고갈된 것도 있었다.

로드니는 비스마르크의 침로(?)를 가로지르며 우현으로 사격한 다음 반전해서 좌현으로 사격하는 식으로 지그재그 기동을 하며, 비스마르크가 떠내려가는 길목 앞에서 2,730야드(2,500미터) ~ 4,370야드(4,000미터) 거리를 유지하며, 3개의 포탑을 모두 이용해 주포 9문 일제 사격을 비스마르크의 선수부에 퍼부었다.
파일:비스마르크의 침묵.webp
<rowcolor=white> 불타오르는 상태로 침묵하는 비스마르크. 도셋셔에서 촬영
9시 56분, 로드니는 침묵한 상태로 떠내려가는 비스마르크를 향해 어뢰 2발을 2,950야드(2,700미터) 거리에서 사출했고, 그중 한발이 비스마르크 좌현에 명중했다. 해전 사상 최초로 전함이 전함을 뇌격한 순간이었다.

10시가 되자, 비스마르크는 떠있는 강철 묘지 내지는 난파선이 된 상태였다.

4.6.3. 비스마르크의 자침 시도와 영국 해군의 뇌격

10시가 조금 지나고 나서, 노포크는 어뢰 4발을 비스마르크에게 사출했다. 그중 한 발이 비스마르크에게 명중한 것으로 추정된다. 노포크의 뇌격 즈음에, 욀스 중령이 배를 버려야한다고 승조원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주기실장 게르하르트 유나크 기관 대위[55]가 거기에 찬동하면서 배수 밸브를 열고 9분 타이머의 폭약을 설치해 자침 준비를 했다. 배를 버린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공황 상태가 되었고, 승조원들은 무질서하게 소그룹으로 뭉쳐서 구명정으로 각자 향하는 '배틀로얄'에 참가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었다.[56]

10시 15분이 되자, 9시 20분에 아크 로열에서 발진한 15대의 페어리 소드피시가 비스마르크 상공에 도달했다. 하지만 로드니와 KGV의 포격이 멈추지 않고 있어서, 뇌격을 위한 저공 비행을 시도할 수 없었고, 위에서 비스마르크를 지켜보기만 했다. KGV의 일부 대공포 사수들이 이들을 독일 항공기로 오인하고 대공포 사격을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10시 16분이 되자 로드니는 사격을 중단했다. 토비 제독이 생각한 것보다 비스마르크의 침몰을 기다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었으며, 결국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비스마르크 근처에 있고 함선에 손상이 없던 도셋셔에게 토비 제독의 뇌격 지시가 떨어졌고, 도셋셔가 2발의 어뢰를 비스마르크 우현 3,280야드(3천미터) 거리에서 사출해 명중시켰다.

10시 20분이 되었는데도 비스마르크는 가라앉는 기미가 없었으며, 승조원들이 무질서하게 탈출하고 있었다. 일부는 배 위에 머물렀고, 일부는 기름투성이가 된 대서양 바다에 몸을 던졌다. 어떤 사람은 수면에 떨어질 즈음에 어뢰에 맞은 비스마르크의 강철 파공에 걸려서 갈갈이 찢기거나 부셔졌다. 욀스 중령은 자침 준비를 마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다로 뛰어들라고 지시하고 있었는데, 13번 구역에서 300여명의 수병들이 다이빙을 하지 않고 사다리를 통해 내려가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질서를 지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해당 구역에 KGV의 주포탄이 작렬하면서 욀스 중령과 승조원들은 그대로 몰살당하고 말았다. 지휘권은 다시 최선임 생존자인 유나크 대위에게 넘어왔다.

10시 35분이 되자 비스마르크가 기울기 시작했다.

10시 36분이 되자, 비스마르크를 선회하며 관찰하던 도셋셔는 3번째 어뢰를 2,400야드(2,200미터) 거리에서 사출했고, 비스마르크의 좌현에 명중했다.
파일:도셋셔에서 본 격침된 비스마르크(어뢰 명중 직후).jpg
<rowcolor=white> 영국해군 순양함 도셋셔 갑판 어뢰발사관 옆에서 촬영한 이미 격침되어 선수만 물 위에 올라온 침몰 중인 비스마르크. 도셋셔는 저 직전에 비스마르크에게 어뢰를 명중시켰다.
10시 39분이 되자, 비스마르크는 좌현 부포의 포신이 바닷물에 닿을 정도로 기울었으며, 곧 대서양으로 가라앉았다.

이 시점에서 사령관 뤼첸스는 이미 전사한 후였으며 함장 린데만 대령은 함교가 피격당했을 때 중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생존자 가운데 유나크 대위에 이은 차선임자였던 4등 포술장교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 대위 등 몇몇은 흰색 정모를 착용한 인물이[57] 배가 뒤집히기 직전에 부상당한 몸으로 밖에 나와 승조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고 증언했다.

