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반식민주의와 반봉건주의의 궁극적인 결과는
베트남 제1공화국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을 법 한 다양한 형태의
반공주의
내셔널리즘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Nguyễn Văn Hầu와 Dật Sĩ 같은 종교파 지식인들은 종교파와
베트민의 관계의 역사를 손쉽게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이라는 맥락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남쪽의 저항 운동의 역사 역시 북쪽에서의 그것과 같은 요소들, 즉 깨진 동맹, 여기저기에서의 폭력, 그리고 저항 운동을 버리는 어려운 결정들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남쪽에서의 반공주의의 기원이 민중 운동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17도선 남쪽에서 반공/내셔널리즘 국가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 반공주의자들을
베트남 공화국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그의 종교파들에 대한 태도는 대월당이나 베트남 국민당에 대한 처분과 다르다. 총통은 종교파 정당들을 배제하고 그들의 기지를 공격했으나, 공개적으로 그들의 평판을 깎아내리지는 않았고, 그들이 공산주의자 치하에서 받은 억압들을 다루는 많은 출판물들이 대중들에게 읽혔다. 호아하오교와
까오다이교는 그들의
반공주의,
내셔널리즘적 역사를 그들의 종교 커뮤니티에 간직했으나, 남쪽 반공 내셔널리즘은 한 번도 북쪽의 그것과는 달리 베트남 공화국 주류의 담론을 지배한 적이 없었다. 사실상, '세 적 공식'은 남베트남의 모든 주요 내셔널리즘 운동을
공산주의건 비공산주의건 심각하게 약화시켰으며, 응오딘지엠이 남쪽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두번째로, 응오딘지엠의 권력 강화는
1940년 이래로 반공 내셔널리즘을 지배했던 정치 스타일에 종말을 고했다.
1956년 전까지 명멸하던 많은 반공주의 연합들은 다원적이고 포용적이었지만 또한 연합전선의 사례처럼 불안정하고 경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응오딘지엠의 취향은 더 협소하고 잘 복종하는, 연합 체제에 내재된 취약함이 없는 정부였으나, 이 때문에 그의 체제를 약화시키는 무장 반란이 초래되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좀 더 국민들을 잘 대변하는 정부를 세우지 못한 그에게 책임을 물으며, 다른 관찰자들은 종교파들이 그들의 사병과 영토를 매우 강하게 방어하던 걸로 보아 협력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종교파를 적과 지지층으로 나눈 사실은, 바이비엔 같은 강경한 적이 아닌 한, 응오딘지엠이 종교파 동맹들과 협력할 수 있는 충분한 공통점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마지막엔, 총통의 그의 동맹 종교파들조차
토사구팽하기로 한 결정은 그의 협소한 정치성이 불가피하다기보단 그의 선택에 따른 것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세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총통이 남베트남에서 가장 중요한 반공주의 내셔널리스트들을 영원히 없애버렸단 것이다. 특히 종교파들은 응오딘지엠과 시골의 대중들 사이를 잇는 다리로 작용할 수 있었으나, 그의 공격성이 반공주의
성직자들과의 협력 가능성을 차단해버렸고 그의 체제가 시골 지역에서 만성적으로 취약했던 원인을 만들었다.
출처
남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의는 프랑스의 주권 침해 아래 놓여있지도 않고, 폭력적이고 잔혹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반대하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건국 당시에는 사실상 프랑스의 보호국에 가까웠던 베트남국에서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를 비롯한 종교파, 베트남 국민당 등의 비종교 반공세력을 비롯한 모든 남베트남의 반공 독립운동 세력들은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를 줄기차게 요구했고, 이들 중 일부가 모여 결성된 '혁명위원회'와 응오딘지엠의 측근 세력[1]이 뭉쳐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건국된 나라가 바로 베트남 공화국이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이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면서 같은 반공 진영에 있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하고 옛 동맹들마저 토사구팽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의 정통성은 시작부터 어긋나게 된다. 비록 본질적으로 이들이 일부 전근대성을 내포하고 있었을 순 있으나,[2] 남베트남에서 종교는 명분상으로나 실제 세력으로나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이 분명했다.[3]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의 인구를 합하면 17도선 아래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숫자였다. 베트민의 폭력적인 테러와 탄압에 질린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공산주의를 증오했고, 또한 스스로의 지역, 특히 남서부 시골에서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비록 이들 종교파가 워낙 다원적인 세력이었기에 내재된 분열의 위험성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나, 응오딘지엠은 권력 독점에 눈이 먼 나머지 그저 이들 세력을 통폐합하고 협조적인 이들만 골라서 체제에 받아들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종교파 구성원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런 과정은 당연히 응오딘지엠 정권, 나아가서는 베트남 공화국 전체가 가지는 정통성과 존재 의의 그 자체에 치명타를 가했다.
1950년대 중반 종교파들에 대한 전쟁은 또한 남베트남 사회에서 이전부터 있던 갈등도 반영하고 있다.
즈엉반민이나 응우옌응옥터 같은 군사/민간 반종교파 지도자들은 각각
베트남국의 기득권층과 같은 계층에 속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으며 수 세대 동안 프랑스 식민 정부에 협력했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실, 응우옌응옥터는 베트남의 내무장관을 했던 적이 있다. 응오딘지엠이 베트남국의 최고 지도자들은 배제하긴 했지만, 그의 종교파들에 대한 행동 때문에 그는 식민 부역자 기득권과 같이 묶이게 된다. 베트남 공화국의 첫 정부 인사들은 이전에 프랑스 식민체제에서 일한 적 있던 민간인들이었으며, 엄격한 학력 제한은 성장들의 구성 성분을 기득권으로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조적으로, Trần Văn Soái,
레꽝빈,
찐민테 등은 학력이 낮고, 자수성가한 빈민층 출신 지도자들로써 대불항쟁 기간 동안 주목받았다. 사실, Nhị Lang는 나중에 특정한 갈등이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베트남 공화국군 장군들과 겸손한 찐민테 사이에 있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많은 학자들은 베트민이 지배했던 지역에서 빈민들은 응오딘지엠의 베트민 간부들을 체포한 것을 애국 독립투사들을 부역자들로 이루어진 정부 인사들이 공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비슷한 현상이 종교파가 지배하던 지방들에서도 일어났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베트남 공화국군 병사들이 지역 종교파 군대를 공격했고, 식민지 시대의 방첩기관이 종교파 지도자들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트민 지역과 종교파 지역 양쪽 다에서, 총통이 남베트남 저항운동을 탄압한 것이다.
응오딘지엠이 타 진영 반공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것은, 그의 정권이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보다 명분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을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 북베트남도 독재국가였고, 타 진영 독립운동가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아니, 북베트남이 한술 더 떴던 것이, 베트남 공산당은 최소 30년대부터 비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을 프랑스에 팔아넘긴 흑역사까지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응오딘지엠이 민주적인 정권을 만들었다면 남베트남은 '같은 민족을 프랑스에 팔아넘겼던' 북베트남 정권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자신들의 범죄를 상당 부분 감추는 데 성공했고, 지엠 정권도 공산당처럼 타 진영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결국 쎔쎔이 되었기에 그럴 여지가 사라져버렸다. 결과적으로 응오딘지엠의 정권은 최고수뇌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프랑스 식민지배 부역자들이나 혹은 그 시대의 보통 군/민간 관료로만 구성되게 되었으며, 게다가 종교파 숙청에 하필 이들을 동원한 사실 때문에 일단은 독립운동가이긴 했던 지엠 자신마저 민중들에게는 부역자 출신들과 동급으로 여겨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명망 있는 잠재적인 정적들[4]을 모두 제거해버린 결과는 응오딘지엠 체제가 붕괴된 뒤에도 남베트남에 심각한 악영향을 낳았다. 응오딘지엠이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숙청하고 자기 자신도 숙청당하고 나니까 남베트남인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경력을 가진 인사 자체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장 응오딘지엠 이후의 집권자들을 살펴보면, 즈엉반민과 응우옌카인은 아예 구 프랑스 식민체제에서 교육받은 친불 기득권층 출신이었다. 응우옌반티에우는 그 자신이 부역자 출신은 아니었으나 일단은 기득권층 출신이었는데다가 응오딘지엠에게 숙청당한 종교파 장군들에 비하면 딱히 커리어에서 특출난 편도 아니었다.[5]
어쨌건간에, 종교파의 두 종교를 비롯한 남베트남의 종교 세력 전체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을 받아 체제의 정통성이 크게 취약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응오딘지엠은 가톨릭을 우대하는 정치를 펼쳤는데 가톨릭은 베트남인에게는 식민 지배자의 종교였고, 당시 베트남인은 90%가 불교 신자였다.
