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9 00:23:30

조정구(1860)

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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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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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860년생조정구.jpg
출생 1860년 7월 17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26년 3월 30일[1][2] (향년 67세)
경기도 경성부 원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본관 풍양 조씨
내경(來卿, 萊卿, 鼐卿) 또는 미경(米卿)
작농(芍農)·귤은(橘隱)·월파(月波)
월파거사(月坡居士)
부모 아버지 조동석, 어머니 대구 서씨
형제자매 남동생 조경구
자녀 아들 조남승, 조남익
친인척 장인 흥선대원군, 4촌 동생 조완구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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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고조부 조득영은 조만영· 조인영 형제의 8촌 형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였으며 고종의 매부였다.

초명은 조재구(趙載九)[3], 조인구(趙寅九)[4], 조석구(趙晳九)[5]였고, 최종적으로 조정구로 개명했다.

2. 생애

조정구는 1860년 7월 17일 한성부에서 아버지 조동석(趙東奭)과 어머니 대구 서씨 서기순(徐耆淳)의 딸 사이의 2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조참판을 지낸 작은아버지 조동필(趙東弼)은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아버지이다.

1873년 종7품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을 지내다가 21살이 되던 1880년( 고종 17) 증광시 문과에 병과 6위로 급제하였다. # 이후 규장각 대교, 부제학, 홍문관 판사를 거쳐 관직이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에 이르렀다. 1906년에는 을사늑약에 반대했다며 대한제국으로부터 훈2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여했으나 거부하고 병을 핑계로 대한의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며 #, 급기야는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어쨌든 남작 작위는 이후에 강제로 수여되었다가 1913년 5월 3일 공식적으로 반납되었다. #

한편 그는 경기도 양주군 건천면 사릉리(現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229번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1917년 금강산 유점사 반야암(般若庵)으로 들어가 승려로 활동했다. #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상경했고, 두 달 후 중국 하남성으로 망명했다. 그해 4월 23일 경성부에 배포된 「임시정부선포문」, 「국민대회취지서」, 「선포문」에 ' 임시정부'의 평정관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며, 순종이 사망 직전 한 유언을 신한민보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차남 조남익(趙南益)의 부고를 접한 그는 1925년 5월 26일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고향 경성부 돌아왔으며,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現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_에 있는 봉선사에 기거하다가 1926년 3월 30일 경기도 경성부 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동생 조경구(趙經九)의 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 1926년 4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2] 풍양 조씨 족보에는 1928년 7월 17일로 기록되어있다. [3] 1873년( 고종 10) 5월 7일 조인구(趙寅九)로 개명했다. [4] 1880년( 고종 17) 2월 12일 조석구(趙晳九)로 개명했다. [5] 1882년( 고종 19) 7월 16일 조정구(趙鼎九)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