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9:48:19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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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의 그리스도[1] (데이시스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의 성모 마리아 ( 쎄오토코스 모자이크)
파일:터키 괴레메.jpg
튀르키예 네브셰히르 도 괴레메 ( 카파도키아)에 남아있는 옛 성당의 11세기 이콘
언어별 명칭
코이네 그리스어 <colbgcolor=#fff,#1c1d1f>Εἰκών (이콘)
현대 그리스어 Εικόνα (이코나)
러시아어 Икона (이코나)
라틴어 Icon
이탈리아어 Icona
루마니아어 Icoană (이코아너)

1. 개요2. 이콘과 가톨릭 교회의 교리적 배경
2.1.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내용2.2. 이콘에 관한 구약과 신약의 해석
3. 역사
3.1. 초기 교회3.2. 비잔틴 미술3.3. 성상파괴 논쟁
4. 지역별 화파들
4.1. 그리스 화파4.2. 러시아 화파
4.2.1. 키예프 시대의 화파4.2.2. 노브고로드 화파4.2.3. 모스크바 전기4.2.4. 모스크바 후기
5. 정교회에서의 이콘6. 가톨릭과 성공회에서의 이콘7. 대한민국에서의 이콘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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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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Μια εικόνα ισοδυναμεί με χίλιες λέξεις. (A picture speaks with thousand words)
그림 하나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 그리스 속담[2]
정교회 동방 가톨릭 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의 동방 교회에서 주로 그리는 종교적인 상징물. 원래 이콘은 그림뿐 아니라 다른 예술품도 포함하지만 그림으로만 한정지어 이해하는 사람들이 몇 있다. 단어의 기원은 중세 그리스어로 '그림', '도상'을 뜻하는 'εικόν' (이콘)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에서 사용되는 아이콘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었다. 아이콘 덕분에 컴퓨터 스마트폰의 기능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이콘 덕분에 글을 몰라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중세 민중들도 시각적으로 기독교 교리와 성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느끼는 기능을 했다.

2. 이콘과 가톨릭 교회의 교리적 배경

2.1.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내용

가톨릭 교회가 이콘이나 성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나 그밖의 다른 존재를 표현하는 교리적 배경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참된 육체
‘말씀’은 참된 인성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묘사가 가능하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질” 수 있다. 제7차 세계 공의회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을 성화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이와 동시에 교회는 예수님의 육체를 통하여 “당신 본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항상 인정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지닌 개별적인 특성들은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을 표현한다. 인간 육체의 모습을 취하신 그분을 성화상으로 그려 공경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신자들이 그분의 모습을 공경하는 것은 “그 모습 안에 묘사되어 있는 위격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476~477항. 원문 링크: 476, 477.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성화상
『가톨릭 교회 교리서』 원문 열람
1159항
1160항
1161항
1162항

“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습을 본떠서 만들지 마라 ……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원문 열람
2129항
2130항
2131항
2132항

2.2. 이콘에 관한 구약과 신약의 해석

위의 『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설명처럼 전문적인 신학의 영역에서 볼 때, 오랫동안 성화상 파괴론자들과 키배를 떠 온 정교회 동서대분열 이전의 정교회가 일치되어 있던 상태인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콘을 긍정한다.

구약시대의 하느님은 절대 자신을 내보이지 않았고 모세 같은 사람들 앞에 현현할 때도 '보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광채가 너무나 눈부셔서 사람이 대면하여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습은 그림으로 그리거나 형상으로 빚을 수 있는 것을 초월한 존재였고, 구약의 하느님은 볼 수 없는 존재이니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3]고 명령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인간적인 존재로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복음은 구약의 완성이므로 구약에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 것'을 규정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의 잠정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도래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되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임을 부정하는 이단적인 사고방식에 연결된다고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말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1px-Ushakov_Nerukotvorniy.jpg 파일:external/www.pigizois.net/12_veroniki.jpg
〈손으로 그려지지 않은 그리스도〉,
시몬 우샤코프, 1658년 그림[4]
그리스도의 얼굴이 찍힌 머릿수건을 들고 있는
성녀 베로니카의 이콘

3. 역사

3.1. 초기 교회

오늘날 남아있는 이콘으로 추측하건대 그리스도교에서 이콘을 받아들인 것은 초기 공동체 사회로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 교리나 기초적인 교리가 완성되기 전에도 신자들은 물고기, , 십자가 착한 목자 등 상징물을 그려 왔으며, 이는 로마 근교의 카타콤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이교도의 우상숭배를 비판하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사람도 비둘기나 물고기 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상징적 형상들을 몸에 지니기를 권하는 글을 썼다.[5] 물론 그리스도나 성모, 여러 성인들의 초상도 그려졌으나 유다이즘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에 인물보다는 상징물이 더 많이 쓰였다. 문자를 아는 사람이 적은 고대 로마 시대에 신자가 많아져 신자들을 가르칠 필요성이 절실해지자 가르침을 목적으로 미술과 음악을 많이 사용했다.