이후로 영국과 독일 사이의 비스마르크의 침몰 원인을 둔 지리한 논쟁이 남게 된다. 영국은 도셋셔가 발사한 어뢰가 결정적인 타격이 되어 격침되었다고 주장하였고, 독일은 자침이 원인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영국의 포위망에서 공격 당한 이후에 도로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영국에게 격침된 것으로 본다. 사실 자침설을 따르더라도, 그 자침은 함장 린데만 대령의 명령이나 허가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며, 의도는 어땠을진 몰라도 과정은 영웅적이진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격침될 때까지, 로드니는 380발의 16인치 주포탄과 716발의 6인치 부포탄을 비스마르크에게 쐈고, KGV는 339발의 14인치 주포탄과 660발의 5.5인치 부포탄을 퍼부었다. 노포크와 셰필드도 780발의 8인치 포탄을 쐈다. 도셋셔는 254발의 8인치 포탄을 쐈다. 이중에서 대략 400여발이 명중했다.

4.6.4. 해전 이후

비스마르크가 침몰하면서, 퇴함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의 생존자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대부분이 부상이나 화상을 입었고, 비스마르크의 연료 때문에 기름투성이었다. 바닷물은 섭씨 13도로 매우 추웠고, 도셋셔가 처음으로 구출하러 올때까지 1시간동안 버텨야 했다. 도셋셔의 함장 마틴 대령은 밧줄을 내려서 구출하려고 했지만,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이 너무 지친 탓에 사다리도 내려줘야 했다. 이후 구축함 마오리도 구조 활동에 참가했다. 이들은 유나크 대위를 포함하여 승조원 110명과 수상기 정비병인 에른스트 카도브(Ernst Kadow) 공군 상병 1명 총 111명을 구조했으며, 이들 중 게르하르트 뤼티치(Gerhard Lüttich) 기관 일병이 구조된 후 사망했다. 도셋셔는 그 중에서 86명을 구조했다.

그러나 도셋셔의 견시가 잠망경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올렸고, 영국 해군은 암호 해독을 통해 U보트가 전개된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58] 철수해야만 했다. 실제로 발견된 것이 U-74의 잠망경인지, 아니면 비스마르크의 잔해인지는 현재까지도 분명하지 않다.

남겨진 이들은 그날 저녁 19시 30분에서 20시 20분 사이에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U-74가 3명을 구조했다. U-74는 더 구조하고자 했으나, 항공기가 출현해서 뇌격을 가해오는 통에 잠항해야 했다. 22시 30분에는 기상함 Sachsenwald이 와서 2명을 더 구조했다. 이들을 제외한 생존자들은 북대서양에서 저체온증 등으로 죽었다.
파일:비스마르크 전사자 장례식(스페인 중순양함 카나리아스).jpg
<rowcolor=white> 스페인 해군 중순양함 카나리아스급 중순양함 1번함 카나리아스 함의 갑판 위에서 거행되는 비스마르크 전몰 장병들의 장례식[59]
인근 해역에 있던 스페인 해군 중순양함 카나리아스도 수색을 진행했으나 생존자를 구조하지는 못했고, 대신 시신만을 수습해 함상에서 장례식을 치르어 주었다. 최종적으로 비스마르크의 2200여명의 승조원 중에서 115명이 생존했다.

110명의 전쟁 포로들은 영국으로 압송되었고, 일부 장교들은 영국 해군의 심문을 받았다. 1942년에는 캐나다의 포로 수용소로 옮겨졌고, 1946년에 석방됐다.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마스코트이자 함재묘인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비언 제독의 기함인 구축함 HMS 코사크(Cossack)[60] 함에 구조되었고, 이후 ' 오스카'(Oskar, Unsinkable Sam)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래의 이름이 뭔지 불명이라 사람이 선박에서 떨어졌다는 구호인 'Man Overboard'에서 따와 독일식 이름인 오스카로 불린 것인데, 후에 코사크가 침몰한 뒤 다시 구조되어 아크로열의 함재묘로 재고용될 때 샘으로 개명했다.

이 고양이는 독일의 전함 비스마르크에 이어, 영국의 구축함 코사크, 항공모함 아크 로얄에 머물렀고, 전부 격침되었다. 세 번의 침몰 이후로 미신을 잘 믿는 뱃사람들에 의해 쉽캣에서 해고되고, 지브롤터 총독(Governor of Gibraltar) 관저에서 머물렀다. 그 와중에도 아크로열의 생존자를 구출한 구축함 라이트닝, 코사크의 생존자를 구출한 구축함 리전이 전부 침몰하자, 당황한 지브롤터 총독이 불운이 지브롤터로 오기 전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영국 해군 기지로 보내버리기로 결정해서 해군 장병들을 달랬고 거기서 여생을 마친다.

독일군 서부 해역 사령부는 비스마르크의 격침을 알지 못했으며, 로이터 통신이 영국 측의 발표를 인용해서 비스마르크의 침몰을 보도할 때가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영국 하원은 비스마르크가 격침되고 나서 몇시간 이후인 이른 오후 쯤에 해당 내용을 군으로 부터 전달받았다.