다만 응오딘지엠의 가톨릭 우대와 측근 정치는 일단 쿠데타로 좀 수습되기는 했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과 응우옌까오키 부통령 체제가 1967년 9월에 들어서면서 민심은 적어도 종교 문제에서는 수그러 들었다. 그러나, 55년~56년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종교파 숙청이 응오딘지엠이나 이후 무능한 집권자들의 대안이 될 수 있던 세력들을 영원히 없애버렸으며, 이들 종교가 더 이상은 이전 몇십년간처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요새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종교와 정치 양쪽에서 일어난 응오딘지엠의 철권통치는 분명 베트남 공화국의 멸망에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종교 문제에서, 당시의 북베트남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국가였다.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톨릭은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가톨릭 계열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으로 보고 대량 탄압했다. 그러다보니 그 전까지는 정권에 충성스러운 편이었던 수십만 가톨릭 교도들은 월남을 택했고, 이들은 당연하지만 남베트남을 지지하게 되었다.[6] 또 베트남 통일 이후 공산정권은 중국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남베트남의 불교계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응오딘지엠 정권 후 불교계에 간첩들이 많이 침투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와 교조적인 공산주의는 양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남베트남의 반공 민중운동 자체가 종교에 기반하고 있기도 했다.[7]
또한 남북총선거 거부가 국가 정통성을 없앴다는 시각과 달리, 국제사회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몰라도, 남베트남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나라 정통성에 그리 큰 타격이 가지 않았다는 반박도 있다. 베트남 전쟁/오해와 편견 참조. 국제사회의 반응도 중요하긴 하지만, 결국 나라의 근본은 민중들의 지지라는 점에서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던 남북총선거가 베트남 공화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북베트남과 베트민은 1945년 독립 직후부터 수많은 반대 세력에 대한 잔혹한 숙청과 민간인들에 대한 테러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흔히 퍼져있는 설과 달리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Nu-Anh Tran 교수의 지적처럼 베트남 공화국 주류를 지배한 반공주의적 담론들이 민중 운동에서 기원한다는 점에서, 남베트남 국민들은 분명히 공산주의보다는 반공주의를 지지했다. 이런 민중적 기반 덕분에 민심이 이미 정권에 등을 돌린 1960년대 말의 막장 상황에서도 남베트남 국민들로 구성된 민병대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전투력을 정비하자마자 베트콩에 조직적으로 대항했다. 그리고 1973년 통계에서 집계된 남베트남 인구가 19,370,000명인데, 통일 이후 바다로 도망친 보트피플만 최소 100만 이상이다. 이들 가운데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정권 수뇌부가 시작부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자기 손으로 부정해버린 것이 원인이다. 상술한 종교파 문제가 그 시작이라면, 극도의 부패와 막장 행동으로 인해 국민과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받을 여지를 스스로 상실한 것이 결정타였다. 아무리 1950~80년대 당시 권위주의 독재정권 치하의 한국이 부정부패가 심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쪽은 ( 김원봉처럼 해방 이후 이북에서 활동한 인사들은 예외가 되긴 했어도) 정권 스스로를 제외한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모조리 제거하지도 않았고, 미국이 공산당을 막으라고 준 무기를 적국에게 돈 받고 팔아넘기는 짓도 하지 않았다. 먼나라 이웃나라 3권 독일편에서 부정부패와 관련한 설명을 하는 중에 미국이 공산당 막으라고 준 무기를 적국에 팔아넘겨 공산당에게 나라를 뺏긴 나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나라가 남베트남이다. 이렇게 남아 있었어도 국가 막장 테크가 확실했기에, 북베트남이 한 일은 남베트남의 썩은 문을 걷어찬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다못해 미국과 파리 협정을 맺은 후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는데 완전히 이기는 데에 2년은 걸릴 거라는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의 예상을 깨고 단 55일 만에 무너뜨렸으니, 그 만큼 남베트남이 얼마나 부패한 국가였는지를 증명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북베트남은 간첩들을 보내 남베트남 정부의 부당함을 알림과 동시에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는 공작을 매우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1.1. 남베트남의 민심
응오딘지엠의 타락과 그 이후 쿠데타의 연속으로 혼란만 초래했던 군정, 그리고 그 이후 집권한 응우옌반티에우의 별로 나아진 게 없는 통치 능력에 남베트남 사람들이 환멸을 느꼈다는 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북베트남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적대를 하지 않았다는 데에는 과장이 심하고, 반론의 여지가 만만치 않다.미군이 개입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이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과 교전한 것은 미군도, 남베트남 육군도 아닌 바로 수십만에 달하는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었다. # 이들의 대다수는 징집병이 아니라 자원해서 입대한 모병이었는데, 이들 중 지방군(Địa phương quân, Regional force)들은 각 성의 통제를 받으며 고향 성을 지키는 풀타임 복무 병력이었고, 의용군(nghĩa quân, Popular force)은 고향 마을에서 농사꾼 등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베트콩이 쳐들어오면 총을 들고 맞서 싸우는 파트타임 복무를 하는 병사들이었다.
시골에 사는 민간인들의 가족이나 친척, 이웃으로서 각 성의 소규모 도로나 하천, 각 마을을 방위했던 이들 민병대원들은 남베트남 시골로 베트콩 병력을 침투시켜서 마을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보급을 챙기는 전술을 쓰던 베트콩들에게 엄청난 골칫거리였고, 따라서 이들에게 베트콩의 공격이 집중되었고, 따라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게다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지원 대부분은 부패한 남베트남 정규군에게 집중되었기에, 미국 군사지원단이 본격적으로 민병대원들을 육성한 이후에조차 열악한 보급과 훈련을 받았고 중화기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며, 화룡점정으로 봉급마저도 정규군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지원과 형편없는 봉급, 그리고 베트콩들의 공격 집중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는 위험한 환경이라는 삼중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민병대 훈련에 나선 1965년 이래로 민병대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전시동원병력이 아니라 모병이었다. 즉 저런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도, 고작 인구 2천만 정도의 나라, 그것도 주 산업이 노동집약산업인 농업인 나라에서 70만 명을 몇 년만에 넘길 정도로 병력 충원이 빨리 됐다는 것은, 그만큼 남베트남 민중들이 남베트남 정부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북베트남 정권과 베트콩은 더더욱 증오하며, 따라서 그들의 고향을 베트콩으로부터 지킬 의지로 충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결과 베트남 민병대는 베트콩과 북베트남에게 인명 피해를 가장 많이 입힌 군대가 되었다.
즉 남베트남 민중들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대항할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민중들의 항전 의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남베트남 정부와 정규군보다 훨씬 높았으나, 무능한 정규군이 지원의 대부분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움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군 또한 정규전에 치중하는 바람에 이들에 대한 지원이 열악했던 등 여러 악조건이 있었다.
2. 역사적 문제
2.1. 남북의 역사적 격차
사실 베트남은 한반도와 달리 이념 논쟁 이전에 원래부터 남북 간의 격차가 심한 편이었다. 한반도는 이르게 잡으면 통일신라, 아무리 늦어도 고려 시대 이후 최소 1000년 이상 중앙집권 단일국가를 유지하면서 한민족이란 의식[8]이 뚜렷했으며,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 양국 간의 냉전과 좌우 이념 대립, '정치 노선과 사상의 차이로 인한 독립운동가들의 분열' 때문이었지, 절대 남북 간에 서로 지역감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9] 반역향 같은 갈등이 있었지만, 이것이 별개의 국가와 민족으로서 서로 구분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고 이런 반역향이 수도권을 빼면 모두 포함되어 남북한과 무관한 데다가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지역감정이었을 뿐이다.[10]
하지만 베트남은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나라이다. 우선 베트남사에서 남부의 참파는 북부와 아예 다른 나라였다. 베트남의 주류인 킨족과 참파의 주민들이었던 참족은 아예 계통도 문화도 완전히 달랐다. 킨족은 중국 남부 계통의 민족으로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 한자-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반면, 참족은 말레이계 민족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믿으며 인도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즉, 민족 문제 이전에 남북은 문화권부터가 달랐다.
헌데 감정적인 면 이전에 베트남 남부는 이미 근대 이전부터 죄다 주류민족인 킨족에게 점거당한 상태[11]라서 베트남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참족과는 별개의 역사와 문화가 자리잡은 유서 깊은 지역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변방 지역 정도가 당시 북부의 시선에서 본 남부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북베트남인들의 시선에서는 남베트남은 "저 촌것들이 프랑스 덕에 조금 컸다고 이젠 미국을 등에 업고 따로 노네? 제정신임?"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가장 이질적이라는 제주도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변경 지역이었던 함경도조차 삼국시대나 그 이전부터 한국인들과 연결되는 옥저와 고구려 등이 이미 차지한 적 있고, 백두산이 영산으로 취급되거나 해모수의 전설이 있기도 하며 #, 늦어도 1443년까지 조선 왕조는 '고토'를 수복한다며 함경도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후에와 같은 남베트남의 비교적 역사적인 도시조차 가장 늦게 복속된 온성군보다도 이민족의 영향 하에 오래 있던 도시였다.
