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4 12:27:27

티치아노 베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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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fff>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파일:티치아노.jpg
출생 1488년 또는 1490년
베네치아 공화국 피에베 디 카도레
사망 1576년 8월 27일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1. 개요2. 명망있는 국제화가3.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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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으로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다. 서양 미술의 기본이 된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기법을 개척했다. 이것만으로도 티치아노는 후대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 셈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베네치안 스쿨(Venetian school)[1]로 불리는 베네치아 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은 전 유럽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티치아노는 제자와 조수들을 여럿 두고 전 생애에 걸쳐 꾸준히 많은 그림을 그렸으나, 그의 문하에서 직접 길러낸 유명한 제자는 엘 그레코를 제외하면 특출난 화가는 없다.[2]

대표작
<풀밭 위의 콘서트, 1510년>
<천상과 세속의 사랑(Sacred and profane love),1514년>
<성모의 승천, 1516~1518년>
<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 1538년>
<카를 5세의 기마상, 1548년>
<앉아 있는 카를 5세의 초상, 1548년>

2. 명망있는 국제화가

티치아노는 본래 베네치아 태생이나 그 활동 영역이 유럽 각지에 걸쳐져 있었던 세계 최초의 국제 화가였다. 지금이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등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떨치지만, 생존 당시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로 활동 영역이 한정되어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 정도의 예술 마니아 외엔 타국 군주들에게 특별히 주목받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말년에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재정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즉 그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진정한 최초의 월드스타는 티치아노였다. 저 셋보다 나이가 어리고[3] 거의 90세까지 장수하였기에 뻗어나가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제대로 올라탔다고 보면 되겠다.

피렌체 회화와 쌍벽을 이루는 베네치아 회화의 최고 대표 작가로서 그는 독특한 유화 기법으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 뛰어난 화풍 덕에 각국 군주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스페인의 카를 5세는 물론이고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를 비롯해[4] 여러 굵직굵직한 군주들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 일감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 명성이 얼마나 자자한지 위로는 황제와 왕들부터 아래로는 총독, 제후들에 이르기까지 권력 깨나 쓰는 이들이라면 티치아노에게 의뢰하려 안간힘을 썼으며 실제로 지금 남아있는 작품들도 대부분 이와 관련된 것들이다.

여담으로 신성 로마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이던 카를 5세[5] 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는데 그림을 그리던 중, 실수로 붓을 떨어트렸다고 한다. 티치아노가 붓을 다시 주우려 했으나 카를 5세가 먼저 주운 다음 티치아노에게 건넸는데 이때 "티치아노 자네 정도면 황제의 시중을 받을 자격이 있지"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 티치아노가 느꼈을 정신적 감명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이후 지금까지도 줄곧 미술가들에게 후원자의 가장 모범적인 전형으로 통하고 있다. 카를은 티치아노를 극진히 총애하여 화가인 그에게 기사 작위와 백작 작위까지도 수여했다. 이렇듯 티치아노는 회화의 불모지인 스페인의 예술 환경을 대폭 업그레이드시킨 1세대 화가로서 후대 스페인 화가들의 영원한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으며, 피터 폴 루벤스를 비롯한 바로크 화가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이 티치아노를 자신들의 교범으로 삼고 흠모했다.

3. 대중 매체에서






[1] 틴토레토, 베로네제 등 [2] 엘 그레코는 티치아노를 '영적인 아버지(spiritual father)'라고 했다. [3] trinity 중 가장 젊은 라파엘로보다 티치아노는 5살 더 어리다. [4]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도 티치아노가 그린 것이다. [5] 스페인 국왕으론 카를로스 1세. 당시 스페인은 아라곤, 카스티아, 레온, 갈리시아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아라곤의 카를로스 1세이자 카스티아의 카를로스 1세, 레온의 카를로스 1세, 갈리시아의 카를로스 1세라고 따로따로 불렸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작위는 왕작 이상만 해도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십수개가 넘는다. [6] 아순타, 요한 세례자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살로메 3세 [7] 카를 5세의 기마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