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00:53:26

세키가하라 전투

<colcolor#fff> 세키가하라 전투
関ヶ原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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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기록화, 1854년
시기 1600년 10월 21일 ( 음력 9월 15일)
장소
일본 미노국(미노노쿠니) 후와군 세키가하라
(現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초)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死後), 일본의 지배권 갈등
결과 동군의 승리
영향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 수립, 조선 명나라 외교관계 개선 시도
교전 세력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동군(東軍)
파일:대일대만대길.svg 서군(西軍)
지휘관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도쿠가와 히데타다[1]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파일:혼다 가몬.svg 혼다 타다카츠
파일:혼다 가몬.svg 혼다 마사즈미
파일:이이 나오마사 가몬.svg 이이 나오마사
파일:도다 가몬.svg 호소카와 타다오키[2]
파일:사카키바라 가몬.svg 사카키바라 야스마사[3]
파일:이케다 가몬.svg 이케다 데루마사
파일:후쿠시마 가몬.svg 후쿠시마 마사노리
파일:쿠로다 가몬.svg 구로다 나가마사
파일:토도 가몬.svg 토도 타카토라
파일:이코마 가몬.svg 이코마 카즈마사
파일:가토 가몬.svg 가토 기요마사[4]
파일:가토 요시아키 가몬.svg 가토 요시아키
파일:후타츠히키료.svg 모가미 요시아키[5]
파일:다테 가문 문장.svg 다테 마사무네[6]
파일:야마우치 가몬.svg 야마우치 가즈토요
파일:토모에 가몬.svg 유키 히데야스
파일:田中家左三巴紋-21.jpg 타나카 요시마사
반 나오유키
파일:모우리 가몬(검은 배경).svg 모리 데루모토[7]
파일:대일대만대길.svg 이시다 미츠나리
파일:모우리 가몬(검은 배경).svg 모리 히데모토
파일:우키타 가문 문장.svg 우키타 히데이에
파일:고니시 가몬.svg 고니시 유키나가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소 요시토시
파일:다케다 가몬.svg 안코쿠지 에케이
파일:우에스기 가문 문장.svg 우에스기 카게카츠[8]
파일:사츠마 시마즈 가문 문장.svg 시마즈 요시히로
파일:사츠마 시마즈 가문 문장.svg 시마즈 도요히사
파일:쵸소카베 가몬.svg 쵸소카베 모리치카
파일:사나다 가몬.svg 사나다 마사유키[9]
파일:모리 와카쓰키 가몬.svg 모리 카츠노부
파일:사타케 가문 문장.svg 사타케 요시노부
파일:오다 가몬.svg 오다 히데노부
파일:나카무스비기온마모리.svg 타치바나 무네시게
파일:시마 가몬.svg 시마 사콘
파일:나츠카 가몬.svg 나츠카 마사이에
파일:mukaishou300.gif 오타니 요시츠구
파일:토모에 가몬.svg 코바야카와 히데아키[10]
파일:와키자카 가문 문장.svg 와키자카 야스하루
파일:킷카와 가몬.svg 킷카와 히로이에
병력 82,000명 → 104,000명[11] (전체)
81,890명 (전투 참가)
120,000명 → 98,000명[12] (전체)
88,888명 (전투 참가)
피해 4,000명 ~ 10,000명 최소 44,444명 이상[13]

1. 개요2. 배경
2.1. 도요토미 가의 내분2.2. 임진왜란과 히데츠구 사건
3. 전투 전
3.1. 각 세력의 규합3.2. 쟁점·정통성3.3. 이해 관계3.4. 개전3.5. 어째서 세키가하라인가?
4. 세키가하라 전투5. 동군과 서군의 참전 다이묘/장수
5.1. 동군5.2. 서군
6. 전개7. 종전, 그리고 결과8. 분석
8.1. 총지휘관의 역량8.2. 명령 체계의 차이8.3. 얽히는 이해관계8.4. 히데요시가 남긴 후환8.5. 종합
9. 전후 처리
9.1. 서군9.2. 동군
10. 이후11. 조선왕조실록의 기록12.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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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00년(게이초 5년) 음력 9월 15일에 일본 미노국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초[14])에서 벌어진 전투.

일본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를 가른 중요한 전투들 중 하나로,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뭉친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 간에 벌어진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이다. 이 전투의 승자는 향후 265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권력을 쥐게 되었고, 패자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 가문이 몰락하고 말았다.

규모면에서는 양군 통틀어 17만이라는 대군이 맞붙었고[15] 역사적으로도 일본사의 큰 흐름을 결정짓게 되는 이 전투가 진행된 시간은 단 3시간에 불과했다. 한편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를 넓은 의미로 보아 동군과 서군 간 벌어진 일련의 내전을 총칭하는 것으로 하면 세키가하라 전쟁은 도호쿠[16], 호쿠리쿠[17], 규슈[18] 등 일본 전국에서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19] 세키가하라 합전(合戰), 동서합전이라고도 부른다.

전투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고, 이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조선에게 사과서신을 보내며 유화책을 펼쳐 조선과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는 데다가 서군을 지지한 다수의 다이묘들이 가이에키당하여 멸문지화(가문자체가 망하는 일)되거나 전봉되는 등의 파급효과가 일어났으므로 정치적인 의의도 크다. 워낙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라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세키가하라'라고 하면 일종의 '중대한 승부처'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 사건 등을 가리키는 관용구로도 많이 쓰인다. 창작물에서도 가끔 "이 곳이 우리의 세키가하라!"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시기적으로는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인해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종전한 지 2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공격했던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로다 나가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토도 타카토라, 타치바나 무네시게,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테루모토,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요시아키,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 일본군 장수들이 다수 참전했다.[20] 고니시(小西)와 가토(加藤)는 임진왜란 때도 서로 반목하고 경쟁하곤 했지만 이제는 진짜 적이 된 것이다.[21]

2. 배경

2.1. 도요토미 가의 내분

이 부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서를 참조해도 좋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거머쥔 것은 사실이나 도요토미 가문의 입지만 놓고 보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히데요시 본인이 정권을 잡아 천하인이 된 이후 자신의 집권 전통성을 어필하기 위해 태양의 아들이라는 허장성세를 한들 출신은 평민으로 미천했고 그를 뒷받침해줄 지역적, 인적 기반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히데요시는 시코쿠, 규슈, 기나이, 간토 등지를 정복해 가신들에게 영지를 뿌려주고 그 정상에 본인이 군림했기에 히데요시 생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오다도 이런 식이었으나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츠구 사건과 임진왜란으로 이렇게 기껏 세워놨던 체계가 싸그리 무너졌다는 것. 특히 직계 아들인 히데요리를 득남한 이후 차기 도요토미 가문의 구심점으로 키우던 히데츠구가 숙청 당해버리면서 히데요시 사후, 측근들에게는 구심점 되어야하는 인물은 히데요리인데 너무 어려서 친모 요도도노가 수렴첨정을 하니 뿔뿔이 흩어지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특히 히데츠구 할복 사건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지지하던 자들이 죄다 반감을 품었고, 히데츠구 할복 이전 도요토미 친위 무장세력 칠본창과 친위 문신세력 미츠나리의 대립하는 등 가신들 사이 파벌 싸움도 심각했다.

상황이 이리 돌아간 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적 기반이 그리 탄탄하지 않았던 문제 말고도 히데요시와 꽉 막힌 이시다 미츠나리가 벌인 삽질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미천한 신분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신 가문인 후다이가 없었다. 이를 보충하고자 우에스기와 같은 대다이묘들을 포섭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영지를 마구 뿌려댔지만, 정작 히데츠구 사건 때문에 그렇게 일궈낸 인재풀은 히데요시 사후 쓸모가 없어졌다. 또한 임진왜란을 벌인 탓에 휘하의 다이묘들의 힘이 빠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라이벌이라도 없었으면 다행이겠으나, 히데요시에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다. 비록 형식상으로는 '신하'라고는 하지만 도쿠가와는 히데요시 다음으로 일본에서 세력이 강성했기에 히데요시 사후 배신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22][23]

그렇기에 히데요시는 시동들로 구성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등 자신의 가신 출신들로 친위세력을 구성하기 시작,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 등 무력을 맡아줄 영주를 만들고 이시다 미츠나리를 비롯한 내정을 담당할 오봉행을 구성해 입지를 다지는 한편, 츠루마츠 사후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자기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처럼 타인에게 자신의 인척을 양자로 보내거나, 우키타 히데이에, 유키 히데야스처럼 타인의 자식을 자기 양자로 삼아 그 기반을 다지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24]

이런 노력 덕에 비록 이에야스 등 거물들이 생존해 있었으나 당시에는 히데요시라는 구심점이 있었기에 충분히 그들을 제어할 수 있었고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삽질을 벌여도 히데츠구가 중심을 잡았기에 제어도 좋아서 히데요시 말년까지 이어졌다.

문제는 히데요시의 예상과 달리 히데요시가 죽고서 가신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주로 전장에서 구른 무단파와 봉행이나 감찰 등을 맡은 문치파, 정실 코다이인파와 측실 요도도노[25][26], 오와리 출신 파벌과 오우미 출신 파벌 등으로 갈라서게 된 것이다.

2.2. 임진왜란과 히데츠구 사건

결국 이런 대립은 임진왜란을 통해 심화되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그와 함께하는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다 히데이에와 반대편인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모두 한 전장에 뛰게 되면서 이런 반목이 극심해진다. 특히 문예파인 이시다 미츠나리와 기독교인에 히데요시 중앙정부를 지지한 고니시 유키나가, 그리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 등으로 구성되어 중앙 정부보다는 현체제를 유지하자는 무단파로 갈린 양측 핵심들의 대립은 걷잡을 수 없었다.

탄금대 전투 같이 서로 동선이 겹치는데도 협력하지 않고 각자 행동 할 정도로 사이가 파탄나있었다.[27] 울산성 전투에서 고니시가 가토의 지원 요청을 씹은 거야 유명하고.[28] 가토는 강화 조약을 망치려고 날뛰어서 미츠나리는 물론 그 뒤의 히데요시까지 길길이 날뛰게 만든 적도 있다. 이렇듯 양측은 전쟁 중에 사이가 격렬해졌고 기요마사 등은 군무도 모르는 게 왜 전쟁에서 지휘권 행사냐고 싫어했으며, 미츠나리 등도 무단파는 싸움밖에 모른다고 싫어하며 으르렁대기 바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을 제어했어야 할 히데요시가 말년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것이다. 애초에 두 사람의 반목은 적대국인 선조 조선 조정 조선군 총사령부가 정보원들을 통해 속속들이 알 정도였다.

임진왜란 중에 히데요시에게 정말 예상치 못한 행운이 터진다. 자신의 피를 이은 적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이다.[29] 60 다 되어 가는 나이에 적자를 얻은 히데요시에게 이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지만 도요토미 가에는 큰 불행이기도 했다. 위에도 있듯 히데요시에게는 이미 후계자로 지명된 히데츠구가 있었고 이미 히데요리가 태어날 즈음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관백의 자리에 임명된 상황이었다. 후계자의 입지를 공고히 다져야 할 때에 예기치 못한 적자가 탄생했으니 오히려 양자에 가까운 후계자 히데츠구에게는 히데요리가 큰 위험 요소가 되었다.

역사가 되풀이되듯 도요토미는 자신의 나이도 나이인데다가 자신이 죽으면 히데츠구가 히데요리를 살해하려 하거나 권력 계승을 안 하리라 여기며 의심병에 빠진 히데요시가 결국 어린 히데요리를 위해 위험 요소인 히데츠구를 숙청하기로 한다. 그런데 숙청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해자가 양산되었다. 히데츠구 본인이 숙청당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매달렸는데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독대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모든 걸 내려놓고 출가까지 했음에도 끝내 할복을 명령받아 죽어야 했고 그 목은 효수당했으며, 처자식에 그 시녀들까지 40명 가까이가 모조리 참수당한다. 아무리 전국시대고 후계자 다툼이라지만 그 시대에조차 출가한 자에게 할복을 명령하는 것과, 할복한 자의 목을 효수당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처자식들을 죄다 참수한다는 건 잔학무도한 일이었으며 관백의 처자식 중 다이묘의 여식도 존재하였기에 관련된 다이묘들은 도요토미 가문에 원망을 품었다. 그 중 히데츠구의 측실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모가미 요시아키의 어린 딸 코마히메도 포함되어 있었다. 엉뚱한 건 그렇다고 히데츠구의 모든 처자식을 죽인 건 또 아니라는 것이다.[30]

도요토미 히데카츠가 죽은 시점에서 유일하게 가문 내에 성인이라 할 수 있는 히데츠구를 죽인 것은 물론 그 일가족을 몰살시킴으로 인해 히데요시에 대한 민심이 땅에 떨어진 것은 물론, 이 과정에서 히데츠구와 가까이 했단 이유만으로 다이묘들까지 숙청하려 든 히데요시의 태도에 많은 다이묘들이 피를 보면서 등을 돌리게 된다. 특히 이 사건에 연루된 자들 중에는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 같은 대영주들을 비롯해 호소카와 타다오키, 도도 다카도라, 다나카 요시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이케다 테루마사 등 유력 가신들까지 있었다. 세타 마사타다 등은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이들 모두 히데요시의 손에 숙청당할 뻔했으나 2인자 이에야스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구원했고 그 정치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어디에 서는지가 결정되었다.[31]

가뜩이나 내·외부의 갈등을 봉합해야 할 히데요시가 내부에서 이런 대형 트롤링을 저지르고[32] 1598년에 사망한 후, 왜란에 출정한 무장들이 초라하게 복귀한다. 무단파들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게되고 충격에 빠지고 전쟁으로 부족해진 자산 등의 문제로 좀 채우려고 하니 융통성 없는 미츠나리가 이를 제동을 건데다가 히데요리님을 위해 중앙집권을 해야한다며 히데요시의 부탁으로 일단 후견인이 된 도쿠가와에게 날선 반응을 보이니 무단파로써는 미츠나리가 자신의 사욕을 위해 나섰다고 판단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이들의 복귀 직후 후쿠시마, 가토를 중심으로 한 무단파와 이시다를 중심으로 한 문치파가 서로 으르렁 거릴 때마다 히데요시의 맹우이자 발언권이 이에야스만큼 높던 만만찮은 거물인 마에다 토시이에가 직접 이에야스를 만나는 등 적극적으로 중재하면서 어떻게든 사태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토시이에마저 1599년 사망함으로 인해 두 세력은 더이상 의견 대립이 아닌 창칼의 대결로 변모해 간다.

토시이에의 병세가 악화되는 사이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에야스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의 히데요시의 무관파 측근과 다테 마사무네, 하치스카 이에마사 같은 이름난 다이묘들을 초대해 성대한 연회를 연일 베풀며 환심을 사면서 정략결혼으로 포섭하였다. 당연히 문치파는 히데요시 사후의 맹약을 깬 것이라며 노발대발했으나 이에야스는 이에 반박하며 이를 묵살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소위 오우미 파라 불리던, 가문 내에서 비교적 신참 다이묘들은 물론 기타 명문 다이묘 가문들을 규합, 도요토미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파국으로 치닫게 된 도요토미 가의 내분은 후쿠시마와 가토 등이 다짜고짜 미츠나리의 거처를 공격하기까지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져버렸고 이에 미츠나리는 다름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대담한 선택을 하게 된다. 히데요시에 토시이에까지 죽으며 이제 이에야스 말고는 이를 막을 자가 없는 때에 야심가인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까지 무사히 배웅해주도록 조치는 했으나, 그 직후 무단파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며 미츠나리를 오봉행에서 강제로 파직시켰다. 은혜를 베푸는 척 미츠나리의 힘을 꺾었고 그 은혜마저 향후에 있을 전쟁 준비를 위한 포석이었음을 알 수 있다.[33] 이에야스의 야심을 파악하게 된 이상,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심만은 진짜이던 미츠나리에게 이대로 있다간 잠자코 죽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3. 전투 전

3.1. 각 세력의 규합

이렇게 되자 미츠나리는 자신의 친구 오타니 요시츠구를 설득해 그를 우군으로 만든 뒤 여러 가문들을 포섭하고자 한다. 양쪽 다 이전부터 자기 세력을 착실히 모으고 있었고, 미츠나리의 파직 이후 본격적으로 소집을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력 규합에 양측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서군은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세력을 모으려 했으나 미츠나리 본인이 모난 성격으로 인해 인망이 매우 부족[34]하고 어디까지나 히데요시란 후광 덕에 고쿠타카가 적어도 다이묘들을 지휘를 내렸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미츠나리에게 히데요시의 후광이 없어져서 대 다이묘들을 규합할 힘이 나올 리 없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오타니 요시츠구 궁여지책으로 대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겨우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내부에서 갖가지 의견이 갈리는 상황.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처럼 간을 보는 다이묘도 있었고 시마즈 요시히로처럼 급조된 다이묘도 있는 등, 신뢰를 확신하기 어려운 무리들이 꽤 많이 가담했다.

반면에 이에야스는 본인이 예전부터 전면에 나서 히데츠구 사건에 연루되어 죽을 뻔한 영주들을 구해줌으로써 쉽게 자기 편으로 만든 바 있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등 미츠나리에게 원수진 자들을 규합하면서 수월하게 갖춰진다. 게다가 이쪽은 신뢰를 확신할 수 있는 다이묘 위주로 세력을 짜 놓아, 조직력을 보증할 수 있었다. 특히나 고니시 유키나가만 죽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가토 기요마사에게는 이에야스가 이를 수락함은 물론, 사은품으로 "고니시의 고쿠다카를 너한테 줄께"라 하면서 가토가 뛸듯이 기뻐할 조건을 달아 주는 등 신뢰 자체는 확실히 했다. 규모 면에서 양측은 대등해보이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3.2. 쟁점·정통성

흔히 이 전투를 도요토미 vs 도쿠가와 가문의 대결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실질적으로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결이지만, 형식상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는 둘 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했다.[35]

기존에는 크게 2개 세력으로 나눠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혈통인 히데요리와 생모인 요도도노를 지지하는 오우미 파와 일본 서쪽 대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가 중심이 된 서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코다이인)를 중심으로 한 오와리 파와 간토 지방의 이에야스가 중심이 된 동군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주류였다. 정실인 네네를 지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쪽과 후처 요도를 지지하는 미츠나리는 서로 정실과 적통의 생모란 점으로 치열하게 정통성 대결을 벌이는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네네가 오히려 서군 편을 든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요도도노와 함께 개입했으며, 서군 주요 인물과 친분이 깊었고 나중에는 미츠나리의 딸 타츠히메를 양녀로 삼아 보호하기까지 했다는 것이 그 근거. 이것이 사실일 경우 도요토미 출신 동군 다이묘들은 동군을 거든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충분히 나온다.

이런 의혹들이 여럿 제기되었지만 현재에 이르러선 다른 해석이 나왔다. 동, 서군 모두 히데요리를 주군으로 인정했다는 것. 이 전쟁은 실상이 어쨌건 겉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두 파들이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싸운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정실 네네에 대한 의혹은 다음으로 해석된다. 네네가 남편이 죽고 후처 요도의 아들인 히데요리가 후계자가 되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다는 점에서 즉, 이에야스와 미츠나리 모두와 연결된 것은 히데요리가 적법한 도요토미 가의 후계자고 모두 그를 받드는 신하이기 때문에 어느 쪽과 맞닿아 있는들 그녀의 태도에 문제가 될 건 없다. 그래서 최근에 그녀의 행보를 두고 정권의 향방을 결정짓다기보다 도요토미 가문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오는 모양이다.

달리 말하자면, 동군의 명분은 네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녀는 비구니로 중립에 섰으니 딱히 이 전쟁과 관련이 없고 히데요리를 지키려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가 동군에 선 것은 히데요시 밑에서 군말없이 따르던 2인자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더 잘 보살피고 도요토미 가문을 보존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으로는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의 후견자가 되는 것이 타당함에도, 미츠나리가 문치파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외치며 이에 사사건건 반대를 해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당연히 무단파는 문치파가 히데요리를 둘러싸 제멋대로 하려 한다라는 인식을 버릴수 없다.[36]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건 히데요리와 그 생모 요도도노에게 달렸는데 정작 본인은 이 사태에 대해 그저 관망한 모양이다. 딱히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의 신하를 자칭했으니 사실상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요토미 휘하 가신들의 파벌 싸움인데 이에야스와는 혈연으로 맺어져있고[37] 미츠나리야 말할 것도 없이 도요토미 가의 충신이므로 누가 이긴들 명목상 도요토미 가문에 해가 될 리는 없으니. 이를 통해 요도도노와 미츠나리의 개인적 관계에 대한 의구심도 낭설로 보면 될 듯 하다.

다만, 이에야스의 야심이나 이후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요도도노가 관망한 것은 도요토미 가문에게 비극으로 돌아왔다.[38]

3.3. 이해 관계

정통성에서 둘 다 히데요리의 가신이라면 굳이 벌어질 필요 없는 전투가 벌어진 건 당연히 양측의 이해 관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전후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겪은 영주들은 이를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히데요시가 죽었고 그 뒤를 이을 후계자가 어리니 충분히 이 혼란을 이용해먹을 속셈이 가득했다.