이에 대해 소수민족 비중이 높은 곳은 북쪽에 몰려 있다는 지적도 있으나 사실 남부 내륙의 떠이응우옌(Tây Nguyên, 西原) 지역은 남베트남과 이후 통일 베트남의 베트남인 이주 정책으로 소수민족이 소수가 된 지역이지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소수민족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실제 1930년대만 해도 이 지역 인구의 95%는 소수민족이었다. # 현재도 구 남베트남 주민들은 킨족화된 비킨족계 선주민(참족, 크메르인 등)의 혈통에 따른 영향으로 구 북베트남 주민들과는 외모에 차이가 있다.
각 수도의 상징성도 마찬가지라서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베트남의 경우 북베트남의 하노이는 500년 이상 확고부동한 한반도의 정치, 경제, 사회 중심지였던 서울과 유사하게 수백 년 동안 역대 베트남 왕조의 수도로 자리잡은 역사 도시였다.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가 된지 900년이 넘었다. 반면 남베트남의 사이공은 17세기 말 응우옌 씨가 막 진출한 메콩 강 델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군사거점에 불과했고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프랑스가 점령해 인도차이나 식민지 경영의 거점으로 삼은 이후였고 사이공은 역사성이 부족할 뿐 20세기 중반 시점에서는 하노이와 더불어 손꼽히는 인프라를 갖춘 대도시였다. 더군다나 남베트남에는 하노이만큼 역사가 길진 않지만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도 있었고, 베트남에서 매우 인기가 많았던 왕조인 서산조의 수도 꾸이년 역시 남베트남의 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은 사이공을 수도로 삼았다. 상징성이 깊은 꾸이년과 후에는 수도로 삼기에는 사이공에 비해 전선과 가까웠으며 무엇보다 가난했던 초기 남베트남 입장에서 새로 인프라를 깔 여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사이공을 수도로 둘 수밖에는 없었다.
한국의 경우 이미 해방 직후부터 거의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명실상부 1극 도시인 서울로 집결했고, 이 서울에서 정부를 수립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데다가, 서울을 위시한 중남부의 인구가 북부에 비해 2배 정도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총선거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를 틈타 어부지리에 가깝게 북한 정권을 꿀꺽한 김일성은 호치민과 같은 중량감은 고사하고 가짜설이 수십 년 간 횡행할 정도의 듣보잡이었던 탓에 오히려 남한에서 줄기차게 ' 괴뢰'로 칭하며 정통성을 깎아내리는 게 가능했고, 북한 스스로도 헌법에 서울을 수도로 명시하면서 서울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의 취약한 정권 기반과 북한의 태생적 열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면 남침과 같은 군사적 모험주의로 이어졌고,[12] 이는 김일성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남한에서 북한에 대한 반감을 심화시키고 대한민국의 국민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반면 태생부터 게릴라로 시작해 천 년이 넘게 잘 개발된 베트남 북부를 차지한 북베트남은 무리한 전면전을 선택할 필요가 없이 남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 지원과 분계선 일대에서의 국지적 무력충돌 정도로 충분히 남베트남의 국력을 소진시키고 사회를 교란시키며 결정적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13]
또한 그 북한의 수도인 평양도 서울에 밀릴 뿐, 사이공(호찌민)과 역사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역사 도시로, 한국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한국사 국가들 중 대외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다.
남베트남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근본 없는 지역에 세워진 나라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2. 프랑스 식민통치기와 남베트남 건국의 난맥상
한국에서는 정파를 막론하고 막연히 대남국을 조선 왕조에, 프랑스 강점기를 한반도의 일제강점기에, 남베트남을 대한민국에 등치시키며 남베트남의 패망을 한국의 상황에 단순하게 대입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역사적 배경은 전혀 다르다.한국은 이미 600년 전 조선 건국 직후부터 전쟁 수행에 애로를 겪을 정도로 철저히 군권을 중앙에 집중한 국가였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지배한 일본 제국 역시 바로 이웃한 국가의 장점을 살려 수만명의 헌병·경찰을 일본인으로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밀도 높은 통치력을 발휘했다. 한국인들의 군사적 저항은 이미 경술국치 이전에 남한 대토벌 작전 등을 통해 뿌리뽑혔고, 1910년대 중반에 국내 무장세력은 자취를 감추어 국내에서는 소수의 잠입을 통한 암살과 테러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한국인 군사지도자들의 경력은 제한적인 도강전투나 아예 일본군 입대 정도를 제외하면 철저히 국외에서만 이어졌고, 자유시 참변 같은 사건까지 겹쳐 8.15 광복 직전에 이르러서는 비좌익진영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국인 군사조직도 간신히 대대급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이 군사경력자들은 국내에서 적시에 대규모 군사조직을 보유하는 데 실패하고 미군정의 통제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좌익진영 역시 국내에서는 무장조직을 형성하지 못한 채 중국과 소련에서 떠돌아야 했고, 해방 직후 결성된 국군준비대와 같은 좌익 군사조직들은 미군정에 의해 가차없이 해산되었다.
반면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세력 확대의 한계선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는 균일하지도 않았고 직접적이지도 못했다. 메콩강 삼각주에 위치한 6개 성은 프랑스 직할통치령인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로 편제되었으나, 중부 안남 지역은 응우옌 왕조가 제한적인 자치권을 행사했고, 북부 통킹은 다시 안남과 별도의 프랑스 보호령 체제였다. 심지어 길다란 국경을 맞댄 라오스나 캄보디아 역시 보호국 체제에 프랑스 본국에서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통제가 느슨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1930년에 옌바이 봉기 같은 대규모 무장투쟁이 발생할 정도로 국내 무장조직이 활동할 공간이 있었고, 1940년대에 들어서는 여기에 일본군까지 들어와 프랑스 식민당국-일본군정-대남국 자치행정당국-베트남 민간세력이 마구 뒤엉키는 등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일대와 비슷한 상황이 도래했다. 이는 해방 후 남베트남의 건국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건국 참여 세력의 합의 면에서도 대한민국과 남베트남은 확연히 달랐다. 남한 지역의 경우 적어도 기존 지배 세력인 일본 제국을 지체없이 추방하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데 그 누구의 반대도 없었고,[14] 물론 해방 초기에 조선인민공화국과 미군정의 충돌, 신탁통치 찬반 갈등, 임시정부의 쿠데타 시도, 남북총선-단독총선 사이의 갈등 같은 일들도 있었으나 미군정이라는 과도기와 총선거를 거친 정부수립이라는 큰 흐름 자체는 유지되었다. 미군정은 여러 삽질도 있었지만 어쨌든 남한 지역에서 우후죽순 나타난 무장조직들을 국방경비대와 경찰에 흡수시키든 아예 짓밟고 해체시키든 정부 통제 하에 귀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반면 남베트남( 베트남국)은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지, 아니 애초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는 할 것인지 자체가 합의되지 않은 채로 해방을 맞았다. 남베트남 자체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여전히 베트남 통치를 포기하지 못한 프랑스가 급조한 괴뢰국이 디엔비엔푸 전투를 계기로 졸지에 독립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 프랑스의 복귀조차도 원래 영국과 중화민국이 분할 진주할 계획이었던 것을 프랑스 복귀로 때웠던 것이니, 그야말로 2차 대전 종전에서 남베트남의 독립에 이르기까지 일말의 계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었고, 차라리 라오스나 캄보디아의 독립 과정이 남베트남보다는 몇 배나 체계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반대편의 베트민은 이미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자체적으로 무력을 육성해왔고 군벌세력이 될 수 있는 반대 진영 군사조직들은 자체 삽질과 공산당의 통수로 날아가 중앙정부가 안정적으로 군사력을 운용할 수 있었던 반면, 남베트남은 프랑스 괴뢰국 체제에서 형성, 정리되지 못한 각종 반공군벌세력들이 지역마다 군, 경찰과 뒤엉켜 난장판을 벌였다. 심지어 수도 경찰권마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이런 난맥상 끝에 사이공 전투라는 대환장파티가 터져버렸다.[15] 정규군이었던 베트남국군의 전투력 자체는 프랑스군이 제법 잘 키워놓은 상태였으나[16] 그 군대의 지휘권의 행사는 심지어 1955년 4월 혁명 당시까지도 명확하지 않아 엄연히 국가원수였던 바오다이가 임명한 신임 참모총장의 취임을 (총리와 정치동맹이긴 했지만) 친정부 군벌 지도자들의 모임인 혁명위가 대놓고 가로막을 정도로 혼란이 지속되었다.[17] 이쯤되면 남북총선거 같은 이슈는 부차적인 문제에 가깝다.
