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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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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Renaissance
파일:아테네 학당의 모습.jpg
파일:pngtree-florence-s-historic-buildings-at-sunset-image_2902845.jpg
아테네 학당 피렌체의 모습
14세기 ~ 16세기
지역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
언어별 명칭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스페인어 Renacimi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영어 Renaissance
독일어 Renaissance

1. 개요2. 일러두기: 르네상스 개념에 대한 비판3. 배경 : 왜 하필 이탈리아인가?4. 역사
4.1. 배경4.2. 르네상스의 시작4.3. 메디치 가문4.4. 전이탈리아로의 확산4.5.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5. 건축
5.1. 초기 르네상스 건축5.2. 하이 르네상스 건축5.3. 매너리즘 건축5.4. 유럽으로의 확산
6. 조각
6.1. 길드와 장인들
7. 회화
7.1. 르네상스 이전 회화7.2. 초기 르네상스 회화7.3. 하이 르네상스 회화7.4. 유럽으로의 확산
8. 과학9. 철학10. 기술11. 의학12. 음악13. 기독교 중심적 인본주의14. 관련 문서1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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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 여러나라에서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일컫는 용어.

현대에는 르네상스의 개념이 모호하며 중세 근대 사이의 자연스러운 전환기일 뿐 독립적인 '르네상스 정신'이 있는 건 아니라는 데 학계의 넓은 공감대가 있지만[1], ‘전통적인’(어디까지나 전통적인) 르네상스 개념에 의하면, ’암흑시대‘[2]를 극복하고 고전 문화를 부흥시켜 ’유럽의 문명적 승리‘를 견인한 시대이다.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 흔히 문예 부흥으로 번역된다. 용어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예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 한 것이다.

이것을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가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re, 다시 + naissance, 탄생)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1860년에 확실하게 정의 내렸다.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그리스도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본주의(humanism)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오늘날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3]

현대에는 전성기(특히 중흥기) 또는 큼지막한 문화 프로젝트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서유럽의 문화가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기에 부흥한 것을 카롤루스 르네상스, 수메르인들이 부흥했던 우르 제3왕조를 '수메르 르네상스', 무슬림들이 학문과 문화의 꽃을 피웠던 이슬람 황금기를 '이슬람 르네상스', 페르시아가 티무르 제국 아래에서 문화적으로 발달한 것을 '티무르 르네상스' 등을 부르는 것 등이 그 예시다. 조금 더 현대쪽으로 오면 디즈니 사(社)가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약 10년간 스튜디오의 황금기를 맞았던 것도 디즈니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각 세기별에 따라 이탈리아어 트레첸토(trecento, 300), 콰트로첸토(quattrocento, 400), 친퀘첸토(cinquecento, 500)라 부른다. 1300년대에 해당하는 트레첸토는 르네상스라기보다는 중세에 더 가까운 극초반부로 서서히 그리스어 텍스트들이 유럽으로 유입되는 시기다. 1400년대에 해당하는 콰트로첸토는 중세 후기부터 초기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1490년대 시작된 최고 전성기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시대를 포괄한다. 1500년대에 해당하는 친퀘첸토는 1490년대부터 시작해 1520년대에 끝난 하이 르네상스 시대와, 하이 르네상스의 지나친 조화와 질서 추구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매너리즘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바로크 시대 초기를 의미한다.

2. 일러두기: 르네상스 개념에 대한 비판

미슐레, 부르크하르트, 페이터는 르네상스를 역사의 한 시대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19세기식 개념을 만들어냈다. 예술과 문화에서의 성취가 개인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문명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는데, 15세기부터 계속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설명을 제시하기보다 그것을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향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 연구자들은 제한적인 민주주의, 교회에 대한 회의주의적인 태도, 예술과 문학의 힘, 다른 문명들에 대한 유럽 문명의 승리를 찬양했다. 이러한 가치들은 19세기 유럽 제국주의를 지탱했다.
(중략)
그린블랫이 저서 제목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제 그와 동료 연구자들은 르네상스를 설명할 때 ‘ 초기 근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사회사에서 온 것으로 미슐레와 부르크하르트의 이상적인 설명보다 좀 더 회의적인 르네상스와 근대 세계의 관계를 제시한다. 이 용어는 또한 르네상스라는 개념을 19세기 저자들이 제안했던 문화적 ‘정신’으로 보기보다는 역사 속의 한 시대로 강조한다.
-제리 브로턴(Jerry Brotton), 『르네상스』
역사에서 르네상스란 없다. 다만 고대로의 복귀라는 가면 아래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변화만 있을 뿐이다. 일련의 르네상스란, 정확하게 말하면 고대에서부터 근대가 완전한 형태를 취한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적 특징이다. 서양사에서는 8~9세기 카롤루스 르네상스, 12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12~15세기에 시작되고 여타 유럽에서는 15~16세기에 꽃피운 르네상스, 예술과 문학과 신학에 국한된 18~19세기 르네상스(신고전주의, 중세가 고대를 대체한 신고딕주의, 신토마스주의 등)와 같은 여러 르네상스가 있었다. 르네상스란 중세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 항시 권위를 과거에서 찾고 황금시대를 옛날에서 추구하는 중세를 특징짓는 현상이다.
-자크 르 고프, 『서양 중세 문명』
오늘날에는 르네상스를 어떤 '정신'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더이상 지지받지 않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즉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언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무언가'라기보다는 그냥 간단하게 ' 초기 근대'이다.

르네상스를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19세기식 개념인데, 여기서 제시되는 소위 '정신'이라는 것을 뜯어보면 제한적 민주주의, 교회에 대한 회의주의, 예술과 문학의 힘, 유럽 문명의 승리 등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형에 부합한다. 즉 소위 르네상스 '정신'이라는 것은 19세기 유럽인이 생각하던 '예쁜 그림'을 근대 초의 유럽에 투영하여 인식한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것들 대부분이 사실은 중세시대부터 있었고, 시간이 흐르며 발전한게 많다는 것도 밝혀져 재평가에 한 몫 하기도 했다.[4]

일반적으로는 르네상스로 인하여 중세적인 문화가 쇠퇴하고 근대 초기적인 문화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여겨지곤 한다. 교황권이 약화( 1309~77, 1517, 1527)되고 중세 흑사병(1353) 등과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 제도가 붕괴( 1336~1453, 1648)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 변화로, 그렇게 중세적 문화를 부정하고 근세적 문화를 성립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르네상스와 중세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애초에 고대, 중세, 근대라는 3시대 구분법은 14세기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는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르며 잊힌 고전 문명이 자신들의 시대에 부활했다고 선언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14세기는 오늘날에는 완전히 중세로 분류되는 시기다. 중세의 끝이 언제인지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 혹은 1521년 루터교회의 출현으로 잡으며 페트라르카의 시대(1304~1374)가 중세라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결국 오늘날의 학계에서 르네상스는 중세의 흐름을 완전히 배척하고 고대고전을 숭배하는 정신으로서의 가치는 부정받고 있고, 르네상스를 중세와 따로 구별할 정도로 특별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중세의 끝' 내지는 ' 초기 근대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르네상스 정신’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19세기 계몽주의적 관점이 진하게 묻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중세와 근세의 전환기에 있었던 이탈리아에서의 문화 경향과 알프스 이북으로 전파된 인문주의의 유행은 실제로 존재했다. 중세 호황기로 불리는 11~13세기의 스콜라 철학과 같은 학문이 신학의 정당화를 위해 고전을 이용했다면, '르네상스'라 불리는 이 문화적 경향에서는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고전 그 자체를 연구하는 모습이 크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 개념은 대중적으로 통용되고 있고, 따라서 교육적인 이유로 ‘전통적인 르네상스상’을 설명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무위키의 이 문서에서는 르네상스를 어떤 '정신'으로 해석하는 19세기식 관점을 통해 전통적인 르네상스상을 부득이하게 설명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그렇게 설명하였다. 이 점을 전제하며 독해를 하기를 바란다.

3. 배경 : 왜 하필 이탈리아인가?

파일:Florence-wallpaper-1920x1200-51009.jpg
르네상스가 시작된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14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는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지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찬란하게 르네상스를 맞이한 지방은 바로 이탈리아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탈리아 반도였을까? 이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들이 있지만 크게 아래 5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다.
1. 로마 제국의 유산과 동로마 제국의 지식 전파

2. 봉건제의 부재와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3. 지중해 중계무역으로 쌓은 막대한 부

4. 교황을 포함한 수많은 경제적 후원자들의 존재

5. 흑사병의 창궐로 인한 세계관 변화
첫째,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고, 그 전통이 그리스도교 세계로 편입된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로마 유적만 봐도 알 수 있듯 고대 로마의 문화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 서방으로 피난한 동로마 예술가 기술자 등 지식인 대부분이 이탈리아로 향했다.[5]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가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동로마 제국의 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과의 교류를 통해 동로마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망명하는 동로마 그리스 학자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연구를 도와 학문의 진작에 큰 역할을 했다는것이 대표적인 예시.[6]

둘째,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인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 교황령의 존재도 이탈리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가르는 데 영향을 주었다.[7] 한편 유럽 중심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1337~1453), 산간 도서 밀라노 지역을 제외한 유럽본토의 중세 흑사병(1346~1353) 등으로 인해 문화부흥이 주춤한 상태였다.[8]

셋째,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인들은 특유의 이해타산적 계산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등 종교의 꼬드김, 상업에 방해가 되는 윤리적 규범에도 넘어가지 않았고(심지어는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아군을 패며 한 몫 두둑히 챙기기도 하였다.), 자신들과 비슷한 속성(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의 직종들인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 수학자들에게 큰 후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이 여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넷째, 아비뇽 유수(1309~1377)[9]가 끝나고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교권을 다시 세우고[10], 황폐화 된 로마를 재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의 이탈리아 전쟁(1494~)으로 북부 이탈리아가 털리기 시작할 즈음 율리오 2세(1503~)는 교황령 확대를 꾀하며 전쟁에 나선다(...)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므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막대한 헌금( 면죄부[11])을 끌어들였으며, 또한 이 돈으로 이탈리아 각지의 유명한 르네상스 기술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천지창조, 아테네 학당 등이 제작되었으며, 더 나아가 성 베드로 대성당(공사기간: 1506~1626) 등을 재건하기에 이른다. 중세의 끝에 논란이 있고, 중세가 끝났는데 교회의 권력이 오히려 더 강해 보이는 이유, 그리고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12]을 추구한다면서 역설적으로 가톨릭 분위기가 풍기는 르네상스 작품들이 다수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코 디 로마(1527)가 터지면서 다 날려먹었지만(...)[13]

다섯째,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유럽 전체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은 유난히 이탈리아에서 더 잔혹했다.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어있었던 이탈리아는 흑사병에 대단히 취약했고 1347년 피렌체는 흑사병으로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흑사병이 유행할 때에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일반인은 30% 정도의 사망률을 나타냈지만 정작 신이 보호한다는 사제들은 사망률이 40% 중반이 넘어갈 정도로 훨씬 높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은 신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죽음에 익숙해진 이탈리아인들은 사후의 영성보다는 현세의 삶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농부와 노동자들이 픽픽 쓰러져죽어나가면서 노동자들의 가치는 급상승했다. 봉건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고 임금 노동자가 출현하며 귀족이 아닌 새로운 계급이 자본을 축적해나갔다. 초기적인 자본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은 결국 하나로 모여 르네상스의 서막을 열어젖히게 된다.

유독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도 피렌체의 발전은 독보적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메디치 가문의 존재였다. 오랫동안 은행업으로 재력을 쌓아온 메디치 가문이 예술을 크게 장려하고 사랑했던 덕분에 전 유럽의 예술가들이 피렌체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특히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경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산드로 보티첼리 같은 역사에 길이남을 예술가들을 모두 후원했고 수많은 작품들을 의뢰하며 일감을 몰아줬다. 일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가 메디치 가문 등장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점, 그리고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이 모두 피렌체와 가까운 토스카나 태생이었던 점을 강조하며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된 것은 행운의 일치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4. 역사

4.1. 배경

파일:main-qimg-26f1f4648ec97d4bbeb22113790cd626-lq.jpg
파일:1348-e1473365825560.jpg
북이탈리아 중심의 중세 교역로 1348년 당시 베네치아의 정경
1300년대 이탈리아는 이미 남북 간의 빈부 격차가 완연히 드러나던 상태였다. 한때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라티움과 남부 지방은 북부에 비해서 가난했고 세계의 수도로 불리던 로마는 폐허로 가득한 유적 도시였다. 교황은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해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는 굴욕을 겪었고 교황령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남쪽의 시칠리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시칠리아 토후국, 시칠리아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약 350여 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지만 중세 후기 들어서는 교역 주도권을 북부 상업도시들에게 빼앗기며 날로 쇠퇴하고 있었다.

반면 북부 도시들은 활기가 넘쳤다. 아예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써 동로마 제국 아랍 등지와 거래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쌓았던 것. 향신료, 염료, 비단 같은 동방의 값비싼 특산물들이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을 거쳐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특히 항구도시들의 발전이 두드러졌는데, 베네치아는 무려 5,00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운용하며 동방항로를 틀어쥐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는 못미치지만 역시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내륙 도시들도 번창한건 마찬가지였다. 피렌체 밀라노 같은 도시국가들은 포 계곡의 비옥한 농경지에서 엄청난 부를 창출했고 프랑스, 독일, 저지대 국가들에게서 양모나 밀, 귀금속 따위를 수입했다. 특히 피렌체는 모직 직물 생산으로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로 급부상하기까지 했다.

