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스 왕조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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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역사 | <colcolor=#000,#fff> 아바스 왕조/역사 | 호람딘 | 잔즈 반란 | 카르마트 |
정치 | 칼리파 | 역대 보편 칼리파(아바스 왕조) | 역대 이집트 통치자(아바스 왕조) | |
행정구역 | 쿠파 | 팔루자 | 바그다드 | 락까 | 사마라 | 카이로 | |
경제 | 디나르 | 이슬람 황금기 | |
종교 | 이슬람 | |
문화 | 비마리스탄 | 지혜의 집 |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 |
파티마 왕조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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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 마흐디야 | 카이로 | |
경제 | 디나르 | 이슬람 황금기 | |
종교 | 이스마일파 | |
문화 | 비마리스탄 | 알 아즈하르 모스크 |
이슬람 황금기
العصر الذهبي الإسلامي Islamic Golden 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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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확장과 지혜의 집의 상상화 | |||||
8세기 ~ 13세기 | |||||
위치 |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북아프리카, 인도, 이베리아 | ||||
주요 칼리파 |
하룬 알 라시드 알 마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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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아랍어, 페르시아어 | ||||
종교 | 이슬람교 | ||||
주요 사건 |
786년
하룬 알 라시드 즉위 8세기 경 지혜의 집 건립 813년 알 마문 즉위 1258년 바그다드 함락 |
진리가 어디서 오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는 데에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그 진리가 과거 세대나 이방인들로부터 온 것이라 해도 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에게 진리 자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ㅡ 9세기 철학자 알 킨디
ㅡ 9세기 철학자 알 킨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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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 ~ 13세기 아바스 왕조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슬람권의 문화적 전성기.2.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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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빛이 비치는 모스크의 모습 |
원래 '이슬람 황금기'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정통 칼리파 시대의 공격적인 확장전쟁을 의미하던 단어였다. 한낱 아라비아 촌동네의 종교 분파가 아라비아와 중동 일대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한 찬사였던 것. 허나 20세기 중후반부터 그 의미가 문화적인 쪽으로 바뀌더니 결국에는 현재처럼 문화, 예술적인 전성기를 의미하는 쪽으로 뜻이 바뀌었다.
이슬람 황금기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언제 끝났는지에 대한 학계의 정확한 합의는 없다. 전통적인 학설은 보통 8세기에서 13세기까지를 일반적인 이슬람 황금기의 범위라고 보지만 현재는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특히 아바스 왕조가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타던 10세기 이후도 쭉 황금기로 봐야하는지는 논란이 있는 부분. 아바스 왕조는 알 마문 이후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고 영토도 차츰차츰 잃어갔다. 12세기 십자군 전쟁으로 입은 타격은 이슬람권, 특히 이집트를 기반으로 하던 아이유브 왕조에게도 나름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750년부터 950년까지 이 200년 정도만을 진정한 의미의 황금기라고 칭한다. 그보다 조금 더 넓게 보는 학자들은 지혜의 집을 창립한 명군 하룬 알 라시드가 즉위한 9세기부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1세기까지를 황금기라고 묘사한다.
3. 상세
압바스 왕조기에 세워진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대사원 내부의 보물고
이슬람권은 문화권과 종교에 상관없이 자신한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은 무엇이든 배워서 더욱 발전시켜나갔고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비 무슬림 학자들도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할 수 있는 융통성있는 사회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산을 계승한 지적 결과물들은 서유럽 세계로 번역되어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무슬림들은 이교도라고 할지라도 필요하다 싶으면 타민족의 지식을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때가 타 문화권의 생각을 잘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때라, 이슬람 근본주의에 휘둘려 막장을 자초하는 근현대의 이슬람권과는 확실히 대조될 지경이다.
아랍의 이슬람 문화권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들을 받아들여 발전되어 있었다. 위상이 이렇다보니 서구권의 교회에서도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 같은 무슬림 저자의 주해서를 읽을 수 있게 허용했다. 당장 알코올과 알칼리, 알고리즘 등의 단어가 아랍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1]
이 시기 이슬람은 이성을 중시하는 무타질라 학파의 융성으로 인해 대놓고 이신론이나 불가지론을 선언해도 처벌받지 않는[2] 매우 관용적인 사회였고 과학, 철학, 사회 등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6~7세기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여파로 식자층이 대폭 감소하여 한동안 제국 영내에서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을 찾지 못해 로마법 대전을 독해하지 못하는 처참한 상황이었고, 중세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는 바이킹의 침략이나 잦은 전쟁으로 피로해져있는 상태였으며 중국은 당나라 말기 ~ 5대 10국시대로 정복전쟁과 내전으로 한참 바쁠 때였다.