며칠 뒤인 6월 1일, 단독 행동에 나섰던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함이 브레스트 항에 무사히 입항하며 라인 연습 작전은 종료됐다. 무선 봉쇄로 비스마르크의 격침 사실을 모르고 있던 브링크만 대령과 승조원들은 먼저 온 비스마르크가 자신들을 맞이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가, 입항 후 비스마르크가 격침됐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에리히 레더가 발언한 슈나이더 소령의 기사십자 철십자장 수여 승인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의 기사십자 철십자상 수여는 7개월 후에 진행되었고, 후임이 먼저 훈장을 받은 사태 때문에 약간의 논란이 되었다.

4.6.5. 독일 공군의 보복

뤼첸스 제독이 연설에서 언급한 유보트와 루프트 바페의 영향권 운운하는 허세는 아예 거짓은 아니었고, 독일 공군 역시 기상 상황이 나아지자 항공기를 발진시켜 복수를 시작했다.

27일 3시 30분에 발진한 2대의 FW200 초계기가 아침에 비스마르크를 포격하던 로드니를 발견했다. 이후 27일에서 28일에 걸쳐 에리히 레더가 발언한 51대의 폭격기로 추정되는 많은 수의 He 111 폭격기가 더 출격해서 영국 전함들을 노렸지만, 4대 만이 폭격을 시도할 수 있었고, 전부 실패했다.

영국 해군의 구축함 HMS 마쇼나(Mashona)와 HMS 타르타르(Tartar)는 전함 로드니를 호위하다가 연료 부족으로 북아일랜드로 회항하고 있었는데, 5월 28일 오전에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았다. 9시에 마쇼나에 폭탄이 명중했고, 46명의 승조원이 사망했다.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타르타르로 옮겨탔다. 타르타르는 마쇼나의 뇌격 처분에 실패했고, 바다 위를 떠돌던 빈 선체는 그날 오후에 다른 캐나다 해군 구축함 2척이 포격으로 침몰시켰다. 이후 구축함 HMS 마오리도 폭격당했지만 살아남았다.