북이탈리아의 경제 발전은 날로 눈부셨다. 동방과 서방을 잇는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의 젖줄을 거머쥐고 얼마 가지 않아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할 정도로 강대해졌다. 복식부기, 합자회사, 금융시스템, 외환 시장, 보험, 정부 부채와 같은 개념들이 속속 등장했다. 피렌체에서 발행한 금화 '플로린'은 국제 공용화폐가 되었고 피렌체는 국제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경제 발전으로 인해 상인 계급들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는데, 상인들의 부상과 기존 귀족층들의 쇠퇴로 인해 초기적인 자본주의가 시작된다. 상인들은 본인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치를 과시했고 이는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또한 상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고리대금, 비기독교인들과의 교역 금지, 군주의 자의적인 재산 몰수처럼 자본주의를 억압하는 법률들이 하나하나 철폐되며 북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다만 1300년대에 소빙기가 찾아오며 유럽 경제는 잠시간 침체로 들어갔다. 기후변화로 인해 농업생산량이 크게 악화되었으며 기근, 인구 감소가 이어졌다. 특히 영프 사이간에 발발한 백년 전쟁은 유럽 전체의 경제를 교란시켜버렸고 1345년 에드워드 3세의 빚 탕감 때문에 피렌체에서 가장 거대한 두 은행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이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동유럽의 경제 교역로가 올스톱 상태로 빠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흑사병의 창궐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흑사병은 인구 밀도가 높던 북이탈리아에 치명적이었고, 피렌체는 50년 동안 25~50%에 가까운 인구 감소를 경험했으며 1378년에는 직물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4.2. 르네상스의 시작

파일:Egyptian_plague_of_boils_in_the_Toggenburg_Bible_0.jpg
흑사병의 창궐은 역설적이게도 르네상스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혼란이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했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으면서 노동력의 가치가 크게 뛰었고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의 재산을 물려받아 훨씬 부유해졌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갔고 인구 감소로 인해 부가 재분배되었다. 15세기 초 흑사병 사망률이 감소하자 사회는 다시 안정세로 돌아갔다. 사치에 소비할 잉여 재산이 많아지자 경제에 다시 활기가 돌았고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수요는 장인 계급과 상인 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앞서 일어난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의 붕괴로 인해 메디치 가문이 그 공백을 틈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14세기의 침체기 시절에 부유층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멈추고 대신 예술과 문화에 더 투자를 하면서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시기가 바로 단테 알리기에리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활동기이기도 하며, 르네상스의 첫 물결이 이탈리아를 적신 시기라고 평가받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라틴 문학과 철학, 서적 등은 실전되지 않은 채 이미 서유럽 세계에서도 꾸준히 연구되고 읽히던 대상이었다. 서유럽에서 잊혀진 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 시절의 문학과 사서들이었다. 그리스의 과학, 수학, 철학은 잊혀지지 않았으나 호메로스, 데모스테네스, 투키디데스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이슬람 세계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번역된 것을 제외하면 동로마 제국의 학자들 위주로 읽히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며 수많은 동로마 학자들이 이 서적들을 들쳐매고 서유럽으로 유입됐다. 수 백년간 잊혔던 옛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이 다시 서유럽에서 부활한 것이다.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간의 잔인한 전쟁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발전에 한 몫 했다. 북이탈리아의 도시 밀라노는 14세기 후반 들어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이끄는 비스콘티 가문의 지배에 놓인다. 잔인하고 유능했던 지도자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북이탈리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그에게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게 바로 또다른 강국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연합군을 구성, 밀라노와 전쟁을 벌였는데 1402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급사하기 직전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다. 피렌체 공화국은 전제군주적인 밀라노와 싸우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주의적인 이상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공화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르네상스의 확산에 맞물리며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에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는 구조였다. 수 백여개의 도시가 있었으나 가장 강한 건 밀라노, 피렌체, 피사, 시에나, 페라라, 만토바, 베로나, 베네치아였다. 중세 후기 북이탈리아는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들었는데, 각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교황파 세력 ' 구엘프', 황제파 세력 ' 기벨린' 둘 중 하나에 소속되어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 도시국가 내부적으로도 파가 갈려서 구엘프와 기벨린은 정말 서로 죽일 듯이 싸워댔다. 무력의 필요성이 부각되며 도시들은 서로 앞다퉈 용병을 고용하기 시작했고, 15세기 들어서는 강한 도시들이 인근 도시들을 무릎꿇리며 어느 정도 교통 정리가 된다. 피렌체는 1406년 피사를 정복했고, 베네치아는 파도바와 베로나를 점령했으며 밀라노는 파비아와 파르마 등지를 복속시켜 세력화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이 도시국가들이 미친 듯이 싸워댔다. 이탈리아인 대장이 이끄는 독일계, 스위스계 용병 무리인 '콘도티에리(condottieri)'가 돈을 받고 대신 전투를 치렀다.[14] 해상에서는 제노바와 피사, 베네치아 3국이 경쟁을 벌였다. 제노바는 피사의 세력을 줄이는 데에 성공했지만 15세기 세력이 쇠퇴하며 베네치아에게 해상 패권을 넘겨줬다. 육상에서는 피렌체와 밀라노, 베네치아 3국이 패권을 나눠가졌다. 1454년에는 '로디 조약'으로 40년 동안 3국 사이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베네치아가 해상 패권을 꽉 휘어잡고 있었던 덕분에, 이같은 평화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인들은 저멀리 동남아시아까지 원정을 나가며 세계로 뻗어나갔다.

4.3. 메디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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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 메디치 가문의 궁전
13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피렌체의 지배 가문은 '알비치 가문'이었다. 그러나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메디치 가문이 힘을 키우더니 알비치 가문의 아성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라 불리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세를 불려나갔다. 그 다음에는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가 대를 이어 메디치 은행을 당대 유럽 최대 규모 은행으로 발돋움시켰다. 1433년 알비치 가문이 수작을 부려 코시모를 피렌체에서 쫒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바로 다음 해에 친 메디치 성향의 시뇨리아가 당선되며 즉각 귀환했다. 알비치 가문과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한 메디치는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피렌체의 지배 가문이 되었고 사실상 피렌체를 상징하는 가문으로 떠올랐다.

당시 피렌체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를 잇는 거대한 상품 무역로를 장악한 상태였다. 워낙 중요한 도시였기에 1439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직접 피렌체를 찾아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을 정도. 동로마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자 수많은 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려왔고 메디치 가문이 세운 아카데미아는 신플라톤주의 사상 연구의 산실이 되었다.

피렌체는 1532년까지 공화국으로 남아있었다. 이 공화정 시기의 피렌체는 명실상부한 르네상스의 중심이자 대표였는데 이 1490년과 1520년 정도 사이의 몇 십년에 달하는 짧은 기간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라고 부른다.[15]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와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이 두 형제는 예술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으며 르네상스 발전에 전념했고 생애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음에도 대중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사실상 피렌체의 군주로 군림했다. 특히 코시모의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는데, 1454년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 로디 조약을 맺어 밀라노와의 길고긴 전쟁을 끝내 북이탈리아에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한편 예술과 문화 진흥에 힘써 피렌체를 유럽 최고의 문화 강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시모가 죽자 유약한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의 뒤를 이었으나 5년 만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피렌체는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장악했다. 로렌초는 '대인 로렌초(Lorenzo Magnifico)'라고 불릴 정도로 코시모의 뒤를 잇는 역대급 위인이었다. 가문에서 어릴 적부터 교양 교육을 받아 예술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뛰어났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피렌체의 100인 위원회를 70명으로 줄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 다만 사업상에서는 코시모만큼 성공적이지 못해서, 그의 임기 하의 메디치 은행은 서서히 기울어갔다. 밀라노와의 관계는 여전히 우호적이었지만 반대로 교황과의 관계는 악화하여 교황이 그를 죽이려 시도한 적까지 있다. 암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대신 그의 남동생 지울리아노가 죽었고, 로렌초는 이를 빌미로 교황과의 전쟁을 일으켜 메디치의 피렌체 장악력을 강화했다.

4.4. 전이탈리아로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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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경당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피렌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르네상스는 점차 시에나, 루카 등 인근 토스카나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토스카나 문화는 얼마가지 않아 곧 북이탈리아 전체의 지배 문화가 되었고, 특히 문학 분야에서는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토스카나 방언이 1타 언어였다. 또다른 강국 밀라노 역시 1447년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권력을 잡은 이후로 빠르게 변모했다. 스포르차 가문도 메디치를 따라 예술에 막대한 투자를 퍼부었고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들 중 하나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끌어들이는 등 피렌체 못지않은 북이탈리아의 문화 강국으로 성장했다.

아드리아 해를 장악하고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던 베네치아 역시 르네상스의 물결에 빠르게 동참했다. 특히 베네치아에서 발흥한 르네상스는 아예 '베네치아 르네상스'라고 따로 부를 정도로 번영을 누렸는데,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인근 페라라, 만토바, 우르비노 등의 도시들에도 전파됐다. 북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도 르네상스에 휩쓸렸다. 1443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 나폴리를 정복하고 남부 일대를 안정화시켰는데, 이 알폰소 5세 역시 당대 유행하던 르네상스 기풍을 받아들여 프란체스코 라우라나, 안토넬로 데 메시나, 시인 야코포 산 나자로, 인문주의 학자 안젤로 폴리치아노 등을 후원하는 등 나폴리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한때 세계의 수도라는 명성을 자랑하던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417년에 이미 교황이 아비뇽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왔지만, 르네상스 초기까지만 해도 로마는 여전히 폐허 유적 도시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1447년 새롭게 교황에 즉위한 니콜라오 5세가 로마를 새롭게 단장시키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에 착수하며 로마 르네상스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인문주의 학자 출신 실비우스 피콜로미니는 1458년 비오 2세로 즉위하기까지 했다. 교황들은 메디치 가문과 보르지아 가문 등 부유한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면서 자연스레 르네상스에 큰 관심을 가졌다. 식스토 4세는 니콜라오 5세의 유지를 이어 시스티나 경당 건설을 명령했고 바티칸 도서관 건립 등 로마 전체를 아름다운 르네상스풍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식스토 4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데르 6세는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산탄젤로 성으로 요새화했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을 시켜 교황 사도궁 '보르지아 아파트'를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수많은 교회와 성당들을 개축했다. 비오 3세의 짧은 통치 이후 즉위한 율리오 2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석을 놓았고,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그 유명한 '천지창조' 등 천장화 역시 이 율리오 2세 시대에 그려졌다. 전사 교황이라 불리던 율리오 2세는 프랑스의 입김을 걷어내고 교황령을 재건했는데 이 국력을 토대로 막대한 예술 투자를 했던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 역시 예술광이었다. 르네상스 시기 최고로 많은 후원을 퍼부은 교황으로 라파엘로를 대폭 밀어주는 등 그림을 매우 장려했다.[16] 다만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을 위해 율리오 2세가 모아둔 돈을 죄다 탕진하다가 면죄부를 팔아치워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치는 등 훗날 종교개혁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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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정수 성 베드로 대성당
르네상스가 전 이탈리아로 확산되면서 르네상스의 성격도 조금씩 변해갔다. 1400년대 후반 들어서는 지배 계급과 귀족들이 르네상스의 이상을 완전히 독점하기 이르렀다.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무명에다가 돈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많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귀족들의 금전적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버렸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점점 취향이 귀족적, 세속적으로 변해갔으며 르네상스 예술은 갈수록 사회 권력층의 입김이 강해졌다.

또한 문화 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게만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이었으나 인구의 4분의 3은 여전히 시골에 살며 농업에 종사했다. 이 농부들의 삶은 르네상스 시대나 중세 시대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봉건제가 발달하지 못한 북이탈리아의 경우 대부분이 자영농이거나 소작농이었지만, 이들은 르네상스가 오든말든 딱히 신경 쓰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일상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다만 도시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도시는 점차 귀족들만큼이나 배타적인 상인 계급들이 장악해나갔다. 이 상인들은 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가지고 도시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이 부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에 아낌없이 뿌렸다. 그 아래에는 상인들의 비호를 받는 예술가와 장인들이 있어 높은 대접을 받았다. 장인이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다른 유럽 지방들에 비하면 확연히 차이가 있는 부분. 이 상인, 예술가, 장인 트리오가 함께 르네상스의 발전을 이끌어나갔던 것이다. 다만 도시의 비식자층인 하류층들, 빈곤층은 르네상스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들 역시 농민들처럼 르네상스의 영향을 딱히 받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당시 북이탈리아의 빈부격차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는데, 압도적인 부를 홀로 독차지한 몇몇의 막대한 후원 덕분에 오히려 르네상스가 발전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4.5.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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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년의 사코 디 로마
분명 유럽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고 지중해 무역이 성행하던 15세기까지는 나름대로의 군사력과 재력, 정보망을 틀어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에 있었다. 도시국가의 군주들이 무식한 힘싸움보다는 문화와 부의 과시를 통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도 한몫했다.