여담이지만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최대의 수혜자 중 한 명으로 그는 히데요시가 조선침공 직전 호조 가문을 토벌한 이후 이에야스의 영지인 미카와(現 아이치현 동부)라는 기반을 없애고 먼 곳으로 옮겨 가문에 위협이 될 화근을 없앨 겸 홍수 등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데다 백년이 넘게 호조 가문의 영지였던 간토 대평야로 이봉시켰다. 사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혼간지에 고생하면서 힘을 잃기 바라던 조치에 이에야스가 반역을 일으킬 경우 시간을 벌려는 의도였으나, 정작 이에야스는 새로 옮긴 간토에서 세력이 약해지긴 커녕 치수 정비 등으로 홍수를 줄이는 것은 물론 자신의 거성인 에도 성을 엄청나게 리모델링을 잘 해서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성으로 만들어 놓았으며[39] 간토평야지대에서 나오는 대량의 식량이 나오는 곡창지대를 확보하는 등 뛰어난 내정 능력을 보여주며 고쿠타카가 일본에서 1위인 대다이묘가 되었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도쿠가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임진왜란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으나 영리한 이에야스는 자신이 자리를 비울 시 잇키가 크게 발발할 가능성이란 훌륭한 명분으로 이 명령을 계속 거절할 수 있었고, 덕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아무것도 잃지 않은 몇 안 되는 다이묘 중 하나[40]였다.

이 속셈을 잘 아는 미츠나리 입장에서 이에야스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적이었다. 도요토미 가문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였고 당장은 충성하지만 언제든 천하를 노릴 야심가이며 히데요시가 죽은 지금 적자인 히데요리는 어리니 실질적으로 가장 막강한 세력을 쥔 것도 그였다. 당연히 미츠나리는 이에야스를 경계했으나 이게 너무 노골적인 게 문제였다.

어쨌든 히데츠구 사건을 통해 입은 은혜도 있거니와 이에야스의 적극적인 포섭에 넘어간 다이묘들 입장에서는 이에야스보다 훨씬 위험한 자가 미츠나리였으며 더욱이 이에야스는 천천히 기회를 노리며 적의를 숨겨 드러내지 않았는데 정작 미츠나리가 적의를 드러내며 어떻게든 죽이려고 수작을 부리니까 미츠나리가 권력을 탐한다고 여긴 것도 있다. 더욱이 히데요시가 길러둔 군부 최측근으로 만들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미츠나리 세력에게는 중앙집권을 노리는 도요토미 정권에 있어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져왔던 만큼 미츠나리가 이들이 꼼수를 부리는 것을 얄짤없이 막는 노골적인 행보에 엄청난 반감을 사고 말았다. 결국 이들은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 편에 붙어 그동안 자기들과 대립해온 미츠나리 파를 제거하면, 히데요리를 든든히 지키며 동시에 본인의 입지도 다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대부분의 당대인들, 다이묘들은 제아무리 이에야스가 너구리처럼 자신의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들, 이미 이에야스의 천하가 다가왔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41] 그런 이에야스에게 붙어 어떻게든 도요토미 가문을 지킬 것인가, 가장 큰 위험인 이에야스를 어떻게든 축출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갈린 것이다. 이후의 역사를 본다면 미츠나리의 관점이 맞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이에야스를 따르는 측근들을 설득할 인망도, 능력도 부족했고 애초에 본인부터 자신과 척 지고 있던 다른 토요토미의 다른 가신들을 굳이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즉 도요토미 가문은 잠재적인 적을 두고 있었지만, 미츠나리로 인해 단결하지 못하고 결국 반 미츠나리 세력은 오히려 도쿠가와에게 붙어버린, 도요토미 가에게 있어선 최악의 형세로 흘러간 것이다.[42]

3.4. 개전

암암리에 세력이 규합하면서 힘을 키울 즈음 마시타 나가모리에게서 마에다 토시이에의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를 중심으로 이에야스 암살이 계획됐다는 밀고가 들어온다. 마에다 가문을 휘어잡기 위한 이에야스의 책략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아무튼 이에야스는 이를 통해 마에다 가문을 압박했고, 마에다 가문 내부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강경파의 주장대로 도요토미 가문에 구원을 요청해보았으나 도요토미 가문은 이를 거절했고, 결국 마에다 가문은 토시나가의 어머니이자 토시이에의 정실 마츠(법명 : 호슌인)를 인질로 보내고 양자이자 이복 동생인 토시츠네를 히데타다의 딸 다마히메와 혼인시킴으로서 복종을 표한다. 마에다 가문의 복종으로 이에야스는 다른 용의자인 아사노 나가마사, 오노 하루나가 등에게 칩거를 명령한다.

한편 1600년 6월, 에치고의 호리 히데하루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며 고발하였고, 이에야스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오사카에서 출진하였다. 에치고는 원래 우에스기 가문의 영지였는데 히데요시 때 히데하루가 전봉을 왔고, 우에스기 가문은 아이즈로 옮겨 갔다. 문제는 다른 곳으로 전봉 가는 다이묘는 자신의 영지로 전봉 오는 다이묘를 위해 한 해의 고쿠타카(石高: 식량)의 절반은 두고 가는 게 관례인데, 카게카츠가 이를 전부 다 가지고 떠나버렸다. 덕분에 엄청나게 고생을 한 히데하루는 카게카츠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설이 많으나 히데하루가 훗날 미츠나리 편에 선 것을 생각하면 이에야스를 서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는 편이 맞을 듯 싶다.

또 한편으로는 오대로인 카게카츠의 힘을 꺾어놓기 위해 이에야스 쪽에서 손을 썼다는 설이다. 당시 카게카츠는 에치고에서 아이즈로 전봉하면서 120만 석의 고쿠다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군비를 증강하면서 노골적으로 이에야스를 도발하고 있었다. 교토로 상경해 해명하라는 이에야스의 요구를 씹은 것이 그 증거. 마에다 가문을 압박했던 전례를 보면 히데하루의 참언보다는 카게카츠와 이에야스 간의 대립으로 보는 편이 옳다.

이때 카게카츠의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는 나오에장이라는 편지를 보내어 "역심이 없으면 상경해서 해명하라 하시는데 오히려 태합 전하께 역심을 품었던 분께서 상경하셔서 용서받고 새로이 땅까지 하사받으셨으면서 지금은 권세가들과 인척 관계를 맺으신다. 우리 주군이신 카케가츠님은 그런 수치도 모르는 짓은 하지 않는다"이라며 이에야스를 조롱하였고[43], 이러한 카게카츠의 도발에 따라 이에야스는 자신을 총대장으로 삼고 자기 편인 도요토미 가 영주들을 대거 이끌고 출진한다. 교토 교외의 후시미 성에 가신인 토리이 모토타다와 약간의 경비병만을 남겨두고 가자, 미츠나리와 그 일파(서군)가 마침내 거병, 먼저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요쿠니 신사에서 출정식을 치르고 미츠나리는 타도 이에야스를 외치며 움직인다.[44] 당시 이에야스를 따라 우에스기 정벌에 참전했으나 서군으로 참전코자 도중에 이탈하는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처 미츠나리에게 합류하지 못해 이를 따지거나, 그 외에도 여러 명의 다이묘들이 미처 합류하지 못한 것이 근거.

이런 탓에 미츠나리는 7월 12일 모리 테루모토를 총대장으로, 17일 후시미 성에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동군에 가담할 여지가 있는 다이묘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으려 한다. 그러나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가 터지는데, 중요한 인질인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내 가라샤 자살하면서[45] 이런 인질극이 실패로 돌아간다. 미츠나리 본인의 평판을 더 떨어트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동군 측을 격분시켰으며 다른 인질들에게까지 영향을 줬기 때문. 이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지만 이제 와 돌이킬 수 없는 일. 미츠나리는 곧바로 전력을 후시미 성에 투입해 19일부터 후시미 성 전투를 개시하고 8월 1일에 함락시킨 다음, 이세(伊勢), 미노(美嚢) 등을 점령하며 영역을 넓히며 8월 중으로 모두 장악한 후, 미츠나리 본인은 사와야마 성을 나와 오가키 성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미츠나리의 거병은 곧바로 이에야스에게 전달된다. 7월 중순 이 소식을 들은 이에야스는 회군을 시작하여 25일에 간토의 시모츠케 국 오야마에서 동군의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이에야스 휘하에 종군하고 있던 다이묘들이 상술한 사나다 마사유키 정도를 제외하면 미츠나리와 맞서 싸우기 위해 이에야스를 전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에야스는 주변 다이묘들을 결집시키니, 이를 '오야마 평정'이라 한다. 결집된 동군은 토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8월 22일,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이케다 테루마사로 구성된 동군의 선봉은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 히데노부가 지키던 기후 성을 함락한다. 기후 성이 함락되자 이에야스는 3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한다.

동시에 3남 히데타다에게 일군을 맡기고 나카센도를 통한 진군을 계획하였으나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에 항복을 권고했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거부하자 전투를 개시, 상대에게 농락당하며 발목을 잡히고 결국 세키가하라에 늦게 도착하게 된다.[46]

이에야스는 기후 성을 점령하고 에도를 출발해 오카야마에 포진하여 히데타다를 기다렸으나, 히데타다가 오지 않자 결국 9월 14일 합류를 포기하고 진군을 개시한다. 이때 서군은 동진을 위해 오사카를 출발하여 오카야마 남쪽인 오가키 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동군의 예상치 못한 빠른 등장에 당황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서군은 가라샤의 죽음으로 인해 동군에 붙은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버지 호소카와 유사이의 성을 제압하기 위해 1만 5천 명의 병력이 묶였고, 주력인 모리 군은 출진을 미루고 미적미적대는 등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마저 14일에 있었던 서군 군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서군 수뇌부는 코바야카와군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이에야스가 나카센도를 따라 이동하려 하자 미츠나리 또한 군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진군, 양 군은 격돌을 앞두게 된다.

3.5. 어째서 세키가하라인가?

일반적으로 세키가하라가 전장이 된 것은 이에야스가 당시 미츠나리가 농성전을 준비하고 있던 오가키 성[47]을 공략해봤자 공격한 측이 피해가 더 크니, 우회해서 서군의 본거지인 오사카 성으로 진군하기로 하고 이 정보를 일부러 흘렸을 것으로 본다. 이에 서군은 동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모여든 곳이 세키가하라라는 것.

굳이 미츠나리가 결전을 서두를 이유는 없었음에도[48] 성 밖으로 나온 것은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우회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 요지이다. 겉으로 보면 좀 이상한 말이다. 위 각주에서 설명하듯 서군은 굳이 결전을 서두를 필요도 없었고 미츠나리는 몇 번이고 오사카 성에 있는 데루모토에게 직접 전장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49] 만약 이에야스가 정말로 오사카로 진군한다면 약 10만에 달하는 서군과 오사카 성에 있는 데루모토 및 자칫 히데요리의 오사카 성 수비군까지도 합류해 협공을 당할 수 있게 된다. 굳이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으니 서군이 속을 일도 없는데 뭣하러 이런 말도 안되는 유인책을 썼으며 이런 뻔한 수에 서군은 넘어가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나왔을까?

이에 대해 서군 내부의 속사정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부터 마츠오 산까지 대규모로 축성을 실시하고 있었다. 즉, 미츠나리의 본래 계획대로라면

1. 마츠오 산 - 사사오 산 라인에 야전 축성을 실시한다.
2. 마츠오 산에 서군 주력을 배치한다.
3. 동군이 오사카로 향하려고 오가키 성을 무시하고 세키가하라 인근으로 향하면 오가키에 배치된 미츠나리 - 히데이에 군, 난구 산의 모리 군이 마츠오 - 사사오 군과 함께 협공한다.
4. 동군이 오가키 성을 공격한다면 마츠오 산에 주둔시킬 계획이었던 서군 주력의 오타니 요시츠구와 난구 산의 모리 군이 동군 배후를 친다.

라는 방어 전략이 수립된다.

문제는 당시 오가키 성은 축성 덕에 방어력이 대폭 강해졌지만 약점이 하나, 하천 범람으로 인한 수해로 타격을 빈번히 입는 환경이었다. 만약 이에야스가 이 약점을 이용해 수공을 걸게 되면 별 피해 없이 간단하게 오가키 성의 서군을 무력화 시킬 수 있고, 미츠나리를 비롯한 서군의 수뇌부와 세키가하라 부근에 미리 자리잡고 있던 모리 히데모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군과의 연락이 끊기게 된다. 모리 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코바야카와 군도 배신의 여지가 있는데다 숫적으로도 서군에 한 축을 담당한 만큼 미츠나리 입장에서 두 군과의 연락 두절은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수공의 위험 요소와 더불어 코바야카와 군의 돌발 행동도 문제였다. 뜬금없이 마츠오 산으로 가더니 그쪽에 주둔한 수비 병력을 쫓아내고 덜컥 주둔해버린 것이다.

이에야스가 수공을 걸면서 동시에 코바야카와 군이 뒤통수를 치게 되면 서군 주력이 무력화되는 건 물론이고 일거에 소탕당할 위험이 있다. 결국 미츠나리는 하는 수 없이 성을 나오게 됐다는 것. 물론 어디까지나 설이다. 그만큼 예상치 못한 전투가 벌어진 것.

이에야스를 제외한 누구도 세키가와라가 결전의 무대가 되고, 그것도 몇 시간만에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다.[50][51]

4. 세키가하라 전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Sekigahara.png

세키가하라 전투의 포진. 하늘색이 서군이고 붉은색이 동군. 주황색은 서군에서 배반한 부대이며 오른쪽에 보이는 진한 파란색은 서군으로 참전했지만 전투에는 나서지 않고 방관한 부대이다.

시바 료타로가 쓴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 실린 일화로, 메이지 덴노 시절 일본 사관학교 장교로 온 프로이센 왕국군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이 포진도만을 보고 즉시 서군의 승리라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일본인들이 동군의 승리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소령은 "그것은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실 전후 사정 다 무시하고 포진 놓고 보면 전후 사정을 몰랐던 클레멘스가 서군의 승리를 장담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일단 군력은 양군이 거의 대등한 상황에서 지형은 서군이 월등하게 유리했던 것. 동군은 말 그대로 포위당한 상태인데 그것도 그냥 포위도 아니고 산골짜기에 갇혀 포위당한 상태였다. 고지대에 주둔을 마친 서군에 의해 십자포화를 맞고 골로 가기 딱 좋은 상황이다.

포진도를 보면 동군의 최종 지휘관인 이에야스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에야스가 포진(가운데의 가장 큰 붉은 표시)한 산 바로 위의 진한 파란색 부대가 (명목상) 서군의 총대장이자 대군을 이끌고 온 모리 가문의 부대였다. 이들이 제대로 싸웠다면 산 바로 아래에 포진한 동군 본진도 무사하기는 어려웠다. 모리와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에야스의 퇴로만 확실히 차단해도 동군을 전멸시키는 것까지도 가능한 포진이었다. 병력의 숫자도 서군이 조금이나마 유리했고 질에서도 결코 동군에 뒤처지는 편은 아니었다. 즉 지도 오른쪽에 있는 부대들까지 합치면 동군을 포위하는 형태의 학익진이 완성되는 상황. 클레멘스가 듣자마자 서군의 승리를 장담한 것이나 전후 사정을 들은 후에 했다는 '그건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임용한 박사도 전력만 보면 서군 쪽이 최소 2배, 최대 5배까지도 유리했다 이야기 할 정도로 서군의 상황이 좋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병력도 서군의 우위였고, 포진을 봐도, 동군 쪽은 동쪽에 완전히 갇힌 상태였기 때문에 서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하지만 미츠나리의 서군은 이 우위를 까먹고 사실상 산골짜기에 포위당한 동군을 상대로 참패했다.

결국 이런 좋은 포진을 가지고 진 데는 전투 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아래에 상세히 나와 있다.

5. 동군과 서군의 참전 다이묘/장수

세키가하라에 직접 참여한 장수들은 강조 표시. 괄호 안은 고쿠다카(단위: 1만 석).

5.1. 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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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군에는 다음과 같은 지휘관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 총사령관 도쿠가와 이에야스(256): 모든 명령권은 형식적이든 실질적이든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 명에게 집중되었고 이에야스는 오다와의 동맹을 맺고서 여러 전투를 뛰며 실전도를 따지면 백전노장에 가까웠고 고쿠타카도 압도적인 1위였기에[52] 발언권도 가장 강했다. 서군이 명목상 총 지휘관 모리 데루모토, 명목상 현장 지휘관 모리 히데모토, 실질적 총 지휘관 이시다 미츠나리 등 내분으로 지휘체계가 분산된 것과 대조적이다.
    • 부사령관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아버지 이에야스에 비해 군재를 비롯한 종합적인 능력은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위인이지만 참모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인물. 다만 군재는 정말 없는 편이라 우에다 성에서 상대의 4배나 되는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도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안드로메다 역관광을 먹었다.[53]
    • 혼다 타다카츠(10): 전장에서 작은 상처 하나조차 입지 않았고 센고쿠 시대에서 일본판 장비라 불린 맹장 중 맹장
    • 이이 나오마사(12): 후일 적귀라 불리던 용장.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욕을 무지 잘했던 도쿠가와 사천왕의 1인.
  • 다테 마사무네(58):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백만석을 공약하면 합류하겠다는 제안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도쿠가와로부터 백만 석의 영지를 약속받고 동군에 참전하였으나 처세술의 달인인 그답게 세키가하라 전투 기간 동안에는 만일을 대비해 카게카츠와 동맹을 맺어 우에스기 측의 침공을 사전에 방지하였다. 북쪽에서 우에스기군과 모가미군이 싸우는 걸 관망만 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쿠가와는 백만석을 주지 않으며 백지화 시켜버렸다.[54]
  • 난부 토시나오: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와 함께 우에스기 카게카츠군에 맞서기로 되어 있었지만 영지 내에서 잇키가 일어나 귀환.
  • 모가미 요시아키(24): 딸인 코마히메가 히데요시의 조카 겸 양자인 히데츠구의 측실로 들어갔으나 이후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할복 자살을 하면서 코마히메도 연좌되어 처형당했다. 거기다가 요시아키의 정실이자 코마히메의 어머니인 오사키 부인도 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이게 원인이 되어 겨우 14일 뒤에 사망하였다. 한순간에 사랑하던 아내와 자식을 억울하게 잃었으니 당연히 히데요시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증오가 매우 컸으나, 전투에서는 별로 활약하지 못했다. 다테군이 관망하고 난부군이 이탈하면서 우에스기군에게 열심히 털렸다. 여기에 이전에 영지를 빼앗겼던 오노데라가가 쇼나이 방면으로 쳐들어 오기까지... 결과적으로 겨우 버티긴 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조금만 늦게 끝났어도 전사할 뻔했다.
  • 구로다 요시타카: 전국시대 말기의 명군사로 가토 키요마사와 함께 신나게 서군 다이묘들의 빈집을 털었다. 형식상 동군으로 참가했는데 사실 혼슈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규슈를 제패하여 히메지까지 진출하여 힘이 빠진 도쿠가와를 쳐서 천하를 차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 때문에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55][56] 그 후 뺏은 규슈의 성들을 바로 이에야스에게 바치는 처세술을 보였다.
  • 구로다 나가마사(18): 킷카와 히로이에와 내통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 약속을 받아낸 세키가하라 전투 제1의 공로자.
  • 후쿠시마 마사노리(24):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필두로 이시다 미츠나리를 매우 혐오했다. 원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에서 카토 기요마사와 함께 맹장 중 하나였으며, 당연히 전투에서도 열심히 싸운 것은 물론 기후성을 점령하며 도쿠가와가 총 공세로 나서게 한 장수이다.
  • 가토 키요마사(20): 후쿠시마와 함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핵심이었던 장수. 지독히도 싫어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랑 이시다 미츠나리가 서군의 핵심 무장과 우두머리로 있었던 게 핵심적인 이유로 동군에 붙었다. 규슈에서 쿠로다 칸베에와 함께 텅 빈 서군 다이묘들의 영지를 빈집털이했다. 심지어 보상 안 해 줘도 되니까 제발 고니시만 죽여달라고 이에야스에게 호소했는데 이에야스는 이런 가토에게 고니시를 죽여줌은 물론이고 고니시의 영지를 가토에게 줘서 그 덕에 가토는 수준급의 다이묘가 되었다.[57]
  • 호소카와 타다오키(18): 아내인 가라샤가 미츠나리 때문에 사망했기 때문에 야사에 가토 키요마사랑 큰 갈등이 있었음에도 동군에 붙었을 정도로 미츠나리를 증오했다.
  • 도도 다카토라(8): 대세에 따라 주군을 자주 바꾸는 걸로 유명한[58] 전국무장으로 이순신과 수군으로 맞붙었던 그 장수가 맞다. 같은 수군으로 이순신과 싸웠던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비롯해 많은 서군 다이묘들의 배신을 획책했다.
  • 야마우치 카즈토요(5.9): 자신의 영지를 이에야스에게 모두 바치겠다고 외치면서 동군의 결속을 굳건히 했다. 이 한 마디로 그는 쵸소카베 모리치카가 다스리던 토사국의 다이묘가 되었다.
  • 오다 나가마스(0.2)(우라쿠사이), 타나카 요시마사, 이케다 테루마사(15.2), 가토 요시아키(10) 등등

이처럼 동군 다이묘들 중 무단파는 대부분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미츠나리, 저놈만큼은 꼭 없앤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이에야스를 구심점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당연히 동군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는 약점으로 작용하지만...[59] 아무튼 이에야스도 이것을 적극 이용하여 히데요시 말년에 입지가 위험해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나 반 미츠나리 파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자신과 친분이 있는 서군 다이묘들을 몰래 접촉하여 회유하였다. 예외가 있다면 츠가루 타메노부 정도인데, 그는 처음에는 서군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주변의 안도, 도자와, 난부 등이 모두 동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군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서군은...

