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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오홍근 테러사건 | |
<colbgcolor=#bc002d,#000> 일시 | 1988년 8월 6일 |
위치 | |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132-19 | |
유형 | 백색테러 |
가해자 | 육군정보사령관 이진백 소장 외 7인[1] |
피해자 |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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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8년 8월 6일 육군정보사령부 소속 현역 군인들이 중앙일보의 자매지인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기자를 대검으로 공격한 백색테러 사건.국군정보사령부의 대표적인 흑역사이자 국내 불법공작 사례 중 하나다.
2. 배경
오홍근 기자는 전두환 정권 때부터 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들을 비판했기 때문에 군부에서는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두환 정부가 무너지고 노태우가 직선제 선거에서 당선된 가운데 제5공화국의 독재 잔재 청산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높아져 가던 상황에서 오홍근은 중앙일보의 월간지인 월간중앙 1988년 4월호부터 '오홍근이 본 세상'이라는 칼럼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했다.오홍근은 월간중앙 1988년 8월호에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1988년 7월 2일 국회에서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사건에 대해 논평하면서 '6공화국의 집권층이 국민과 사법부와 입법부를 보는 시각이 잘못돼 있으며, 그같은 시각은 바로 군사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논조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3]
이후 신문사로 항의 편지가 오거나 오홍근에게 직접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 등 신변에 위협이 닥치기 시작했다.
3. 상세
6일 상오 7시 30분쯤 서울 강남구 청담동 132의 19 대주사우나 앞길에서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이 30대 괴한 3명에게 왼쪽 대퇴부를 예리한 흉기로 찔려 전치 3주의 상처를 입었다.
경찰은 지난 4월 말쯤 신문사로 "몸조심하라" 협박 전화가 두 차례 걸려왔었으며 지난 4월 초에도 집으로 주소를 묻는 괴전화가 걸려왔었다는 오씨의 말에 따라 기사와 관련된 원한관계 범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펴고 있다.
中央經濟(중앙경제) 사회부장 세 怪漢(괴한)에 被襲(피습) 부상, 1988년 8월 8일 경향신문
8월 6일 오전, 트레이닝복을 입은 청년 3명이 자택 앞에서 출근하려던 오홍근을 습격했다. 매우 큰 위기였으나 때마침 출근했던 아파트 경비원 덕분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경찰은 경비원 중 한 사람의 증언 덕분에 수상한
현대 포니 차량이 오홍근의 자택 주변에 주차되어 있었음을 알아냈다. 경비원은 아파트 내에서 도난 사건이 자주 일어났던 탓에 낯선 차만 보이면 일단 차량 번호를 적어 놓았다고 말했다. 차량 번호를 조회한 결과 해당 차량이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은 지난 4월 말쯤 신문사로 "몸조심하라" 협박 전화가 두 차례 걸려왔었으며 지난 4월 초에도 집으로 주소를 묻는 괴전화가 걸려왔었다는 오씨의 말에 따라 기사와 관련된 원한관계 범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펴고 있다.
中央經濟(중앙경제) 사회부장 세 怪漢(괴한)에 被襲(피습) 부상, 1988년 8월 8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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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입원한 오홍근 기자의 모습 |
오홍근은 월간중앙 4월호에 서울지하철공사의 군 출신 사장이 사단장 시절 부하들을 요직에 앉혔다는 의혹을 다뤄 37명이 인사조치된 적이 있었는데 한때 이들 중 누군가가 원한을 품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서울지하철공사 전 사장인 김재명 등에 대한 수사에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8월 23일, 한 익명의 제보자가 중앙일보에 "정보사 소속 부대원 4명의 사건 당일 행적이 불분명하다"며 4명의 신원을 제보했다. 수사 결과 결국 제보자가 말한 부대원 4명이 오홍근을 테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검거된 자들은 오홍근의 칼럼에 불만을 품은 부대원끼리 그를 혼내 주겠다는 생각으로 저지른 개인적인 테러라고 주장했지만 범행을 지시한 배후가 분명 있으며 이들이 사건을 축소 및 은폐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강하게 일었다. 체포된 4명 외에도 현장에 4명이 더 있었다는 의혹, 현역 장성들이 개입되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국회와 시민사회가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국방부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정보사 예하부대장 이규홍 준장[5]이 부하 박철수 소령에게 지시했고 박 소령은 산하 요원 4명에게 작전 실행을 맡겼다. 당시 육군정보사령관 이진백 소장[6]은 사건을 보고받고도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결국 예편되었다.[7]
