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투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에 대한 내용은 노량: 죽음의 바다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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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 소속 | <colbgcolor=#fff,#1c1d1f>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 |
가족 |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 이봉상 · 그 외 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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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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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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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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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 |||
1592년 |
<colcolor=#f0ad73,white> 음력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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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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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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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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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고착화 및 국지전 시기, 정유재란 (일본군 대규모 재상륙) | ||||
1593년 |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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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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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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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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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 |||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노량 해전 露梁海戰 | Battle of Nory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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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제승당에 전시되어 있는 노량 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의 최후[1] | |||||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
1598년 12월 16일 새벽
양력 1598년 11월 19일 새벽 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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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
원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에 따른 일본군의 철수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명 연합 (공세) 승
|
일본 (수세) 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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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주요 인물 |
지휘관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 진린 (어위 도총관 겸 전군도독부도독) |
지휘관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가문의 당주 겸 사츠마 번의 다이묘) |
||
조선 수군 무의공 이순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안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운룡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송희립 (군관) 우치적 (순천부사) 이언량 (사도가장) † 이회 (군관) 이완 (군관) 고득장(高得蔣) (흥양현감) † 방덕룡(方德龍) (낙안군수) † 송여종 (녹도만호) 손문욱 (만호) 배흥립 (조방장) 류형 (해남현감) 김응함(金應緘) (미조항첨사) 이영남 (가리포첨사) † 조효열(趙孝悅) (당진포만호) 정응두(丁應斗) (영등포만호) 우수(禹壽) (안골포만호) 이섬(李暹) (사도첨사) 설우범(薛禹範) (지세포만호) 소계남(蘇繼男) (발포만호) 주의수(朱義壽) (제포만호) 김성옥(金成玉) (사량만호) 안이명(安以命) (당포만호) 정공청(鄭公淸) (조라포만호) 선의문(宣義問) (진도군수) 나대용 (광양가장) 송상보(宋商甫) (강진현감) 조계종(趙繼宗) (보성군수) 남언상(南彦祥) (무안현감) 전봉(田鳳) (장흥부사) 민정붕(閔庭鵬) (회령포만호) 명나라 수군 등자룡 (부총병) † 진구경 (부총병) 진잠 (부총병) 심리 (파총) 계금(季金) (유격장) 도명재(陶明宰) (중군장) † 왕원주(王元周) (참장) 허국위(許國威) (유격장) 심무(沈茂) (유격장) 부일승(副日昇) (유격장) 양천윤(梁天胤) (유격장) 마문환(馬文煥) (유격장) 장량상(張良相) (유격장) 이천상(李天常) (파총) |
사천왜성 시마즈 토요히사 (당주 조카) 시마즈 타다츠네 (당주 3남) 오코히라 타카시게 (가신) † 마치다 히사마사 (가신) † 아카자키 탄고노가미[2] (가신) 아리마 스미후사 (가신) 이세 사다나리 (가신) 이세 사다마사[3] (가신) 이와키리 노부후사 (가신) 우와이 카네마사 (가신) 쿠보 유키모리 (가신) 오야마 유키츠나 (가신) 고다이 토모야스 (가신) 사이다 시게마사 (가신) 사가라 나가야스 (가신) 시라사카 마사무네 (가신) 츄마 시게가타 (가신) 니이로 타다모토[4] (가신) 니이로 타다마사[5] (가신) 니이로 료안 (가신) 하시구치 야스시게 (가신) 히시가리 타카토요 (가신) 히로바 시게츠나 (가신) 혼다 치카아사 (가신) 야노 켄운 (가신) 요코야마 타다아츠 (가신) 카바야마 히사타카 (가신) 카바야마 쿠타카 (가신) 키이레 타다츠구 (가신) 야마다 아리노부 (가신) 야마다 아리나가 (가신) 나리토 마사토요 (가신) 타네가시마 히사토키 (가신) 타네가시마 시라노부 (가신) 오야마 유키츠나 (가신) 오야마 츠네무네[6] (가신) 오시카와 키미치카 (가신) 카와카미 히사토모 (가신) 카와카미 히사시게 (가신) 카와카미 타다자네 (가신) 카와카미 타다노리 (가신) 키노와키 스케히데 (가신) 세토구치 시게하루 (가신) 미하라 시게다네 (가신) 데라야마 히사가네 (가신) 쵸주인 모리아츠 (가신) 이쥬인 타다무네 [7] (다이묘) 이쥬인 타다자네 (다이묘의 장남) 고성왜성 타치바나 무네시게 (다이묘) 타치바나 나오츠구 (당주 동생) 이케베 사다마사 (가신) † 쓰쿠시 히로카도[8] (다이묘) 모리 히데카네[9] (다이묘) 남해왜성 소 요시토시[10] (다이묘) 게이테츠 겐소 (가신) 부산왜성 데라자와 히로타카[11] (다이묘) 데라자와 카몬효에이 (가신) 데라자와 세이로쿠 (가신) 데라자와 세이이치 (가신) 순천왜성 고니시 유키나가[12] (다이묘) 우츠노미야 쿠니츠나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 (다이묘) 오무라 요시아키 (다이묘) 마츠라 시게노부 (다이묘) 고토 하루마사 (다이묘) |
병력 |
조선 수군 병사 6,000~7,000명[13] 판옥선 50척~60척[14] 협선+방패선 80~180척[15] 명나라 수군 병사 15,000~18,000명 판옥선 2척 사선+호선 300척 |
일본 수군 [16]병사 22,000~23,000명[17][다만] 안택선+세키부네(일부 고바야) 약 350척 이상[19][20] |
피해 |
조선 수군 병사 150~300명 전사 전선 0~4척 손실[21] 명나라 수군 병사 200~350명 전사[22] 전선 1~2척 손실[23] |
일본 수군 일본 수군 절반 사살(최소)[24] 혹은 13,000명 사살[25] 전선 200척 침몰 전선 100척 나포(?)[26] |
결과 | 조 명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조선 수군
최고 지휘관 전사 * 조선인 포로 수백명 구출[27] * 일본 수군 극소수 및 수뇌부 탈출[28] *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종결[29] |
[clearfix]
1. 개요
노량 해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7년 전쟁을 끝낸 전투이자 이순신 생애 최대, 최후의 해전이다.[30]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지휘하는 조선- 명나라 연합함대가, 철수하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함대를 구조하려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일본 함대를 속여 노량해협에 유인한 후, 기습하여 관음포로 몰아넣고, 극소수의 탈출을 제외한 대다수를 침몰 또는 나포시켜 큰 승리를 거두었다.[31]
2. 배경
2.1. 명량 대첩 이후 조선의 제1차 공세
1597년 10월 17일(음력 9월 7일)의 직산 전투와 1597년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으로 육로와 수로에서 일본군은 모두 공세종말점을 맞이했다. 일본군의 다이묘들은 가망이 없어진 전쟁에서 철수하고 싶어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으로의 철수를 금지했으므로, 남해안에 왜성들을 짓고 수비에 들어갔다.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려는 공세를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2]
- 1598년 1월 16일(음력 12월 6일), 조명연합군이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를 벌여 소폭의 성과를 얻었다.
- 1598년 1월 29일(음력 12월 23일), 조명연합군이 울산성 전투를 벌였으나 공성에 실패했다.
- 1598년 1월 말, 명나라군 50,000명이 부산포왜성을 공격했으나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방어에 막혀 공성에 실패했다.
2.2. 히데요시 사후 조선의 제2차 공세
1598년 9월 18일(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정권을 위임받은 고다이로(五大老, 5대로)와 고부교(五奉行, 5봉행)들은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의 공식적인 철수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절대로 일본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실익적으로는 적의 전력을 온전히 보내줬다간 재침략의 불씨가 될 수도 있거니와, 감정적으로도 7년 동안 조선 곳곳을 잔악무도하게 유린한 대가를 치르도록 할 생각이었다.조명연합군은 이 소식에 따라 사로병진책을 세워 공세를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33]
- 1598년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조명연합군이 사천 왜성( 시마즈 요시히로) 방면을 공략했으나( 사천성 전투)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 1598년 10월 19일(음력 9월 20일), 조명연합군이 순천 왜성( 고니시 유키나가) 방면을 공략했으나( 왜교성 전투)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 1598년 10월 21일(음력 9월 22일), 조명연합군이 울산 왜성( 가토 기요마사) 방면을 제2차 공략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1598년 10월 28일(음력 9월 29일), 이순신이 이덕형, 선조, 명나라의 왕사기와 편지로 작전을 주고 받았다. "솥을 치우고 소를 잡는 등 일본군이 대대적인 철수 준비", "그들을 몰아(세워), 소굴을 벗어나면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살해하면 가장 기묘한 책략", "먼저 왜교를 치고 나중에 남해를 도모" 등의 작전이 담겼는데, 이것이 1개월 뒤 실현되었다. #
2.3. 순천 포위망을 통과한 일본 연락선
1598년 12월 초(음력 11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퇴각까진 아니어도 연락선만이라도 다닐 수 있게 해달라며[34] 뇌물을 보냈다. 이순신은 몹시 어이없어 하며 뇌물을 가져온 사신을 죽이려다가 참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진린은 이를 수락해 연락선 1척의 통과를 허용했다.1598년 12월 11일(음력 11월 14일) 무렵, 일본군 4명이 탄 고니시의 연락선이 진린 측의 포위망을 통과했다. 이순신이 격노하여 추격을 명령했고, 추격군은 한산도까지 추격했으나 결국 연락선을 놓쳤다.[35] 연락을 받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의 소 요시토시(고니시의 사위), 부산의 테라자와 히로타카 등에게 남해의 창선도로 소집령을 내렸다. 이로서 순천의 일본군, 창선도의 일본군 사이에 조명연합군이 도리어 포위되는 처지에 놓였다.
3. 전개
[ruby(今日固决死, ruby=금 일 고 결 사)] [ruby(願天必殲此賊, ruby=원 천 필 섬 차 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항복의 《백사집》( 1629년)에 기록된 이순신의 마지막 출정 전 맹세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항복의 《백사집》( 1629년)에 기록된 이순신의 마지막 출정 전 맹세
3.1. 위장공격과 매복
|
노량 해전 직전의 전개도 (12월 15일) |
1598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늦은 오후
- 이순신은 진린을 찾았고, 함께 출전했다.[36]
- 1598년 12월 19일 이덕형의 보고에 따르면, 이순신은 "연락선이 순천을 떠난지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먼저 나아가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진린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에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청하자 함께 하기로 했다.