5.2. 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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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하나의 목적과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뭉쳐 움직인 동군과 달리, 이쪽은 명목상의 전력으로는 우위였으나 억지로 참여해 배신 내분이 철철 넘쳤고 총지휘관 모리 데루모토는 사실상 바지사장일 정도로 지휘계통도 엉망진창이였으며, 서군에 억지로 참여한 장수를 중요 위치에 배치하는 등 막장으로 점철되었다. 조별과제 절망편
  • 명목상 총지휘관 모리 데루모토(112):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안코쿠지 에케이의 주전론과 킷카와 히로이에의 화평론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내내 오사카성에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유로는 위의 우유부단함이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나 히데요리의 생모 요도도노가 오사카의 방비 때문에 못 가게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다.[60]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신들의 전쟁 지속 주장에도 불구하고 퇴성하며 도쿠가와 측에 싸울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61]
    • 명목상 현장 총지휘관 모리 히데모토(20): 모리 테루모토의 사촌이자 양자로, 오사카성에서 나오지 않는 테루모토를 대신해 모리군을 총지휘했다. 하지만 킷카와 히로이에가 병력 이동로에 진을 치고 막아둔 결과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전투 내내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여야 한다는 핑계로 구경만 하다 도망친 덕분에 다른 서군의 발까지 묶었다. 이 때문에 배신자가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오사카성에서 모리 테루모토에게 항전을 주장했던 것을 보면 그냥 무능했거나, 히로이에의 배신을 알면서도 가문과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지는 싸움에 출전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 안코쿠지 에케이(6):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으로,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의 총대장으로 가담하도록 유도하고, 데루모토의 이름을 팔아서 서군 장수들을 모집한 인물. 전투 내내 킷카와 히로이에의 방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투 종료 후 이에야스에게 잡혀서 참수되었다.
    • 킷카와 히로이에(14.2): 배신자 1호.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 처음부터 화평론을 주장하다가 동군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이미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기존 영토의 보존을 약속받고 내통을 한 상태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모토 병력의 선봉을 맡았는데, 병력 이동로에 진을 치고 병력이 못 움직이게 막았다. 이로 인해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 히데모토는 항의하는 쵸소카베 등에게 도시락을 먹인다는 등의 변명을 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출진을 하거나 아니면 공격에 나서게 길을 비켜달라는 전령에게 지금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었으니 1시진(2시간)은 이후에나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실질적으로 3시간만에 끝난걸 생각하면 전령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62] 이 때문에 배신자가 아닌 나츠카, 쵸소카베 군까지 발이 묶여서 방관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전투 상황도를 보면 킷카와 히로이에가 초반 포위된 동군의 측면에 있었으니, 만약 히로이에가 내통자가 아니었거나 다시 돌아섰다면 서군이 그대로 돌진하여 동군은 전멸했을 수도 있었다.
  • 실질적 총지휘관 이시다 미츠나리(19.4): 미츠나리는 훌륭한 행정가였지만 군사적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서 전시보다는 평시, 그것도 행정부문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인망이 두터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그를 방증하듯 무단파의 사정을 조금 헤아려주고 눈을 감아주는 융통성만 있었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말솜씨가 뛰어나서 무단파의 성격을 긁지 않도록 잘 달랬더라면[63] 이렇게 갈등은 하지 않았을 터인데 워낙 깐깐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히데요시 시절부터 뿌리깊은 무단파와의 대립은 그나마 현장 지휘관으로 뛰어난 여러 다이묘들이 동군에 붙는 결과를 초래한 점에서 지휘관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인망과 통솔력이 바닥이었다. 게다가 이를 커버하기 위해 모리 데루모토 등 명목상 지휘관을 내세운 결과 지휘계통은 분산되어 엉망진창이 되었고 그 명목상으로 내세운 지휘관들도 개인 사정으로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등 전혀 도움이 안 되었으며 시간을 더 끌었더라면 우에스기와 사나다가 도쿠가와 본진을 칠 가능성도 있는데 이를 해내지도 못 했다. 이 전장에서 열과 성을 다해 싸운 것은 오타니 요시츠구, 시마 사콘, 우키타 히데이에 등으로, 이들은 지휘관으로서가 아닌 미츠나리의 몇 없는 맹우로써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이었다.
    • 시마 사콘(2): 전후 쿠로다군 병사들이 "꿈에서 사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며 벌벌 떨었던 맹장으로 시마 사콘의 활약으로 초반 전황은 서군이 우세했지만 전투 초반 조총에 맞고 전투 이탈하며 전선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 가모 요리사토, 마이 효고: 사콘의 이탈 후, 이시다군을 이끈 맹장들이다. 그나마 이들이 있어서 미츠나리 측이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었다.
  • 오타니 요시츠구(5): 이시다 미츠나리의 절친. 미츠나리와의 의리와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600여 명의 병사로 참가. 그래도 그 병력을 가지고 1만 명이 넘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군대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지만 히데아키와 다른 다이묘들의 물량 앞에 결국 패했다. 가뜩이나 인망이 없던 데다 호소카와 가라샤 사건으로 평판이 땅으로 떨어진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에 그나마 10만 명 이상의 부대가 모인 것은 오타니 요시츠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토벌을 해야한다는 격문을 각 다이묘에게 보낸 것과 그의 인품을 안 다이묘가 의리로 왔기 때문이었다.
  • 시마즈 요시히로(73): 역시 서군에서 알아주는 용장. 그러나 애초에 전투의지가 부족한 데다가 거느린 병사가 오타니 요시츠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사실 요시히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요청으로 후시미 성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하였는데, 성을 지키던 토리이 모토타다가 모반을 두려워하여 입성을 거부, 이후 천하의 판세에 참여하기 위해 일단 서군에 가담했다. 이때 요시히로가 이끄는 군사는 1000여 명 정도로 매우 적었는데, 73만 석의 대 다이묘가 이렇게 적은 병사를 이끌고 온 이유는 그의 무리한 조선 침략에 화가 나 있던 형 시마즈 요시히사와 중신들이 참전을 반대하여 요시히로와 그의 지인들만 모여서 합세한 군사였기 때문.[64] 결국 미츠나리는 시마즈군의 수가 적은 것에 실망했고[65], 이후에도 참전 다이묘 중 전투 경험은 가장 베테랑인 요시히로가 내놓는 야습 계책을 미츠나리가 죄다 무시하거나 "세키가하라에서 싸워야만 한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세키가하라로 병력을 결집시켜 버린다. 이에 요시히로도 분노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미츠나리의 가신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했다는 것을 트집잡아 미츠나리의 지휘를 거부하였고 미츠나리의 명령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미츠나리는 요시히로의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라도 보내달라고 하지만 이마저도 거부해버렸다. 여기에 서군 일부 장수들의 동군 전향을 하는 배반으로 전황이 점차 서군이 불리해지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이 결정적이여서 결국 우키타 히데이에군이 퇴각하자 요시히로는 우키타군에게 총질을 했다. 즉, 도망가는 거 막으니까 같은 편을 쏘고 튄 것이다. 사실 시마즈는 그냥 이 전투에 참여해 유리해보였던 서군이 이기면 떨어지는 콩고물만 얻어먹으려는 심산으로 참전한 거라[66] 목숨을 걸겠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 우키타 히데이에(57):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이시다 미츠나리의 몇 없는 친구관계로 그나마 열심히 싸운 몇 안 되는 서군 다이묘. 다만 본인이 군재가 부족했고 전투 전 가신들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에 대군을 보유하고도 정작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 고니시 유키나가(20): 임진왜란의 선봉장. 역시 그나마 열심히 싸운 몇 안 되는 서군 다이묘. 그리고 동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대단히 좋지 않았다. 장수로서의 능력은 일본에서 저평가를 받는것에 비해 상당했던 편이지만[67]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겪은 소모전으로 휘하 병력의 대부분을 날려버린 상태. 특히나 순천에서 너무 날려먹은 게 컸다.[68] 어떻게든 긁어모아 7천명 정도를 데리고 참전했으나 대세를 가를 정도는 아니었다.
  • 소 요시토시(6)[69]: 쓰시마 영주.[70]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 장인어른인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에 가담했는데, 임진왜란에 이어 이 전투에서도 가솔들을 대거 잃고 결국 고니시를 배신했다. 물론 배신의 결정적인 동기는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요구였지만 이건 명분이고, 애초에 장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추진한 플랜이 몽땅 실패하면서 섬이 파탄나고 영민들이 무더기로 굶어죽었으니 개인적으로도 배신할 이유가 넘쳐났던 셈이다.[71] 전투 종료후 서군에다가 무려 유키나가의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유일무이하게 사형당하지 않고 생존했는데,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화친을 하기 위해, 어릴때부터 조선어와 조선문화를 알았던데다가 조선 왕과 대화까지 해 봤던 그를 이용하기 위해, 특별사면으로 서군 지휘관들 중에서 요시토시 단 한명만 살려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장군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다시 조선을 외교하러 방문한 극소수의 매우 희귀한 다이묘이다.[72][73]
  • 사나다 마사유키(3.8): 마사유키는 예전부터 이에야스랑 충돌이 있었으며 이에야스를 여러번 물먹인 숙적이다. 이에야스는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자 시나노와 카이를 지배권에 두기 위해 야금야금 북상하였다. 당연히 마사유키와도 충돌은 했으나 우에다 성 건축을 위해 일부러 도쿠가와에게 복종하는 등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였다. 사실상 척을 지게 된 일은 도쿠가와와 호죠 우지마사와의 전투에서 전황이 불리하던 이에야스가 중립 혹은 방관중인 마사유키에게 우지마사의 보급로를 끓어준다면 시나노와 카이 일대 지배권을 인정해주겠다고 서약한 일이 원인이 되었다. 이런 제안을 받은 마사유키는 옛 다케다 가문의 부활을 꿈꿔 이에 응하면서 이에야스는 호조에게 밀리던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호죠는 태도를 바꿔 이에야스측과 휴전과 동시에 동맹 협정을 맺었는데 이 협정 중 시나노와 카이를 호죠와 이에야스가 서로 절반씩 나눠먹고 누마타도 호죠가 가지고 간다는 조약을 한 것으로 인해 이때부터 둘은 매우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장남인 사나다 노부유키는 이에야스의 충신이자 맹장 혼다 타다카츠의 딸과 결혼했고 차남인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시다의 맹우 오타니 요시츠구의 딸과 결혼한 상황이라서 서군/동군에 연줄이 있어 마사유키는 어딜 붙든 상관이 없었으나, 도쿠가와와의 껄끄러운 관계로 인해 장남 노부유키, 차남 노부시게랑 모여 술을 마시며 논의한 끝에 장남은 동군으로 차남 노부시게와 함께 마사유키는 서군에 붙었다.[74] 우에다 성에 자신의 군대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으로 쳐들어온 히데타다와 베테랑 참모 혼다 마사노부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덕분에 히데타다는 전후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욕을 엄청 들어야 했고, 마사유키의 장남인 노부유키는 장인인 타다카츠를 통해 이에야스 앞에서 제발 아버지와 남동생 사나다 유키무라의 목숨만은 구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당연히 이에야스는 마사유키가 다시 도요토미측에 붙으면 위험하였으며 히데타다는 마사유키 때문에 아비한테 깨져서 두명 다 마사유키는 절대로 살려둘 맘은 없었다. 그러나 난생 처음 도쿠가와에게 "주군께서 사위가문을 없애시려 한다면 그 전에 자신과 일전을 벌이셔야 할 겁니다"라며 협박을 가한 타다카츠를 보고 일단 목숨은 살려줬다.[75] 대신 차남 노부시게와 함께 쿠도산에 유폐되었고 그대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다.
  • 우에스기 카게카츠(120): 카게카츠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쨌든 도쿠가와와 전투를 벌일 준비를 하였고, 이에 도쿠가와의 지시를 받아 자신을 적대한 난부 토시나오,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 등 세명의 다이묘랑 도호쿠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난부 토시나오는 영지에서 잇키가 발생하자 귀환하였고, 다테 마사무네는 세키가하라로 출병 전 만일을 위해 카게카츠와 휴전을 신청, 카게카츠는 당연히 최대 전력이 줄어드는 셈이니 이를 수락하여 성립된 동맹이 되어 사태를 관망하여, 홀로 남은 모가미 요시아키를 탈탈 털었고 만약 시간을 좀 더 끌었다면 난부 토시나오를 상대할 대책을 세운 뒤 사나다와 합류하여 이에야스 본진을 칠 가능성도 있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2시간만에 동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바로 항복하였다. 덩치가 컷던 만큼 모리에 비견할 정도로 영지삭감을 당했는데, 본래 자신의 영지인 아이즈 와카마츠 120만석은 다 날아가고 가신인 나오에 가네츠구의 영지인 요네자와 30만석으로 이봉하였다.
  • 사타케 요시노부(54): 미츠나리의 친구. 아버지 요시시게는 동군을 지지하였으나 요시노부는 친구를 따라 서군을 지지하였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아버지와 싸우느라 아무것도 못했고, 전후엔 가문 자체가 도호쿠로 강제 전봉된 것은 물론 영지를 대량으로 빼앗겼다.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37): 배신자 2호. 히데요시의 처조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양성한 병력을 비롯 두번의 왜란을 통해 전투경험이 제대로 축적되어 서군 내에선 손꼽힐 만큼의 강병들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있어서 서군 입장으로 보면 사실상 정예 부대였으나, 문제는 히데아키는 미츠나리랑 사이가 최악으로 안 좋았다는 것이다. 정유재란 때 미츠나리는 히데아키의 잘못을 히데요시에게 고자질하는 바람에 히데아키가 감봉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원한을 잊지 않은 히데아키는 쿠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동군과 내통해 배반을 약조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기며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 마츠노 시게모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가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배신하자 히데아키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명령을 거절했으며, 결국 주군을 배반하고 오타니 요시츠구의 요격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버렸다는 것이 전해지는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그가 히데아키의 중신으로 이름을 올린 당대 사료들이 발견되어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쪽이 주론.
  • 와키자카 야스하루(3.3): 배신자 3호. 칠본창의 일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따라 배신했다. 하지만 사실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와 친교를 가졌으며[76] 본래 동군에 가담하려다 전투가 벌어질 당시 본인이 오사카 성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서군에 가담했다. 전투 중에도 거의 방관하는 처지였으며 동군에 가담하고서야 적극적으로 나선다. 아무래도 혼자 배신하면 사방에서 화살 세례를 퍼부을 것 같았는지 처음부터 배신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하자마자 뒤따라 동군에 붙었다.
  • 쵸소카베 모리치카(22): 아버지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죽은 뒤, 토사 국을 계승하였다. 처음엔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나츠카 마사이에가 길을 막고 버텼고 근처 영주들이 거진 서군에 가담하면서 어쩔수 없이 서군 소속이 된다. 그런데 서군으로 참전하였으나 이번엔 킷카와 히로이에가 길을 막아 방관하는 처지가 되었다.

동군과는 반대로 서군은 겉으로 보이는 양, 질, 진형은 월등했을지언정 그 실상을 살펴보면 어마어마한 양의 위험요소를 떠안고 있었고, 결국 그 위험요소가 전투에서 한꺼번에 터져 패망한다. 위의 내용들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수뇌부는 같은 편이 싸우고 있는데 수수방관하느라 도움이 안 되고, 전력으로 쓸 만한 이들은 비협조적이거나 연달아 배신을 저질렀으며, 그나마 협조적인 이들마저 여러 문제들로 인해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점들이 다 합쳐진 결과, 서군은 이기는 게 말도 안 될 정도로 전투에서 말 그대로 개판 5분 전이 되어 버렸다. 사실상 싸우기 전부터 진 거나 다름이 없던 셈.

더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전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미츠나리가 군재의 무능은 물론 자신을 혐오하여 대다수 도요토미 가신들이 이에야스에게 붙은 동군은 말할 것도 없고, 서군에서도 일부 인사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있었을 정도로 인망이 없다시피 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장 서군을 구축한 모양새부터가 전투 참가 문제로 내부 갈등을 벌이던 모리 가문의 수장 모리 테루모토를 바지사장에 앉히고 도쿠가와 측에 가까웠던 와키자카를 어거지로 가담시키는 등 억지로 맞춘 퍼즐처럼 임시땜빵을 한 티가 역력했다.

거기에 전투 당시의 포진을 보더라도 서군이 동군을 산골짜기에 가둬놓고 포위해 일방적으로 두들겨패기만 하면 되는 진형을 짜놓았다고는 하나, 그 포위망 중 한 축인 게 하필이면 동군인 쿠로다 나가마사와 친분을 가지고 있어서 배신의 위험성이 컸던 코바야카와를 둔 것도 모자라 화평론을 펼치고 동군과 내통하던 킷카와를 측면 포위망의 병력 이동로 겸 가장 앞쪽에 둔 결과 코바야카와의 배신으로 전황이 뒤집어진 것은 물론, 킷카와도 서군의 진격로를 틀어막아버리면서 서군의 주력이었던 측면 포위병력 전체가 길이 막혀 전투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병력의 우세를 믿고 무작정 공격하다가 참패를 당한 적이 있는데도 미츠나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77]

6.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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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군의 선봉장은 원래 후쿠시마 마사노리였으나 이이 나오마사가 이에야스의 아들이자 나오마사 본인의 사위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를 데리고 50여 명의 병력으로 냅다 우키타 군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은 개전 당시 동군과 실제로 전투를 할 수 있었던 병력은 이시다군, 오타니군, 우키타군, 고니시군 약 3만 3천여 정도였으나, 지형의 이점을 통해 병력차를 극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잘 싸우고 있던 시마 사콘이 부상을 입어 실려 나가면서[78] 삐걱대더니, 미츠나리가 시마즈 군에 사자를 보내 요시히로나 토요히사가 대신 지휘를 해줄 것을 부탁한 것을 요시히로가 미츠나리의 사자가 말을 탄 채 군령을 전했다는 이유로 응전을 거부하면서[79] 일이 꼬인다.

여기에 사실상의 주력인 모리군은 이미 동군과 내통한 깃카와 히로이에가 길을 막고 있어 참전하지 못하였다.[80] 모리군은 테루모토의 양자인 히데모토가 지휘를 맡았으나, 그에겐 안코쿠지 에케이의 주전론과 킷카와 히로이에의 화의론 중 어느 쪽도 선택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결국 그는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여야 한다는 놀라운 핑계를 대며 전투 내내 방관만 하였다.[81] 결국 모리군이 싸우질 않는 바람에 에케이는 물론 쵸소카베 모리치카군, 나츠카 마사이에군까지 발목이 잡혀 방관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 그리고 미츠나리의 편에 서서 끝까지 싸워주는 우키타와 고니시가 있었기에 서군은 여전히 싸워볼 만했다. 정오가 지나면서 슬슬 병사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며 어느 쪽이 유리하다 할 수 없는 백중세가 지속되었는데, 이때 동군의 회심의 카드이자 전투를 끝낼 결정타가 터졌다. 바로 히데아키의 배반이었다. 동군과 내응을 약속한 히데아키가 이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보고를 듣고 화가 난 이에야스가 코바야카와의 진지에 대하여 사격을 가하였고, 이에 놀란 히데아키는 결국 마음을 다잡고 산 밑의 오타니 군의 배후를 급습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82] 히데아키가 이끄는 1만 5천의 병력, 서군 전력의 약 20% 가량이 동군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게다가 히데아키가 진을 친 곳인 마츠오 산은 서군 주력부대의 남쪽 지역이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츠키 모토츠나 등도 이곳 근처에 있었다.

그의 배신을 이미 예상했던 오타니 요시츠구는 소수의 병력만을 가지고 이에 대응, 전선에 나가있던 히라오카, 토다의 지원을 얻어 후퇴시키긴 했으나,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인해 이때까지 전투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던 서군의 여러 무장[83]이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오타니 군을 공격한다. 이에 요시츠구는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궤멸하고 자신도 할복하였다. 이것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흐름은 동군 쪽으로 기울게 된다.

동군은 더욱 사기충천하여, 혼다 타다카츠는 말이 총에 맞아 낙마하였음에도 바로 일어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서군의 병력들을 도륙하는 용맹을 과시하였고 코바야카와 군은 우키타 군을 집중공격해서 결국 괴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패주할 때 시마즈 군이 우키타 군에게 총질하며 팀킬까지 일어났다. 서군은 분전에도 불구하고 시마 사콘, 가모 요리사토, 마이 효고 등의 맹장들이 차례차례 전사하는 가운데 결국 괴멸되었다.

한편 서군의 시마즈 군은 목숨을 걸고 동군 본진을 정면돌파하여, 일부 병력만이 겨우 살아남아 탈출하였다. 참전한 1600명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이는 100명도 되지 않았다고. 이 돌진으로 시마즈 토요히사, 쵸쥬인 모리아츠가 전사했지만 이 와중에 이이 나오마사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자세한 건 시마즈의 퇴각 항목 참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서군쪽에서 내분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여러 다이묘들에게 밀서를 보내 배신을 권유하는 등 안그래도 불안한 서군의 내분을 더욱 부추겼다. 승부는 이걸로 갈렸다. 서군이 전투력과 지형상의 이점만 갖고 전투에 응한 게 참 경솔한 짓거리였다. 동군은 이미 서군에 권모술수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서군은 자신의 팔다리를 자신이 다루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아군이 아군이 아닌 상황이 된 서군과 적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는 동군의 상황을 보면 결과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동군의 대승으로 종결되었다. 정확한 사상자는 알 수 없으나 소설 대망에 따르면 동군의 사망자가 약 4천 정도에 서군은 약 3만 2천에 이르렀을 거라고. 소설인 만큼 숫자에는 신경쓰지 말고 대강 서군이 그만큼 큰 규모로 패배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이시다군을 비롯해 끝까지 싸운 서군 측 병력은 거의 몰살을 당했음을 생각하면 그다지 틀린 주장은 아니다. 이게 비율상으로 따지자면 양군이 대등한 병력인 7만 4천~8만 쯤에서 맞붙었기 때문에 서군은 절반 가까이 전사해서 완전히 궤멸한[84] 반면, 동군은 겨우 5% 정도만 사망한 데에 그쳤다.