15세기 말까지는 백년전쟁 등으로 대륙의 사정이 혼잡해서 외침의 걱정은 없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백년전쟁을 마무리한 후 이탈리아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고,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을 비롯 거의 전 유럽을 한 손에 틀어쥔 합스부르크의 강대한 황제 카를 5세의 출현으로 이탈리아는 강대한 영토 국가들의 영향하에 놓이기 시작한다. 이제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영토 국가는 이탈리아 개별 도시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군사력이 강해진 것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땅따먹기의 현장으로 변하고 특히 1525년 이탈리아를 둘러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카를 5세에게 박살나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이에 당황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떻게든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코냑 동맹을 결성해 발버둥쳤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카를 5세는 교황의 비열함을 비난하면서 가톨릭 군대로 하여금 교황령을 털어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17] 이 전쟁에서 시원하게 털린 교황이 6개월이나 유폐에 가까운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고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 건물은 개박살나서 현재 로마 시내에서는 르네상스풍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사코 디 로마는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종결지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이탈리아의 부는 고갈되고 문화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한편[18] 대부분 지역이 외세의 지배에 놓이고 만다. 이 시점을 흔히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분기점'이라 칭한다. 이후 결국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카를 5세 밑에 굴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는 지난 세기의 영화를 대륙에 내준 채 3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유럽 각국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그 나름대로 각국의 토양에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철학자, 인문학자, 예술가, 건축가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이탈리아 못잖게 상공업과 개방성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의 경우 자체적으로 회화 예술이 붐을 일으켰다. 당시에 확산된 금속 활자 인쇄술 덕분에 15세기말부터 유럽 널리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전파되지만, 유럽 전체가 균일하게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었고, 군주론이라든가 인문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계약설은 훗날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 체제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적어도 계몽주의의 새로운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각국 귀족과 군주들의 후원 하에서 다방면의 발전이 계속될 수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음에도 이탈리아 내부에서 전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전쟁 이전까지 이탈리아가 여러 군소 도시국가로 나누어있었던 탓이 크다. 오히려 이탈리아 외부 국가들에서 연구가 활발했는데 19세기까지 이탈리아는 외지인들에게 경이의 땅이자 관심의 대상이었고 당연히 그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조르조 바사리 등 이탈리아인의 시각에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도 존재한다.

5. 건축

5.1. 초기 르네상스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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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탄드레아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두오모의 돔
아이러니하게도 르네상스 시기 이전의 이탈리아 건축은 기술적으로 고딕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로마 제국 문명의 본류는 이미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으로 떠나가 버렸고, 그렇게 이탈리아 땅이 버려진 사이 북쪽의 '야만인'들은 자신들이 동쪽으로 내쫒아버린 로마의 건축 유산을 잘 이어받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모방을 넘어 고딕이라는 대담하고도 놀라운 구조의 건축양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딕건축으로 지어진 높은 성당과 거기에 들어간 기술 - 플라잉 버트레스, 리브볼트 등은 이탈리아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신기술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자존심이나 미학적인 취향의 다름으로 인해 고딕의 새로운 구조를 높이에만 집착해 추한 덧댐으로 마무리된 불완전한 구조로 규정했다.[19]따라서 르네상스 건축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을 모색하게 된다. "높이"에 집착하던 고딕과 다르게 건축물의 높이는 좀 낮더라도 건축의 "질서"에 집중한 것. 기둥과 창의 엄격한 배치와 구성,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례를 가진 장식을 강조하였다. 물론 기술적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11세기 즈음부터 토스카나 지방에서 주로 보이던, 십자형 로마네스크 교회의 중심에 팔각형 혹은 둥근 작은 이 올라가던 양식[20]도 계속 계승되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러 성당들이 인상적인 거대한 을 구현하며 기술적인 성취도 이루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21]의 역작인 피렌체 두오모가 거대한 돔을 얹은 성당들의 대표적인 예이다.[22] 다만 이 두오모를 비롯한 이 시기의 많은 돔을 얹은 건물들은 완성된 르네상스 양식과는 좀 다른 과도기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오늘날에 와서는 이탈리안 고딕 양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23]

이렇게 르네상스가 건축에 적용되기 시작한 시기의 건축을 '초기 르네상스 건축'이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미켈로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이 이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대가로 꼽힌다. 최초의 르네상스 건축가로도 평가받는 브루넬레스키는 수학적 비율에 대단히 신경을 많이 썼다. 수학적 비율에는 별 관심이 없던 고딕과는 달리,[24] 고대 로마의 건축은 반원형 아치의 너비가 높이의 정확히 2배 만큼 넓은 규칙을 따르는 등 단순한 수학적 비율을 정확히 지키고 있었다. 이에 경탄한 브루넬레스키는 건물 전체의 구성과 비율, 그 대칭성에 매료되어 고대 로마의 건축을 모방한 건물들을 차차 설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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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두오모 돔 내부 모습
브루넬레스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자 최초의 업적은 바로 피렌체 두오모의 돔 설계였다. 당시 두오모는 고딕적인 요소를 상당히 차용하고 있어서 뾰족한 고딕 아치와 고딕식 골조를 사용한 건물이었는데, 여기다가 고대 로마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은 거대한 벽돌 돔을 올려버린 것이다. 판테온의 거대한 콘크리트 돔에는 수직 골조가 무게를 분산하여 돔이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있으며 꼭대기의 종석이 없이 8m 가량의 구멍이 뚫려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에 영감을 받아 8개의 외부 리브와 16개의 내부 리브로 돔의 하중을 지탱, 수평 골조로 보강한 다음 훨씬 가벼운 충전재로 속을 채우고 꼭대기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 놔두었다. 이렇게 하면 돔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고, 르네상스 초기 건축의 대작이라고 부를만한 작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미켈로초 역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여러 예술가들 중 하나였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 1444년 코시모 데 메디치의 의뢰를 받아 완성했고 이후 메디치 가문의 정궁으로 사용됐다. 소박한 취향이던 메디치의 뜻을 따라 외부는 투박한 돌로 장식하고 로마식 기둥도 세우지 않았으나 내부는 엄청나게 화려하다. 이후에도 산 마르코 수도원의 도서관, 피에솔레의 빌라 메디치를 지었고, 나중에는 라구사에 궁전을 짓는 등 이탈리아 국외에서 르네상스 건축을 선보인 최초의 건축가들 중 하나로 이름을 남겼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그리스-로마 건축으로의 회귀를 내세우며 산탄드레아(Sant'Andrea) 성당을 건축했고 이렇게 르네상스의 표준적인 양식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브루넬레스키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 등 기둥과 보를 이용한 경쾌한 모습과는 달리 엄청나게 두꺼운 벽 구조와 둥근 드럼 천장 등으로 무거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어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로마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장중한 분위기의 파사드가 핵심. 산탄드레아 성당은 이후 궁극적인 성당 건축이라 할 수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원근법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남겼고, 건축과 조각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수학적 비례를 제시하고 정립하였다. 그가 남긴 다른 업적에는 루첼라이 궁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등이 있다.

5.2. 하이 르네상스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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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파르네세 궁전 판돌피니 궁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는 1490년, 혹은 1500년 즈음에 시작되어 1520년 라파엘로의 죽음으로 끝난 짧은 시절을 가리킨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 메디치 가문이 있는 피렌체 등 북중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가장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시기로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의 이미지가 바로 이 '하이 르네상스'의 것이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바로 르네상스의 대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토 브라만테 등이다.

이탈리아의 건축은 초기 르네상스를 거쳐 날로 발전했고 하이 르네상스 건축 시기에 더더욱 발전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가들은 도나토 브라만테, 안토니오 다 상갈로 등이 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건축을 본땄다지만 하이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은 이미 그 시대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전에 비해서 훨씬 장식적이고 형식적인 요소가 강해졌고, 조각상, 돔, 큐폴라의 모습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시대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는 도나토 브라만테는 1444년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밀라노 공작 아래에서 20년 동안 일하다가 밀라노가 프랑스에 패배해 함락당하자 로마로 향해 교황 아래에서 일했다. 밀라노에서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에 지은 십자형 성당. 벽돌로 만들었고 화려한 테라코타로 장식한 북이탈리아식 전통 건축법을 따랐다. 부지 문제 때문에 신랑이 익랑보다 더 멀리 뻗어있는걸 제외하면 거의 대칭이다. 팔각형의 드럼 내부에 숨겨져서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무려 직경 20m에 달하는 거대한 반구형 돔을 천장으로 이고 있는 건물이다. 그 외에 옛 베스타 신전의 외양을 본뜬 '템피에토'를 지어 '건축학적으로 완벽한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특히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을 받아 1506년 성 베드로 대성당, 벨베데레 정원 등 역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들을 설계했다.[25]

안토니오 다 상갈로는 군사 기술자의 가족으로 태어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이유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 참여한 것보다는 '파르네세 궁전'의 건축에 있다. 파르네세 궁전은 1530년대에 지어져 '이 시대의 가장 웅장한 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넓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부지에 지어진 파르네세 궁전은 그 규모급의 건축물에는 드물게도 석조 외벽이 아닌 부드러운 치장 벽토를 사용했고 부드러운 분홍빛 벽을 배경으로 소박한 창문, 정교한 틀의 반복 등으로 우아한 느낌을 선사한다. 여담이지만 3층은 원래 설계안에 없었는데 미켈란젤로가 따로 설계해서 덧붙여넣은 것이고, 여기에 사용된 석회는 콜로세움에서 뜯어왔다.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 산치오 역시 화가 뿐만 아니라 건축가로서 유명한 편이다. 페루자에서 설계법을 배우고 한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활약했고 안토니오 상갈로와 함께 대성당 건설에 참여했다. 라파엘로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은 '판돌피니 궁전'. 고대 로마에서 모티브를 얻은 2층 배열의 창문을 달아 장중한 느낌을 주었다.

'하이 르네상스 양식'과 고딕 성당과 비교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뾰족하고 높은 첨탑과 외부로 나와있는 기둥들, 넓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높은 천장을 가진 성당은 고딕양식이다. 반면 네모와 같은 도형과 그리스, 로마식 기둥과 창으로 장식된 벽면, 그리고 건물 가운데의 거대한 돔과 그 아래의 큰 공간을 가진 성당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다만 이후 시대로 가면서 점점 위의 특징들이 섞이게 된다는 점은 유의하자. 이 특징들은 고대 로마의 건축을 응용한 것으로 레온 알베르티에 의해 로마 고전주의의 부활과 함께 등장했으며 그동안 서유럽의 건축 구조에서 등한시되어왔던 돔이 다시 건축구조로 나타나게 된다.

5.3. 매너리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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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시아 도서관의 계단 빌라 카프라 마시모 알레 콜로네 팔라초
그러다가 16세기에 고전적인 균형미와 조화에 집착한 르네상스 양식에 대한 반발심으로 매너리즘 건축이 등장했다. 매너리즘[26]은 일반명사로는 '습관적 반복, 상투적인 모방, 진부한 기교' 등을 일컫는 말로 새로운 창조력이 상실되었다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있지만, 고유명사가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인공적인 기교를 통해서 구성의 긴장과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예술 사조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사조나 화풍을 뜻한다.

초기 ~ 하이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점차 지나치게 균형과 조화에 집착하는 예술에 대한 반감이 생겨났다. 이미 다 빈치, 미켈란젤로, 바사리 등 천재적인 선배 예술가들이 앞서 모든 것을 정립해놓았으니 해부학, 빛, 관상학, 인간이 표현과 몸짓에서 감정을 등록하는 방식, 비유적 구성에서 인간 형태의 혁신적인 사용, 미묘한 톤 그라데이션 사용 등 이미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달성된 것처럼 보였다. 젊은 예술가들은 기존 르네상스 예술 내부에서는 더이상 예술적인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매너리즘이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려 새로움을 찾고자 했다. 위태로운 포즈와 비대칭을 통한 긴장감의 인위적인 조성, 무너진 원근감과 비합리적인 비율 등이 바로 이 매너리즘의 상징인 것이다.

오직 고대 로마의 조화와 비율만을 중시하던 르네상스 건축계에서도 매너리즘의 돌풍이 몰아닥쳤다. 대표적인 매너리즘 건축가들은 '발다사레 페루치', '줄리오 로마노', 미켈란젤로, 안드레아 팔라디오 등이 있다. 이들이 남긴 매너리즘 사조는 훗날 바로크 양식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이어진다.

발다사레 페루치는 1481년 시에나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활동했다. 대표작은 로마에 세워진 '마시모 알레 콜로네 팔라초'. 거리를 향해서 약간 둥글게 튀어나온 파사드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줄리오 로마노 역시 유명하다. 그 유명한 라파엘로의 제자인데 '팔라조 테'가 대표작이다. 거대한 프레스코화와 정원 동굴을 활용했는데 다소 불균형하고 정렬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일부러 긴장감을 유발하도록 만들었기에 그가 지은 건축물들의 전체적인 느낌은 혼란스럽다고. 놀랍게도 말년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역시 매너리즘 건축가들 중 하나다. 그가 남긴 최고의 매너리즘 양식 건물은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과 로렌시아 도서관. 특히 메디치 가문의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로렌시아 도서관의 현관은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세 방향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계단 때문에 위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르네상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라는 평을 듣는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전주의 건축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기존의 건축가들은 콜로세움이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처럼 특정 유적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팔라디오는 특정 건물이 아닌 일반적인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영감을 찾았다. 그가 지은 건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빌라 카프라'라고 하는데 돔이 얹힌 중앙 홀과 4개의 동일한 현관이 모든 면에 지어진 빌라로 마치 옛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케 한다.

