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 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 8·10 城南(廣州大團地)民權運動 8·10 Seongnam(Gwangju Large Complex)Civil Rights Movement |
|
봉기를 진압하러 간 경찰기동대 대원들[1] |
|
기간 | |
1971년 8월 10일 ~ 8월 12일 | |
장소 | |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 일대[상세] | |
원인 | |
철거이주민의 광주대단지로의 강제 이주 광주대단지의 생계수단 및 기반시설 미비 행정당국의 거액의 토지대금 납부 요구 |
|
결과 | |
서울특별시의 이주민들의 요구 무조건 수용 약속 성남출장소의 성남시 승격[3] |
|
영향 | |
서울 지하철 8호선의 서울특별시 주도 건설 및 여러 교통 혜택 부여[4]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건의안 가결 박정희 정부의 시민 불복종 운동 및 저항 운동 탄압 강화 성남시민들의 반(反)서울 감정 형성 경기동부연합 출현[5] |
[clearfix]
1. 개요
광주대단지 사건( 廣州 大 團 地 事 件)은 1971년 8월 10일 화요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관할 구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중이 공권력에 저항한 사례는 많지만, 광주대단지 사건은 정치적인 사유가 아닌 빈민의 생존권을 비롯한 경제적인 이유로 일어났고, 반정부세력이나 사회 불만 세력이 아닌 평범한 지역 서민들이 주도했으며, 폭력과 약탈을 동반한 적극적인 저항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유사 사례가 드물다. 한편 이 사건은 성남시 출범에도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성남시 역사에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2. 이름
이 사건은 광주광역시나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6]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사건 발생 지역은 현재 성남시의 수정구 및 중원구에 속해 있는데, 사건 당시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7] 중부면[8] 이었고, '광주대단지'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어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기에 광주대단지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오늘날 더이상 광주대단지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고, 행정구역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에 광주대단지 사건의 명칭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됐으며 광주대단지에서 역사가 시작된 성남시에서는 이 사건의 이름을 8.10 성남 항쟁으로 바꾸는 것에 합의했으나( #) 민간에서는 여전히 광주대단지 사건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따라서 성남시에서는 8.10 성남 항쟁이라는 명칭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질 때까지는 광주대단지 항쟁이라는 명칭으로 쓰기로 합의했다.
2021년 6월 10일 성남시에서는 조례 개정을 통해 8·10 성남(광주대단지) 민권운동으로 정식 명칭이 확정됐다. 과거 역사적 명칭을 남길 것인지, 현재 행정구역으로 개칭할지, 이러한 두 문제들 사이에서 둘 다 남기되 성남이라는 현재 지역명을 더 강조하는 일종의 중립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3. 배경
3.1. 서울특별시 무허가 판자촌 정리
이촌향도로 인해 판자촌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 박정희 정부는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 정리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일부는 무허가 주택을 현지 개량해서 양성화하고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어 그쪽으로 이주시킨다는 것이었다. 원래 철거민 이주지로 계획된 곳은 서울 서남부 지역이나 동북부 지역 등 여러 곳이 있지만 거기에 가속을 걸고 좀더 거대한 주거지로 계획된 것이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현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 및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조성되는 10만 명이 살 수 있는 규모의 대단지(광주대단지)와 서울 시내 곳곳에 짓는 시민아파트였다.원래 이주단지 후보로 거론된 곳은 광주군 중부면과 광주군 서부면(현 하남시)과 시흥군(현 광명시 및 안양시)이 있었다. 서부면이나 시흥군 모두 광주대단지에 비하면 최소한 산비탈은 아니었지만 정부는 구태여 중부면의 남한산 기슭에 이주민들을 몰아넣었는데, 그 이유는 농경지 보호였다. 당시 한국의 주산업은 농업이라 농지를 줄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9] 물론 농경지 보호 논리 이외에도 저렴한 조성 원가가 중요한 이유였는데 서울시는 광주대단지 조성에 쓸 돈이 많지 않았고 돈을 많이 쓸 생각도 없었다.
이때 10만여 명이 넘는 빈민층[10]이 살 집을 준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이사를 갔다. 당시 청계천[11]과 서울역[12] 일대에 살던 빈민들에게 '다시는 서울로 이사오지 않겠다.' 는 서약을 받고 이주시켰다고 하니 상황을 알 만하다.
당시 정부가 주민들에게 내걸었던 조건은 다음과 같은데
한 가구당 20평씩 평당 2천원에 분양한다.
입주하고 3년 뒤부터 분할상환하면 된다.
공장을 세워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이에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빈민층들은 너도 나도 신청서를 작성했다. 철거민들은 이불 보따리와 식기 등을 싸들고 서울시가 제공한 트럭에 올랐다.입주하고 3년 뒤부터 분할상환하면 된다.
공장을 세워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이 광주대단지를 담당했던 서울시 직속 기관이 서울특별시 광주대단지사무소였는데, 1969년에 설치되어 1972년에 폐지되었다.
3.2.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당시 거주했던 주민에 따르면 이 곳은 도로 포장도 안 되어 있었고 남한산성 언저리의 산들은 가파른 경사지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에 주민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도착해 보니 주민들은 일제히 "뭐야? 이런 곳에 어떻게 살아?"라는 말을 반복했다.주민들이 주택단지에 도착해 보니 말 그대로 십만 명을 구겨넣을 수 있는 땅만 마련되어 있었다. 정부는 이곳을 자급자족도시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서울 근교에 넓은 대지와 낮은 토지보상비를 고려해 당시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근처로 부지를 마련하고 토지를 측량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갈 곳이 없어진 철거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자 했는데, 당시 정부에서 이주민들을 위한 살림집을 지어 놓은 것이 아니라 가구당 약 60~120m² 남짓한 언덕배기에 금만 그어 놓은 땅바닥과 1가구당 고작 군용 텐트 단 한 개만 지급했다.