정교회에서는 이콘의 기원에 대해 신화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하는데 이콘은 사람의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당신의 상을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의 유명한 전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성녀 베로니카가 땅에 넘어진 그리스도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쓰고 있던 머릿수건을 풀어 그의 피땀을 닦아주었는데 그 수건에 예수의 얼굴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동방 정교회에서 전해오는 〈손으로 그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의 상〉의 전승은 병에 걸린 에데사의 왕이 예수를 보길 간청하자 직접 갈 수 없었던 예수가 아마포 수건으로 자신의 땀 묻은 얼굴을 닦자 그곳에 상이 맺혔고 그 상을 보자 왕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다. 그리스어로 " 아히로피타"(αχειροποίητα, 손으로 그려지지 않은)라고 불리는 이 이콘은 이외에도 과달루페의 성모의 발현과 관련된 사건에서도 비슷한 기적으로 나타난다. 이 모두가 이콘의 신비성에 대한 교회적 차원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들이다.

4세기 말경에는 순교자들의 일생을 그린 작품들이나 성인들의 초상화로 교회 내부를 장식하도록 장려했는데, 이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문맹자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종의 교육적인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아직 경배의 대상으로서는 논의되지 않았었다. 에우세비우스도 자신의 저서 <교회사>에서 사도 바울로 베드로, 그리스도의 이콘이 자신의 시대까지 보존되어 있었다고 증언한다.

3.2. 비잔틴 미술

330년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제국의 수도가 옮겨짐에 따라, 예술의 주요 후원처인 교회와 궁정도 같이 옮겨지게 되었다. 비잔틴 미술은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을 바탕으로 하여 아나톨리아, 시리아, 알렉산드리아 등의 미술을 첨가한 것으로 5세기경에 발달하여 이후 약 1천 년 간에 걸쳐 대체로 확립된 여러 형식을 고수하며 독자적 미술을 형성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는 비잔틴 미술이 절정을 맞이했다. 황제의 후원 하에 다양한 그리스도교적 미술과 건축이 발달할 수 있었는데, 조각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거의 부조에 한정되었다. 당시 조각가들은 고전적인 방법은 그대로 사용하면서 당대의 시대성을 잘 반영시킨 상아 작품들을 제작했고, 건축가들은 교회의 건축에 있어 장방형, 정방형, 십자가형 평면도상에 을 얹은 집중식 건축을 시도했는데 종종 바실리카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 작품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진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며, 이후 비잔티움 세계 도처에서 돔 양식은 보편화되었다.

성당 안에 그려지는 장면이나 인물의 배열 등은 교회가 정한 규약을 이탈해서는 안됐다. 따라서 성당 안의 장식들은 원칙에 따른 모자이크, 이콘, 미니어쳐 등으로 제작되었으며, 비잔틴 미술의 최후 전성기였던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는 프레스코화도 융성하게 된다.

3.3. 성상파괴 논쟁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상당히 오랫동안 이콘은 그리스도교회에서 신앙행위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신학 문제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콘이 우상인지 아닌지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 8~9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에서 대대적인 성상파괴가 일어났다. 이러한 우상숭배 논쟁은 당시 떠오르던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면이 있으며 일부는 동로마 황제가 촉발하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의 레반트 지역 영토에 살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이콘 풍습을 우상숭배로 공격하는 이슬람의 주장에 대응하여 이콘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교회의 영향력을 제어하고 싶어하던, 그리고 해당 지역의 현실을 이해하고 있던 황제들이 이런 움직임을 밀어준 것이 문제였다. 이 문제는 동방 교회에서는 몇 차례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10세기에 들어와서야 공의회를 통해 이콘은 우상숭배가 아닌 공경의 형태로 정리되어 합법적인 성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서방에서는 이 기간 동안 이콘이나 성상의 사용이 특별히 문제시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동방 교회에서 주기적으로 제기되는 성상 금지 떡밥으로 인해 동서방 교회 사이의 골이 더 벌어졌다.