7. 종전, 그리고 결과

한편 규슈에서는 구로다 간베에와 가토 기요마사가 서군의 빈집을 열심히 털고 있었다. 이들의 빈집털이는 다치바나 긴치요에게 막혔지만 긴치요의 활약도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조스이의 이러한 빈집털이를 두고, 그 역시 일본을 차지하려는 야망이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중앙에서 내전을 벌이는 동안 규슈를 제압하고 시마즈가와 연합하면 전투로 지쳐있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해볼 만하다는 구상이었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아들 나가마사의 활약 덕택에 동군이 후시미 성 전투로부터 2개월 만에 빠르게 승리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종료 후 구로다 죠스이는 그동안 털었던 서군 빈집을 모두 이에야스에게 넘겼으나,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께서 제 오른손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며 감사를 표했습니다."라며 자신에게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 그럼 네 왼손은(이에야스를 베지 않고) 뭐했냐?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85]

또한 발단이 된 우에스기에서는 이에야스가 떠나기 전 모가미 요시아키의 거성에 도호쿠의 다이묘들을 모아 우에스기 토벌에 종군시키려 하였는데, 본인이 반전하고 다른 다이묘들이 떠나는 바람에 모가미만 전쟁 준비를 하는 꼴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우에스기가 모가미를 공격하여 모가미의 거성을 빠르게 포위하였으나, 요시아키는 데와의 여우라는 별명답게 3천의 병력으로 2만이 넘는 우에스기 군을 상대로 선전하였고 우에스기 군은 하세도 성에 묶이게 되었다. 이 때 관망하던 다테 마사무네가 참전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우에스기 군은 퇴각하고 이후 이에야스에게 항복하였다.

모리 데루모토는 전후 모리 히데모토, 타치바나 무네시게[86]의 주전론을 거부하고 알아서 이에야스에게 항복하였다.[87]

야사로, 이때 주변에 살던 일반 백성들은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전투를 구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세 일본처럼 봉건 영주들 간의 전투는 특성상 다른 상황에 비해서는 일반 민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고자 하니까 이 대전투 또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전쟁에 휩쓸리면 노역과 약탈, 살해되고 강간당하고,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던 센고쿠 시대에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해야했던 건 피차일반이었기에 오히려 패잔병들과 그들이 지닌 검과 갑옷 등의 재물을 노렸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88] 만화 배가본드에 이런 상황이 잘 묘사된다.[89]

8. 분석

8.1. 총지휘관의 역량

제일 먼저 양 측 지휘관의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개전부터 종전까지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이에야스는 본인이 짜온 시나리오를 남김없이 선보였음을 알 수 있다. 명분과 실리를 철저히 챙겼음을 알 수 있다.
  1.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선 도발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자기 일파만의 병력 전부를 이끌고 출정, 미츠나리의 거병을 유도
  2. 후시미 성에 남겨둔 도리이 모토타다 및 일부 병력들을 미츠나리가 공격함에 따라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타도할 명분 획득
  3. 오야마 평정으로 즉시 다이묘들의 의견을 정리하고 서쪽으로 회군
  4. 서군의 내부 불안을 이용해 오사카로 우회하는 척 세키가하라로 유인
  5. 학익진을 펼친 서군의 포위망에 같은 도요토미 가 신하들인 칠본창 부대를 내세움[90]
  6. 본인은 느긋하게 뒤에서 관망.[91] 물론 등 뒤에 모리 군이 있지만 내려오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 섰기에 문제 없었다.
전투 결과 이에야스는 휘하 병력 대부분을 보존했음은 물론, 세키가하라에 참전하지 못한 히데타다의 본군까지도 고스란히 아낄 수 있었다.[92] 이 한 번의 전투로 서군이 일망타진당하고 줄줄이 무너졌음을 생각하면 중요한 전투임에 비해 너무 일방적인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그저 전투를 대신 해줄 다이묘들에게 기대어 본인은 손을 놓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자기 병력을 지휘하면서 첩자들을 적진에 뿌려 흔들어댔는데 킷카와 히로이에를 통해 모리 군을 뒤흔들었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흔들다 못해 아예 자기 편으로 돌아서게 했다. 게다가 밀서를 여기저기 뿌려대서 자기 편으로 배신하라는 것을 마치 절호의 찬스인 것처럼 선전하면서 자기 밑의 다이묘들은 꽉 붙잡았다.[93]

전투 시작 전부터 이미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우에스기 때문에 이에야스가 북쪽으로 간 틈에 거병하겠다는 게 처음부터 미츠나리가 노렸던 바였을지 모르나 이에야스 또한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다. 사실 이에야스 입장에서 미츠나리는 별 게 아니었다. 애초에 미츠나리의 고쿠다카 부터 19만 4천 석이라 이에야스의 256만 석과는 13배나 차이난 데다가 진작에 미츠나리의 목을 쳐버릴 기회가 많았고 자기가 치지 않아도 칠본창이 쳐버릴 수 있었다. 실제로도 미츠나리가 칠본창에게 습격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미츠나리는 어이없게도 이에야스에게 살려달라고 요청했고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미츠나리를 그의 거성으로 갈 때까지 아무도 못 건드리게 배웅하면서 동시에 오봉행에서 삭탈관직시켰다. 그렇다보니 미츠나리의 입장에서 보면 명분을 아무리 쥐어짜도 동조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형국이었다.[94] 게다가 미츠나리는 가라샤를 죽게 만드는 희대의 자충수마저 둬버렸으니 이쯤되면 이에야스가 가서 미츠나리를 그냥 칼로 찔러 죽여도 명분이 설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놔두었던 것, 은혜를 베풀었던 것은 미츠나리가 거병하도록 유도해 그에게 붙을 파벌들을 통째로 갈아버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실패하고 히데츠구를 숙청한 시점부터 도요토미가의 명운은 이미 결딴이 나 있었다. 이에야스의 천하, 이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고[95] 전술한 '미츠나리의 거병을 통해 그에게 붙을 파벌들을 통째로 갈아버릴 생각'부터가 이에야스는 이미 히데요시 사후 본인을 마음 속으로는 일본의 지배자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충성심 테스트로 자신을 가장 적대하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이용해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떼거리로 제거하기 위해 너구리 같은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에야스는 뛰어난 장악 능력으로 동군에 소속된 자신의 휘하들을 전부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지휘했다. 하지만 인망이 부족한 미츠나리에게 리더로써의 장악능력은 부족했다. 서군의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능력을 신뢰한 동군의 다이묘들과는 달리[96] 미츠나리의 지휘능력을 크게 의심했다. 서군이 지휘관의 지휘능력을 의심했기 때문에 배신을 염두에는 두고 있었으나 먼저 배신했다가 혼자만 배신할 경우 집중공격을 받을까봐 서로 눈치만 계속 보고 있었고 실제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제일 먼저 배신하자 뒤이어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줄줄이 배신 퍼레이드를 벌인 것이다. 그 밖에도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병력이 1,500명 밖에 없다고 무시한 행동 등이 큰 실수였다. 설령 요시히로의 병력이 이보다 적더라도 요시히로를 존중해줘야만 했다.[97]

미츠나리는 이에야스가 서쪽으로 떠난 틈을 타 마침내 거병할 수 있었으나 상술했듯 이후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다 실패하고 토리이 모토타다의 후시미 성 공격에도 시간을 끌리게 되면서 불필요한 시간 낭비와 병력 소모가 잇따라 생겼다. 특히 가라샤 사망이 치명적인데 이게 되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와준 꼴이 되어버렸고 중립을 지키던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가라샤의 사망으로 인해 이에야스 쪽으로 붙어버렸다. 시작부터 손실을 안고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도 처음 그가 의도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전투였다. 포진 자체는 완벽했을 지언정 미츠나리 본인은 이 전투를 획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굳이 야전으로 결전을 치러야 했던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다. 군략에서 이에야스가 간간히 부족한 점을 보이긴 하였으나 수많은 경험을 쌓은 백전노장이였고, 미츠나리의 군략을 높이 감안해주더라도 절대 미츠나리가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통솔력. 세키가하라 전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둘에게 가장 큰 차이가 났다.

야전 지휘관들의 능력만 따지면 서군이 마냥 뒤진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그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게 문제였다. 미츠나리의 뜻을 끝까지 따른 지휘관은 고작 오타니 요시츠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 뿐이었다. 이들 모두 자기 병력을 통솔할 능력은 충분했지만, 불리한 전역을 어떻게든 뒤집거나 승리할 만한 전력을 갖춘 다이묘들은 아니었다.[98] 그런데 그나마 믿을 게 이들이었다는데서 이미 패색이 짙었던 것. 나머지는 모두 배신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는데, 특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1만 5천의 대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군과 서군을 저울질 하고 있었다. 서군 입장에서는 이기기 위해서는 무조건 잡아야 하는 존재였다. 특히 미츠나리에 의해 영지가 감봉된 적이 있었단 설이 돌 만큼 애초에 감정이 좋지 못할 수밖에 없으니 더더욱 관리가 필요했던 경우. 게다가 이에야스는 서군 다이묘들에게 계속 밀서를 뿌리면서 배신을 부추겼는데 히데아키는 그런 이에야스의 배신 밀서를 받고 있던 다이묘였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코바야카와에게 글로 된 서약서만 줬을 뿐 별도의 관리도 하지 않으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펼친 학익진의 한쪽 날개를 맡겼다. 최악의 대처였다. 정말 하다 못해 서로 백중세였던 정오 즈음이 되어서라도 설득에 나섰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못해서 결국 히데아키가 배신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만 해야 했다. 이도저도 하지 않은 미츠나리는 결국 멸망으로 걸어가고 말았다. 요상하게 가장 군재가 떨어지는 자가 총지휘관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지휘체계를 갖춘 서군이었다.

그리고 문제가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고쿠다카. 미츠나리는 설령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고작 19만 4천 석에 불과한 작은 고쿠다카로는 다른 제장들을 지휘하기 매우 어려웠다. 당장 시마즈 요시히로가 73만 석이나 되는 근육질 다이묘였고, 실제로도 배신한 히데아키조차 37만 석이니 다들 체급이 미츠나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았던 것이다. 이건 굳이 따지자면 미츠나리 본인 잘못이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잘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애초에 미츠나리를 부교로 임명해 줄거였으면 51만 석 정도를 떼어다 미츠나리에게 줘서 70만석 정도는 만들어 줬어야 했다. 그렇게 해도 히데요시는 170만 석이나 되는, 여전히 2위의 다이묘 자리를 유지했을 것이니 별 손해도 아니었다. 이렇게 했으면 히데아키는 저 무시무시한 고쿠다카 크기에 눌려서 배신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미츠나리의 작은 고쿠다카를 보고 이미 얕잡아 본 것이다. 현대 군대로 따지면 대위가 지휘관이 되면 중령들이 말을 안 듣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반면 이에야스의 고쿠다카가 256만 석이나 되어 모든 다이묘들이 이에야스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공통적으로 죄다 이에야스를 매우 어려워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결국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데루모토를 관여시키는 걸로 자신의 한미한 고쿠다카 문제를 해결해 보려 시도는 했으나... 문제는 그 데루모토가 병력들 앞에는 코빼기도 안 보인 것이다. 데루모토가 병력들 앞에 직접 나타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정말로 컸다. 나타났으면 병력들이 일절 의심하지 않고 미츠나리가 데루모토의 대리인. 이렇게 인식했을 것이다. 고쿠다카가 별 거 아니어 보여도 대단한 게 고쿠다카는 병력으로 단순 계산이 가능한 단위이며 고쿠다카만으로 바로 뽑아낼 수 있는 병력을 따지자면 미츠나리 5천 명 vs 이에야스 6만 5천 명 이런 식이 된다. 고쿠다카가 힘의 기준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미츠나리 본인이 지휘를 하기에는 힘이 너무 약했던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단장이 꼭 장성급 장교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미츠나리는 거병 후 석 달이 넘는 기간동안 자기와 별로 엮인 적이 없거나 혹은 사이가 안 좋았던 다이묘들을 제대로 포섭치 못해 결국 전투에서 발목을 잡힌 반면 이에야스는 휘하 다이묘들을 능수능란하게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다이묘들까지 흔들 기반이 마련됐다. 물론, 이는 미츠나리 또한 이 상황이 오래 갈 것이라 여겼기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포섭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나 이에야스는 상대 세력에 빈틈이 있는 지금 결단을 내리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 판단했을 것이고 기후 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허겁지겁 다이묘들을 포섭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거기다 모리 데루모토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론 얼굴마담이긴 해도 형식상 총지휘관이니 손을 쓰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겠지만, 어떻게든 데루모토를 전장에 나오게 만들거나 아니면 확실하게 서군의 편으로 만든다든가 해야 했는데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안코쿠지 에케이만 믿었다가 킷카와 히로이에가 히데모토를 미친 듯이 흔들어놓은 덕에 모리 군은 전투 내내 소극적인 행보로 일관했다.[99] 데루모토는 에케이와 히로이에 사이에서 갈팡질팡만 하다가 자기가 뭔가 한 게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서군의 포진은 대단히 문제가 많다. 진형 자체야 좋았지만 한쪽 날개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맡고 있었으며 이에야스의 배후를 노릴 진영은 모리 군이 맡고 있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히데아키를 나름대로 견제하고자 배치해둔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부대마저도 배신자들 투성이었다는 점이다. 야스하루는 전투 이전부터 친도쿠가와파나 마찬가지였고[100] 당연히 이에야스가 뿌린 밀서를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다.[101] 당연히 히데아키의 배신 이후 줄줄이 따라간 것은 그만큼 배신하기 쉬운 위치였다는 점도 한몫한다.

거기다 시마즈 요시히로 또한 이에야스 편을 들려다가 마지못해 온 다이묘… 이쯤 되면 미츠나리가 인선 배치를 못해도 너무 못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요시히로를 영입했으면 극진하게 대우해야 하는데 미츠나리는 워낙 밴댕이 소갈머리라서 요시히로가 병력을 1,500명밖에 안 데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멸시했다.

그 결과, 미츠나리는 히데아키가 마츠오 산을 무단 점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떻게 할 수 없어 결국 오가키 성을 나와야 했고 서군 전원이 히데아키에 맞춘 포진을 짜야만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인해 야스하루도 배신하고 계속 줄줄이 배신을 이어가는 바람에 전투의 판도가 뒤집혀 서군의 대패로 직결, 군략의 차이는 적었으나 정치력의 차이는 너무나 컸으니 병력 및 예하부대 장악 능력은 크게 달랐던 것이다.

8.2. 명령 체계의 차이

이러한 총지휘관의 차이는 동군과 서군의 지휘체계에 명명백백히 나타난다. 동군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하는 군대였으나, 이에 맞서 싸워야 할 서군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부족한 인망으로 인해 모리 데루모토라는 얼굴마담을 내세워야 했고, 이로 인해 지휘권이 이원화되었다.

물론 데루모토가 형식상 지휘관이었기에 실제로 미츠나리의 지휘권에 간섭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나 내부적인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데루모토의 우유부단함 또한 서군 장수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는 요인이었다. 미츠나리가 자신이 직접 최종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모든 명령을 내릴 때마다 모리 데루모토의 이름을 팔아야만 할 정도로 인망이 바닥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지만. 이러한 서군의 모습을 보면 미츠나리는 미츠나리대로 사람을 못 믿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타 지휘관들은 시마즈 요시히로처럼 그런 미츠나리에게 실망하거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나 모리 히데모토처럼 갈팡질팡거리며 전투 중에 미츠나리의 명령을 씹어버리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미츠나리는 당시에 히데요시의 최측근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딱히 능력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을 만한 것도 없었으며 특히 다이묘들에게는 계급장이나 다름없는 고쿠다카 역시 20만 석도 안 되는 작디 작은 다이묘였으니, 다른 건 몰라도 미츠나리보다 많은 고쿠다카를 보유한 다이묘들이 미츠나리를 무시하기 딱 좋은 위치였다.

사와야마 19만 석의 미츠나리가 다른 대 다이묘들을 지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전국시대에 고쿠다카만큼 자기 세력이나 힘을 보여주는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미츠나리가 19만 석의 고쿠다카 가지고는 인망이 좋더라도 지휘권을 가지기 힘들다. 결국 서군은 데루모토의 이름을 팔아 세력을 모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모은 세력이 단합될 수 없었다.

결국 이런 차이는 전투 중에 유연한 배치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으며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반면 동군은 이에야스의 명령을 따랐고, 이에야스는 자군을 확실히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요 서군의 장수들까지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미츠나리가 이를 막지 못한 끝에 결국 서군 전력의 20~25%가 동군으로 돌아서고 비슷한 수의 전력이 방관만 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패배는 당연지사였다.

8.3. 얽히는 이해관계

덧붙여 동군과 서군은 각 진영마다 얽힌 이해관계가 확연히 차이난다. 일단 동군부터 보자면 다테 마사무네, 구로다 요시타카 등 어부지리를 노리는 영주들도 분명 있었으나 이에야스 밑에서 그를 따르며 미츠나리 파를 축출하는 데 우선목표를 뒀다. 때문에 이들은 각자 자기 부대가 주둔한 곳에서 나름대로 이득을 챙기거나 후일을 도모하는 행보를 보일지언정 동군 자체에 혼란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102]

반면에 서군은 입장이 다른 영주들이 많았다. 처음부터 이에야스를 따르고자 한 영주들이 많았던 동군과 달리 서군은 둘의 대립을 방관할 생각이었거나, 이에야스를 따를 생각이었던 영주들이 다수 존재했다. 당연하지만 전후자 모두 군사 1만 이상을 보유한 대 다이묘가 하나씩 있었고 이들은 모두 서군의 핵심적인 역할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양 진영을 비교해보면 정말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총지휘관의 참전 유무다. 여기에 얽힌 이해 관계가 폭발하면서 양 군이 극적으로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서군은 모리 데루모토의 참전을 적극적으로 원했다. 전투 전부터 미츠나리는 데루모토가 오사카 성에서 나와주길 원했고 이건 다른 서군 영주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데루모토의 불참이 확정되자 서군 쪽의 사기는 급격히 꺾였고 여기에 데루모토가 없는 모리 군이 미츠나리의 명령을 무시하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구경만 해 서군의 패배를 불렀다. 적어도 데루모토가 이 전투에는 불참할 지언정 서군 병력들 앞에 얼굴만이라도 보여줬더라면 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을 것이지만 데루모토는 끝내 서군 병력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서로 간에 이해 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데루모토는 명목상 총지휘관이었지만 전장에 참전하더라도 미츠나리가 지휘권을 계속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설사 데루모토가 지휘권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서군은 사분오열될 게 틀림없었고 거기다 서군 내부에는 본래 동군으로 합류하기로 했던 인사들이 많았으며 기회주의자들 또한 많았다.

서로 간에 이해 관계가 얽히게 되면 오합지졸이 되는 것 정도는 숱한 역사가 증명해왔다. 사실상 데루모토가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서군의 시한폭탄들은 모조리 초읽기에 들어갔다 봐도 무방하다.

반면에 동군은 달랐다. 물론 동군도 이에야스가 참전하지 않았으면 좋지 않았을 것이고 동군 다이묘들도 이에야스에게 출진을 재촉했던 적이 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도 했고. 그러나 동군은 서군과 달리 이에야스가 참전은 하되 전면에 나서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히데타다가 3만 5천이나 되는 병사를 이끌고 있는데도 그가 오기도 전에 세키가하라 전투를 치렀음은 물론, 이에야스가 후방에 모리 군이 있다는 이유로 정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군의 사기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는 위에도 설명했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입장 때문이다. 이들의 목표는 미츠나리 파의 축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히데요리를 든든히 지원할 수 있는 대 다이묘로서의 입지를 다질 필요도 있었다. 이에야스가 아무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검은 속을 드러냈다고는 하나 이미 히데요시와 대립한 바 있는 이에야스를 영주들이 순순히 믿었을 리도 없다. 거기다 엄밀히 말해 칠본창 입장에서 이에야스는 자기들이 이기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자기들이 섬기는 주군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군은 어디까지나 히데요리였으며 이에야스 또한 히데요리의 가신에 불과했다.