그러나 서울시와 정부에서는 땅을 줬으니 집은 알아서 짓고 의식주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태도를 보였다.[13] 기본적인 인프라인 도로와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어서 비가 오면 발목까지 빠지는 진창길이 되기 일쑤였고, 땅이 마르면 그야말로 모래바람에 먼지가 날려댔고 눈이 오면 빙판길이 되었다고 한다. 전문적인 측량을 하고 땅을 분배했기 때문에 당시 자연스럽게 조성된 도시와 다르게 숨막힐 정도로 규칙적인 단독주택 위주 도시 구조가 됐다. 서울시에서는 제대로 측량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이후에 일어날 거대한 사건의 도화선을 만든 셈이 됐다.
또한 이주한 땅의 주변에는 조금이나마 경제적 뒷받침이 될 수 있는 상권이나 업무시설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모란시장 정도가 있었지만, 당시 모란시장은 정말 소규모 면소재지의 5일장일 뿐이어서 10만 명의 대인파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천막촌이 형성됐다.
1970년경의 모습 |
겨울이면 난방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바람만 겨우 막는 천막에서 굶주린 아이들과 실업자들이 한낮에도 이불을 뒤집어 쓰면서 벌벌 떨고 여름이면 그늘 하나 없는 곳에 햇볕만 가린 천막 안에서 파리와 모기를 물리칠 힘도 없어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고 한다. 노천 변소에 있는 오물은 사방으로 넘쳐 빈민촌 전체가 악취로 진동을 했고 결국 쓰레기는 썩어들어가면서 전염병까지 돌았다고 한다. 화장실, 상하수도, 전화 같은 기본적인 시설의 공급도 입주 당시 계획의 20% 이하였다. 생활고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
광주대단지를 기획했던 사람들은 '인구 10만 명만 모아놓으면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고 산다.'는 전제 아래 계획을 추진했다고 한다. '자급자족도시'라는 명목 하에 나온 무계획이었다. 이 논리는 광주대단지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당시 정부는 '일단 10만명을 모아서 뜯어 먹기 시작하면 땅값이 오를 것이고, 그렇게 오른 땅값 차액으로 부족한 시설 구축에 투자하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인프라 부족에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게다가 교통도 열악했다. 10만 이상의 거대한 인구를 밀어넣은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도로도 없었고 강북으로 가는 가까운 다리라곤 고작 광진교 하나 뿐이라서 광주대단지에서 서울 사대문 안으로 가려면 현 위치 기준으로 장지역 부근 - 개롱역 - 서하남IC 입구 - 보훈병원 - 길동사거리 - 광진교 - 광나루로를 거쳐야 했다. 이 코스는 현재의 송파대로- 잠실대교- 천호대로-도심 코스에 비해 크게 돌아가는 것이라서 버스를 이용할 수 없던 당시 한강 이남의 거주민이 강북으로 출퇴근을 하기 위해서 나룻배를 타고 이용해야 했는가 하면[14] 서울로 가는 대중교통이라곤 천호동을 거쳐서 을지로6가까지 가는 서울시영버스 270번 하나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원래 3대뿐이었던 걸 간신히 6대까지 증차시킨 데다[15] 열악한 도로망으로 인해 을지로 6가까지 1시간 30분이나 걸렸고 버스비도 70원이나 나갔기 때문에 빈민들에겐 큰 부담이었다. 당시 9급 공무원 월급이 1만원 미만이었고 2023년 기준 9급 공무원 봉급이 160~180만원 정도이니 단순 기준으로 버스비가 11,200원 포지션인 셈.[16]
이렇게 소외된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생계수단마저 전혀 없었다. 정부가 당초 약속했던 일자리가 되어줄 공장 지역도, 물자 공급을 해 줄 상가도, 그 어떤 주민 편의시설도 전혀 없었다. 교통도 개판이니 다른 지역으로 취업이나 물건을 구하러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몇 시간이나 길바닥에 시간과 비싼 돈을 버려가면서 서울로 출퇴근해야 했고 아침마다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인해 헬게이트가 열렸다.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주민들은 광주대단지에 공장이 생긴다는 말을 믿고 들어온 것인데 여전히 서울로 출퇴근하게 됐으니 졸지에 교통비로 월급의 반절이 날아갈 상황이 됐다.
그 외에도 분명히 빈민층을 위한 주택단지를 목적으로 조성한 곳인데, 투기꾼들은 입주권을 가지고 장사를 해서 전체 입주 가구의 30% 가량이 불법 입주권 판매를 통해 이주한 사람들이었고 그 비중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부동산업자의 말만 믿고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사람들은 난민촌 입장권을 비싼 돈 주고 산 꼴이 되었다. 그리고 1971년 10월 14일 대통령 보고서에 따르면 철거민이 29.8%, 일반 입주자는 49.3%로 오히려 철거민 숫자가 역전됐다.
이렇게 된 것은 원래 입주자인 철거민들이 입주권을 전매했기 때문. 서울 강북의 공장지역에서 일하던 저소득 노동자들이 새로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왔다가 공장은 커녕 교통비만 몇 배로 들게 되자 거주를 포기하고 입주권을 판 뒤 다시 강북의 판자촌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투기꾼들은 그 입주권을 철거민들에게 샀다. 한참 강남(영동) 개발의 영향으로 인해 강남 지역의 땅값이 들썩이고 투기가 판을 치던 시기, 교통이 안 좋아 광주대단지의 사정을 전혀 모르던 내집마련의 꿈을 가진 서민들에게 "조금만 고생하면 광주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 라는 사기를 쳤다. 그로 인해 당시 비교적 싼 값에 투기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부동산 상품처럼 둔갑한 이 입주권을 업자들이 큰 차익을 노리고 팔았으며, 일반 입주자들은 이렇게 유입된 사람들이었다. 정작 입주권 불법 전매를 강하게 단속해야 할 서울시와 정부는 단속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대놓고 사태를 방관하거나 때로는 몰래 부추겼다. 이는 서울시가 광주대단지를 조성해 빈민들을 쫓아내 다시는 서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광주대단지 취재를 갔다가 이러한 현실에 경악하여 1970년 5월 15일자 기사를 통해 이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실상을 고발하기도 했다. 산산이 깨진 「楽園(낙원)의 꿈」 難民(난민)들은 서럽다
3.3. 분노에 차오르는 주민들
백원에 매수한 땅, 만원에 폭리 말라.
