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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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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C008><colcolor=#00A99A>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김재준
金在俊 | Kim Jae-jun
파일:장공 김재준.jpg
출생 1901년 9월 26일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골마을 #)
사망 1987년 1월 27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수안 김씨[1]
아호 장공 (長空)
학력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 (신학 / 학사)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 / 석사)
웨스턴 신학교
종교 장로회
1. 개요2. 생애3. 논란 및 비판
3.1. 소위 '고등비평' 논란3.2. 친일논란
4.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image/005/2006/01/24/20060124_32_02.jpg [2]

대한민국 장로회 목사이자 대표적인 진보적 신학자로서 한국기독교장로회 (기장)과 조선신학교(훗날 한신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2. 생애

김재준 목사의 일대기 영상[3]

1901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사서삼경 등 동양고전을 수학하였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인 신학부와[4]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웨스턴신학교(현재 피츠버그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성서를 가르쳤다.

1940년에는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를 세우는 실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장로회 중 진보적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형성에 공헌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 중 하나인 경동교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교계에서 교리적, 정치적으로 모두 보수적인 목사로 유명한 김장환, 한경직 등은 김재준을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5]

평양에서 장로회 목회자를 양성하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거부 등의 이유로 폐쇄되자, 선각자 김대현 장로와 뜻을 모아 서울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한다. 이전의 평양신학교가 서양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것과 달리 조선신학교는 조선인 신자들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학교로 계획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이렇게 새로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교단 신학교로 승인한다. 그러나 광복 이후, 조선신학교에서 성서비평학을 가르치는 문제로 인해 교단 내 보수파와 갈등을 겪게 된다. 교단 내 보수파는 조선신학교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하고 별개로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운다. (이 신학교가 예장합동의 주요 신학교인 총회신학대학교와 예장통합의 장로회신학대학교가 된다.) 1935년 ' 아빙돈 성서 주석 사건' 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 한경직 목사와 일부 보수 신학자들은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이 가르치는 소위 '고등비평'이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 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재준은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제명했다.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에서는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결의 위반급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또 그 직분행함을 금하노라 선언" 하였다. 이에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은 독립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형성하였다. 이후 군사독재 반대 및 민주화 운동 참여를 계기로 오늘날 기장은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인 교단로 불린다.

김재준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고 삼선 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할 것을 권고했지만 결국 1969년 9월 14일 개헌안이 기습 통과되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장공은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1987년 별세하였다.[6] 대한민국 정부는 장공의 민주화운동과 신학발전에의 기여를 기려 2002년 12월 2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7]

3. 논란 및 비판

3.1. 소위 '고등비평' 논란


김재준에 '고등비평' 논란에 대한 한겨레 조현 기자와 김경재 목사의 대담

김재준에 대한 신학적 반대파는 김재준이 성경에 대한 소위 고등비평을 시도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재준은 성경을 마치 세상의 문학작품 등과 같이 비평적으로 접근하고자하고 이는 성경에 오류가 있음을 전제하는 성경유오설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란에 의해 김재준은 교단에서 파문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이 김재준에게 씌운 '고등비평'이라는 레이블은 실상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이었으며, 이후 예장통합의 신학교인 장신대에서도 성서신학 커리큘럼에 포함하는 주류(mainline) 개신교 신학의 경향이다. 김재준을 오해한 유연하지 못한 신학관은 50년대 당시 한국 장로회가 아직 미성숙한 시기였던 탓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 장로교단에는 해외 선교사들의 지원과 영향이 여전히 존재했는데, 김재준의 무고한 파문 소식을 듣고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단을 포함한 많은 해외 선교단체가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특히 캐나다 연합교회는 적극적으로 김재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조선신학대학교 유지비용을 선교회 차원에서 충당해주었다. 이러한 계기로, 캐나다 연합교회와 기장 교단은 오늘날까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한신대 출신 목회자들이 유학을 갈 경우 캐나다 연합교회 계열 신학교인 토론토 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Emmanuel College)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김재준 파문 이후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던 미국 장로교(PCUSA)는 오늘날 예장(통합)과 형제교회로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김재준에 '고등비평' 논란과 대한 파문은 당시 교단 내 보수파와의 갈등에서 빗어진 오해였으며, 이에 대해 예장통합은 2016년 공식적으로 김재준에 대한 파문을 취소하고 사과했다. 기사 CBS뉴스 영상

