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위치 | ||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
공통 | 국수주의 · 민족주의 · 황색 사회주의 · 혼합 정치 · 혁명적 내셔널리즘 · 협동조합주의 |
이념 | 국민생디칼리슴 · 나치-마오주의 · 민족 볼셰비즘 · 민족 아나키즘 · 봄바치주의 · 슈트라서주의 · 순정사회주의 · 신사회주의 ·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 아랍 사회주의( 바트주의) · 제4의 정치이론 · 좌익 파시즘 · 정통 페론주의 · 주체사상 · 팔랑헤주의 · MAGA 공산주의 | |
정당/조직 | 독일 노동당 · 레히 · 민족 볼셰비키당 · 사회대중당 · 시리아 사회민족당 · 소련 자유민주당 · 아메리카 공산당 · 우크라이나 진보사회당 · 유라시아당 · 전통주의노동자당 · 팔랑헤 · 흑색 전선 | |
인물 | 그레고어 슈트라서 · 기타 잇키 · 니콜라 봄바치 · 베니토 무솔리니(초기) · 알렉산드르 두긴(초기) · 오토 슈트라서 · 에른스트 니키쉬 · 에른스트 윙어 · 조르주 소렐 · 찬드라 보스 · 후안 페론 | |
기타 | 대안 우파 · 보수혁명 · 파시즘 · 인종국민주의 · 적색 파시즘 · 조선민족제일주의 · 좌익 내셔널리즘일부 · 좌익 보수주의일부 · 카다피주의 · 편자이론 |
|
|
러시아의
민족 볼셰비키당의 상징.[1] 훗날 다른 러시아에서 수류탄과 번개 모양을 삽입한 상징으로 대체된다. |
[clearfix]
1. 개요
독일어: Nationalbolschewismus
러시아어: Национал-большевизм
영어: National bolshevism
민족 볼셰비즘[2]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처음 등장한 용어로, 패전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독일에서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 보수혁명' 운동의 하나였다.[3] 용어 자체는 백계 러시아인이자 좌익 유라시아주의 사상가였던 드미트리 스뱌토폴크미르스키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4] 약칭으로 나츠볼(Nazbol)[5]로도 불린다.
오늘날에도 러시아나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러시아의 E. V. 리모노프의 다른 러시아는 반푸틴 재야 진영에서 활동하는 군소 진영 중 하나지만 다른 나라보다 비교적 수면 위에서 활동한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6] 이름 그대로 민족주의에 사회주의를 결합한 사상이라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와 종종 헷갈리기도 하는데 일단 소련에 대해 긍정적이고 계급문제에 대해 민감하다는 점, 자칭 반제국주의 성향을 띈다는 점 등에서 국가사회주의와 구분된다.[7]
상당히 이상한 이념이지만 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1차대전 직후 독일과 러시아가 마주한 상황을 분석해 보면 된다. 당시 독일과 러시아는 각자 패전국과 공산주의 이념의 국가로서 서방 자유민주주의 세력에게 가장 비난받는 나라였다. 배상금 징발과 전쟁의 책임이라는 명목으로 내정간섭을 당하며 휘둘리는 바이마르 공화국과는 달리 소련은 시장 자본주의 질서를 배격하는 자립주의적인 노선을 택하며 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으로 불온세력을 모두 때려잡아 국가 질서를 유지했다. 흔들리는 독일과는 달리 외부의 공세에도 굳건히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소련은 당시 극우파들의 눈에 "서방의 질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일종의 해결책으로 보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념상으론 공산주의와는 별 관계가 없고 공산주의자들이 보인 볼셰비즘이라는 방법론에 매혹을 느낀 것이다. 20세기 내내 민족 볼셰비즘의 이론을 발전시킨 건 장프랑수아 티리아르(Jean-Francois Thiriart) 같은 반미, 반자본주의 성향의 서구권 네오파시스트들이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비슷한 시기의 이탈리아에서도 벌어졌는데 당시 이탈리아 좌파는 독일이 그러했듯이 계급과 민족의 문제에서 갈등을 빚었다. 그 중 조르주 소렐의 민족생디칼리슴(National syndicalism) 노선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자 아르투로 라브리올라(Arturo Labriola)는 "프롤레타리아 민족(Proletarian nation)" 이라는 이론을 주장했는데, 이탈리아는 착취받는 민족에 해당하며 이탈리아에 필요한 투쟁은 내부적으로 계급투쟁을 벌이며 국제주의적 연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금권적 착취 국가에 맞서 억압받는 이탈리아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8] 다른 민족생디칼리스트 지도자 세르지오 파눈치오(Sergio Panunzio)는 폭력의 중요성에 집착했으며,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는 대중 동원과 이들을 지도할 신엘리트 계급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라브리올라는 협동조합주의 경제 이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괴상하게 뒤틀어서 혁명적 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자본주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들은 이 발전과정이 부르주아 농민 그리고 노동자들의 전국가적인 계급협조가 요구된다고 주장했으며, 프롤레타리아적 민족주의와 이탈리아의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옹호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반대하는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갈등을 빚었고[9] 여러 사회주의 조직들에서 탈퇴하거나 쫓겨나게 된다. 이 민족적 사회주의자들 중 알체스테 데 암브리스(Alceste De Ambris)와[10] 안젤로 올리비에로 올리베티(Angelo Oliviero Olivetti)는 1914년 10월, 함께 국제적 행동의 파쇼(Fasci d'Azione Internazionalista)라는 조직을 결성한다.[11] 다음달인 11월 5일엔 역시 전쟁의 문제로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출당 조치된 베니토 무솔리니가 혁명적 행동의 자율적 파쇼(Fasci Autonomi d'Azione Rivoluzionaria)라는 조직을 결정하자 두 조직은 합쳐지게 되어 혁명적 행동의 파쇼(Fasci d'Azione Rivoluzionaria)라는 조직이 된다.[12] 이런 조직의 발전 과정에서 합류한 민족생디칼리스트인 미켈레 비앙키(Michele Bianchi)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전투 파쇼(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와 파시스트당을 창설하는 것을 도왔고, 로마 진군을 이끄는 파시스트 지도자 중 한 명이 된다.