살인적인 불하가격, 결사 반대한다.
- 당시 광주대단지 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
살인적인 불하가격, 결사 반대한다.
- 당시 광주대단지 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직후인 1971년 6월에 광주대단지 관할 행정 당국인 경기도청은 주민들에게 토지대금을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발부했는데 그 금액이 처음 약속했던 가격의 최소 4배에서 최대 8배에 달했다. 처음 토지대금은 20평씩 평당 2천 원이라고 약속했지만 나중에 경기도가 청구한 금액은 평당 8천 원 내지 1만 6천 원이었다.[17] 또 이걸 일시불로 내야 했고 7월 말까지 일시불로 내지 않으면 6개월 이하 징역 또는 벌금 30만 원을 부과하겠다는 추신까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가구당 배정된 땅은 20평이였지만 땅의 위치에 따라서 적게는 20만 원에서 많게는 36만 원이었다. 돈이 없어서 이 언덕까지 올라와서 살던 주민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배신감에 크게 분노한 주민들은 7월 19일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 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평당 가격을 1500원 이하로 내릴 것, 10년간 분할상환하게 할 것, 영세민 취로사업을 실시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처럼 주민들은 정부에 자신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리고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울특별시는 청구 최저가격을 평당 8천 원에서 1만 2천 원으로 되려 올려 버렸고 내무부, 서울특별시, 경기도 모두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토지대금이 비싸진 것은 투기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6343가구의 전매 입주자가 정착했다는 통계가 나오자 이 통계에 따라 평당 8천 원에서 1만 6천 원에 이르는 가격으로 뻥튀기하여 청구했다. 이 대금을 2년 거치 3년 상환토록 했으나 막상 통보서에는 땅값을 일시불로 내게 한 것도 모자라 취득세, 재산세 등 각종 조세를 부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2년 거치 3년 상환이었던 이유도 대부분 주민들이 실업자였기 때문이었다. 6343가구 입주자들의 대부분이 토지대금 납부는커녕 생계 유지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주민들의 감정은 서서히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대책위원회는 투쟁위원회가 됐고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의 날로 정해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 주민 전체가 결의했다.
4. 투쟁 과정
4.1. 최후 결단의 날
"우리의 대변자 국회는 잠자는가?"라는 현수막을 펼치고 경찰과 대치 중인 광주대단지 주민들.[18] |
먼저 움직인 쪽은 철거민이 아니라 일반 입주자들이었다. 철거민들의 목소리보다 일반 입주자들의 목소리가 더욱이 더 힘이 될 거라고 본 철거민들도 이에 동의해 1971년 7월 17일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 대책위원회>가 출범했고 7월 19일에는 유지대회를 열어 대표 33명을 선출했다.
이들은 평당 가격을 1천 5백원으로 내리고 10년간 분할 상환, 영세민 취로사업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으나 오치성 내무부장관, 양택식 서울특별시장, 김태경 경기도지사 그 누구도 대책위원회의 요구에 답을 주지 않았다. 결국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바꾸고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의 날'로 정해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8월 3일 마침내 세금 고지서가 집집마다 날아들면서 주민들이 폭발했다.
화요일이었던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성남출장소[19] 뒷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몽둥이, 삽, 피켓 등을 들었으며 가슴에는 "허울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라고 적힌 노란색 리본을 달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특별시장과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답이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5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주민들은 "배가 고파 못 살겠다! 토지 불하가격 내려달라!", "백원에 산 땅 만원에 파는 폭리를 하지 말아라!" 하고 거대한 함성을 냈지만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했다.
성남출장소 앞에 집결하여 세금 감면, 분양가 인하, 공장과 상업시설 설치, 취업센터 설치, 구호사업, 취역장 알선 등 정부가 애초에 한 약속을 이행하거나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해 달라고 요구하고 <배가 고파 못살겠다>, <일자리를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당시 서울특별시장 양택식과 면담 약속을 받아냈다. 사실 그로부터 한 달 전부터 대책위원회가 끈질기게 요구해서 정부 측에서 서울특별시장과의 면담을 주선한 것이었다. 이것 또한 주민들의 요구를 정부에서 번번이 묵살하다가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한 정부에서 면담을 주선한 것.
하지만 면담 예정일이었던 8월 10일에 양택식 서울시장이 약속된 면담에 30분 정도 늦는 바람에 11시에 도착한다고 알던 주민들이 여기서 드디어 폭발했다. 양택식이 도착했을 때 사태는 이미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양택식이 늦은 이유는 일부러가 아니라 당시 서울의 교통정체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손정목 교수의 서울특별시 관련 서적을 보면 양택식은 면담 준비를 위해 아침 일찍(아침 7시) 서울특별시청을 나섰으나 길에서 3시간 넘게 시간을 버렸다고 한다. 면담은 결국 1시간 정도 지연돼 12시부터 진행됐고 양택식 시장과 중앙정부에서는 이미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양보를 할 예정이었던 터라 면담은 개시 30분만에 주민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선에서 원만히 끝났다. 그러나 이 회담 결과를 공개하기 위해서 또 서울시청까지 가야 했던 상황이라 면담 결과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은 같은 날 오후 6시였다.