5. 여담

  • 비스마르크의 최후가 자침인가 격침인가에 대해서는 영국측과 독일측이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를 들이대면서 싸우고 있는 관계로 여전히 불명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실시한 선체 조사 결과 비스마르크의 선체 하단은 멀쩡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 발표 직후 영국 BBC가 같은 조사를 실시, 영국 순양함이 실시한 뇌격지점에 큰 파공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고, 일단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수선하 방어구조로 볼 때 양자 모두 가능성은 있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독일측의 자침 발표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인 게르하르트 유나크 대위의 회고조차도 영국측의 심문 결과와 전후의 회고 내용이 다르다. 영국 심문 결과는 자침 명령보다 배가 이미 침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문서 파기와 최종 퇴함만을 명령했다는 것이며, 영미권 전쟁사 개괄서는 대다수가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사실 비스마르크의 방어구조는 견고하긴 하나 고전적인 구조여서 실질적인 방어력이 높지 않고 배 자체가 과도한 침수에 대응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수상함용 어뢰를 맞았을 경우 자침이 필요할 정도로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 전함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다수의 견해이다.
  • 비스마르크는 기본적으로 1차대전식 방어체계의 발전형으로, 현측장갑이 강력하고 갑판장갑이 상당히 약했다. 특히 갑판장갑의 경우 사실상 대낙각 포탄 및 폭탄에 방어력을 가질 수 없는 얇은 장갑갑판 2-3개로 방호하고 있어서 사실상 스펙만큼의 방어력도 없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정체를 잘 모르던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화력이 일찌감치 무력화되자 포탄 관통력과 명중률을 높일 심산[64]으로 지나치게 근접해서 난타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이 100% 발휘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수백발을 맞아도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로드니의 경우 전함끼리의 교전이라면 그냥 명중률 문제가 아니라 함정간 충돌까지 각오해야 하는 거리인 2km까지 접근해서 발포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포격의 또다른 부작용은, 관통을 해 봤자 침수를 유발할 수 있는 타격은 도저히 입힐 수 없으므로, 탄약고에 맞지 않으면 관통해봤자 그저 바람구멍만 뚫고 만다는 것이다. 전함의 주포는 부각[65]을 크게 줄 수 없기 때문에 근거리에서 사격하면 적함의 흘수 아래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66] 이런 경우엔 관통탄이 탄약고를 건드려 유폭하길 바라는 방법 밖에 없는데,[67]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수선 아래에 배치된 탄약고를 맞추기 어려웠다.
  • 비스마르크가 빠르게 무력화된 이유는 주포탑 장갑과 바벳이 타 전함에 비해 상당히 얇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포탑 경사장갑을 잘못 적용해서 포탑 측면의 윗부분 절반이 얇은 상부장갑으로 구성되는 바람에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의 절반이 얇은 상부경사장갑을 뚫고 포탑 내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저질렀다.
    이 부분들이 이렇게 된 것은 배의 고전적 장갑구조로 인해 함정 배수량에서 장갑이 차지하는 중량이 지나치게 커져 흘수가 너무 깊어지고, 덤으로 높은 함상구조물 때문에 무게중심이 잘못 배분되면 배의 안정적인 항해능력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장갑을 줄인 것이었다.
  •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수상함대는 육군이나 공군에 비하여 열악했는데, 독일이 자랑하던 최대의 군함 비스마르크가 격침당하면서 더더욱 열악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출격은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에는 대서양에서는 유보트와 구축함, 어뢰정, 소해정 등 소형 함정들을 제외하면 소수의 상선을 개조한 가장순양함이나 비밀수송함의 출격만 이루어졌고, 대형함들은 죄다 북해나 발트해로 보내졌다. 이는 히틀러가 비스마르크 침몰 이후 대형함들의 보전을 최우선시하도록 지시하여 수상함대가 소극적으로만 활동하게 된 탓이 크다.
  •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은 것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소드피시 뇌격기였다. 심지어 소드피시는 최신 기종도 아니고 1933년에 개발된 복엽기다. 이 때문에 이 전투는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도 매우 드문 전함간 포격전이었음에도 바다에서 더이상 커다란 배와 대구경 함포가 절대적인 우위를 보장해주지 않는단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68]
  • 비스마르크가 마지막 교전을 할 당시 유보트 5척 정도가 비스마르크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U-556과 U-74가 그나마 가까운 현장에 있었다고는 평가받는다.하지만 U-556은 어뢰가 바닥난 상태였고, 아크 로열을 발견한 시점에 이미 2번째 소드피시 편대가 이함을 완료한 상태여서 전황을 바꾸긴 어려웠다. 이 때 비스마르크와 접촉을 유지하며 아군을 유도하려 애쓴 볼파르트의 전쟁일지는 되니츠 원수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을 통해서도 소개되어 있다.
    U-74는 영국 해군의 대잠폭뢰 공격을 두들겨맞고 심하게 손상된 유보트라 어뢰 발사를 할 수 없어 지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보트 기록들이 그렇듯이 함장들과 되니츠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자기 변명이 심한 편이고, 실제로 U-74는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영국 해군 함선들이 우글우글한 해역에 제 발로 들어갈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렇게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유보트 비밀일기의 저자 역시 U-109의 함장이 비스마르크를 구원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을 보고 내심 경악하는 모습을 보였고, 구축함이나 경순양함에 잠수함으로 도전하는 함장은 몇달 못간다는 '상식'까지 소개하기도 했다. 이것이 당시 유보트 승조원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 비스마르크를 도우려 했던 U-556과 비스마르크는 같은 조선소 출신에 이런저런 사연을 겪으며 끈끈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진수식 준비를 하던 U-556의 함장은 군악대를 수소문하다 비스마르크의 군악대를 빌려보기로 생각한다. 맨입으론 안해줄것 같아 그림까지 그려가며 '우리 U-556는 어떤 상황에서든 큰 형 비스마르크를 지켜줄 것을 맹세한다'는 기사 서약 형식의 증서를 써 줬는데 비스마르크의 함장 린데만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U-556이 바로 눈 앞에서 비스마르크와의 약속을 지킬수 없게 만들었다. U-556은 귀항 후 다음 초계에서 격침되었고 함장 및 승조원 대부분은 생존해 포로가 되었다.
