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Münzer
1489~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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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교 개혁 시기에 활동한 독일의 급진 종교 개혁가이자 재세례파 지도자.2. 생애
토마스 뮌처는 1489년 스톨베르그라는 독일의 한 작은 도시에서 나름 안정적인 집에서 태어나 꾸준히 오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150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신학과 예술 교육을 받은 것을 보면 꽤나 좋은 집안이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 외에도 프랑크푸르트 대학 등을 다니며 예술 쪽 일을 하다가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사제가 되었다.하지만 그 당시 유럽은 혼란스럽고 부패하던 시기였다. 교황은 면죄부를 팔고 있었고 당시 사제였던 그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다. 특히 그 말고도 마르틴 루터와 같은 소위 개혁파 인물들이 교황와 성당의 행동을 비판하고 나섰고 이 둘은 자연스럽게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95개조 반박문을 쓰기 전 뮌처와 루터는 서로 만나 교황과 기존 성당을 어떻게 개혁하고 비판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되었고 인본주의와 같은 루터의 사상에 크게 감명을 받아 종교 개혁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뮌처는 단순히 성경 중심 개혁으로는 이 부패한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믿었고 그의 신비주의적 성향과 루터한테서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적 성향이 합처저 점점 급진적으로 변하였고 도시는 물론 시골을 전전하며 농민들과 만나며 그의 사상은 종교의 개혁에 그치지 않고 사회 그 자체의 봉건적 악습의 철폐로 이어졌다.
이후 독일 농민전쟁이 발발할 당시 뮌처는 농민의 정신적 교주로서 활동하였다. 토마스 뮌처는 마르틴 루터에게 동맹을 요구했지만 마르틴 루터는 오히려 오만방자한 도적 농노들이라며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뮌처와 루터는 그로부터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으며 마르틴 루터는 당시 교권에 반대되던 영주에게 붙어 이들을 적극 탄압하게 하였다.
독일 농민전쟁은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왕, 교황, 심지어 신성 로마 제국 외부의 국가들의 공격에 무너지게 되었으며 뮌처 그 자신은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를 상대한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대패하여 포로로 잡혔으며 극심한 고문을 당하다 "모든 것은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하며 영주, 지주, 공작에겐 처음에 경고를 주되 이를 듣지 않고 계속하여 악행을 한다면 죽여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이후 참수형과 함께 효수되었다.
3. 사상
그의 사상은 철저히 신학을 기반으로한 사회의 변혁이였다. 즉 사회 변혁을 위해 신학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학대로라면 사회가 변혁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선 급진파 개혁가였다.만일 어떠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본 적도, 성경을 소리로 들은 적도 없을지라도 영적인 경험과 참된 가르침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신실한 기독교 교도이며 기독교 교도로 남을 것이다.
토마스 뮌처
토마스 뮌처
그는 신비주의자였으며 성경을 통한 문자적 배움보단 영적인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는 성경이란 그저 과거의 영적인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보는 수단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농노들, 심지어 외국인들일지라도 그 스스로가 영적인 경험을 겪게 된다면 모두가 참된 기독교도라고 주장하였으며 그렇기에 참된 믿음과 참된 이해를 독점하는 교황과 기존 가톨릭 세계를 비판하였고 오직 성경만을 외치며 문자적 교육만을 외치던 루터와도 반발을 겪게 되었다.
너희가 해야할 일은 인내하며 너의 비옥한 마음에 자란 너희의 잡초와 가시를 뽑아내게 하는 하느님께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한자라 할 지라도 마귀만이 자라날 것이니 너희가 성경을 모두 독해했을 지라도 농사를 지어봐야한다.
토마스 뮌처
토마스 뮌처
또한 그는 이러한 영적인 경험은 바로 영적 혹은 육체적 고통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난, 노동, 정결함 등으로 고통이라는 것을 겪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노동의 가치를 높게 봤는데 그는 농사 한 번, 일 한 번 하지도 않았으면서 성경을 다 읽었다며 자신을 진실된 기독교 교도라고 믿던 교황, 사제들에 대해 너희가 아무리 성경에 대해 빠삭할지라도 농사 한 번 안 지어 봤으면 마귀가 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을 위한 순수한 경외만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그대들의 희생은 헛된 것이고 그저 가슴만 아픈 고통이 될 뿐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린 다시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고난 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대는 마귀를 위한 순교자가 될 뿐입니다.
토마스 뮌처. 프랑켄하우젠 전투 직전의 연설에서
토마스 뮌처. 프랑켄하우젠 전투 직전의 연설에서
또한 그는 사회 변혁의 대한 변증법을 애기함에 있어서 변증법을 이루는 요소는 하느님의 대한 순수함 경외와 인간의 대한 경외라고 말하였다. 그는 사회가 좋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향한 경외만이 있어야만 하며 인간의 대한 경외는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사회적 신분에 관계 없이 참된 신자는 인간을 경외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만을 경외해야 한다며 모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신분의 대한 폐지를 지지했다.
에스겔 14장에서는 하느님이 모든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명을 수행할 사람을 만들려고 하고 도우려고 하였다. 하늘의 새와 거리의 들짐승들이 폭군의 살을 삼키며 부패한 세상을 멸한다고
다니엘 7장에도 써있었다. 그리고 그 심판의 권세는 바로 우리 평범한 민중에게 있다.
토마스 뮌처가 1525년 에어푸르트 사람에게 보낸 편지
토마스 뮌처가 1525년 에어푸르트 사람에게 보낸 편지
또한 그는 종말론자였는데 그는 하느님이 분명 이 세상의 썩은 부분을 도려낼 것이고 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것은 참된 신자인 농노들이 하느님의 영적인 경험과 뜻을 토대로 그들을 도와 이루어낼 것이라고 봤고 이 일로부터 그는 인류의 새시대와 참된 신자를 필두로 하는 새 인간이 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하는)인 사제들의 부패함을 꼬집으며 참된 신자인 농노들이 대놓고 너희 부패한 마귀 사제를 심판할 것을 하느님이 도와주신다고 말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사상은 고통을 통한(특히 노동과 압제의 대한 투쟁) 영적, 육체적 경험, 인간 경외의 부정, 오직 선택된 이들만이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것의 대한 거부, 그리고 Omnia sunt communia(모든 것은 공공의 것이다.)로 대표되는 공동체적 사상과 결부되어 단순히 개인주의적 해방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억압받던 이들 전체의, 실제로 노동하며 사회를 꾸리던 이들 전체의 해방을 애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는 독일 농민전쟁 당시 지역 곳곳에 협동조합을 만들어 꾸렸던 바를 볼 때 그의 신학은 필시적으로 사회변혁으로 밖에 갈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초기 공산주의 즉 기독교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의 시초로도 여겨지기도 하며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뮌처의 사상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다만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뮌처는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직 봉건제의 완전한 철폐까진 못 갔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