[13] 물론 이 안에서도 독일에서 처럼 민족주의적 기원을 지니는 "파시스트-우파와" 민족 사회주의적 기원을 지니는 "파시스트-좌파" 사이의 갈등이 존재했다.[14] 이후 민족적 사회주의자들의 일부는 자신들이 만든 결과물에 경악하여 다시 사회주의로 전향하는 등 반파시즘 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일부는 무솔리니의 앞잡이로 남게 된다. 이 점에서 민족 볼셰비즘은 초기 파시즘의 이데올기적 혼란상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보수혁명론자들의 볼셰비키와 소련에 대한 지지는 그것이 보여준 사회주의로의 진보적인 힘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이들은 볼셰비키와 소련에게서 반서구적 반문명 지향적 힘을 발견한다. 이 보수주의 엘리트들은 독일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파괴하는 근대 자본주의적 침탈을 경멸했으며, 동시에 볼셰비키가 소련에서 보여준 영웅주의와 계획경제 체제에 열광했고 이로써 전통적인 좌우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들은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계급투쟁 사유재산의 폐지 같은 요소를 적대화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만 단결된 민족해방투쟁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과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국가를 폐지하는 아나키즘적 방향을 제시했던 것과는 달리, 볼셰비즘( 레닌주의)은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국가에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따라서 이들은 볼셰비즘에서 보수혁명론자 카를 슈미트가 주장했던 총체적 전체주의 국가의 이상향을 발견했던 것이다.[15] 이런 맥락에서 민족 볼셰비키 한스 폰 헨티히(Hans von Hentig)가 한 연설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회주의를 축복할 것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 군사적이고 외정(外政)적인 이유로 사회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깊이 있고 압도적인 철갑으로 무장한 사회주의여야 한다.[16]
정체성이 굉장히 모호한 이 이념은 결국 좌우로 나뉘게 되었는데, 진정한 공산주의로의 도달을 위해 민족주의를 수용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민족문화의 보전과 보수혁명을 위해 볼셰비즘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 신스탈린주의나 좌파 민족주의 사상으로 분류되며 김일성, 김정일을 존경하거나 주체사상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는 등 북한에 호의적이기도 하다.[17] 후자의 경우 극우 권위주의나 파시즘으로 분류되며 아돌프 히틀러나 베니토 무솔리니 같은 파시즘 지도자에게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2. 민족 볼셰비즘의 기원
2.1. 독일의 기원
민족 볼셰비즘의 시작은[18] 전(前) 사회민주당원이었던 하인리히 라우펜베르크(Heinrich Laufenberg)와[19] 전(前)산업노동자연맹 회원이었던 프리츠 볼프하임(Fritz Wolffheim)[20] 같은 이들을 기원으로 보는데, 둘 모두 1910년대 독일 공산당 함부르크 지부의 지도자였다. 그들은 1919년 카를 라데크(Карл Бернга́рдович Ра́дек)[21]에게 노동계급은 1차대전 후, 독일을 점령한 외세에 대항하고 민족 해방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족 부르주아와 손을 잡고 민족주의적 프롤레타리아 독재(20세기 중반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 마오주의자들이 좌파 민족주의, 민족 자결이라고 포장하는 이론과 유사한)를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그들의 주장은 라데크( 블라디미르 레닌이 직접적으로 헛소리라고 언급[22])에 의해서 거절되었고, 이후 출당당한다. 그들은 이후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23]이라는 신생 정당의 창설을 돕는다. 하지만 민족 볼셰비즘에 대한 입장 때문에 그들은 KAPD에서도 출당 되었는데 그들의 출당은 KAPD가 코민테른 3차 대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라데크가 제시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두번째 민족 볼셰비즘의 물결은 전후 독일 민족주의의 부흥과 관련되어 있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배상금 징발이라는 명분으로 루르를 점령하자 독일의 노동계급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민족주의가 부상했고 코민테른은 공산주의자와 국수주의자들 간의 협력을 촉구했다. 1923년 6월 라데크는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에서 레오 슐라게터(Albert Leo Schlageter)를 찬양하는 연설을 했다.[24]
독일이 싸우고자 한다면, 노동자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지식 노동자는 이 연합을 위해 울부짖는다. 노동자의 승리를 위한 단결로써, 독일은 모든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는 막강한 저항력을 얻게 될 것이다. 민중의 대의가 민족의 대의가 된다면, 민족의 대의는 민중의 대의가 될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족으로써 단결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위해 투쟁하는 다른 민중들의 지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독일 공산당과 코민테른이 슐라게터의 묘소에서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족주의 대중의 대다수가 자본가의 편이 아닌 노동자의 편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마땅히 투쟁할 것이며, 이런 대중을 위한 길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슐라게터와 같이 대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전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방랑하는 자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는 석탄과 철의 남작의 이윤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며, 신음하는 독일 민족을 위해 그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민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피를 흘리고자 해야 한다.