문제는 양택식 시장이 직접 설득할 수 없는, 즉 회담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인데... 결국 11시 45분 군중 300여 명이 성남출장소로 달려가 성남출장소를 모조리 때려부숴 연기와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이 광경을 보고 주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남출장소로 몰려갔고 검은색 관용 지프를 뒤집어 불태우고 공무용 버스와 트럭을 탈취해 광주대단지 전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복된 채 불타는 관용 지프. |
버스에 올라타 이동하는 시위대. |
성남출장소 전체는 불타올라서 소방차와 경찰차가 출동했지만 시위대에 가로막혀 접근도 못 했다. 정부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경찰기동대 700여 명을 투입했다. 12시 경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이미 분노할 대로 분노한 주민들은 경찰이고 나발이고 다 박살내 버린 다음 관리사무소, 파출소 등지에 방화를 저지르며 광주대단지 전역을 초토화했다. 2시 경에 경찰기동대가 도착하자 주민들은 돌을 던져 이들의 접근을 막았고 곳곳에서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주경찰서 성남지서, 남문주유소는 이미 불타올랐다.
이 와중에 버스 노선 하나 제대로 없는 이곳에서 차량만 모두 22대가 불탔다. 불탄 차량은 관용차와 경찰차였다. 그리고 이 날 전경과 주민들이 대치하던 중에 도로변에 참외 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굶주린 주민들은 일제히 참외 트럭에 달려들었고 참외는 주민들이 달려든 동시에 한 트럭 분이 전부 사라졌다.
대단지 안을 초토화시킨 군중들은 다음 단계로 움직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대단지 주변을 지나가던 승용차, 택시, 버스, 트럭들을 가로막아 멈춰세운 뒤 탑승객과 화물들을 모조리 끌어내고 탈취하여 운송 수단을 확보한 뒤 서울로 이동했다.
4.2. 정부의 백기투항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늦게나마 현장에 도착한 양택식 서울특별시장과 주민 대표의 면담은 장소를 옮겨 진행됐고 사건 발생 전 대다수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한 양택식 시장은 사실상 대표들의 모든 요구를 수용해주겠다고 사실상 항복하면서 회담은 원만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20]. 양택식 시장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항복하게 된 이유는, 공권력마저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너무 커져서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 사건을 보고받은 정부는 오후 5시 정성관 내무부차관과 김태경 경기도지사를 현장으로 파견해 이주민들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며 주민대표에게 정식 사과하고 이주민들의 화를 달랬다.
이틀 뒤인 8월 12일, 양택식 서울시장은 방송 담화로 광주대단지(성남출장소)를 성남시로 승격하고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시민들이 자진 해산하였고 소요사태는 3일 만에 최종 진정됐다. 이후 공단 설립과 상하수도 건설 등의 추가 조치도 실시됨으로써 주민들의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구성남 지역에 아직 남아있는 상대원공단이 바로 대단지 사건 후에 조성된 곳이다.
4.3. 사건 이후
사실상 정부와 서울시의 백기투항으로 사건은 마무리됐으나 관공서와 차량에 대한 방화를 비롯한 폭동에 대한 책임은 누군가 져야 했고 실제로 이 과정에서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부상을 당한 만큼 폭동의 주동자급 주민 22명이 구속되어 형사 처분을 받았다.
이후 2006년부터 성남의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이 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운동이 시작됐고[21] 2012년 이후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의 성과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
성남시 승격 50주년이 되는 2023년에는 당시 주민과 정부의 회담이 이루어졌던 단대오거리역 앞에 기념비를 설치하기도 했다.
5. 왜 이렇게 됐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원주민인 도시 빈민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몰아내는 일은 광주대단지가 처음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후에도 1980년대의 상계동 올림픽으로 대변되는 지역 정리 사업, 그리고 21세기의 구룡마을 문제까지 정부/지자체와 대립하는 원주민들의 폭력을 동반한 저항은 꾸준히 있어 왔다. 하지만 광주대단지 사건은 모든 진행 과정이 엉망이었다. 광주대단지사건에서 정부(서울시, 경기도 포함)의 문제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대단지의 기획 의도는 처음부터 부산시장 시절 정책 이주지라는 대규모 철거민 퇴거 작업을 진행시킨 김현옥 전임 서울시장의 계획으로[22] 다수의 실업자가 포함되어 경제력이 없는 사대문내 무허가 판자촌 빈민들을 아예 도심에서 서울 밖으로 대규모로 내칠 목적이었으며 여기에 농지 보호 등의 논리까지 개입시키면서 서울과의 접근성, 주거 환경 모두 최악인 남한산성 밑 산비탈을 그 대상지로 삼았다. 일부러 접근성을 나쁘게 만들어 다시는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게 1차적 목표. 이는 이주민들의 생계 문제를 낳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 목돈 부담 능력이 없는 빈민을 대상으로 했기에 저렴한 땅 가격과 토지 가격 분할 납부 조건을 걸고 여기에 공장 등 생계 수단 구축까지 약속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았음에도 가설주택조차 세우지 않고 맨땅에 텐트 하나 짓고 모든 것을 모른 체 했으며 생계수단인 공장 건립 및 상하수도 등 최소한의 도시 인프라 구축도 '사람이 모이면 풀뜯어먹든 뭐든 알아서 다 된다'는 터무니 없는 논리 아래 제대로 하지 않았다. 서울 및 주변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교통망 확충조차 늘어난 인구에 맞춰 진행하지 않아 힘들게 서울로 출퇴근하며 돈을 버는 것도 어렵게 했다.
