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우당 이회영 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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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 서훈 내역 | 비고 |
첫째 이건영 |
건국훈장 애족장 (1999) | ||
이규룡 |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이건영의 장남 | |
둘째 이석영 |
건국훈장 애국장 (1991) | ||
이규준 | 건국훈장 애족장 (2008) | 이석영의 장남 | |
셋째 이철영 |
건국훈장 애국장 (1991) | ||
넷째 이회영 |
건국훈장 독립장 (1962) | ||
이은숙 | 건국훈장 애족장 (2018) | 이회영의 처 | |
이규학 |
대통령표창 (1982)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이회영의 차남 | |
장해평 | 건국훈장 독립장 (1963) |
이회영의 차녀 이규숙의 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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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창 | 건국훈장 독립장 (1968) | 이회영의 3남 | |
다섯째 이시영 |
(대한제국)
훈3등팔괘장 (19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49) |
초대 부통령 | |
이규창 | 건국포장 (2008) | 이시영의 장남 | |
여섯째 이호영 |
건국훈장 애족장 (2012) | ||
•
조정구(이규학의 장인) - 건국훈장 애족장 (2019) • 정이형( 이규창의 장인) - 건국훈장 독립장 (1963) • 신익희(매제 신재희의 동생)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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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3년 5월 12일 |
경기도 개성군 흥교면 사곡리 | |
사망 | 1940년 12월 29일 (향년 87세) |
본관 | 경주 이씨 |
자 | 백순(伯純) |
이명 | 이희(李喜) |
부모 |
부: 이유승 모: 동래 정씨 |
배우자 |
초배:
반남 박씨 (1853~1869) 재배: 칠원 윤씨 (1856~1875) 3배: 장수 황씨 (1855~1884) 4배: 안산 김씨 (1868~?) |
자녀 | 자: 이규룡[1], 이규면, 이규훈 |
형제자매 | 제: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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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53년 5월 12일 경기도 개성군 흥교면 사곡리에서 이유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10대조가 이항복이다. 자는 백순(伯純)이고, 이명은 이희(李喜)이다. 동생 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李始榮)·이호영 등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운영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슬하에 이규용(李圭龍)·이규현(李圭鉉)·이규훈(李圭勛) 등을 두었다.대한제국 시기 익위사 부사를 역임하였다. 1909년경 형제들이 활동하던 신민회(新民會)가 국내 활동이 어려워져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계획하자, 형제들과 협의해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이주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상룡(李相龍) 등과 협의하여 구체적인 이주 계획을 수립하고, 1910년 말~1911년경 중국 펑톈성[(奉天省) : 현 랴오닝성(遼寧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이주하였다.
1911년 초 이상룡 등이 합류하고, 한국에서 이주해 온 수백명을 모아 경학사를 조직해 만주에서의 농업이민자간 상호 보조와 현지 적응을 시도하였으나 흉년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은 후일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의 단체 설립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이들은 농업 조직뿐만 아니라 근대교육과 민족의식 함양은 물론 일선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할 무관 양성을 위한 학교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1911년경 추가가에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이관직(李觀稙)·이장녕(李章寧)과 이동녕(李東寧) 등을 섭외하여, 6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군사교육 능력을 배양하도록 하였다.
1919년에는 본격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표방하고 점차 규모를 확대하여 고산자가(孤山子街) 대토자촌(大肚子村)에 교사를 신축하고, 퉁화현(通和縣) 쾌대모자(快大帽子)·린장현(臨江縣) 토애(土崖)·하이룽현(海龍縣) 성영하자(聖永河子) 등에 분교를 설치하였다. 또한 검성중학(儉成中學)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등에 교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이후 교육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학교의 운영 수요와 비용 등이 증가하자, 형제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행정을 도맡아 1914년 12월경에는 직접 경리(經理)로 근무하였다.
1919년 2월경에는 동생 이철영·이호영 등과 함께 학교의 운영과 교련생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병농일치(兵農一致) 운영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농산가공품을 매각해 학교의 운영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이 일제 측에게 포착되기도 하였다.한편 신흥무관학교와 별개로 서당을 경영하며 유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고, 이후에 펑톈성 보안보(保安堡)에서 거주하다가, 다시 서탑(西塔) 3정목(丁目)으로 이주해 활동하였다.1926년 1월경 국내로 귀환하여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군내면(郡內面) 읍내리(邑內里)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힘써, 2,200원 가량의 재산을 소유하였다. 하지만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일제 경찰의 감시를 계속 받다가, 1930년 12월 2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
양자. 생부는 이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