성상파괴운동 문서 참고.

4. 지역별 화파들

4.1. 그리스 화파

그리스 지역에서는 비잔티움 화법을 계승하여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법으로 발전했다. 이 지역의 이콘들은 비교적 소박하며 극도로 정제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이콘들은 이슬람 세력에게 반항하던 그리스 민중이 겪었던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 지역에서는 크게 북부의 마케도니아 화파, 남부의 크레타 화파로 각기 다른 화풍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도 아토스 성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이콘들을 많이 전하고 있다.

4.2. 러시아 화파

종교적 정열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던 루스인에게 이콘만큼이나 국민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없다. 이콘은 황제의 궁전에서부터 농부의 보잘것없는 오두막집에까지도 있었다. 988년, 블라디미르 1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이때 그리스에서 사제들과 함께 초청되어 새로운 교회의 건축과 장식을 담당했던 비잔티움의 그리스인 장인들에게서 이콘의 제작 기술을 배웠으나 곧 슬라브 특유의 민족적 양식을 지닌 이콘들이 출현하게 됐다.

이콘은 기도 속에 제작되고, 지성소에 40일간 두었다가 사제들에 의해서 축복되기 때문에 일반 그림과는 다른 성화임을 강조하고자 러시아어로 이콘 제작에는 '그림을 그리다'가 아닌 '글을 쓰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4.2.1. 키예프 시대의 화파

블라디미르 1세는 새로 건축되는 교회들을 위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건축업자, 모자이크 제조자, 이콘 화가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돕게 하기 위해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여러 가지 조형 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이 러시아인들은 다시 러시아인 제자들을 받아들여 당시 수도였던 키예프를 중심으로 점차 러시아의 건축양식과 러시아 회화의 고유한 예술적 표현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그 시대에 제작된 이콘들은 모두 파괴되어 오늘날 그 면모를 살펴볼 수는 없다.

4.2.2. 노브고로드 화파

노브고로드는 그 당시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타타르의 침입을 받지 않아 11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러시아 성상회화의 황금시기를 이루었으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도 많다.

1223년 몽골의 침입에 의해 러시아의 수많은 도시들은 비잔티움과 발칸반도 제국과의 문화적 교류가 완전히 중단되었고, 따라서 비잔티움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민족적 특성이 강조되어 지엽적인 독자성을 형성함으로써 완전한 창작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비잔티움의 관점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엄격했던 인물 묘사는 보다 가볍고 역동적인 요소와 혼합되었고, 색채도 새로운 다양성과 생동감을 얻었으며, 얼굴의 표정들도 보다 자연스러우며 민족적 유형의 얼굴들로 전환되었다. 또 복잡하고 추상적인 상징주의를 피하고 설명이 필요없는 쉬운 주제들을 취급했다.

12세기에는 키예프와 노브고로드 외에도 여러 지방에 새로운 화파들이 생겨나고 발전했는데 블라디미르 수즈달, 야로슬라블, 포스코프 등이 그 중심지였으며, 이들을 북러시아 화파라고 부른다.
  • 블라디미르, 수즈달 화파
    이 화파의 절정은 1250년 경이며, 이 시기에 볼가강 북쪽 지역에서는 데이시스 이콘[6]들이 큰 인기를 끌어 자주 그려졌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시는 1238년과 100여 년 후 타타르인에 의해 파괴되어 오늘날 순수한 이콘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블라디미르의 성화상은 비잔티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정교하고 우아함을 지니고 있으며, 부드러운 색상으로 그려졌다는 특징을 가진다.
  • 프스코프 화파
    프스코프시는 노브고로드 다음으로 러시아 북부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 프스코프도 타타르의 침입을 면하여 12세기와 14세기 사이에 안정된 발전이 가능했다. 이 도시의 이콘 화가들은 노브고로드 화파의 이콘에 많이 종속되어 있었고, 비잔티움식의 엄격함을 현저히 감소시켰고, 좌우 대칭으로 그리는 것이 특징이며, 색상이 독특하다. 즉 비잔티움 회화의 어두운 색조들은 피하고 밝은 색조들이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다. 양식은 간결했고, 형상들은 극히 양식화 되었으며, 인물들의 자세도 단순화시켰다.
  • 야로슬라블 화파
    야로슬라블 화파의 전성기는 13세기 초이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이 문화 중심지는 잠시 막을 내리게 됐고, 16세기에 다시 새로운 발전을 시작했다. 이 화파의 특징으로는 배경을 채우는 작은 건물들과 사람을 많이 그려 넣는 묘사를 들 수 있다.

