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4A3800,#FFF {{{#!wiki style="margin: -5px 0px" |
단독황제 | 양두정치 | 제1차 사두정치 | 제2차 사두정치 | |
동방 정제 | 디오클레티아누스 | 갈레리우스 | |||
동방 부제 | - | 갈레리우스 | 막시미누스 다이아 | ||
서방 정제 | - |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우스 1세 | ||
서방 부제 | 막시미아누스 | - | 콘스탄티우스 1세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
>>> 306 ~ 310년 >>>
|
|||||
제2차 사두정치 | 제3차 사두정치 | ||||
동방 정제 | 갈레리우스 | 갈레리우스 | |||
리키니우스 | |||||
동방 부제 | 막시미누스 다이아 | ||||
서방 정제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콘스탄티누스 1세 | |||
막시미아누스 | |||||
막센티우스 | |||||
서방 부제 | 콘스탄티누스 1세 | 콘스탄티누스 1세 | - | ||
막센티우스 | |||||
>>> 311 ~ 316년 >>>
|
|||||
내전기 | |||||
동방 정제 | 갈레리우스 | 리키니우스 | 리키니우스 | ||
리키니우스 | |||||
막시미누스 다이아 | |||||
동방 부제 | - | ||||
서방 정제 | 콘스탄티누스 1세 | 콘스탄티누스 1세 | |||
막센티우스 | |||||
서방 부제 | - | 바시아누스 | |||
>>> 316 ~ 324년 >>>
|
|||||
내전기 | |||||
동방 정제 | 리키니우스 | 리키니우스 | 리키니우스 | 리키니우스 | |
발레리우스 발렌스 | 마르티니아누스 | ||||
동방 부제 | 발레리우스 발렌스 | - | 리키니우스 2세 | ||
서방 정제 | 콘스탄티누스 1세 | ||||
서방 부제 | - | 크리스푸스 | |||
콘스탄티누스 2세 | |||||
>>> 324 ~ 352년 >>>
|
|||||
콘스탄티누스 왕조 | |||||
동방 | 콘스탄티누스 1세 | 콘스탄티우스 2세 | 콘스탄티우스 2세 | ||
중앙 | 콘스탄스 | 콘스탄스 | |||
서방 | 콘스탄티누스 2세 |
베트라니오 마그넨티우스 |
|||
>>> 353 ~ 364년 >>>
|
|||||
콘스탄티누스 왕조 | - | ||||
동방 | 콘스탄티우스 2세 | 콘스탄티우스 2세 | 율리아누스 | 요비아누스 | |
서방 | 율리아누스 | ||||
>>> 364 ~ 378년 >>>
|
|||||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 |||||
동방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발렌스 | |||
서방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
그라티아누스 | |||||
>>> 379 ~ 395년 >>>
|
|||||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 테오도시우스 왕조 | ||||
동방 | 테오도시우스 1세 | 테오도시우스 1세 | |||
서방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
그라티아누스 | 마그누스 막시무스 | ||||
에우게니우스 | 플라비우스 빅토르 | ||||
>>> 395년 ~ >>>
|
|||||
동방 | 동로마 제국 | ||||
서방 | 서로마 제국 | }}}}}}}}}}}}}}} |
이름 |
바시아누스 (Bassianus) |
출생 | 미상 |
사망 | 316년 |
형제 | 세네키오(Senecio) |
아내 | 아나스타시아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 수여가 고려되었다가 돌연 콘스탄티누스 1세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2. 생애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리키니우스의 심복이었던 세네키오의 형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는 각각 막센티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무너뜨린 뒤 로마 제국을 분할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아프리카를 맡았고, 리키니우스는 발칸 반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맡았다. 315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복 누이인 아나스타시아를 바시아누스와 결혼시켰다. 이는 리키니우스와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16년, 콘스탄티누스는 이복 형제인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를 리키니우스에게 보내 바시아누스를 카이사르에 선임하여 이탈리아를 맡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바시아누스를 콘스탄티누스의 사람이라고 여겼기에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바시아누스는 세네키오와 짜고 콘스탄티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발각당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를 처형한 뒤 리키니우스에게 세네키오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리키니우스가 이를 거절하자, 콘스탄티누스는 그와 관계를 단절하고 전쟁을 단행했다.
이상은 오리고 콘스탄티니 칙령(Origo Constantini imperatoris)에 기재된 내용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이 기록은 콘스탄티누스가 사실 관계를 조작하여 선전용으로 써먹은 것이라고 간주한다. 페트리샤 서턴(Patricia Southern)은 콘스탄티누스가 반란을 '창조'한 뒤 리키니우스가 자신의 부하를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게 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마련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티모스 반스(Timothy D. Barnes)는 실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을 거라 추정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에게 자신의 처남인 바시아누스와 크리스푸스를 각각 서방과 동방의 카이사르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315년 콘스탄티누스의 누이인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에게서 아들 리키니우스 2세를 낳았기에, 자기 자식에게 카이사르를 맡기고 싶은 생각에 거절했을 것이다. 얼마 후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가 콘스탄티누스의 아이를 임신하자, 콘스탄티누스는 바시아누스가 차후에 태어날 자식의 정적이 될 것이라 여겨 반역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형했다. 이후 리키니우스와 한판 붙기로 마음먹고, 세라키오가 자기 형제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고 주장해 그를 넘겨달라고 청한 후, 리키니우스가 거절하자 곧바로 전쟁을 선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