게다가 하필이면 남베트남의 정규군부터가 식민통치자였던 프랑스가 직접 육성한 군대이고 남베트남 정부 역시 괴뢰국 정부가 이양된 것이다보니, 응오딘지엠이 아무리 독립운동가였건 뭐건 간에 북베트남에서는 남베트남을 신나게 친불 매국노 정권으로 매도하며 정통성을 까내릴 수 있었다.[18][19] 그러니까, 남베트남군을 구성하는 장교들과 장성들이 과거 프랑스 식민 당국에 협력한 민족반역자였들이었다. 남한의 경우 미국은 아무리 삽질을 하건 뭐건 간에 어쨌든 식민통치자였던 일본을 축출하고 들어와 3년의 군정 끝에 확실한 독립국가를 만들어준 해방군에 가까웠던 반면, 베트남에서의 미국은 기존 식민통치자였던 프랑스의 대체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고 베트남 좌익은 이러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면서 의식화된 지식인 계층을 적극적으로 포섭해나갔다.[20]
2.3. 반공주의 연합 붕괴와 군사력의 막장화
사이공 전투는 베트남국이 제대로 된 국가라고 보기도 힘든 체제였다는 걸 증명한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베트남 공화국 체제의 가능성을 내비친 사건이기도 했다. 친정부 군벌과 정부군이 큰 갈등 없이 연합해서 반정부 군벌을 토벌한다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과 질서를 갖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가이드라인과도 같았으니까. 군벌 난립으로 사분오열된 채로 하나의 통합된 군대를 10여년간 다뤄온 북베트남과 마주한 열세를 민주주의 체제의 협치라는 장점으로 커버가 가능하다는 증명이 될 수도 있었다.[21]그러나 사이공 전투 막바지에 군벌 세력의 일부인 찐민테가 누군가에게 암살당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22] 군사적인 경력이 없던 지엠은 많은 전공을 세운 영웅을 지도자로 뒀고 스스로도 강력한 전투력을 지녔던 리엔민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동지보다는 자신의 정권 유지만을 바라보다가 독재정치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 보았고, 정규군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반타인까오 한 사람에게만 지원금을 몰아줘서 리엔민 군벌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다른 까오다이교 군벌이었던 응우옌타인프엉의 경우, 지엠에게 잘 보이겠답시고 아예 교주를 공격해서 캄보디아로 내쫓는 하극상을 일으키면서(...) 사실상 정치적인 가치를 상실했다.[23] 결국 까오다이교 쪽 군벌들은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지엠 정권 혹은 스스로의 뻘짓으로 해체되었고, 호아하오 쪽 군벌들은 정부군에 항복하고 무장해제되거나 토벌되면서 베트남 공화국을 만든 반공주의 연합은 결국 완전히 붕괴된다.
반공주의 군벌을 모두 없앤 응오딘지엠은 군사적 경험도 없음에도 남베트남 정규군에게까지 사사건건 개입했고, 유능한 지휘관을 앉혀서 베트콩을 소탕해야함에도 유능한 장수가 유명해지면 자기 정권을 노릴까봐 능력보단 응오딘지엠 일가에 대한 충성심 위주로 인사를 펼치면서 정규군의 전투력마저 형편없이 떨어트리고 만다. 그 결과 1955년, 56년에 빙쑤옌이나 호아하오 군벌을 상대로 수적인 우위를 이용해서 잘 싸우던 남베트남군이었으나 군 지휘부가 응오딘지엠의 예스맨들만으로 배치되면서 무능한 이들이 병력을 지휘하다 보니 점차 막장화 되어갔고 지엠 정권 말기에 이르자 수적인 우위와 미국에게 엄청난 무기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콩한테 탈탈 털리는 희대의 당나라 군대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막장사태에 경악한 미국은 결국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대대적인 개입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미국이 참전할 즈음에는 남베트남군은 더더욱 막장화가 되어있었는데 미국이 대중들의 민심을 사고 복원 작업에 쓰라는 물자와 군수물자를 넘겨줬더니 지역을 수비하는 군대의 지휘관들이 이것을 자기들 관리하에 들어온 물자라며 돈내고 쓰라며 사유화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사리사욕을 채웠다.[24] 이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크레모어에서 제대로 묘사되었다.
3. 전략적 문제
남베트남의 경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미 응오딘지엠 일가의 독재와 부패가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 초기엔) UN에서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지원할 명분이 없다시피 했다. 미국이 '미군'이 아닌 'UN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대한민국이 UN의 지원을 통해 '최초'로 수립된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론 미군정이었지만 한반도는 UN의 신탁통치 후 독립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이는 2차 대전 이후 "UN이 막장이 된 지역을 정상화시키고 주권국가로 만들어보자" 라는 야심찬 계획의 제1번이었다. 대한민국 제헌 총선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주관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 국군은 1950년 6월까지 줄곧 UN 한국소위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그런 한국을 침공하는 건 자존심을 넘어 UN의 존립을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에[25] 소련조차 차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어 불참 후 항의라는 형태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26] 그 대가로 북한군은 2020년 현재까지 최초이자 최후로 국가적 전면전에서 UN군과 마주하고 있다.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한 군대였다.반면 북베트남은 직접적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을 피하고 베트콩을 지원하여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데 주력했으며, 북베트남 자체는 공식적으로 미국에 대하여 방어적인 움직임만을 보였다. 베트콩을 '자발적으로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포장하여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현실의 베트콩은 근본적으로 보면 적국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에 지나지 않았으나, 남베트남 정부의 무능 탓에 60년대 초반까지 베트콩을 제대로 상대할 수단이 마련되지 않았고 이 문제는 미국이 민병대 육성을 적극 지원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이미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진 뒤였다. 더불어 북베트남의 언론플레이도 비교적 잘 먹혀들어서 베트콩의 잔혹성을 축소하고 미국과 남베트남의 문제점만 부각하는 이들까지 서방권 내부에 생겨나면서[27] 미국이 제대로 개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이 부분 역시 남북한과 다른 부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UN으로부터 총선거를 통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한국 전쟁 때 북한의 일방적인 남침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위치 때문에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을 명분이 충분했다. 게다가 북베트남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28]과는 달리 남한 내에서의 빨치산 부대는 말이 북한군이지 실제로는 여순사건 및 한국전쟁 때의 낙오병,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피해 도피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했으며 북한 정권의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했고 결국 북한 정권에 의해 버림받았다.[29] 그래서 유의미한 세력 구성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만 행하다가 1950년대에 거의 대부분 소멸했다.
4. 지리적 문제
남베트남은 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도 우크라이나[30]와 남한에 비해 훨씬 운이 나빴다.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베트남은 나라가 남북으로 길게 생겼으며 그 중에서도 중부 지방은 특히 극단적으로 좁고 길게 생겼다. 때문에 남북베트남의 국경은 매우 좁아서 언뜻 생각하면 방어하기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베트남 서쪽의 라오스, 캄보디아는 개발 도상국인데다가 자국 영토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31] 북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해방구를 통해서 호치민 루트를 만들고 베트콩을 지속적으로 키워줄 수 있었다. 거기다 호치민 루트가 밀집되어 있던 라오스 남부와 베트남 안남 지방의 경계 일대는 험준한 산지이기 때문에[32] 호치민 루트를 발견 처리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며 길이가 길며 산지 투성이에 정글로 뒤덮인 남베트남의 서쪽 국경은 경비가 무척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서쪽 국경이 남베트남을 공격하는 제2, 제3 전선이 되었던 것이다. 해상은 강력한 미 해군으로 철저하게 봉쇄할 수 있었지만 북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해 우회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해상 작전을 펼 필요도 없었다. 물론 밀수선박 등은 꾸준히 총기와 탄약을 실어 날랐다. 몇몇 나포선이 그 증거.
반면 한반도는 동쪽, 서쪽, 남쪽이 모두 바다이기 때문에 북한이 우회하여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해상으로 침투하기에는 북한 해군은 미국은 고사하고 대한민국 해군에게조차 밀리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남한(과 UN군)은 폭이 비교적 좁은 휴전선 만을 주 전선으로 삼을 수 있었다.[33] 오히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릴 때, 인천에 상륙해 반격을 꾀하거나 역으로 남한 쪽에서 북한의 해안 도서를 점령해[34] 북파공작원의 근거지로 활용하며 본토에 북파공작원을 파견, 게릴라전을 펼칠 정도였으며, 남쪽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빨치산은 지원이 거의 끊겨버리는 바람에[35]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에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죄다 말라 죽어버렸다. 그래서 2020년대에 북한은 공작원 보내는 횟수는 적어졌으나 IT 기업에 취업하는 형식으로 기밀을 빼내려는 횟수가 증가하고 있다.
4.1. 미군이 해상 포위전을 벌였다면?
사실 미군이 북위 17도선 북쪽으로 대규모 지상전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두고 전쟁을 펼쳤기에 베트남의 지리 조건은 한반도와 달리 북베트남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되었지만 안 그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과 공산 진영을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능력, 즉 해군력을 한국전에서처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다면 말이다.2년 4개월 동안 일방적으로 포위전을 당하면서 지속적인 함포사격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교통 중심지로써의 역할이 심각하게 저하되었으며 항구 기능은 아예 마비된 원산시와, 몇 차례 공습을 받긴 했어도 도시 자체 기능이 마비된 적은 없는 하이퐁시를 비교하면, 오히려 원산보다 하이퐁이 더 포위전에 취약한 지리적 조건을 가졌다.