4. 전말
1988년 8월 31일 국방부가 공식 발표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일시 | 내용 |
1988년 7월 22일 |
오전 11시경 제5616부대 예하부대장인 이규홍 준장은 오홍근이 쓴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 칼럼을 읽고 분개하여 부하인 박철수 소령에게 '한번 혼내주라'라고 지시했다. |
7월 24일 ~ 8월 1일 |
박철수 소령은 전화번호부 및 언론인 명부에서 오홍근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이후 소속 부대 차량인 서울 1거 6873호 포니 엑셀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여 단독으로 청담동 동사무소에서 오홍근의 주민등록등본 1부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동사무소 부근 부동산에서 삼익아파트 평면도 1부를 획득해 오홍근의 집 주변을 1차 관찰했다. |
8월 2일 | 부대장 사무실에서 이규홍 준장에게 준비 사항을 보고한 박철수 소령은 '치명적인 상해는 입히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
8월 4일 | 오후 4시경 박 소령은 자신의 부하인 안선호 대위·남정성·김웅집·이우일 하사 등 4명을 행동대원으로 선발해 칼럼 기사내용을 소개하는 등 범행 계획을 설명했다. 소속 부대에서 사용 중인 길이 25㎝ 과도 3개를 하사관 3명에게 나누어주면서 '죽이지는 말고 혼만 내주라'고 지시한 후, 같은 날 오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6873호 차량과 5616부대 소속 서울 1라 3406호 포니2 승용차를 이용, 청담동 삼익아파트에 도착하여 미리 와있던 안 대위 및 하사관 3명과 함께 오홍근의 집 주변을 관찰 후 복귀했다. |
8월 5일 | 오후 6시쯤 안 대위와 김 하사·이 하사 등 3명에게 오홍근의 인상 및 귀가 시간을 확인시킨 후 박 소령이 오홍근의 다음날 출근 시간을 범죄 결행 시기로 결정했다. |
8월 6일 | 오전 6시경 안 대위는 하사관 3명과 함께 권진상 병장이 운전하는 3406호 차량을 이용해 청담동 삼익아파트 쇼핑센터 내 몽블랑제과점 앞에 도착하여 하사관 3명을 오홍근의 집 주변에 10m 간격으로 배치했다. |
오전 7시경 박 소령은 6873호 차량을 운전하고 삼익아파트 정문에서 남동쪽 450m 지점인 올림픽대로변 두산공원에 도착해 차량을 주차시킨 뒤 안 대위 등 4명과 합류한 후 권 병장에게 6873호 차량 열쇠를 주면서 안 대위와 함께 먼저 복귀하도록 하고 하사관 3명에게는 범행 종료 후 삼익아파트에서 북동쪽으로 300m 떨어진 한양아파트 1동 뒷골목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한 후 오전 7시 20분 남 하사로부터 집에서 나오는 오홍근을 발견하였다는 신호를 받고는 범죄 결행을 지시하고 바로 3406호 차를 직접 운전하여 약속된 집결지에서 대기하였다. | |
오전 7시 30분경 사고현장인 대주사우나 앞 영동대로변 인도에서 김 하사와 이 하사는 피해자의 양팔을 붙잡고 '당신이 오홍근이냐'고 물었으나 오홍근이 아니라면서 뿌리치고 택시를 타려고 하자 남 하사가 오홍근의 얼굴을 1회 때려 땅에 쓰러뜨린 후 미리 준비한 과도로 왼쪽 다리와 어깨를 1회씩 찌르고 김 하사 및 이 하사는 주먹과 발로 오홍근을 2~3회 때려 전치 3주의 상해를 가한 후 집결지에 모여 도주하였다. | |
이규홍 준장이 박 소령으로부터 범죄실행 종료보고를 받았다. | |
8월 8일 | 오후 5시경 제5616부대 참모장 권기대 준장은 선임자인 이 준장으로부터 오홍근 피습사건에 소속 부대 차량(서울1라3406호)이 관련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 준장과 수습방안을 상의한 후 범죄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했다. |
오후 6시경 소속대 병기지원대장에게 사고일 전후 위3406호 차량의 운행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관계서류 정리를 지시한 후, 재차 본부근무대장을 통해 차량의 흙받이 및 머플러 캡을 교환하는 등 차량의 부분 변조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 |
오후 7시경 경비소대장에게 정문차량 출입대장에서 4일부터 8일 사이 박 소령의 범행에 지원된 3406호의 운행기록을 없애라고 지시하는 등 증거인멸을 했다. | |
8월 11일 | 오전 8시 30분경 제5616부대장 이진백 소장은 예하부대 순시를 마치고 복귀해 부재중 업무보고를 받은 후 오전 9시쯤 권 준장과 이 준장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위 범행 사실을 보고받고도 필요한 지휘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이 사실을 묵인하였다. |