  • 구축함 피오룬은 앞서 말했듯이 폴란드 망명 정부 소속으로 독일이 멸망시킨 자유 폴란드의 마지막 해군 유산이었다. 2차 대전이 벌어지기 전 폴란드 해군이 영국에 제조를 의뢰했고 대전 중 완성하여 폴란드 망명 정부 소속이 된 것. 피오룬은 함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조국의 복수를 위해 미친듯이 달려들었고 비스마르크 격침전에 큰 공을 세우며 조국을 짓밟은 원수 독일에게 복수에 성공한다.
  • 덴마크 해협 전투에 참가한 네 주력함의 함장 중, 프린츠 오이겐의 함장 브링크만 대령은 유일하게 종전 후까지 살아남은 함장이다. 비스마르크의 함장 린데만과 후드의 함장 커는 격침 당시 전사했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장 리치 대령은 몇 개월 후 벌어진 말레이 해전 당시 전사했지만 브링크만 대령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훈하고 중장까지 진급하여 종전 후 2년간 영국에서 포로 생활 후 석방, 1983년까지 생존했다.
  • 비스마르크 승조원들 중 최선임 생존자인 유나크 대위는 전후 재건된 독일 연방해군에 기관장교로 재복무해 대령까지 진급했고, 1977년에 사망했다.
  • HMS 후드 함의 세 생존자들 중 최선임자였던 던대스 사관후보생은 전후에도 해군에 계속 복무했으며,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1958년에 소령으로 전역했고, 1965년 11월 2일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불과 42세의 나이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틸번 수병은 1952년 8월에 전역할 때까지 해군에서 계속 복무했고, 후드 격침 후 한동안 HMS 빅토리의 승조원으로 사실상 육상 근무를 하는 등 후방에서 보내다 전함 HMS 퀸 엘리자베스함을 타고 다시 해상 근무를 했다. 전후 HMS 후드 협회가 설립된 뒤 2대 협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95년 2월 24일에 74세로 사망했다. 최후의 생존자였던 브릭스 수병은 CPO까지 진급하며 종전시까지 해군 통신 직별에 종사했고, 6.25 전쟁 제2차 중동전쟁에도 참전했다. 이후 늦깍이 장교로 임관해 1973년 2월 대위로 퇴역했다. 틸번에 이어 3대 HMS 후드 협회장을 지냈고, 사망시까지 후드 관련 서적 등의 편찬에 관여하고 기념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8년 10월 4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후드의 생존자 3명을 구조했던 구축함 일렉트라는 이후 태평양으로 이동해서 말레이 해전에도 참전했다. 전투 중 전함 리펄스,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생존 승조원을 구출하기도 했으며 1942년 자바 해전에서 침몰했다.
  • 그나마 싸우다가 최후를 맞은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자매함이었던 티르피츠는 굉장히 허무하게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티르피츠가 대전 후반기에 완성된 탓에 빛좋은 개살구 처지가 됐다고 해도, 비스마르크의 동형함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국의 심기를 박박 긁어놓는데는 충분했다. 당시 영국은 티르피츠를 지나치게 신경썼던 탓에 급기야 PQ-17 같은 대형참사까지 일으켰고, 결국 이 배를 나오기 전에 박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5번의 공중해상 합동 작전 끝에 티르피츠의 구동계가 작살나며 앉은뱅이로 전락했고, 독일은 최후의 방법으로 티르피츠를 갯벌에 안착시켜 고정포대로 사용함과 동시에 수리를 개시했다. 그러나 영국은 멸적의 톨보이[69]를 떨궜고,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티르피츠는 총 3발의 톨보이를 맞고, 지진폭탄의 강력한 위력에 안착해있던 기반인 갯벌 자체가 무너지며 빨려 들어가다시피 뒤집어졌다. 때문에 인양은 커녕 배에 구멍을 뚫고 생존자를 구출하는 일조차 애를 먹어 사망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어쨌거나 티르피츠가 전장에서 별 전과를 보인적이 없고 심지어 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음에도 완전히 침몰시킬 때까지 작전을 계속 했던 것도 동형함이었던 비스마르크가 전장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이었다.
  • 당시 비스마르크를 뇌격으로 최종 격침시켰던 순양함 HMS 도셋셔는 이후 태평양 전선으로 보내졌다가 1942년 실론 해전에서 격침당했다.
  • 비스마르크의 승조원 중 마지막 생존자는 베른하르트 호이어였으며, 2018년에 96세로 사망했다.
  • 이 추격전을 다룬 조니 호튼(Johnny Horton)의 Sink the Bismarck라는 노래가 있다. 후술할 영화 주제곡이었다고. 최근 곡으로는 2019년에 나온 스웨덴 밴드 Sabaton의 Bismarck라는 노래가 존재. Sabaton의 Bismarck 뮤직비디오는 아래의 월드 오브 워쉽의 제작사 워게이밍넷과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실제로 배를 타고 나가서 선상에서 녹음한 것으로 보인다.
  • 이 추격적을 다룬 루이스 길버트 감독, 케네스 모어 주연의 1960년작 《Sink the Bismarck》라는 영국 영화가 있다. 여기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장으로 나오는 영국 배우 에스몬드 나이트는 1940년에 해군 장교 훈련을 받은 후 대위로 진급, 몇 편의 전시 선전 영화의 주연을 맡은 후 실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포술장교로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전하였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공격으로 부서진 함교 구조물을 맞아 두 눈이 멀었으며, 2년 후 오른눈의 시력을 회복하여 영화배우 경력을 계속 이어 나갔다. 또한 동 작품에서 영국 여장교로 나오는 다나 윈터는 독일 출신이다.
  • 전함소녀에서는 역사전 - 전함코어와 발키리 작전으로 구현되었다.
  • 벽람항로의 프롤로그가 덴마크 해협 전투 ~ 후드 격침까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후 2019년 5월 비스마르크의 출시와 함께 진행된 이벤트 해역 "메탈 블러드 - 음표 & 맹세"가 후드 격침 이후부터 비스마르크의 최후까지의 내용이다.
  • 함대 컬렉션의 2018년 초가을 이벤트의 후반부가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라인 연습 작전을 다루고 있다.
  • 이 전투를 다룬 국문 단행본으로 2024년에 출간된 "비스마르크를 격침하라(원제: Hunt the Bismarck, Angus Constam 저, 2018)"

