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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 |
출생 | 1814년 |
사망 | 1888년 (향년 74세) |
시호 | 충문(忠文) |
본관 | 경주 이씨 |
자 | 경춘(景春) |
호 | 귤산(橘山), 묵농(默農) |
부모 |
부친: 이계조(李啓朝, 1792~1855) 모친: 반남 박씨 박종신(朴宗臣, 1754~?)의 딸 |
배우자 | 처: 동래 정씨 정헌용(鄭憲容, 1795~1879)의 딸 |
자녀 |
장남(양자):
이석영(李石榮, 1855~1934)[1] 차남: 이수영(李壽榮, ?~1880) 장녀: 풍양 조씨 조연빈(趙然斌, 1832~1859)의 처 차녀: 양주 조씨 조정희(趙定熙, 1845~?)의 처 3남(서자): 이호영(李虎榮) 4남(서자): 이표영(李豹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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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쇄국 정책을 추진하던 흥선대원군과 반목·대립하였고, 김홍집 등과 함께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6형제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이석영의 양부로 실제 혈통은 13촌 숙부이다.2. 생애
1814년(순조 14) 출생하였다. 선조조 영의정 오성부원군 문충공 백사 이항복의 9대손으로, 조부는 이조판서 이석규(李錫奎, 1758~1839), 부친은 이조판서 이계조(李啓朝, 1793~1856)이다.1841년(헌종 7) 문과에 급제하였다. 1850년(철종 1) 1월 이조참의가 되었고, 동년 12월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851년(철종 2) 성균관 대사성, 1855년(철종 6) 이조참판, 1858년(철종 9) 사헌부 대사헌, 1859년(철종 10) 형조판서를 지냈다. 1860년(철종 11) 1월 의정부 참찬, 동년 2월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동년 3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동년 11월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1년(철종 12) 6월 형조판서, 동년 9월 공조판서를 지냈고, 동년 11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1862년(철종 13) 12월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즉위 후 1864년(고종 1) 6월 좌의정이 되었고, 동년 8월 좌의정으로서 실록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고종 10)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 시절, 호조참판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추진하였다. 1875년(고종 12) 주청사로 청나라로 갔다가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유원은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는 폐단이 없지 않다고 고종에게 고하였고, 이로 인해 수구파의 큰 반발을 얻었다. 1881년(고종 18) 만언척사소로 인해 사직하였다.
1882년(고종 19) 7월 17일 봉조하(奉朝賀) 이유원은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서 일본국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 義質)와 함께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동년 11월 21일 상호도감의 계청으로 익종대왕추상존호금보전문서사관으로 차출되었으나, 동월 27일 이유원의 상소로 체차(遞差)하고 윤의선(尹宜善)을 임명하였다.
1885년(고종 22) 1월 10일 12촌 아우인 이유승(李裕承)의 차남 이석영(李石榮)을 양자로 삼아 제사를 잇는 문제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윤허받았다.
1888년(고종 25) 4월 강녕전(康寧殿)의 상량문 제술관에 차출되었다. 이때 12촌 아우인 이유승은 자미당(紫微堂)의 현판 서사관에 차출되었다. 동년 9월 5일 병세가 심해지자 고종이 어의에게 필요한 약물을 가지고 가서 병세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다음날인 9월 6일 사망하였다.
3. 사후
1888년(고종 25) 9월 6일 봉조하(奉朝賀) 이유원이 사망하자 고종이 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제문(祭文)을 직접 짓겠다고 하였으며, 의주견권(倚注繾綣)[2]이라는 네 글자로써 표창했다. 11월 7일 시호를 충문(忠文)으로 하였다.4. 여담
본래 이유원은 이수영이라는 외아들이 있었으는데 모 판서의 딸과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악성 종기로 인해 후사없이 죽고 말았다. 이에 같은 문중의 판서 이주영의 둘째 아들을 죽은 이수영의 양자로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온 양자는 효심이 깊어 이수영의 부인, 즉 양어머니의 잠자리 시중을 들곤 했는데 서로 또래이다 보니 결국 연애로 변해 불륜까지 저지르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륜사실을 이유원에게 고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에 놀란 이유원은 은밀히 상소를 올려 과부며느리와 그 양아들을 가문에서 끊어버렸고, 이유승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니 그가 이석영이다.[3]당대 어마어마한 갑부로,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사는 곳인 양주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오르내렸다'는 말이 전할 정도이다.[4] 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양자 이석영은 이를 처분하여 형제들인 이회영, 이시영 등과 함께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