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1:17

초기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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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근대
Early Moder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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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신항로 개척[1]
언어별 명칭
영어 Early Modern Age
독일어 Frühe Neuzeit / Frühneuzeit / Frühmoderne
프랑스어 Époque moderne
한자 初期 近代 / 近世[2]

1. 개요2. 시기 구분3. 중요 사건
3.1. 르네상스3.2. 활판 인쇄술의 발전3.3. 화약의 등장3.4. 대항해시대3.5. 종교개혁3.6. 재정 군사 국가3.7. 과학 혁명3.8. 계몽사상
4. 초기 근대의 요소들

[clearfix]

1. 개요

초기 근대 혹은 근대 초기(Early Modern Age)는 일반적으로 영어권 및 독일, 네덜란드, 북유럽 등 게르만권에서 르네상스 이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16~18세기 유럽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으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 라틴권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이전 시기는 '근대', 그 이후는 '현대'로 뭉뚱그려 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근대 초기 혹은 초기 근대라는 명칭보다 근대로의 이행기 내지는 근대 유럽의 형성기로 정리하기도 한다.

대중적으로는 기존의 관성과 편의상 유럽의 초기 근대도 근세로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지만[3] 현재 국내 서양사학계에서는 영어권의 용례를 따라 이 시기를 근대 초기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에[4] 유럽사의 근대 초기는 여기에 서술하도록 한다. 동일한 시기의 아시아는 근세를 참조할 것.

2. 시기 구분

일반적으로 유럽사의 중세에서 근대 초기로 전환하는 분기점은 르네상스로 여겨지나, 15세기 말~16세기 초 유럽 각국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기점이 될만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고, 그에 따라 각국에서는 이 시대를 구분하는 기점으로 다양한 사건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중세 문서에서도 나와 있지만 근세/근대의 시작이면서 중세의 끝에 대해서도 나라/사학자별로 천지차이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종점은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발발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나, 나라에 따라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잡기도 한다. 독일사의 경우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역시 중요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프랑스의 구체제를 의미하는 앙시앵 레짐 역시 이 시대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3. 중요 사건

3.1. 르네상스

14세기 이탈리아에서부터 시작된 인문주의와 고전의 재발견, 그리고 이어지는 르네상스의 개막은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15세기에 이르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출신지이기도 한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 문화는 이후 알프스 이북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특히 네덜란드와 플랑드르를 비롯한 저지대를 중심으로 만개하였다. 에라스뮈스가 이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특히 저지대 르네상스는 회화 분야에서 크게 발전하여 얀 판 에이크 피터르 브뤼헐이 이를 대표했다. 이외에 프랑스에서는 몽테뉴 프랑수아 라블레, 독일에서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이, 영국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토마스 모어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은 현재의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를 중세와의 '단절'로 이해하지 않는다. 르네상스인들은 여전히 종교를 최우선시하고 있었고, 중세인들 역시 고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날 중세와 르네상스의 차이를 과장하는 관점은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르네상스 역시 중세와의 연속성에 주목하여 이해되고 있다. 르네상스를 하나의 시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지양되고, 하나의 문화사적 흐름이자 운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3.2. 활판 인쇄술의 발전

1450년경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한 금속 활자 및 인쇄기의 발명은 현대적인 서적 인쇄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곧 전 세계적인 파급력을 미쳤다. 활판 인쇄술의 도입은 서적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지식의 대중화로 이어졌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또한 인쇄술의 발전은 서적뿐만 아니라 소책자와 전단지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의 범람을 불러왔고, 이로부터 촉발된 '미디어 혁명'과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소통 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3.3. 화약의 등장

중세를 지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흑색화약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고, 대포가 도입되면서 전장의 판도를 크게 뒤바꾸게 된다. 기병은 여전히 주요 전력이었지만 총의 등장으로 인해 중세처럼 전장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존재는 아니게 되었으며, 성벽 역시 대포의 등장으로 방어수단으로써의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신 총기를 사용하는 병과인 머스킷티어 전열보병, 그리고 포병이 전장의 주요 병과로 대두된다. 또한, 대포는 해군에서도 쓰이기 시작하며 충각과 선상전투 위주였던 해전 환경에 포격전이 새로운 전투 방식으로 등장한다.

또한, 화약의 등장은 갑옷의 쇠퇴를 불러온다. 중무장한 판금 갑옷조차도 총알 한 발에 뚫려버리는 시대가 도래하며 갑옷은 비효율적인 장구류로 전락하고, 일부 상징적인 용도나 심리적인 이유로 존속한 흉갑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상 퇴출되게 된다. 대신, 기동성과 소속감, 일체감을 강조한 화려한 제복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3.4. 대항해시대

바르톨로뮤 디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스쿠 다 가마, 페르디난드 마젤란를 비롯하여 에스파냐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대항해시대는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이들의 항해는 경제적으로 유럽의 상업 혁명, 가격 혁명을 촉진하여 초기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화를 통해 이후 유럽 식민 제국 시대의 초석을 놓았다. 또한 그동안 서로 분리되어 제한적으로 교류가 있던 세계가 대항해시대를 기점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의의이다.