이 사실이 공산당이 독일 대중에게 선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산업 노동자들을 위한 빵껍질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정당이며, 이것은 독일에서 고통받는 온 국민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슐라게터는 이제 이 선언을 들을 수 없지만, 수천의 슐라게터가 이 말을 듣고 이해할 것이라고 확신한다.[25]
슐라게터는 1921년, 그의 동료들과
나치당에 입당한 이후 극우 조직
자유군단의 일원으로서 루르를 점령한 프랑스군에 대항한 사보타주를 행했기 때문에 나치당원들 사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 사건은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독일 공산당과 나치당 사이의 협력기에 이어 공산당원인 루트 피셔(Ruth Fischer)는 나치 학생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유대 자본을 공격했다.[26] "유대 자본에 맞서 싸우는 자는 누구든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계급투쟁의 전사들이다...
유대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가로등에 매달아 짓밟아 버리자."[27] 공산당은 자신들의 신문에서 극우파인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Wilhelm Ernst Victor Moeller van den Bruck)의 글들을 실었는데, 공산당의 평당원들이 거리에서 반파시즘 운동에 나서며 파시스트들과 패싸움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이것이 독일 공산당과 코민테른이 슐라게터의 묘소에서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족주의 대중의 대다수가 자본가의 편이 아닌 노동자의 편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마땅히 투쟁할 것이며, 이런 대중을 위한 길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슐라게터와 같이 대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전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방랑하는 자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는 석탄과 철의 남작의 이윤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며, 신음하는 독일 민족을 위해 그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민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피를 흘리고자 해야 한다.
이 사실이 공산당이 독일 대중에게 선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산업 노동자들을 위한 빵껍질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정당이며, 이것은 독일에서 고통받는 온 국민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슐라게터는 이제 이 선언을 들을 수 없지만, 수천의 슐라게터가 이 말을 듣고 이해할 것이라고 확신한다.[25]
보수혁명론자인 묄러는 그의 저서인 제3제국(Das Dritte Reich)에서 러시아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서구 자본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체제로서 " 민족주의적 사회주의(Nationalist socialism)"라는 기치 아래 모든 계급을 통합한 제3제국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는데, 그는 반유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훗날 나치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묄러가 설립한 6월회(Juniklub)는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이후 독일의 보수혁명론자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여기엔 오토 슈트라서도 있었고 아돌프 히틀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1922년 6월회를 방문했을 때 묄러는 히틀러는 독일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지만 자질이 없다고 평가했다. 뮌헨 폭동의 실패 이후 묄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그의 프롤레타리아적 원시주의에 의해 망가져있다. 그는 자신의 민족사회주의에 아무런 지적 기반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는 열정의 화신이었지만, 척도나 균형감각 같은 논리를 가지지는 않았다."[28] 묄러에 의해 무식하다고 비판받았지만, 히틀러는 그를 존경했으며 그가 1945년 자살한 벙커에서도 묄러가 직접 친필로 사인한 Das Dritte Reich가 있었다.[29]
1931년 독일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사회 파시즘 이론"에 따라 사민당 주도의 프로이센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나치당과 다시 손을 잡는다.[30] 다음 해엔 공산당과 나치당은 함께 파업에 참여했지만[31], 반대로 평당원들은 나치의 갈색 셔츠단과의 거리 싸움에 참여한다. 이런 전략은 파시스트들의 정책이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자극할 것이라는 결함이 많은 가속주의(accelerationism)[32]적 사상에 기반했다.[33] 이것은 당시 공산당의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의 슬로건에 나타난다. "히틀러 다음은 우리 차례다!".[34] 그렇게 공산당은 나치의 부상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좌파에 본격적으로 폭력을 자행하기 시작한 이후에도[35], 공산당은 사민당과의 연합전선을 거부하며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다.[36]
니키쉬가 사용한 민족 볼셰비키의 상징[37] |
니키쉬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는 사회혁명적 국민주의자들(Social Revolutionary Nationalists)이라는 조직을 결성한 오토 페텔(Otto Paetel)이 있는데 그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소련과의 긴밀한 협력을 지지했고, 반자본주의가 서구의 점령에서 독일을 자유롭게 할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페텔은 히틀러 유겐트와[42] 함께하려 시도했으며, 많은 그의 조직원들은 슈트라서 형제의 나치당 좌익 블록에 속해 있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독일 공산당의 많은 당원들은 나치로 전향하는데 이들은 비프 스테이크 나치(겉은 갈색이지만, 속은 붉다는 뜻에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전(前)공산당원들은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나치 돌격대에 합류하여 상당한 존재감을 나타냈다.[43]
여담으로 니키쉬는 히틀러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며 히틀러의 집권에 반대하였다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장기간 투옥되었고, 그동안 민족주의의 열망을 완전히 버리고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하였다. 나치 독일 패망 이후에는 동독에서 한동안 교수 활동을 했지만, 1953년 동독 봉기에 실망해 서베를린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한다.