원산만 내부 섬들 중 원산 포위전 당시 한국군과 UN군이 점령했던 7개의 섬의 지리조건을 살펴보면, 그 중 6개는 관측반이 포격유도를 해 줄 수 있는 관측소 역할을 해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협소했고, 그나마 커서 포위전 사령부를 설치할 수 있던 여도도 고작 비상활주로 하나를 설치할 공간이 나올 정도로 협소했다. 여도의 면적은 고작 6제곱킬로미터 정도, 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포격은 원산만에 주둔한 미 해군 함선들, 특히 구축함들이 주로 담당했고 7개의 섬 자체에는 야포가 배치되지 않았다.
반면 하이퐁 앞바다의 하롱베이에서 가장 큰 섬인 깟바 섬의 경우, 면적부터가 354제곱킬로미터로, 1958년에 중공군이 그토록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진먼 섬의 두 배가 넘는다. 게다가 섬 서부의 약간의 저지대를 제외하면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진 덕에 섬 자체가 관측소로써의 기능을 하기도 적합하기 때문에,[36] 만약 미군이 한국전쟁 때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반도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했듯이 깟바 섬을 점령해놓고 진먼 섬처럼 남베트남군이 주둔할 요새를 건설했다면 해군력이 없다시피했던 북베트남이 여길 탈환하는 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깟바 섬은 하이퐁 코앞에 있어서 155mm급 곡사포만으로도 하이퐁의 항구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60년대 말~70년대 초에 화포의 사거리가 늘어나고 있던 탓에[37] 하이퐁 시 영역 전체가 위험 범위 내였을 것이다. 하노이까지의 거리도 고작 110km밖에 안 되는 탓에 잘못하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이 하노이를 타격하는 비용까지 크게 줄여줄 수 있을법한[38] 원산만의 섬들처럼 남베트남 영토가 된다면 북베트남 입장에선 엄청나게 위협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결국 '하이퐁 포위전'이 실제로 시행되는 건 무리였을 가능성도 높은데, 미군이 북베트남 지역에 지상군을 투입한다면 중국이 개입할 것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상륙작전에 필요한 압도적인 화력은 미 해공군이 해 줄 수 있을 지 몰라도, 상륙작전 자체는 남베트남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상륙작전이 시행되는 게 그나마 가능했을 법한 시기인 1969년에는 남베트남 해병대 병력이 고작 9300명에 불과했다. 물론 상륙전은 해병대 병력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긴 하지만[39] 상륙작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남베트남 육군은 전투력에서 신뢰받을 만한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이 함정이다(...).
5. 간첩 문제
남베트남 정권 자체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지지는 사라지고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북베트남은 이를 기회로 보고 수많은 간첩들을 침투시켜 사회혼란을 부추겼다.대통령 비서실장과 법무부 장관,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드러난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內)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진행된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만 지나면 통째로 입수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에 공산 간첩들이 대대적으로 침투해 있었다. [40]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2위 득표를 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張廷裕)는 선거 유세에서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반미(反美), 반전(反戰)을 선동했다. 변호사 출신인 쭝딘주는 용공(容共)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자 “나는 용공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며 진실한 불교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세 때마다 “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라면서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개표 결과 그는 17.3%의 지지를 얻어 2위를 얻었다. 그의 아들은 사회주의 베트남 정부를 위해 외교관으로 복무하다 1978년 공작원 행위가 들통나 추방당했다.
좌익 종교인들은 월남 군인들을 향해 “동족인 월맹군을 향해 총을 쏘지 말고, 미군을 향해 쏘라”고 선동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지꽝 승려 등 종교인들은 ‘구국(救國) 평화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이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이대용 전 주월공사는 “월남은 월맹에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들에 망하고, 데모에 망하고, 부정부패에 망했다”고 술회했다. # 남베트남에 침투한 간첩들은 '민주주의가 망할 때까지 민주주의를 외쳐라'는 이이제이 전략을 가장 잘 수행했는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던 판칵투 신부는 외세와 결탁한 티우 정권과 미군을 몰아내자며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했다. 당시 남베트남은 막 독립된 혼란기였던 것도 모자라 뿌리부터가 대단히 불안정했고, 설상가상으로 공산주의 물결이 전세계를 휩쓸던 시절이었기에 '간첩'에 버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런 환경을 만들어준게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였고 실제로 간첩에게 돈을 받고 무기나 기밀을 넘기거나 현상금 삐라를 제작하고 뿌려대는데 동참하기까지 했다.[41]
6. 외부 문제
1970년대 미국의 경제난과 뒤이어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습하느라 미국은 휴전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습해야 하는 탓에 미국은 휴전 후 신경쓸 여력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제럴드 포드가 부통령이 된 지 얼마 안되어 대통령직에 올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개입하기 어려웠다.7. 한국과의 비교
한국의 상황을 남베트남에 비교하는 것은 꽤나 오래된 주장이다. 이는 한반도와 베트남 두 지역 모두 식민 제국에 의한 식민통치를 겪었고 독립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착안해서 나온 주장으로 극우들은 물론, 좌파들도 자주 언급한다. 일반적인 우익들은 남베트남이 간첩의 공작과 종북의 국론 분열 조장으로 망했다고 하는 반면, 좌파들은 남베트남은 친불파가 장악한 정통성 없는 국가이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의 속국이었던 것처럼 친일파가 장악한 한국 역시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였고 부정부패과 방산비리를 언급하며 남베트남과 비교를 한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엔 정부와 언론 등지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월남 꼴 날지 모른다"고 주구장창 언급했다.[42]일단 차이점을 몇 가지 말하자면, 대한제국이 이미 진작에 망해 굳이 계승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북한이 정통성에서 우월한 입장이 아니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43] 적어도 대한민국 정부는 총선거를 실시한 한반도 38선 이남 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완전히 인정받았다. 김일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 전쟁을 일으켰지만,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남침을 함으로써 스스로 '침략에 대한 방어'라는 확고한 반격 명분을 대한민국과 미국에게 넘겨줬다. 그 결과는 UN군의 반격이었으며, 북한을 응징하자는데 서방 각국과 반공주의 국가들의 동의는 확고하게 되었다. 반면 베트남 전쟁의 경우, 6.25 전쟁에 비해 반공주의 진영 국가들의 참전 명분이 희박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통킹만 사건의 경우 미국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논란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고, 국호에서도 볼 수 있듯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그대로 계승했으며 수도인 서울 자체도 500년 조선 왕조의 수도란 정통성과 그에 걸맞은 실질적 인프라가 있었고[44][45], 국민의 국가에 대한 공감도 남베트남과 달리 있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제헌 국회를 통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고, 이 점은 절대적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권이 악명높긴 했지만, 응오딘지엠처럼 다른 반공 독립운동가들이 자기 정권에 위협이 될까봐 다 쓸어버리지는 않았기에 독립운동가들은 정권 내부건, 야당 세력으로건 온존이 가능했다. 국과장급 공무원과 경찰조직 및 육해공군의 장교단에서 일본 제국과 만주국의 문관과 무관으로 일한 경력자들을 그대로 고용했다는 약점은 있으나[46] 남베트남과 달리 최소한 국가 지도층은 대부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47] 이승만 본인도 남들을 욕할 때 종북몰이만큼이나 친일몰이도 자주 한 사람이었다.
또한 대한민국 주민들은 남한 내 좌익세력의 분란으로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진 데다가 농지개혁 시행으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이 대한민국 정부에게 충성할 명분을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북한이 6.25 전쟁이라는 화려한 자폭을 저지르면서 결정타를 날렸다. 여기에 그렇게 넘어온 북한 인민군이 대한민국 정부보다 국민들에게 더 잘 해줬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나눠준 것까지는 모르겠는데[48] 북쪽에서 하던 짓을 반복해서 농작물 수확의 27% 밭작물 수확의 25%를 바칠 것을 강요했다. 농지개혁법으로 인해서 연 30%를 5년간 납부해야 하니 당장 보면 차라리 전자가 나아보인다. 하지만 후자는 딱 5년만 총합 150%만 바치면 끝 그걸로 내 땅이 되는 건데 전자의 경우는 세금 형태이다 보니까 그 짓을 언제까지 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북쪽에서는 더해서 50%가 넘는 세율을 거두었다. 그걸 몰랐건 알건 간에 사람들 눈에 보면 30% 5년간 내기 VS 25~27%씩 (그리고 북한 기준으로 보면 이후 50%씩) 영원히 내기인데[49] 그중에서 전자를 택하는 게 당연하다.