전통적으로 이 시기를 일컫는 명칭은 '신대륙 발견', '발견의 시대'와 같은 말이 사용되었으나, 그러한 언어의 유럽 중심적 측면이 지적되면서 현재는 '신항로 개척' 혹은 '접촉의 시대', '대항해 시대'와 같은 말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3.5. 종교개혁

1517년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 발표 이후 전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 운동 역시 근대 초기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교황청을 비롯한 구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며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구호로 내세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더 엄격한 개혁을 내세웠던 장 칼뱅의 칼뱅파는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로 확산되었다. 한편으로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내부 개혁을 단행했다.

종교개혁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및 인쇄기의 발명이 촉발한 미디어 혁명 및 커뮤니케이션 혁명이었다.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루터 성경)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민중들에게 널리 확산되었고,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전의 종교개혁 운동들과는 다르게 전 유럽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던 핵심적인 원인이었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유럽 각국은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 영국 국교회와 같은 교파로 분열되었고, 30년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럽 각국은 각 교파의 교리를 중심으로 국가 내부의 정비를 시도했다. 종교개혁 이후 신교 국가에서는 기존 교회 조직에 대한 비판을 핵심으로 한 루터의 교리를 기초로 하여 군주의 교회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가톨릭 국가 역시 가톨릭교회가 신교 교회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군주들의 지원이 필요하였기에 이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합하면서, 세속 국가의 권력은 후미진 시골 구석구석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교회 조직을 국가 조직 내에 편입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유럽 각국은 각 교파의 교리를 통해 내부 질서를 유지하고 신민의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사회적 규율화(Social Discipline/Sozialdisziplinierung)를 강화하였다. 교파화(Confessionalization/Konfessionalisierung)라고 하는 이러한 과정은 근대 국가 형성의 초기 단계로써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3.6. 재정 군사 국가

중세 후기부터 국가 권력의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고 있던 유럽의 군주국들은 근대 초기를 거치며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조세의 독점[19]을 달성한 초기적인 형태의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7세기부터 유럽 각국은 군주의 세금 징수에 대한 동의를 의결하는 역할을 했던 중세 유럽의 신분제 의회와 타협하거나 무력화하면서 조세 권한을 장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재정을 충당하고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면서 국가 권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체제를 흔히 '절대주의(Absolutism)' 혹은 '절대 왕정'이라고 부르고, 30년 전쟁 이후 프랑스 혁명 발발 이전까지 유럽사를 절대주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절대주의라고 불리는 군주들의 권력이 전혀 '절대적'이지 않았고, 구엘리트인 귀족의 특권이 광범위하게 보장되고 있었으며 군주는 이들과 타협을 통해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파악한다.[20] 그렇기에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절대주의라는 개념 및 시대 구분 자체를 현재 지양하는 추세이고, 이를 대체하는 개념으로 재정 군사 국가가 확산되고 있다.[21][22]

재정-군사 국가 이론은 앞서 말한 국가에 의한 폭력과 조세의 독점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 17세기 이후 유럽 국가 간 빈번했던 전쟁에 주목한다. 16세기 이후 군사 혁명으로 대표되는 군사적 혁신이 도입되고,[23] 17세기 이후 각국 사이에 전쟁이 빈발하면서[24] 이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비용을 요구했다. 그런데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세금을 통해 조달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서는 기존에 군주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협력해야 했던 구체제의 신분 집단(성직자, 귀족, 도시민, 농민 등) 및 이들을 대표하는 신분제 의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유럽 각국은 크게 군주와 의회가 타협하였던 잉글랜드식과, 군주가 신분제 의회를 무시한 채 세금을 징수하고 신분제 의회는 이를 묵인하는 프랑스식의 두 방식으로 조세 권한을 확보해 나갔다. 이로써 근대 초기 유럽 국가들은 조세를 통해 재정을 충당하는 조세 국가(Steuerstaat)로 발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제와 상비군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 유럽 군주들이 세금을 마음대로 징수하였던 것 역시 아니었다. 군주들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공식적이던지 비공식적이던지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존 신분 집단의 동의가 필요했다. 또한 귀족들은 군주에게 종속되지 않았고, 기존의 특권을 보장받고 새로운 관료 집단 및 군대의 고위직을 차지하는 대가로 군주에게 협력하는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3.7. 과학 혁명

16세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를 시작으로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거쳐 17세기 아이작 뉴턴 프린키피아에서 정점에 도달한 과학 혁명은 그 말과 다르게 서서히, 때로는 단절되기도 하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자연과 인간 자신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점을 혁신하였고, 이후 '서구의 흥기'의 기반을 닦았다.