- 광주대단지의 상태에 절망한 다수의 빈민들은 그곳에 있다간 생계가 끊기니 입주를 포기해 입주권을 불법적이나마 브로커를 거쳐 일반인들에게 팔았고 싼 값에 내집마련을 할 수 있을거란 기대에 입주권을 산 일반인들은 그나마 저렴한 토지 가격에 광주대단지로 들어와 꾸준히 그 비율을 늘렸다. 이는 당시 제한된 정보로 인해 실상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시의 허황된 신도시 개발 광고때문에 먹혀들어갔고, 한참 영동 개발로 투기 열풍이 불던 시기라 투기자본과 정보력 부족으로 손가락만 빨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던 서민들을 상대로, 당시 적은 돈으로 자기 집과 땅을 장만하고 싶어하던 차상위, 서민들의 투기심리에 불을 지펴 입주권 전매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 이를 본 서울시와 경기도는 오히려 일반인 입주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의 약속을 깨고 4~8배의 토지 가격과 세금을 그것도 분납이 아닌 일시납으로 이주민들에게 강요했다. 이때부터 서울시는 이 사업을 빈민구제나 주거안정을 위한 공공택지조성사업이 아니라, 수익사업처럼 이 사업을 변질시켜 부동산 투기를 부추긴 뒤 입주권을 비싸게 되팔아 그 돈으로 다음 택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 서울시와 정부의 황당한 처사에 분노한 대단지 이주민들이 강하게 항의했음에도 오히려 정부(서울시)는 최소 가격을 올렸고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한 모든 협상 요구에 귀를 막았다.
- 분노가 극에 달한 이주민들이 최종 시한을 정부에 통보하고 나서야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였고, 내부적으로는 광주대단지 주민 대표들이 내건 요구 사항의 대다수를 수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음에도 이를 빠르게 통보하지 않고 최종 시한까지 버티고 버텼다.
광주대단지는 빈민을 쫓아내겠다는 의도로 이뤄졌으며, 개발 과정 역시 수요자인 이주민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그리하여 거주가 가능한 주택이나 이에 동반한 상하수도 등 거주 인프라조차 갖추지 않고 텐트 하나만 세워 두고 들어와 살라고 한 것이나 이후에 벌어진 터무니없는 토지 가격 인상과 납부 조건의 변경, 폭동이 터지기 전까지 거주민 대표를 통한 개선 요구에 침묵했다.
권위주의적 정부는 주민들의 분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문제를 수습할 기회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헛되이 넘겼고, 오히려 일을 키웠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과 독선은 중간에 문제를 수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서울시를 포함한 정부가 그냥 시간을 헛되이 보낸 차원을 넘어 사건에 장작을 쌓고 휘발유를 붓게 만들었고, 결국 양택식 서울시장의 협상장 도착 지연이라는 예상치 못한 불씨가 날아들자 폭동에 불이 붙고 광주대단지는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양 시장과 주민 대표단의 협상 자체는 나름 평화롭게 끝났다는 점에서 서울시와 정부가 의지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광주대단지 거주민들을 폭동 전에 달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 까짓 빈민들이 뭘 할 수 있겠냐?'는 오만함이 화를 불렀다 할 수 있다.
6. 영향
광주대단지사건은 해방 이후 최초의 대규모 도시빈민투쟁이었다. 이에 엄청난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 사건을 철거민들의 폭동으로만 표현했고 이후 시위에 대해 더욱 신경질적인 대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10월 유신 이후에는 원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시위를 가혹하게 진압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폭동으로 매도했지만, 주민들과의 약속은 지켜서 광주대단지(성남시)에서 서울, 경기도 광주로 가는 교통망을 대폭 정비했다. 잠실대교/ 천호대교/ 송파대로(강북 접근성 개선), 헌릉로(강남 접근성 개선), 갈마터널(광주 중심부 접근성 개선)이 이 사건을 계기로 건설된 것이다. 또 서울시는 서울과 성남(수정구, 중원구)을 잇는 전철도 약속했고 이는 재원 문제와 계획의 지속적인 변경으로 인하여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으나 2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서울 지하철 8호선으로 실현되었다.[23] 8호선 성남 구간은 수익자 부담 원칙에 맞지 않게 서울시에서 주도하여 건설하고 건설비는 전액 국비로 부담했는데 이 역시 광주대단지사건이 간접적인 원인이었다.[24]
사건의 원인 중 하나였던 서울시영버스 270번은 이 일을 계기로 지선 형식으로 6대에 불과했던 운행 대수를 늘려 모든 차량이 광주대단지까지 운행하도록 연장되었고 이후 약간의 노선 개편은 있었으나 지금도 서울 버스 303으로 남아 구성남과 서울을 이어주는 중심 버스 노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땅값을 내기도 버거웠던 도시빈민, 그리고 영끌하여 입주권을 사 들어온 일반 입주민들로 이뤄진 성남 원도심 주민 다수는 이 사건 이후에도 억지로 버티고 버티며 광주대단지(성남시)를 떠나지 못했다. 당시 광주대단지에 입주한 사람들이 정부와 서울시에 가진 반감은 골이 깊어 서울과 연결된 생활권을 가진 도시임에도 직접적인 서울 편입 요구가 거의 없다.[25] 그만큼 성남 본시가지 주민들은 서울을 언덕 너머에 있는 딴 동네로 생각하는 정서가 강하다.[26] 그리고 광주대단지사건 당시 주민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는 성남출장소의 성남시 승격이었지, 서울특별시 편입은 아니었다. 2023년 국민의힘의 일명 서울 인접 경기도 시 지역의 편입론이 있을 때도 이 때 당연히 성남시는 빠져있었다. 게다가 이때 시장인 신상진 시장은 국민의힘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편입을 강력히 주장하는 같은 당 김병수 김포시장과는 다르게 끝까지 서울 편입론에 대해서 편입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며 서울시 기후동행카드 사업에도 참여하지 않았다[27]. 일산을 품고 있는 고양시의 시장이자 같은 당 소속인 이동환 고양시장과도 행보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동환 시장은 서울시의 기후동행카드 협약식에도 참여하고 오세훈 서울시장과도 여러 번 만나서 고양시의 서울 편입에 대해서 논의하여 왔으나 신상진 시장은 단 한 번도 서울 편입을 놓고 오세훈 시장과 만나 논의를 한 바가 없다. GTX-A 개통식에서 만난 일은 있지만 이때에도 따로 논의를 한 건 없었다고 전해진다 .[28]