이슬람권의 대표적인 도시 바그다드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 지성의 요람,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워 세계 3대 도시에 등극하는 위엄을 보여준다. 특히 바그다드와 카이로에 세워진 지혜의 집은 중세 지중해 권역과 페르시아, 인도의 학문이 집대성된 곳이었고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시칠리아, 스페인, 모로코, 알제리 등 (당시 기준으로) 이슬람 지역의 학교에서 천문학, 철학, 수학, 화학 등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피보나치.
특히 상류층이 지식 추구를 주도했는데, 대표적으로 칼리파 알 마문은 정확한 지구 둘레 측정을 위해 에라토스테네스의 실험을 이라크 북부 신자르의 사막에서 재현하기도 하였다. 이때 측정된 지구 원주는 16세기 전까지 가장 정확한 측정값이었다. 게다가 이에 대해 후대의 석학 알 비루니가 자신의 저서에서 지구의 원주를 재려고 발품을 팔 필요가 없다고 빈정거릴 정도로 수학과 천문학은 특히 발전되어 있었다.[3] 애초에는 정확한 기도 시간과 라마단 기간, 메카 방향 측정 등 지극히 종교적 목적에서 비롯된 수학·천문학은 이슬람 과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이슬람권의 대도시의 대모스크 주변은 마드라사, 비마리스탄, 마크타브 (도서관) 등의 공공 시설이 세워져 복합단지를 이루었다. 그중 비마리스탄에서는 종교와 민족, 성별, 나이, 직업을 불문하고 누구나 무상으로 의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편적 복지는 재력가나 권력자들이 기금을 투자한 와크프 (재단)에 의해 정부와는 별개로 가능하였다.
1154년의 알 이드리시 지도[4] | 12세기 서유럽의 TO 지도 |
3.1. 교육
당시 이슬람 황금기가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들 중 하나가 바로 선진적인 교육 체계였다. 마드라사라고 불리는 이슬람 신학교들이 곳곳에 뿌리박고 있었기에 대중적인 교육이 가능했고 기초적인 교육을 받는 자들이 많으니 학문 발전의 토양이 만들어질 수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교육은 쿠란과 하디스 등 종교 경전 연구과 암송에 맞춰져 있었지만 동시대에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 문화권들이 넘쳐났고 당시 이슬람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수준의 교육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전근대 이슬람 사회의 문맹률을 계산하는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최소한 동시대 서유럽이나 동유럽에 비하면 훨씬 낮은 수준이었음은 확실하다.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집이나 모스크 부속 학교에서 아랍어와 쿠란을 공부하는게 초등교육에 해당됐다. 그중 일부 재능있거나 돈이 많은 집 학생들은 '타프시르'라고 쿠란 주해법이나 이슬람 법학 '피크'를 공부했다. 교육은 암기 위주였지만 이슬람식 논평이라는 틀 안에서 학생들 역시 쿠란 주해법 등에 독자적인 의견을 제시하며 작가나 비평가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키워낸 고급 인재들은 이슬람 율법학자인 울레마로 성장했다. 울레마는 이슬람 세계 최고의 학자이자 권위자였고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말은 '율법학자'이지만 과학, 해부학, 천문학, 수학, 서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전문가였기에 이슬람 학문의 중심은 바로 이 울레마들이었다.[5]
이슬람 초기에는 체계화된 교육 시스템이 완전히 부재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종교계의 지원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왕들이 ' 마드라사'라는 고등교육기관들을 대거 설립하기 시작했다. 마드라사는 저명한 학자들이 거주하며 학생들에게 이슬람 법학을 중심으로 의학, 신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들을 가리지 않고 가르쳤던 기관이었다. 다만 마드라사는 교육 과정이 일관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학자 마음대로 커리큘럼과 교육 내용을 짰고, 수료라는 개념도 없었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대학이라기보다는 서당에 더 가까운 시스템이었지만[6] 그래도 혁신적인 발명이었다. 학위 역시 존재하지 않아서 학자가 마음대로 제자에게 '이자자(ijaza)'라는 증명서를 발급하는 방식이었다. 마드라사 차원에서 주는게 아니라 스승이 자의적으로 발급해주는 거라 도제 시스템에 더 가까웠다고 보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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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과 마드라사 | 알 카라윈 대학교 |
마드라사는 주로 법학, 율법 연구에 전념했지만 신학, 의학, 수학 같은 다른 학문들 역시 함께 연구했다. 주로 도서관, 학자들의 숙소, 모스크가 합쳐져서 하나의 마드라사 단지를 이루었다. 이 마드라사를 유지하는 비용은 '와크프(waqf)'라 불리는 자선기금으로 충당했다. 자선금만으로 대학 유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이슬람 전통에서 이 와크프가 압도적으로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자선을 베풀어야했고 가장 좋은 자선 방법이 바로 이 와크프였으니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마드라사에 돈과 토지를 바쳤다.