3.8. 계몽사상

바로크 문화가 풍미했던 17세기를 지나 18세기 동안 유럽 세계는 인간의 이성과 그를 바탕으로 한 인간성의 진보에 대한 신뢰를 핵심으로 하는 계몽사상이 대대적으로 유행하였다.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 장 자크 루소, 영국의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독일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이마누엘 칸트는 18세기 계몽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계몽사상은 무엇보다도 매체 혁명과 근대 초기 대학 제도의 발전 및 그에 힘입은 문해력의 상승의 결과로 나타난 독서 대중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프랑스의 살롱이나 영국의 클럽으로 대표되는 '협회'가 전 유럽적으로 출현했고,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는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이러한 협회로부터 당대의 정치적 쟁점을 토론하는 정치적 공론장, 즉 '공공 영역(Public Sphere)'이 형성되었고, 이는 계몽사상이 널리 확산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계몽사상의 가치들은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19세기의 대변혁을 예비하였다.

4. 초기 근대의 요소들

  • 가발
    퍼루크라고도 한다. 17-19세기 유행한 남자 가발. 유럽의 왕이나 귀족들을 비롯한 여러 직업군들이 이 가발을 착용하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세대들의 초상화에서 이 가발을 쓰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 계몽주의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18세기에 주류로 자리잡은 사조로 유럽을 근대사회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 르네상스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 마녀사냥
    보통 중세 기독교의 광신이니 어쩌고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집중된 관료제적 현상은 16세기 중반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지방, 개신교와 카톨릭 제후국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마녀를 가상의 존재로 취급하거나, 권력당국이 의도적으로 계획 및 집행하지 않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마녀 '폭동'이 잠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 성형 요새
    화포의 등장으로 중세식의 공성전이 소용없어지자 이에 대비하여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 역병 의사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새부리 가면의 역병의사는 중세가 아니라 근세에 등장했다.
  • 증기기관
    증기기관이 사회 전반에 보급되어 산업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된 것은 근대의 일이지만, 이 근대식 증기기관의 기원은 계몽주의 시대인 1705년에 토머스 뉴커먼이 개발한 증기기관이며, 제임스 와트가 1765년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개량하면서 근대식 증기기관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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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단의 그림은 인체비례도로도 알려져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며, 하단의 그림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탐험을 묘사한 그림이다. [2] 일본에서 쓰는 용어. 일본의 영향으로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대중적으로는 자주 쓰이지만 최소한 국내 서양사학계에서는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근세 문서 참조. [3] 근대와 현대를 묶어 근현대라 부르듯이 중세와 초기 근대=근세를 묶어 중근세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도 근세란 표현이 초기 근대의 동의어로서 쓰이는 이유 중 하나다. 초기 근대를 근대의 초창기로서 보는 관점의 표현 외에도 (현대를 근대의 연장선으로 보듯이) 중세의 연장선으로 보는 관점의 표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4] 황대현, 16~17세기 유럽의 '교파화 과정'에 대한 연구사적 고찰(2004), 임승휘, 16~18세기 유럽 국가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2013) 등을 참조 [5] 국내에선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나 단순한 정치사가 역사의 시대 구분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고 바라보기에 고등교육기관에서는 해당 사건이 일어난 연도를 근대의 시작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6] 네덜란드 및 벨기에 [7] 러시아 [8] 프랑스 [9] 영국 [10] 에스파냐 및 포르투갈 [11] 폴란드 [12] 이탈리아 [13] 독일 및 오스트리아 [14] 스위스 [15] 프랑스 [16] 독일 및 유럽 대륙 [17]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18] 헝가리 및 체코 [19] 막스 베버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개념화하였다. [20] 신분 집단의 간섭 없는 진정한 '절대 군주제'를 수립한 것은 프레데리크 3세 시대 중반인 1660~1665년의 덴마크, 칼 11세 칼 12세 시대의 스웨덴 정도다. [21] 2022 개정 교육 과정에서 재정-군사 국가가 기존의 절대 왕정을 대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22] 하지만 기존의 절대주의 개념이 프랑스를 모델로 정립되었다면 재정-군사 국가 개념 역시 영국을 모델로 정립된 것이기에, 영국 외의 사례에 이 개념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 역시 여전히 있다. 그렇기에 아직 광범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23] 다만 군사 혁명 이론은 현재 흔히 주장되던 것보다는 덜 혁신적이었다는 견해가 대세이다. [24] 17세기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해는 단 4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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