성남시 내부의 지역 갈등인 성남 본시가지와 이후 개발된 신도시( 분당신도시, 판교신도시, 위례신도시) 주민들 간의 갈등에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런 내부 갈등의 원인은 신도시 지역의 부심을 제외하면 주로 신도시 거주민과 입주 기업이 부담하는 세금의 배분, 여러 인프라에 대한 건설과 사용 등 경제적인 이유가 크지만, 광주대단지사건을 겪은 원도심 주민들과, 그러한 감정에 관계없이 유입된 신도시 거주민들의 차이가 감정의 골을 깊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1971년 이후 투쟁의 결과로 얻어낸 성남시에 대한 행정 편의와 인프라 개발은 권리를 제약당한 성남시의 빈민들이 광주대단지사건으로 얻어낸 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그 혜택은 이 사건을 직접 겪지 않은 분당, 판교, 위례 등 후발 신도시들이 같이 누린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공권력의 강제철거와 폭압 그리고 이로 인해서 형성된 성남의 배타적인 지역 분위기가 경기동부연합을 비롯한 자생적 주사파의 탄생의 배경이 됐다고 보기도 한다.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이 2014년 출간한 < 경기동부>가 이런 주장을 담고 있다. 2012년 통진당 부정 경선 사건 이후 보수 언론에서 통진당 당권파 혹은 경기동부의 핵심 인맥들이 성남과 가까운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출신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냈다. # # 경기동부와 인연이 있는 정치평론가 유재일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이야기한 것에 따르면 당시 광주대단지에 전향 서류에 서명한 빨치산 출신들도 많아서 대학생들에게 교육자로 등장하며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입할 수 있는 커넥션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경기동부연합이 자신들은 빨치산의 후예라고 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29]
이 시기 이후에도 이어졌던 성남 구도심, 특히 단대동 언덕쪽을 말하는 '달나라, 별나라'는 당시 이 지역의 혼돈을 일컫는 표현이다. 별나라란 당시 이곳에 장사하러 온 외판원이 물건을 월부로 팔면 동네 주민들이 금방 되판 뒤 산 적 없다고 잡아떼거나 아예 다른 동네로 야반도주하는 등 별난 동네라 물건 값을 못 받는 마경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고 달나라는 이 동네에 물건을 팔러 오면 사겠다는 사람보단 달라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단순히 가난한 게 아니라 외지인이나 행정에 대한 신용이 깨지면서 당시의 보편적 사회질서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붙은 표현이다. 그만큼 정부 통제도 잘 안 되고 내부 혼란도 심했기 때문에 간첩이나 불체자 등이 숨어들기엔 좋은 장소였다. #
이 사건은 박정희 정부의 이후 행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 직후 실미도 사건까지 터지면서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 내에서 이를 빌미로 한 10.2 항명 파동이 발생했는데, "다시는 국민 여러분께 표를 달라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지킬 준비를 하던 박정희는 이 항명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당내 반대 세력을 소멸시켰고, 이후 본격적으로 10월 유신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광주대단지 사건을 계기로 정권 내부에서 박정희의 1인 종신독재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면서, 더 이상 정권 차원에서 박정희의 1인 종신독재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7. 폭동 여부
그동안 ' 폭동'이라며 매도당한 것의 반발로 이를 폭동으로 분류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진보 진영을 옹호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학자들 중에도 광주대단지사건을 폭동이라 분류하는 경우가 있다. 예로 역사비평사에서 내고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당시 성공회대 교수)이 쓴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5ㆍ16 에서 10ㆍ26 까지)'에서는 광주대단지사건을 폭동이라고 소개했다.[30] 6월 항쟁에 참여했던 김원 교수도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이라는 책에서 광주대단지사건을 폭동이라 했다. 이 책에선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은 폭동이 아닌 항쟁이라고 설명하며 흔히 폭동이라고 알려진 대구 10.1 사건도 폭동이 아닌 항쟁이라 분류한다.광주대단지사건을 폭동이라고 분류한 이유는 국가의 폭력에 대한 저항 목적이 명확했던 철거민 생존투쟁이나 민주화 운동들과 달리 정치적 노선이 불분명한 평범한 서민들이 재산권 침해로 인한 분노 표출로 폭력을 목적을 가지지 않고 갑작스럽게 벌였기 때문이다. 이는 시위 참가자 구성에서 알 수 있는데, 광주대단지 개발의 시작인 사대문안 철거민만이 아니라 투기 목적으로 유입된[31] 영세한 이주민이 많았으며 이들의 재산권 행사가 철거민의 인권보장 못지 않게 중요한 이슈였고 저항 세력의 구호도 민주화나 정권 퇴진이 아니라 재산권 보호 및 정부의 공약 이행이었다. 광주대단지사건 당시 자기 생명과 재산권 위협에 폭도로 돌변한 군중에 의해 치안 부재와 폭력행위가 발생했다. 이는 왜곡보도를 일삼던 방송국 등지에 대한 방화를 제외하면 시민의 손으로 공공질서가 지켜져 은행이나 점포가 약탈당하는 일이 없이 자체 치안유지를 시도했던 5.18 민주화운동과 비교될 수 있다. 강만길 교수 역시 '고쳐 쓴 한국현대사'에서 광주대단지사건을 폭동이라고 말했다.[32]
광주대단지사건을 폭동이라고 정의하는 건 학문적 연구에 따른 것이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폭동은 꼭 폭동을 벌인 사람들 탓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나 정부의 부조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LA 폭동이 그런 예이고 광주대단지사건도 당시 정부의 부조리가 일으킨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시민 불복종 운동 중에서도 정치적 색채가 옅은 민란의 성격이 강한 사건이다.