- 1599년 2월 2일 이덕형의 보고에 따르면, 이순신은 "적의 구원병이 수일 내 당도할 것이니, 난 먼저 가서 요격하겠다" 라고 했으나, 진린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순신이 듣지 않고 단호히 나팔을 불며 배를 띄우자, 진린도 어쩔 수 없이 함께 따랐다고 했다.
- 진린과 등자룡은 이순신이 선물한 판옥선 2척에 나눠 타고 출전했다. 그리고 그 뒤를 사선과 호선들이 뒤따랐다.
- 이순신은 함대를 셋으로 나눴다. 서쪽의 순천왜성을 위장공격하려는 극소수의 위장함대, 동쪽의 노량해협을 포위하려는 본함대/복병함대. 여수 좌수영에서 동쪽의 노량해협까지 노를 저어 하루 반절이 걸렸다.[37]
1598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늦은 밤
- 해가 지고 한밤중, 이순신의 위장함대가 서쪽의 순천왜성을 무너뜨릴듯 포격하며 상륙할 것처럼 위장했다.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이 연락선이 나간걸 알자, 구원군이 오기 전에 순천왜성을 끝장내려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절박해져 봉화 수준이 아니라 산을 불태우며 멀리 긴급함을 알렸다.
- 창선도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불길을 보고 '조선 수군이 노량 쪽을 막지 않고 순천 쪽으로 갔다'고 해석하고 노량해협을 신속히 통과하기로 결정했다.
3.2. 노량에서 관음포까지의 유도
|
노량 해전 전개도 (12월 16일 오전 0~4시 무렵)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0~2시
- 일본 함대가 노량에서 순천 방향으로 물의 흐름이 생겨날 때 창선도를 출발해 노량해협을 통과했다.
- 일본 함대가 '해협을 통과한 뒤' 조선 복병 함대가 기습 포격하며 해전이 시작되었다. 조선 수군이 순천 쪽에 있으리라 생각한 일본 수군은 당황했다.
- 수 척의 일본 함선이 격침될 쯤에, 시마즈는 복병 함대의 수가 적음을 파악하고 이들을 포위하려 했다.[38]
- 그러자 죽도 부근에 매복하던 명나라 함대가 합류했다. 진린의 판옥선은 도독기를 높이 올리고 북을 치며 진격했다. 등자룡의 판옥선은 불랑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돌격했다.[39]
- 조선 복병 함대는 기습 외에도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명나라 수군을 호위하는 임무 또한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함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공격하였다.
- 시마즈는 이들과 전면전을 하며 시간을 소비하거나, 노량해협을 거슬러 되돌리기보단, 따돌리고 빨리 전진하기를 선택했다.[40]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2~4시
- 일본 함대가 관음포[41][42]까지 전진했을 때(유인되었을 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 본 함대가 등장했다. 이로서 일본 함대는 3면이 포위된 형태가 되어 버렸다.
- 조선 본 함대는 첨자찰진(삼각형의 돌격형)으로 경상우수사 이순신(무의공)을 선봉장으로 어린진(전방이 두터운 방어형)으로 전진하던 일본 수군의 옆면에 등장해 파고 들어 지휘부 쪽을 위협하자, 지휘부의 수호를 최우선하는 일본 함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43]
- 때마침 부는 북서풍을 이용해, 조명연합군이 화공(불화살, 신기전, 불 붙은 짚섬)까지 가했다.[44]
- 순천왜성 쪽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위장함대에 속은 것을 알고 군영을 철수해 배를 출발시켰다.[45]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4~6시
- 일본의 선봉대가 불능에 빠졌을 무렵, 시마즈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나라 수군 방향으로 포위망을 벗어나자고 총공세를 명령한다. 이에 아직 전력이 보존 된 중위-후위 병력들이 빠르게 돌진했다.[46]
- 때마침 등자룡의 판옥선이 명나라 아군이 잘못 쏜 포에 의해 불이 났다.[47] 일본 함대가 여기로 공격을 집중하자 결국 등자룡이 전사하고 판옥선은 불타버린다. 명군 파총 심리가 등자룡의 배를 구하러 달려들었으나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 이 여세를 몰아 일본군은 진린의 판옥선에도 달려들었으나, 이순신의 본 함대가 또 다시 진린을 구원하였다.
- 명나라 수군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의 본 함대는 일본 수군 중앙을 파고들던 첨자찰진에서 점차 포위진으로 변경되었고, 이후 근접한 일본 함대에 포격을 가하며 포위망을 조이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야간이었기에 전함식별 및 조준이 어려워 평소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서 화포발사를 해야 했고, 근접전/백병전도 자주 발생했다.[48]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6~8시
- 명나라 수군 방향으로 돌파가 무산된 상황에서, 바닷물의 방향이 바뀌었다. 야간이라 방향을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 수군은 바뀐 물의 방향을 따르면 다시 노량해협을 지나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관음포 앞바다의 파도는 관음포 만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일본 수군은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49]
- 조명연합군은 관음포 입구에 정렬해 입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포위섬멸하려 하고, 일본 수군 역시 죽기살기로 관음포를 다시 나가기 위해 최후의 발악으로 달려든다.[50]
- 순천왜성의 고니시는 해가 밝은 뒤 시마즈의 구원함대가 대패하는 것이 보이자 먼 바다로 도망쳤다.
3.3. 불타는 관음포와 이순신의 죽음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8~10시- 일본 수군은 명나라+조선2군 방향이 아닌, 이번엔 조선1군 즉 이순신의 대장선 방향으로 탈출하려 한다.[51]
- 따라서 이순신의 대장선을 비롯 전라좌수군이 직접 돌파를 시도하는 선박들을 추격-포위한다. 일본군 선두의 시마즈 요시히로의 대장선(안택선)이 반파되어 작은 배로 옮겨타야 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위기에 처한다.[52]
- 일본군 후방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군이 관음포를 또 빠져나와 조선1군의 후방을 찌르고 들어오면서 난전이 발생했다. 이 덕에 시마즈 요시히로도 탈출에 성공했다.
- 이 난전으로 조선1군의 전라좌수영 다수 장수들이 전사했고, 최고지휘관 이순신 역시 전사했다.
이순신의 죽음
- 총탄을 맞은 경위
-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덕형은 "혈전을 하던 중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라고 보고했다.
- 류성룡의 '비망기입대통력-경자'에 따르면 "장군이 직접 화살을 쏘고 돌팔매를 하자, 부장들이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고,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
- 총탄을 맞은 방향
- 류성룡의 징비록은 '총탄이 가슴을 관통해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기록했다.
- 안방준의 은봉전서는 '총탄이 겨드랑이 아래(腋下)'에 맞았다'고 기록했다.
- 이순신의 유언
- 이어진 전투
- 징비록에는 이순신 형(이희신)의 아들( 이완)이 이순신의 명령대로 이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기록되었다. PDF001책 86쪽
- 조선왕조실록에 이덕형은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 아들(이예)이 울려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손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고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이 죽지 않다고 여겨 용기내어 공격했다"고 보고했다.[57]
- 조선왕조실록에 권율은 " 손문욱이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 손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주사의 공이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 선조수정실록은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대신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은봉야사별록에 송희립이 독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장선에 있던 송희립도 부상을 입었고, 유형은 탄환을 6발이나 맞고도 전투를 독려했고, 가리포첨사 이영남 역시 잔적을 소탕하다 전사했다.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10~12시
- 바다는 왜선 2백여척이 부서지고 시체, 판자, 무기, 갑옷이 뒤덮여 물이 흐르지 못하고 붉었다.
- 일본군 50척 가량은 관음포에서 탈출에 성공해 외해로 도주했다.[58]
- 일본군 100척 가량은 관음포에서 탈출에 실패해 배를 버리고 남해도에 상륙, 도주했다.[59] 이는 이틀 뒤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이어진다.[60]
3.4. 결과
주요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 조선 -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방덕룡, 고득장, 이영남, 이언량 / (호남절의록)[61] 이설, 정기수, 나대용의 종제 나치용, 오용운, 오극성, 남병, 나득룡, 김몽성, 이충실, 김덕방, 김예의, 김득효, 강극경, 이덕수, 김득룡, 이응춘, 신인수, 김두흥, 이덕경, 김말동, 김백운 / (용사일기) 안헌
- 명나라 - 등자룡(부총병), 도명재(진잠의 부장)
- 일본 - 오코히라 타카시게, 마치다 히사마사, 이케베 사다마사 등
조선 측 <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24일, 을사) #
- 진린의 보고 - 왜적의 배 1백 척을 포획했고, 2백 척을 불태웠으며, 5백 급을 참수했고, 180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까지 떠오르지 않아 그 숫자를 알 수 없다. 이순신이 전사했다.