마드라사에서는 이슬람 이전 문명에서 물려받은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시절의 학문 역시 가르쳤다. 주로 철학이나 의학 따위가 주를 이뤘는데 이걸 '고대 철학' 또는 '합리 과학'이라 따로 불렀다. 물론 이슬람 학문에 비해서는 천대받았으나 고대 철학 역시 나름 중요한 대접을 받았고, 특히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 등에서는 비공식적으로나마 맥이 끊기지 않고 전수되며 활발히 연구되는 주요 대상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교육기관 역시 이 마드라사다. 859년 모로코 페스에 설립된 '알 카라윈 대학'이 바로 그 주인공. 일부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타이틀은 알 카라윈 대학에 비해 더 체계적인 교육체계를 운용했던 볼로냐 대학교가 가져갔다. 이 외에도 978년 설립되어 아직까지도 운영하고 있는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교 등도 이 이슬람 황금기 시대에 지어진 마드라사에 기원을 두고 있다.
3.2. 수학
이슬람이 이 시대에 남긴 가장 찬란한 업적을 논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분야. 특히 9세기와 10세기 경 이슬람 수학은 고대 그리스 수학(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과 고대 인도 수학( 브라마굽타, 아리아바타)의 지식들을 바탕으로 엄청난 성취를 이룩하는 데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대수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기하학과 삼각법의 발전 등 세계 수학사에서도 손꼽힐만한 성취가 모두 이 이슬람 황금기에 이루어졌던 것. 이렇게 발전한 이슬람 수학은 10~12세기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 수학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대수학을 의미하는 영단어 'Algebra'의 어원이 '완성', 혹은 '깨진 부분의 재결합'을 의미하는 아랍어에서 왔다. 대수학의 아버지가 디오판토스라면 중세 대수학의 창시자는 페르시아의 수학자 알콰리즈미가 있다고 할 정도다. 알 콰리즈미는 자신의 저서에서 1차, 2차 방정식 등 다항방정식의 양의 근을 구하는 방법을 설명했으며 환원법을 소개했다. 특히 디오판토스와는 달리 방정식들에 대한 일반해를 구하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특히 상징적이고 기하적인 수준의 대수학에 머물렀던 디오판토스와는 달리, 알콰리즈미는 완전히 수사적인 방법으로 대수학을 탐구하여 유리수, 무리수, 기하학을 죄다 대수적으로 처리해 깔끔하게 정리할 수도 있었다. 이후 아부 카밀 슈자가 기하학적 삽화와 함께 대수학 저서를 편찬했다.
특히 페르시아 수학자 오마르 하이얌의 연구가 눈길을 끄는 부분인데,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을 넘어 3차 방정식의 일반해를 구하는 방법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기 때문. 하이얌은 두 원뿔 단면의 교차점을 이용해 삼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방법은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도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 모든 방정식들에 일반적으로 적용해보려 시도한 것은 오마르 하이얌이 최초였다.
