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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성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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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가족 관계
연호 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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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성세
康乾盛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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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Qing_China_Map_1820.jpg
건륭제, 옹정제, 강희제의 초상화와 청나라의 최대 강역
1661년 ~ 1799년
고사성어
편안 강 하늘 건 성할 성 대 세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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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강희제 - ( 옹정제) - 건륭제 시기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말이다. 문경지치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서 이름난 태평성대 중 하나다. 실제로는 이 두 황제 사이에 옹정제가 끼어있지만 60여 년에 달하는 둘의 재위기간에 비해 10여 년으로 재위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민간에서는 폭군이라는 인상이 강한 편이었기 때문에 생략 당하는 경우가 많다.[1] 다만 강옹건성세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강건을 두 연호의 두문자어가 아닌, 일반적으로 쓰이는 한자어'강건'(剛健)으로 혼동하기 쉽다. '전성기니까 강건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2. 상세

청나라가 6대 180년 동안 팽창을 거듭한 것은 마치 하나의 기업이 창업자로부터 그의 6대손에 이르기까지 ‘오너’의 직접 경영 아래 고속 성장을 멈추지 않은 것과 같았으니 실로 역사의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었다.

... 능력을 검증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순치제를 제외하더라도 누르하치, 홍타이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5명의 군주는 모두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능한 통치자였다. 또한 건륭제 이후에도, 적어도 1850년경까지의 청나라 황제들은 군주로서 평균 수준은 되었다.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2012, [ebook]

후금에서 시작한 청나라 천명제 누르하치 시절부터 파죽지세의 성장을 계속하다 4대 황제 강희제 시대부터 국력의 절정기를 맞는다. 이후 강희제의 아들과 손자인 옹정제, 건륭제를 거치며 총 135년에 걸쳐서 청은 문화, 민생, 경제, 무역 등의 여러 방면에서 많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농업, 상공업 등의 생산 및 기술력 등 상업 분야가 대폭 발달되고 다양한 종류의 상품, 문물들이 대상인과 상점을 통해 유통되어 경제가 발달하였다.

또 그간의 중국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인 중원(혹은 만주 포함) 외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칭하이, 티베트, 몽골, 연해주에 이르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능가하는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기도 하면서, 이시기 청나라는 유럽 러시아 등지에서 관련 학파가 생겨날 정도로 관심을 받는 유라시아의 대제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사실상 오늘날 다민족국가 중국의 기원이 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비록 건륭제의 경우는 말기부터 잦은 대외원정으로 군비 증가, 황실과 귀족들의 사치 등으로 이미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지만 대외확장이라는 명백한 공이 있으며,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능한 통치자였다.

사실 강건성세 후에 청은 쇠퇴하는데, 19세기 들어 청이 서구 문명에게 기술·사상·군사적으로 열세를 보이는 게 명백해졌고 아편전쟁은 그 대표적 사건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 시대인 강건성세에 탓을 돌리기도 어려운데, 청나라 쇠퇴의 근본 원인들은 건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구조적 모순(만한갈등)이거나 문명사 레벨의 거대한 파도(서세동점)였기에 명군 뽑기운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강건성세 후 1850년경까지도 청엔 암군이 없었다.


[1] 조선 숙종 영조 사이의 경종을 생략해서 '숙영조'라는 말을 쓰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