15세기 후반, 노브고로드 회화는 모스크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작고 힘이 세 보이는 인물 대신에 마르고 신장이 과장되게 긴 인물들로 대치되고, 그때까지 사용되던 짙은 색들이 은은한 색으로 바뀌었는데, 분홍색, 보라색과 은색을 띤 녹색들이 즐겨 사용됐다. 1478년 노브고로드시가 자치권을 상실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에 합병된 이후에는 의복의 묘사에 있어서 많은 문양을 가미하고 전체 구도에 있어서도 우아한 조화를 보이는 새로운 양식이 대두됐다. 그러나 1570년 이반 4세의 대정벌로 노브고로드시는 하나의 보잘것없는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4.2.3. 모스크바 전기[7]

14세기 이후, 모스크바의 세력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타타르의 몰락으로 그동안 단절되었던 비잔티움과의 문화적 교류가 다시 이루어졌고, 이슬람으로부터 위협당한 남슬라브 지역 출신의 대가들이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됨으로써, 많은 러시아의 화가들이 그리스의 화가들을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이렇게 모스크바로 이주한 이콘 화가들 중에는 그리스의 유명한 테오파네스가 있다. 그는 1395년 모스크바로 갔는데, 그곳에서 '테오판 그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본보기 그림 없이 초안을 직접 그렸으며, 아름다운 색조 등으로 사람들을 감탄케 했다고 한다. 그는 후기 비잔티움 미술을 러시아에 소개하여 러시의 전형적인 특징들과 잘 결합시켰다. 그는 또한 러시아의 이콘 화가들 중 가장 유명한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스승이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비잔틴 미술의 많은 요소들을 러시아적인 창작으로 형상화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 테오파네스와 더불어 루블료프는 러시아 이코노스타시스[8]의 고전 형식 창시자로 간주된다. 1405년, 모스크바의 성모희보 성당에서 함께 활동한 이 두 예술가는 이코노스타시스를 현저하게 확대시켜 신자들로 하여금 제단을 볼 수 없게 했다. 비잔티움의 이코노스타시스는 비교적 작았고, 데이시스 이콘과 축제 이콘들로 된 두 단 정도였는데 테오파네스와 루블료프는 데이시스의 묘사를 전신상으로 하여 2미터가 훨씬 넘는 높이로 만들었다. 3년 후 루블료프는 코이메시스 주교좌 성당에 3미터 이상 높이의 이코노스타시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따라서 본래 지성소와 회중석을 분리하던 것에서 다량의 이콘으로 완전히 벽을 이루어 성조들과 예언자들 여럿을 묘사하여 여분의 면까지 장식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러시아는 나무가 풍부했으므로 비잔티움에서처럼 돌이 아니라 나무로 이코노스타시스를 제작하게 됐고, 비잔티움의 벽화 역할도 이어 받게 됐다.

4.2.4. 모스크바 후기[9]

15세기 후반에도 모스크바 화파는 여전히 훌륭한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그들 중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후계자인 디오니시오스는 종교적 주제를 보다 세속적으로 취급했다. 그는 루블료프와 달리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였으나 루블료프 예술의 순수성과 정신성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러므로 밝고 부드러운 중간 색도와 자유롭게 움직이는 선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그의 그림들은 루블료프보다 세속적으로 섬세하고 우아하고 미묘한 것을 선호했으며, 성인들의 인물 묘사에 있어서 신장을 길게 과장했고 명상에 잠긴 부드러운 얼굴을 주로 그렸다.

