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4:40:16

김용준(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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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재인 전 대통령은 궐위로 인한 선거로 인수위 없이 임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보완책으로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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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헌법재판소장
김용준
金容俊 | Kim Yong-jun
파일:1702496219472_yrmavz_2_0.jpg
<colbgcolor=#911B2B><colcolor=#E6B366> 출생 1938년 12월 2일 ([age(1938-12-02)]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본관 광산 김씨 (光山 金氏)
재임기간 대법관 ( 이일규 대법원장 제청 / 노태우 대통령 임명)
1988년 7월 10일 ~ 1994년 7월 9일
제2대 헌법재판소장 ( 김영삼 대통령 임명)
1994년 9월 15일 ~ 2000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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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11B2B><colcolor=#E6B366> 가족 배우자 서채원, 슬하 2남 2녀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무악현대아파트[1]
학력 서울고등학교 (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법학 / 석사[2])
명지대학교 ( 철학 / 명예박사)
제주대학교 ( 법학 / 명예박사)
대구대학교 ( 법학 / 명예박사)
병역 면제 (소아마비)
경력 제9회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 합격
대구지방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
제9대 서울가정법원장
대법원 대법관 (1988.07. ~ 1994.07.)
제2대 헌법재판소장 (1994.09. ~ 2000.09.)
법무법인 율촌 고문변호사
법무법인 넥서스 고문변호사
초대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장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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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논란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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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대 헌법재판소장, 박근혜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법조인.

2. 생애

1938년 12월 2일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서울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쳐[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57년 제9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최연소 합격하였으며, 1960년에는 최연소 판사 대구지방법원에 부임했다. 이후 1961년 서울지방법원 판사, 1966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69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70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73년 사법연수원 교수를 지냈고, 1975년 부장판사로 승진해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77년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1979년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1980년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 1981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냈다.

1984년 제9대 서울가정법원장을 거쳐 1988년 7월에 이일규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되었으며, 1994년 7월까지 대법관직을 수행하였다. # 대법관직에서 퇴임한 후 1994년 9월 9일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하여 제2대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되었다. # 헌법재판소장 임기를 마친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고[4]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사위가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 율촌의 고문 변호사로 있으면서 2004년 4월 제4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2009년 국민원로회의 사회통합분야 위원을 지냈고, 2011년 법무법인 넥서스 고문변호사에 취임하면서 노년에 소일하고 있었는데…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다시 등장하였다. 대법관 헌법재판소장이라는 사법부 최고위직을 역임한 원로가 정치에 뛰어드는 것에 대하여 삼권 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있었다.[5]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 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데 이어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6]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 70~80년대 부동산 투기 의혹, 대법관 및 헌법재판소장 재직 시 허위 재산공개 의혹 등을 받은 끝에 지명 5일 만에 자진사퇴하였다. #

3. 논란

대법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해 특수감금죄를 인정한 원심판결을 파기하였는데, 2018년 검찰이 해당 대법원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취지로 비상상고를 결정하면서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

하지만 대법원은 2021년 3월 11일 검찰이 한 2건의 비상상고(2018오2, 2019오1)를 모두 기각 결정했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이 정한 비상상고 이유인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때'란 실체법 적용에 관한 위법 또는 그 사건에서의 절차법상의 위배가 있는 경우"라며 "법령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전제가 되는 사실'을 오인해 법령위반의 결과를 초래한 것은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4. 여담

  • 한화그룹의 전신인 조선총포화약주식회사 대표를 지낸 김봉수 씨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부친이 6.25 전쟁 와중에 납북되는 바람에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어머니 등에 업혀 등교할 정도로 힘든 학창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 서울고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대학 3학년 때인 만 19세에 고등고시(현 사법시험)에 합격, 판사로 임용됐다. 헌재소장 재임 중에는 과외금지, 군제대자 가산점제, 택지소유상한제, 동성동본 혼인금지, 단체장 입후보금지 조항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리는 등 국민 기본권 침해에 대한 각종 제한을 철폐했다는 평을 받았다.

5. 관련 문서



[1] 관련 기사 [2] 석사 학위 논문 : 強制執行法上(강제집행법상)의 平等主義(평등주의)에 對(대)한 批判(비판)(1967). [3] 당시에는 재학생의 검정고시 응시가 허용되었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서울고 8회 동기동창이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경기고등학교 입학이 거부돼 서울고등학교 진학을 택한 아픈 일화가 있다. [4] 金 대통령 퇴임 헌재소장에 서훈 [5]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기춘의 행보도 같았으나, 이 쪽은 이미 국회의원을 3번이나 지냈었고, 검찰이 법원에 대응되기는 하나, 사법부는 아니어서 넘어갈 수 있었다. 오히려 김기춘은 공안검사로서 부정적인 행적들이 부각되면서 까였다. [6] 다만 지명 당시에 만 74세를 넘긴 고령이었던지라 이에 대해서도 말이 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