- 1598년 12월 19일(선조 31년, 음력 11월 27일, 무신) # [62]
- 이덕형의 보고 - 사천-남해-고성의 왜적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 1백여 척은 남해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고니시(소서행장)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 사관의 논평 - 어느 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이순신이 진린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린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허락하였다. 조명연합군이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에 쓰러지니, 이순신의 아들(이예)이 울려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손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고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이 죽지 않다고 여겨 용기내어 공격했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그리고 이순신의 죽음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적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본 측 <정한록(征韓録)>에서는 끝부분에 전사한 26명 외 다수의 가신들을 열거하고 있다. <정한위략(征韓偉略)>에서는 시마즈 가문 문서(島津家記)를 인용하여 따르던 군사의 절반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군비록 <高麗軍秘錄>에서는 공격을 받은 일본군이 질서 없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고 한다.[63] 일본 측의 전과는 명군 200명을 살해하고, 조선 배 4척, 명나라 배 2척을 포획했다고 기록했다.[64]
애초에 일본 측에서는 버티고 있는 조선 장수가 이순신인 이상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은 전투였다. 그러나 질 것을 알면서도 해야만 했던 게 일본의 입장에서 이 전투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 조선에 갇혀 있는 다이묘들을 구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비록 일본은 조선에게 대패를 당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구출하는 데에 성공해 원래의 목적은 달성했다. 다만 그 대패의 정도가 너무 컸다. 8500여명 살리자고 그 두 배 인원과 군함 300여척을 잃었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의 명성에 비해 매우 적은 병력을 가지고 참전한 것이 노량해전에서의 피해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순신이 지휘한 해전 중 가장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해전이다. 본래 임진년 부터 이순신이 지휘한 해전에서 발생한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극히 적어서 조선 수군의 사상자 수보다 파괴, 침몰한 일본 수군의 함선의 수가 더 많은 경우가 비일비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노량 해전에서는 이순신 본인을 비롯해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야간전, 그리고 진형이 엉킨 근접전과 난전으로 인해 인명 피해가 많이 발생한 것. 그럼 근접전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기존 해전들과 달리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전략적인 목표는 "퇴각" 이었고 조선군 역시 전략적 목표가 "격퇴" 가 아닌 "섬멸" 이었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싸우려고 하는 적이 상대라면 상대와의 거리를 조절하며 화포를 쏘아 전의를 꺾고 물리게 하여 격퇴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퇴각하려는 적이 상대라면 당연히 이런 전술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격퇴하려 하면 격퇴하려 할수록 다음 기회란 없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더더욱 결사항전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군의 전략적 목표가 퇴각이고 조선군의 목표는 섬멸이었으므로 필연적으로 포위 후 근접전을 벌이게 될 수 밖에 없는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4. 가설
가설/주장/연구/논쟁 관련한 내용은 문단을 접었다. 문단 제목을 클릭하여 펼 수 있다.===# 전투 규모 추정 (조선-명) #===
<임진전란사>에서 정리한, 노량 해전에 참가한 조선군 장수들과 명나라군 장수들은 상단 도표와 같다.
조선 수군의 규모 추정
- 이순신 직속 7천명, 기타(협선 등) 0~2천명
- 바로 직전 왜교성 전투 당시 조선 수군은 7,328 ~ 10,000여명이었다.
- 노량 해전에 충청 수군은 합류하지 않았으므로 이 때보다 조금 적을 수 있다.
- 판옥선 60척
- 판옥선 당 승선 인원이 대략 120명이므로 7,000명의 탑승에 대략 60척이 필요하다.
- 1600년 12월 24일, 선조실록에 나대용이 정유재란 직후 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판옥선 총 숫자가 60여척이라 했으므로 대략 이 전후 숫자가 추정된다.
- 충청 수군(충청수사 오응태)은 합류하지 않았다. 따라서 노량 해전에서 판옥선은 60척보다 적은 수였거나, 충청 수군이 판옥선이 전무했을 수 있다.
- 협선 90~180척
명나라 수군의 함대 규모 추정
- 진린 직속 5천명, 등자룡 직속 3천명, 기타 0~1만명
- 바로 직전 왜교성 전투 당시 투입된 명나라군은 5,000 ~ 19,400여명이었다.
- 1598년 3월 29일, 선조실록은 진린 휘하는 5,000명이었으나, 9월에 왕원주의 병력이 더해져 7,000명이 되었다고 했다.
- 1610년, 이분의 행록은 진린이 7월 16일 5,000명을 데리고 이순신에게 합류했다고 했다.
- 1630년, 신흠의 상촌집은 등자룡 휘하는 3,000명이고, 진린 휘하는 8,590명이었으나 9월에 왕원주의 병력이 더해져 10,590명이 되었다고 했다.
- 판옥선 2척
- 사선(대형) / 호선(소형) 300척
-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명나라 왕원주, 복승, 이천상의 배가 각 100척, 총 300척이라고 기록했다.
- 일본 측 우도궁고려귀진물어 역시 명나라 배를 300척이라고 기록했다.
- 1598년 10월 24이 선조실록에 큰 배(사선)에는 100명씩, 작은 배(호선)에는 30-40명씩 탑승했다고 했다.
일본 측 정한록, 조선정벌기는 명군 혹은 조명연합군 전선을 500척이라 했는데, 이는, 조선측 판옥선 60척 + 조선측 협선 100여척 + 명나라측 사선/호선 300척을 일컫는 것일 수 있다.
혹자는 기록에 남아 있는대로 명나라의 대장선(판옥선) 2척만 소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노량해전에 참전한 명나라 수군의 전력들이 다수 있거나 명나라 수군이 노량해전의 승리에 대하여 어떠한 식으로든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자료들도 있다. 무엇보다, 대장선만 참전하고 관망한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군법을 넘어 오늘날 기준으로도 다 사형감이다.
- 2006년 10월, 남해역사연구회의 책 '이순신과 노량해전' PDF
- 2008년 2월, 장학근의 책 <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 2013년 5월, 김연수의 책 <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 2014년 6월,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의 '임진왜란 시기 명 수장 이금의 군사 행적 고찰전' 이순신연구논총 발표 #
- 2018년 4월, 송은일 전남대 교수의 '정유재란기 명 수군의 참전과 예교성전투' 이순신학술세미나 발표 PDF
- 2018년 4월,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의 '명실록 중 노량해전 전적 기록에 대한 분석' 이순신학술세미나 발표 PDF
- 2018년 4월,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의 '노량해전의 승리요인에 대한 몇 가지 관점' 이순신학술세미나 발표 PDF
- 2018년 4월,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의 '노량해전에서 발휘한 이순신의 전술과 리더십' 한국해양안보포럼 발표 #
- 2018년 6월,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의 '노량해전의 승리 요인과 역사적 평가' 이순신연구논총 발표 #
- 2018년 6월, 송은일 전남대 교수의 '명나라 시기 수군의 대외 참전과 활약' 중국학총론 KCI논문 #
- 2022년 2월,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의 '조선후기 청산도 진린도독비의 건립과 역사적 의미' 이순신연구논총 발표 #
- 2023년 3월, 이종화 건양대 교수, 윤헌식 이순신전략연구소 연구원의 '노량해전의 조명연합수군 규모' KCI논문 PDF
- 2023년 6월, 박주미 국립목포해양대학교 해군사관학부 교수의 '자율-안보 교환 모델을 통해 본 임진왜란 시기 조·명 연합수군의 해전 수행 연구' KCI논문 #
===# 전투 규모 추정 (일본) #===
- 1591년, 임진왜란에 시마즈 군은 15,000명을 동원했다.[65] 시마즈 군은 출병 이래 전투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손실은 없었다.[66] 임진년(1592년) 태풍으로 격군-선원을 일부 잃었으나 미미한 수로 정유재란 시 복구되었다.
- 1596년, 시마즈의 보고 기록에 따르면 가신인 이쥬인의 병력까지 15,000명을 정유년(1598년)에 재도입할 계획을 밝혔다.[67]
- 1598년 10월, 사천성 전투에서 시마즈 군은 7,000~8,000명이었다. 선조실록 1598년 9월 28일 추정으로, 같은 기록에 '어떤 이는 1만여 명이라고도 한다'는 것을 병기했다. 상식적으로 성밖에서 성안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 또한 시마즈 군은 사천성 전투의 성과를 부풀린 전적이 있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 1598년 12월, 노량 해전 참전 무장별 군역장에 따른 병력 추정은 다음과 같다.[68]
- 1600년 10월, 사쓰마(시마즈)의 세키가하라 전투 참여규모를 통한 추정
- 1609년 3월, 사쓰마(시마즈)의 류큐 왕국 침공규모를 통한 추정
- 시마즈는 3천명을 동원했다. 이를 두고 '이에야스 막부의 기습침공 방어를 위해 3천은 남겨야 했을 테니 전체 규모는 6천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 때는 막부가 시마즈에게 류큐 복속을 명령한 때라 오히려 가진 걸 쥐어짜 신속히 류큐를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따라서 이 3천만으로 시마즈 가의 군 규모를 알긴 어렵다. 또한 임진년/정유년에 잡병/포로 고용이 빈번했으며, 그간 성인이 되었을 장정도 있다.
===# 일본군 저격설과 반박 #===
전근대 시대의 조악한 명중률의 화승총으로, 야간의 난전[73] 속에서, 호버링하는 헬기보다 더 흔들리는 전근대 시대의 배에 탑승한 상태로 변변한 조준도구도 없이 사람을 온전히 저격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전근대 시절 전쟁에서 장수가 눈먼 화살 등에 맞아 전사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일단 전쟁터 자체가 워낙 위험한 곳이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에 장수라고 특별히 보호막이라도 있지 않는 한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 총알, 포탄이 장군만 피해가란 법은 없다. 실제 역사를 봐도 무수한 이름 난 장군들이 전장에서 그 명을 달리했다. 특히 전근대 시대에는 지휘관이 직접 최전선에 섰기에 근현대 시대의 전쟁보다 지휘관급의 희생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국시대에 일본군이 조총수들을 경보병처럼 운용, 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지휘관들을 노리고 쏘는 전술을 자주 했고 육상전에선 조선 장수들이 저격당한 것처럼 보이는 정황들이 기록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노량 해전은 배가 격하게 요동치는 상황에서 전근대적 화기를 발사하는 엄연한 해전이다. 조선 측 명나라 측 일본 측 어디에도 관련 기록은 없다.