16세기 말에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화가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일반 뿐 아니라 황제를 위해서도 일했는데, 그들은 예술적 가치가 크고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이콘들을 제작했다. 그들은 16세기 초에 활동한 화가들과는 달리 부드럽고 감정이 섬세한 묘사 방법을 사용했으며, 예배드리는 이콘으로서가 아니라 관람자의 미술적 감상도 겸할 수 있는 이콘을 제작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섬세한 관찰을 위해 소형 혹은 중간형 크기의 이콘을 제작했기에 이들의 이콘은 넓은 장소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17세기에는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문화교류가 긴밀해짐에 따라 배경과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회화 기법이 시작되었다. 이때 시몬 우샤코프는 사물을 정확하고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이 묘사해야 그 특성이 명확하게 포착되며, 이콘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발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유용하고 이러한 이콘을 통해 하느님의 재현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17세기에는 수 백년 동안 고수해온 전통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는 화가들이 많이 배출됐고, 작품들은 세속화됐다. 여기에는 지배층의 의식구조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수즈달 지방의 여러 촌민들은 농한기를 이용해 이콘을 그려 가족의 생계비에 충당했다. 즉 수야, 조루이, 팔레흐시 등의 사람들이 이콘을 만들었는 그중 팔레흐시는 정교회의 중심지로 옛 전통을 중시했으며, 서방에서 들어온 새 유행을 무시했다. 그들은 노브고로드, 모스크바, 루블료프, 스트로가노프 등의 유명한 기법을 새로운 형태로 모방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이콘 회화를 완전히 산업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적 가치를 위해 일하는 이콘 화가들이 있었다. 19세기 말의 이콘 화가들은 양철판 위에 유화 물감을 사용해 성화의 모티브를 인쇄하는 모스크바나 오데사 같은 도시의 공장들과 경쟁하게 됐다. 이 양철판은 목판 위에 놓고 못을 박아 고정시켰으며 교회 계통의 감독관청에서 인가했고, 신자들도 이를 성화로 간주했다. 점차 서유럽 화법이 도입되며서 러시아의 이콘은 그 고유함을 잃어갔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더욱 큰 시련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수많은 성당들이 파괴되고, 이콘들은 불태워졌으며, 이콘 제작을 가르치던 모든 공방들은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일부나마 역사성이 인정된 이콘들은 떼내어져 박물관으로 옮겨지거나 외국에 판매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다시금 러시아 이콘은 부활의 시기를 맞게 됐고, 현재는 서구화됐던 변형보다 황금기였던 안드레이 루블료프 시대의 전통적인 이콘 화법으로 되돌아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으며, 새로운 러시아 이콘의 중흥기를 누리고 있다.

5. 정교회에서의 이콘

정교회의 신학적 견해로는 모든 이콘은 거룩하고 신비롭다. 이 때문에 이콘이 전시된 박물관에서는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고 이콘에 입맞춤하는 정교인도 쉽게 볼 수 있다. 열심한 신자들은 지나가다가 성당 십자가를 봐도 성호를 긋고 화살기도를 한다. 어떤 이콘들은 특별히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데 하느님은 그 이콘을 통해 기적의 역사를 베푼다. 성유나 알 수 없는 향을 발산하거나 병든 이를 치유하거나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해주고 재난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주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눈에 익은 〈블라디미르의 성모〉가 대표적인 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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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의 성모(Θεοτόκος του Βλαντιμίρ)〉, 12세기 콘스탄티노플 학파의 무명 작가 그림
이 이콘이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395년 티무르 모스크바를 침입했을 때의 일이다. 이콘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급히 옮겨온 뒤 바실리 1세 대공은 그 이콘 앞에서 밤새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자 기도의 효험이 있었는지 티무르의 군대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은 채 퇴각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기적에 놀란 모스크바 사람들은 이 이콘을 블라디미르로 돌려주기를 거부했고 결국 모스크바가 계속 간직하게 됐다. 이 이콘의 기적은 1451년과 1480년 타타르 무리의 침입 때도 반복적으로 나타났으며 심지어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해 왔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이콘을 비행기에 실어 주변 상공을 비행하도록 하자 며칠 뒤 독일군이 퇴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콘은 기본적으로 믿음과 영성 수양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정형화된 구도와 매우 수학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인체비례를 적용한다. 심지어 인물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이나 들고 있는 도구, 펼쳐들고 있는 두루마리에도 모두 각각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콘의 구도는 수백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창작은 절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콘화가들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전문장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중세 러시아에서는 이콘을 그리는 화가들이 사제 수도자들이었으며 이들이 이콘을 그릴 때는 사순대재에 준하는 금식기도를 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물감까지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 수도원에서도 이콘을 그리는 수도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도에 대해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위의 〈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은 전형적인 '엘레프사(Ἐλεούσα)', 러시아어로는 '우밀례니에(Умиление)'에 속한다. '자비로운'으로 해석되며 이콘에서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에게 친근한 듯이 얼굴을 맞대는 구도로 나타난다. 하지만 성모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데 이는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아기 예수의 천진한 표정은 수난의 고통을 이겨내고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을 상징하며 황금빛 하늘은 천상왕국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이콘은 전통적으로 널빤지 위에 캔버스천을 붙인 다음 그 위에 금박을 입히고 '템페라'라고 불리는 가루물감을 달걀 흰자와 맥주로 풀어서 그리는데 물감이 상당히 빨리 굳기 때문에 다루기 쉽지 않다. 색칠하는 작업에도 절차가 있는데 먼저 배경과 옷처럼 넓은 면을 먼저 칠하고 그 다음 얼굴, 머리카락, 수염, 문구(文句)순으로 칠해나간다. 마지막으로 광택이 나는 일종의 천연랙커로 마무리하는데 이렇게 되면 이콘이 번쩍번쩍하고 빛이 나고 단단해진다. 단, 이렇게 마무리한 이콘은 성당에서 사용하는 기름등불과 촛불, 향의 연기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점점 검게 변하며 보통 70~100년마다 한 번씩 덧칠한다.