민주화운동사 1권에서도 폭동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1960년대 무허가 판자촌 철거 반대를 통한 노동빈곤층의 지역 수호투쟁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주거권 보장을 요구하는 ‘능동적 권리 투쟁’에 이르지 못한 채 철거로 인한 주거지 상실에 사후적으로 반발하는 ‘수동적 저항’에 머물렀다. 또한 이러한 저항과 반발이 도시 곳곳에 산재한 무허가 판자촌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가 단기간에 와해되어 그 전후의 빈민운동과 연계성을 갖지 못함으로써, ‘운동의 일과성, 국지성’이라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1960년대 후반 더욱 가열된 정부의 철거정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그 불만이 누적되어 광주대단지사건과 같은 주민폭동으로 터져나왔던 것이다.
「제5장 민중생존권투쟁의 분출—전태일의 분신과 광주대단지사건」, 『한국민주화운동사1-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2008, 638쪽
한국근현대사 연구자들 가운데 가장 권위높은 역사학자
서중석[33]도 저서에서 역시 폭동으로 명시했다.「제5장 민중생존권투쟁의 분출—전태일의 분신과 광주대단지사건」, 『한국민주화운동사1-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2008, 638쪽
정부는 무작정 입주만 시켜놓고 생활능력이 없는 이주민들을 아무런 대책 없이 그대로 방치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주민 약 5만 명이 실업자 구적 등을 요구하다가 양탁식 서울시장이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자 성남출장소에 방화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13, 375-376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13, 375-376
위키백과를 비롯한 각종 사전들과 언론에서도 2000년대 이후에는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지 폭동이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니다.
8. 매체에서
이 사건을 다룬 문학 작품으로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있다. 해당 작품에는 이 사건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참외 트럭 습격까지 있었다.이 외에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도 이 사건이 나오며 이문열 소설 변경에서도 비중있게 다뤄진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도 패찰(딱지) 전매,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공단 제빵공장의 열악한 노동환경 등 광주대단지사건의 요소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34]
2017년 12월 출간된 고건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에서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했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을 통해 "이 마을에서 굶주림에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돕니다."라는 당시 안내자의 말로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증언했다. #, # 당시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부이사관)이었던 고건 전 총리는 사건 발생 20여일 후 경기도 직할 성남출장소를 설치하고 파출소를 증설하는 등 후속대책 마련으로 사태 해결에 참여했다고 회고하며 "지금의 성남시가 있기까지 철거 이주민의 눈물과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는 당부와 함께 사건에 대한 술회를 마쳤다.
9. 기타
- 팟캐스트 '이이제이' 122회 광주대단지 사건 특집[35]과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26화에서 다루었다.
- 광주대단지 사건을 정리한 블로그 글도 참조할 만하다.
- 영상 다큐멘터리로는 ‘다시읽는 역사 호외 06편 광주대단지 과연 신도시 프로젝트였나'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 제50,62,64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문제에 출제됐다.
[1]
서울특별시 심볼이 붙어 있는 이유는 이 지역을 서울시가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 구조물에 적혀 있는 문구는 '환영 약진광주대단지'다.
#
[상세]
광주군 중부면
단대리,
상대원리, 탄리,
복정리,
수진리,
창곡리 일대.
[3]
광주군 성남출장소 → 경기도청 (직할) 성남출장소 → 성남시 순.
[4]
이 혜택은 지금도 남아있어서 8호선
남위례역 ↔
모란역 구간이 서울시 바깥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기후동행카드 가용 구간으로 지정되었다.
[5]
한국학중앙연구원 임미리 박사는 논문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에서 광주대단지사건이 경기동부연합 탄생의 배경이 됐다고 분석했다.
#
[6]
다만 경기도 광주시와는 관련이 있다.
[7]
현재 경기도
광주시의 전신. 행정구역 변경 전의 광주군은 지금의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를 포함, 서울특별시의 송파구, 강동구, 강남구 등까지 포함한 매우 넓은 행정구역이었다. 서울특별시의 경계 확장과 일부 지역의 시 승격 독립 후 남은 지역이 광주군으로 존속하고 있다가 2001년 광주시로 승격되었다.
[8]
주소는 중부면이지만 광주대단지 지역은 중부면 면소재지와는
남한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1910년대부터 광주대단지 지역에 성남출장소를 두고 그곳에서 행정 업무를 처리했다. 중부면은 이후 성남출장소 지역을 떼주고,
한참 뒤에
남한산성면으로 개칭한다.
[9]
1960~70년대에는 '농경지 보전'이라는 명목으로
경부고속도로도 일부러 산 능선을 타면서 굴곡지게 건설했으며
행정수도 이전을 기획할 때 '농경지보다는 구릉지가 많은 곳에 이전할 것'을 제시하기도 했다.
[10]
이는 당시 한국 인구의 0.3%에 달했으며, 당시 이주한 빈민층 중에는
김동연 현
경기도지사 일가족도 있었다.
[11]
답십리동~
금호동~
옥수동까지
[12]
북아현동~
청파동까지
[13]
광주대단지만 특별히 이랬던 것은 아니다. 당시 서울시는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서울 외곽에 있는 국유지나 시유지를 판자촌 철거민에게 1가구당 몇평씩 불하하고 텐트만 던져준 뒤 집은 알아서 짓고 살라고 했다.
중계동 백사마을이나
불암산역 인근 시가지가 그렇게 형성된 곳이다. 그러나 광주대단지는 저 철거민 마을에 비해 그 규모가 너무 컸고 서울에서 너무 멀었던 게 문제.