5.4. 유럽으로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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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의 대표작인 샹보르 성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건축은 알프스 이북으로 넘어가 독일, 프랑스 등으로 퍼져나갔다.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은 프랑스였다. 이탈리아와도 지리, 인종,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이미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 국토가 속주에 편입되어 로마 건축 양식을 경험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었다. 또한 롬바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기 때문에 교황청이 주도하던 르네상스 표준 고전주의를 적극 수입할 수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가 르네상스 애호가였기에 지도층의 반발도 적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했고, 그중에 1541년 이주한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는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부분적으로 프랑스 전통 양식을 혼합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을 지으면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피에르 레스코와 필리베르 들로름를 거쳐 세르소 가문에 이르러서는 점차 이탈리아 르네상스 표준 양식과도 거리가 먼 프랑스만의 르네상스 건축이 발전한다.

영국은 1세기가 지난 16세기 들어서야 뒤늦게 르네상스 건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와 먼 것은 물론 종교개혁의 여파 때문에 1534년에 교황청과 단절되는 등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로마와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권력층의 성채나 생활환경 등에서 이탈리아 풍이 유행하는 형식으로 르네상스 건축이 단편적으로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양식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가 지나서였다.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은 프랑스와 달리 자연스러운 예술운동이 아니라 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는 특징이 있다. 스튜어트 왕조 개신교와 연합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상징할 새로운 건축양식을 원했다. 이때 바로 중세 가톨릭을 이끌던 고딕을 밀어내고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선택된 것이다.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은 대체적으로 '이니고 존스'[27] 한 개인에 의해 선도되었고, 따라서 독창성도 부족했다.

독일의 경우 영국보다도 더욱 침체된 상태였다. 개별 건물에 부분적으로 르네상스 건축을 사용하는 정도였고, 정식 양식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미진한 상태였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부터 불거진 가톨릭· 개신교 간 갈등이 폭발한 30년 전쟁과 같은 외부 요인 탓이 컸다. 15세기 독일과 네덜란드의 미술을 ' 북유럽 르네상스'로 지칭할지, '후기 고딕'으로 지칭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북유럽 르네상스의 의미를 긍정하는 편이다.[28]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서야 등장한 '고딕 매너리즘'은,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달리 분산적 장식을 이용한 흥겨운 율동이 주요 특징이었다.

다만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 당시 문명 발전의 최전으로 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식의 역사관에 기초한 윗 문단은 다소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다. 같은 시대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을 단순비교하는 것이 맞는 문제인지 생각해보자. 우선 본문에서 언급되는 독일에서 유행한 '매너리즘'은 '국제 고딕양식'이라고 부르는 '고딕 매너리즘'이지, 르네상스 이후의 '매너리즘'와는 다르다.

독일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양식이 유지되었던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던 고전주의적인 양식이 독일인들의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전주의적인 양식 외에는 독일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같은 관심사들을 공유하고 창작에 활용했다.[29] 실제로, 독일인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달리 매우 쉽게 유입되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에폴로 등이 독일 내에서도 활동하고, 많은 독일인 건축가들과 화가, 조각가들이 바로크 시대에 활동하게 된다. 이는 비슷한 사정이었던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이라고 생각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하지만 중부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여행하면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경험했는데, 알브레히트 뒤러가 대표적인 예이며 또한 밀라노 공국의 보나 스포르차와 결혼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가 폴란드 내에 르네상스 양식의 예술을 후원한 것을 미루어 볼 때 네덜란드나 독일 지역 또한 르네상스의 영향이 아예 없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독일 지역과 네덜란드의 국제 고딕 양식이 국제 고딕 양식이라 하더라도 고딕 양식에 없던 르네상스적 건축 장식이 파사드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례로 현재는 폐허가 된 하이델베르크의 성을 본다면 일부 구관의 건물들의 파사드가 르네상스적 요소가 더러 섞여 있는 것 알 수 있다. 독일어 위키 백과에서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고딕 건축의 사조를 노르딕 르네상스, 베저 르네상스로 명명하고 있다.

6.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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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다비드상 모세 상 아펜니노 거상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분야들 중 하나. 고대 로마의 조각품들을 모방한 조각품들이 우수수 쏟아져나왔다. 특히 당대 르네상스 조각의 중심지는 북부의 피렌체로, 특히 15세기 유럽 조각의 중심부는 그냥 피렌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시대 피렌체의 주요 조각가에는 오르카냐, 난니 디 반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난니 디 바르톨로, 로렌초 기베르티, 도나텔로,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안토니오 로셀리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자코포 산소비노 등이 있다. 이는 피렌체에서 출생한 거물 조각가들만 나열한 것으로, 실제로 이 당시 이탈리아는 수많은 거장 조각가들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르네상스 조각사 역시 초기 르네상스, 하이 르네상스, 매너리즘, 후기 르네상스 이렇게 구분된다. 1400년 만들어진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기점으로 초기 르네상스가 시작됐다고 보고, 1499년에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그리고 1501년에 시작된 대작 다비드상의 제작을 하이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본다. 1527년 사코 디 로마로 인해 로마 르네상스가 절단난 시점을 매너리즘의 시작으로 보며 이후 매너리즘은 후기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까지 이어진다. 르네상스 조각이 언제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1600년대 즈음에 로마에서 바로크 양식이 르네상스 양식을 완전히 몰아내는 걸 기점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나눈다.

당시 조각가들은 여러 가지 재료들을 사용해서 작품들을 깎아냈다. 대리석이 가장 일반적이고 선호되는 재료였는데 특히 토스카나 북부의 알프스에서 산출되는 순백색의 카라라 대리석을 최고급으로 쳤다. 혹은 아드리아 해 건너 이스트리아 지방에서만 나는 색색의 대리석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동은 매우 비싼 재료였다. 같은 양의 최고급 대리석과 비교해도 10배 가량 더 값비쌌을 뿐더러 함부로 구하기도 어려웠다. 부유한 사람들은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에다가 금박을 입혀 부를 과시했다. 나무도 많이 썼다. 물론 값어치나 품질은 재료들 중에 가장 떨어졌지만, 무게가 제일 가볍다는 특성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조각할 때 나무를 많이 사용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걸린 '브루넬레스키의 십자가'도 나무로 제작했다. 또한 매우 부드러워 조각하기 쉬웠기 때문에 성가대석처럼 매우 정교한 장식이 필요한 곳에도 나무를 이용해 장식했다. 성당들이 값비싼 석상이나 청동상을 구매할 여력이 없어 주석 유약을 바르고 구운 테라코타로 만든 조각들을 전시해놓는 경우도 흔했고 석고나 회반죽에 조각을 새기기도 했다.

르네상스 조각품의 주요 발주처는 바로 교회였다. 성당들은 수백 수천 개의 조각들을 발주했고 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북이탈리아는 유난히 조각상들을 건물 외부보다는 내부에 전시해놓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 몇 안되는 예외가 밀라노 대성당이다. 수 백개의 조각상들을 외부로 노출된 벽감 안에 세워놨는데 대부분은 너무 높은 데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고. 이 외에도 여러 조각상들이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역시 처음에는 피렌체 대성당 동쪽 지붕 쪽에 놓으려고 했는데 만들어놓고 보니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따로 전시하고 있는 것 뿐이다.

교회 내부에는 부자와 유력자들의 무덤이 자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묘지를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중세식으로 우리가 아는, 관뚜껑 위에 누워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양식의 무덤을 선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살아서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서 무덤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무덤이 이런 양식이다. 레오 10세의 사례 이후부터는 어떤 인물이던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앉아있는 모습을 조각해서 무덤 뒤에 안치하는 모습의 무덤이 일반화되었다.

공공장소에도 조각품들이 넘쳐났다. 피렌체인들은 공공 조각품들을 도시의 자랑거리로 여겼고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앞에 수많은 조각상들을 전시해놨다. 물을 공급하는 분수도 중요한 조각품이었다. 분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귀중한 물 공급원이었는데, 이같은 실용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도시 미관 장식 목적으로도 사욛됐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볼로냐의 넵튠 분수나 피렌체의 넵튠 분수 등이 있다.

무덤 위에 세울 조각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승마상도 유행했다. 고대 로마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권력자 찬양 목적이었다. 가장 유명한 승마상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완성작 '스포르차 말'이다.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그의 아들을 위해 발주한 실물 규모의 승마상이다. 다 빈치는 1489년에 이 프로젝트를 맡았고 1492년 겨울에 점토 모형을 완성했다. 이 모형은 당시 밀라노에서도 대호평을 받아 이제 청동으로 만드는 일만이 남았지만, 하필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대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청동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승마상 제작 프로젝트는 무위로 돌아갔다. 게다가 만들어놓은 점토 모형마저도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점령했을 때 궁수들이 표적으로 삼고 사격 연습을 하면서 파손당했다. 현재 남아있는건 점토 모형을 묘사한 그림 몇 점과 작은 밀랍 모형 몇 개 뿐이다.

6.1. 길드와 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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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화가의 작업장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비좁은 작업장 '보테가'에서 일했다. 여러 가문 출신 자제들이 모여서 좁은 건물 1층의 작은 공간에서 수련을 받았던 것이다. 해당 건물의 2층에는 보통 스승의 거처가 있었다. 대부분의 작업장이 상당히 작았기 때문에 대규모 커미션을 발주할 때에는 여러 작업장들이 합작해야하는 경우가 잦았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장 한 명이 작품 하나에 끝까지 달라붙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제작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고 15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등장한다. 도나텔로만 봐도 수많은 조수들을 두었고 도나텔로가 작품의 설계와 구안을 짜면 조수들이 대신 조각하거나 그가 하다남긴 일들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도나텔로는 작품의 큰 방향을 지시하고 일부 면을 손볼뿐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주의적인 거장의 이미지는 미켈란젤로인데 미켈란젤로는 실제로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을 도맡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각가들이 돈을 버는 방법은 단순했다. 의뢰를 받은 조각품을 완성하면 발주자에게 돈을 받는 식이었다. 다만 그 조각품의 가치를 판정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랐다. 그냥 발주자가 처음부터 거액의 계약금을 주면 그걸 받고 돈을 주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사용된 방법은, 일단 조각품이 완성되면 객관적인 제3자가 그 조각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식이었다. 이 방법을 쓰면 조각가들이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라도 공을 들여 작품을 완성했기에 발주자들은 보통 이 방법을 더 선호했다고.

1472년 당시 피렌체에는 54개의 석조 작업장이 있었고 44명의 금은세공인, 30개의 화실이 존재했다. 목조 세공인들은 수도 없이 많아서 심지어 정육점보다 목조 작업장이 더 많았다. 물론 이건 당시 예술의 중심이던 피렌체 한정이고, 모든 르네상스 도시들이 이 정도로 예술가들의 집중도가 높거나 많지는 않았다. 이 당시 피렌체와 예술문화적으로 경쟁이 가능했던 도시는 베네치아 뿐이다. 반대로 이탈리아 남부는 예술가들이 굉장히 희귀했다. 남이탈리아 최대 도시라는 나폴리조차도 장인들이 없어서 저 북이탈리아에서 사람을 초빙해와 작품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다.

조각가들이라고 해서 조각만 하는게 절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만 봐도 알겠지만 절대다수의 조각가들은 조각가이자 화가, 건축가로 일했으며 그 분야에 거리낌이 없었다. 금세공에 배경지식이 있는 조각가는 금세공가로도 일했고 은행업에 관심이 있다면 은행가로 일하기도 했다. 조각을 배우기 위해선 스승에게 수업료를 지불하고 작업장을 구해야하는 등 꽤나 돈이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최소 중산층 이상의 집안 출신이었다. 특히 금세공인의 경우 하도 직업적 기술장벽이 탄탄해서 돈을 싸들고 가지 않으면 기본 기술조차 가르쳐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각가들은 나름 돈도 잘 벌고 대접도 괜찮았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먼지가 많고 더럽고 육체적으로 피곤하다'라는 이유로 조각을 싫어했다고 한다.

모든 도시에는 반드시 길드가 존재했다. 석공들은 석공 길드, 금세공인들은 금세공인 길드, 화가들은 화가 길드에 가입하는 등 각자 직업이나 세공 재료에 따라서 다른 길드에 가입했다. 길드는 해당 회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다른 도시의 예술가들이 함부로 일감을 빼앗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지만, 지나친 독점과 인맥관리 때문에 예술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고. 길드의 힘이 가장 쎈 곳은 피렌체였다. 베네치아나 로마의 예술가 길드들은 힘이 다소 약했지만 피렌체의 길드들은 그 영향력이 대단히 강했다. 다만 피렌체 길드들은 타 도시 길드들에 비해 외지인들에게 꽤 포용적이었는데, 이는 피렌체 출신 거장들이 죄다 타지로 나가서 일을 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타지인들에게 수용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길드들은 조각가와 화가들은 후원해주는 역할도 했다. 일부러 길드 회원들에게 일감을 만들어주거나 교회로부터 일감을 받아와 배분하는 역할을 했던 것. 교회 뿐 아니라 은행가들도 의뢰를 많이 넣었다. 메디치 가문 역시 은행가 가문 출신이고 피렌체의 또다른 거물 스트로치 가문 역시 예술품 의뢰를 쏟아냈다. 은행가들이 예술품 의뢰를 넣는다는 것은 종교 및 시민사회에 대한 관대한 기부를 통해 은행업으로 쌓은 죄를 속죄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피렌체를 포함한 여러 나라들에서는 군주가 예술의 주요 후원자였다. 밀라노, 리미니, 페라라, 우르비노 모두가 예술에 막대한 후원금을 쏟아부었지만, 1531년 메디치 가문이 토스카나 대공국을 건국한 이후에는 메디치 가문의 재력과 후원력을 따라올 상대가 없었다. 교황도 엄청난 후원자였다. 아비뇽 유수에서 돌아와 로마를 재단장하기 시작한 이래로 교황은 이탈리아 최대의 의뢰 발주처들 중 하나였고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등 수많은 교황들이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는 아예 메디치 가문 출신일 정도. 얼마 지나지않아 개신교가 발흥하자 기겁한 가톨릭 교회는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조각 발주를 더욱 강화했는데, 특히 유럽 곳곳의 추기경들이 가톨릭의 교세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예술 후원을 하기도 했다.