2.2. 러시아의 기원
러시아의 민족 볼셰비즘은 독일과는 다른 조건에서 등장했다.1917년의 혁명 이후 러시아에 내전이 시작되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새롭게 탄생한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우익 세력들에게 전략적 양보를 했고, 결과적으로 검은 백인대(Чёрная сотня/Black Hundreds)[44] 같은 차리즘 세력에서 볼셰비키로 합류하는 자들이 대폭 증가했다. 당시 13만 붉은 군대 장교의 절반 가량이 러시아 제국군 출신이었으며, 이들 중 다수가 군주주의자들이었다.[45][46]
이런 전(前)백색세력의 인물들 가운데, 니콜라이 우스트랼로프(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Устря́лов)라는 자가 있었는데[47], 그는 러시아 혁명이 러시아를 강력한 나라로 재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닌에 의해 추방된 우스트랼로프와 다른 백계 러시아인들이 프라하에서 간행한 "스메나 베흐(Смена Вех, 새로운 이정표)"라는 간행물에서는 내전을 중단하고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볼셰비키와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우스트랼로프가 보기에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국제주의적 발언들은 단지 위장에 지나지 않았고, 통일 러시아의 복원과 미래를 확장시키기 위한 유용한 도구였다. "소비에트 체제는 세계혁명이란 이름으로 국경을 재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러시아의 애국자들 또한 통일된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이를 위해 싸워야 한다... 이념은 다를지라도 결국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48] 우스트랼로프가 독일의 민족 볼셰비키인 에른스트 니키쉬의 글들을 읽은 후에 그들은 "민족 볼셰비키"라는 이름을 채택한다. '스메나 베흐'가 소련에서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그들에게 보조금을 지불했고, 우스트랼로프는 1935년 소련으로 귀환, 스탈린 집권기에도 계속 소련을 찬양하다가 대숙청 시기 처형되었다. 스메나 베흐의 기고가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스메노베홉스치(Сменовеховцы) 운동의 지지자들은 이후 소비에트 설립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독일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하고 레닌이 사망한 뒤, 공산주의 운동이 혼란한 와중에 소련의 민족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혼합을 거치게 되는데, 이는 " 일국사회주의"라는 일종의 민족 볼셰비즘으로 발전한다.[49]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이질적인 동거는 나치 독일의 뮌헨 협정 위반으로 인한 서방 세력의 위기 당시 그 존재감을 다시 나타냈다. 당시 스탈린은 표면상으로는 히틀러에 맞서는 영국, 프랑스와의 동맹 협상을 했지만, 동시에 비밀리에 독일과 협상한다.[50] 그해의 8월 독소 불가침조약이 서명되었고[51], 스탈린은 독일에서 소련으로 망명온 독일의 공산당원들을 독일로 강제 추방시킨다.[52] 그들의 밀약에서는 동유럽을 소련과 나치의 영역으로 분할하는 비밀 규약이 있었고, 다음달 그들은 함께 폴란드를 침공한다. 폴란드를 점령한 이후, 그들은 브레스트와 리보프에서 함께 군사 퍼레이드를 개최했다. 이들은 히틀러가 불가침조약을 위반하기까지 함께 경제 협약을 맺고, 점령지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한 정보 공유를 하는 등의 협력을 이어 나가게 된다.[53]
폴란드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자, 코민테른은 반대로 모든 반파시스트 활동을 중단하고 각국의 공산당에 전쟁을 제국주의자들의 계략으로 모함하고 전쟁의 명분을 훼손할 것을 지시하는데, 이는 유럽의 반파시스트 인민전선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54]
인민전선에 아무런 예고없이 스탈린은 갑자기 그의 외교 정책을 뒤집어 1939년 8월 20일,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 히틀러와의 전쟁이 시작됐지만, 소련은 없었다. 조약은 스탈린의 해외 요원들에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고, 그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다...
파시즘에 대한 전쟁은 어려움 없이 소련의 이익에 반하는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모했다. 전쟁의 책임은 영국과 프랑스에 있었고, 러시아와 독일의 방식에 근거한 평화 협정만이 정당하다고 주장되었다...
독일과 러시아의 협약은 단지 불가침 조약일 뿐만이 아니었고,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독일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에서의 독일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적극적인 동조가 아니었다면, 자비로운 중립일 뿐이었다. 이에 따라 독일에 대한 코민테른의 정책은 변화를 겪었다. 제7차 총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을 금용 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요소의 독재라고 주장하였으며, 독일의 파시즘은 파시즘의 가장 반동적인 변종이라고 불렀다. 이제 영국 금융자본은 세계에서 가장 반동적인 것이 되었다. 1935년 이래로 독일 공산당의 총괄위원회의 회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는 공산당의 공식지인 Die Welt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독일 정부는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기꺼이 선언했지만, 영불 군국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을 원한다고 선포했다. 소비에트 인민과 독일 노동계급은 따라서 영국의 전쟁계획을 확인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 전쟁은 특히 범죄적인 것인데, 힐퍼딩(Hilferding)에 따르면 전쟁의 결과로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반동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영국 제국주의는 소련의 지원으로 독일이 만든 전쟁 종식을 위한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완전히 반동적인 성격을 보였다."
울브리히트는 이어서 말했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현독일 정권의 폭압정치에 대하여 영웅적으로 저항하고 있는데, 그러한 공포정치는 독일의 국민을 해치고 독일의 평판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독일 민족의 저항이 약화되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같은 반동세력의 국수주의자들이 그들의 전쟁의 목적을 숨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결국 독소 협정 시기의 독일 공산당이 히틀러에 반대한다는 것은 인도 공산당이 1942년에 제국주의 압제에 반대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그들 또한 폭압정권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인도인의 일본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독소협약의 시기에 독일 공산당은 제국주의 전쟁에서의 자국의 부르주아를 지지했다. 공산주의자의 대적자는 더이상 히틀러가 아니라 독소 불가침조약의 반대자였다.[55]
파시즘에 대한 전쟁은 어려움 없이 소련의 이익에 반하는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모했다. 전쟁의 책임은 영국과 프랑스에 있었고, 러시아와 독일의 방식에 근거한 평화 협정만이 정당하다고 주장되었다...