[14]
나룻배 전복사고로 매년 수백명에 달하는 익사자가 발생했을 정도여서 그때마다 한강에 다리를 더 놓아야 한다는 서울시민의 요구가 있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15]
이 노선은 1973년에
570번으로 바뀌었다가
2004년 서울 시내버스 개편 때 303번의 노선번호가 새로 부여되어 지금에 이르는데(종점은
신설동역까지로 단축) 현 운행대수는 39대(그나마도 2022년 5월에 6대, 2023년 8월에 2대 감차한 게 이 정도다)로 입주 직후의 거의 14배에 달할 만큼 늘어난 것이다.
[16]
1971년 1원은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21.142원이다.
[17]
당시 막 개발되던
강남구의 토지가격이 약 1평당 1만 2천 원이었다.
[18]
당시 이주민들을 대변해야 할 광주군의
국회의원은
차지철이었다. 당시는 광주군이
이천군과 하나의
선거구로 묶여 있었다.
[19]
성남시로 승격 후 해당 위치에
성남시청이 세워졌다가 2009년에
여수동으로 이전한 후에
성남시의료원이 새로 세워져 오늘날에 이른다.
[20]
다시 듣는 대한민국 경제실록, 서울 고도성장의 신화
[21]
당시 광주대단지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에 적극 나섰던 사람 중에는 훗날
성남시장을 거쳐
경기도지사,
대선후보,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되는
이재명 변호사도 있었다.
[22]
광주대단지 사건 이전에 일어난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김현옥 시장이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후임 양택식 시장이 그 뒷수습을 맡아야 했다.
[23]
1996년
잠실~
모란 구간을 시작으로 1999년에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24]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 이유는 8호선의 최종 계획을 수립할 당시 성남시 인구는 이미 50만명을 넘어 지하철 없이는 교통 수요를 버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다만 광주대단지를 기반으로 하는 구 성남 시가지 중심의 노선 배치나 서울시의 사업 시행 및 정부 측의 비용 부담 등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는 했다.
[25]
게다가 이주 온 당사자들에게는 반감뿐만 아니라 법적인 문제도 있다. 상술했듯이 다시는 서울로 이사 오지 않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에 서울로 편입되는 순간 자신의 거주지를 또 떠나야 한다.
[26]
더불어 서울에 인접한 안양이나 고양, 부천 등지에서 서울
지역번호 02 편입 요구가 거셌던 데 비해 성남에서는 지역번호 편입 요구도 거의 없었다. 사실
서울 지하철 8호선 건설 등으로 다른 예시와 비교했을 때 구성남의 지역번호 02 편입의 당위성은 타 지역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성남이 서울 지역번호를 쓰게 된다면
국번은
광진구,
성동구,
송파구,
강동구 및
강남구
동
남
부,
서초구
내곡동과 같이 400번대 국번을 썼을 것이다.
[27]
두 시장의 차이를 보면 김병수 김포시장은 총선 후에도 김포시를 반드시 서울특별시로 편입시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이고
김포골드라인의
기후동행카드 사용을 허용해주는 등 서울 편입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반대로 신상진 성남시장은
한동훈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의 서울 편입론에도 중립을 지키며 입장을 밝히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총선 당시에도 김병수 김포시장은 반드시 김포시를 서울특별시 자치구로 편입시겠다며 이를 처음 주장한
김기현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지지하였지만 신상진 시장은 총선 내내 서울 편입에 대해 중립을 지키며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김기현 당시 대표와 한동훈 비대위원장과도 중립을 고수하며 선을 그어왔다.
[28]
고양, 구리, 과천, 하남, 김포시장 등 서울과 인접한 국민의힘 소속 시장들이 모두 오세훈 시장과 서울 편입 관련으로 논의를 한 적은 있지만 이 중에서 논의를 한 적이 없는 시장은 신상진 성남시장이 유일하다. 신상진은 시장 되기 전에
중원구 선거구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냈던 사람으로서 구성남 주민들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같은 당 소속임에도 당론에 소극적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29]
이 사건이 터진 70년대 초 정도까지가 북한이 남파간첩을 육로로 투입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였다. 1968년
1.21 사태가 터졌을 때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 턱밑까지 들어온 데 기겁한 박정희 정권이 주민등록제도 등 강력한 국민 통제책을 세우고 전방 경계를 강화하면서 북한 입장에서 남파간첩을 훈련시켜서 휴전선 철책을 넘기기엔 너무 위험부담도 크고 실패 확률도 컸으며 이후부턴 남파간첩이 더 이상 북한으로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남북의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30]
부마민주항쟁은 항쟁,
5.18 민주화운동도 항쟁이며
대구 10.1 사건은 '10월 항쟁'이라고 소개한다.
[31]
영동 개발 초기인 1960년대 후반부터 이미 영동 전체에서 언젠가 개발될 지역이라는 이유로 땅투기가 활개쳤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정보도 없고 자산이 없었기에 땅투기는 오직 부자들의 특권에 가까웠는데, 자산 증식이나 내집 마련에 관심가졌던 서민들은 광주대단지가 어떤지 모르고 서울시의 언론플레이에 속아 비교적 적은 돈으로 내집을 마련할 수 있을거란 상상에 입주권을 전매해 들어왔다가 그때야 이곳이 마경임을 깨달았던 것. 없는 재산을 다 털어 입주권을 전매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영끌족이 이들이기도 하다.
[32]
강만길 교수 역시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을 폭동이 아닌 민중항쟁이라고 설명하며
6월 항쟁은 6.10 민주화운동이라고 하고 대구 10.1 사건은 폭동이 아니라 경북과 대구에서 10월에 일어난 민중항쟁이라고 말한다.
[33]
박정희 시기 경제성장이 박정희의 공로라고 하는 것을 '
위험한 착각'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반박정희 성향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34]
상대원공단 빵공장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다.
[35]
정확한 이야기는 43분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