7. 회화

7.1. 르네상스 이전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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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의 '애도' 르네상스 이전 국제고딕양식의 그림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직전인 13세기 후반, 토스카나 지방의 회화는 이탈리아-비잔틴 양식의 거장 피렌체의 치마부에와 시에나의 두초가 양분하고 있었다. 둘은 보통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들을 많이 그렸고 특히 성모와 예수를 묘사한 성화들을 가장 즐겨그렸다. 중세 시대의 회화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에 대단히 엄격하고 틀에 박힌 듯한 형식을 중요시했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손의 위치는 성화가 상징하는 축복의 성격에 따라 하나하나 달라질 정도였다. 심지어 성모의 머리와 어깨 각도, 베일의 주름, 이목구비의 구성 등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마저도 형식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치마부에와 두초는 조금씩 판에 박힌 듯한 그림에서 벗어나서 더 자연적인 느낌의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조토 디 본도네다. 1266년 피렌체 북쪽 언덕에서 양치기 출신으로 태어나 치마부에의 제자가 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그 재능을 인정받아 북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들 중 하나로 떠올랐다. 조토는 더 자유로운 화풍을 중시하던 로마의 화가 '피에트로 카발리니'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딱딱한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더 개성적인 그림을 그려나갔다. 동시대 비잔틴 작품들과 비교해도 조토의 작품들은 확고하게 3차원적이다. 땅바닥에 제대로 발을 붙이고 서있는 모습, 해부학적으로 훨씬 비례정확한 모습, 무게가 잡히고 구성이 제대로 잡힌 옷을 입고 있는 등 훨씬 사실적인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조토의 작품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적인 감정의 묘사다. 이전의 중세 작품들은 죄다 딱딱하기 짝이 없는 무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쁨, 분노, 수치심, 절망, 사랑 등을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파도바에 그린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의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화는 르네상스 서사화의 선구작으로 일컬어질 정도다. 이렇게 사실적인 표정 묘사, 투시, 명암 등을 회화에 접목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조토는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르네상스 이전 회화의 공통적인 주제는 바로 '죽음과 구원'이다. 1348년 몰아닥친 흑사병 때문에 사람들은 그 이전 어느때보다도 죽음의 존재를 피부 가까이 느끼기 시작했다. 죽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걸 깨닫자 죽음의 불가피성, 참회자에 대한 보상, 죄에 대한 사후의 형벌 등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작품에는 1350년 그려진 '죽음의 승리'가 있다. 죽음을 의인화한 존재들이 세상 모든 것들을 뒤집어엎고 다닌다는 무시무시한 그림.

14세기 후반 토스카나 지방의 대표적인 화풍 양식은 '국제 고딕 양식'이었다. 인물들이 형식적으로 우아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점, 후기 고딕 양식의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제 고딕 양식은 시몬 마르티니와 젠틸레 데 파브리아노를 거치며 더욱 발전했다. 조토의 작품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조토가 감정을 묘사하는 등 현실적,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했다면 국제 고딕 양식은 이상적이고 신에 가까운 우아한 분위기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프라 안젤리코는 국제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 사이의 격차를 해소했다는 평을 받는데, 고딕 양식의 정교함과 르네상스의 화려한 색감과 사실성을 섞어냈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색상이 절제되어 있으나 굉장히 강렬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것이 안젤리코가 그린 작품들의 주 특징이다.

7.2. 초기 르네상스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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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최초의 르네상스 프레스코화 '헌금'
피렌체 최초의 르네상스 회화는 피렌체 세례당의 문이다. 일명 '천국의 문'. 1401년 피렌체 시의회는 세례당에 새로운 한짝의 문을 달기로 결정했다. 당국은 7명의 전도유명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경쟁을 붙였다. 주제는 '이삭의 희생'을 모티브로 문을 장식할 황동 판을 만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이중 로렌초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 선정됐고, 최종적으로는 기베르티가 문 제작 담당 예술가로 뽑혔다. 그는 무려 27년이라는 세월을 들여서 문을 완성했다. 기베르티는 성경의 내용을 서술적이고 비유적인 구성으로 아름답게 뽑아내는데 성공했고, 뿐만 아니라 선형 원근법을 사용함으로써 피렌체의 회화예술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최초의 초기 르네상스 프레스코화는 1425년 2명의 예술가 마사치노와 마솔리노가 피렌체의 브란카치 예배당에 성 베드로의 생애를 그리면서 시작됐다. 그들은 조토의 화풍을 충실히 이어받아 해부학, 단축법, 선형 원근법, 빛, 옷감 질감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려진 작품 '헌금'은 정확히 하나의 소실점을 가지고 있으며,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통해서 작품에 입체감을 준다. 또한 예배당 측면 아치에 그려진 '선악과를 받는 아담과 이브'는 반대편에 그려진 아름다운 인물화와 명확한 대조를 이루며 아담과 이브의 욕망을 부각한다. 마사치노는 1428년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훗날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르네상스 초기 회화에서 가장 눈여겨볼 점은 바로 선형 원근법의 발전이다. 15세기 전반에 걸쳐 소실점과 원근법을 사용해 2차원 평면 안에 3차원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이다. 파올로 우첼로는 지나칠 정도로 원근법에 집착해서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원근법을 실험하기 위한 용도로만 그림을 그려댔을 정도. 그의 대표작은 1450년에 그려진 '산 로마노 전투'. 멀게 그려진 언덕과 들판은 초기 원근법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원근 뿐만 아니라 자연광에 의한 빛의 묘사도 한층 자연스러워져서 이전에 비해 훨씬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게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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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로마노 전투[30]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
초기 르네상스는 하이 르네상스, 즉 르네상스 전성기로 향하는 요소들이 하나하나씩 등장했다. 가장 중요한건 당연히 경제적 후원자들의 존재였다. 아무리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있어도 후원가가 없으면 예술에 종사하기 힘들다. 르네상스 시기 대부분의 후원은 교회나 부유한 은행가 가문, 예를 들어 메디치 가문이나 사세티 가문, 루첼라이 가문, 토르나부오니 가문 등등에서 나왔다. 1460년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인본주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제 가문에 상주시켰고 옛 플라톤의 철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형제애', 혹은 플라토닉 러브가 신의 사랑을 모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랑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후원가들은 고전 그리스 로마 문화를 기존과는 달리 새롭게 인식한 사람들이었다. 중세 때까지만 해도 그리스 로마 문화는 기독교 확산을 방해한 이교 문화로써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면이 있었으나, 르네상스 들어서는 기독교 예술 안에서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쪽으로 편입됐다. 우상숭배라고 여겨졌던 비너스 여신은 이브, 순진한 사랑의 상징, 더 나아가 심지어 동정녀 마리아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졌다. 악마로 취급되던 고전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은 더이상 사악한 이단 이교주의의 상징처럼 백안시되지 않았다.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만큼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도 얼마든지 허락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 역시 메디치 가문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수많은 예술품 의뢰를 넣는 주요 후원자들 중 하나였다. 1477년 식스토 4세 바티칸의 버려진 예배당을 개축했는데, 이 예배당을 그의 이름을 따서 시스티나 경당이라고 이름붙였다. 식스토 4세는 새롭게 만들어질 경당의 장식을 위해 수많은 예술가들을 초청했다. 산드로 보티첼리, 피에트로 페루지노, 도메니코 기를란디요 등이 시스티나 경당의 장식을 맡았다. 경당 한쪽에는 모세의 이야기를, 반대쪽에는 예수의 일생을 프레스코화로 그리도록 하였다. '예수의 탄생'과 '모세의 발견'이 각각 중앙 제단 양 옆에 그려져 있었고, 중앙 제단 바로 뒤에는 '성모 발현'이 그려져 있었다. 이 성모 발현은 훗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위해 지워졌지만 그 예술성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현재는 이때 그려진 프레스코화들 중 12점이 경당 내부에 보존되어 있는데, 동방박사를 인도하는 천사부터 분노한 파라오까지 수백수천 명의 인물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볼 만하다.[31]

7.3. 하이 르네상스 회화

파일: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jpg 파일: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초상화.webp 파일:라파엘로 산치오의 자화상.jpg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 3명이 활동했던 르네상스 회화의 황금기 시대. 이들 외에도 뛰어난 예술가가 넘쳐나지만 이 세 명은 당시부터도 격이 다르게 여겨져 왔다.[32]

이 시기의 르네상스 예술을 따로 '하이 르네상스 예술'이라 부른다. 선형 원근법, 부드러운 명암 대비를 통한 빛의 조작, 스푸마토 기법, 톤 대비 등을 통해 균형과 조화의 정점을 찍은 시대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르네상스 회화는 현실 대 이상, 운동 대 정지, 공간 대 평면, 자유로움 및 멈춤, 선 대 색 등 다양한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서양 회화의 절대적인 기준점으로 여겨지는 수준이다.

보통 미술사학자들은 전성기 르네상스가 1495년, 혹은 1500년 쯤에 시작해서 1520년 라파엘로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본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1525년, 혹은 사코 디 로마가 일어난 1527년에 끝났다고 본다고 한다. 극히 일부는 1530년을 완전한 전성기 르네상스의 종결로 보기도 하지만 중론은 사코 디 로마가 일어난 1527년을 완전한 르네상스의 끝으로 보는 편. 전성기 르네상스의 첫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으로 본다. 이 시기 회화계는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라는 희대의 천재 3명이 이끌었으나 그 외에도 안토니오 다 코레조, 안드레아 델 사르토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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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끈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동시대 유럽 최고의 거장이자 고금을 통틀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452년 태어나 피렌체의 베로키오 공방에서 훈련받으며 성장했고, 1482년 밀라노로 이주해 일하다가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는 과학적인 관찰가였다. 그는 들판의 꽃, 강의 소용돌이, 바위와 산의 형태, 나뭇잎에 반사되는 태양빛 등 주변 사물 모든 것을 관찰했다. 특히 인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병원에서 30여구에 달하는 무연고 시신을 직접 해부하며 인체의 근육과 힘줄 구성을 깨우쳤다. 그는 조토 이래로 가장 풍부하게 그림속 인물의 감정을 표현했던 화가들 중 하나였다. 1495년부터 작업하기 시작한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 식당 그린 '최후의 만찬'은 이후 500여 년동안 유럽 종교 서사화의 모범이 되었을 정도.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이후에도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수없이 그려졌지만 그의 것만큼 유명한 작품은 없다. 그는 그 어떤 화가들보다도 작품 속 분위기에 대한 연구에 앞장선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 모나리자와 암굴의 성모만 봐도 명암을 굉장히 섬세하게 사용했는데, 이걸 레오나르도 특유의 ' 스푸마토 기법'이라고 한다. '흐릿한'이라는 이탈리아어 '스푸마레'에서 유래한 단어로 연기처럼 물체의 윤곽을 안개에 싸인 듯이 부드럽게 처리하는 기법이다. 색의 명암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조화롭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작품들의 3차원적 구성, 작품의 역동성과 긴장감 등은 후기 르네상스 예술가, 매너리즘 예술가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빛, 해부학, 풍경 및 인체 표현에 대한 연구는 후배 예술가들에게 크나큰 자료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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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중(中) '아담의 창조'

레오나르도의 경쟁자로 꼽히는 인물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있다. 그는 여러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의 수많은 걸작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천장화들이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의 의뢰를 받아 미켈란젤로가 그리기 시작했다. 원래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은 12명의 사도들을 하나씩 각각 그려넣을 목적으로 12개의 천장 펜던트를 가지도록 설계되어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사도만 그려넣을 생각이 없던 미켈란젤로는 훨씬 복잡하고 장대한 천장화를 구상했다. 그의 프로젝트가 어찌나 장대했던지 그가 이 천장화를 완성하는 데에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원래 교황의 계획은 벽에 주제별로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그리고, 그 성경 내용들이 바로 옆 초상화들의 갤러리에 있는 교황들의 초상화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경당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교황들이 성경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연결성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 그래서 시스티나 경당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의 초대 주교가 되어 교황들의 계보를 시작했다는 내용을 그려넣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인간의 구원과 영광을 그리는 대신 인간의 치욕과 무지를 표현했다. 인간의 무지를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왜 인류에게 예수와 신앙이 필요한지 역설했던 것이다. 천장화 자체는 표면상으로는 굉장히 인본주의적으로 보인다. 등장하는 인간들은 대부분이 초인처럼 묘사되었으며, 최초의 인간 아담의 경우 신이 직접 빚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인물의 몸과 얼굴은 아름답게 묘사되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표정과 행동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플라토닉 러브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그림에 묘사된 인간들은 불화와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표면적으로는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한 것 같지만, 실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신의 완전성을 대비시킨 것이다. 천장화 뿐만 아니라 제단 벽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도 유명하다. 흔히 미켈란젤로 최후의 대작이라고 여겨지는데, 1534년부터 1541년까지 약 7년에 걸쳐 그려졌다.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그린 작품들 중 하나인데, 그래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에 당시 유행하던 매너리즘의 영향을 섞어 몸이 조금더 길쭉하게 그려지는 등의 특징이 있다. 이렇게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예술의 인체 표현방법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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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변용

르네상스 예술의 3대장 중 가장 젊은 라파엘로 산치오는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에 비하면 회화의 기법적 발전에 기여했다고 할 만한 모습은 약간 부족하다. 하지만 그는 선배 화가들이 이룩해놓은 회화적 토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합하여 발전시킨 융합적 천재로 르네상스 예술의 정점을 찍었고 많은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도와 인물의 배치, 풍부한 색감, 명암의 활용,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 등 모든 면에서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의 최절정이라고 평가 받는다. 현대에 들어와 다른 둘에 비해 약간 밀리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르네상스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수백년 동안 최고의 천재 화가로 평가받은 사람은 사실 라파엘로였다. 르네상스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라파엘로의 죽음이다.[33]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정복 후 파리에 가져온 상징적인 유물은 라파엘로의 그림이었으며[34], 라파엘 전파라는 후대의 화파 이름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35] 자화상에 비친 그의 모습은 '라파엘라'라고 하여 화가의 상징이[36] 되었고, 그의 두개골은 보존되어 화가들이 연필을 가져다 대는 숭배 의식의 대상이 된다. 또한 성 누가를 대체할 정도의 거의 예술의 수호성인 수준까지 이른 신적 예술가로 여겨졌다. 그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페루지노의 작업장에서 일했고, 1504년 피렌체, 1508년 로마로 이주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바티칸에 남긴 '아테네 학당'이다. 그는 선배 화가들이 남긴 유산들을 아낌없이 활용했다. 페루지노의 둥근 형태와 빛나는 색상, 기를란다요의 사실성, 레오나르도의 생생함과 조명, 미켈란젤로의 강력한 소묘를 모두 이용했던 것이다. 그는 37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다수의 대형 제단화, 프레스코화, 태피스트리 등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작품과 인물의 개성을 담은 초상화로 유명세를 떨쳤다. 실력에 더한 사교적인 성격으로 교황 율리오 2세 레오 10세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항상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어려움 없이 풍족한 삶을 살았다.

