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1:06:07

숙안공주

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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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효종의 왕녀
숙안공주 | 淑安公主
파일:숙안공주묘.jpg
숙안공주묘 전경
출생 1636년( 인조 14년) 6월 1일( 음력 4월 28일)
사망 1698년( 숙종 24년) 2월 2일( 음력 1697년 12월 22일)
(향년 62세)
능묘 숙안공주묘(淑安公主墓)[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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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왕 - 효종
모후 - 인선왕후
부군 익평위 홍득기(益平尉 洪得箕)
자녀 슬하 1남
아들 - 홍치상(洪致祥)
봉호 숙안군주(淑安郡主)[2]
숙안공주(淑安公主)
이칭 익평공주(益平公主)[3]
}}}}}}}}} ||
1. 개요2. 생애
2.1. 탄생2.2. 혼인2.3. 악행2.4. 기사환국2.5. 사후
3. 가족 관계4. 대중 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제17대 국왕 효종과 왕비 인선왕후의 차녀. 또한 현종의 친누나이자 숙종의 고모이다.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당대의 굵직한 사건에서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 생애

2.1. 탄생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언니가 있었으므로 효종의 차녀이나, 언니가 병으로 일찍 사망했기에 그녀가 실질적인 장녀였다.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효경, 내훈[4], 소학에 능통하였다.

2.2. 혼인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급사하는 정치적 혼동으로 그녀의 운명도 바뀌었다. 그해 윤6월에 봉림대군이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의 적통 소생에게 내려지는 작위인 군주(郡主)로 책봉, 이때부터 숙안군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만약 이때 인조가 봉림대군이 아닌 원손 경선군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했다면, 후일 그녀가 숙종 대에 갖게 되는 정치적 입지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1649년(인조 27) 부마 간택령이 내려지고, 홍명구[5]의 손자이자, 현감 홍중보의 아들인 홍득기(洪得箕)가 익평부위(副尉)가 된다.[6][7] 그러나 다음달인 5월 8일, 인조가 사망하면서 가례가 미뤄졌다.

그런데 효종이 즉위하고 1650년(효종 1) 청나라의 섭정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조선의 공주를 원했다. 이는 화의 과정에서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혼인하여 화친을 공고히 할 것' 이라는 조목과 관련이 있었고, 이미 인조 대에 조선의 여자들을 시녀로 차출해 간 바가 있었다. 그리고 도르곤이 "공주의 나이가 어리면 종실 가운데 적합한 자로 선택하여도 무방하다"는 조건까지 걸었다. 효종은 자신의 딸들은 물론이고 소현세자의 딸들도 청나라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8] 이미 혼인했거나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라는 식으로 둘러댔고 금림군 이개윤의 딸이 의순공주가 되어 청나라로 떠났다. 효종은 그해 8월 4일 숙안공주와 홍득기의 가례를 간략하게 치르게 한다.[9]

당연히 인조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비판을 받지만, 효종은 공주의 가례를 밀어 붙였고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이런 거조를 하게 된 것" 이라고 말했다.[10]

2.3. 악행

효종의 큰딸[11] 현종의 첫째 누나, 숙종의 첫째 고모인 숙안공주의 영향력은 이미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횡포를 일삼고, 백성의 땅과 세금을 함부로 갈취하여 탄핵과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12][13]

숙안공주는 그동안 효종의 차녀(실안적인 장녀), 현종의 둘째 누나, 숙종의 큰 고모로서 과분한 대우를 하지 않기 어려운 존재였다. 계조모인 장렬왕후 앞에서도 후술할 막말을 서슴치 않았고, 그 꼬장꼬장한 명성왕후 김씨도 손아래올케였다. 이런 점을 친정을 시작한 숙종도 인지하고 있었는지 일찍 졸한 효종의 장녀에게 공주의 직첩을 내림으로써 숙안공주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꺾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의 장녀이자 숙안공주의 언니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가던 부모를 따라 가다가 급사한 숙신공주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숙종 13년 동평군이 " 김수항(金壽恒)·이단하(李端夏)·이사명(李師命)과 숙안 공주(淑安公主)·숙명 공주(淑明公主) 두 공주(公主)는 마땅히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실록에 전하는데, 김수항과 이단하는 각각 영의정과 우의정, 이사명은 밀성군의 8대손으로 이이명의 형이자 당시 병조판서인 서인의 중심 세력이었다. 발언의 진위를 차치하더라도 숙안공주와 숙명공주는 숙종 연간 궁중 서인 세력의 중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 본인들보다 더 권세가 강했던 올케 명성왕후까지 사망하자 왕실 내외명부 중에서 숙종의 유일한 혈육들[14]이라는 명분까지 생기며 이들의 영향력은 더 거대해졌다.[15]