    • 가 있다.

6. 관련 영상

라인 연습 작전에서 독일 해군의 활약상을 담기 위해 당시 프린츠 오이겐에는 독일 선전부 소속 기자와 촬영기사가 탑승하고 있었다. 이들은 프린츠 오이겐의 항해 모습과 덴마크 해협 해전 장면을 촬영하였고, 이를 가지고 독일로 귀환하는데 성공한다. 이 가운데 일부(11분 45초 분량)를 프린츠 오이겐의 포술장교였던 파울 슈말렌바흐 대위가 모종의 경로로 갖고 있다가 전후에 "프린츠 오이겐 승조원 전우회(Bordkammeradschaft Prinz Eugen, 약칭 BKPG)"에 기증한다.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전함 비스마르크와 생생한 사격 장면과 순양전함 후드의 피격 상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원본 필름 총 11분 45초 분량 전부이다. 여기서 5분 40초 ~ 7분 19초 부분이 덴마크 해협 해전이다.


덴마크 해협 해전 부분을 포함한 2분 23초 분량의 흑백 영상에 AI로 컬러를 입힌 것이다.


[1]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후드. [2] 마쇼나 [3] 킹 조지 5세급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4] 페어리 풀머 2기. 격추가 아닌 연료 부족으로 인한 해상 추락. [5] 비스마르크 격침 이후 Fw 200의 공격으로 격침당한 마쇼나 함의 전사자및 구조되지 못한 페어리 풀머파일럿을 포함한 수치 [6] 부상 악화로 1명 사망 [7] 네덜란드는 왕실이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웠고, 샤를 드골 자유 프랑스를 세웠다. [8] 정확히는 스위스가 자신들의 땅에 독일군이 넘어오려는 순간 산과 산으로 둘러쌓인 국토들을 연결하는 터널을 모조리 무너뜨려 독일군을 산채로 묻어버리겠다며 히틀러에게 으름장을 놓았던 상황이다. [9] 유보트의 문제는 할 일은 많은데 배가 엄청나게 적었다는 데 있었다. 여기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었는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독일 해군의 재무장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과 당시 해전의 패러다임이 거함거포주의( Z 계획으로 히틀러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도 1차대전 참전자였던 히틀러와 국민들에게 1차대전 당시 영국 다음으로 강했던 독일 대양함대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였기에 작고 은밀해서 눈에 잘 안 보이는데다가 건조비용도 많이 드는 유보트는 뒷전으로 밀려났으며, 해군은 육해공 3군 중 나치당원의 수가 가장 적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면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웬만한 전투함이 그러하듯 유보트 역시 상당한 비용을 자랑했고(유보트 한 대 가격이 4호 전차 60대 가격과 맞먹는다), 잠수함 특성상 숙련된 승무원 양성이 매우 힘든 점도 한 몫했다. [10] 1940년 9월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므로 라인 연습 작전 시기의 뤼톈스 제독의 계급은 대장으로 해야 옳다. [11] 1940년 프랑스 함락 이후, 옛 프랑스 해군의 군항들에 잠수함 기지들이 들어서면서 해군 잠수함사령부도 파리로 이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독일 본토로 이전할 때 까지 주둔했다. [12] 반달 같아 보이는 이름이지만 Flying Officer Michael Frank SUCKLING은 RAF의 실존 인물이다. # 스핏파이어를 운용하는 제 1 사진 정찰대(1 Photo Reconnaissance Unit)에서 복무했고, 비스마르크 추격전으로 부터 2달 후인 1941년 7월 21일에 프랑스 라 로셀(La Rochelle)로 정찰 비행을 나갔다가 공격받아 실종되었다. 이후 KIA 판정을 받고 영국 공군 기념관(the Runnymede Memorial)에 명판으로 새겨졌다. [13] 육지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발진하는 것이 아닌 항공모함의 특성상 조그마한 실수라도 기체 파손이나 파일럿들의 죽음으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그 항공모함에 익숙한 항공단이 조직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겨우 한번 이착륙한 수준이라면 그만큼 비전투 손실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14] 항공모함 빅토리어스는 1941년 5월 14일에 취역했고, 5월 24일에 비스마르크에게 함생 첫 공습을 한다. [15] 토비 제독은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후드/KGV와 신조함인 POW/빅토리어스를 반반 나눈 것이다. [16]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사이의 해협. 덴마크와 노르웨이-스웨덴 사이의 해협이 아님에 주의하자. 저 둘은 스카게라크 해협과 카테가트 해협이라는 고유의 명칭이 있다. [17] 전함 킹 조지 5세,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순양함 오로라, 갈레테아(Galatea), 허마이오니(Hermione), 케냐, 넵튠, 구축함 액티브(Active), 잉글필드(Inglefield), 인트레피드(Intrepid), 랜스(Lance), 펀자비(Punjabi), 윈저(Windsor). [18] 노포크와 서포크에는 레이더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초기형이라 탐지거리가 20km 이하였는데, 날씨만 좋다면 차라리 정찰병이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이 더 나은 수준이었다. [19] 전통적으로 함대의 기함이 전열의 선두에 위치하며, 기함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함대에서 가장 크고 강한 함정이 맡는다. 구축함 등 호위함은 제외하고 함대의 주력함들 중 선두라는 것이며, 항공모함 등 함 자체의 전투력이 약한 배가 기함이면 선두에 세우지 않는다. 