하지만 앞뒤 정황만을 따져 볼 때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비록 해상전에서의 저격은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시마즈군은 분명 저격 전술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며 수하에 정예 총병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시마즈군에는 가신인 타네가시마씨[74]가 함께 종군했는데 이들은 당시의 최정예 총병대로 이름높았다. 또한 시마즈군에는 후퇴하며 자살적 후비대를 남겨두어 적장을 저격하는 전법인 '스테가마리'가 존재했는데, 저격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전술이 해상전에서 사용되지 말란 법이 없다.[75]
물론 해상전에서 전근대적 화약무기를 가지고는 저격이 거의 불가능[76]하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적인 조준사격의 경우이며, 전근대적인 일제사격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이순신과 비견되는 영국의 넬슨 역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군 전열함의 마스트에 있던 머스켓 사수들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바가 있다. 당장 멀리 갈것도 없이 이순신도 사천해전에서 조총 사격으로 부상을 당한 기록이 있는데, 노량 해전에서 일제사격성 저격이 일어나지 않을거란건 말이 안된다. 이들이 가장 고가치 표적인 대장선의 장대를 향하여 집중사격을 가했다면 피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관련된 사료가 없는 이상 증명이 불가능한 상상의 영역이지만, 퇴각전에서의 적장에 대한 기습적 저격 전술을 즐겨 사용했고, 정예 저격수 집단이 종군했던 시마즈군과 정면대결한 전투에서 하필 추격전을 벌이던 충무공이 전사했다는 것은 분명히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일본군 저격설의 변형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막하에서 순왜가 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에 귀순해 일본의 정보를 넘겨주고 노량 해전때 이순신의 대장선에 동승했던 손문욱이 사실은 위장귀순하여 일본측의 밀명을 받고 이순신을 노량해전 중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 이 역시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조총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손문욱은 참모군관으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판옥선 장대에 이순신과 손문욱만 있었던 게 아니고, 기록에 따르면 송희립, 이회, 이완 등이 함께 장대에 있었다. 그렇다면 손문욱이 전투 지휘 도중 이순신에게 조총을 겨누는 행동을 한다면 다른 군관들에게 발각되어 제지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어떻게 몰래 저격하여 조총을 발사했다고 치더라도 발사 폭음과 섬광을 주변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조총은 발사하는데 1분이 넘을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 동안 멀뚱허니 바라보고만 있을 리도 없다. 그래서 손문욱 암살설을 진지하게 믿는 학자는 없으며, 일본 조총수가 쏜 탄환에 우연히 이순신 장군이 맞았다는 게 지배적인 설이다.
===# 이순신 자살설/은둔설과 반박 #===
자살설/은둔설 주장 측은 이순신이 왜군을 추격하면서 갑옷을 벗고, 지휘관실에서 벗어나 적군의 사거리에 들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주장한다. 왜 이랬냐는 물음에는 이순신이 전쟁이 끝난 뒤에 선조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전란 후를 생각했을때 모두를 위해서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주 헛소리는 아닌 것이, 전쟁이 끝난 후에 큰 공을 세워 유능하고 명망 높은 장수가 집권층의 질투와 두려움을 사 토사구팽 당하는 예는 인류 역사에서 적지 않다. 게다가 당시 임금인 선조는 이순신을 증오하여 전쟁 중에도 대놓고 그를 잡아들여 고문을 하는 등 이순신을 제거하려 한 전적도 있었으니 충분히 합리적 추측이다. 또한 이순신은 당시 조선 민중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전쟁이 끝나며 공적이 알려지면 인기는 더욱 늘 것이고, 그를 억압한 조정에 대한 반감은 급증했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자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군주인 선조의 의심병적인 성질로 미루어 볼 때 노량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후에 못볼 꼴을 당하지 않게 하였고, 그의 명예를 위해서 가장 잘 된 일이라고 생각들을 하곤 한다.
이순신이 생전에 명 수군 도독직을 받았다고 보는 측에서는 특히 이것 때문에 이순신이 자살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해당 논란에 관해서는 이순신/의문점 항목 참조.
이순신 자살설은 비단 현대뿐만이 아닌 조선 후기에도 심각하게 논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숙종 때의 영의정 이여는 "충무공이 총탄에 맞기를 자처했다"라고 말하고, 신료인 이민서도 "당쟁으로 김덕령 장군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김덕령의 죽음을 논하면서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이순신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77] 또한 이후의 매천 황현의 《 매천야록》도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이이명은 "공이 아무리 앞에 다가올 화를 걱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겼겠는가?"라며 자살설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78]
사실 이순신 자살설이 수면에 오른 건 남천우 박사가 역사 비평에서 간행한[79] 이순신 전기에서 다시 들고 나왔다. 문제는 남천우 박사가 자살설을 지지하는 게 아니고 자살설이 있으나 강하게 부인하면서 생존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은 죽은 게 아니라 부하들과 짜고 변복해 숨어 소실집이나 본가의 다른 방에 은거하다가 20년 후에 진짜로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80] 꽤 많은 사람들을 낚았으나 이는 근거가 전혀 없다. 남천우 박사는 이순신의 자서전을 발견했다고 했으나 그 자서전이라는 게 이분의 충무공 행록이다. 원래 숨어살면서 "나는..."이라고 쓴 자서전을 이분이 3인칭으로 바꾸었다는 이론이다. 그러니 낚이지 말자.
사실 이러한 자살설이 불거진 큰 이유는,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과 노량 해전의 처절함이 어쩐지 자살하기에 딱 좋은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인 맥락을 조금만 안다면 노량 해전은 생각 만큼 (조선 입장에서는) 처절한 전투도 아니었고, 이순신이 처한 상황 또한 자살하기에는 택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노량 해전은 조선 입장에서 봐도 충분히 처절했다.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작전에 말려들어 두들겨 맞기는 했으나 여전히 명군과 합세하더라도 150대 500척의 군사적 차이가 있었고 관음포로 도망간 상태에서 입구가 막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배수진을 쳤던 당시 일본군의 상황은 이제 이순신에게 겁먹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이곳을 뚫고가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처절한 전투에서 최고지휘관이 자살할 생각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다시 말해, 자살설은 이순신 장군의 군인 정신을 폄하하는 설일 수 있다. 노량 해전은 이순신 스스로 그토록 원하던 전투였다. 이순신 본인이 일본군에게 가장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라 전투에 큰 심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객관적으로도 이순신은 조선 수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투 현장에서 전 수군을 지휘하고 명군의 말도 안 되는 행동과 명령을 중재하고 더 나아가 이의제기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막중한 권한과 임무를 짊어진 것을 알면서,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하늘에게 빌며 원했던 해전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자살하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남긴 공적과 군인 정신을 폄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순신 입장에서 이 노량 해전은 최후의 전투도 아니었다. 시마즈는 고니시 군을 구원하러 온 것이었기에 격파했을 뿐, 이순신의 가장 큰 목표는 시마즈가 아니라 고니시였다.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자가 뒤에서 살아남아버렸는데 그 책임감 강한 이순신 장군이 과연 자살을 하려 했을까? 만약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살아남았다면 곧바로 고니시를 부산까지 추격했을 것이며, 아예 부산 근처에 돗자리 펴 놓고 왜군이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제2차 부산포 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81] 노량 해전 이후 조명연합군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군사력이 격렬하게 소모된 것도 있지만 이순신의 죽음으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게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전사했기 때문에 노량 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된 것이다.
KBS 역사 프로그램에서 이순신 자살설 및 생존설을 주제로 다큐를 만들다가 문중의 항의로 내용을 바꾸어서 방영한 적이 있다.
이를 명량이 흥행했을 때 MBN 프로그램인 아궁이에서 다루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을 연구한 학자가 이런 설이 나도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 즉 위대한 영웅인 이순신이 적군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 있다는 것으로 합리화 한 것이라 평했다.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 노량해전 무용론과 반박 #===
다만 패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일본의 장수들은 모두가 온 마음을 다 해 귀화하려 하고 있다.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고 있다. 너희도 각기 여러 병선들을 이끌고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군사들의 진영 가까이 머무르면서 불화를 야기하거나 혼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였는데, 왜인들이 진을 친 채 점거하고 있는 거제·웅천·김해·동래 등은 모두 우리나라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 하였는데, 제 고장이란 대체 어디를 말합니까? 불화와 혼란을 일으킨 자도 우리가 아니라 왜입니다. 왜인은 권모술수와 거짓에 능하여, 예로부터 신용을 지키는 의로움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저 흉악한 무리들이 아직도 악행을 멈추지 않은 채 연안으로 물러나 한 해가 다 가도록 돌아가지 않고 있으며, 이곳저곳을 날뛰며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전보나 배나 더하니, 무기를 집어넣고 바다를 건너가고자 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1594년 금토패문에 대한 이순신의 답장 |
일본의 극우매체로 알려진 산케이 신문의 서울 특파원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미 전투 의지를 잃은 적을 기어코 추격하다 전사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이순신을 떠받드냐'고 비판한 바 있으며 일부 일본 극우 네티즌 역시 이와 비슷한 뉘앙스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전쟁의 특수성을 싸그리 무시하고 그저 일본 자신들의 당시 입장만 근거로 내세운 몹시 편협한 주장이다. 전쟁이라는건 당사국들 중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을 멈추고 싶다면 당사국들이 모두 전쟁을 끝내는 것에 동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개적인 종전선언을 해야 전쟁이 끝나는 것이다. 즉, 서로가 동의하고 더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해야지 전쟁이 끝나는거지 상대방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철수한다고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예로 휴전 선언 직전까지도 서로가 전투를 벌이던 한국전쟁이 있고 당장 철수에 대해 협상중이던 1593년 철수 협상중이던 와중에도 한양에 갇혀 고사중이던 일본군을 부산포로 돌려보냈더니 결집한 일본군은 대뜸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일으키고 주민을 몰살해 버린 사례까지 있다.