호찌민과 베트민 세력을 북한의 김일성 세력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호찌민 및 베트민도 사실 그렇게 떳떳한 독립운동 세력이라고는 볼 수 없었으나, 일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세력을 키운 결과 40년대쯤에는 북베트남을 대부분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서 김일성 세력보다는 기반이 확고했다.[50][51]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팔아넘긴 이후로 항불-항일로 전향하고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호찌민의 베트민은 북베트남에서만큼은 확고한 집권 세력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비공산주의 계열 세력들을 상대로 비겁한 배신과 테러를 저지르면서 베트민 역시 상당 부분 명분을 잃게 되긴 했지만. 보천보 전투와 같은 소규모 유격전을 과대 선전하고 소련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무력으로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김일성과는 그 위치부터가 달랐다.[52] 진짜 문제는 그나마 있던 베트남의 반공 민족주의 독립운동 진영이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한 1930년 옌바이 봉기[53]가 실패하면서 중국으로 모조리 쫓겨나고 이후 북베트남에서 공산당을 견제할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는 것으로, 이로써 한반도와 달리 베트남에서는 반공 독립운동세력은 거의 남쪽의 종교계 세력밖에는 남지 않았고, 이들 역시 베트남 공화국 설립 이후로 응오딘지엠의 독재와 종교탄압으로 쓸려나갔다. 북베트남의 정통성에서 가장 큰 약점은 자신들보다도 독립운동에서 유서가 깊던 불교를 포함한 토착 종교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다가 먼저 배신해서 도덕적인 우위를 상실했다는 점이지만, 곧이어 남베트남의 집권 세력도 자신들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서(...) 그 문제는 해소되었다.
국제적인 합법성 면에서도 북한보다는 대한민국이 훨씬 유리했다. 지리적으로도 수도 서울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한국위원단이 제안한 남북 총선거를 조선로동당과 소련 군정이 거부하여 어쩔 수 없이 선거가 가능한 38선 이남 지역에서 총선거를 하여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설립된 정부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처럼 베트남도 일단 분단되었다가 총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했는데, 한반도와 달리 베트남은 오히려 남쪽이 총선거를 거부했다. 총선거를 하면 호찌민과 베트남 공산당이 이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54] 그러나 국제적인 합법성과 별개로, 개요 문단에서 상술했듯이 남베트남의 국민들을 상대로 이 총선거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국제사회에 대한 정통성까지 확보한 한국보다 남베트남이 딸려 보이는 건 사실이나, 북베트남을 상대로 밀리기 시작한 건 이게 주된 원인은 아니다.
남베트남은 종교 정책에서조차 병크를 저질렀다. 이승만 같은 경우는 친 개신교 정책을 취하긴 했어도 최소한 자기 주변 인사들을 개신교도로만 뽑지는 않았고 친 개신교랍시고 불교, 가톨릭, 토속종교 등을 눈에 띄게 탄압하지도 않았다.[55] 베트남의 경우 가톨릭은 식민지배자의 종교였지만[56], 한반도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은 일제 지배자들과의 연결고리가 약했고 오히려 베트남에서의 가톨릭의 지위를 가진 종교는 일본의 주요 종교였던 불교[57]와 신토[58]였다. 기독교는 오히려 식민지 이전에는 국권수호를 위한 문명개화의 상징이었고 식민지 시기에는 애국계몽과 항일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우방국의 종교이자 한국형 기복신앙으로서 세가 계속 늘어났다.
지리적으로도 한반도는 양쪽이 바다라 간첩 세력의 지속적인 보급이 불가능하다. 무장공비들이 침투했는데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모두 전멸한 이유가 이것이다. 반면 북베트남은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정치적 혼란을 겪는 와중에 국경 지대에 있는 정글들을 통해 지속적인 물자보급을 이룰 수 있었다. 남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와의 국경이 제2, 제3의 전선 역할을 한 것이다. 미군과 한국군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음에도 남베트남이 패망한 이유 중 하나가 긴 국경의 문제였다.
지리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극우파들이 그러는 것처럼, 현재 한국 대중들의 의식을 남베트남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 역시 무리다. 우선 국민들이 가지는 인식과 지식 등에서도 차이가 난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비해 최소한의 비교우위를 갖춘 현실사회주의 체제였던 반면, 현재의 북한은 남한에 비해 표면상으로는 별다른 비교우위를 갖추지 못한 막장 국가인데다가 제대로 된 현실사회주의 체제도 아니다. 따라서 남베트남 대중들 가운데 아무리 봐도 외부 열강의 간택으로 정권 잡는 몇몇 유력 군부, 정치 가문들이 자기들끼리 대놓고 총칼로 싸우는 판에 자본주의고 뭐고 할 기본적인 정치적 안정과 치안, 보호도 제공하지 못하는 남베트남에 비해서야 일단 동포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도 억압적이지만 적어도 제대로된 국가 기강은 확실히 잡힌 북베트남식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차라리 더 낫다고 여겨 북베트남을 지지하고 북베트남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많았다.(물론 멀쩡히 돌아가는 상점이나 공장에 폭탄테러를 한 것도 수차례지만) 반면 남한의 대중들 가운데 북한 체제,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가 더 낫다고 여겨 북한의 편을 드는 사람은 종북주의자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더군다나 일반적으로 한국 국민들의 북한 정권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매우 좋지 않다. 북한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은 언젠가 평화적으로 합쳐질 통일의 대상이고 북한 주민들에게는 한민족이라는 생각으로 우호적일 수는 있으나 독재와 압제를 일삼는 북한 '정권'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는 국민은 주체사상파 계열 NL과 반서방 성향 인사들,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이 아닌 이상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든 뭐든 그 어떤 단체를 가장한 국내 반정부 세력이 북한 정권을 위해 변호와 옹호를 해도 오히려 그들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될 뿐이고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옭아맬 뿐이다.
한국을 남베트남과 비교하면서, 남남 갈등과 같은 국론 분열이 언급될 때마다 "남베트남처럼 한국도 국론 분열로 멸망한다!"는 소리도 나오는데 위에서도 설명하였듯이 남베트남은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패망한 것이다. 특히 그중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응오딘지엠이 국론 통합이랍시고 야당 세력들을 깡그리 탄압하고 측근 정치만 한 것이니 오히려 국론 분열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비판점이 있는데, 내부의 적을 조심하자는 취지는 좋았어도, 아무나 남남갈등과 국론 분열 딱지를 붙여대면 여론의 반응이 좋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한국을 남베트남에 비교할 때 방산비리와 부정부패를 걸고 넘어지며 안보팔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방산비리 큰 원인은 똥별들이 떼어먹는 문제보다 나라까지 반토막난 상황인데 주변국이 북한 빼고 깡패급인 환경과 제한된 시간과 상황에서 꼭 필요한 무기사업, 첨단장비를 개발 혹은 얻기 위해서 강행하거나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기간으로 인한 여러가지 원인이 더 크다(...). 북한이 한국을 훨씬 능가하는 썩어빠진 국가임을 망각하고 있으며,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에 나온 것처럼, 북한군 내부는 대한민국, 아니 남베트남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비리와 부조리가 가득한 군집단이다. 북한 자체가 뇌물로 나라가 돌아간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부패가 심각하다.
거기다가 현 한국의 부정부패를 남베트남에 비유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남베트남은 관료들이 적에게 무기 팔아 넘길 정도로 썩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적어도 북한에게 무기를 팔아줄 정도로 썩진 않았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았던 군사독재 정권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민주화와 남북 대화의 분위기를 마련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북한 정권과 국내의 그 동조세력을 경계하고 있다. 국가의 존립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즉시 국가보안법을 동원하여 잡아들인다.
대한민국 국군은 베트남 공화국군과는 태생 자체가 다르다. 일제강점기 한반도는 일본군의 일부인 조선군만 존재했으며, 이들은 일본제국 패망 직후 모두 철수했다. 당시 한국에는 주 구성원이 한국인이었던 군사조직이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초창기의 대한민국 국군은 비록 일본군 출신이 많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48년에 창설된 완전한 신규 조직이고, 그 수뇌부에도 이범석, 김홍일 같은 독립운동가 장군들이 들어와서 군대 자체의 정통성도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었다.
반면 베트남 공화국군은 55년 건국 당시에도 신규 조직이 아니었다. 전신인 베트남국의 베트남 국군이 간판을 바꿔 단 것이 근원이다. 친불 성향이 강한 참모총장 응우옌반힌과 응우옌반비가 해임되긴 했으나, 응오딘지엠은 반항적인 수뇌부가 제거된 뒤로 추가적인 숙군이나 개혁을 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이범석이나 김홍일에 해당할 법한 반공 독립운동가 장군들은 군 수뇌부 편입을 약속받았으나 곧 응오딘지엠에게 배신을 당하고 숙청되었기에 수뇌부의 구성성분 변화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교진은 응오딘지엠의 독재적 성향 때문에 능력보다는 충성심 위주로 등용되어 하급 간부들의 인재풀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베트남 공화국군의 실체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식민 부역정부의 군대였던 베트남 국군 그 자체였다.