공간의 한계로 인해 이콘에 표시되는 글자는 대체로 압축되어 있다. 가령 ' 예수 그리스도 승리자'라는 뜻의 그리스어Ιησούς Χριστός νικά는 ICXC NIKA로 압축되며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인 Μήτηρ Θεού는 ΜΡ ΘΥ로 압축된다. 이 문구는 각 정교회마다 자국어로 표기하는데 한국 정교회 성당에 가면 한국어 이콘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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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교회의 수호성인들 중 하나인 미라의 성 니콜라스 주교.
산타클로스의 모델로도 유명하다.
사악한 용을 죽인 전설로 유명한 성 요르고스[10] 순교자의 이콘.
16세기 러시아 무명작가 그림. 성 요르고스는 모스크바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이콘 공경은 3차원 도상을 인정하고 성유물에 대해 좀 더 비중을 두는 가톨릭보다 정교회에서 더 강한 편이다. 독실한 정교회 신자들은 가정에 이코노스타시(εικονοστάσι)라는 이콘을 위한 공간을 두는데 러시아에서는 정교회 신자이든 아니든 가정집을 방문하면 그 집의 이코노스타시를 찾아가 그곳의 이콘에 성호를 긋고 친구하면서 공경을 표하는 것이 예의다.[11] '이코노스타시'에는 적어도 3가지의 이콘이 놓여지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콘과 성모 마리아의 이콘, 그리고 그 가정을 수호하는 성인의 이콘이다. 이외에 케루빔 세라핌 천사의 이콘과 다른 성인의 이콘을 놓기도 하며 1쌍의 촛불, 십자고상과 기도서, 성경, 축일날 사용되는 성물들을 함께 비치한다. 축복받은 이콘은 이콘 속에 묘사된 성인이 가정, 직장, 착용자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한다고 믿기 때문에 집이나 사무실, 자동차에 이콘을 비치하고 목걸이로 조그만 이콘을 착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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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져 누운 남편〉, 1881년 바실리 막시모프 그림.
이코노스타시 앞에 무릎을 꿇고 남편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가 묘사되어 있다.
러시아 가정집에는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이런 이코노스타시를 두는 집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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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가게 되면 조그만 성당 모형 안에 이콘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도로 곳곳에서 보이는데 이것은 '이꼬노스따시오 스띠 아크리 뚜 드로무(Εικονοστάσιο στη άκρη του δρόμου)'라고 부른다. 이것은 누군가가 도로에서 사고를 당했거나 전쟁, 살인, 강도 등 불의의 이유로 사망했을 때 그 유가족이나 그 시신을 수습한 사람들이 시신을 찾은 그 장소 위에 세워주는 일종의 추모비다.[12] 주로 죽은 이의 주보성인의 이콘을 모셔놓는다.

6. 가톨릭과 성공회에서의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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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이콘. 폴란드의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이콘.[13]
우선 동방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가 그대로 가톨릭 교회에 귀일하게 된 교파이기 때문에 이콘과 같은 기존 문화는 정교회와 다를 바 없지만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일반적인 인식의 가톨릭, 즉 서방 교회인 라틴 가톨릭교회에서 볼 수 있는 이콘은 위에서 보아 온 철저하게 형식을 갖추어 만들어지는 것과는 좀 다르다. 사실상 '성화(聖畵)'의 역사는 서양의 미술사와 함께 하고 있다.