즉, 이들 입장에서 이에야스가 정면에 나서 전투를 지배하게 되면 자기들의 공적이 축소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에야스의 개 취급을 받을 여지가 많다. 그러니 이에야스가 총사령관으로서 출진은 하더라도 전투 정면에서 나서 공을 세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 공적을 인정받아 영지도 왕창 늘려받고 그러면 전투 이후 도쿠가와 정권이 수립되더라도 도요토미 가문과 그들의 입지 또한 유지되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이에야스 입장에서도 이러한 동군 영주들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자기 병사들을 갈아넣지 않고 도요토미 가신들만으로 전쟁이 끝난다면 고스란히 남은 군사력으로 정권 수립 후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주들에게 땅도 떼어줘야 하고 당장에 축출했다간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영주들이 알아서 선봉장으로 나서주니 이에야스 본인은 일절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되면 이에야스는 영주들에게 논공행상으로 떼줄 만큼 다 떼줘도 본인은 여전히 강대한 세력으로 남을 수 있다. 게다가 적대인 우에스기 가게카츠나 모리 데루모토나 이 놈들 걸 빼앗아다 동군 영주들에게 나눠주면 그만이므로 이에야스 본인은 일절 자기 고쿠다카에 대한 피해가 전혀 없다. 특히나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 그런 거 필요 없고 고니시 유키나가만 죽이면 된다고 했으니, 고니시 유키나가를 죽이고 그의 고쿠다카를 가토 기요마사에게 붙여주면 가토 기요마사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게 된다. 참으로 절묘하게도 동군은 총지휘관과 다른 다이묘들 간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여기서 엄청나게 노련한 논공행상을 하는데 서군 다이묘들의 땅을 압수해다가 그걸로 논공행상을 벌인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참수한 뒤 고니시의 영지를 그대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주었다. 모리 테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츠는 둘 다 고쿠다카 100만 석이 넘는 대다이묘였지만 이에야스는 그 둘의 영지를 25% 정도로 확 줄여버리고 전봉 조치했으며 특히 카게카츠는 광대한 아이즈 번에서 북쪽 구석탱이 요네자와 번으로 쫓겨나버렸다. 또한 쵸소카베 모리치카의 토사는 야마우치 카즈토요에게 주어졌다.

이로 인해 전투가 시작되자 동군은 적극적으로 전투에 뛰어들었지만[103] 서군은 자기들끼리 눈치 게임 벌이고나 있었다.

8.4. 히데요시가 남긴 후환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를 거론할 때 죽은 히데요시가 남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야스는 판도를 읽는 능력이 매우 좋았으며 통솔력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그가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하는 과정은 엄청난 속도였다. 7월 중순 거병 소식을 듣게 된 이에야스는 25일 오야마 평정을 통해 우에스기에 남길 자와 서쪽으로 돌아갈 자들을 정리했고 토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을 개시해 8월 23일 기후 성을 손에 넣었고 9월 15일 마침내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였다. 그 많은 대군이 이에야스의 지휘 한 번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이다. 게다가 후속조치 역시 일사천리라 10월 1일에 미츠나리를 참수했고 논공행상도 끝냈다.

전후 상황을 보면 이게 히데요시의 말년이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이에야스가 휘하 다이묘들을 꽉 쥐며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이에야스의 통솔력이나 군략도 있지만 애초에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 막강했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이에야스의 지지가 막강한 미카와에서[104] 지지기반이 없는 간토로 보냈지만 정작 이에야스는 훌륭한 내정과 개발로 간토를 훌륭한 영지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후 참전 압박을 받았음에도 늘어난 고쿠타카로 인해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과 간토의 특성을 알고 보냈던 히데요시였던지라 이 이상 압박은 불가하여 임진왜란에 전혀 참전을 하지 않아 피해를 하나도 받지 않았던 것, 자신의 양자 히데츠구 사건으로 인해 다수의 다이묘들이 죽을뻔 하거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마에다 토시이에가 아닌 이에야스를 내세운 것이 연쇄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왜란 후 이에야스는 250만 석이 넘는 땅과 상처 하나 없는 8만 가량의 대병을 보유하고 있었고[105] 거기다 이에야스가 소유했던 미카와 등도 여전히 이에야스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106] 히데요시 사후에는 히데요시를 따를 인물이 없어져 버렸다.

이에야스의 그릇은 히데요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그릇이 크고 인내심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걸 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전봉 조치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다.[107][108] 이에야스는 이 힘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에다 토시이에 정도가 아니고서야 입도 뻥긋 못할 정도의 막강한 세력을 보유했고[109] 미츠나리에 반발한 히데요시의 측근들까지 이에야스를 편들고, 히데요시가 육성하던 무장들 중 두번의 왜란으로 잔뼈가 굵은 가토 기요마사가 붙은것과 가토와 쌍벽을 이루는 맹장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해 전투에 일가견이 있는 상당수 무투파가 이에야스에 붙은것, 대다이묘 격인 다테 마사무네 같은 다이묘들은 자식들의 결혼으로 혈연으로 묶이지 자연스레 다음 천하인으로서의 발판이 완성되었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의 힘을 기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불모지인 에도로 전봉시켰지만 문제는 이에야스가 도시 개발의 달인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에야스는 기가 막히게 도시를 잘 개발하는 사람으로 불모지인 에도에 아예 도시를 새로 차리는 수준으로 개발했으며, 허름한 에도성을 리모델링해서 일본에서 제일 화려한 성으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치수를 기가 막히게 잘 해서 에도를 일본에서 제일가는 곡창지대로 탈바꿈 해 놓았다.

에도로 전봉되어 거기서 살아남은 것은 이에야스의 능력이지만 문제는 이에야스가 에도에서 임진왜란 동안 착실히 힘을 기르는데 히데요시는 허황된 꿈을 꾸는 바람에 자기 휘하 가신들의 기반을 박살내버렸다. 이 때문에 히데츠구가 살아남으려고 주변 다이묘들의 환심을 사고자 돈을 빌려준 자들도 꽤 많다. 그랬더니 이들을 모두 히데츠구 사건을 통해 히데츠구와 관련되었던 인간 전부 숙청대상에 올려버린다. 게다가 그 중 일부가 숙청을 모면했다고 하지만, 문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구명을 해 줘서 겨우 숙청을 모면한 이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빚진 이미 이에야스 사람이 된 이후인 것이다. 위에도 나와 있지만 이중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이 히데요시의 측근들이었고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견제하라고 배치해둔 기존 이에야스의 영지인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시나노와 노부나가의 영지였던 오와리 방면 다이묘들과 이에야스가 혹시나 서쪽으로 진군할 때 배후를 칠 수 있는 에도 근처의 다이묘들이었다. 스루가 - 나카무라 가즈우지, 토토미 - 호리오 요시하루, 미카와 - 다나카 요시마사 등, 이에야스의 뒤를 쳐야 할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도 전부 이 숙청에 휘말렸다가 이에야스 덕에 살았으니, 당연히 전쟁이 발발하면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싸우는 것은 당연했다.[110] 게다가 말년의 히데요시는 노망이라도 든 것인지 연거푸 삽질을 반복했고, 임진왜란이라는 기나긴 전쟁은 크나큰 물자, 인력 손실을 야기했다.

이들이 거진 이에야스 편에 붙어버리자 이에야스는 오야마 평정 후 거진 무혈입성 수준으로 서쪽으로 쾌속 질주를 하더니 한 달 만에 선봉대가 기후 성을 함락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단순히 미츠나리나 그 일파들의 무능함을 떠나 히데요시가 말년에 싸지른 똥이 그 부하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111]

8.5. 종합

세키가하라 전투는 결국 개전 전부터 이에야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의 거병을 통해 자신이 거병할 기회를 얻었고, 미츠나리가 거병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미리 우에스기와 인접한 다테와 모가미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았다.[112] 그러고는 순순히 아이즈 쪽으로 나아갔으나,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부대를 재편성해서 다테와 모가미로 하여금 우에스기를 상대하게 하고 돌아갔다. 때문에 서군은 바람과 같이 달려오는 동군을 상대로 당황했고 미츠나리는 이런 당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세키가하라라는 전장을 잡고 학익진을 편성해 이론적으로는 최고의 포진을 만들어놓긴 했으나 그 또한 역부족이었다.

미츠나리는 위에 써있듯이 아군 장악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미츠나리는 어디까지나 일단 이기기만 하면 불만이고 뭐고 누를 수 있다는 판단하에 어떻게든 동군과 전투를 하고 싶어했다. 물론 이렇게 빨리 벌어질 줄은 몰랐겠지만, 이미 계산은 다 해놓았고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의 지형과 포진은 서군에게 유리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임용한은 가장 믿을 만한 부대를 전부 자기 주변에 모아놓은 점을 미츠나리의 결정적인 실수라고 지적했다. 미츠나리는 자신의 부하들도 분명히 배신할 것이라고 지적한 존재들을 결정적 위치인 마쓰오산과 난구산에 배치했다. 임용한은 미츠나리 입장에서는 '애들을 중앙에 놓았다가 배신하면 어떻게 하냐는 생각에 판세를 보고 자신에게 가담하겠지' 라고 생각했을 수 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생각과는 달리 임용한은 미츠나리가 마쓰오산과 난구산의 병력들이 움직일 수단을 안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한쪽이라도 그런 수단이 있었으면 따라 움직였을 것이라고. 또한 진짜 웃기는건 난구산이라고 지적했다. 왼쪽의 킷가와 히데아키는 배신자, 반면 쵸소카베 모리치카가 있는 오른쪽의 부대는 충성파다. 차라리 앞에다 충성스러운 부대를 놓았으면 이길 수도 있었지만 뒤통수를 맞을까봐 걱정한 미츠나리가 포진을 이상하게 했다고.[113]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미 결판나 있었고, 서군에는 이를 전술적 승리로 뒤집을 역량을 가진 자가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휘자와 구성원 간의 관계라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겠다.

9. 전후 처리

9.1. 서군

서군 출신 영주들은 그야말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 패전 후 도주했다가 옛 친구인 다나카 요시마사에게 붙잡힌 미츠나리, 타케나카 시게카도[114]에게 붙잡힌 고니시는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거부하고 참수를 당했다.[115] 그리고 모리 데루모토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로 데루모토를 대신해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안코쿠지 에케이가 데루모토의 죄를 적용받아서 조리돌림당한 후 참수당했다.
  • 모리 데루모토는 사형을 면하는 한편 영지 보전을 약속받고 주고쿠로 돌아갔지만 애시당초 이에야스는 그를 그냥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스오, 나가토, 빈고, 아키, 이와미, 이즈모 112만 석에서 스오, 나가토 29만 8천 석으로 감봉. 그나마도 원래 이에야스가 데루모토를 처형한 후 완전히 소봉시키고 자신과 내통한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주려고 했으나 히로이에가 이에야스와 담판한 끝에 29만 8천 석이나마 남겨 준 것이다.[116] 서군 총대장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모든 영지를 몰수한 것. 그런데 모리 데루모토와 관련되어서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만 하기에 모리 데루모토 대신 안코쿠지 에케이를 참수했다. 여담으로 데루모토 본인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분하게 생각해서 이후 잠잘 때 발을 에도쪽으로 향하게 했다. 킷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을 위해 동군과 내통한 것이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117]
  • 시마즈 요시히로 사쓰마 번 73만 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사실 이에야스도 시마즈가에 대해 토벌령을 내리긴 했으나 건재한 시마즈 가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요시히로가 동원한 병력은 요시히로 본인이 사재를 털어 마련한 병력이라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후에도 시마즈가는 건재했던 것. 여기에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가 사실상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그는 이 모든 게 치매에 걸린 요시히로의 독단이라며 그에게 독박을 씌워버렸다.[118] 하지만 이렇게 주장한 덕에 이에야스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당주 자리에서 내리게 하는 조건으로 더 이상 시마즈 가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이 영지는 고쿠다카 삭감이 없는 대신 다이묘가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로 바뀌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구로다 요시타카와 연합할지도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규슈가 너무 멀고[119] 시마즈 군이 강군이란 평판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요시히사의 이런 판단 덕에 시마즈 가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요시히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단, 후에 이들이 모리 가문의 조슈 번 연합하여 막부를 무너뜨리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일본 최고의 정치 파벌을 형성한 것을 보면 그의 복수는 후손들이 늦게나마 해준 셈이다.
  •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아이즈 번의 거대 다이묘 120만 석에서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감봉 크리. 사실 요네자와[120]는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의 영지였으며 아이즈 번의 일부로 아이즈 번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당연히 요네자와가 아이즈보다 작을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이 가진 영지는 죄다 뺏기고 북쪽에 조금 붙어 있는 가신 영지를 대신 차지한 형세. 패전 후 카게카츠는 '무운(武運)이 쇠한 것이니 이제 와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만을 남겼다고 한다.

    사실 핵심적인 주모자라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신세였지만, 카네츠구의 엄청난 말빨로 목숨을 건진 데다가 카네츠구의 요네자와의 영지까지 자신의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양도받았다. 여기에 카게카츠의 인품에 매료된 가신들이 감봉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떠나질 않아서 에도 시대의 명군 우에스기 요잔의 개혁 이전까지 에도시대에 우에스기 집안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3대 번주 츠나카츠가 후가 없이 사망하여, 여동생의 아들이었던 4대 번주 츠나노리를 말기양자로 들여 가문은 이어졌지만 그 대가로 카게카츠 시절의 30만 석에서 절반인 15만 석까지 크게 감봉되는 등, 우에스기 가문의 요네자와 번은 고통스런 시절을 보내야 했다.
  •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에 망명했다가 체포된 우키타 히데이에는 오카야마 57만 석에서 개역당하고[121] 자신은 이즈 제도 하치죠시마[122]로 유배된 뒤 거기서 죽었다. 그나마 처가인 마에다 가문의 탄원 덕분에 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할복을 강요당하거나 목이 잘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히데이에는 그야말로 엄청 가늘고 엄청 길게 여생을 보냈는데 에도 막부 제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츠나가 치세하는 시절인 1655년에 향년 83살의 나이로 유배지 섬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이 당시 우키타 히데이에가 매우 젊은 나이였던 데다가 꽤 오래 살다가 천수 이상으로 누리고 갔으므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다이묘 중 가장 늦게 죽었다.
  • 사나다 마사유키 사나다 유키무라 부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제대로 농락당해서 이를 갈고있었고 이에야스도 사나다 마사유키를 위험시하여서 둘 다 참수를 하려 했지만 동군측에 붙었던 사나다 노부유키가 장인어른 혼다 타다카츠의 도움을 받은채 구명을 청원한 끝에 쿠도산으로 유배를 당했다. 이후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가문에 경사가 터질때마다 사면을 바라며 구명 청원을 했지만 이에야스는 들어줄리 없었고 결국 유배지에서 죽었고 노부시게(=유키무라)는 히데요리에게 고용되어 구원하기 위해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했다.
  •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 측에 참전했다가 오쓰 성에서 발목이 잡혔고, 세키가하라의 본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자 본래 영지였던 규슈 야나가와에서 동군 측에 항전했으나 결국 동군에게 항복하여 패전 서군 다이묘들에 대한 영지 개역에 휩쓸려 영지 다 잃고 낭인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쇼군 호위대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야나가와 10만 석으로 복귀한다. 복귀한 이후에 발발한 시마바라의 난에서 엄청난 용맹을 보이며 대활약했다.
  •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에 발목잡혀 뜻을(?) 이루지 못한 사타케 요시노부는 조상대대로 자리잡아 영지를 늘려 간토 히타치 54만 석을 가진 다이묘였었지만, 대대적인 감봉 조치로 깡촌인 데와 아키타에 20만 석의 다이묘로 전봉을 당했다. 사타케 가문 역시 에도 시대 때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여기도 모리, 시마즈가처럼 나중에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무진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이 아닌 삿초의 메이지 신정부편에 들며 쇼나이번[123]을 아이즈 전선에서 이탈시키면서 공략을 수월하게 만들었고, 이들의 북진도 본거지인 구보타성 앞의 쓰바키다이에서 신정부군과 같이 저지하면서 막부 잔존 세력을 소탕하는 걸로 복수한다.
  • 고니시의 사위 소 요시토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124] 그냥 장인어른의 지시로 서군에 가담한 점 + 조선과의 외교회복을 위해 필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125] 형벌생략이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다.[126] 단 살려주는 조건으로 고니시 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라는 이에야스의 요구조건에 응해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마리아와 잽싸게 이혼한다.
  • 소마 요시타네는 한때 사타케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하였지만 자기 영지를 통과하려는 다테 마사무네를 곱게 보내주어[127] 전후 그의 도움을 받고,[실제로] 다테의 편을 들어 우에스기를 공격하기도 했다는 등의 탄원을 한 결과 개역이 철회되어 기존의 영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 그 외에도 나츠카 마사이에, 오노기 시게츠구, 구키 요시타카는 전후 자결했고[129], 마시타 나가모리, 오노데라 요시미치, 하시오 타카하루 등 상당수가 영지를 몰수당했고 이 영지는 동군에 가담한 영주들에게 돌아갔다. 살아남은 이들도 변방의 도자마 다이묘가 된 자들이 많았으며, 결국 일부 다이묘나 그 밑의 낭인(로닌)들은 아예 쫓겨난 다음 오사카 성 공방전, 시마바라의 난 등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9.2. 동군

동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은 석고가 가증되는 등 이익을 보았으나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가족들이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후다이 가신들도 자신들의 영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 256만 석에서 일본 전역의 400만 석으로 가증되어[130] 압도적인 최강자가 되었고 1603년 쇼군에 취임했다.
    •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는 간토 시모우사 10만 석에서 에치젠 67만 석의 대다이묘가 되었다.
    •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또한 무사시 오시 10만 석에서 오와리 키요스 52만 석으로 대폭 증가했다. 1607년 타다요시가 요절한 뒤 도쿠가와 요시나오가 키요스를 받았고, 이는 고산케의 오와리 번으로 이어졌다.
    • 5남 다케다 노부요시는 히타치 미토 15만 석을 받았다. 1603년 노부요시가 요절한 뒤 미토는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에게 돌아갔고, 이는 고산케 미토 번으로 이어졌다.
  •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들 또한 영지가 늘어나거나 새로 다이묘가 되었다.

주요 다이묘들이 가증된 예는 다음과 같다.
믿을 수 없는 칠본창 등 옛 도요토미 가신들을 규슈, 주고쿠 등 서부에 몰아넣고 간토나 도카이, 긴키 일대의 핵심 영지는 직할령이나 자신의 핏줄, 측근들로 채워넣었다.

10.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자신의 딸 센히메와 결혼시켜 겉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의 후견인이 되었고 이후 정이대장군에 스스로 올라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으며 이후 도쿠가와의 편을 들었던 영주들은 노른자위 땅의 영주가 되거나 기존 대다이묘들은 영지를 많이 받으며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칠본창의 생각대로 이후 그들은 히데요리의 충신으로서 여전히 남을 수 있었으며 동시에 후원자로서 이에야스가 마냥 천하의 주인으로서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할 수 없게 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여기에 대해 이에야스는 딱히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220만석에서 65만 석 규모로 감봉해 어느정도 힘을 꺾은 다음 선봉의 공훈과 시마즈 가와의 전투 공적으로 넷째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에게 오와리, 미노의 땅 52만 석을 주었고 그 덕에 위에서도 언급된 적 있던 이에야스의 옛 영지들이었던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와 사나다 노부유키를 중심으로 한 시나노까지도 사실상 이에야스의 지배권에 들어오게 된다. 히데요시가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에 다이묘로 임명했다가 이에야스에게 붙은 나카무라 카즈우지, 호리오 요시하루, 다나카 요시마사는 고쿠다카 자체는 올랐지만 먼 영지로 전봉되었고 모두 아들이나 손자 세대에서 대가 끊겨 개역되었다. 또한 기존 칠본창을 거진 다 오사카 인근이거나 서쪽으로 몰아넣고 동쪽의 대다이묘들의 필두격인 다테 마사무네는 전투 이후까지도 들들 볶아 야망 따윈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도요토미 편 즉, 서군이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전투 전 120만석을 지닌 다이묘 3위였지만 당연히 30만석으로 감봉당해 중소 다이묘로 몰락했고 재정난이 겹쳐 더 이상 까불 수도 없게 만들었으며 남은 영지라도 지키기 위해 카케카츠는 오사카 전투 때 공적을 세우기 위해서 대활약을 하였다. 이렇게 이에야스는 후방을 안정화시켜 천천히 대 오사카 포위망을 구성해 때를 노렸다.

천천히 때를 노린 끝에 시간이 흘러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등의 도요토미측 핵심 인사들이 죽어나가자[139] 호코지 종명 사건…이라기보단 생트집을 잡으며 오사카 전투를 일으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물론이거니와 첩 소생의 아들까지 죽이는 등 씨를 말렸고 히데요리를 따르던 수많은 영주들도 죽었고 친 도요토미 가문과 잔당들은 개역당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면서 도쿠가와 가문의 절대 권력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에도 막부가 260여 년간 일본을 지배해나갈 발판이 만들어진 것이며 세키가하라 전투의 최종 승자가 이에야스임을 알리는 것이라 하겠다. 이 모든 것이 도요토미 가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만큼 들어주면서 챙긴 결과물이라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140]

2020년 10월 21일(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 음력 9월15일은 양력 10월 21일에 해당), 현지 이에야스 최후의 진지터 옆에 |기후세키가하라 고전장기념관이 오픈하였다. 당초 계획된 예산의 2.5배에 달하는 500억원이 투입되어 공사당시 예산초과와 호화 기념관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무려 4선 현지사였던 (5선까지 하고 현재는 불출마 은퇴) 후루타 기후현지사의 적극적인 추진에 힘입어 기후현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개관하여 4DX 상영관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이에야스와 미츠나리등 당시 참전 무장을 캐릭터화한 기념품도 판매중.

현재 세키가하라 전장 일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농촌마을. 주요 참전 무장의 진지터는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중. |방문기

11.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귀환 포로들을 통해서 이 전쟁소식을 들었고 명나라에 이런 사건이 있었음을 통보한다.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하동(河東)[141]의 교생(校生=지방 향교나 서원에 다니는 생도) 강사준(姜士俊)과 여진덕(余進德) 등의 초사(招辭=자세히 이야기하는 일을 이르던 말)는 다음과 같다.

