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16:49:09

벽파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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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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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 해전
碧波津 海戰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597년 (선조 30년) 10월 17일 (1597년 음력 9월 7일)
장소

벽파진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
(공세)
일본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충무공)
지휘관

파일:이나바 가몬.svg 구루시마 미치후사
병력 조선 전선: 13척 일본 전선: 13척
피해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결과 조선의 승리
영향 명량 대첩 발발
1. 개요2. 배경3. 전개4. 이후

[clearfix]

1. 개요

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 1597년 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7일)은 어란포 해전에 뒤이어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

2. 배경

이하 배경은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

10월 8일 (음력 8월 28일), 어란포 해전 직후 조선 수군은 장도(노루섬)으로 진영을 대피하여 숙박했다.

10월 9일 (음력 8월 29일), 오전에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진영을 옮겼다.

10월 10일 (음력 8월 30일), 이순신이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이라며 두려워하며 탈영하려 해 그 관할 아래 장수들이 찾는 소동도 생겼다. 배설이 제 종을 시켜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좀 해야 하겠다"고 솟장을 냈고, 이순신은 "뭍으로 가서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줬다. 이에 배설은 뭍으로 갔다.

10월 11일 (음력 9월 1일), 탐라에서 온 점세라는 사람이 소 다섯 마리를 바쳤다.

10월 12일 (음력 9월 2일), 배설이 탈영했다.

10월 14~16일 (음력 9월 4~6일), 된바람 속 배들이 가만히 있지 못 했는데 각 배들을 겨우 보전했다. 추위 속에서 격군들이 고생하며 배를 지켜냈다. 이순신은 이를 천행이라 표현했다.[1]

3. 전개

10월 17일 (음력 9월 7일)
  • 탐망군관 림중형(林仲亨)이 "적선 55척 중 13척이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우리 수군 공격 목적이 있다" 보고했다.
  • 오후 4시쯤 13척이 다가왔다. 조선 수군도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 맞서려 하자 그들은 돌려 달아났다. 바람과 조수가 모두 역류라 항해할 수도 없고, 복병선을 우려해 쫓지 않고 돌아왔다.
  • 돌아온 즉시 조선수군은 회의하여 "오늘 밤에는 반드시 야습이 있을 것 같으니, 각 배의 장수들이 알아서 준비"를 명령하고,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대로 할 것"임을 재차 삼차 타일렀다.
  • 밤 10시쯤 낮의 13척 적선들이 포를 쏘며 야습해왔다. 이순신은 조선수군이 겁을 먹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적선으로 돌격하며 지자포를 쏘아 강산이 진동했다. 적은 당해내지 못 하고 물러갔으나 4차례나 나왔다 물러났다 하며 포를 쏘았다. 밤 1시가 되어서야 물러갔다.

10월 19일 (음력 9월 9일), 이틀이 지나도록 적의 동태도 없고, 중양절 명절이기도 하니, 그제야 긴장을 풀고 탐라 사람 점세가 바친 소들을 잡아 병사들에게 고기를 나누었다. 저녁나절에 적선 2척이 어란포에서 감보도(진도군 고군면)까지 들어와 정탐을 하였고,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이를 뒤쫓자 적선 2척은 놀라 배에 실었던 물건을 몽땅 바다에 던지며(배를 가볍게 하려) 도망갔다.

10월 20일 (음력 9월 10일), 일대를 정탐하여 적선 55척이 모두 멀어졌음을 확인했다.

4. 이후

이 전투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루시마는 이 특급 소식을 일본 수군에 전달하고, 일본 수군 전군이 진격한다. 이순신은 10월 21-23일 (음력 9월 11-13일) 돌아간 55척이 더 많은 적을 데려올 것이 뻔하기에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 한다.

10월 24일 (음력 9월 14일) 어란포 앞바다에 적선 수백척이 다시금 찾아왔고, 10월 25일 (음력 9월 15일)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 앞 울돌목으로 옮겨 적을 맞이하기로 하며 결전을 맹세한다. 마침내 10월 26일 (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이 발발한다.


[1] 이순신은 이후 명량 해전에서의 승리 정도에야 천행이라 표현한만큼, 이 날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