항모가 여러 척 있는 함대라면 그 중 기함인 항모가 항모들 중 맨 앞에 위치한다. [20] 아직 미완성인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도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쟁 때문에 완전히 완성되지 못한 채로 작전에 투입된 상태였다. [21] 뤼첸스 제독은 실력은 있었지만 성격이 깐깐하고 독해서 함장 린데만 대령 이하 승조원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편이었다. 반면 린데만 대령은 전체적으로 능력있고 유머러스함도 겸비했던 편이라 승조원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함장을 맡기 전에 오랫동안 포술학교에서 교관을 맡아서 함장직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그건 기우였다고. [22] 린데만과 해군사관학교 동기였다. [23] 전방에 발생한 화재였으므로, 증언이 다소 엇갈린다. [24] 교전 후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장 존 카터럴 리치 대령이 보고서에 첨부한 후드 격침 당시의 목격상황을 직접 그렸다. [25] 그 후 리치 대령은 말레이 해전에도 동함의 함장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때 전함이 침몰할 때 함대 지휘관 필립스 제독과 함께 퇴함을 거부하고 죽었다는 말도 있고 퇴함을 지휘하고 마지막으로 탈출했지만 함이 침몰하면서 만들어진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망했다는 말도 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살아남지는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26] 사실 개장안의 장갑 두께도 비스마르크의 주포에 관통되는 스펙이다. [27] 14인치가 더 가볍기 때문에 장전 속도가 더 빠르다고 폄하받기도 하지만, 온당한 평가는 아니다. [28] 전방 4연장 1번 주포는 1개만 정상, 2연장 2번 주포는 정상, 후방 4연장 3번 주포는 1개가 살아있지만 포탑이 회전 불가 상태여서 사용 불가. [29] 1883.1.10 ~ 1945.12.6,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자. 경순양함 아마조네, 전함 슐레지엔의 함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0년 1월 1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한 고참 장교. 빌헬름 마르샬(Wilhelm Marschall), 테오도어 크랑케(Theodor Krancke) 제독 등 수상함 전문가들과 함께 독일 함대 전력을 유지했다. 전후 소련으로 끌려가서 군사 재판을 받았고, 1945년 12월 6일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소련 체제가 종식된 1994년, 러시아 법정은 그의 책임을 풀고 명예를 신원하였다. [30] 후드 승무원의 생존자 3명 중 한명인 테드 브릭스의 해군 입대 계기가 어릴 적에 항구에 정박한 전함 후드의 모습을 보고 후드의 웅장한 모습에 매료되어 입대나이가 되자마자 해군에 입대를 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더 어린 나이에 입대 지원을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모병관이 거절을 했었다. 그런데 훈련을 수료하고 첫 배치를 받은 곳이 어릴적의 우상이었던 전함 후드 였다고(...) [31] 그래서 처음에는 단박에 거절당했다. [32] 대서양을 횡단하는 정기 연락선 SS Normandie의 정비를 위해 만들어져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33] 영어 번역으로는 Execute Hood 이다. [34] 비스마르크가 귀환할 때 귀환 루트를 가지고 뤼첸스와 린데만이 격한 토론을 벌였는데 뤼첸스는 남동쪽으로 가서 프랑스로 입항하자고 주장했고 린데만은 북동쪽으로 돌아서 노르웨이로 가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치열한 토론 끝에 뤼첸스의 안이 채택되었는데, 만약 린데만의 안이 채택되었다면 토비 제독의 판단이 정확히 들어맞았을 것이다. [35] 다음날인 5월 26일에 정식 명령을 받으면서 소급 처리된다. [36] 토비 제독은 4성 제독이고, 위에는 더들리 파운드 제 1 해군경과 윈스턴 처칠 의 2명 밖에 없는 최고위 장교였다. [37] 명령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혼자 결정하고 통보한 것이긴 하다. [38] 영국 해군 함선들은 위험한 도버 해협을 통과하기 어려워서 북아일랜드로 빙 돌아 복귀해야 했으므로, 돌아갈 거리를 생각하면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범위에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39] 미국도 같은 문제로 1943년까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영국의 것은 독일이나 미국처럼 완전히 엉터리는 아니었던 탓에 2차 대전 내내 그럭저럭 쓰이게 된다. [40] Stephen, Martin. Sea Battles in Close-up (Shepperton, Surrey: Ian Allan, 1988), Volume 1, pp.89-90. [41] 보통 대형함의 키는 하나가 고장나거나 피격으로 파손되어도 다른 하나로 조타할 수 있도록 두 개를 다는 것이 보통이다. 위 그림처럼 양옆으로 두 개를 다는 경우도 있고, 야마토급 전함처럼 앞뒤로 두 개를 다는 경우도 있다. [42] 소드피시들이 떠 있긴 했다. [43] 영국 해군이 1939년 4월 15일에 8척을 주문한 N급 구축함 중 하나인 HMS 네리사(Nerissa)이고, 건조 중이던 1940년 10월에 폴란드에 대여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 해군에 다시 반환되었으며, 'HMS 노블'이라는 세번째 이름을 받는다. [44] 이후 아침에 토비 제독의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피오룬의 행적이 어땠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위키피디아에서는 폴란드 구축함이 비스마르크에게 3번 일제 사격하고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45] 매우 공격적인 작전 방침으로 느껴질텐데, 비언 제독은 그 유명한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의 장본인이고, 이번에는 480킬로를 달려서 H함대에 합류하라는 해군성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한 상남자사람이기도 하다. 