대체로 적정(賊情)은 병신년부터 천재(天災= 자연재해)가 자주 있고 지진이 너무 심하여 공사(公私 = 공과 사)의 가옥(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해 지은 집)이 무수히 파괴되었고, 심지어는 산릉(山陵= 산과 언덕)과 천택(川澤=내와 못)이 이동하고 균열되어 압살(壓殺=무거운 것이나 센 힘으로 눌러서 죽임)당한 민간과 가축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무술년 8월 18일에 평수길(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142]이 병사(病死=병으로 죽음)하면서 그의 폐노(嬖奴)[143] 석전 치부경[144](石田治部卿: 이시다 미츠나리)·증전 우문승[145](增田右門丞: 마시타 나가모리)·장속 태장승[146](長束太臟丞: 나츠카 마사이에) 등 3명에게 유언하기를 ‘너희는 어린 수뢰(秀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라. 나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내부 가강[147](內府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관동북(關東北) 33주(州)를 네가 진복(鎭服=진압하여 복종하게 하다)시켜야 어린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하고, 다음으로 중납언[148] 휘원(中納言輝元: 모리 데루모토)에게 ‘관서(關西: 간사이 지방)의 남쪽 30여 주에서는 네가 우두머리이니, 모름지기 나의 아들을 부탁하는 근심을 가련히 여겨 삼가 후사(後事)를 보존하도록 하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과 갑비수(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 석전 치부경이 권세를 잡고 자기들을 야박하게 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가강에게 아부하여 석전 치부경을 강주 좌우성(江州佐祐城= 오미 사와야마 성)으로 내쫓았는데, 기해년 가을에 가강이 또 수뢰(秀賴)의 유부(乳父:유모의 남편) 시전비전수(蒔田肥前守:마에다 도시나가)를 가주(加州 가슈)로 내쫓고서 자신이 복견성(伏見城: 후시미 성)으로 들어갔으며, 동년 9월에 수뢰를 문안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수뢰가 있는 대판성(大坂城: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그대로 웅거(雄據=일정한 지역을 차지하여 세력을 폄)하고 있으면서 군국(軍國=군사와 사무)의 모든 일을 제맘대로 하였으므로 상하가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중납언 경승(中納言景勝: 우에스기 가게카츠)이란 자가 있는데 3주(州)를 거느린 장수로서 동북(東北: 도호쿠 지방) 지역에 있으면서 가강이 수길의 부탁을 배반한 것을 매우 싫어하여 비로소 가강을 따르지 않을 뜻을 두어 가강이 재삼 불렀으나 끝내 그에게 복속하지 않았습니다. 경자년 9월에 가강이 5∼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본진(本鎭)인 월주(越州=에치고)와 능등(能登 노토) 지역에 달려가 그의 얼자(孽子) 삼하수(三河守: 유키 히데야스)라는 자를 보내 5∼6만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아 경승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일곱 번 싸워 다섯 번 패하여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석전 치부경 등이 가강이 수길을 저버리고 국사를 제맘대로 농락하는 것을 증오하고, 병권(兵權)을 가지고서도 온유(溫柔)한 휘원(輝元)을 사모하여, 대소(大小)가 모두 휘원을 권하여 허점을 틈타 입성(入城=성에 들어가다.)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증전 우문승으로 부장(副將)을 삼아 수뢰가 있는 곳에 머물도록 하고, 석전 치부경은 비전주 중납언(備前州中納言) 평수가(平秀家: 우키타 히데이에)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살마 도주(薩摩島主=사츠마 성주) 도진(島津: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군대 4∼5만 병력을 거느리고서 중로병(中路兵)이 되어 미주(尾州 오와리)·농주(濃州 미노) 지역 대원성(大垣城: 오가키 성)으로 가서 진을 치고 장속 대장승(長束大藏丞)과 안국사(安國寺: 안코쿠지 에케이) 2인을 군총(群總)으로 삼아, 휘원(輝元)의 양자(養子) 예주 재상(藝州宰相=아키국의 재상) 수원(秀元: 모리 히데모토)과 용장사(龍藏寺)·운주 시종(雲州侍從: 깃카와 히로이에) 등의 4만 3천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우로병(右路兵)으로 삼아 이세주(伊勢州 이세)로 가서 진성(津城: 쓰 성)과 송오성(松鳥城: 우조 성)을 함락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가강에게 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군대를 농주(濃州 미노)의 관원(關原: 세키가하라)으로 이동시키고, 대전 형부경(大田刑部卿 : 오타니 요시츠구)[149]이 산구인 번수(山口因幡守: 야마구치 무네나가, 야마구치 나가히로 부자 중 한 명일 것이나, 둘 중 이나바노카미의 관위를 가진 사람은 없다.)의 7천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좌로병(左路兵)으로 삼아 월후주(越後州 에치고 국)에서 항전을 하였는데, 당시 가강과 같이 일을 도모한 왜장 시전비전수의 군대가 추격하였습니다. 3로의 군대가 농주 관원에서 합진(合陣)하여 가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강은 휘원이 이미 대판성에 입성하여 군대를 출동하여 항전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에게 붙은 8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야로 달려 농주(濃州)의 청원(靑原)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란 자가, 휘원의 사위(실제로는 양사위) 축전주 중납언(筑前州中納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과 휘원의 종제(從弟) 운주 시종(雲州侍從: 킷카와 히로이에)이 속으로 휘원에게 붙으려 하지 않는 뜻이 본래부터 있음을 알고서 몰래 가강에게 내통하니, 가강이 즉시 갑비수를 시켜 반간계(反間計)를 사용하였는데, 축전주 중납언 등이 그 말을 달게 여기고 약속하기를 ‘9월 14일에 정예 기병(精銳騎兵)을 정돈해서 기습해 오면 우리는 거짓으로 3로의 선봉(先鋒)이 되었다가 되돌아서서 관원(關原)을 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과연 그 약속대로 하니 축전 중납언 등이 역시 약속대로 하여 주야로 연전(連戰=두 번 이상 잇따라 싸움)하였는데 관원의 3로병이 크게 패퇴하여 수가(秀家)와 대소 형부경(刑部卿) 등은 다 전사하고[150], 그 나머지도 모두 궤산(潰散=허물어져 흩어짐)하였으며 가강은 승승장구하여 근강주(近江州 오미슈) 세다교(勢多橋:세타 다리)에 도착하여 운주 시종(雲州侍從:깃카와 히로이에)이란 자를 불러 ‘너의 종형 휘원이 성문을 열고 스스로 물러가면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휘원이 속임수인 줄을 모르고 그 말을 믿고서 겁이나 성을 버리고 본진(本津)으로 물러가니 같은 달 27일에 가강이 다시 수뢰(秀賴)의 성으로 들어가 증전 우문승(增田右門丞) 등 자기를 배반했던 10여 인을 추격해서 체포하여 할복 자결하도록 하고, 또 석전 치부경(石田治部卿)과 평행장(平行長)·안국사(安國寺, 에케이) 등 셋을 잡아다 도시(都市= 교토)를 돌면서 죄를 성토한 후 경동교(京東橋) 앞에서 효수(梟首)하였습니다. 그리고 휘원에게 협박하기를 ‘네 죄는 의당 죽여야 할 죄이나 너의 애첩(愛妾)과 자식 수취(守就: 모리 히데나리)를 볼모로 보내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니, 휘원이 그 말대로 하였습니다. 가강은 그들을 볼모로 잡고서도 또다시 휘원의 식읍(食邑) 8주 중에 6주를 빼앗고 협박하여 중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경승(景勝)은 군대가 매우 강성하여 그 주변의 적추(賊酋) 6∼7인이 그에게 붙었고, 가강의 얼자(孽子) 삼하수(三河守: 유키 히데야스)란 자도 역시 제 아비를 배반하고 경승에게 합세하였는데, 경승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대대적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하므로 이는 가강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또 토좌 시종(土佐侍從: 조소카베 모리치카)이란 자가 남경로(南京路)에 있는데, 가강에게 붙지 아니하고 있으며, 살마 시종 도진(薩摩侍從島津: 시마즈 요시히로)이란 자는 휘원과 같은 무리인데 가강이 지난 10월에 그의 손자 사위인 청정(淸正)으로 장수를 삼아 4만 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도진(島津:시마즈)과 싸우도록 하였으나 네 번 싸워 모두 패하자 군사를 퇴각시키고, 강화(講和)를 요청하였으나 도진이 병선(兵船) 70여 척을 준비해서 중국으로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친다고 합니다. 적의 속셈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도진이 가강과 서로 대치하여 변란을 대처하고 있으면서 필시 가강이 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중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관의 평: 강사준 등의 공초를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뒤를 이어 돌아온 사람들의 공초도 대개 같으니, 모두가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천도(天道)는 악한 짓 하는 자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이치가 역시 거짓이 아니므로, 여기에 갖추어 기록한 것이다.

선조실록 136권, 34년(1601년: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4월 25일(임진) 11번째 기사( 출처)

12. 대중매체

12.1. NHK 대하드라마

NHK 대하드라마에서 센고쿠 시대 말기를 다룰 경우 빼놓을 수 없는 전투다. 하지만 대규모 전투를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고 중요한 부분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151]

2000년에 방영한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만은 예외로 세키가하라 400주년을 기념해 에피소드 하나를 다 써서 정말 웅장한 전투를 보여주었다.[152] 특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에 참여하지 않아 온갖 성질을 내다가 드디어 배반하여 오타니 요시츠구 부대로 돌격하는 장면과 함께 승리를 예감한 이에야스의 웃음소리가 장면의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게 백미.

특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의 전투 장면은 이후 공명의 갈림길, 천지인, 군사 칸베에 등에서 재활용되었다.

12.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센고쿠 시대의 종언과 에도 막부의 개막을 알리는 전투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자주 등장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PK에서 도쿠가와-이시다 전국전으로 등장하며 요구조건을 충족하여 이벤트 합전을 이기면 게임상의 동군/서군인 연합구도에 변화가 생긴다. (대표적인 예로 이시다가로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하면 아내가 죽어 빡친 상태로 동군에 참전한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어느새 서군에 속해있다.) 그러나 딱히 도쿠가와가 약해지는건 아니다. 또한 이시다 가문 전국전은 세키가하라 하나밖에 없다.

12.3. 시바 료타로의 동명의 소설

원제는 '세키가하라関ヶ原'이며 한국에는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전 5권.

소설의 시점은 딱히 고정되어 있지 않으나 대체로 이시다 미츠나리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부분이 많으며 소설 오리지널 캐릭터 역시 미츠나리의 첩일만큼 그에 대한 조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내용 구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까지이며 세간에 알려진 '불의를 싫어하고 타협을 모르는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캐릭터성은 이 소설을 통해 확고해졌다고 보면 된다.

이 소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회한 '너구리'이자 산전수전 다 겪은 무장으로 문자 그대로 최종 보스 포지션. 미츠나리를 주역으로 서술한 탓도 있어 상대적으로 악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무리한 미화로 거의 이에야스를 부처처럼 묘사한 대망을 먼저 읽은 독자가 이 소설의 이에야스를 접하면 다소 충격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에야스를 무작정 깎아내린 것도 아니고 이에야스의 배포나 장점, 강점도 서술하고 있어서 이에야스가 왜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알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이 오히려 이에야스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한 편이라는 평이 지배적.

자료를 최대한 모으고 등장인물들을 관조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편인 시바 료타로의 소설답게 이 소설 최고의 묘미는 히데요시 사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미츠나리에게 붙을지 이에야스에게 붙을지를 고뇌하는 여러 인간 군상들에 대한 묘사이다. 이 소설은 자못 담담한 어조로 동군과 서군의 여러 인사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왜 동군 혹은 서군에 붙었는지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으며, 미츠나리가 주창한 대의명분을 따르는 사람/ 히데요시 사후 최강자이자 대세였던 이에야스를 따르는 사람/ 단지 미츠나리를 제거하기 위해 이에야스에게 붙은 사람/ 어정쩡하게 중립을 지키는 사람/ 가문의 안위에만 급급한 사람/ 이시다와 도쿠가와 모두 물리치고 자기가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가까지 다양한 인간 유형들이 등장한다. 이는 마치 한국사로 치면 계유정난 전후를 다룬 사극과 비슷한 분위기로 계유정난 시기[153]를 다룬 창작물에서 '실세( 수양대군)'와 '명분( 단종)' 사이에서 여러 길을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히데요시 사후 최강 실세인 도쿠가와를 따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히데요시의 유지를 지키자는 대의명분 아래 뭉친 자들,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길을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며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찾아 보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묘미이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에서 이시다나 도쿠가와 모두 물리치고 자기가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가는 상술된 사항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구로다 죠스이로, 세키가하라 전투 후 일단 정리된 일본 내 정국을 서술하는 소설 말미를 장식하는 것도 이에야스가 아니라 그이며 그의 표리부동한 모습도 잘 서술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으나 국내 정식발매본은 2013년 시점에서 거의 절판된 상황에 가격마저 프리미엄이 붙어 상당히 고가로 형성되어 있으니,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보든가 일본어 독해능력자라면 아마존에서 값싸게 문고본으로 사보자.

12.3.1. 영화 세키가하라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파일:sekigaharamovie2017.jpg

기본적으로 원작의 플롯을 충실히 따라가는 구성으로 되어있으나, 플레이타임의 한계상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원작을 읽지 않거나 세키가하라에 대한 사전배경지식이 없으면 따라가기가 힘들다.

12.4. 기타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에선 후반 주인공이 테루모토로 교체된 뒤 최후반부의 전투이다. 여기서는 오다 가문의 잔혹함에 분노한 테루모토가 오다 가문과 싸우다보니 노부나가 사후 오다 잔당을 이끌고 싸우는 이에야스와 세키가하라에서 맞섰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이겼다. 역사상으론 명목상의 총대장일 뿐 별로 도움도 안 됐고 패배한 전투지만 본작의 테루모토가 역사상의 테루모토와는 몇백만 년 떨어진 인간이다보니 제대로 된 총대장이 된 데다가 이에야스를 영혼까지 털어버린다.

GMT Games에서 만든 세키가하라: 일본의 통일이라는 보드 워게임에서도 플레이어의 운용에 따라 터질 수도 있는 전투. 게임의 배경 자체가 본 문서와 동일하다. 일반인들도 쉽게 플레이 가능한 명작으로 뽑히는 보드 게임.

한국에서 만든 시뮬레이션 게임인 임진록 2의 확장팩 조선의 반격에서 주 배경으로 나온다. 임진왜란 이후 역사대로 서군과 동군이 싸우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각각 조선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지원군을 요청한다는 대체역사적 스토리.[스포일러] 그리고 3국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주 스토리다.

그 외에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간략하게 언급만 된다.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에서도 풍신수길 사망 이후 일본은 내전이 일어나고 이 내전에서 덕천가강이 승리해서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간접적인 묘사는 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의 일본 캠페인의 맨 마지막 미션도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다만 주인공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라 사쿠마 키치로라는 가공 인물인 관계로, 정작 전투의 총사령관이었던 도쿠가와가 아니라 키치로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는 느낌.

오다 노부나의 야망에서는 주인공 사가라 요시하루의 눈물나는 노력 덕분에 노부나(노부나가), 요시하루(히데요시)가 생존해 있는 상황이다. 덕분에 해당 시점에서는 천하인의 위치를 차지한 오다 노부나를 지지하는 서군과 반대하는 동군의 전투가 되어 있다. 서군은 오다, 다테, 모가미, 사가라, 오토모, 시마즈가로 구성되었고 동군은 다케다, 우에스기, 호조, 사나다, 모리, 아소, 초소카베, 류조지, 도쿠가와가로 구성. 역사에서 동군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도쿠가와는 본작에서 아직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공주무장으로, 결코 노부나와 사이가 나쁘지 않지만 똑같이 생긴 세라다 지로사부로에 의해 유폐되어 있다. 따라서 이쪽의 도쿠가와는 사실 다른 인물이었다는 전개.

전국 바사라 3 전국 바사라 3 우타게의 핵심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살아남은 그의 부하 미츠나리와 숙적 이에야스가 서로의 수하 장수들을 일본 전국에서 끌어모아 세키가하라에서 최후의 결전을 뜨는 것이 작품의 주요 플롯이다. 극장판 전국 바사라 THE LAST PARTY의 배경이기도 하다.

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혼노지의 변이 중심이던 1편과 다시 노부나가가 주역이 된 5편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에서 모두 큰 비중을 부여받은 전투로 등장하며 특히 역사적 사실에 가능한 충실한 4편과 사나다마루에서는 말을 안 듣는 아군[155]과 반대로 파죽지세로 압박해오는 적군, 그리고 코바야카와군의 배반[156] 등으로 어째서 서군이 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토탈 워: 쇼군2에서 역사적 전투들 중 하나로 등장. 오직 서군 측으로만 플레이 가능하다. 동군이 북쪽, 남쪽으로 나뉘어 공세를 취하는데 전부 막아내면 남쪽의 코바야카와 등이 배신하게 된다. 배신한 이들까지 전부 막아내면 승리. 여기서 꼼수가 있는데 카타나 사무라이 2부대 정도를 코바야카와 군 뒤쪽에 매복시킨 뒤 나머지 부대를 재빨리 본대로 이동시키는 것. 어차피 초반에는 코바야카와도 동맹이라 공격하진 않기 때문에 빨리 이동 시키면 부대 온존이 가능하다. 그리고 코바야카와가 배신하는 순간 바로 매복시킨 카타나 사무라이로 장군 호위대를 급습한다면 코바야카와 군대는 그대로 발이 묶여 도쿠가와 군에 재때 합류하지 못하니 이를 통해 각개격파 시키는 게 가능하다.[157] 또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등장하는데 직접적으로 배신은 하진 않지만 저 자식들이 방관하기로 작정했다는 코멘트와 함께 진군하지 않고 방관만 한다. 그렇기에 바로 병력을 시마즈 측으로 이동 시켜서 얘들도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 그나마 난이도를 낮출 수 있다.[158] 또 모리 측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드라마 전국자위대·세키가하라 전투는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키가하라 전투가 배경이다.

경계선상의 호라이즌의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2017년 8월 위에 언급된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제목은 세키가하라. 영화의 주인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그의 부하 여닌자이며, 이시다 미츠나리가 왜 세키가하라에서 질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며, 동시에 여닌자와의 로맨스를 주 내용으로 삼는다. 만화적인 사극 영화 개봉이 주를 이루던 일본 영화계 추세와 다르게 정통파 사극이다. 군사 칸베에에서 구로다 간베에를 맡았던 오카다 준이치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맡았으며, 아리무라 카스미가 닌자, 야쿠쇼 코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연기한다. 이외에도 히라 타케히로가 시마 사콘을, 히가시데 마사히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마츠야마 켄이치 나오에 카네츠구를 연기하며,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연기했던 마로 아카지가 이번에도 동일 배역으로 출연한다.

리듬 게임 팝픈뮤직에는 이를 본떠 西軍∥∴⊂SEKIGAHARA⊃∴∥東軍이 수록되어 있다.

드리프터즈 1화의 앞부분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벌어진 시마즈의 퇴각이다. 시마즈 토요히사가 역사대로 미끼역할을 해 이이 나오마사에게 조총을 쏴 낙마시킨다. 여기서 중상을 입은 시마즈 토요히사는 이세계로 전이된다.

Fate/Grand Order 2022년 구다구다 이벤트에서 서군 두목의 손에 암흑 세키가하라 대전으로 재현되었다. 코바야카와랑 와키자카 등등이 통수를 치는 장면과 모리가 출진해야 할 길목을 막은 킷카와의 도시락 네타가 회상에 그대로 나오며, 코바야카와처럼 평소땐 디스하면서 억지로 묶어두었던 아군이 상대편에 붙어서 이시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전개까지 그대로 나와 이시다에게 또 빅엿을 먹였다.

바키 시리즈 미야모토 무사시 회상으로 짧게 등장.

무사시 건도에서는 서군이 이겼다는 전제 하에서 도요토미 바쿠후가 성립되는 대체역사로 전개된다.

황천의 츠가이에서도 약 400년 전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지고 있다. 작품 특성상 츠가이라 불리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개입한 전쟁으로 추측되고 있는 중.

요괴워치 시리즈에서도 위스퍼의 과거 편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등장하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잠깐 언급된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병사에게서 듣고 곤란에 처해있는 장면이 묘사된다.