이에 반해 노량해전 당시 일본은 조선과 협상은커녕 종전선언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즉 노량 해전은 어디까지나 사로병진책의 연장선상에 있던 전투이며 일본은 여전히 조선 땅을 점거한 채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하며, 약탈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군이 노량 해전에서 매복 공격한 건 싸움을 완전히 포기하고 돌아가는 패잔병을 비겁하게 풀어주지 않고 공격한 게 아니라, 포위를 뚫으려 몰려오는 적을 섬멸하는 엄연한 전쟁 행위였다. 실제로 당시 명군은 그저 우리가 더 이상 피를 보기 싫다며 자신들의 참전을 거부한 게 전부였지 '명백하게 전쟁 포기 의사를 보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패잔병을 공격하는 비겁한 짓을 하기 싫다'며 조선군을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당대의 일본에서도 노량 해전을 비인륜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종전선언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직 전쟁은 진행중인 것이었고 조선이 정당한 전쟁을 수행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강화협상 결렬로 히데요시가 재차 침공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났었으니 조선과 명으로서는 이번에도 같은 패턴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재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정식으로 끝난 것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정식으로 종전을 위한 국서가 오고 조선과 일본 양국이 협상한 뒤인 광해군 1년인 1609년 기유약조를 맺은 후이고, 그 사이 약 10여 년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휴전조차 아닌 대치 상태에 가까웠으며 실제로 해당 기간 내인 1604년에 에도 막부가 크메르 왕국에 보낸 주인선(朱印船) 선단이 조선 측 해역에 표류하자 조선 수군이 이를 요격하여 대규모 전투까지 벌어진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많은 전쟁들이 이런 식으로 한 쪽이 일단 물러났다가 나중에 다시 재침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백년 전쟁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이름과는 달리 진짜로 영국과 프랑스가 100년동안 조금도 안쉬고 풀타임으로 싸운게 아니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뒤 실제로는 한창 싸우다가 힘에 부치면 잠시 각자의 본국으로 돌아가서 회복하고 난 뒤 다시 침략해서 맞붙기를 수십번 반복하다가 선전포고일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에야 양국이 합의하여 종전선언을 함으로서 종식된 전쟁이라 백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요전쟁은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다가 서희와의 담판으로 잠시 물러났지만 아직 종전선언을 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일 2차 전쟁이 발발했고 여기서도 종전선언이 이루어지지 않은채로 거란군이 본국으로 철군했다가[82] 재차 3차 전쟁이 발발했다가 귀주 대첩으로 거란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거란이 협상에 나서서 거란과 고려 양국이 전쟁을 종결하는데 공식적으로 동의함으로서 여요전쟁이 막을 내렸다. 즉 모든 전쟁은 당사국들이 합의하여 종전선언을 마쳐야 정말로 끝나는 것이다.[83]
물론 결과론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이 전쟁을 포기하게 된 건 사실이지만, 이후에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으면 전대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재개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내전에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임자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후대의 눈으로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었고 그가 조선과의 전쟁을 지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 조선의 누가 그런 미래를 알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결과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1599년에 소 요시토시와 그의 가신인 야나가와 시게노부에게 강화를 명하면서 만약 조선 측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다음 해에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이라는 절박한 정세 속에서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에게 상락(上洛)을 재촉하고, 그 이유로서 조선과의 강화가 성립되지 않았을 경우, 출병에 대해서 상담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이 이에야스의 지시를 받아 조선과의 교섭을 담당하게 된 소 씨는 조선 측에 일이 있을 때마다 이에야스의 강화에 대한 열의를 강조하는 한편, 교섭이 성립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다시 출병도 불사한다고 하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히데요시·이에야스 등 정권 담당자를 비롯한 당시 무사계급 전체의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실태는 참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전쟁에 참가한 모든 다이묘의 가보(家譜)가 각기 전투에서의 무공을 자랑스럽게 나열해 써놓은 것도 이것과 관계한다. 즉, 그들 군사정권의 담당자에게 ‘무위(武威)’만이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본이었으며, 전쟁에서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지배의 정당성을 근저부터 흔드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강화는 동시에 조선 복속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교섭이 성립되지 않았을 경우에 ‘무위’를 보이기 위해서 다시 출정한다고 하는 자세를 가령 표면적인 모습이라 할지라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도요토미 정권이 가진 외교 논리의 특징이며, 도쿠가와 정권도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막말에까지 이른다.[84]
또한 17세기에 들어서게 되면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만주족이 조선과 명을 압박해 오기 시작하는데, 만일 왜군이 노량 해전을 치르지 않고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으로 퇴각하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면 조선으로서는 자칫 북으로는 만주족, 남으로는 일본의 위협에 맞서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선 측 입장에서 일본의 철군은 종전 이후 철군이 아닌 전략적 후퇴에 가까웠고 이렇게 후퇴한 대규모 병력이 다시 공격해올지 모를 상황이었다. 구로다 가쓰히로의 말대로 후퇴하는 적을 고이 보내주는 것은 전쟁을 장기화하고 미래의 위험을 만들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현대전을 포함해 모든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고 퇴각이나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문제될 거 없다. 현대에 와서도 노량 해전처럼 후퇴하는 적을 얼마나 잘 섬멸시키는지, 반대로 후퇴하는 측은 얼마나 적은 피해로 잘 후퇴하는지의 여부가 전쟁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괜히 전쟁 전술에 추격전술과 퇴각전술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송양공의 사례처럼 고이 보내주는 게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명연합군은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어 향후 전쟁 의지를 꺾어야 했고, 그래서 노량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군이 입는 피해의 정도와 무관하게 단순히 왜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게 목표였던 이전 전투와 달리 왜군을 최대한 섬멸하는 게 주요 목표였고, 야간전이라 사망자도 많이 나왔다.
즉, 결론짓자면 이는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가문이 망한 뒤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여러 교섭들을 통해 결국 강화를 맺어 재침략하지 않았다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지 당대의 냉철한 시각에서 보면 노량 해전은 필수불가결적인 전투였다. 물론 노량해전이 없었더라면 이순신을 비롯한 수많은 장병들이 죽진 않았겠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사실 임진왜란 문서에 적혀 있는 일본의 내부 사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 내 유력 다이묘들은 조선 침략에 소극적이었으며, 어쨌든 당시 일본 1인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으니 형식적으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가 얼마 안 돼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가 대다수였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과 일본의 상황을 보면, 나라가 한 번 뒤집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과는 달리 일본 측은 큰 전력을 소모하지 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임진왜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손쉽게 재건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큰 피해 없이 승리를 거두고 에도 막부의 쇼군이 됐으니 가능했던 것이지, 만약 노량 해전에서 친 도요토미 세력을 크게 섬멸하지 못해서 도요토미파의 세력이 조금 더 강성한 상태였다면 일본 내 세력 구도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다.[85] 이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약화시킨 노량 해전을 비롯한 임진왜란 그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5.1.1. 조선왕조 오백년
마지막 회를 빛내는 전투로 유명하다.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하늘에 기도하는 이순신을 연기한 김무생의 연기는 전율할 정도. 김무생은 그해 연기 대상 후보에 올랐다. 이순신의 최후도 적의 구원군[86]이 온다는 소식에 그것을 보러나가다 총에 맞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유언은 유언대로 하고 방패로 가렸을 뿐 아니라 지휘를 하는 것처럼 앉아서 서서히 사망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부하들도 마지막에야 장군이 사망한 것으로 알게 된다. 진린은 이전부터 찌질이로 나오는데, 진린을 연기한 배우(국정환 씨)가 초반에 1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전한 명나라 장수 조승훈을 연기한 배우와 같다. 다른 작과 달리 왜군이 진린이 탄 함선에까지 도선해와서 육박전을 벌이는 장면이 연출되며 이를 본 이순신이 진린을 구하는 충실한 고증이 여기에서는 나온다.5.1.2.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1598년 11월)
세상의 끝에 선 투쟁
스스로 피흘려 부르는 희망
불멸의 승리를 향해
오라, 아득한 적이여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ㅡ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 예고1, KBS[87]
세상의 끝에 선 투쟁
스스로 피흘려 부르는 희망
불멸의 승리를 향해
오라, 아득한 적이여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ㅡ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 예고1, KBS[87]
천지신명이시여, 이기게 해 주소서.
적을 무찌른다면 저 노을을 따라 오늘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들의 피로 물들였던 바다일세.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4회 ~ 5회 초반, 마지막회(104회)에서 나왔다.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치열한 전투신,
김명민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4회는 칼의 노래를 많이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설정으로 비난이 많았던 부분, 도자기 운운하는 도자기 덕후 왜군 일당,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동귀어진하는
이영남[88], 고질적인 파열탄 등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회(104회)는 4회와는 비슷한 부분이 일부 있으나 4회 방영 이후 설정 변경 등으로 인해 대사, 장면, BGM이 4회와는 다르게 나왔으며 새로 촬영한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4회와는 달리 역사상의 전투 기록과 대부분 비슷하게 나왔으며 파열탄, 동귀어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등자룡이 전사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89]적을 무찌른다면 저 노을을 따라 오늘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들의 피로 물들였던 바다일세.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진린을 설득하여 고니시를 구원하러 오는 일본군 지원군에 맞서기 위해 출전을 한다. 매복을 하고 있다가 사거리 내에 왜군이 접어들자 시원하게 포를 쏘는 것으로 전투의 서막을 알린다. 야간전투인 것을 제외하면 여느 이순신의 해전처럼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다. 불멸의 이순신 자체가 마지막에 전사+자살설을 절충한 거라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스스로 벗어[90] 전사한 이영남에게 덮어준 후 직접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한다. 붉은 철릭 차림에 조총 사거리 내에 대장선이 들어섰고 결국 조총에 맞게 된다.[91]
이순신이 총탄에 맞자 역사대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한 후, 송희립이 울부짖음과 더불어 독전고를 두들기면서 돌격하라고 소리치며 이완 역시 돌격을 명령하게 되자 명나라 측의 진린과 모든 조선 장수[92]들이 칼과 활을 빼들어 공격하는 모습과 이순신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참다가 송희립의 승전 보고를 듣자 마침내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고, 주변에 있던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우는 장면은 드라마의 마지막편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의 최후를 그린 전투답게 비장한 OST와 배우들의 연기가 어울려져 많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통제사 이순신, 그와 함께 우리는 왜적을 맞아 23번을 싸워 23번을 이겼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 이긴 것은 비단 왜적만이 아니었다.
ㅡ장수들의 회상 전 권준의 독백
ㅡ장수들의 회상 전 권준의 독백
"우리는 지난 200년간, 조선 사회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수많은 관행, 그리고 구습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ㅡ무의공 이순신
ㅡ무의공 이순신
"또한 우리는 무기력하고 나태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
ㅡ김완
ㅡ김완
"우리는 수많은 불가능에 도전하고 또 도전했으며 마침내 승리했다."
ㅡ나대용
ㅡ나대용
"패전의 뼈아픈 치욕과 싸워 승전고를 울렸다."
ㅡ우치적
ㅡ우치적
"깊은 절망과 싸워 이겼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 이순신 전사 전
= 이순신 전사 후 영웅이라 이름하기에도 너무나 큰 인간, 이순신.
우리는 그를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바다에 묻는다.
그러나, 우린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
왜적을 맞아 전승을 기록한 위대한 군인으로만 그를 기억코자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싸워야 할 적이 자기 자신임을 깨달을 때, 원칙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용기가 있을 때, 백성을 하늘로 알고 마음을 다하여 섬길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93]
ㅡ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 마지막 권준의 내레이션,[94] KBS
= 이순신 전사 후 영웅이라 이름하기에도 너무나 큰 인간, 이순신.