사실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이렇게 3명만 지나치게 부각이 돼서 그렇지 사실 이 3명 말고도 이 시기에 활동한 예술가들은 많다.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선두주자 조반니 벨리니와 조르지오네, 티치아노 베첼리오, 안토니오 다 코레조 등이 있다. 개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티치아노 베첼리노다. 조르지오네와 함께 조반니 벨리니의 업장에서 훈련을 받았고, 조르지오네를 도와 그림을 그리다가 조르지오네가 죽자 60여년 동안 베네치아 화풍의 정점을 지켰다. 그는 선이 아닌 색을 그림의 주요 요소로 삼았다. 그는 느슨하고 섬섬한 붓놀림으로 색상을 빛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당대 최고의 빛과 색채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성모 승천'.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암시한 최초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 등 다른 대가들이 후기로 갈수록 매너리즘 화풍을 그렸던 반면 티치아노는 죽을 때까지 하이 르네상스 화풍을 유지하며 이탈리아 주류 회화계와 서서히 고립됐다. 여러 면에서 현대 회화의 창시자라 할 수 있겠다.

7.4. 유럽으로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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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프리마 판도라. 장 쿠쟁 작(作). 프랑스 르네상스 작품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저지대, 잉글랜드, 저멀리 북유럽까지 쭉쭉 뻗어나갔다. 가장 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받아들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애초에 이탈리아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나라들 중 하나였고 교역도 활발했기 때문. 1400년대 후반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이탈리아에 발을 내디뎠는데, 이때 북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처음 접하게 된다. 1516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다 빈치를 초대해 극진한 대접을 해줬다. 이때 갖고온게 그 유명한 모나리자, 성 안나와 성 모자와 세례 요한,[37] 세례 요한 등의 작품이다. 이후 프랑스 르네상스는 앙리 4세 등 왕가의 후원을 바탕으로 매너리즘 화풍을 거쳐 초기 바로크 화풍으로 발전한다.[38]

독일의 경우 이탈리아식 르네상스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특히 건축학적으로는 여전히 고딕 양식을 고수했고 이탈리아식 르네상스 양식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것이 독일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독일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지식의 전파가 빠른 지방들 중 하나로 꼽혔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 기술이 책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고 야금, 광업, 은행업, 섬유업 등이 발전된 지방이었기 때문. 도시화율 자체는 이탈리아나 네덜란드에 비해 떨어졌지만 독일계 국가들의 부유함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목판화와 판화는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독일에서 더 먼저 발전했다. 독일 르네상스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꼽히는 알브레히트 뒤러 뉘른베르크에서 견습생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1490년 견습과정을 마친 뒤러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한 몸에 흡수한 채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독일에 르네상스를 소개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지만 여전히 성모 마리아와 가톨릭 성화들을 그렸고, 구교파와 신교파 소속 인물 모두에게서 의뢰를 받았다. 덕분에 그는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는 헌사를 받았다. 그의 대표작은 '기도하는 손',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등이 있다.

뒤러는 종교 분열이 확실해지기 전인 1528년 사망했기에 별 상관이 없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이 확실해지자 더이상 가톨릭식의 대규모 종교화나 천장화는 독일에서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루터교도 벽에 성인과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장 칼뱅의 칼뱅파가 힘을 얻으며 그마저도 불가능해진 것. 교회에서 의뢰하는 성화나 벽화들이 주 수입원이던 예술가들에게 개신교의 우상숭배 금지 조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의 회화 발전은 1550년대 이래로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뒤러의 사망 이후 약 수십년간 독일의 미술 발전은 정체됐으나 일부 화가들이 이탈리아, 플랑드르 등지에서 배워온 매너리즘을 독일에 도입하는가 하면, 가톨릭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남부 독일에선 회화의 발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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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하임 제단화[39]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
네덜란드 등 저지대 지방은 독일에 비해서는 종교적인 회화가 맥을 보존했다. 르네상스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15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종교적인 모티브들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저지대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있다. 낯설고, 비합리적인 이미지가 가득찬 작품들로 환상적인 세계를 담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1550년대 이후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화가들은 자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탈리아식의 우아한 자연의 전원풍경보다는 풍경, 정물화, 풍속화 등 일상생활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 시기의 대표가 바로 피터르 브뤼헐이다. 그의 대표작은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인데, 정작 주인공 이카루스는 저 배경에 숨겨져 있고 작품의 메인은 이카루스가 떨어지든말든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이다. 브뤼헐은 인간을 반(反)영웅적이고 우스꽝스러우며 때로는 기괴한 존재로 묘사한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늦게 르네상스를 받아들인 국가들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가 영국과 너무 거리가 멀고 영국이 섬인지라 유럽 본토와 고립되어있었던 탓이 크다. 그래서 영국에는 헨리 8세의 재위기인 1500년대 초반에야 처음 르네상스가 들어왔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인 15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영국 르네상스가 절정기를 맞았다. 영국 르네상스의 가장 큰 특징은 문학과 음악에 치중되어있다는 것으로, 회화는 딱히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의 종교개혁으로 성상파괴가 일어나며 기존의 성화들이 죄다 불살라지며 르네상스 예술이 설 자리는 더 줄어들었다. 이후 영국 회화는 초상화 위주, 그 다음에는 풍경화 위주로 발전해나갔다.

8.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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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을 탐구하는 르네상스 연금술사의 모습
르네상스 시대에는 지리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수학, 해부학 공학 분야에서 활발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서양인들은 15세기 초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슬람, 심지어 저 멀리 인도의 문헌들까지 수집하기 시작했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수많은 고대 문헌과 자료들이 서구 유럽 세계로 유입됐다. 또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이래로 인쇄술이 등장, 지식의 전파 속도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며 과학 발전은 더욱 가속화됐다. 한때는 르네상스 학자들이 인문학, 정치학 같은 인문적인 학문에만 신경을 쓰고 자연과학, 수학 등을 등한시했다는 시각도 있었지만 현대 들어서는 르네상스가 과학과 수학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4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의외로 천문학이나 물리학에 발전이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르네상스인들은 고전 자료라면 죄다 세상의 진리인줄 알고서 수용했는데, 문제는 당시 정설처럼 여겨지던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관이 아예 틀려먹은 가설이었다는 것. 논리와 연역은 감정에 부가적으로 딸려오는 부속품 취급을 받았고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은 자연이 특정 규칙이나 수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적인 창조물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코페르니쿠스, 지롤라모 카르다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같은 근대적 학문가들이 등장하면서야 과학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된다. 이 때 중동의 천문학자들을 불러와 천문학을 연구하던 중국도 점점 서양의 천문학자들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연금술 화학은 거의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계통의 학문이었다. 연금술은 지금이야 비과학적인 사이비 학문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엔 진지하게 연구됐고 인기도 많았다. 연금술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을 만드는 것. 연금술사들은 이세상 모든 물질들을 형성하는 '필수 물질'이 존재하며, 물질을 이 '필수 물질'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반대로 이 필수 물질을 이용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을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겼다. 쉽게 말하면 -> 필수 물질 -> 이런 식으로 바꾼다는 원리다. 중세 연금술사들은 특히 수은을 이용해 작업했다고.[40] 결론적으로 이들의 연구는 실패했으나 그 과정에서 발견된 수많은 물질들, 화학적 법칙과 원리들은 훗날 근대 화학의 발전 기반이 되어주었다. 화학은 르네상스 말기 들어서는 아예 연금술로부터 분리되어 마침내는 대학 교육과정에까지 따로 등재될 정도로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떨어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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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기반 우주관
중세 후기 천문학은 고대 프톨레마이오스 천동설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읽어본 천문학자나 점성술사는 거의 없었고, De Sphaera mundi나 Theorica Planetarum 같은 요약 소개본 따위에나 의존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르네상스 천문학자들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지동설에 기반한 천문테이블표 '알폰신 표'를 이용해 행성들의 움직임을 계산했고, 분점 세차운동에 가상의 진동을 도입해 오류를 보정했다. 다만 대중적인 오해와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의 필연적인 오류를 맞추기 위해서 주전원 위의 또다른 주전원을 도입한다든가 그런 복잡한 짓은 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천문학의 최고 거두는 당연히 코페르니쿠스다. 그는 지난 몇 천년 동안 지배적이었던 천동설의 원리를 부정하고, 1514년 지동설이라는 획기적인 개념을 부활시켰다. 옛 고대 그리스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을 1700년 만에 다시 끌어올렸던 것이다. 그는 태양중심설의 과학적, 수학적 정확성을 증명하면서 여생을 보냈고, 1534년 그 유명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했을 때 그는 이미 임종 직전 상태였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생각은 딱히 빛을 보지 못했다. 서구 천문학계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의 것을 따랐고, 지동설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의 등장 이후부터다. 이러한 천문학의 발달에 힘입어 1582년에는 율리우스력의 일부 오류가 수정되고 그레고리력으로 대체된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들의 위대한 업적들은 르네상스 시대 들어서 다시금 빛을 보았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의 작품들 대부분은 서양에서는 소실되었으나 비잔틴과 이슬람 문화권에 잔존하고 있었는데, 이 것들이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라틴어로 대규모로 번역되며 확산되었던 것이었다. 참고로 15세기와 16세기의 르네상스인들은 단순히 고대 수학을 부활시킨 것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타르타글리아나 루카 파치올리 같은 수학자들은 피보나치나 옛 이슬람 수학자들의 학문을 계승해 더욱 발전시켰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을 비판하며 부분 물리학 계산을 위한 수학적 교리를 개발했고 자연 이론을 변형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크게 발전한 분야 중에는 지리학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고대 이래로 유럽 최고 권위의 지리학 서적은 역시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다. 15세기 라틴어로 번역된 이래로 1475년에 처음 인쇄되어 유럽 지리학의 성경 같이 대접받았다. 새로운 지식들이 속속 등장하는 와중에도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립한 좌표법이나 투영법 등등 지도 제작 시스템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특히 지도 제작을 단순한 귀족들의 취미나 예술 분야가 아닌, 독자적인 과학 분야로 끌어올리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동시기에 일어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지구 일주 등이 성공하며 확장의 물결이 유럽 전체를 휩쓸었던 것 역시 지도학과 지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9. 철학

르네상스 철학에 가장 심오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12~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들이 발견된 이래로 자연철학, 도덕학, 형이상학 같은 저술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이에 경도된 르네상스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래에서 새로운 철학 사상을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세의 물리학 강의는 그의 책을 이용해 수업했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르네상스 도덕 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아예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주로나 다름없었다. 그의 저서는 라틴어와 여러 언어들로 번역됐고, 특히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신교 일파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권위의 주요 원천을 삼았으며 그의 윤리학을 다룬 수십여개의 논평이 쏟아졌다.

한편 플라톤 철학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졌다. 중세 철학, 특히 스콜라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력 없이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정작 중세시대 내내 읽힌 플라톤의 저서는 고작 <티마이오스> 한 편뿐으로, 플라톤의 원전이 아닌 후대의 신플라톤주의 성향을 띄는 교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견해를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었기에 플라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15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플라톤의 저서 원전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망명한 비잔티움의 철학자들에 의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으로, 그는 플라톤 철학을 체계적으로 강의하고 그의 저서를 소개함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배하게 된 서유럽 지성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특히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해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 교리에 잘 맞음을 강조하고, 플라톤의 정치철학 역시 서유럽에 소개하여 로마적 보편제국이 아닌 소수의 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 의한 이상적인 철인정치가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공공선(res publica)에 의한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비전은 토마스 모어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을 매료시켰다.