[1] 전투가 하루만에 끝나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지 못했다. [2] 자신의 아내인 가라샤가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유폐된 뒤 자살하자 이에 분개하여 동군에 가담했다. [3] 도쿠가와 히데타다랑 마찬가지로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지 못했다 [4]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규슈에서 서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공격했다. 임진왜란 시 선봉장에 섰으며, 라이벌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장 먼저 한성에 입성하였으나 자신이 먼저 입성한 것 처럼 공문서를 위조했다. 이를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발각되어 탄핵당하자, 이를 계기로 이시다 미츠나리에 앙심을 품게 되어 동군에 가담했다. [5]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과 데와에서 싸웠다. [6]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우에스기 카게카츠 모가미 요시아키의 싸움을 관망하였다. [7] 명목상 총 지휘관. [8]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다가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병으로 이에야스가 철수하자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 등과 데와에서 싸웠다. [9] 실제로 세키가하라에서 싸운 것은 아니고 세키가하라로 향하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수만 대군을 소수의 병력으로 발을 묶었다. [10] 정유재란 울산성 전투에서 경솔하게 행동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질책당하고 영지를 몰수(전봉)당했다. [11] 후반부에 서군의 병력들이 배신하여 합류하면서 증강되었다. [12] 무려 20% 정도가 배신을 한 것이다. [13] 관련 사료에서 서군의 절반 정도가 궤멸되었다는 말이 있기에, 이 정도 사상자가 나온 게 타당하다. [14] 도카이도 본선 세키가하라역 일대 [15] 사실 전체 병력은 20만인데 3만명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비전투병력이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16] 모가미 요시아키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이의 게이쵸 데와 합전, 하세도 퇴각전 [17] 다이쇼지 성의 야마구치 무네나가와 마에다 토시나가의 충돌 등 [18] 쿠로다 칸베에의 거병, 오토모 요시무네의 구령 침공 등 [19] 다만 도쿠가와가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간토, 서군의 모리와 우키타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주고쿠는 예외. [20]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다이묘가 원정에 참전하긴 했다. 히데요시 계열의 다이묘가 주력이라 묻혔지만. [21] 그런데 고니시와 가토의 대립이 잘 알려져서 그렇지, 임진왜란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왜군 다이묘들의 관계들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도도 다카토라 구키 요시타카,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등 모두가 서로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이가 앙숙이거나 좋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도요토미군 장수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자가 바로 이시다 미츠나리이다. 이 자는 주로 군감으로서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의 공을 깎는 일을 했기 때문. 원래 미츠나리는 도요토미 밑에서도 석고를 정확하기 파악하는 일을 해서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았으나 대신 이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벌을 받은 많은 다이묘들의 증오를 사기도 했다. 정작 이시다 본인의 석고도 20만 석이 안 되는 등 별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22] 애당초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힘으로 누르지 못했다. 기요스 회의 이후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카츠와 손을 잡고 히데요시와 붙은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정작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와 멋대로 강화를 하는 바람에 이에야스는 명분이 없어진 데다가 히데요시가 자기 여동생과 어머니를 인질로 내민 탓에 거절할 수도 없게 된 상황이라 할 수 없이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것이다. 이후 히데요시는 후 호조 가문을 몰락시킨 뒤 간토 6주 평야로 전봉시키면서 겉은 영전이지만 내부로는 잇키를 핑계로 이에야스를 죽이려 하는 조치로 이에야스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훌륭한 내치로 간토6주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식량과 인구수에 힘입어 사실상 2인자가 되었다. [23] 거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 관계였기 때문에 그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격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도 이에야스였고, 이에야스 또한 호락호락하게 히데요시에게 고개를 숙이려 들지 않았다. [24] 이 중 유키 히데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형이다. 즉, 도쿠가와에서 보낸 인질이기도 한 셈. 성이 유키인 건 나중에 유키 가에 양자로 다시 보내졌기 때문이다. [25]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가 코다이인이었더라면 요도도노로 인해 문제가 생길리 없었으나,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가 코다이인이 아니라 요도도노였던 것이며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시점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점이었다. [26] 사실 코다이인파와 요도도노파가 갈라져서 싸웠다는 것이 기존의 학설이었으나 현재는 코다이인이나 요도도노나 이 전투에서는 어느쪽 편도 들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애시당초 코다이인은 자식도 없었으니 굳이 요도도노와 싸울 일도 없었고, 또한 요도도노의 외삼촌 오다 노부나가는 코다이인에게도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요도도노와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명분도 도요토미 가문을 위한 것이라고 내세웠으므로 두 사람이 나설 명분도 사실 없었다. [27] 사실 이런 식의 대립은 봉건제적 특성 하에서는 많이 볼 수 있다. 각각의 이들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보니 사이 나쁘면 협력을 안 하는 것으로 전투를 말아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나마 전쟁 초기에는 조선군을 간단히 밀어버렸지만 이 승세도 어디까지나 조선의 준비가 매우 부족한 초기 한정이다. [28] 다만 이 문제는 조·명 연합군의 연막작전이 먹히면서 공격 대상이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이 늦었고, 결정적으로 당시 고니시 군은 거리가 먼 순천에 있었기에 어차피 지원을 해주고 싶어도 지원을 해주기가 힘든 상황이므로 결과는 무엇을 선택하든 비슷했다. [29] 그런데 당대에는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씨가 아니라 요도도노가 바람을 피워 낳은 사생아라는 게 정설이었고 현대적 시점에서 봤을 때도 합리적인 의심이 가는 게 늦둥이 아들인 히데요리가 막상 장성하니 190㎝가 넘는 거구가 되었는데 막상 아버지인 히데요시는 키작기로 유명한 당대 일본인 치고도 키가 매우 작은 편이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나이 56살 때 득남했는데 그 전 히데요시는 첩만 15명 거느렸는데도 아들은커녕 딸도 없었으니 무정자증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던 상황에서 갑자기 아들이 태어났으니...이쯤 되면 음모론 취급하기도 힘들다. [30] 히데츠구의 정실은 이케다 테루마사의 여동생인데 어쨌든 살아남긴 했다. 또한 오고노 츠보네의 딸인 오키쿠도 갓난아이라는 이유로 외갓집에 맡겨져 살아남았기도 했다. [31] 애시당초 이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에서 간사이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감시·견제하는 한편 도쿠가와가 간토로 전봉되기 전의 원 영지였던 미카와·츠루가·도토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히데츠구 이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이들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원 이에야스에게 붙었다. [32] 히데츠구 숙청에는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칼날은 히데츠구만을 향했어야 했다. 히데츠구의 처첩까지 처형해서 그 처첩들의 가문, 즉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굳이 광역 어그로까지 끈 것은 자기 지지기반을 깎아먹는 어마어마한 실책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아들인 마츠다이라 노부야스, 아내인 츠키야마도노를 죽이는 등 친족을 숙청하기는 했으나 철저하게 범위를 한정지었을 뿐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으므로(혹은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이라고 뒤집어씌울 수 있었으므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다 노부나가는 츠키야마도노의 숙부인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죽였다.) 이에야스 자신의 입지에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33] 사실 이에야스의 이런 짓은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술수임에도 미츠나리가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부터가 이미 문치파와 무단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말이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틈새로 어부지리를 잔뜩 챙겼고. [34] 미츠나리는 유능한 재능을 보여서 자신이 맘에 든 사람에게는 매우 살갑게 대했지만 무능하거나 유능해도 자신의 맘에 들지 않거나 적이였으면 매몰차게 대하였고 좋고 싫은 티를 확확 냈다. 미츠나리가 최소한 무단파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다면 도쿠가와를 밀어내고 정권을 잡았을 수도 있었다. [35] 그렇지만 사실 이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역시 오다 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저 자리를 차지했었다. 오다 가는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와 그 장남이 사망해서 히데요시의 야망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차남 삼남이 다투는 사이 기요스 회의를 통해 장남의 아들 산보시를 옹립한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았다. 즉, 저건 적어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그저 명분일 뿐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36] 다만 이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옹립한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냥 명분이 필요해서 그런 거지 정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존경했거나 그가 중심으로 나서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그래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도쿠가와가 나서기 전에 칠본창들은 자신들이 먼저 선봉에 서서 돌격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야스 혹은 그 수하들에게 선봉을 뺏기면 그만큼 공훈이 줄어들 테니) 실제로는 그냥 이시다 미츠나리가 꼴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 사실 미츠나리는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중앙집권화를 주도한 인물이며 그가 권력을 잡으면 다이묘들은 그들이 숨기고 있던 고쿠다카를 까게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잖아도 임진왜란으로 인해 가난해졌던 다이묘들은 자기들이 기껏 힘써서 개간한 토지를 찾아내어 세금을 물린 미츠나리를 굉장히 미워했다. [37] 이에야스의 삼남이자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이 요도도노의 동생 스겐인이고 그 딸인 센히메는 히데요리의 약혼녀였다. [38] 물론 이 시점에서 요도도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지는 의심스럽지만. 애시당초 무슨 정치적 식견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쟁에 나갈 수 있지도 못한 이상 요도도노가 할 수 있는 일 따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39]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성을 얼마나 잘 만들어 놓았는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계속 천황 황거로 사용하고 있다. [40] 사실 이에야스를 비롯해 마에다, 우에스기 등 동부 지방의 대다이묘들은 보급문제로 인해 대타로 잠깐 파병하거나 아예 파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나마 적극적으로 참전한 다테 마사무네 역시 소규모의 과시용 부대만 데리고 참전했을 뿐이다. 이 외에 소다이묘 중 피해를 입지 않은 가문은 사나다 가문이었는데 사나다 가문 역시 교토를 중심으로 보면 동부 다이묘였으며, 일단 군령에 의해 집결지에는 모였으나 현 나가노현 산골짜기에 있다보니 군대 규모도 적고 멀었기에 후순위로 밀려서 조선 침공에 참가하지 못한 케이스였다. 그 밖에도 야마우치 가문 등이 참전하지 않았다. [41] 물론 토요토미 가신들끼리의 전쟁이라는 성격이 있었긴 했지만 히데요시 사후의 이에야스는 이미 일본 제일의 세력가였다. 토요토미 본가의 영지 220만 석에 비해도 이에야스 자신이 이미 칸토 평야의 250만 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원래의 본거지인 미카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토미 정권이 유지되더라도 이에야스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리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에야스는 적이 많았던 미츠나리와 달리 전반적으로 원로로써 원만한 평판을 받고 있었다. 애시당초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부터가 원래 히데요시가 섬기던 오다 가문의 권력과 영토, 군사력이 반란으로 가주 후계자가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져 최고권력자 자리가 공백이 된 상황에서 주군의 복수를 명분삼아 반란 주동자는 물론이요 경쟁자들 주군의 아들까지 가문 내 세력경쟁에서 차례차례 제거하며 가로챈 것이었으며, 그 오다 가문도 본래는 오와리의 슈고다이 가문의 분가에 불과한 위치였는데도 하극상을 일으켜 본가와 주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던 전례가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어린 히데요리보다는 히데타다라는 장성한 후계자가 있고 본인도 능력과 인망 면에서 누구보다 나은 이에야스가 패권을 차지할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42] 다만, 그 이전의 일본 역사를 살펴보아도 새로운 쇼군가의 후계자가 어린 경우 권신이 쇼군가를 몇대에 걸쳐 좌지우지하는 등의 사례가 이미 있었기에, 당시 관점에선 반드시 이에야스의 집권이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43] 나오에장은 진짜로 도쿠가와를 통렬히 조롱하며 미츠나리랑 계획하에 보냈다는 설과, 도쿠가와가 그냥 우에스기를 손보기 위한 명분으로 삼기 위해 있다고 주장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 [44] 시기상 히데이에의 출정식이 먼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히데이에가 미츠나리와의 협의 없이 출정식을 한 것이고 미츠나리가 그 뒤를 따른 것이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45] 기독교 신자라 직접 자살하진 못해서 가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게 하고 주거지를 불태웠다. [46] 이에 대해 처음부터 히데타다의 임무는 서군에 붙은 사나다 가의 공략과 견제, 그리고 나카센도의 제압(퇴보로의 확보)이었으며, 세키가하라에 합류하는 것은 추후 내려진 명령이라는 이설도 있기는 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에야스는 3만 5천 명 이상의 군사를 고스란히 보존했다. 이런 점에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도요토미 가신들의 군대로 치르고 자신의 주력군을 보존하려고 했던 이에야스의 교활한 계획이었다는 설도 있다. 소설 대망(원제: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한 이 관점을 따르고 있지만, 이 소설은 이에야스 미화가 심한 편이다. 그렇긴 해도 그 강력했던 오다 가가 오다 노부나가와 장남이자 후계자인 오다 노부타다 혼노지의 변에서 한꺼번에 살해당하면서 기반이 홀라당 날아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에야스가 신중하게 자기 후계자를 보호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긴 하다. [47] 최신 축성 기술로 만들어져 철포 공격에 대비한 천수각과 해자를 두룬 농성전에 유리한 성 [48] 카게카츠가 아이즈에서 동군을 붙잡고 있고 만약 이쪽 동군이 무너지면 이에야스의 본진인 에도가 노출된다. 시간이 지나 히데타다 본군이 도착할 게 두렵긴 하지만 서군도 모리 본군 외 도착하지 않은 잔여 병력이 상당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유리한 전투 구도를 만들 수 있다 한들 수성하는 입장에서 성 밖으로 나와 일합 승부를 노리는 편이 훨씬 더 이상하다. [49] 세키가하라에 합류한 모리 군은 양자인 히데모토와 일군을 보냈을 뿐 총대장 데루모토 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50] 실제로 미츠나리는 적어도 8개월 정도 지나야 전쟁의 승패가 날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2년은 물론, 심지어 10년 이상은 걸릴 거라고 예상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구로다 요시타카, 다테 마사무네처럼 어부지리 전략으로 자신이 천하를 차지할 계획을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에야스만큼은 이미 서군 다이묘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던 점, 히데타다와 별도로 움직였던 점, 빠르게 세키가하라로 진군했던 점을 미루어볼때 세키가하라를 최후의 결전의 무대로 예비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51] 즉, 결론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회군이 예상보다 빨랐던 탓에 서군이 허겁지겁 와서 막으려 했던 곳이 세키가하라였다고 할 수 있을 듯. [52] 동군에서 고쿠다카 2위인 다테 마사무네는 58만석이었다. 즉 거의 2백만석 가까이 차이가 난다. [53] 다만 위에서도 나오듯이 사나다를 견제하고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일부러 히데타다가 천천히 오도록 했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도요토미 가의 내전인데 도쿠가와 군이 스스로의 전력을 깎아먹을 이유도 없고 히데타다가 이에야스에게 욕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처분을 받은 것도 없고 나중에 쇼군직에도 오른 것을 보면 사실상 쇼일 가능성도 높다. 히데타다도 이에야스의 뒤를 이어 에도 막부를 반석에 올린 인물이고 생각보다 전투 경험도 적지 않은 편임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은 있는 셈이다. 거기다 오다 노부나가가 하필 장남과 함께 죽는 바람에 히데요시에게 모든 걸 빼앗겼다는 점과 이에야스가 신중한 성격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만일을 대비한 거라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그 상대가 표리비흥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나다 마사유키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라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54] 그러나 본인이 영지를 개발하여 자력으로 백만석을 만들어버리는 엄청난 근성을 보여주었다. [55] 본인은 이에 빈정이 상했는지 나중에 아들에게 도쿠가와 안 베어버리고 뭐 했냐는 식으로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56] 다만 엄밀히 말하면 아들 탓은 아니고 그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보가 워낙 신속했기 때문이었다. 쿠로다 요시타카의 예상으로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좀 더 오래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하루 남짓 만에 끝나 버렸기 때문. 그리고 아무리 아들이 일조를 했다고 하지만 당연히 아들이 그 원인의 전부인 건 아니었다. 거기다 아들과 상의한 것도 아니었으니 누굴 원망하기도 뭣하다. 관점을 바꾸면 오히려 아들이 이렇게 공을 세워서 가문을 보전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57] 다만 이후 여전히 도요토미가에 대해 충성을 보였기에 결국 나중에 가면 개역을 당하게 된다. [58] 다만 주군을 배신한 건 아니다. 그냥 더 큰 영주를 섬기기 위해 이전 주인과 결별한 것. 그래도 휘하에 있을 때는 열심히 일해서 감사장이나 추천장을 받고 나오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처세술이 좋은 편이었다. [59] 상술되었다시피 이들은 이에야스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가에 충성했는데, 문제는 이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는 사실상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은 물론 일본 전체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그 결과 도요토미 가문이 압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세를 인정한 이들이야 이 전투가 있었다고 해서 손해볼 일은 없었지만(대표적으로 다테 마사무네나 쿠로다 칸베에 등이 있다. 특히 마사무네는 이후로도 계속 도쿠가와 가문의 편에 서서 쇼군을 보좌하는 엄청난 권력자가 되었고 쿠로다 가문도 원래 도요토미 가를 섬기던 쪽임에도 도쿠가와 가의 패권을 인정함으로써 자기 가문을 보전할 수 있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카토 기요마사 같은 경우는 말 그대로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동군에 투신한 몸이다 보니 나중에 가면 이에야스에게 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몰락했다. [60] 요도도노에게는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성이 함락당하여 친아버지, 양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잃은 경험 때문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빙성은 있다. [61] 그래도 이렇게 처신한 덕택에 목이 날아가거나 유배되지 않을 수 있었다. 비슷하게 대군을 보낸 우키타 히데이에는 똑같이 군재에 무능했음에도 영지를 빼앗기고 남쪽 섬으로 유배보내졌다. [62] 히로이에를 치면 되기야 했겠지만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 싸우는 게 되어 진영의 분열을 불러올 수 있으며 그렇게 싸워 이겨도 병력 손실이 크고 작전을 제대로 시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63] "절대 하지마" 라는 말보다 "이거 보단 그게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고압적이지 않고 상대방에게 더 좋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게 말을 하는 것이다. [64] 다른 주장으로는 반대가 아니더라도 동원할 병력 자체가 없었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특히 노량해전 당시 사츠마 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를 미처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5] 미츠나리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로 상대방의 처지나 상황을 보고 너무 그에 맞게 대접을 한다는 것이다. 병사 한 명, 다이묘 한 세력도 아까운 이런 상황에도. [66]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민낯을 안다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말 그대로 천재라 불림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그 황무지로 악명 높은 간토 대평야에 기가 막히게 도시 개발을 해 놓았으며 그가 재건한 에도 성 메이지 유신 때 도리어 천황궁이 될 정도로 리모델링을 아주 잘 해 놓았다. 게다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항복 시키는 과정이 진짜 가관인데 어머니인 오만도코로를 인질로 내 주고 여동생인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냈다. 임진왜란때도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함부로 못 건드렸을 정도이다. 그러니 이에야스는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불리해 보여도 뭔가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이에야스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배신시켜 전세를 역전시켰다. [67] 임진왜란 초기에 전쟁 준비가 안 된 조선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전쟁 중후반기에도 물량에서 압도당한 4차 평양성 전투 외에는 자기 실책으로 패배한 일이 거의 없다. [68] 이 때 고니시가 어찌나 절망적이었는지 군량이 다 떨어져서 자기가 그 동안 타고 다니던 군마를 도축해 겨우 끼니를 때웠을 정도였다.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이게 극단적으로 처절하게 묘사되는데 진린에게 사신을 보내 보석을 듬뿍 주고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그걸 이순신에 의해서 막히자 포로로 잡아뒀던 명나라 병졸 2명의 손목을 잘라서 진린에게 보내면서 "살려주지 않으면 포로들을 다 죽이겠다"는 인질극까지 했다. 결국 노량 해전 다음날 새벽에 해가 뜰까말까한 시점에 살아서 도망은 갔지만 일부 왜병들이 부상이 너무 심해서 걸어가질 못하고 기어가다가 그대로 엎어지는 묘사가 있다. 그리고 그 왜병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69] 사실 그의 영지인 쓰시마 섬은 고쿠다카에 직접 들어가는 영지가 없지만,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나오는 수익을 환산해서 저만큼 나온다고 치고 대우를 해준 것이다. [70] 대마도(쓰시마)는 조선에 가까운 섬으로, 쓰시마 다이묘는 대대로 조선과 일본 양측에 조공을 바쳤다. 장사도 양쪽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이묘들은 어릴때부터 조선어 교육을 받았고, 소 요시토시 역시 조선어를 할 줄 알았다. 임진왜란 전에 조공을 바치러 조선에 가서, 조선의 임금 선조와 직접 식사를 하고 대화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71] 애시당초 소 요시토시가 지배하는 쓰시마는 조선과의 조공관계(특히 쌀. 대마도는 섬이라 쌀이 항상 모자란 곳이다.)로 먹고 살던 곳이다. 그런데 그 조선과 척을 졌으니 망하는 게 당연하다. 이런 쓰시마의 한반도 의존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한국인 관광객들이 관광용으로 쓰는 돈이 오늘날 쓰시마 사람들의 주 수입원일 정도다. [72] 조선은 일본과 생각보다 쉽게 화해했는데 그게 조선이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조선 내부에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하나라도 줄이려고 일본과의 관계를 대충 화해한 것이다. 