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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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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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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의의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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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첫 행보이자, 조선 수군의 피해 뿐인 승리.

2. 전개

1597년 3월 9일(음력), 거제도의 기문포(器門浦)[1]에 왜선 3척과 왜병 20여명이 정박해 있다는 소리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첫 출전했다. 서로 휴전기였기에 왜병들은 경계하지 않았으며, 원균이 항왜를 통해 술을 주겠다며 초청했기에 기꺼이 응해 배를 조선 측에 접선해 술을 받아갔다.

그런데 원균이 돌아가는 왜선에 지자총통을 쏘며 뒤통수를 감행했다.[2] 그것도 깔끔히 완파라도 했으면 모르겠으나, 오히려 독기가 오른 왜선 3척이 달라붙으며 1척의 판옥선을 전쟁 최초로 빼앗겼다. 왜병들은 빼앗은 판옥선을 타고 북쪽 육지로 도주하려 했으나, 조선군이 추격하며 화포와 불화살을 쏘아 원래 우리 배였던 판옥선을 침몰시키고, 왜병 18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 과정에 조선군은 140명이나 죽어 피해가 더 컸다.

도원수 권율 원균은 왜병의 수를 80명으로, 수급을 47명으로 뻥튀기까지 한 이 해전의 승전보 장계를 올리자 선조는 기뻐하며 논공행상을 하려 했다.

하지만 김응서가 원균의 추악한 실태를 담은 장계를 비변사에 보내어 진상이 알려졌다. 김해 죽도에 있던 왜장 도요 시게모리가 김응서에게 엄연히 휴전중임에도 나무를 베기 위해 떠난 자기 부하들이 원균에게 몰살당했다는 항의를 보내온 것. 심지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15명, 32명의 왜병을 꾀어 죽였다는 것. 이에 선조조차 논공행상은 취소했다.

3. 의의

졸전이었지만, 거제도에 일본군이 넘어오는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로도 볼 수 있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부산포를 공략함에 있어서 중간 정박지점은 반드시 필요했고, 안골포-가덕도에 일본군이 왜성을 짓고 버티는 이상, 조선 수군은 거제도 북부인 장문포/영등포/기문포 등을 중간 정박지점으로 사용했다. 불과 1달 전인 2월 10일, 이순신 통제사가 장문포를 중간 정박지점 삼아서 부산포를 강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일본군이 거제도 북쪽에 넘나드는 일은 점차 늘어나서, 조선 수군은 부산포 강습 때 장문포/영등포/기문포가 아닌 칠천량과 외해 옥포 쪽에 정박하게 된다.

4. 출처

2016년 6월, 이문영 작가의 매일경제 기고

2020년 1월, 김의부 소장의 기문포 위치 추정


[1] 거제도 북부, 장문포~영등포 부근으로 추정. [2] 다만 강화협상 중에도 제2차 진주성 전투 등 국지전은 있었다. 또한 이미 1월에 일본군이 대거 재상륙하며 협상이 파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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