가톨릭의 성화상은 다른 가톨릭 교회전통이 그렇듯 본질적인 부분은 보존하면서 역사적으로 계속 발전해 나갔다. 박해받던 초세기의 카타콤 시기에는 익투스 같은 간단한 기호와 문양이나 초기 이콘들, 로마 제국의 가톨릭 교회 공인 후에는 모자이크 형식, 서유럽에 본격적으로 퍼져나간 시기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등으로 발전해 온 식이다. 특히 중세의 미술은 권력층 및 종교계와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 시대에 그려진 것의 거의 대부분이 가톨릭의 성화라고 봐도 무난하다. 이 관계는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헬레니즘적인 예술활동으로 치우치게 되어 점점 깨져갔고 성화들의 형식도 많이 희석되어 세속화되었다.

가톨릭의 입장에 의하면 이콘은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했으며 이콘에 대한 공경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살아가면서 그들의 믿음을 실천한 여러 성인들의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생애와 믿음을 기억하고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쉽게 말하면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을 보고 그들을 기억하는 것과 위인들의 동상을 보면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존경심을 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14] 그래서 가톨릭 신자의 가정이나 직장 등에서 정교회의 이코노스타시와 별 차이 없이 선반이나 탁자 위에 십자고상과 성화, 성상, 성경을 모시고 공경한다.

성공회에서는 이콘을 비롯한 각종 시각적 상징을 교회의 전통으로 존중하며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도로 생각한다. 주요 축일 미사( 감사성찬례) 때 제대 주위에 작은 이콘들을 가져다 놓는 성당이 흔하고 성물방에서도 이콘을 판매한다. 성공회 신자들은 십자고상이나 성모상,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성가정[15]을 묘사한 이콘을 보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상기하고 삼위일체나 성서의 여러 사건들을 묘사한 이콘을 보면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성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보면서는 성인들이 굳센 믿음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여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묵상한다. 주요 축일 미사( 감사성찬례) 때 제대 주위를 작은 이콘들로 장식하는 성공회 성당이 많으며 서울주교좌성당에는 커다란 '전능자 그리스도' 이콘과, 성 스테파노, 성 이사야, 성모 마리아, 성 요한 사도, 성 니콜라 이콘이 있다.

가톨릭과 성공회에서는 동방 교회의 영성에 관심을 가지는 평신도들이 늘어남에 따라 정교회 형식의 이콘을 취급하는 성물방이 많아지고 있다. 관심 있는 신자는 지금 다니는 성당의 성물방을 찾아가면 된다. 어떤 성당에서는 이콘과 십자고상을 혼합한 물품도 종종 취급하는데 온라인으로도 구할 수 있으니 비단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구입해 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팔고 있는 이콘들은 사제의 축복을 받지 않은 것이라는 걸 알아두자.

7. 대한민국에서의 이콘

한국에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인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가 러시아에서 이콘을 전공하고 돌아와 가르치고 있으며 작은형제회 소속인 오승민 스테파노 수사가 정동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이콘을 가르치고 있다. 이 둘은 학위기관은 아니며 학위기관은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원 그리스도교 미술학과가 있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신자라면 누구든지 배울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신자는 성모 마리아 신심이 없어서 좀 그렇다고 한다.
CPBC 뉴스 보도 (2022.10)
이콘에 관한 한국 서적으로는 헨리 나우웬의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 장긍선 신부가 저술한 「이콘: 신비의 미」 등이 있는데 2022년에 장긍선 신부의 번역으로 「이콘 그리고 동방의 얼굴들」이라는 이콘 사전이 출간됐다.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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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국 원나라에서 마니교의 사도로 묘사된 예수

동방의 대표적인 종교 예술인 불화 탱화를 이콘 성화와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동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예수의 묘사는 위와 같이 마니교를 통해서였는데, 이콘의 정의가 그리스도교 성화인 만큼 최초의 이콘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다만 후광 같은 광배, 십자가 등의 요소가 두드러지며 불화의 기법으로 예수를 묘사했다는 의의가 있다.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에서는 교파에 따라 이콘을 쓰기도 하고 예배에 활용하는 것을 우상숭배라며 금기시하기도 한다. 이런 교파에서는 예배당 내에 시각적 상징을 배치하는 것을 대단히 기피하여 십자가조차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만 시각적 상징을 활용하는 것이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교파도 있는데 이런 교파의 교인들은 성(聖) 미술이나 이콘을 활용하는 데도 긍정적이다.

루터교회에서는 이콘을 금기시하지는 않으며 미국 유럽의 경우 정교회 등과 교류하는 등 에큐메니컬 분위기의 영향으로 서방식 성상뿐 아니라 이콘도 활용하는 루터교회들이 많다. 다만 한국 루터교회는 이콘을 잘 쓰지 않는데 이는 장로회가 대부분인 한국교회의 특성 때문이다.