패망의 길을 걸은 남베트남군의 상황은 구태여 따지자면 한국군보다는 북한군에 가깝다. 정규군 57만, 민병대 포함 총 140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던 남베트남군은 정규군과 베트콩 포함 약 108만 수준이었던 북베트남을 수적으로 압도했으며 미군으로부터도 막대한 최신 장비를 인수받았지만, 정작 이들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러한 수적 우세는 전혀 살릴 수 없었다. 수적으로도 한국군을 압도했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최신무기를 제공받은 그 당시의 북한군과 빼닮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뇌물에 휘둘리고 군 장비를 마구 팔아먹는 모습, 체제 유지에 전전긍긍하며 군 수뇌부를 정치놀음에 개입시키는 남베트남군의 모습은 한국군보다는 북한군에게서 찾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른바 베트남전의 교훈을 부르짖는 이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기본적으로 간첩 문제에서 한국과 남베트남은 차이점이 많다. 간첩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남베트남 수뇌부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이 원인임을 감안하면, 간첩 문제는 남베트남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단 부가적인 요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정부패와 쿠데타로 정치적 혼란이 잦았으니,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었던 한국과 달리 남베트남은 부정부패와 빈약한 정치적 근간에 더불어 북베트남에서 남파된 간첩들이 조장하는 사회적 혼란까지 덮쳐 간첩과 이적세력을 소탕할 능력이 전무한 상황이였다.
또한 한국의 경우에는 6.25 전쟁이라는 본격적인 전면전이 발발하고 초반에 수도가 함락되는 등 패전의 기미가 농후해지면서 남로당과 정재계 및 군부에서 암약하던 제5열이 대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었고 이후 국군의 북진 과정에서는 일반 주민들 중 북한의 잠재적 동조세력들이 북으로 대거 피난하거나 숙청되었기 때문에[59] 월남에 비해서는 훨씬 안정된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이 경제나 사회 신뢰도나 안보나 여러모로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나아서 남베트남처럼 망할 가능성이 없어졌다. 오히려 과거 남베트남과 매우 유사한 국가는 위에서도 강조했다시피 북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최고지도자라는 김정은 본인부터가 부정부패와 사치에 손을 대면서 국고를 파탄내고 있고 고위 간부들과 보위부, 북한군과 같은 주요 기관들도 부패가 판을 치고 있다. 그 결과 북한 체제를 옹위해야 할 보위부가 탈북자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눈을 감아준다던지 북한군이 주요 무기나 한미연합군의 공습으로부터 포대를 지켜줄 갱도 포문까지 횡령하는 꼬라지가 터져나오고 있을 지경이다. 북한 사회 전체가 뇌물로 돌아가다보니 당연히 북한의 주요 시스템들이 제대로 돌아갈리는 없고 일반 북한 주민들은 아예 장마당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사실상 북한 체제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북한은 남베트남과 같은 막장화를 걷고 있기 때문에 유일한 체제 지탱 수단인 핵무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1]
훗날의 근로인위혁명당.
[2]
Nu-Anh Tran 교수에 따르면, 까오다이교의 전신격 종교들은 왕당파 독립운동가의 지지자들이었다.
[3]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와 종교는 양립할 수 없으니 종교를 끌어들이면 반공의 명분이 강해진다.
[4]
사실 초기에 응오딘지엠에게 협조적이었던 혁명위는 응오딘지엠이 먼저 배신하기 전까지는 정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5]
또한
베트민에 몸 담은 적이 있다는 경력상의 약점도 있었다.
[6]
그리고 마침 이때는 응오딘지엠이 비교적 상식적으로 통치를 하고 있어서 이들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7]
베트남은
1992년 헌법을 개정하고서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
[8]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고려말 40년 간에 걸친
여몽전쟁을 거치면서 민족 의식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가 통일된 직후에도 삼국 유민 의식이 남아있어서 고려 중기 때는 신라나 고구려, 백제 등 삼국 부흥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신라에 비해서
삼한일통 의식이 발달하였기에
후삼국시대와 같은 재분열로 비화되지 않았다.
[9]
오죽하면 분단 직후까지 우파의 세력은 북한 땅이 된 평양이 있는 평안도에서, 좌파의 세력은 남한 땅인 경상도에서 강했을 정도이다.
[10]
일례로 조선시대 지방에서 터진 대규모 반란인
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난,
홍경래의 난 등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중앙정부를 갈아엎거나 중앙정부에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정도였지 자신들이 한성 조정에 대항하여 지방 독립운동을 벌이려던 게 아니었다. 특히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은 조선의 통치체계가 완성되기도 전인 1400년대 초중반인데도 이랬다. 홍경래의 난에서는 평안도 상인
임상옥이 진압군을 지원하거나, 홍경래의 세력조차 아예 남한 땅 곳곳이 환난을 피할 길지고, 충남
계룡산에 새 나라가 세워진다는 책인
정감록을 중요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11]
여담으로 한국에서 베트남인하면 먼저 떠오르는 동남아시아인 외모를 가진 베트남인의 경우, 킨족 주도의 문화적 동화 정책으로 킨족화 된 참족과 크메르족의 후손들이며 북베트남의 베트남인의 경우 중국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한족에 의해 축출되어 인도차이나로 밀려난 킨족이 기원이라 외모는 동남아시아인보다 동아시아인에 더 가까운 편이다.
[12]
김일성은 사실상 패전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그 책임을 반대파에게 뒤집어씌워 국내파와 연안파, 소련파를 줄줄이 숙청하고 1인지배체제를 다지는 데 성공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은 집권 초기 마오쩌둥의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3]
한반도의 경우 분단 초기에야 북한 지역이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공업 인프라와 천연자원 등으로 부유했지만, 남한의 일본과 미국의 자본을 들여올 수 있는 자유 시장 경제 체제 도입으로 60년대부터 이미 농업 생산력에 기대는 것조차 비효율적일 정도로 발전했다. 사실 한반도 북부부터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역으로 발전하던 곳이었는데, 지나친 권력욕으로 이것마저 당 중앙이 통제하고 금지하려고 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4]
민간에서는
왕정복고 목소리도 있긴 했지만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는 철저히 씹혔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목표는 어디까지나 공화국이었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경우 집권 기간 동안
이왕가 구성원의 입국을 금지시켰고 더 나아가 무국적자 상태로 만들었다.
[15]
남한으로 치면 2차 대전 이후에도
야인시대 2부 초반의 총 들고 설치던 주먹패들이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아예 군벌로 진화해
1950년대 중반까지도 정부의 통제를 안 받고 설치고 있는 상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울 경찰은 이정재에게 장악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다
김두한과 그의 부하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6]
물론 이것마저도 응오딘지엠의 통치가 길어지면서 남베트남군의 막장화가 심해져 의미가 없어진다.
[17]
근데 이 신임 참모총장 응우옌반비도 제대로 된 인물은 아니고 군 내 친불파에다가 이후 군사정권 시대에는 이 권력자 저 권력자에게 들러붙으며 비리를 저질렀다. 차라리 혁명위 장군들이 훨씬 나은 인물들이다. 단순히 국가원수의 통수권이 제약당했다는 점만으로도 문제인데 그 제약의 원인이 국가원수가 대놓고 인사 트롤링을 저질러서 군벌 지도자들이 문제를 수습해야 할 정도였으니 설상가상이었다.
[18]
즉 지엠의 독립운동 경력은 남베트남 정부의 정통성을 보완해주는 게 아니라, 하필 '침략자'의 종교인 카톨릭 신자였던 점까지 더해져 오히려 '매국노들과 결탁한 변절자'로 까이는 용도가 되었다.
[19]
남한에서 이승만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공격받았지만, 여긴 개신교가 이미 사회 주류에 자리잡았고 애초에 개신교는 프랑스라면 모를까 일본의 전통과는 아예 무관한 종교였고 북한이 대놓고 침략자 포지션을 잡아주면서 오히려 이승만을 구원해주었다.
[20]
한국에서도 민족해방 계열
운동권에서
미국을 해방군보다는
일본의 대체자 포지션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고 미군정의 삽질과
1900년대 당시 포츠머스 조약, 가쓰라 태프트 밀약 등 일본의 조선에 대한 국권 피탈을 방조한 사례들을 적극 부각시키며 이런 이미지를 만들려 시도하긴 하지만, 이쪽은 이미
카이로 선언이나
포츠담 선언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명확히 보장하기도 했고, 당장 당대
여운형 같은 좌파계열들부터가 영미를 조선을 해방시켜줄 구원자로 기대하던 판이었다. 결정적으로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남한에서 좌익 이미지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버렸고,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30대의
김일성은
가짜설이 수십년간 풍미했을 정도로
호치민에 비하면 중량감이 확 떨어졌다.
[21]
그러나 이들이 일반적인 정치세력이 아닌 '군벌'이라는 한계점은 여전했다.
[22]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영어를 못 한다고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무시하다시피 했다고 비판받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반대로 50년대 중반 베트남에서의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 이외에도 찐민테라는 '제3의 길'을 가는 군벌과 친분을 맺은 행동은 충분히 현명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때 미국이나 남베트남이나 정말 재수가 더럽게 없었다.
[23]
다만 이쪽 군사들은 만약 리엔민이 멀쩡했다면 리엔민 쪽으로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종교도 같으니.
[24]
이러한 사리사욕은 청나라 시절에 있었던 일이고 청일전쟁이 터지자 그 결과가 나온 셈.
