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64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반대하여 일어난 6.3 항쟁에 이어 1965년에 일어난 한일협정 반대투쟁. 1965년 한일협정 조인비준 반대투쟁이라고도 한다.2. 전개
1965년 1월 18일, 6.3 항쟁으로 중단되었던 한일회담이 속개되었고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면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이 시작되었다. 3월 26일 동국대의 시위를 시작으로 4월 2일에는 대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잇달았으며 4월 16일에는 동국대학교 학생 김중배(20)[1]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스무 살 김중배를 누가 죽였나시위가 날로 격화되자 정부는 전국 34개 대학, 119개 고등학교에 4월 24일까지 휴교조치를 내렸지만 시위는 전국의 대학으로 계속 확산되었다. 5월이 되면서 학생들은 한일회담에 깊이 관여하는 미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5월 10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미국에 대해 한일회담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했고 6월 27일 이화여대 학생들은 「워싱턴 데일리뉴스」에 한일회담을 간섭하는 미국을 규탄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6월 29일 고려대 시위에서는 "양키여 침묵하라(Yankee Keep Silent)" 하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5월 중순부터 학생들은 연일 시위, 동맹휴학, 단식 등으로 저항했다. 6월 14일 서울대 법대생 2백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각 대학으로 파급되었다. 6월 22일, 전국에 갑호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날 서울대 법대생 185명이 단식으로 졸도했고 전국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한일협정이 1965년 6월 22일 정식으로 조인되자 6월 23일 전국 각 대학과 고교에서 한일협정 조인 무효화와 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성토대회와 시위, 단식이 계속되었다. 7월 7일 이화여대생들은 국회청원을 위한 한일협정비준반대 가두서명에 나서 약 3만 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학생들의 끈질긴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박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교수, 변호사, 문인, 개신교 목사 등 지식인들도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7월 초에는 개신교 목사 1백여 명이, 7월 중순에는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이 회담 반대의 강력한 입장을 표명했지만 공화당은 7월 14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기습적으로 발의하였다. 이에 예비역 장성 11명이 회담에 반대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기독교계와 불교 및 유교 등 종교계에서도 성명서, 연합기도회, 비준 반대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7월 말에는 대학교수단・예비역 장성・종교인・법조인・문인・여성계 등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조국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 윤보선 등 야당 의원들은 탈당계를 제출하고 야당의 해체를 주장했다.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면서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투쟁이 격화되었다. 8월 17일 서울대 법대 학생회의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선언식을 시작으로 하여 학생들은 연일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8월 23일에 이어 전국 대학 및 고교생 1만여 명이 시위하더니, 이튿날 24일에는 서울지역 대학생 1만여 명이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학교별로 성토대회를 가진 뒤 거리로 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8월 25일, 무장군인 50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군화로 짓밟고 곡괭이 자루로 패며 수십 명을 연행하였다. 8월 26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주요 대학에 군인이 상주하였다. 이로써 약 일곱 달에 걸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도 또 다시 군인들에게 진압당해 막을 내렸다.
한일협정으로 한일관계는 정상화되었지만 이 협정은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였고[2] 협정에 대한 양국의 해석 차이로 인해 오늘날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청구권 문제, 독도 분쟁 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였고 2005년 1월 한일협정 일부문서를 공개하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