장로회에는 이콘이 없지만 각 신자들이 마치 정교회 신자들처럼 집안의 잘 보이는 곳에 예수 초상을 걸어놓은 경우가 아주 많다. 그게 정식 이콘이 아니라 미국에서 현대에 그려진 예수 초상화여서 문제지...[16]

이콘을 그리는 기법이 화장과 아주 유사하다. 우선 이콘을 그릴 캔버스를 준비한 다음 그 위에 금박을 먼저 입히고 밑그림을 그린 다음 템페라 물감을 계란 노른자로 녹인 다음에 밑그림을 따라 진한 색부터 옅은 색으로 칠해나가기 시작하는데 계속해서 덧칠을 하면서 명암을 주는 식인데 이는 세상 창조 때 어둠속에서 빛이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그리스 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정교회에서는 이콘을 다른 성물보다 더 중요시한다. 신자들이 집에서 사용하는 촛대나 향로 같은 성물들은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사제가 강복하는 형태로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이콘은 사제가 축복받을 이콘들을 모아서 지성소 안에 있는 제대 밑에 놓고 40일 동안 보관하며 40일이 지나야 축복이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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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현대에 들어서는 예수나 성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콘식 초상화도 종종 보인다. 그림의 인물은 러시아 음악가 예고르 레토프의 초상화. 가끔 러시아 웹에서 밈으로 사용되는데 배경에 적힌 글자는 "ПВВ НХЙ"로 본인의 초기 시절 노래 제목이기도 한 Пошли Вы Все НаХуЙ(너희 전부 다 좆이나 까라)의 줄임말이다.

그 유명한 강철의 대원수도 이콘을 가지고 있다.[17]

스탈린이 무신론자이면서 이콘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소련 자체가 무신론을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국민들의 신앙이 정교회로 깊이 뿌리내린 것을 무시할 수 없었고 스탈린 자신도 이콘의 신비로운 힘을 강하게 믿었기 때문에 이콘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 '만유의 주관자 그리스도' 이콘으로 분류한다. 하기아 소피아는 성 소피아 성당의 그 소피아를 뜻한다. [2] 아래에 언급했듯 이콘을 뜻하는 현대 그리스어인 εικόνα(이코나)는 고대 그리스어나 현대 그리스어나 종교화뿐만 아니라 그림 자체를 의미한다. 참고로 그리스 원문을 번역하면 '천개의 단어로' 이야기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콘에 들어있는 수많은 상징이 복음서에 쓰여진 내용들을 자세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3] 신명기 4장 15절 [4] 이 주제의 이콘은 서울 아현동 소재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 내부에도 그려져 있다. [5] L.우스펜스키,<정교회의 이콘신학>, 정교회출판사 2012, p.24 [6]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성모와 성인들이 도열한 이콘 [7] 前期 [8] 정교회 성당 내부의 지성소와 회중석을 분리하는 이콘으로 장식된 칸막이 [9] 後期 [10] 게오르기오스, 가톨릭에선 제오르지오라고 부르는 그 성인이다. [11] 마찬가지로 정교회 성당을 방문하면 먼저 입구에서 양초를 봉헌한 다음 앞에 모셔진 주보성인의 이콘에 친구하고 들어간다. [12] 정교회에서는 길바닥에 죽은 채 버려져 있는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을 가장 큰 선행 중 하나라고 여긴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도 처형된 후 농부들이 수습해서 묻어주었다. [13] 가톨릭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 있는 긁힌 자국은 개신교도들의 반달리즘 때문이라고 한다. [14] P.30, <천주교와 개신교> 천주교 대구대교구 박도식 도미니코 신부, 가톨릭출판사. [15]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성 요셉 [16] 가장 흔한 것은 ‘중국에 간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눈 녹은 진흙탕을 갑작스런 충동으로 사진 찍었는데 현상해 보니 예수 초상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검정 얼룩무늬로 그려진 예수 초상. # 심하면 1977년작 영화 〈나자렛 예수〉의 포스터에서 따온 예수 배우(로버트 파웰)의 사진을 모신 집도 상당히 많다... [17]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는데 이 사람은 소련 공산당 소속이고 무신론자이면서 교회를 다 때려잡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자세한 건 이오시프 스탈린 문서의 7번 문단과 이오시프 스탈린/평가 문서의 4번 문단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