자의대비의 육촌동생 조사석이 정승이 되자, 숙안공주는 내전에 문안차 들어와서 자의대비에게 "조사석이 좋은 명정 감을 얻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명정(銘旌)이란 장례 때에 죽은 사람의 품계 등을 기록하여 관 앞에 세우는 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조사석이 좋은 명정 감을 얻는다.'는 소리는 조사석이 정승이 되어봤자 장례식 때 명정에 쓸 벼슬 품계를 그럴싸하게 쓸 거리가 생겼을 뿐, 정승다운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폄하이다. 직접적으로는 조사석을 폄하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조사석에게 정승 벼슬을 제수한 숙종을 돌려깐 셈이 된다. 이 때문에 숙종은 분노했으나 장렬왕후가 넘어가기로 한 탓인지 이걸 문제삼지 않았다.[16][17]

2.4. 기사환국

공주의 시가는 대표적인 서인 가문이라 공주도 서인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이후 기사환국이 터졌는데,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이 어머니를 믿고 악행을 거듭하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홍치상은 같은 동서이자 이종사촌인 숙명공주의 장남 심정보에게 누명을 씌워 유배가게 만들었다.[18][19]

기사환국으로 하나뿐인 아들 홍치상을 잃은 원한을 갚기 위해 서인에게 자금을 대어주고 환국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체포된 한중혁, 이시도 등의 자백으로 발각되어 극형을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갑자기 숙종이 태도가 바뀌어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뒤집어지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인현왕후 영빈 김씨는 복위되지만, 홍치상의 명예회복은 숙종이 죽을 때까지 금지되었다.

2.5. 사후

1697년(숙종 23) 12월 22일 지병인 숙환으로 사망하였다.[20] 한때는 정치적으로 부딪혔던 사이지만,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숙휘공주[21]의 장례에 의거하여 상제를 치르게 하고, 통곡하였다. 졸기에서는 숙신공주를 제치고 효종대왕의 제1녀라고 언급된다. 공주는 앞서 세상을 떠난 남편 익평위 홍득기와 합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전리 산 24에 있다.

3. 가족 관계

  • 시부 : 홍중보(洪重普, 1612 ~ 1671)
  • 시모 : 한산 이씨(韓山 李氏) - 이현영(李顯英)의 딸
  • 남편 : 익평위 홍득기(益平尉 洪得箕, 1635 ~ 1673)
    • 아들 : 홍치상(洪致祥, 1654 ~ 1689) - 기사환국때 처형됨
    • 며느리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 1674) - 이정영(李正英)의 딸, 영빈 김씨의 이모
      • 손자 : 홍태유(洪泰猷, 1672 ~ 1715)
      • 손부 : 전의 이씨(全義 李氏, 1672 ~ 1747) - 이징하(李徵夏)의 딸
    • 며느리 : 창원 황씨(昌原 黃氏) - 황진(黃璡)의 딸
      • 손녀 : 심증현(沈曾賢)의 처
      • 손녀 : 신사성(申思聖)의 처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서손녀 : 신영(申瑩)의 처

4. 대중 매체

  • 장희빈(2002)》 - 김영란
    실제 역사에서는 위의 악행 항목에 나와있듯 평가가 그리 좋은 인물이 되지 못하지만, 선역과 악역의 구분이 필요한 대중매체에서는 대체로 인현왕후편의 좋은 인물로 그려지는 편이다(..). 물론 출가한 공주임에도 궁궐을 마음대로 드나들고, 후궁인 장희빈을 하대하는 등 마냥 선역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악행 자체는 아예 그리지 않는 편.
    작중에서 장희빈( 김혜수 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궁궐에 들어와 장희빈의 군기를 잡는데, 절을 하라고 시키고는 '치마 접히는 소리'가 난다느니 하면서 절만 수십 번 시켜서 다리가 풀리도록 만든다. 심지어 회초리까지 들려고 하지만, 인현왕후( 박선영 분)가 달려와 만류하는 바람에 하지 못한다. 또한 조사석과 장희빈의 어머니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주동자이기도 하다.

    결국 장희빈 때문에 아들 홍치상까지 잃으면서도 서인의 편에 서서 온 힘을 다해 인현왕후를 돕는다. 작중에서 숙안공주의 왕실 내 위치 때문에 숙종( 전광렬 분)도 쉽게 어쩌지 못하는 걸 이용하는 편.[22][23] 그렇게 아들을 잃고 마음의 병을 얻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죽는 순간까지 인현왕후를 걱정하다가 결국 인현왕후의 복위와 갑술환국을 보지 못 하고 숨을 거둔다.