무리수에 대한 탐구도 특기할만하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 무리수를 발견했지만 그리스인들은 무리수가 수의 완전성을 해친다고 여겨 자세히는 탐구하지 않고 관심 밖으로 밀어놓은 상태였다. 특히 기하학과 이미 길이가 명확히 정해진 선분들을 중심으로 수학을 탐구하던 그리스인들에게 무리수는 탐구하기 어려운 대상이었기 때문. 하지만 기하학에서 벗어나 수사적인 방법으로 대수학을 탐구하던 아랍인들은 무리수에 대한 관심에 다시 불을 붙였다. 아랍인들은 무리수를 해로 가지는 방정식을 만들 수 있었고 고대 그리스인들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무리수를 다루었다. 다만 아랍인들 역시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무리수에 관심을 가졌을 뿐, 다른 수학 분야에 비하면 큰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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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슬람의 수학저술 | 알콰리즈미 |
구면 삼각법 역시 이 시대에 출발했다. 애초에 사인 법칙을 발견한 사람들이 무슬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다. 사인 법칙은 10세기 경에 발견되었는데, 누가 발견했는지를 두고는 논쟁이 있으나 확실한건 이슬람 세계에서 사인 법칙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븐 무아드 알 자야니가 11세기에 저술한 책은 사인 일반 법칙을 소개했고 13세기 나시르 알 딘 투시는 사인의 평면 법칙을 저술했다. 삼각함수의 기원은 인도지만 사인을 제외한 코사인, 탄젠트, 코탄젠트, 시컨트, 코시컨트는 아랍 학자들이 고안하였다.
음수의 개념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이지만, 사실 음수라는 개념 자체가 실생활에서는 상당히 생소한 것이었기에 제대로 쓰이지는 않았다. 알콰리즈미 역시 인도 수학의 영향으로 음수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제 저술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콰리즈미 이후 50년만에 아부 카밀이 곱셈의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음수를 끌어들였다. 알 카라지는 음수를 '용어'의 개념으로 도입해야한다고 썼고 다른 수학자들은 '빚'의 개념을 음수로 설명하려 시도했다. 12세기 아랍 수학자들은 - 기호를 사용해 다항식 나눗셈을 풀어내고 음수 X 양수 = 음수, 더 작은 음수에서 더 큰 음수를 빼면 양수가 되는등 음수의 기본적인 법칙을 정립하는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가위치법(False Position)'은 근의 가짜 위치를 찾아내고 그 위치를 이용해 진짜 근의 위치를 찾아내는 방법으로 이 역시 아랍 세계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9세기 즈음 이집트의 수학자 아부 카밀은 가위치법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다. 레바논의 수학자 쿠스타 이븐 루카는 유클리드식 기하학적 증명을 통해 가위치법의 합리성을 증명해냈다. 아랍인들은 가위치법을 이용해 쿠란 상속 규칙을 따른 재산 분할 같은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오락에 이용했다고.
3.3. 예술
이 시절의 이슬람 제국은 사람의 모습을 그림으로 묘사하는데 딱히 거리낌이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7]. 오히려 당대 서유럽보다 훨씬 발전했다.제정일치 대제국의 절대군주가 된 우마이야 왕조의 역대 칼리파들은 화려한 궁전 외에도 오아시스에 호화로운 별장을 지었고, 술과 여자를 즐기는 등 사치스럽고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 이들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문화와 풍습을 받아들였고, 전제적이고 화려한 생활방식 또한 흡수했다. 이런 태도들은 독실한 이슬람 신자들에게 규탄받았고, 안 그래도 1•2차 피트나 때 행했던 학살과 성지 메카에 대한 파괴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신망을 더 추락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호라산의 아바스 가문에게 불평분자들이 모이는 빌미를 제공했다.[8]
4. 쇠퇴
14세기 안달루스 지역의 벽화
아랍 지역은 중세 후기 십자군 전쟁과 잦은 내전, 몽골 제국의 침략 등으로 큰 고난을 겪고 사막화로 인한 식량 생산 감소로 인한 경제 침체와 인구 감소를 겪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대규모 번역 사업 및 학술 연구 지원도 점점 줄어들었다. 즉 유럽은 11세기 이후로 나름 평화를 유지하며 농업이 부흥하고 인구가 증가하며 상공업과 학문이 부흥하기 시작하는 등 각성이 시작되었지만 이슬람권은 12세기에 프랑크 (십자군), 13세기에 세계를 정복한 몽골제국의 침략을 겪으며 보수화된 것이다. 몽골군에 의한 바그다드 함락은 알 무스타심 문서 참고.