독일과 러시아의 협약은 단지 불가침 조약일 뿐만이 아니었고,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독일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에서의 독일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적극적인 동조가 아니었다면, 자비로운 중립일 뿐이었다. 이에 따라 독일에 대한 코민테른의 정책은 변화를 겪었다. 제7차 총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을 금용 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요소의 독재라고 주장하였으며, 독일의 파시즘은 파시즘의 가장 반동적인 변종이라고 불렀다. 이제 영국 금융자본은 세계에서 가장 반동적인 것이 되었다. 1935년 이래로 독일 공산당의 총괄위원회의 회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는 공산당의 공식지인 Die Welt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독일 정부는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기꺼이 선언했지만, 영불 군국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을 원한다고 선포했다. 소비에트 인민과 독일 노동계급은 따라서 영국의 전쟁계획을 확인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 전쟁은 특히 범죄적인 것인데, 힐퍼딩(Hilferding)에 따르면 전쟁의 결과로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반동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영국 제국주의는 소련의 지원으로 독일이 만든 전쟁 종식을 위한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완전히 반동적인 성격을 보였다."
울브리히트는 이어서 말했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현독일 정권의 폭압정치에 대하여 영웅적으로 저항하고 있는데, 그러한 공포정치는 독일의 국민을 해치고 독일의 평판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독일 민족의 저항이 약화되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같은 반동세력의 국수주의자들이 그들의 전쟁의 목적을 숨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결국 독소 협정 시기의 독일 공산당이 히틀러에 반대한다는 것은 인도 공산당이 1942년에 제국주의 압제에 반대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그들 또한 폭압정권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인도인의 일본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독소협약의 시기에 독일 공산당은 제국주의 전쟁에서의 자국의 부르주아를 지지했다. 공산주의자의 대적자는 더이상 히틀러가 아니라 독소 불가침조약의 반대자였다.[55]
소련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노동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다른 반체제 인사들과는 달리, 민족 볼셰비키들은 그런 상황에서 생존할 유리한 위치를 갖추고 있었다. 많은 민족 볼셰비키들은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체제에 순응했고, 당의 공산주의 이념을 거부하는 대신 “전통 러시아의 가치관”을 강조함으로써 전자의 중요성을 최소화했다. 이런 입장은 당시 소비에트 통치구조의 엘리트 세력으로써 굳게 자리매김한 민족주의 세력에게 호소되었다. 민족 볼셰비키의 주장은 몇몇의 소비에트 국영 미디어(공산당 청년기구, 적군 등의)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고, 이런 주장들은 정치적으로 적절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가장 주요한 민족 볼셰비키 대변자는 몰로다야 그바르디야(Молодая гвардия/청년 수호대)라는 공산주의 청년단의 공식 저널이었다. 이 저널에서는 “민족 정신”과 “대지와 토양”을 부활하길 열망하는 시와 수필들이 게재되었고, 제노포비아적으로 소련군을 찬양함과 동시에 러시아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찬양했다. 청년수호대의 작가들은 마르크스주의적 계급분석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러시아의 정신적 우월성을 미국의 물질주의와 대립하는 것으로써 표현했다. 그들은 서구 문명을 “얇은 셀로판지로 위장한 야만”으로 표현했으며, 청년들이 서구적 타락에 물들 위험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타락의 산물이었고, 철권통치를 찬양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통치기 동안 민족 볼셰비키의 주장은 서독의 반체제 저널인 베체(Veche)에서도 공명하였다. 겐나디 시마노프(Геннадий Михайлович Шиманов)는 베체의 비정기적인 기고자였는데, 러시아인을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이라며 찬양했고 소련을 “신비한 유기체”이자 전인류를 위한 “정신적 기폭제”로 묘사했다. 베체의 기고자 중 한 명인 발레리 스쿠를라토프(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Скурлатов) 박사는 “도덕 규범”이라는 글에서 인종적 순결성의 보존을 옹호했고, 외국인과 성관계한 러시아 여성을 '살균'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56]
3.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파시스트 프랜시스 파커 요키는 반공주의자였음에도 다른 극우파와는 달리 타락한 문화를 정화하고 유대인들의 음모에 맞서기 위해서는 소련식 권위주의 정권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제3세계의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했고,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같은 유대인들의 계략에 맞서기 위해서 파시즘 세력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57] 그는 유대인과 자본주의에 의한 서구 문명의 타락에 맞서기 위해 파시즘은 공산주의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를 적갈색 동맹(Red-Brown Alliance)이라고 불렀다.[58]1940년대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던 극우 시온주의 테러단체 레히(Lehi)는 # 처음엔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에게 반영투쟁을 할테니 유대인들을 모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켜 달라며 동맹을 주장했고, 이후엔 소련과 스탈린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가더니, 좌파와 우파를 통합시켜야 한다며 민족 볼셰비즘을 주장했다.[59] 그러나 유대 민족주의가 건국 이념이며 투쟁의 동력인 이스라엘에서 반유대주의 유대인 음모론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이 사상은 먹힐 리가 없었다. 결국 1948년 5월 29일 이스라엘군으로 흡수된다.