방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철학은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적인 어휘를 훈련받은 사람들의 철저한 탐구가 필요한 심오한 주제로 간주됐다. 철학적 문제는 대학 강의와 '질문'을 통해 접근되었다. 후자는 어떤 면에서 현대 논쟁과 유사하며 특정 철학적 입장이나 해석의 찬반 양론을 논했다. 이 '질문'을 이용해서 학생들이 질문에 신속하게 제안하거나 응답하도록 만들었고, 특정 철학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자주 언급되는 모든 알려진 철학적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했다. 중세 시대 동안 발전해온 이런 식의 수업 스타일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거의 세상 만물을 다뤘을 정도로 넓은 범위를 탐구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범용성 덕분에 중세, 르네상스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아래에서 모든 분야를 논할 수 있었다. 투척물의 궤적, 동물의 습성,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 의지와 자유, 미덕과 행복의 관계 등 광범위한 주제들이 모두 다뤄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기독교도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2가지의 주제, 영혼의 불멸성과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토론에 쓰일 자양분이 되었다. 비록 기독교를 신앙하던 르네상스 철학자들이 이에 내놓은 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달랐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르네상스 철학의 기반을 만들어주었다는데에 큰 의의를 남겼다.

르네상스 이후로 서구 철학가들은 훨씬 넓어진 학문적 소스를 누릴 수 있었다. 중세에는 고대 사상과 문헌들이 사악한 이교도들의 것이라 하여 함부로 열람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시대가 바뀌며 고대 철학자들의 풍부한 자료들이 그대로 개방됐고 이용할 수 있는 소스도 크게 넓어진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직접 플라톤의 저서를 읽을 수는 없었으나 간접적으로 플라톤의 사상을 접했고, 키케로를 최고의 라틴어 산문가로 깊이 존경했다. 르네상스 철학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두 위대한 이교도 철학자를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에피쿠로스 쾌락주의가 다시 사회에 떠올랐으며 미셸 드 몽테뉴 피론주의와 학문적 회의주의를 다시 부활시켰다. 스토아 학파가 다시 명성을 얻으며 대중적인 운동이 되기까지 했다. 고대 사상을 이단이라 배척했던 중세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중세 철학 최고의 거물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덕 철학이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 이렇게 3가지의 하위 분류로 나뉘며 정치가 다수의 이익을 고려하기 때문에 정치학이 윤리학보다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했다. 허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떠오르면서, 윤리학이 도덕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기존 철학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철학의 이론적 측면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는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닌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마치 옛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키케로를 연상시키는 사고방식이었다.

인본주의자들은 중세 철학을 지배한 스콜라주의의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인본주의자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접할 수 있도록 기존 번역서들을 더욱 유려하고 단순한, 더 가독성이 좋게 만들고자 했다. 기존의 딱딱하고 기술적이기 짝이 없는 번역서들을 다시 번역해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리스어 원문에 더욱 쉽게 접근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에라스뮈스는 아예 고전 그리스어의 아름다움 아래에서 고전 철학을 접해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모든 수업을 그리스어 교재로만 진행했을 정도였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차 모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540년대부터는 이탈리아어로 고대 저작들이 번역되는 등 점차 고대 철학자들의 저서도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기 시작했다.

초기 역사가들은 르네상스 철학이 점차 신을 부정하는 쪽으로 흘러갔다고 주장했다. 영혼 불멸을 대놓고 부정한 피에트로 폼포나치, 인간의 중요성을 논하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 등을 중시하며 르네상스 철학이 세속주의와 심지어 무신론까지 흘러갔다고 주장했던 것.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당시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던 철학 논문 '자연철학 개요서'는 굉장히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고 모든 철학자들은 독실하지는 않더라도 기독교도였다. 이 시대의 종교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고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르네상스 철학이 신을 부정했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것은 자중해야 할 것이다.

신비주의 기독교의 관점에서 플라톤을 재해석한 마르실리오 피치노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철학을 재창조했다. 그는 철학을 통해 부패한 종교계에 쇄신과 정화가 이루어지길 바랬다. 피치노는 플라톤 철학의 불쾌한 면(ex: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플라토닉 러브로 승화시키는가 하면, 피에트로 벰보와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이 플라토닉 러브가 남녀 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변형시켰다. 피치노와 그 제자들은 '숨겨진 지식'에 관심이 많았다. 모든 고대 지식들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고 믿었고 하느님의 계획 아래 상호적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 이렇게 르네상스 철학자들은 반종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친화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르네상스 철학이 갑자기 중세의 어둠 속에서 뿅하고 등장해서 고대 지식의 광채를 환하게 흩뿌렸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매우 곤란하다. 다른 모든 시대의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철학 역시 이전 철학들의 총집합이자 연속체에 불과했다. 기독교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플라톤, 심지어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까지 수많은 옛 철학들이 하나로 합쳐져 르네상스 철학이라는 거대한 줄기를 이룬 것이 정확하다. 또한 르네상스 철학에 대한 해석 역시 해석하는 사람의 편견이나 관념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르네상스 철학이 중세나 근대 철학과 확연히 구분된다거나, 무(無)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했다라는 식의 이해는 삼가야 할 것이다.

10.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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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인쇄기 베란치오의 낙하산 베네치아의 플로팅 도크
르네상스는 학문적 발전 뿐만 아니라 기발한 발명과 발상의 시대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발명품만 봐도 인쇄기, 도면의 선형 원근법, 특허법, 이중 돔, 바스티온 요새 등이 모두 이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르네상스는 과학혁명을 낳았고 과학혁명은 기술 발전을 낳았다. 이 둘은 서로 선순환을 하며 끊임없이 성장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기존 기술의 혁신과 발전이 일어났다. 광업 및 야금술의 경우, 고로 덕분에 철을 상당량 생산할 수 있었고 고급 단조를 이용해 선철을 연철로 제련할 수 있었으며 '슬리팅 밀' 시스템을 이용해 제작을 기계화했다. 또한 제련소에서도 납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14세기 후반에는 화승총 소총이 개발됐고 15세기에는 인쇄기, 총기, 항해 나침반 이 3가지의 발명품들이 널리 퍼졌다. 특히 인쇄기, 나침반과 총기의 발전으로 이전과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으로 의사소통, 장거리 항해, 권력 행사가 가능해지자 르네상스인들 스스로가 고대인들을 능가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고.

독일의 금세공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은 르네상스 뿐만 아니라 제2천년기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위대한 발명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세 사회를 변혁하고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기계는 하루에 3,600 페이지를 생산할 수 있는 스크류로 이루어져 있어 원시적인 규모지만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책을 찍어냈다. 16세기 초에는 유럽 12개국 2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인쇄기가 돌아가며 2천만권 이상의 책을 찍었다. 1600년까지 유럽의 서적 생산량은 약 1억 5천만 부에서 2억 부까지 증가, 100년만에 최대 10배까지 증가했다.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생산은 학습 및 교육의 급격한 발달로 이어졌고 지배 귀족의 지식 독점을 깨뜨렸다. 지식은 점차 민주화되었으며 언론이나 베스트셀러 같은 근대적 미디어 현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낙하산 역시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가장 초기에 알려진 낙하산 디자인은 1470년대 이탈리아의 익명 원고에 등장한다. 원고에는 원뿔형 캐노피에 부착된 가로대 프레임에 매달린, 안전 장치용으로 막대 끝에서 허리 벨트까지 4개의 끈을 동여맨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1485년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보다 더 발전된 형식의 낙하산을 발명했는데, 캐노피를 정사각뿔 모양으로 개조하고 낙하산 모양을 원뿔에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바꿨다. 베네치아의 발명가 베란치오는 다 빈치의 안을 개량해 캐노피를 부풀어오르는 듯한 돛 모양의 천 조각으로 교체했다. 이 방법이 추락 속도를 더 효과적으로 감속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베란치오가 베네치아의 탑에서 직접 낙하산을 매고 뛰어내렸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 당시 베란치오의 나이가 65세나 되었기에 딱히 신빙성은 없다.

그 외에 1400년대 후반에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아스트롤라베,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묻혀있었다가 다시 등장한 드라이독 기술, 1560년대 베네치아에서 등장한 플로팅 도크 기술, 로마 바티칸 앞으로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옮기기 위해 사용한 거중기 비슷한 리프팅 타워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발명품들이 있다. 특히 플로팅 도크의 경우, 좌초된 선박을 구조하기 위해 플로팅 도크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물 위에 떠있는 2개의 커다란 가대가 있고 측면에 반쯤 침몰한 배를 상부에 부착된 2개의 밧줄을 이용해 수직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언론 신문이 등장해 1600년대에는 이미 신성 로마 제국에서 2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신문을 구해 읽었다. 1607년 바르톨로메오 크레센티오는 강력한 나선형 스프링이 장착된 공기총을 창안했다. 단순 기술적인 면에서도 발전이 많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크랭크를 장착하는가하면 실 타래를 감는 크랭크 릴, U자형 그립이 장착된 목재 버팀대, 크랭크형 웰 호이스트, 외륜 보트, 회전식 숫돌, 기어 핸드밀, 수류탄 소총 등도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선보였다.

11.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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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의 스케치 베살리우스의 신경계 묘사도 베살리우스의 시체 해부도 르네상스의 시체 해부 모습
의학의 선구자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빼놓을 수 없다. 직접 의사로서 활동한 건 전혀 아니지만, 그는 인간의 뇌가 시각 및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과 그 것이 영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의 연구는 시력과 관련이 있었고, 다 빈치는 시각 정보가 눈을 통해 들어온 다음 시신경을 통해 결국 영혼으로 전달된다고 믿었다. 다 빈치는 영혼이 심장이 아닌 에 머무른다고 믿었다.

그는 개구리를 연구해 인간의 척수에 대해 연구했다. 개구리의 척수가 부러지자마자 개구리가 죽는 걸 관찰한 다 빈치는 척추가 촉각의 기초이자 모든 움직임의 근원이며, 신경의 근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또한 모든 말초신경이 척수에서 시작한다는걸 알아챘고 후각신경을 뇌신경들 중 하나로 정의한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다 빈치의 엄청난 탐구욕 덕택이었다. 그는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30여구의 무연고 시체들을 직접 해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교한 해부학 스케치를 그렸다. 그의 해부학적 스케치들은 무려 380년이 지난 이후에야 발견되었지만 그 정교함은 근대 의학에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외과의사 '앙브루아즈 파레'는 해부학자이자 수술 도구의 발명가였다. 1533년부터 1536년까지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 동안 군의관으로 활동했다. 원래 총상을 치료하는 데 쓰던 끓는 기름이 떨어지자 고대 로마식으로 송근유, 달걀 노른자, 장미유를 섞어 발랐다. 그러자 이게 총상 치료, 통증 완화에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상처에 무식하게 끓는 기름을 들이붓는 짓거리보다는 후유증도 훨씬 경미했고 효과도 좋았던 것이다. 또한 동맥 합자를 도입하기도 했다. 출혈을 멈추기 위해 절단된 팔다리의 혈관을 명주실로 묶어냈다고. 하지만 아직 소독기술이 발명되지 않은 당시에는 이 방법이 치료는커녕 감염사시키기 딱 좋은 방법이었고, 인두로 지져버리는게 훨씬 효과적이었기에 결국 잊혀진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1514년 무렵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전속 약사이기도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해부학에 관심을 가졌고 생쥐, 두더지, 고양이, 개 따위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학자 갈레노스의 연구를 계승해 해부학을 하나로 체계화해 발전시켰고 그 덕에 '근대 해부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어찌나 해부에 열정적이었던지 법을 어겨가며 교수형당한 범죄자의 시체를 몰래 해부할 정도였다.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엄청 눈총을 받았다고. 그가 28세의 나이에 출판한 대표작 '사람 몸의 구조'는 혁명적인 수준으로 정밀한 장기 묘사로 유명하다. 베살리우스는 이렇게 갈레노스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동시에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며 근대 해부학을 한걸음 진보시켰다.