우리는 그를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바다에 묻는다.
그러나, 우린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
왜적을 맞아 전승을 기록한 위대한 군인으로만 그를 기억코자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싸워야 할 적이 자기 자신임을 깨달을 때, 원칙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용기가 있을 때, 백성을 하늘로 알고 마음을 다하여 섬길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93]
ㅡ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 마지막 권준의 내레이션,[94] KBS
5.1.3. 징비록
50화에서 묘사된다. 이순신이 총탄에 맞는 장면이 발 CG인 것,[95] 또한 불멸의 이순신의 칠천량 전투씬 장면 일부를 재활용해 뜬금없이 거북선이 등장하거나 판옥선이 포격을 맞는 장면이 나온 것, 그리고 실제로 전투에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96], 타치바나 무네시게, 테라자와 히로타카 대신 노량 해전에 참전하지도 않았으며 노량 해전이 발발하기도 전에 일본으로 퇴각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나온 것이 흠이다.[97]
그래도 마지막 전투이자 드라마의 마지막 화인만큼 치열한 전투의 분위기는 잘 살린 편.
5.1.4. 임진왜란 1592
5회에 나온다. 예산상의 문제로 대부분 징비록, 불멸의 이순신 장면을 재활용하였다. 그래서 전투 장면의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못 받으나 이전의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들과는 달리 노량 해전의 고증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노량 해전에 참전했다는 역사 왜곡을 저지른 이전 사극과는 다르게 고증대로 시마즈 요시히로가 조명 연합군의 주적으로 나오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아예 노량 해전 장면에 나오지도 않는다.5.2. 영화
5.2.1. 성웅 이순신
김진규가 주연 및 감독을 맡은[98] 성웅 이순신에서는 대낮[99]에 전투를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조선 수군과 이순신에 호의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명장 진린[100]이 나오는 것이나, 일본 측 장수로 고니시 유키나가[101]만 나온다.[102]5.2.2. 노량: 죽음의 바다
자세한 내용은 노량: 죽음의 바다/줄거리 문서 참고하십시오.5.3. 다큐
5.3.1.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1992년에 제작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4부작.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당해 왜성에 갇혀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그동안 조선에서 노략질한 금은보화를 탈탈 털어서 뇌물로 주고 자신들을 몰래 빼내달라고 사신을 보내 협상하지만 이순신이 엄청나게 분노하여 "우리 조선을 이 지경까지 망가뜨린 놈들은 절대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게 된 탓에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에 열받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들이 잡아두고 있던 명나라 병졸 포로 중 2명의 손목을 잘라서 진린에게 그 4개의 손을 보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일이 이 지경까지 가자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러 왔고 이순신은 이런 시마즈 요시히로를 완전히 박살냈다. 특히 이순신은 휘하 병력들에게 그동안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자제하고 있었던 백병전까지 허락해가면서 왜군을 모조리 도륙할 것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한밤 중에 해변에서는 조선군들과 왜군들이 각자의 군함을 옆에 두고 패싸움을 벌이게 된다. 무기를 든 병력도 있고 주먹질로 싸우는 병력도 있다. 이 전투에서 일본에 대한 이순신의 분노가 제대로 묘사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조하러 가는 왜군과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조하지 못하게 막는 조선군 간의 현피였다. 결국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구조한 병력보다 전사한 병력이 훨씬 많았다.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으로 여러 가설을 제기했다. 뭐가 옳다고 딱 잘라 주장한 것은 아니고 그냥 여러가지 가설을 내놓았을 뿐이다. "진두지휘하다가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 전투엔 갑옷이 아닌 구군복을 입고 참전해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조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전사했다", "전사하지 않았다. 15년 뒤 아무 이유 없이 이순신의 무덤이 800m 이장했다"
엔딩은 해가 뜰 무렵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병력들과 같이 뛰어서 도망치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식량이 다 바닥나서 군마를 도축해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맨 마지막에 허리와 다리에 큰 중상을 입고 엎드려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두 팔로 기어서라도 도망치려고 발악하는 왜병의 모습이 보인다.
5.3.2. 기타 방송국의 다큐들
- 2008년 5월, KBS 한국사전(이순신 3부작의 3부)에서 불멸의 이순신 전투장면을 편집 및 활용하여 방송하였다. 이순신 자살설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기도.... 3부
- 2016년 5월,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도올이 강의했다. 예고편
- 2021년 5월, 국방TV( 국방홍보원)에서 노량해전 해설 다큐를 만들었다. #
- 2022년 7월,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방송했다. 방송분
- 2022년 12월, SBS 비디오머그가 이순신 은둔설을 다루었다. #
5.4. 소설
5.4.1. 칼의 노래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2001년
김훈의 소설. 서문 마지막 문장은 노량 해전을 앞둔 이순신의 독백이다.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소설의 대미를 장식한다. 뇌물을 받고 싸움 직전 퇴각하는 일본군을 그대로 놓아준데다, 대놓고 싸우기 싫어하는 진린을 바라보며 충무공은 '이 자식 죽일까'라고 독백한다.[103] 전투에 앞서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라고 독백하며 면사첩을 불태우는 충무공의 모습은 비장미의 절정이다. 이순신이 총탄을 맞고 서서히 숨이 끊어지며 되뇌는 독백도 진국인데,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것은 자연사와도 같다며, 자신의 죽음에 오히려 안도하는 모습은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동시에 숨이 끊어지기 직전, 난중에 죽은 여인 여진과 아들 이면의 냄새를 떠올리는 묘사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면모도 눈물겹다.
5.4.2. 타임슬립 쓰시마 해전
1994년 영 챔프 창간준비호에 실렸던 단편으로 글, 그림은 김은기. 1994년 당시 남해에서 해상훈련을 하던 대한민국 해군함정 2척이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16세기 말로 타임슬립을 하게 되는데,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노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군 함정 지휘관은 역사에 개입할 수 없었기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노량에서 빠져 나가는 시마즈군의 잔존 함대는 20세기 무기들로 전멸을 시켜버리고 다시 원래 시간대로 귀환한다는 이야기.5.5. 게임
5.5.1. 임진록 시리즈
1997년 게임 임진록과, 2000년 게임 임진록 2에선 조선 진영의 마지막 캠페인으로 등장하고, 2001년 임진록 2의 확장팩 조선의 반격에선 첫번째 미션으로 등장한다. 차이라면 조선의 반격에서는 이순신이 죽지 않고 부상당했으며 이후 시나리오에서 전장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5.5.2.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시리즈
1999년 게임. 단편 캠페인 모음인 "역사적인 전투"에 포함되어 있다. 실제 역사와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게 단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캠페인 공략/역사적인 전투 항목 참조. 여담으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시리즈의 캠페인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 시간대의 미션이다.6. 관련 문서
[1]
제승당에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은 출처가 불분명한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한 기록화가 있으며 고증 오류가 많다. 노량 해전 당시
거북선은 운용되지 않았으며, 조선군은 두석린갑을 입지 않았고,
판옥선의 모습도 일부 틀리다.
[2]
본명은 불명.
[3]
이세 사다나리의 동생.
[4]
귀신 무사시로 이름을 날린 시마즈 가문의 최고참 중신이다.
[5]
니이로 타다모토의 아들
[6]
오야마 유키츠나의 동생.
[7]
시마즈 가문의 가신이었으나 독립하여 다이묘가 된 인물(타치바나 무네시게와 고바야카와 타카카게도 이와 같은 케이스로 다이묘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로 인하여 규슈 통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시마즈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 도요토미 정권과의 강화를 목표로 분골쇄신 했다. 히데요시는 그런 타다무네를 높이 평가하여 휴가 미야코노조 지방의 8만석 짜리 영주로 독립 시켰는데 이러한 상황을 시마즈 가문은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겼는지라 1599년 이쥬인 타다무네를 불러들여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격분한 아들 이쥬인 타다자네는 시마즈 가문에 반기를 들었으나(쇼나이의 난) 진압되어 1602년 타다자네를 비롯한 이쥬인 가문은 모두 몰살당한다.
[8]
부인이 다카하시 쇼운의 부인과 자매 사이다. 즉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이모부
[9]
히고의 고쿠진 잇키 토벌 당시 다나카 성 공략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으며, 함께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의형제를 맺었다.
[10]
순천 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다. 장인을 구원하러 사천 왜성의 시마즈 가문에 요청했다.
[11]
구원군에 합류해 노량해협을 함께 통과했으나, 조명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반격이 아닌 도망치는데만 집중했다.
[12]
자기를 구하러 온 시마즈의 구원군이 조명연합군에게 실컷 얻어 맞는 모습을 멀리서 관전하면서, 우회하여 몰래 빠져나갔다.
[13]
바로 직전의
왜교성 전투 당시 조선 수군 병력이 7,328명이었으므로, 노량 해전 투입 병력은 최대 7,000명이었을 것이다.
[14]
60척이 모두 투입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나대용이 정유재란이 끝난 후 삼도의 판옥선이 60척이라고 보고했다.
[15]
판옥선 1척당 2~3척.
[16]
순천 왜성의 8,500여 명 및 전선 70여 척은 전투에 불참하고 도주하여 집계하지 않음.
[17]
시마즈 15,000명, 타치바나 5,000명, 기타 2,500명. 군역장/순왜/조선인 포로 일체 포함.
[다만]
이것보다 많을 수도 았다. 예를 들어 한산도 대첩이나 명량 해전 당시 병력 규모를 추정해보면 군역장보다 훨씬 많은 인원으로 추측되는데, 군선이 300척이 넘었으니 더 많은 인원도 추측 가능하다.
[19]
《선조실록》의 기록이며,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500여척
[20]
시마즈군은 121척. 다이묘급은 안택선에 탔다.
[21]
《조선왕조실록》이나 명나라의 기록에는 조선의 함선 손실 기록이 없다. 《
난중잡록 》기반의 조선측 기록으로는 '함평' 소속 전선 1척이 격침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마즈 가문은 4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4척의 함선 손실을 그대로 믿기도 어려우며 사실이라 해도 이 4척 중 2척 이상은 정황상 협선이나 방패선이었을 확률이 높다.