[1] 남편 홍득기와 합장되었으며, 두 사람의 합장묘는 양평군 향토유적 제 28호로 지정되었다. [2] 인조실록 24년 12월 25일 정유 3번째기사 [3] 남편 홍득기의 봉호 익평위(益平尉)에서 유래된 호칭. # [4]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쓴 책으로, 당대 여성들을 위한 유교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5]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동생인 홍명하는 효종대의 명신이다. [6] 부위는 군주의 남편에게 내리는 작위로 종1품에 해당한다. [7] 홍득기는 이전에 인조의 딸 효명옹주의 부마간택에 후보 3명(김세룡, 홍득기, 정재악(정태화의 아들로 숙정공주의 남편인 정재륜의 형)에 들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이 부마가 된다. [8] 조카들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한게 아니라 소현세자의 딸들을 청나라에 보낸다고 하면 자신에게 쏠릴 왕실과 종친의 비난부터 대내외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9] 먼저 숙안공주의 가례를 치르고, 8월 9일 소현세자의 장녀 경숙군주도 가례를 치른다. [10] 효종실록 5권, 효종 1년 11월 5일 을묘 2번째기사. # [11] 물론 실제로는 차녀지만 실질적으로는 장녀였다 [12] 당시 조선왕조실록. # # [13] 효종의 5녀인 숙정공주 등도 함께 비난받았다. [14] 명안공주조차 1687년에 장렬왕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15] 결국 이들의 영향력은 1688년 왕실최고어른인 장렬왕후가 사망하고, 기사환국 등을 걸치며 사라지게 된다. [16] 숙종은 의외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증조할머니 장렬왕후와 사이가 좋았다. 우선 장렬왕후 본인도 성품이 후덕하고 선한 편이었고 송시열은 한원부원군(장렬왕후의 부친) 신도비명에 자의대비를 후덕하다고 쓰기도 했다. 인자한 성품이었던 친할머니 인선왕후와 아버지 현종이 불과 14살 때 6개월 간격으로 사망한데다 친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즉위 초기부터 꾸준히 내정에 간섭하면서 반목했고, 조강지처 인경왕후의 3년상도 제대로 못 치르게 한데다 장희빈을 내쫓고 인현왕후와의 가례를 억지로 추진하면서 생각보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친고모라지만 중전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젠 나이도 많은데다 자신과 사이도 좋은 장렬왕후의 면전에다 대놓고 망언을 내뱉은 숙안공주에게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17] 홍치상이 공주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역모도 아니고 단순한(?) 악행을 이유로 죽은 이유도 이런 배경이 깔려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실 어른을 능멸하는 패륜 행위는 아무리 왕족이라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근대까지도 엄격히 처벌할수 있는 문제였다. 현대에서도 명예훼손죄로 큰 벌금을 물 수 있다. 정황상 당사자인 장렬왕후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으니 그녀의 살아생전에는 어떻게든 무마된 것인데 오히려 장렬왕후까지 사망한 상태에서 국왕이자 왕실 최고 서열이 된 숙종 입장에선 여전히 악행을 저지르는 홍치상을 봐줄 수 없었고 봐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18] 홍치상과 심정보의 아내들은 이정영의 딸이자 서로 자매 사이로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이모들이다. [19] 한편 홍치상이 처형당한 기사환국이 발발한 원인으로는 1년 전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사망으로 숙종의 환국과 숙청을 제지할 왕실어른이 전무했다는 점이 매우 컸는데, 숙안공주는 장렬왕후가 사망하기 불과 1년 전인 1687년에 장렬왕후의 6촌 동생인 조사석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린 주동자였고 그 유언비어로 명색이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위신을 깎아내렸다. 그 당시에도 병환을 앓고있던 장렬왕후는 이로 인해 더욱 맘고생을 하다가 결국 1년 후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창경궁 내반원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어찌보면 숙안공주는 자신이 주도한 유언비어로 장렬왕후의 사망을 앞당기는 바람에 역으로 숙종의 서인 숙청을 막아줄 왕실어른을 하나 없애 버리게 되면서 아들 홍치상이 처형당한 기사환국의 시기를 앞당기게 되었으니 인과응보를 혹독히 치른 셈이다. [20]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2월 22일 무진 4번째 기사. # [21] 숙안공주의 친동생. 숙안보다 1년 먼저 죽었다. [22] 작중에서 숙종에게 아들 홍치상이 자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애원했고, 고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 한 숙종은 홍치상에게 사약을 내려 시신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23] 장희빈이 홍치상에 이어 숙안공주도 처벌해달라고 청하지만, 숙안공주의 위치 때문에 숙종이 곤란해하며 대신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확답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