윌리엄 하비는 근대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만큼 유명한 의학자다. 그는 모든 의학 지식이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해부학을 "눈 검사와 해부를 통해 각 부분의 용도와 작용을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정확하게 정의내렸다. 혈액이 어떻게 심장을 타고 몸 전체를 순환하는지 밝혀낸 업적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히에로니무스 파브리시우스도 잘 알려져있다. 파브리시우스는 인체 및 동물 해부서를 작성한 해부학자로서, 인간의 뇌와 정맥을 연구했다. 그는 전두엽 측두엽을 분리하는 뇌 고랑을 밝혀냈고 정맥 내부의 판막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12.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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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독교 중심적 인본주의

르네상스 인본주의란 고대 문헌들을 토대로 인간을 중심으로 두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어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인본주의라고 하여 신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인 인간을 중시한다는 뜻과는 좀 거리가 멀다. 르네상스인들은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유신론자들인데다가 독실한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부패해 썩어빠진 가톨릭 교회를 '정화'하는 것이지 '폐지'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의 최종 목표는 중세 가톨릭 신학의 지나친 복잡성을 걷어내고, 복음과 신약의 단순성을 기둥삼아 기독교 사상의 초심을 되찾는 것이었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신의 자리에 인간을 올려놓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상당수의 인본주의자들은 의외로 성직자였다. 애초에 글을 읽고 편안하게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계층이 사제계급이었으니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비오 2세, 식스토 4세, 레오 10세 같은 교황들은 인본주의를 후원했다. 특히 종교개혁 이래로 가톨릭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성경과 초기 기독교 문학에 대한 이해와 번역을 개선하기 위해 인본주의자들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다. 이후 에라스뮈스, 자크 르페브르 같은 비이탈리아인 신학자들이 등장해 성경, 교리, 그리고 전반적인 신앙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인본주의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고대 문헌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흔히 말하는 '이교'와 기독교 교리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417년에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저서 'De Rerum Natura'가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저서 안에는 수천년 동안 잊혀졌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소개되어있었다. 처음에는 루크레티우스의 문법과 표현방법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150년 후에는 책에 실린 쾌락주의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좋지 못했는데, 한 프랑스 평론가는 쾌락주의에 대해 '공상적이고 터무니없으며 반기독교적'이라고 쏘아붙였다. 그의 평가는 무려 19세기까지 서양 학계가 쾌락주의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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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신의 세계를 묘사한 단테의 '지옥'.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매우 기독교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부정했던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언어학자 로렌초 발라였다.[41] 그는 그의 작품 안에서 그의 대담자 중 하나의 입을 빌려 에피쿠로스식의 쾌락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기분좋게 사는 사람들이 쾌락주의자라면,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들보다 더 쾌락주의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썼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장 진정한 즐거움과 쾌락을 누릴 수 있으므로 예수를 믿는 것이 진정한 에피쿠로스 주의자라는 설명이다.[42] 이런 식의 시각은 르네상스 인본학자들이 대부분의 이교 철학들을 바라보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활발하게 일어났던 자유사상의 전파는 인본주의의 확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동방과 교류하며 취향과 의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점차 개방적으로 변해갔다. 단테 페트라르카, 마키아벨리 등의 저작들은 모두 지적 자유와 개인 표현의 미덕을 강조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역시 그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헤르메스주의다. 이중 헤르메스주의는 꿋꿋이 살아남아 서구 사상에 계속 큰 영향을 끼쳤지만, 신플라톤주의는 대부분 지적 경향 수준으로 소멸되어 신지학, 뉴에이지 사상처럼 서구 밀교 수준으로 크게 격이 떨어진다. 이렇게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스주의가 이끌던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종교계와 협력하며 발전해나갔지만, 종교개혁이라는 초유의 대사건이 터지며 모든게 바뀐다. 권위가 흔들리며 더이상 내부의 불경한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던 가톨릭계는 인본주의를 탄압했다. 신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개신교 역시 별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 등 대표적인 종교개혁가들은 상당수 인본주의자일 정도로 인본주의의 영향력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시작된 가톨릭의 대항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인본주의의 입지는 날로 좁아졌다. 오직 스콜라 철학에 기반한 엄격한 가톨릭 정통 신학만이 강요됐다. 교황청은 상당수의 인본주의자들, 심지어 온건파에 속하는 에라스뮈스마저도 이단으로 몰릴 수준으로 인본주의자들을 때려잡았다.[43] 물론 이러한 제한 속에서도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같이 여전히 인본주의의 명맥을 유지한 신학자들이 일부 있었지만,[44] 가톨릭 교회의 강경한 태도는 최종적으로 인본주의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교회한테 이렇게 탄압받았다고 인본주의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하겠다는 둥의 그런 류의 불경한 사상은 전혀 아니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오히려 지극히 기독교적이고 하느님에게 의지하는 사상이었다.

14. 관련 문서

15. 외부 링크


[1] 자세한 내용은 아래 '르네상스 개념에 대한 비판' 문단 참조. [2] 20세기까지만 해도 중세를 아예 암흑시대로 폄하하는 경향이 강했다. 고대는 좋았던 과거, 이후 중세는 미개하고 무지한 암흑의 시대로, 반대로 르네상스와 근대를 계몽되고 깨어난 빛의 시대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역사를 바라봤던 것이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되어, 오늘날에는 ’중세‘이든 ‘중세 초 서유럽’이든 암흑시대라는 워딩이 틀렸다고 학계에선 본다. [3] 14세기 이전에도 중세인들은 그리스-로마 고전을 굉장히 사랑했고, 르네상스인들이 반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다. 가끔 르네상스 문인들이 반그리스도교적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는 계몽주의자들과 19세기 일부 학자들의 프로파간다에 의한 것이고, 단테의 사례에서 보듯 이들은 매우 그리스도교적이었다. 물론 교황과 멱살 잡는 일이야 있었지만, 그 정도는 중세에도 아주 흔한 일이었다( 1077). 흔히 중세는 교황권이 강했으나 시대가 흐르며 추락했다는 인식이 강하고 크게는 맞는 말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세의 교황은 교권이 현대 교황보다 훨씬 약했고 대신 속권이 강했다. [4]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서 자본주의의 발달 미비를 이유로 중세 전성기로 보는 소수설도 있다. 이 시대구분법은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 체제에 따른 시대구분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5] 그리스 학자들이 꼭 동로마 멸망을 기점으로 대거 이주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동로마가 쇠락하면서 그리스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안전한 서유럽으로 도피하고 있었다. 1396년 초청을 받아들여 피렌체에 이주한 동로마의 외교관 겸 학자 '마누엘 크리솔로라스(Manuel Chrysoloras)'를 시작으로 동로마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수많은 공헌을 했다. [6] 그래서인지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는 오늘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적인 지역으로 손꼽힌다. [7] 교황령 로마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형태로 존재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는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이 사실상 분단 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력한 군주가 나타난들 교황령을 넘어서 반대쪽으로 군대를 보낼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게 1100년이 넘게 이어졌다는 것. 그래서 현재의 이탈리아 역시 남부와 북부는 서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이며 이탈리아 내에서 남북 간에 지역갈등이 심각하다. 북부지역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정당이 이탈리아 국회에 입성했을 정도이니... [8] 백년전쟁이 끝나자마자, 프랑스( 발루아 왕조)와 오스트리아-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탈리아 전쟁(1494~1559)이 시작되고, 피렌체 메디치 가문도 전쟁에 휩쓸리고, 사코 디 로마로 중세가 완전히 끝나고만다. 르네상스는 유럽본토로 망명하고, 이탈리아 본토는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9] 유럽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프랑스왕이 교회에 과세를 부여하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을 교황으로 세움으로써 시작된 일련의 사태. 많은 경우 프랑스왕이 교황을 아비뇽으로 납치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된 일은 아니다. [10] 서방교회 대분열(~1449)로 인한 대립교황의 난립으로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으며 니콜라오 5세시기가 되어서야 그 혼란을 마무리짓고 재건을 시작한다. [11] 1502년 마인츠(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발했으며, 다량의 면죄부를 만들기 위해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이 곳 조폐공사 직원이자 금속세공업자의 아들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참고)는 이 기술로 그리스도교와 연을 맺고 더 나아가 성경을 출판하며 전국구 스타가 된다. 인쇄술의 발달은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널리 퍼트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지만, 이는 훗날의 이야기. [12] 헷갈리는 비슷한 사조로 고전주의(Classicism, 어원:시민최상위계급), 신고전주의(by 폼페이유적발굴)가 있다. [13] 첨언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면 예술가들은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된 르네상스 시기와 달리 점점 간섭받고 억압 받으면서 소심한 반항을 담아 그림을 그리곤 했고(유럽본토의 종교개혁(1517)으로 교회 권위에 도전하는 분위기가 늘어자는 시기였다.), 또한 사코 디 로마 같은 충격과 공포를 겪으면서, 교황(=메디치 가문) 주위의 르네상스는 매너리즘( 최후의 심판(1533) 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14] 다만 전투의 빈도에 비해서 인명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용병들이 애초에 제 목숨을 그렇게 내던지면서까지 격렬하게 전투에 임하지 않았으며 용병 입장에서는 최대한 전쟁을 질질 끌면서 급료를 받는게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세력이 강해진 용병들이 아예 도시들을 넘보는 상황도 많았다고. [15]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것도 메디치가 피렌체 시의 절대권력이 된 이후에 등장한 소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혹은 '피렌체 르네상스'만에 국한된 것이다. 밀라노 베네치아는 피렌체와는 다른 양식적인 특징이 있었다. [16] 반대로 조각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7] 다만 사코 디 로마 자체는 지휘관의 전사에 분노한 란츠크네히트들이 저지른 일탈이었고 실제로 소식을 전해 들은 카를 5세도 몹시 당혹해했다. [18] 문화의 경우 바로크까지는 그래도 건재했다. 카라바조도 있고... 유럽에서의 이탈리아 미술의 문화 주도권 상실은 1680년 베르니니 사망을 기준으로 본다. [19] 애초에 '고딕'이라는 단어 자체가 처음에는 이탈리아인들이 비하의 어조를 담아서 붙인 멸칭이었다. [20] 아퀴 성당이나 피사 대성당 등이 대표적. 이탈리아에만 이러한 돔이 건설된 성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앙굴렘 성당 등에서 돔이 올라간 11세기의 로마네스크 건축물을 볼 수 있다. [21] 브루넬레스키는 건축공학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더해서 수학적 원근법을 발견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미친 셈. [22] 두오모는 돔이란 뜻이지만 대성당을 의미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성당에서 돔을 처음 올린 것은 아니지만, 당시 유럽에는 이 성당의 돔 크기를 능가하는 건축물은 없었다. 유럽 이외까지 포함하면 하기아 소피아와 Oljeitu Mausoleum이 가장 크다. [23] 실제로 두오모 성당은 고딕양식으로 계획하고 짓던 중에 여러 사정으로 공기가 연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행이 바뀌어버렸다!! 새로운 유행대로 돔을 얹으려니 이미 너무 고딕양식에 맞춰 커져버린 기틀에 맞는 돔을 얹기 난해해서 무려 51년을 다들 손가락만 빨며 바라보고 있던 중에 브루넬레스키가 해결하면서 유명해진 것. 브루넬레스키는 이전까지 그저 놀랍게도 금 세공장인이었다. 이 프로젝트 하나로 건축자로써 입지를 굳힌 것. [24] 위로 수직적으로 뻗어나가는 고딕 양식은 위치에 맞게 그때그때마다 아치나 기둥의 길이너비 비율을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건물을 지었다. 때문에 동일한 구조 내에서조차 서로 다른 각도의 아치가 존재할 정도로 수적 비율이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25]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되기 전에 이미 죽어 끝을 보진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은 설계사들은 마음대로 브라만테의 설계도를 변경했는데, 미켈란젤로가 다시 설계 지휘권을 잡자 브라만테의 설계안 상당수를 되살렸다고 한다. [26] 이탈리아어 : 마니에리스모 Manierismo [27] 1573~1652. 17세기 영국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르네상스 양식을 처음으로 영국에 소개한 위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하던 중 르네상스 건축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 왕실 건축가로 임용되어 큰 활약을 했다. 주요 작품에는 그리니치의 퀸스 하우스, 화이트홀 궁전의 연회궁 등이 있다. [28] 물론 북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담론이 처음 등장한 건 나치의 싹수가 보이던 1930년대(...)였었지만... [29] 독일에서 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지 않은 이유는 도시 단위로 다른 취향을 갖고 있던 독일의 상황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왕에 의해 국가 전체의 문화적 취향이 좌지우지 되는 프랑스처럼 어떤 한 취향을 가져가기 어려웠다는 것. [30] 파올로 우첼로의 그림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형 원근법 발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예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다. 3m가 넘는 나무 패널에 달걀 템페라로 채색했다. 현재는 런던 국립 미술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하나씩 컬렉션이 보관되어 있다. [31] 개중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가 예술계에서는 가장 유명하다. 특히 뒤쪽에 그려진 도시 경관에는 2개의 개선문을 양 옆으로, 중앙에는 팔각 모양의 로마식 영묘 파빌리온이 그려져 있다. [32] 서열 매기기 좋아하는 동아시아에서 만든 용어가 아니며 ' trinity of great masters'만 넣어도 검색이 많이 된다. 1명이 더 추가된다면 보통 티치아노가 말석에 포함된다. [33]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보다 연상이지만 훨씬 오래 살았다. [34] + 라오콘, 벨베데레의 아폴론 등 고대 조각 [35] 라파엘로 이전의 화풍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그들의 모토이다. 라파엘로 이후의 모든 미술은 라파엘로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36] 특히 모자 [37] 목탄으로 그린 그림으로 현재는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중이다. [38] 앙리 4세의 아내 마리 드 메디시스는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서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플랑드르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를 초청해 뤽상부르 궁전에 대규모 작품을 다수 그리게 하기도 했다. [39] 독일 르네상스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대표작으로, 복원된 이래 독일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그뤼네발트는 르네상스 화가라기보단 후기 고딕 화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40] 파라켈수스는 황, 수은 뿐만 아니라 소금도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겼다. 그는 화학적 요법들을 실제 인체 치료에 사용되도록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41] 교황이 유럽의 지배권을 주장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서가 조작된 것이라는 걸 밝혀낸 인물이기도 하다. [42] 하지만 로렌초 발라가 진심으로 쾌락주의를 옹호했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쾌락주의를 옹호하기는커녕 기독교보다 열등하다고 봤지만, 쾌락주의와 스토아 학파를 싸잡아 한꺼번에 비판하기 위해 일부러 쾌락주의를 옹호하는척 스토아 학파를 깠다는 것이다. [43] 결국 에라스뮈스는 교회의 탄압을 피해 1514년 스위스 바젤로 떠나 바젤 대학교로 피신해야만 했다. [44] 이냐시오 데 로욜라 이냐시오 영성을 주장함으로써 인본주의적 신비신학을 제시했는데, 그가 가톨릭의 대항 종교 개혁을 이끈 선도자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묘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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