승함한 HMS 코사크는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 당시에도 그의 기함이었다. [46] 즉, 장거리 무선 통신 송신기, 레이더가 있는 마스트가 한 방에 모조리 파괴되었다. [47] 코사크가 전함이었다면 T자 대형으로 비스마르크를 몰아부치는 코스로 잡았다.(...) [48] 헤르만 괴링의 욕심 때문에, 해군은 자체 항공대를 한동안 갖지 못하고 함재기조차 항공기와 조종사 및 승무원, 정비 인력 등 일체를 공군 파견 부대에 장기간 의존해야 했다. 그나마 Fw 200 콘돌 정찰기를 도입하면서 소규모의 자체 해군 항공대를 갖추었다. [49] 전부 죽을 사람을 위한 거짓말 위로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전부 진행되긴 했다. [50] 볼파르트 대위는 이상적인 어뢰발사각도로 들어오고 있던 영국 함정들을 잠망경으로 바라보면서 "어뢰 몇 발만 있더라면!" 하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U-556과 비스마르크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다져진 유대관계가 있었고 반 장난이었지만 U-556이 비스마르크를 지켜주겠다는 서약도 쓴 적이 있었다. [51] 이 책의 사실상 저자인 볼프강 히르쉬펠트 통신상사는 잠수함 U-234에서 복무하던 중 배가 미 해군 구축함에 나포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당시 U-234는 동맹국 일본 제국으로 향하던 중으로, 주일 국방무관으로 부임할 예정이던 공군항공대장 울리히 케슬러 장군, 그리고 일본 제국 해군 좌관급 연락장교 두 명이 동승한 상태였다. 동승한 일본 해군의 연락장교 두 명은 미군에게 잠수함이 나포될것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52] 회고록에 따르면, 피셔 대위는 너무 깊은 잠항심도를 유지한 바람에 수압을 못이겨서 엉망이된 함 상태로 인해 전투배치가 불가능하다는 다른 장교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기관 부사관에게서 의견수렴을 하듯 거짓말을 치면서 기동이 가능하다는것을 확인후 "전함을 구할수만 있다면 잠수함 1척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비스마르크 구원 작전을 감행했다. [53] 격침인지 자침인지 논란이 있는 관계로 중립적 명칭인 침몰로 표기한다. [54] 부상 악화로 1명 사망 [55] 비스마르크 함의 기관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기관장은 발터 레어만 소령으로, 생존하지 못했다. [56] 보통 침몰하는 함선에서는 흔한 광경이지만, 비스마르크의 경우는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 이는 전투 중 함교가 피탄당해 승조원들의 질서를 잡을 고위 장교들이 전부 사망한 탓이 크다. 독쟁이 뤼첸스만 살아있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안 갔다. [57] 당시 독일 해군에서 흰색 정모를 착용했던 건 오직 최고지휘관들 뿐이었고 뤼첸스는 저 시점에서 전사가 거의 확실시되는 관계로 이는 린데만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58] 알았지만 그냥 배짱으로 들이대서 비스마르크를 부순 것이다. [59] 생존자 구조는 실패했지만 대신 시신만을 수습해 장례식을 치렀다. 스페인 함이었던 관계로 저기에 독일 수병은 한명도 없고, 전원 스페인 해군 수병들이다. [60]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 당시 알트마르크를 나포한 그 배 맞다. [61]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전쟁으로 인해 내장공사를 못 끝낸 상태에서 작전에 참가했다. 작전중에도 내장공사 마무리를 하려고 탑승한 민간인 신분인 군무원이 함께 동승해 있었다. [62] 폴란드 자유군 소속 군함으로 당시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는데 큰몫을 했다. 유명한 일화로, 함급차이에도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이 배를 보고 비스마르크 측에서 발광신호로 왜 그러는지를 묻자 우린 폴란드인이다라며 답했던 것이 유명하다 [63] 생존자 구조를 시도. 시신 수습. [64] 원래 넬슨 시대부터 영국 해군은 근접 포격전을 선호했고, 아울러 당시 영국의 주력 함포 모두가 은근히 관통력이 부족한 포들이었다는 것이 감안되었다. 로드니의 16인치는 고속 경량탄을 쏘는 실패작 16인치(다른 나라의 16인치보단 약했지 그래도 웬만한 15인치들보다는 강력했다)였고, KGV는 아예 소구경인 14인치 함포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군은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이 최소 15인치 대응방어능력을 갖고 있으리라 판단했고,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아예 원거리에서 포탄 낭비를 각오하고 교전하거나 아니면 최대한 지근거리에서 공격을 가해야 했다. [65] 포신을 수평 기준에서 아래로 내리는 각도. [66] 정 안되면 함체의 구획 일부를 침수시켜서 함체를 기울이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당시 포격지원에 나선 USS 텍사스가 이 같은 방법으로 사정거리를 넘어서는 장거리 포격을 가한 사례가 있다. 단, 고속으로 항해하는 급박한 교전 상황에서 사용하기는 어려운 방식. [67] 영국 해군은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에서 승함 육박전을 벌인 적이 있긴 하나, 이것이 전 세계 해군 역사상 마지막 승함 육박전이기도 했고, 자침하면 다같이 죽는 꼴이기도 했다. [68] 비스마르크 자체적으로 대공화기 배치에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럼에 한대의 피해도 없이 돌아와 작전을 성공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69] 티르피츠 제압 작전 중 처음 쓰인 것은 아니다. 구동계를 작살냈던 친구가 이 친구였다. [70] 최종 보상이 비스마르크였다. 그리고 컬렉션에 비스마르크 추격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