독일 등지의 유럽 일각에서 활동하는 네오나치인 자율적 민족주의자(Autonome Nationalisten)들도 민족 볼셰비즘 계열에 해당한다. 독일 재통일 당시 독일 당국의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네오나치 정당인 독일 민족민주당(NPD)과 연계된 극우단체들이 고정관념적 극우 이미지에서 벗어난 애매모호한 이미지(닙스터(nipster)라고도 불리는)를 택하며 세포조직화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3.1. 소련 붕괴 이후
1991년 소련의 붕괴로 혼란한 와중에 신스탈린주의자들은 왕당파, 파시스트, 정교회 근본주의자, 이교주의자, 보수적 환경주의자들과 협력하며 포스트 소비에트 정치 파벌(적갈색 동맹)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들은 표준적 정치 해석에서 벗어난 이데올로기적 혼란의 상황에 있었고, 작가이자 민족 볼셰비키 정치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는 다음처럼 주장하기도 했다. “새로운 운동은 이전처럼 좌파와 우파라는 말로써 분류될 수 없다. 이것은 과거의 언어이며, 포스트 소비에트 사회에 적용될 수 없다.”이 주장은 1992년 3월 러시아를 방문해서 야당 대표들과의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던 프랑스의 파시스트 이론가 알랭 드 브누아(Alain de Benoist)의 주장과 동일했다. 브누아는 수년간 프랑스의 신우파(Nouvelle Droite)를 이끌며 전통적인 좌/우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브누아는 냉전종식 이후 이런 정치적 분열은 완전히 낡은 것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아니라, 기득권 중앙파와 반체제적 주변파들의 대립이 더욱 실질적인 관점이라고 주장했는데, 중앙과 주변부라는 대립항은 러시아의 적갈색동맹 파벌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다.
리모노프는 파리에 있을 당시 브누아와 처음 접촉했다. 그곳에서 그는 유명한 민족 볼셰비키인 장 티리아르를 비롯한 여러 괴상한 믿음을 가진 이들과 자주 토론했다. 당시 티리아르는 벨기에에 근거지를 둔 Parti Communautaire National-Europeen(PCN)라는 조직과 일했는데 이 조직은 전(前) 마오주의자들과 네오파시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미유대제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 조직은 뤼크 미셸(Luc Michel)이라는 인물이 이끌었는데 그는 스스로를 민족 공산주의자로 표현했으며, 이전엔 오랫동안 네오나치당의 당원이었다. 티리아르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1992년 8월 티리아르는 서유럽에서 러시아까지 민족 공산주의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정치적 야당의 대표들과 그의 견해를 논의했다. “유라시아 대 아메리카”는 티리아르와 그의 새로운 러시아 수하들이 공감하는 주요한 개념이었고, 이들 중엔 당시 30살이었던 알렉산드르 두긴도 있었다. 리모노프에게 민족 볼셰비키 전선을 설립할 것은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은 바로 두긴이었다. 두긴은 또한 겐나디 주가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정치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을 도왔으며, 주가노프는 티리아르와 함께 전략을 세웠다. 주가노프는 마르크스나 레닌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러시아를 “꿈꾸는 국가”와 “동원자 국가”같은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주가노프에 대한 두긴의 영향력은 주가노프가 다음처럼 발언했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우리(러시아인)는 국제적 세계시민주의라는 폭정에 맞설 수 있는 마지막 세력이다.”
티리아르가 모스크바에 있을 당시 그는 신공산주의자들과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여러 회의에 참석했고 1992년 9월 국민 구제 전선(Фронт Национального Спасения/National Salvation Front)이라는 거대한 적갈색동맹 조직을 형성했다.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역시 NSF의 설립에 관여했으며, 운영회에서 일했다. 두긴과 리모노프가 이끄는 민족 볼셰비키당은 NSF에 합류한 40여개 이상의 야당 단체 중에 하나였고, 이들은 모두 러시아 정부 전복을 지지했다. NSF는 옐친 행정부의 가혹한 실험들을 비난했고 민영화, 가격 자율화 같은 충격 요법들이 러시아를 어려움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 옐친은 NSF를 금지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들에게 반대했다. 옐친은 Dyen(두긴의 극우 민족주의 저널이자, NSF의 공식지)과 여러 국수주의 출판물을 금지하려고 시도했지만 적갈색 동맹을 지지하는 러시아 의원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티리아르가 1992년 11월 23일 벨기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Dyen을 비롯한 여러 민족주의 언론에서 그를 추모했다. 그 중 한 기사는 티리아르의 주장을 인용하여 그의 동료 민족 볼셰비키들이 그가 오랫동안 염원하던 대륙의 권력 블록을 형성할 것을 촉구했다. “소련과 서유럽의 깨우친 엘리트들이 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정치적 유대 관계를 구성하는 것을 필수적이다.”... “이 혁명적 엘리트들은 단결해서 유럽의 토양에서 미국의 침략자를 추방할 준비를 해야 한다.”