[25]
국제연맹이 사실상 그 수명을 다한 것이
만주사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등을 막지 못했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UN이 세운 국가인 대한민국이 멸망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생 UN을 폭파시킬 수도 있는 문제였다.
[26]
미국은 애초부터 소련이 안보리에서 한국 지원에 거부권을 행사하면 '평화와 화합'이라는 특수조항을 발동해 총회로 넘겨 표 숫자로 압살해버릴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소련 입장에서도 그나마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확실한 지분과 기득권을 챙길 수 있는 UN이라는 틀을 함부로 무너뜨릴수도 없었다. 그 전의 국제연맹에서는 1934년까지 15년간 가입 자체를 불허당했었고, UN 폭파시키고 동서방이 따로 국제기구 차린다고 하면 미영불을 주축으로 추축3국인 서독, 일본, 이탈리아에게 적국조항의 멍에를 풀어주고 본격적으로 재무장을 허가해줄 수 있는 서방과 달리 소련은 딱히 쓸만한 강대국 친구가 없이 혼자 모든 걸 떠안아야 할 판이었다. 그나마 있는 중공과의 관계도 썩 좋은 편은 아니라....
[27]
단순히 반전시위하는 민간인들만 그랬던 게 아니라 가렛 포터처럼 소위 학자라는 작자가 자료 조작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베트콩을 옹호하는 일도 있었다.
[28]
베트남 전쟁 후기에는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활동하던 게릴라들이 남베트남 정부군과 미군에 의해 전멸하면서 베트콩의 구성원 상당수는 북베트남에서 남파시킨 북베트남 출신 정규군과 공산당원으로 대체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수뇌부가 전부 순수 북베트남 출신 공산당원인 것은 아니며 그 중에서 베트남이 분단되기 전에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북베트남으로 넘어가서 그 곳에서 정치적 입지를 만든 뒤 남베트남으로 재남파한 남베트남 출신 공산당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전 시점에서 남베트남 출신자들은 4개 사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물론 이들은 해체되어 북베트남군에 흡수되었다.
[29]
남한 내에서 활동했던 조선인민유격대 구성원의 대다수가
남로당 출신이었다.
[30]
이쪽은 러시아와 벨라루스 국경이 지리적으로 맞댈지언정 동유럽 대다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물론 북유럽 3국도 서유럽 쪽으로 경유해서 우크라이나에 지원해 주면 그만이며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서유럽 국가들이 지원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운이 나쁜 쪽은 러시아에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조.
[31]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라오스와
캄보디아 동부 일대는 공산 반군 지배하에 있던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왕
시아누크는 은근히 그들을 돕기까지 했다.
[32]
이것이 베트남의 역대 왕조들이 서쪽
라오스로 확장하는 것을 자제하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확장한 이유이다.
[33]
국군 및 UN군이 북진할 당시에는 폭이 좁은 한반도 중남부와 달리
청천강-
함흥시 축선 이북으로는 동서 방면으로 크게 길어지면서 방어해야 할 전선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중공군에게 공세를 허용하는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34]
휴전 당시 북한 지방의 수많은 섬들이 남한 점령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북한의 해상 이용에 심각한 위협을 끼칠 수 있었다. 다만 휴전에 북한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도 있었고 추후 계속적인 군사적 충돌 및 그에 따른 각종 비용에 대한 우려로 휴전 협정 때 모두 북한에 반환포기하였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서해 5도와 같이 남아있는 지역도 있는데 여긴 원래부터 38선 이남지역이었다.
[35]
지리상 문제로 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북한
김일성 정권은
일부러 빨치산을 버렸다. 휴전협상 당시에 남한 측에서 "제발 좀 빨치산 데려가라"고 했는데 오히려 북한 측에서 무시해버렸으니. 전쟁을 전후한 남한 내 빨치산들은 북한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며,
탈북자들 경우 오히려 남쪽에 와서야 빨치산 이야기를 알았다고 한다.
[36]
이 때문에 섬 동부에 일본군이 해안포 요새를 하나 설치했는데, 지금은 관광지로
기능하고 있다.
[37]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분의 영향력이 컸다. 불 박사 자신도 북베트남 해안가들을 포격하는 함포들의 개량에 깊게 참여했기도 하고 말이다.
[38]
당장 당시 현역이던
MGM-52 랜스 미사일 사거리 내다.
[39]
인천 상륙 작전에는 미 해병대 1개 사단 외에도
육군 7개 사단이 추가로 동원되었다.
[40]
주월국군사령관을 지냈던
채명신 장군의 경험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장성들이 함께 모여서 진행하는 작전회의는 거의 100%로 북베트남 측에 흘러들어갔기에 미군과 연합군 장성들은 남베트남군 장성이 합석했을 때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내용만을 이야기하고 남베트남 장성이 돌아가면 그때 다시 모여서 진짜 작전회의를 개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것을 처음 경험한 채명신 장군은 '우리가 정말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구나.' 라고 하면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한다.
[41]
실제로 이놈 죽이면 현상금 준다며 미군이나 한국군, 남베트남군, 호주군을 비롯한 미국 주도 국제연합군 장교들의 사진과 신상정보들을 영어나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쓰여진 삐라가 부대 내에 나돌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근데 이걸 일부 남베트남 병사나 장교들이 돈 받고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뿌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42]
1980년 5월 <
대한뉴스> '안정만이 살길'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
2:28 ~ 3:27)
[43]
2024년에는 북한이 통일정책(정확히는 남북한 합의하의 통일)을 포기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고 한국을 적대국으로 선언하자 한국이 북한을 반민족적인 형태라고 트집을 잡을 구실만 주게 되고, 한반도 정통성만 한국으로 확고해시고 있다.
[44]
그리고 서울은
온조왕 때부터
개로왕 때까지 백제 왕조의 수도였으며
고려 시대에도
숙종 때 서울로 천도할 계획이 있었다.
[45]
해방 직후 한반도의 교통로는 남이든 북이든 서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구조였다. 분단 이후 북한이 시행한 정책 중 하나가 서울 방향으로 뻗은 북한 내 교통로를 평양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46]
경찰에 친일 인물이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독립운동가 출신이 아예 없진 않았다. 수가 매우 적었을 뿐. 대표적으로
차일혁,
최능진,
문형순 등이 있다.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은 일단 독립운동가 출신 지식인이긴 했지만 그는
4.3 사건 강경 진압을 지시해서 큰 오명을 남겼다.
[47]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에서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윤치영 초대 내무부장관 정도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거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48]
심지어 이조차 기존의 농지개혁법으로 인해서 반응이 밍숭맹숭했다.
[49]
북한은 나중에 세금을 폐지했지만 그때는 땅이고 뭐고 개인의 소유가 없어졌다.
[50]
40년대에는 완전장악은 아니다. 북베트남에서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국민당부터가 55년에야 사이공으로 옮겨간다.
[51]
사실 도덕성이나 정통성 측면에서는 이쪽도 잘한 건 하나도 없었다. 옌바이 봉기 이후로 그나마 잔존한 국민당 세력 등을 포함한 민족주의 세력을 프랑스에 대한 부역으로 팔아넘긴 작자들이었으니. 김일성도 이런 짓은 안했다.
[52]
오히려 남쪽에서 활동하다가 넘어온
박헌영이
호찌민에 비길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했다. 실제로 대중들에게 지지도 많이 받고 있었고... 그러나
소련은 박헌영보다는
김일성을 더 다루기 편하니까 선호했고, 때문에
김일성은 북쪽에서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뻥튀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53]
옌 바이 지역의 프랑스군 병영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 사건. 베트남인 병사들의 호응을 기대했으나 그런 거 없이 결국 국민당 조직 전체가 전멸해버리는 대참사를 야기했다.
[54]
만일 남베트남이 총선거를 받아들였다면 오히려 미국의 징병제는 오랫동안 지속됐을 것이다.
[55]
정부 주도의
불교 정화운동을 벌이는 등, 몇 가지 탄압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면에서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당시 불교계가 조선 왕조의 억불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친일 행적을 보였기 때문. 불교계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를 거치고 나서야 우리가 아는
조계종 중심의 민족불교로 바뀐다.
[56]
프랑스는 세속 국가이기에 공식적인 국교가 없지만 가톨릭이 오랫동안 프랑스의 국교 노릇을 해왔고, 또 식민지배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57]
정확히 말하자면
선종이 일본에서 신불습합을 거치면서 토착화 된 젠(善) 불교.
[58]
그것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변질된
국가신토
[59]
6.25 전쟁 이전 정확히는 1920년대부터 1948년까지의 시기에는 1970년대 이후 우파 계열 정당의 지지 기반에 해당되는 TK지역 중 하나인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의 세가 강했고 8월 종파 사건 이후 주체사상의 발상지가 된 평양의 경우 북한 정권과 소련군정에 의한 탄압으로 기독교도가 절멸하기 전까지는 구한말 당시부터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해 기독교도의 비중이 높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