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6:57:10

보헤미아 왕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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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cc21> 보헤미아 왕관령
뵈미셴 왕관령, Länder der Böhmischen Krone( 독일어)
체스케 왕관령, Země Koruny české( 체코어)
파일:보헤미아 왕관령 국기.svg 파일:보헤미아 왕관령 국장.svg
국기 국장
지도
파일:Böhmischen(kaiserlich und königlich).png
1348년 ~ 1849년
지리
위치 <colbgcolor=#fff,#191919>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수도 프라크(프라하)
인문환경
언어 체코어, 독일어, 폴란드어
종교 가톨릭
민족 체코인, 독일인, 폴란드인
정치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경제
통화 탈러

파일:1458px-Verwaltungsgliederung_Länder_der_Böhmischen_Krone_1893.svg.png

1. 개요2. 역사

[clearfix]

1. 개요

보헤미아 왕국과 왕국의 영지의 집합체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2. 역사

2.1. 룩셈부르크 왕조의 지배

룩셈부르크 왕조 출신의 카렐이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등장했다. 1346년 황제선거에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루트비히 4세 대립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던 카렐은 보헤미아 국왕 대관식을 위해 보헤미아 왕국의 수호 성인 성 바츨라프의 이름을 딴 성 바츨라프의 왕관(Svatováclavská koruna)을 제작하여 보헤미아 국왕의 권위를 전 유럽에 드높이고자 했다.

1355년 4월 5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로 대관식을 치른 카렐은 1356년 금인칙서를 발표하여 모라바 변경백국, 슬레스코 공국, 루지체 변경백국, 그리고 몇몇 주교후의 봉토를 보헤미아 왕관령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카를 4세의 후계자 바츨라프 4세는 부친이 견고하게 닦은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얀 후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사형된 여파로 후스 전쟁이 일어났다. 반란에 충격 받은 바츨라프 4세는 사망했고, 뒤를 이어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이었던 이복동생 지그몬드가 선출되었다.

2.2. 후스 전쟁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후스 전쟁은 보헤미아 왕국을 휩쓸었지만,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는 후스 전쟁의 전화에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다. 지그몬드는 보헤미아 국왕으로도 인정받았으나 얼마 못가 사망했고, 지그몬드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가 보헤미아 국왕 알베르트로 선출되었으나 그 역시 2년 만에 사망했다. 알베르트의 유복자 라디슬라프가 국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실권은 후스주의를 믿은 귀족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넘어갔다. 라디슬라프 사후 선출된 이르지는 후스주의와 가톨릭의 조화를 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의 공격으로 모라바와 슬레스코 대부분을 점령당했다. 반 헝가리 민중 봉기로 헝가리군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는 후스주의였던 이르지 대신 마차시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보헤미아 본토에서는 여전히 이르지가 우세했지만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를 승인하여 보헤미아 왕관령은 분열되었다. 이르지가 죽고 난 뒤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의 맏아들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선출되어 블라디슬라프로 즉위했지만 여전히 보헤미아 왕관령은 분열된 상태였다.

2.3. 야기에우워 왕조의 지배

마차시 1세 사후 블라디슬라프는 보헤미아 왕관령 전역에서 인정을 받았고, 역으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수도 부더로 건너간 울라슬로 2세는 보헤미아 국정 운영을 귀족들에게 넘겨버렸다. 울라슬로 2세가 죽은 뒤 어린 루드비크가 즉위했지만 그 역시 헝가리에 머물렀고, 보헤미아 국정은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1]를 중심으로 한 귀족 의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2.4.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

1526년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가문 페르디난트 1세 대공이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과 달리 보헤미아 영토를 지켜내지 못했다. 루지체 변경백국은 30년 전쟁 도중인 1635년 프라하 평화조약으로 작센 선제후국으로 넘어갔으며, 1742년 6월 11일 브레슬라우 조약으로 슬레스코 대부분이 프로이센 왕국에 할양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슬레스코를 되찾기 위해 동맹의 역전까지 일으켜가며 7년 전쟁을 일으켰으나 슬레스코를 결코 되찾지 못했다.

합스부르크 가문 국왕들은 보헤미아를 억압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예수회를 초빙하여 대항 종교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자유도시를 억압하고 오스트리아 중심의 관료제를 도입하였다. 페르디난트 2세 30년 전쟁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보헤미아 귀족들을 억압하고 합스부르트 가문에서만 왕위 후보자가 배출될 수 있도록 강요하였다. 페르디난트 3세 레오폴트 1세 치세를 거치며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은 더욱 억압을 당했고 그 자리는 독일인들이 이주해와 채웠다. 설상가상으로 1749년 5월 2일,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보헤미아 왕관령은 사실상 해체되어 보헤미아 국정은 에서 처리되기 시작했으나 법적으로는 1918년까지 존속했다.

2.5. 19세기: 체코 민족주의의 발흥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선포되었으나 보헤미아 왕관령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달리 오스트리아 산하 구성국에 불과한 신세였다. 18세기 말부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체코인 상공 시민 계층을 중심으로 민족 문화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고,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어와 체코 민족주의도 서서히 불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온 독일인의 지배로 대부분 귀족계층이 이미 독일화되고 주데텐란트 프라하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독일인으로 채워지는 등 체코인이 설 자리는 없었다. 1848년 혁명 당시 프라하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으나 보기좋게 실패했고, 결국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를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호 아래 자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오스트로슬라브주의(Austroslavismus)가 체코인 사이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오스트로슬라브주의는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우는 러시아 제국 범게르만주의를 앞세우는 독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뿐, 결코 합스부르크 가문이 좋아서가 아니었다.[2] 상공업이 발달한 보헤미아였지만 오스트리아 빈 정부에게 보헤미아는 돈줄에 불과했고, 자치권 부여는 논의 대상도 아니었다. 대타협으로 헝가리가 주권을 되찾고, 크로아티아인도 폭넓은 자치를 누린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체코인의 입지는 여전히 2등 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체코인 민족주의 운동은 사그라들기는 커녕 점점 타올랐고 주데텐란트와 프라하 독일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코어 공용어로 지정었으며 프라하 대학교가 체코 학교와 독일 학교로 분리되는등의 성과도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제위 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체코인을 포함한 슬라브인에게 대거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제국을 개편하려 계획했으나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면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보헤미아 왕관령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빨려들었다.

2.6. 해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주요 전장터는 서부의 이탈리아 반도와 동부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었기 때문에 체코는 전화에 직접 휩쓸리지는 않았다. 대다수의 체코인 역시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지지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정부 모두 체코인에게 자치를 부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빈 정부의 의중을 파악한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는 1916년부터 제국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고 이대로 가다가는 체코인마저 전범으로 놓일 위기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헝가리 치하에서 압제받는 슬로바키아인과 손잡고 독립을 선언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막을 내려 카렐 3세는 퇴위하였고 보헤미아 왕관령은 해체되었다.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귀족제도를 폐지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위 시도를 차단하였다.
[1] 프로이센 공국의 창립자 알브레히트 공작의 친형으로, 독일 종교 개혁에 헌신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2] 훗날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후 나치 독일에 의한 뮌헨 협정 소련에 의한 프라하의 봄이 일어난 것을 고려한다면 팔라츠키의 걱정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