일본에서 에도 막부가 세워질 당시 조선은 광해군이 즉위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장군인 이괄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임진왜란 못지 않은 변란이 터져 여기저기 수습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73] 한편 일본에서도 조선과 화해한 데에는 정치적인 사유도 있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으로 임진왜란의 실패를 들었고, 그러기 위해 이에야스 본인은 악랄한 히데요시와 다르다는 것을 어필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당장 자기 영지인 쓰시마가 쑥대밭이 되고 먹고 사는게 급한 소 요시토시도 있었다. 결론은 어쩌다보니 이에야스-요시토시-조선 세 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면이 있다. [74] 세간에서는 이들이 그날 밤 어떠한 대화를 하였고 왜 서로 갈라졌는가에 대한 문건이 없어서 다 유추한 내용뿐이다. 만약 이들이 동군/서군 어디로 붙을지에 대한 것으로 갈라졌다면 전후 노부유키가 아버지 마사유키와 노부시게 구명을 할 이유가 없었는데 노부유키가 이 둘에 대한 구명청원을 한 것을 보고 이 삼부자가 동군/서군 서로 편을 든 뒤 이긴쪽이 진쪽을 구명하여 목숨을 건지는데 도와주기로 약조했을 것 이라는 추측이 정황이 어느정도 일리가 있어서 이게 정설이 되었고 사나다 가문이 활동한 지역의 사적지에서도 이들의 그림이 걸려있다. [75] 그럴수 밖에 없는데 타다카츠는 이에야스 가문의 산하 무장중 먼 친척 관계인 마사노부랑 비슷한 상위 서열이었고 일본의 장비라고 불릴정도의 맹장이었다. [76] 한국 사극인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묘사되었다. [77] 게다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우에스기와 사나다가 합세해 이에야스의 본진털이를 감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을 지도 모르고, 후방에 모리 가문의 증원군이 왔을 가능성은 물론 배신할 만한 자들도 미리 가려내서 조치할 수 있었겠지만, 조기결전을 벌이는 바람에 모두 말아먹어 버렸다. [78] 그는 이때를 계기로 역사에서 퇴장하였는데, 전사설과 생존설이 분분하다. [79] 시마즈 요시히로는 위에서 말했듯 어쩔 수 없이 서군에 붙어있었고 미츠나리에게 사사건건 무시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 [80] 애초에 테루모토는 전투기간 내내 오사카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81] 히데모토의 도시락 드립은 훗날 재상님의 빈 도시락(宰相様の空弁当)이라는 고사로 전해지며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뜻하는 속어가 된다. [82]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당시의 조총 사격력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세키가하라가 짙은 안개와 총성과 총의 연기으로 가득 차있었기에 후세의 창작이라는 것이 정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던 전투의 기록에 있고 수천 명이 한꺼번에 쏘아대는 총소리는 충분히 위협적이고 히데아키 쪽은 전투와는 동떨어진 상황이었기에 좀 더 눈에 띌 수 있으니 가능하다고 보는 반론이 있지만, 당장 철포 사격을 했다는 기록 자체가 후대의 창작에 등장하는 것이며 1차 사료상의 기술은 없다. [83]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츠키 모토츠나 등 약 4천 병력. [84] 현대 군대에선 30% 이상이 사상(사망+부상)을 당했다면 전멸로 취급하는데, 50% 가까이 전사했다는 건 최소 70% 정도는 사상한 것이기에 궤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무리 중세 군대가 주력이 많다지만, 저 정도 전사자가 난다면 최소 궤멸 확정이다. [85] 하지만 나가마사의 판단을 욕하기도 뭣한 게 어차피 세키가하라 전투는 시작부터 동군이 이기고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고 나가마사가 한 것도 전투를 빨리 끝낸 공이 있긴 하지만 대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긴 어렵다. 애초에 죠스이의 계략부터 어디까지나 동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서군과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데 이에야스는 고작 두 달 만에 서군을 완전히 박살 내 재기불능으로 만들었으니 전제 자체가 박살 난 계략이 되어버린 셈이다. 괜시리 아버지한테 까인 나가마사만 뻘쭘한 상황. [86] 아직 모리 가문의 병력은 아무런 피해가 없이 오사카성에 주둔하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까지 데리고 있었던 만큼 아직 싸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87] 이미 단독으로 전투를 벌이기에는 상황이 너무 불리했다. 애시당초 싸울 놈들은 이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당했거나 배신했거나 셋 중 하나였고. 만약 맞붙으면 이에야스의 성격 상 배신한 군대를 내보낼 것이 뻔한데 이러면 이에야스 본인에게는 흠집조차 못 내고 자신만 피해를 입게 된다. [88] 이걸 반영한 일본의 속담으로 "낙오 무사는 참억새 꽃에도 겁을 먹는다(落ち武者は薄の穂にも怖ずという)"라는 말이 있다. 한국으로 치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다와 비슷한 뜻이다. [89] 사실 주변 사람들이 내전을 구경하는 일은 일본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고,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이괄의 난 진행 중 안령 전투가 벌어질 때 한양의 백성들이 단체로 이괄과 정충신의 전투를 구경하러 갔다. 네이버 웹툰 칼부림을 보면 당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또한 로마 제국도 내전이 벌어지면 시민들이 구경하고, 심지어 패잔병이 어디있는지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90] 정작 그러면서도 휘하 병력은 칠본창보다 훨씬 많았다. 한마디로 자기가 약해서 칠본창을 내세운 게 아니라 칠본창에게도 충성심 검사를 한 것이다. 만에 하나, 칠본창이 서군으로 붙을 경우를 대비해 이들을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병력을 거느렸으면서도 정작 직접적인 전투는 나오지 않은 것이다. [91] 그렇다고 마냥 놀기만 한 건 아니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쪽으로 계속 닌자(서군 아시가루로 변장시킨)들을 보내서 첩보전을 감행했다. 한마디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계속 배신을 부추긴 것이다. [92] 히데타다가 늦게 오자 이에야스가 노발대발했다는 말도 있지만 당시 정황을 살펴 봤을 때 일부러 천천히 오게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무엇보다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만큼 전투에 굳이 참가시키기보다는 도쿠가와 군 주력을 이끌고 천천히 오는 편이 더 안전했다. 동맹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장남 노부타다와 함께 혼노지에서 배신을 당해 죽었고 이로 인해 잘나가던 오다 가문이 사실상 패망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에야스가 이런 식으로 대비를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어차피 이에야스 본인이 이미 세키가하라에 와 있었으니 남들이 뭐라 할 일도 아니고 주력군이 오지 않더라도 충분히 유리한 상황이었던 데다가 병사 수는 적었지만 별 차이는 없었고 대신 서군에 꼬드김에 넘어가 배신할 놈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칠본창 등은 오히려 선봉에 서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93] 구로다 요시타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뒤통수를 치려다 실패한 이유가 바로 자기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가 너무 열성적으로 이에야스의 명령을 따라 대활약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요시타카 입장에서는 아들이 웬수였겠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자기 아들조차 이에야스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 그만큼 구로다 요시타카의 계략은 성공할 확률이 낮았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쿠로다 요시타카의 계획은 이에야스가 서군과의 전투로 인해 공세종말점에 다다른다는 것이 전제조건인데 정작 이에야스는 그 서군을 속전속결로 물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군의 지휘 담당이 하필이면 내정에서는 천재일지 몰라도 전투에서는 졸장으로 악명 높은 이시다 미츠나리인 게 문제였으며 실제로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공세종말점까지 버텨줄 능력이 전무했다. 또 전투 후 이에야스와 악수했다고 자랑하는 자기 아들한테 왜 이에야스를 찌르지 않았냐고 말했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웃기는 소리인게 만약 거기서 나가마사가 이에야스를 찔렀으면 나가마사는 거기서 그냥 죽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구로다 가문 자체가 구족을 멸족 당했다. 이럴 거 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자리에 항상 혼다 타다카츠를 데리고 다녔는데 혼다의 싸움실력은 이 시점에서 일본 전체 최강자였다. 그 뿐 아니라 이에야스 본인 역시 늙긴 했어도 검술 실력은 그 가토 기요마사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싸움을 잘했기 때문에 혼다가 방심한 틈에 칼을 뽑아도 죽일 수 있다는 보증이 없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미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마사가 알아서 이에야스를 찌르는 정도의 우연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성공하기 어려운 계획이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거기다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수만 명의 도쿠가와군을 대체 어떻게 감당할 생각일지도 의문이다. 거기다 이미 이에야스는 자기 아들 히데타다를 빼돌려놨을 정도로 철저했다. 이게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결론은 쿠로다 요시타카의 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낮았다는 것이다. 사실 요시타카의 발언도 진심어린 책망이라기보단 자기 속도 모르고 너무 열심히 일해버린 아들에 대한 푸념에 불과했을 것이다. [94] 이미 미츠나리는 도요토미 가문 수호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에야스 역시 같은 명분을 내건 데다가 앞서 말한 일과 미츠나리 개인의 인망이 부족한 탓에 호응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95] 심지어 도쿠가와 가문은 석고마저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령보다 많았다. [96] 이에야스는 참패를 겪어본 적도 있지만 또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한 백전노장이었기에 동군 내에서 그의 군재에 대한 불신은 없었다. [97] 시마즈 요시히로는 서군에 참전한 것 자체가 온전한 본의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가담 직후에는 그나마 서군을 맹렬히 지지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서군 중에서도 서군을 지지하던 인물은 이시다 미츠나리 및 그와 친분이 있던 몇몇(안코쿠지 에케이, 오타니 요시츠구 등) 외에는 거의 없었다. [98] 그리고 이들은 애시당초 거느린 병사 수도 별로 많지 않았고 그나마 고니시가 좀 많은 편이었다. [99] 나중에 모리가 엄청나게 감봉을 당한 뒤 억울해했던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100] 와키자카는 시즈카타케의 칠본창 중 하나였고, 다른 칠본창들과 마찬가지로 미츠나리와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101]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 부분을 잘 묘사하여, 아예 대놓고 도쿠가와가 와키자카를 자신의 사람으로 품으려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 [102] 사실 구로다 요시타카나 다테 마사무네가 일을 벌이고 싶어도 이에야스가 그럴 틈조차도 주지 않았다. 애시당초 세키가하라 전투 자체가 순식간에 끝나기도 했고. [103] 오죽하면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선봉인 자길 제쳐두고 이이 나오마사가 진군했다고 하자 노발대발했다. 이걸 소설 같은 데서는 이에야스에게 의심받았다고 분노한 걸로 묘사하지만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의 시종 가신도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보기보단 이에야스의 재촉이 매우 불쾌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뜩이나 이에야스가 끼어드는 것이 싫었을 테니. 물론 이에야스는 이런 식으로 마사노리를 자극해 개전을 촉구하면서 동시에 선봉으로서의 공훈은 낼름 가로채갔다. [104] 미카와는 도쿠가와(마츠다이라) 가문의 전통적인 본거지라 당연히 이에야스에 대한 지지도 확고했다. [105]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천하를 놓고 겨룰 때도 이에야스는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에 오다 사후 지배력이 붕괴된 구 다케다령인 가이, 시나노를 복속시키며 150만 석이라는 대영주로 성장했다. 이는 당대에도 히데요시 세력과 호조씨 다음가는 규모로 모리와 우에스기보다도 큰, 전국 3위의 대영주였다. 더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항복하고 나서 그 힘을 꺾기 위해 에도로 전봉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문제는 이에야스가 힘이 빠지길 기대했던 히데요시의 기대와 달리 그 땅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 히데요시의 의도는 자신을 적대한 이에야스를 긴키 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간토로 전봉시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 옛 지배자인 호조씨를 그리워하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그것을 빌미로 이에야스를 숙청하거나 감봉시킬 생각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황무지였던 에도를 새 중심지로 삼고 그곳을 일국의 수도로 삼아도 될 만큼 성장시키고, 농민들과 구 호조씨의 가신들도 잘 다독이면서 졸지에 정적의 세력을 두배 가까이 늘려준 셈이 되었다. [106] 원래 도쿠가와 가로부터 미카와, 스루가, 도토우미 일대를 넘겨받았던 영주들은 대부분 히데츠구의 측근이거나 관계자들이었는데 히데츠구가 처형당하면서 이들은 대부분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애시당초 이들은 이에야스가 간토에서 어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그 땅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손해는 두 배라고 할 수 있다. [107] 물론 이건 이에야스가 처신을 잘 한것도 있었고, 히데요시조차도 이에야스를 아무런 명분없이 쳐낼 수 없을 정도로 이에야스의 세력이 무시못하게 큰 것도 있었다. [108] 사실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의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필 오다 노부나가의 바보 아들이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명분을 잃고 항복한 것. 그나마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몇 번이나 채근했는데도 참내 한 번 오지 않다가 나중에 가서 히데요시가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을 인질로 보내니까 그때서야 왔을 정도다. 그래도 간토 전봉 정도로 이에야스를 묶어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히데츠구 사건과 임진왜란의 여파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컸다. [109] 마에다 토시이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능가할 실력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명분을 무기삼아 그나마 이에야스의 야심을 어느 정도 누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토시이에는 친 도요토미 가문을 결집시킬 발언력도 있었다. [110] 특히 모가미 요시아키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인 코마히메 도요토미 히데츠구 첩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좌되어 처형당한 것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구명된 것을 떠나서 원래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원한이 컸다. 때문에 이후에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111] 각종 매체에서도 미츠나리는 이 일대의 영주들이 이에야스의 발목을 나름 잡아 시간을 끌 것이라 판단했으나 이들이 이에야스측에 붙어 길을 제공해줌으로써 빠르게 도착한 현실에 기겁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112] 다테는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었고, 모가미는 코마히메 건으로 도요토미 가에 대한 깊은 원한이 있어서 쉽게 도쿠가와 쪽으로 넘어왔다. [113] 다만 이건 결국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어차피 배신할 놈은 어디에 두건 배신하게 되어 있다. 단지 싸우다 배신하느냐 싸우기 전에 배신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당시 서군은 믿지 못할 놈을 주변에 두었다가 그대로 미츠나리를 사로잡아 이에야스에게 바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114] 타케나카 한베에의 아들이다. [115]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어갔다. [116] 애초에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더라도 모리 가문만은 보존해달라는 조건으로 동군에 가담하였다. 도쿠가와는 킷카와 히로이에의 탄원(담판)은 물론 데루모토의 아들과 첩을 인질로 받고 나서야 그 선에서 마무리했다고 한다. [117] 하지만 애시당초 킷카와가 아니었으면 모리 가문은 멸문당했을 수도 있었으니 뻘짓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과가 좋지 않았던 건 애시당초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 총대장이 되었기 때문이지 내통한 결과와는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내통한 덕에 그나마라도 남길 수 있었던 것. 그게 싫었다면 애시당초 참가를 하지 말았거나 싸워 이겼어야 했다. [118] 실제로 요시히로는 나중에 치매에 걸려 말년이 비참했다고 한다. [119] 사츠마에서 교토의 거리가 이미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백두산의 거리에 육박한다. 더욱이 이에야스의 본거지로부터는 더더욱 멀다. [120] 당시에는 아이즈번(현재의 후쿠시마현 서쪽 절반) 최북단이었지만 원래 아이즈와는 별도의 지방으로 현재는 야마가타현 최남단의 도시이다. 물론 아이즈 지방과 비교해보면 비교도 안 되게 작다. [121] 그 영지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넘어갔다. [122] 여기에서 에도까지의 거리는 서울특별시에서 남원시까지의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 [123]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하나인 사카이 타다츠구의 후손인 다다즈미의 군 통솔력과 번내의 니가타항, 동북방 최고 재력가인 사카타 혼마 가문을 업고 당시 최고 수준의 서양식 무기인 후미장전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전면적으로 무장했다. 그래서 항복할 때까지 열번동맹의 번들 중 유일하게 신정부군이 침공하지 못 했고, 처벌도 혼마가의 재력으로 피했을 정도. [124] 원래는 임진왜란 참전을 제일 반대했던 사람이다. 대마도의 지리적 특성 상 조선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많았고 또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으로 짭짤한 수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싸울 이유가 사실 없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무역이 끊기고 영민들이 전쟁에 끌려가자 대마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125] 결정적으로 소 요시토시는 조선어 회화가 가능하며, 임진왜란과 무관한 시기인 어릴때부터 당시 다이묘이던 부친을 따라 조선에 여러번 가봤기에 조선 문화를 이해하고 있으며, 조선 왕을 알현하고 외교를 해봤던, 일본에서 유일무이하다못해 매우 희귀한 다이묘였다. 조선인과 1대1 대화를 할 수 있으며, 조선인들과 교류 및 소통하는 문화를 알기에 무작정 죽이기엔 조선과의 관계회복에 있어 불리한 점도 있었다. 조선을 전쟁이라도 하러 가보기라도 한 서군의 다이묘들과 달리, 본토 방위라는 명분으로 조선에 가본 적도 없으니 조선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전혀 없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절실한 인적 자원이었다. 요시토시가 조선의 임금 선조와 과거 젊은 나이에 직접 식사 및 대화까지 해본 적도 있다는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매혹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126] 그 대신 소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국서까지 위조해가며 목숨값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127] 당시 마사무네는 오사카에서 도쿠가와의 참전 요청을 받아 전쟁 준비를 위해 센다이로 돌아갔는데, 주 통로가 우에스기에 의해 막혀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소마의 영지를 통과하는 것밖에 방도가 없었다. 문제는 당시 다테 가문과 소마 가문의 사이가 끝장나게 나빴다는 것. 당연히 당시 가신들은 이 참에 마사무네를 쳐버리자고 했지만 한 원로 대신인 미즈타니 타네시게가 반대하였고 결국 소마 가문 내의 협의 끝에 마사무네를 곱게 보내주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다테가 이를 도왔는가는 의문이 제기되지만 그간 사이가 나빴음에도 적어도 소마의 구명운동을 방해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29] 요시타카는 가신의 권고로 자결했는데 정작 이미 동군 편에 섰던 아들 모리타가가 아버지를 구명해냈고 무사할 것이라는 소식을 보낸 뒤였다. 때문에 나중에 이를 접한 모리타카는 빡쳐서 자결하라고 권고한 가신 도요타 고로에몬을 죽였다. [130] 자신의 구 영지였던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를 되찾았고 교토, 나가사키 등 일본 각지의 핵심 요충지를 차지했다. [131] 이전 영지였던 카즈사 오타키 10만 석은 타다카츠의 차남 혼다 타다토모가 5만 석으로 줄어들어 입봉 [13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녀의 남편, 즉 이에야스의 사위이다. [133] 노부마사의 장남 이에마사는 시모츠케 우츠노미야 10만 석을 따로 받았다. [134] 토리이 모토타다의 차남 [135] 구마모토 20만 석 + 우토 20만 석 + 기타 [136]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몰수해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붙인 영지 포함. [137] 나카무라 카즈우지의 아들 [138] 전쟁 전 100만 석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마사무네가 같은 동군인 난부 가문의 영지에서 옛 영주 와가 타다치카와 내통하여 잇키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취소하였다. [139] 너무 타이밍 좋게 줄줄이 죽어나가서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140]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천벌을 받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141]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142] '풍신수길'이 아니라 '평수길'로 표기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헤이시(평씨)의 후예를 자처하던 데서 기인한다. [143] 뜻은 사랑받는 시종이라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총신, 권신이라는 뜻에 가깝다. [144] '치부경'은 관직명 [145] '우문승'은 관직명 [146] '태장승'은 관직명 [147] '내부'가 관직명 정확히 내대신으로 내부는 당명칭으로 내대신의 이명이다. [148] 관직명 [149] 실록 원문에서 "골짜기 곡"을 "밭 전"으로 오기했다. 大田은 '오타(오오타)'라고 읽고 大谷은 '오타니'라고 읽는다)오타니 요시츠구의 당시의 작위가 형부경이었다. [150] 수가는 전사하지 않았으나 조선에 소식이 전해지면서 와전된 걸로 추정된다. [151] 제작비 문제 등으로 애초에 전투를 제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드물다. [152] 고증도 훌륭하거니와 전투 전개과정을 하나하나 잘 보여주었으며 서군들 중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며 온갖 변명을 해대는 장면도 잘 표현되었다. [153]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수양대군이 실세가 된 것은 계유정난 이후이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를 다룬 사극들 가운데 단종 친화루트를 탄 경우는 수양대군 세력의 입지를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크다. 아무리 사서가 승자에 대한 미화라고 해도, 역사적 의미에서 계유정난은 '약소 계파가 건곤일척을 노리고 저지린 도박'이지 강대 계파의 확인사살 내지는 양강의 정면충돌이 아니다. [스포일러] 처음에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휘하 장수 고니시를 조선에 파견한 것을 막지 못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휘하 장수 가토를 명나라에 파견하고, 나가사키에 상륙한 명군이 쓰시마를 시작으로 일본으로 온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다짜고짜 도쿠가와의 영지를 공격하지만, 후반에 공개된 도쿠가와의 서신과 송응창의 대사에 따르면 모든 게 조선과 서군을 기만한 작전이였다. 즉, 다시 말해 페이크였다. 이후 나고야에서 동군으로 돌아서서 조선과 서군 공격을 감행하고, 교토 점령 후 서군의 전령으로 온 고니시에 의해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조선군도 오사카로 즉시 철군한다. 이후 오사카에서 미츠나리가 전사한 후 각각의 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끝에 조선과 서군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이어 서군의 궤멸로 결전이 끝난 후 이여송, 도쿠가와, 이순신의 회담 끝에 에필로그에 나온 바에 따르면 동군이 쓰시마와 오키나와를 전승국인 조선에 넘겨주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나라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실제 역사를 기준으로 하면, 도쿠가와는 임진년 전쟁때 적극적이였지 않았기에 오히려 조선을 끌어들이는 반면 서군을 위시로 한 미츠나리는 명나라를 끌어들일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났다면 서군 휘하인 고니시를 명나라를 보내 이전 평협의 주도자였던 고니시 자신을 도와달라는 논리를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쪽에서는 역시 평협의 당사자였던 심유경은 처형 되었고 그를 밀어준 석성도 몰락했기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전후의 피해가 극심해서 이를 복구하는데도 여력이 모자를 판이였고 명나라도 북쪽에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만주족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느라 일본으로 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155] 특히나 미츠나리 관련자를 제외하면 유일한 무쌍 무장인 시마즈 군은 직접 조작하지 않는 이상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하등 도움이 안 된다. [156] 이때 아군 진영의 우익 전체가 통째로 적으로 돌아서는 환장할 상황이 벌어진다. 유일하게 남는 오오타니 군은 진짜 한 줌 병력이고... [157] 다만 이러면 고급 병종인 카타나 사무라이를 버리는 패로 써야하기에 타격이 크다. 거기다 발을 안 묶어도 어차피 거리가 있어 합류에 시간이 걸리기에 그냥 카타나 사무라이도 같이 본대로 이동시켜도 추후 전투에서 큰 지장은 없다. [158] 어쨌든 동맹이기 때문에 일단 이에야스 군이 접근하면 이에야스 군에게 덤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