티리아르의 서유럽 제자들은 유럽 해방전선(European Liberation Front)이라는 조직을 결성했고, 이들은 러시아의 국민구제전선과 정기적으로 접촉했다. 유럽해방전선이라는 이름은 요키와 그의 영국인 추종자들이 결성했던 조직과 동일한 이름이었다. 요키의 조직은 유럽에서 미제 침략자에 대항해 소련과 협력할 네오나치 지하 네트워크를 형성할 목적으로 형성된 조직이었다. 이후 ELF은 여러 유럽 국가들의 민족 볼셰비즘 조직들로 구성되어 갔으며, 이 적갈색 잡종 세력들은 티리아르의 사상을 받아들인 네오파시스트와 신스탈린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ELF는 국민구제전선이 러시아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그림자 정부를 형성했다고 발표하자 환호했다. 1993년 9월 옐친이 의회를 해산하자 옐친 충성파와 러시아 백악관에 모여든 자칭 애국세력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됐다.
내전이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리모노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의회 건물에 모여들었다. 이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적갈색 극단주의자들이 건물에 모여 들었고 알렉산드르 바르카쇼프(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Баркашо́в)의 검은 셔츠 돌격대는 전투를 준비하며 무기를 가져왔다. 긴장이 고조되자 ELF는 모스크바에 조직원을 파견했다. 당시 ELF를 대표했던 네오파시스트 미셸 슈나이더(Michel Schneider, 티리아르와 모스크바에 동행했던)는 옐친이 의회에 군대를 보냈을 때 부상당했다.
진압 작전으로 많은 이들이 부상당했고, 리모노프를 비롯한 야당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바르카쇼프와 수십명의 무장대원들은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에 탈출했지만, 바르카쇼프는 몇주 뒤에 익명의 요원에게 총격을 당한 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결국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다.[60]
전후 네오파시즘의 부활을 조사한 책인 The Beast Reawakens의 저자 마틴 A. 리(Martin A. Lee)는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바이마르 공화국에 비유했다.
4. 같이 보기
- 제3의 위치
- 좌익 파시즘
- 네오파시즘
- 민족공산주의
- 좌익 내셔널리즘
- 러시아 내셔널리즘
- 유라시아주의 - 좌익 유라시아주의만 해당
- 슈트라서주의
- 프로이센 사회주의
-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보수혁명
- 반동주의
5. 둘러보기
[1]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깃발에
하켄크로이츠 대신
공산주의의 상징인
낫과 망치를 그려 놓은 깃발이다.
[2]
구글 검색했을 때
민족 볼셰비즘이
국민 볼셰비즘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에도 '민족 볼셰비즘'으로 등재된 논문이 있다.
#
[3]
오토 슈트라서가 주창한
슈트라서주의도 여기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다.
[4]
다만 미르스키 본인뿐만 아니라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 등 고전적
유라시아주의 사상가들은
인종차별의 철폐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파시즘이 내포한 폭력성, 군국주의, 극단주의, 인종주의를 배격하였다.
[5]
NAZional+BOLshevism
[6]
전신인 민족 볼셰비키당은 2007년에 해산되었다.
[7]
제국주의가 인종적 혼혈과 문화 융합을 촉발시켜 민족적 순수성을 훼손한다고 반제국주의자를 자칭하는 것이다.
제3의 위치 추종자들 중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반제국주의를 자칭하는 경우가 많다.
[8]
https://books.google.com/books?id=hnv0F88nLawC&q=Arturo+Labriola+adopted+Sorel%27s+theory+of+proletarian+violence&redir_esc=y
[9]
https://books.google.com/books?id=hnv0F88nLawC&q=Not+all+Italian+syndicalists+became+fascists+but+most+syndicalist+leaders+were+among+the+founders+of+the+Fascist+movement+Many+even+held+key+posts+in+the+regime+of+Benito+Mussolini
[10]
https://books.google.com/books?id=CRYFOJaaAisC&q=Revolutionary+Fascio+of+Internationalist+Action+Alceste+de+Ambris&redir_esc=y
[11]
파쇼는 라틴어
파스케스에서 유래한 이탈리아 단어로, 이렇게 조직명에서 사용될때 ~단(團)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어원이 그렇다 보니 권위주의적인 어감을 가진 표현이며, 이런 단체명도 대충 의역하면 "국제적행동군단" 정도가 된다.
[12]
https://books.google.co.uk/books?id=hnv0F88nLawC&q=Fasci+autonomi+d%27azione+rivoluzionaria
[13]
https://books.google.co.kr/books?id=Tm6uVwH03hAC&q=Michele+Bianchi+Unione+Italiana+del+Lavoro&redir_esc=y
[14]
https://books.google.com/books?id=x_MeR06xqXAC&q=national+syndicalists+Fascist+left+Panunzio+Olivetti+right+sectors&redir_esc=y
[15]
Ernst Niekisch, "Die politik des deutschen Widerstandes," Widerstand 4(1930)
[16]
Hans von Hentig. Ruf zu den Waffen. 7. Aufstz zur deutschen Revolution. Louis Dupeux, Nationalbolschewismus in Deutschland. 1919~1933. Kommunistische Strategie und KKonservative Dynamik(1974: München, 1985), 157~158
[17]
이념상으로 주체사상은 흐루쇼프 노선을 비판하며
반수정주의적 입장에서 자신들이 스탈린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올바른 해석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민족 볼셰비키들은
에른스트 니키쉬,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 슈트라서 형제 등의 독일
보수혁명론자의 이념을 자신의 뿌리로 간주한다는 차이가 있다.