3.2. 친일논란

조선신학교 설립 당시 김재준은 신사참배를 '개인의 자유로 맡기자'는 투로 사실상 방관 내지는 허용했다. 민족 신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명분이라고 포장하기는 하였으나 이를 대부분 친일행위라고 생각한다.[8]

나무위키의 한국기독교장로회 항목 중 친일행위 단락에도 언급되었다시피, 김재준을 포함한 한국기독교장로회, 더 나아가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 등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적통을 잇는 한국 장로교 교단들 모두 친일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의 장로회 교단 중 이러한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교단은 예장 고신파 정도 뿐이다. 예장 고신은 신사참배반대로 투옥되었다가 광복후 출옥한 소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교단이다.

이와 같이 친일은 한국 개신교의 광범위한 치부에 해당하기 때문에 교단을 떠나 과거 친일 논란을 대놓고 공론화시키는 것을 꺼리는 추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 자신들의 친일논란, 특히 김재준을 포함한 자기 교단 지도부에 대한 친일논란이 교단 내부에서 나오는 곳은 기장뿐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즉, 애초에 친일행위에 대한 인정과 사과요구가 오직 에큐메니안이나 뉴스엔조이 등 기장측 성향의 진보적 기독교 언론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에큐메니안은 기장총회 행사를 홍보하거나 새로 교단 집행부가 들어설 경우 집행부 인터뷰를 보도할 정도로 기독교장로회 총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교단이다. 뉴스엔조이 역시 한신대학교 출신 기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언론사답게 기장에 대한 기사를 많이 내보내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과거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기장에게 돌아오고 따라서 이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단 지정 신학교의 설립자였던 김재준에 대한 사과를 기장 총회와 한신대학교에 요구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안 기사 뉴스엔조이 기사

4. 여담

김재준 목사가 작사한 '어둔 밤 마음에 잠겨'
  • 찬송가 582장(새찬송가, 통일찬송가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김재준 목사가 직접 작사한 찬송가이다. 주로 통일, 국경일 예배시에 사용되는 곡이다.
  • 경동교회의 장공채플은 김재준의 호인 장공에서 이름을 따왔다.
  • 한신대학교의 본관인 '장공관'과 신학대학원 도서관인 장공도서관은, 마찬가지로 김재준의 호인 장공에서 이름을 따왔다.


[1] # [2] (출처: 국민일보 기사 #) [3] 경동교회가 제작한 영상으로 김재준 관련 사진 및 클립 모음이다 [4] MARCH에 속하는 그 아오야마가쿠인이다. 신학부는 2차대전 이후 도쿄신학교로 이관되었다. [5] 역사의 우연인지, 김재준 목사가 초대 교장을 지냈던 서울고등가정학교는 훗날 명지대학교로 이어진다. 그리고 김재준 목사를 도왔던 송창근 목사는 명지학원의 초대 이사장이 되었고, 그리고 바로 위 문단에 나오는 김장환 목사는 훗날 명지학원의 제7대 이사장이 된다. [6] 이미 1980년대 들어서는 고령에 건강문제로 공개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고 대신 민통련, 국본 등 주요 민주화 운동 단체가 출범할때마다 상임고문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지지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즈음에는 문익환 목사가 진보기독교계를 대표해서 민주화운동을 이끌게 된다. [7] 상훈법 상 사유는 '국민화합 및 국가발전유공자'로 기록되었다. 자세한 내용 및 기타 대한민국 상훈기록 관련은 상훈기록 검색 사이트 참조 #. [8] 또한 조선신학교 설립 공동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채필근 송창근 목사의 경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후보에 올랐다. 기사 그러나 채필근 송창근의 경우 서울 조선신학교 설립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도 조선신학교와 관련된 사유 때문이 아니라 후평양신학교 건립에서의 행적으로 인한 것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평양신학교가 수업을 중단하자 일제에서 곧바로 이름만 빌려 평양신학교를 다시 세웠는데, 채필근과 송창근은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