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23:07:42

화번공주

중국어: 和親公主 (허친공주)
일본어: 和蕃公主 (와반코슈)

1. 개요2. 사례3. 실존 인물4. 관련 작품

1. 개요

중국 역대 왕조에서 정략적인 이유로 이민족의 왕에게 시집 보낸 황제의 딸 혹은 황족의 딸을 일컫는다.

비록 공주라는 이름으로 시집을 가는 모양새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이민족에게 인질로 보낸다는 의미가 크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1] 공녀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2. 사례

다만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서류가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던 옛날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실제 공주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거의 모든 경우 자기 친딸을 이민족에 인질로 보내고 싶지 않은 황제들은 종친의 여식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양녀로 삼아 보냈고, 심지어는 아무 궁녀 하나를 잘 꾸며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전한 원제 때에 흉노 호한야 선우(왕)에게 화번공주로 간 왕소군이 대표적인 경우다. 다만 왕소군 자체는 공주로 속인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궁녀의 신분으로 보냈다. 이민족 왕들도 이들이 진짜 공주가 아님은 알고 있었으나 외교 관계로 인한 정략결혼이었으므로 그냥 그러려니 했다.

당나라는 화번공주를 시집 보냄으로써 그 민족을 회유하고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견제하였으며, 화번공주를 맞아들인 민족은 군주권을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다. 하지만 화번공주라고 모두 신세가 좋지는 않았는데, 당나라와 자주 싸운 거란족한테 시집을 간 화번공주들은 거란족이 당나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장 먼저 거란족들한테 죽임을 당하는 위험한 신세이기도 했다.

원나라 고려 왕실에 공주들을 시집 보냈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 국왕의 제1왕비 자리는 원나라 공주들이 독점했다. 황족 출신이 아니더라도 몽골인이면 고려인보다 우선 순위가 되었다. 이들 역시 대부분 종친의 딸이고 충렬왕의 아내 제국대장공주만 대칸의 친딸이다. 그녀들은 친정의 막강한 위세를 등에 업고 횡포가 대단했고,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도 업신여겨 부부 사이도 좋지 않았다. 이들 중 단 한 사람,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만이 남편과 금슬이 좋았고, 남편의 반원 개혁 정책을 지지해주었다.

화번공주들은 결혼 후 이민족의 땅에 거주하며, 그곳에 중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화번공주라고 하긴 경우에 맞지 않으나 조선에서도 공주 작위를 받고 청나라에 시집 간 공주가 있다. 의순공주였는데, 왕실의 먼 친척으로 당시 청나라 실세였던 도르곤에게 시집 갔다가 도르곤이 죽자 형사취수 풍습에 따라 남편의 조카와 재혼하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일찍 죽고 조선에 귀국, 안타깝게도 비참한 삶을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명나라가 강화 협상을 할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건 협상 조건 중에는 "명나라의 황녀를 천황 후궁(!)으로 보낸다"는 조건이 있었다. 차라리 천황의 정식 황후나, 혹은 실권자인 히데요시 본인의 정실 부인이었다면 명나라 측에서도 '적당한 여인을 화번공주의 형태로 보내는 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겠는데?'라고 검토를 할 여지라도 있었다. 하지만 정실도 아니고 후궁이었으니 당연히 명나라에선 검토할 여지고 뭐고 없었고, 협상은 그대로 결렬되었다.

3. 실존 인물


4. 관련 작품



[1] 정략결혼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중국 왕조의 국력에 따라 대우의 차이가 있다. [2] 엽교미에 시집을 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다, 엽교미의 손자인 잠추와의 사이에 1녀를 남기고 죽었으며 사후에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에서 묻힌다. [3] 세군 사후 잠추의 처로 들어오나 세군과 달리 그곳 풍습에 적응하고 여러 자녀를 두었다.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에서 묻힌 세군과 달리 고향 한나라로 돌아와서 여생을 보낸 뒤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