[18]
https://books.google.co.kr/books?id=1rA0DwAAQBAJ&q=laufenberg+wolffheim&redir_esc=y
[19]
https://books.google.co.kr/books?id=iagWb0Pc2PgC&q=council+of+workers+and+soldiers+Laufenberg&redir_esc=y
[20]
https://books.google.com/books?id=iagWb0Pc2PgC&q=Wolffheim+Industrial+Workers
[21]
트로츠키주의자였으며 볼셰비키 최고의 이론가 중 한 명으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레닌이 가장 말싸움으로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대숙청 시기 NKVD에 의해 감옥에서 살해당했다.
[22]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20/lwc/ch08.htm
[23]
평의회 공산주의 정당이다.
[24]
https://www.marxists.org/archive/radek/1923/06/schlageter.htm
[25]
https://www.marxists.org/archive/radek/1923/06/schlageter.htm
[26]
https://books.google.at/books?redir_esc=y&hl=de&id=DXqJDAAAQBAJ&q=Ruth+Fischer+Jewish+capital
[27]
The Dutch and German Communist Left (from a meeting of 25 July 1923, reported in Die Aktion No. 14, 1923)
[28]
Politics of Cultural Despair , p. 238.
[29]
Cyprian Blamires, World Fascism: A Historical Encyclopedia, Volume 1 (Santa Barbara, Cal.: ABC-CLIO, 2006), p. 431.
[30]
https://books.google.com/books?redir_esc=y&hl=de&id=857cMqogQY4C&q=Prussian+Referendum
[31]
https://books.google.co.kr/books?id=ndXKHVIOASIC&q=infamous+KPD+NSDAP+cooperation+Berlin+transportation+strike+November+1932&redir_esc=y
[32]
그들의 용어로 "제3기 이론"
[33]
https://books.google.co.kr/books?id=NXMtDwAAQBAJ&q=October+14+1931+Reichstag&redir_esc=y
[34]
https://books.google.com/books?id=p1WuBAAAQBAJ&q=After+Hitler+Our+Turn&redir_esc=y
[35]
https://books.google.com/books?id=CmjBW3lsA84C&q=Bands+of+stormtroopers+began+attacking+trade+union+and+Communist+offices&redir_esc=y
[36]
https://books.google.co.kr/books?id=p1WuBAAAQBAJ&q=the+task+of+the+KPD+remains+as+before+to+direct+the+chief+blow+at+the+present+stage+against+social+democracy&redir_esc=y
[37]
본래는 민족생디칼리슴(National syndicalism) 이라는 제3의 위치 사상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Cercle Proudhon라는 초기 파시즘 단체가 사용하던 문장이다. 민족생디칼리슴은 이후에 이탈리아 파시스트당과 스페인의
팔랑헤 등에 영향을 준다.
[38]
https://books.google.com/books?id=1rA0DwAAQBAJ&q=niekisch&redir_esc=y
[39]
https://books.google.com/books?id=sZ_cAAAAQBAJ&q=Niekisch&redir_esc=y
[40]
정확히는 문화비관주의라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41]
https://libcom.org/library/excerpt-national-bolshevism-martin-lees-beast-reawakens
[42]
https://books.google.com/books?id=nnZyz6JOKlQC&q=Paetel+Hitler+Youth&redir_esc=y
[43]
https://books.google.com/books?id=nnZyz6JOKlQC&q=popular+phrase+was+Beefsteak+Nazis+brown+on+the+outside+red+on+the+inside&redir_esc=y
[44]
여기서 백인은 인종을 뜻하는 게 아니라 '100인'을 뜻한다.
[45]
https://books.google.com/books?id=sZ_cAAAAQBAJ&q=October+Revolution+Black+Hundreds&redir_esc=y
[46]
https://crimethinc.com/2017/11/07/one-hundred-years-after-the-bolshevik-counterrevolution-a-timeline-charting-the-destruction-of-popular-movements
[47]
https://books.google.com/books?id=sZ_cAAAAQBAJ&q=Ustrialov&redir_esc=y
[48]
https://libcom.org/library/excerpt-national-bolshevism-martin-lees-beast-reawakens
[49]
https://books.google.com/books?id=sZ_cAAAAQBAJ&q=spirit+of+Rapallo+world+revolution&redir_esc=y
[50]
https://books.google.com/books?redir_esc=y&hl=ro&id=qBBcqDludakC&q=negotiations+secretly+germany
[51]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german-soviet-pact
[52]
https://books.google.com/books?id=YkekBwYc1_wC&q=stalin+deported+about+five+hundred+communist+exiles+back+to+nazi+germany.&redir_esc=y
[53]
https://books.google.co.kr/books?id=ZliWXGydrzAC&q=The+Treaty+on+Friendship+and+the+Border&redir_esc=y
[54]
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writers/goonewardene/1947/ch09.htm
[55]
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writers/goonewardene/1947/ch09.htm
[56]
https://libcom.org/library/excerpt-national-bolshevism-martin-lees-beast-reawakens
[57]
이 사람이 보기에 공산주의자들이 이 독재는 민주적이라고 해괴하게 정당화하더라도, 이러한 체제가 파시스트들의 이상향을 충족시키기에 매우 적절해 보였던 것이다.
[58]
https://libcom.org/library/investigation-red-brown-alliances-third-positionism-russia-ukraine-syria-western-left
[59]
Eran Kaplan이나 Derek J. Penslar 같은 역사학자들은 레히는 인종주의와 보편주의가 결합되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혼합된 사상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60]
https://libcom.org/library/excerpt-national-bolshevism-martin-lees-beast-reawake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