[22]
영문위키 및 중국위키에서는 500명을 조명연합군 합계 사상자로 보고 있다. 따라서 조선군/명나라군 피해를 분리한다.
[23]
등자룡이 탄 판옥선 1척은 확실하게 격침됨.
[24]
일본의 《정한위략》(征韓偉略) 기준. 일본측 대장선조차 분멸되었으며, 겨우 작은배로 옮겨 타서 생존한 시마즈 요시히로를 비롯 200척이 완파(참고로 시마즈의 전선이 총 120여 척이었다. 따라서 다치바나를 비롯한 다른 다이묘들의 피해도 컸을 것이다.)되었고, 이외에 추가적인 피해를 본 것을 감안하면 피해규모는 최소 70% 이상이다. 또한 《
정한위략》에는 조선군이 칠천량 해전 당시 무려 전선 200척이 넘는 막대한 피해를 봤다는 과장이 버젓이 서술되어 있는 등 어디까지나 일본측 기록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볼 대목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록하기 좋아하는 일본측조차도 자국의 피해규모를 200척이 넘는 상당한 수준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300척이 넘는 배 중 200척 이상이 완파되었으며, 반파 등 추가적인 피해도 있었을 것이다.
[25]
《선조실록》
참고.
[26]
조선측 보고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명나라 장수 진린 측의 기록.
[27]
명나라 장수 이천상의 공으로 알려졌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천상에 대해 인품이 좋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구출한 포로를 몰래 자신의 배에 머물게 하다가 조선 수군에게 적발되었고 공적을 부풀렸으며, 선조 앞에서 거만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
[28]
순천 왜교성 주둔군 70척 탈출, 창선도를 출발한 구원군 50~60척 탈출.
[29]
일본군은 남해안에 왜성들을 쌓고 조명연합군과 5년 이상 힘의 평형을 이뤘기에, 조명연합군 측의 공세가 꺾였다면 이러한 상태가 그대로 고착화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 함대가 이 중 순천/사천 두 곳의 큰 군세를 무너뜨렸기에 일본군은 전면 철수하게 되었다.
[30]
참고로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는 노량해전의 마무리격인
남해왜성 소탕전이었다.
[31]
1383년 5월 정지 장군이
관음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지 215년이 지난 시점에, 같은 곳에서 일어난 전투였다.
[32]
울산-부산이 장악당하면 순천-사천의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갈 길 자체가 사라져 조선에 전군 투항할 수 밖에 없었다.
[33]
사로병진책은 3로의 육군, 1로의 수군을 의미한다. 즉 고니시의 순천 왜성은 육로 및 수로가 완전 포위되었다. 왜성들에 틀어박힌 일본군의 군수 보급은 처참한 수준이 되었는데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도 자기가 타고 다니던 말을 도축해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였다. 당시 기병 하나를 양성하는 비용은 기와집 3채였다.
[34]
조명연합군에 의해 10월에 포위되기 이전까진 순천(고니시)-사천(시마즈) 사이에 이전부터 연락선이 오갔다. 한 번은 순천에서 사천으로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시마즈의 가신 시키네 요리모토(敷根頼元)와 가마타 마사토미(鎌田政冨)가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
[35]
이것이 《난중일기》의 마지막 내용이다.
[36]
명나라의 입장에선 일본이 재침략을 해도 이제 자국까지 전쟁이 번지기 어려워졌으므로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진린의 입장에서 이순신이 그간 수급과 전리품을 챙겨주며 크게 접대한 점, 왜교성 전투에서 목숨을 살려준 점 등이 있어 명나라 수군도 함께 참전한 것이었다. 두 보고 내용이 엇갈려 울며 청했는지, 단호히 박차고 나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37]
여수 좌수영에서 노량해협까지 24km며, 조선 수군은 약 8~9km/h이므로 최소 3시간 정도, 전략적 배치에 1~2시간을 생각하면 늦어도 오후 3-4시에 출발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38]
군사력은 병력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란체스터 법칙이 당대의 해전에서 가장 잘 적용되며, 물량을 이용하여 포위하는 것은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술이다. 실제로 시마즈가 옳은 판단을 한 것이다.
[39]
명나라 수군의 사선-호선들은 일본의
세키부네에 비해 열세였지만,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우위였다. 또한 사선-호선은 포위전선을 구축하고, 백병전을 하는 정도는 부족함이 없었다.
[40]
세키부네 중심의 일본군은 추격해올 명나라/조선복병함대의
판옥선보다 신속하므로 따돌리고 이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순천의 고니시군이 봉화를 올린데다 명나라/조선복병함대가 소수인만큼, 조선 수군의 주력은 여전히 순천 쪽에 있을 가능성이 있어, 순천 쪽으로 향하면 '포위공격'이란 당초 일본 측의 구상에 맞다. 또한 병목구간인 노량해협을 그것도 역류에 후퇴하는 것은 힘들고 후미의 피해가 커질 수 있다.
[41]
觀音浦. 현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앞바다
[42]
215년 전의
정지 장군의
관음포 전투 승리 이후 관음포에서 발생한 2번째 한일 해상 세력 간 무력 충돌이기도 하다.
[43]
일본군은 에도 막부가 금지하기 전까지 다이묘가 사망하면 순사라는 명목으로 가신들도 줄줄이 죽일 정도로 책임을 물었다. 다이묘가 전사했다간 가신들 입장에선 어차피 본인도 죽거나
로닌 즉 실업자가 되어 가족들의 생계가 끊기므로, 자기가 죽어도 다이묘는 무조건 지켜야만 했다. 반대로 조선군은 최고지휘관이 전사해도 부하들이 최선을 다 해 싸운 게 입증되면 죄를 묻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칠천량 해전은 원균의 전략이 너무 어리석었기에 귀환한 장군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44]
불화살은 속력 때문에 날아가다 불이 꺼지기 일쑤라, 바람을 적합히 타야 화공이 일어난다. 날씨도 조명연합군을 도운 것이다. 불타는 일본군 함대가 산을 이뤄 밤 바다가 환해졌다는 기록이 상촌집에 나온다. 또한 임진왜란의 해전 중 가장 근접전이었는데 적선과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적의 얼굴표정이 다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45]
오전 7시반 일출 뒤 시마즈 함대가 패색이 짙어 도주하는 모습을 여수해협에서 이들이 보고 함께 도주했다면, 대략 3~4시에는 순천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순천왜성에서 여수해협까지 18km 가량이며,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보다 살짝 빠른 11~12km/h이지만, 물량이 파악되지 않는 위장함대의 재기습도 조심해야 하므로 4시간에 걸쳐 조심히 이동했을 것이므로. 또한 순천왜성의 불길을 창선도가 보고 출발했듯, 이 무렵 조명연합군의 포성과 화공의 불길을 순천왜성 쪽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46]
세키부네의 방향전환 능력이나 안정성은 판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전방 기동력은 뛰어났다.
[47]
고의적인
팀킬을 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명나라의 전함도 병력도 함포사격에 특화되지 않아 적중률이 떨어져 실수로 맞춘 것이다.
[48]
상촌집에는 당시 서로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근접전이 이루어졌다고 묘사했다.
[49]
야간에 기습받자 방향을 잘못 잡고 퇴로 없는 만에 배를 몰아넣어 많은 배를 잃은
칠천량 해전의 복수극이 된 셈이다. 두 해전 모두 최초교전지(칠천량/노량)를 해전명으로 하고, 궤멸지(춘원포/관음포)를 해전명으로 하지 않는다.
[50]
이들은 사천/남해/고성/부산에서 군영도 모두 정리하고 온 데다가, 여기에서 배를 잃으면 고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영영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51]
시마즈 가문은 포위된 상황일수록 오히려 적의 대장 방향으로 돌파하는 전략을 짜곤 한다. 스테가마리(捨て奸)라 불리는 이 전략은
시마즈의 퇴각 문서 참고.
[52]
시마즈 가문의 기록인 일향기, 정한록 등이 출처.
[53]
戰方急, 愼勿言我死.
[54]
징비록은 류성룡이 1604년까지 작성한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 류진(柳袗)이 간행한 것이다. 이후 1657년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도 같은 유언이 수록되었다.
#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 1566~1619)이 지은 행록에는 본래 이 유언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충무공가승(1716)과 이충무공전서(1795)에 실린 후대 판본에 징비록을 바탕으로 해당 내용이 덧붙여졌다.
#
[55]
愼勿發喪, 揚旗鳴鼓, 猶我之生.
[56]
與賊對陣, 愼勿發喪.
[57]
손문욱은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귀순해 다시 조선 장수가 된 인물이다.
[58]
해전 뒤 최종적으로 도망에 성공한 일본 함대는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50척, 일본 기록에 따르면 60척이다.
[59]
이덕형의 보고에 따르면 (나포된, 즉 불타지 않은) 1백여척어치 인원은 남해로 상륙해 도망쳤다.
[60]
다수는 남해도에서 다시 뗏목을 급히 지어 한반도로 도주했고, 1천명 가량은 남해도에서 나가지 못 하고 소탕되었다.
[61]
18세기 말에 쓰였다. 이순신의 동순참좌제공(함께 싸우거나 전사한 선비들)은 144명이고 동순제공(함께 전사한 선비들)이 58명인데 그 중 21명, 약 38%가 노량에서 전사했다고 기록했다.
[62]
1599년 음력 2월 2일,
선조가
이덕형에게 과거 보고했던 수군의 대첩이 과장된 것이 아니냐 의심하자, 이덕형이 재차 거짓이 아님을 확언했다.
#
[63]
"日本方 被成御打負 御船散散罷成候 維新公 御召船誠御難儀候."
[64]
등자룡의 판옥선 1척 격멸은 교차검증으로 확실하므로, 명군이 정말 200명 죽었을 수 있다. 하지만 배 포획 성과는 과장되었거나 협선의 격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산포 해전도 92척의 협선이 74척의 판옥선과 함께 출격했고, 1593년에는 250척에 달하는 규모였다.
명량 해전 역시 협선 32척이 함대에 포진해 있었다. 물이 얕은 바다에서는 판옥선 대신 잔적 소탕에 투입되는 등 전투임무도 수행했다.