실제로 몽골제국의 침공이 이슬람 근본주의의 뿌리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바스 왕조의 탄압으로 절멸되었던 한발리파 이슬람이 13세기 말엽 이븐 타이미야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 후대 이슬람 근본주의로 이어졌는데, 그 이븐 타이미야는 몽골군에게 학살을 당한 하란에서 태어나 시리아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의 침공으로 전체 다르 알 이슬람 (이슬람권)의 절반 이상을 파괴되거나 학살당한 후 기존 사회가 죄를 저질렀기에 신의 천벌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는 사조가 유행하였다.[9]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러한 시류를 타며 지도자들이 부패하였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에 이슬람이 수축되는 것이라며,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살라피즘을 제시하게 되었다.
5. 8 ~ 14세기 이슬람 학자들
그 외에 과학자 알 비루니, 대수학을 집대성한 오마르 하이얌과 기야숫딘 하산, 신학자 겸 천문학자 나시룻딘 투시[10] (1201 ~ 1274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알 파라비, 신학자 알 아시리 등이 활약하였다.
6. 관련 문서
7. 관련 창작물
[1]
연금술을 뜻하는 'alchemy'와 대수학을 뜻하는 'algebra'는 모두 아랍어에서 온 말로써, 각 단어의 앞에 붙은 'al-'은 아랍어에서 정관사 the의 의미로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2]
단, 무신론만큼은 이 시기에도 절대로 용납받지 못했다.
무신론과
이신론은 엄연히 다르며, 당시 무슬림 학자 중에서는
불가지론을 대놓고 주장하는 사람은 있어도 대놓고 무신론자인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중세 아랍어에서
마니교도를 지칭하던 진디끄, 잔다까라는 단어가 시대가 지나면서 무신론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슬람 황금기에도 무신론자라는 비판은 심각한 표현이었고, 중세 이슬람권 인물 중 거의 유일하게 무신론자로 확정된 사례인 이븐 알 라완디의 경우도 여든 살이 넘어 죽기 직전에 자신이 무신론자인 것을 밝혔다. 현대 그나마 이슬람권 국가 중 세속화가 잘 되었다는
튀르키예에서도 무신론자라는 단어는 욕설에 해당한다. 당시 이슬람권에서 무신론이 관용되었다는 것은 중세 아랍어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해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유럽권에서도 무신론자가 차츰 용납받기 시작한건
계몽주의 시대때인 최소 17-18세기때부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3]
지구 원주 측정은 간단한 관측과 기초 삼각함수면 된다는 것이다.
[4]
지도의 윗쪽이 남쪽이다
[5]
비슷하게 중세 서양에서도
수도사나
신부들이 학문의 발전을 이끈 경우가 많았다. 글을 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집단이 바로 사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6]
볼로냐 대학교가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여겨지는 것은
학위와
대학원 체제 등 오늘날의 대학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7]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조각상, 그림은 물론이고 아이들 인형조차 우상으로 여겨질까 꺼린다.
터키같이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세속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슬람 주류 국가들은 이런 경향이 그래도 없는 편이다(터키는
국교가 없다). 참고로 이렇게 우상숭배를 극도로 피하려는 이슬람의 성향은, 이슬람 문화권의 미(美)적 활동과 예술에 크게 영향을 끼쳐
이슬람 서예와
아라베스크가 등장해, 발달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라베스크'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8]
다만 우마이야 왕조를 쫓아 내고 들어선 아바스 왕조도 비아랍인 차별주의만 철폐했을 뿐이지 역시 세습 왕조라는 점에서 증명하듯이, 어쩌면 우마이야 왕조 시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슬람 제국의 왕정화는 결국 어느 정도는 선지자 무함마드 시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팽창된 이슬람 제국의 정교한 관료제 속에서 나타난 필연에 가까운 현상이었고, 선지자 무함마드 본인은 종교적으로는 엄격해도 정치적으로는 꽤나 유연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세습 관료제까지는 어찌저찌 이해해 줬을 지도 모른다. 결국 역시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아랍인 제일주의라고 봐야 한다.
[9]
칭기스칸이 호라즘 제국을 정복할 때 '짐(칭기스칸)의 군대는 너희들(호라즘 제국)을 심판하기 위해 보내는 신의 천벌이고, 짐의 군대는 신의 군대다.'라고 전령병을 통해 협박장을 보낸 적이 있다.
[10]
일 칸국의 재상으로서
마라게에 천문대를 지었고 프톨레마이오스를 능가한 천체 관측기를 만들었다. 그 기구로 투시는 지구 공전설을 주장하게 된다. 이후 그 기구를
티코 브라헤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