당연히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엄청난 반발 여론이 일어났고 검찰이 지나친 양형을 사유로 재심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이에 고등군법회의는 12월 28일 원심을 깨고 아예 준장과 소령에게도 선고유예 판결을 내리며 묵살해 버렸다. 통일민주당은 논평을 내어 이는 군법회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린 매우 유감스런 일이라며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해 가식적·기만적 처사로 일관한데 대해 공분을 감출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의 다수가 정부와 군 관련으로 재취업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일부는 정보사로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이진백 전 정보사령관은 1991년 국영기업인 대한중석광업의 사장이 되었다. 권기대 준장은 국방부 군무원으로 특채되었다. 이규홍 준장은 방위산업체인 풍산에 상무이사로 들어갔다. 박 소령과 안 대위는 1991년 원계급을 회복하면서 예편 후 같은 해 4월 정보사에 군무원으로 특채된 것으로 밝혀졌다.
5. 이후
육군정보사령부가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의혹이 있으나 기관이 기관인 만큼 제대로 된 수사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추측만 할 뿐이다. 언론의 자유를 군 첩보기관이 불법 테러 공작으로 억누르려 한 초유의 사건으로 당시 민주화에 대해 수구 세력이 벌인 저항의 대표적 사례다. 노태우 정부 초기에는 이 사건 외에도 1988년 서정의 납치 사건 및 우리마당 피습사건, 1989년 현대중전기 노조 피습사건 등 백색테러가 빈발했다.피해자인 오홍근 기자는 사건 이후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9년에 중앙일보를 떠나 초대 국정홍보처장,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을 지낸 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안철수 진심캠프 국정자문단에 참여하고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안철수계 몫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이후 안철수 의원을 따라 탈당하고 국민의당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안철수계로 활동했다가 2022년 3월 9일에 향년 79세로 사망했다.
2024년 3월 14일, KBS 기자 출신인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 이 사건을 언급하며 MBC 기자에 대한 협박성 발언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오홍근 기자의 유족들도 MBC에 직접 연락해 이 사건을 규탄하는 입장을 밝혔다. #
이 사건으로 당시의 사건이 재조명되자 MBC 뉴스가 사건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를 모은 영상을 업로드했다.
['엠빅' 이슈] "언론인 향한 마지막 테러이길" '회칼테러' 피해 기자 당시에... |
[1]
이규홍 준장, 박철수 소령, 안선호 대위, 남정성·김웅집·이우일 하사, 권기대 준장.
운전병,
증거인멸 가담 등 간접적으로 연루된 인원까지 포함하면 더 많다. 실제로 많은 자료에서 가해자를 10여 명으로 서술하고 있다.
[2]
피습 후 병상에서
MBC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 1988년 8월 30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보도되었다.
[3]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이 왜 이런 비판으로 연결되는지 의아할 수 있는데
정기승 문서를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국회가 여소야대가 된 상황에서 군사독재 정권에 철저히 부역한 판사를
대법원장으로 앉히려고 했으니 오홍근 기자는 '군사정권의 후신인 노태우 정권이 민주화 이전처럼 입법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오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4]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군대에서는 차량을 운행할 때 반드시 배차 절차를 거친 뒤 운행기록을 남긴다. 항상 공관과 사령부 단거리 운행만 하는 지휘관 1호차도 상시 배차가 잡혀 있는데 사령부 소속 1개 차량에 운행기록이 없을 리가 없다. 운행기록을 고의로 삭제해서 은폐해 버린 것이다.
[5]
성균관대학교
학군사관 1기 출신.
[6]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진삼 전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의 동생. 이진삼도 육군정보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각종
백색테러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있다.
[7]
이는 후일
이종구
국방부장관과 이진삼 육군참모총장의 갈등의 원인으로 자리잡는다.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진백 육군정보사령관을 전역시킨 사람이 이종구 당시 육군참모총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