세키부네에 비해 우월한 체급이 아닌 협선과 방패선이라도 노량 해전에서는 뒤에 둘 상황이 아니었다. 방패선과 협선은 정원이 50-32명으로 추정되는 만큼 노량에서 판옥선의 엄호를 기대하기 어려운 밤에 정말 처절한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판옥선에 승선한 장수들도 전사하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웅포해전에서도 조선 전선이 피해를 입은바 있는데 이 피해가 모두 협선의 피해였다.
[65]
미키 야스시(Miki Yasushi)
가고시마대학 교수
#
[66]
이때문에 2차 진주성 전투 직전에 히데요시로 부터 경고를 받았다.
[67]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따르면 피로인(끌려간 조선인)중 끌려가 군사훈련을 받은 자만 해도 3~4만에 달한다고 한다. 2005년 후지키 히사시가 쓴 <천하통일과 조선침략>에 따르면 1596년 시마즈 스스로가 동원하는 병사는 12433명이고 가신인 이쥬인 타다무네가 동원할 병사는 233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외 기마 사무라이 240인까지 더해 15337명이다. 이쥬인 타다무네는 노량해전이 끝난지 얼마 안지나 시마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68]
1990년대 나온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조선역을 이유로 일본군 전체 병력이 7~8천에 불과하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 하지만 기록된 군역장보다는, 함선 수에 탑승인원을 곱해 추정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 자명하다. 일례로
명량 해전의 일본군 군역장은 와키자카+도도+구루시마 7천명에 불과하지만, 세키부네 130척 안택선+고바야부네 170척이상의 탑승인원을 추정하면 이를 크게 상회한다.
[69]
난중잡록이 "조선인 남녀 포로가 많았다"는 점과, 명나라 이천상의 조선인 포로 수백명 구출 기록이 교차검증된다.
[70]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직후로 내부 사정이 어려웠기에 시마즈 가는 그 규모와 히데요시의 요구에 비해 동원한 병력이 적었고, 이마저도 힘들게 마련했다. 그게 피해를 입은 것이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현실이다. 상식적으로 동원할 병력이 있어야 동원 운운할 게 아닌가?
[71]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료는 이유를 시마즈식의 동원 체계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그 외에
요시히사와의 갈등으로 요시히로가 직접 모은 병력만 이끌고 갔다는 것, 내부 사정이 어려워서 그랬다는 설 등이 있다.
[72]
미카타가하라 전투 직후
코사카 마사노부가 이에야스에게 '시간을 끌면 노부나가가 8만을 이끌고 올 것' 간언했지만 실제
나가시노 전투에 온 것은 3만이었다. 즉 간언도 추정치인 것. 보통 석고 1만 석당 250명으로 계산하는데, 시마즈 가는 70만 석으로, 17,000명 동원이 최대다. 그리고 조선처럼 바다건너 공세가 아닌, 방어전에 1만을 동원하긴 어렵다.
[73]
이순신이 피격된 시간은 전투막판인 오전 8시경으로 시야가 충분히 확보된 시간이다.
[74]
일본에서 가장 최초로 철포를 접하고 자체 생산한 것으로 유명한 씨족. 히데요시에게 존재감을 어필하기 위해 수백 정의 철포를 상납하기도 했다.
[75]
임란 후 벌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와 비교해보면, 세키가하라에서는 노량해전과 마찬가지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반드시 살려서 퇴각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여기에서 스테가마리를 통해 도쿠가와측 명장
이이 나오마사를 저격하여 치명적인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 세키가하라에서는 스테가마리로 투입된 병력이 모두 전사하여 누가 저격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76]
아케치 미츠히데 등 빼어난 조총 사격술을 보여준 기록이 있는 장수들도 대부분 정지된 표적을 남들보다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쏘아 맞춘 것을 뽐낸 정도에 그친다.
[77]
다만 이민서가 쓴 "갑옷을 벗고 싸웠다." 부분은 '열심히 싸운다'는 뜻의 관용적 표현임이 정설이다. 마치 발 벗고 나선다라는 표현이 실제 맨발이 아닌 적극적으로 앞장선다는 의미이듯
[78]
왕조 시대에 왕과 빚는 갈등으로 인해 자살설이 화제로 떠오를 정도면, 당시 왕을 섬기던 사대부들조차 선조의 처사를 도리에 맞지 않다고 본 것이다.
[79]
사실 이론이 너무나 허술하고 사료적 가치가 많은 편이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상대적으로 비주류인 역사 비평사에서 출간할 수 있었다.
[80]
사망한 지 3일 뒤에 묻혔고 20년 뒤에 현재 위치에 이장한 건 맞으니까 사실은 그 때 안 죽고 이장할 때 죽었다는 논제.
[81]
즉 정녕 이순신이 자살하겠다는 결심을 했어도 적어도 제2차 부산포 해전 쯤의 전투 막바지에나 실행했을 것이다.
[82]
참고로 이 때도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철군중이던 거란군을 공격해서 끌려가던 고려인 포로들을 다수 구출하였는데 거란측에서 이에 대해 문제를 삼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비록 거란이 전쟁 의사를 잠시 접고 물러나고 있던 상황이였으나 아직 종전선언을 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전쟁은 분명하게 현재진행형이였고 따라서 고려측이 정당하게 전쟁을 수행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83]
현대의 남북한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의 이름이 '국경선'이 아닌 '
휴전선'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6.25 전쟁이 실질적으로 종결된 것은
북한의 큰형님인
소련이 공산권 대표로 나서서
UN측과 이제 그만 전쟁하자고 제안을 했고 이로 인해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공산 국가들과 '남한을 제외한' UN군 국가들이 모두 그 제안에 동의했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이 전쟁에서 손을 떼었지만, 당사국인 남한과 북한은 아직 종전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6.25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고 단지 휴식을 갖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양국 사이에 평화 분위기만 조성되면
한 쪽 지도자가 상대국으로 넘어가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조만간 종전선언을 하자'는 협의까지 보기도 하지만 결국엔 안하기 때문에 여전히 6.25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양국이 서로를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도 자국이 정통 국가이고 상대방은 무력으로 영토와 인구를 강제 점거중인 반군으로 보고 있으며 반군과의 협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84]
《근세 일본과 동아시아》, 아라노 야스노리(荒野太典)
릿쿄대학(立敎大學) 교수
[85]
세키가하라 전투 자체가 도요토미 파에게 유리한 구도였는데, 도요토미 파의 실질적인 수장인
이시다 미츠나리의 인망 부족으로 인한 서군 내에서의 내분과 연속된 배신으로 도쿠가와 파가 이긴 전투였다. 다만 만약 도요토미 측이 노량 해전에서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히 병력을 유지한 채 돌아갔다면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전투 결과에 다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당장 노량 해전에서 세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편에 섰으나 데리고 간 군사가 적어서 적극적으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았는데 당시 시마즈는 서군 진영에서 우에스기 모리에 이어 석고가 3번째로 많았음에도 정작 병력은 석고 10만석 이상 다이묘 중 제일 적게 데려온 점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86]
아마도 시마즈 군의 지원인 것 같다.
[87]
마지막 두 행은 원작인 《칼의 노래》의 작가의 말에서 발췌되었다. 전문은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88]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멀쩡히 살아 돌아가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해서는 처음에는 서군에 붙었다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붙어버리자 따라서 동군에 붙어서 살아남았고, 이후로는 편히 여생을 보내다 자연사했다. 그리고 애시당초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노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노량 해전에 참전한 적이 없다.
[89]
사실 이는 본작의 노량 해전 장면에서 진린과 등자룡이 한 척의 판옥선을 함께 탄 것으로 묘사된 게 크다. 실제 노량 해전에서 진린과 등자룡은 각각 다른 판옥선을 타고 있었다.
[90]
이영남이 이 모습을 보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막으려고 했다. 이 모습을 발견한 조선군 장수들은 경악하거나 대장선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91]
이때 이순신에게 조총을 쏜 일본군 병사는 와키자카군 소속으로 묘사된다. 애초에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위의 각주에 나온 것처럼 실제 역사에선 노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으로 돌아갔으므로 본작의 지나친 와키자카 띄워주기로 인한 고증오류이지만... 차라리 시마즈군이나 타치바나군 소속 병사가 이순신을 죽이는 걸로 묘사하는 게 나을 것이다.
[92]
이때 다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대장선 쪽의 이순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를 어느 정도 챈 모습이 보이며 울분에 찬 모습으로 적들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93]
전투의 참상이 남겨져 검게 물든 바다가 깨끗하고 푸른 바다로 변하며 전쟁의 종식과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는 엔딩 장면도 많이 회자되고는 한다.
[94]
작중 해설을 맡은
김종성 성우가 아닌,
권준 역을 맡은
박찬환 배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독백하며 여운을 남겼다.
[95]
1화 도입부 때 류성룡의 상상 장면에서 나온 총탄에 맞는 장면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CG였는데 사용을 하지 않았다.
[96]
그래도 고니시의 대사에 시마즈가 언급되긴 하였다.
[97]
더 웃긴 건 뭐냐면 남해왜성을 수비하면서 시마즈에게 고니시를 구출해야 한다고 부추겨야 할
소 요시토시가 순천왜성에서 고니시와 같이 이순신에게 고립되어 있다.
[98]
당시에는 세트장 재활용, 테마 파크가 없어서 노량 해전을 찍은 후에는 촬영에 사용된 소품을 모두 소각해서 폐기하였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시사회 후 몇가지 불만 사항들을 지적해 재촬영을 했고, 그로 인해 소품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번거로움을 겪었다.
[99]
위 문서를 보면 알듯이 전투는 야간에 벌어졌다.
[100]
배우 주현이 열연.
[101]
영화에서는
박동룡이 열연했다. 어차피 이 작품에서 주요 왜장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유일하다.
[102]
고니시 유키나가가 노량 해전에 참전했지만 엄연히 이 전투의 일본 측 주장은
시마즈 요시히로다.
[103]
'근데 여기서 이놈 죽이면 내 적은 이 세상 전부가 되겠지 씁' 하고 덧붙이는 건 덤이다. 당시
중화사상을 반영한 서술인 듯. 우습게 써서 그렇지 김훈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저걸 읽으면 참 열 뻗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