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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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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도첨의좌중찬
한희유
韓希愈
생몰연도 <colbgcolor=#fff><colcolor=#000>? ~ 1306년
본관 가주 한씨[1]
이름 희유(希愈)
주요 직위 판밀직사사
판삼사사
동북면도지휘사
도첨의찬성사
도첨의시랑찬성사
도첨의우중찬[2]
도첨의좌중찬[3]
주요 참전 삼별초의 난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카다안의 침입
자녀 자: 한검(韓儉)
녀: 가주 한씨
『고려사』 권104, 열전17 한희유

1. 개요2. 생애
2.1. 삼별초를 토벌하고, 일본정벌에서 활약하다2.2. 카다안의 침입을 막아내고,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되다2.3. 귀양을 다녀오다2.4. 한희유 무고 사건2.5. 무죄임이 밝혀지다2.6. 무죄임이 밝혀진 이후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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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의 관리이자 무신.

가주의 주리(州吏)[4]라는 한미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사의 여러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무신정권이 무너졌음에도 순전히 군공(軍功)만으로써 재상이 된 무신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무신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문신 출신이나 외국 사신들에게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무고를 당하기도 하면서 곤욕을 치루었지만, 같은 시기 원충갑과 더불어 고려를 지켜낸 용장이다.

2. 생애

2.1. 삼별초를 토벌하고, 일본정벌에서 활약하다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진도(珍島)와 탐라(耽羅)를 토벌하여 모두 공이 있었다. 일본 정벌 때 김방경은 한희유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단병(短兵)으로 적과 맞붙었는데, 한희유가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다가 손을 다쳐 피가 흘렀으나 끝까지 힘써 싸워 여러 명의 수급을 베었다.

고려사 한희유 열전
1271년에 김방경을 따라 진도와 제주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하는데 전공을 세웠으며, 1274년 일본정벌 때에는 선봉으로 나서서 활약한다.[5]

1287년에는, 충렬왕이 원나라의 종왕(宗王) 나얀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한희유를 좌익만호가 삼는다.그렇게, 한희유는 출정하게 된다.

하지만, 가던 도중, 내안을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다시 고려로 돌아왔다.

2.2. 카다안의 침입을 막아내고,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되다

한희유(韓希愈)가 창을 들고 말을 몰아 적진으로 돌입하니 사람과 말이 두려워하며 물러섰다. 용사를 잡고 나와서 그를 참수한 후 그 머리를 창에 매달아 보이자 적들 모두 기세를 잃었으므로 대군이 사방에서 공격하여 이들을 크게 무찌르고 마침내 군사를 돌려 석파역(石破驛)에 주둔하였다.

고려사절요 권 21, 충렬왕 17년 5월
1291년에 카다안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오자, 한희유는 좌익만호로서 군대를 지휘하여 카다안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김흔(金忻)을 죽전(竹田)에, 한희유(韓希愈)를 충청도[忠淸]에, 나유(羅裕)를 교주도(交州道)에 보내어 합단(哈丹, 카단)의 잔당을 추포하였다. 신미. 적 580인이 한희유에게 항복하였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17년 6월
1291년 6월에는 충청도에서 카다안의 잔당을 추격해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후, 충렬왕은 카다안의 침입을 막아낸 한희유를 강화도에 파견시켜 외적을 방어하게 하게 한다.

2.3. 귀양을 다녀오다

한희유는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자월도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이유는 사적갈등으로 보인다. 그렇게 유배생활을 계속하다가 1298년 11월, 충렬왕이 다시 복귀한 이후, 풀려나 관직생활을 한다.

2.4. 한희유 무고 사건

정유 만호(萬戶) 인후(印侯)와 김흔(金忻), 밀직(密直) 원경(元卿) 등이 함부로 군사를 동원하여, 만호(萬戶) 한희유(韓希愈)와 상장군(上將軍) 이영주(李英柱)를 잡아 모반했다고 무고하였다.

고려사 충렬왕 25년 1월
1299년 인후, 김흔, 원경(元卿)은 한희유를 담구려고 시도하였고, 이렇게, ‘한희유 무고 사건’ 이 일어나게 된다.

인후는 이 사건을 충렬왕과 몽골 관료 카산에게 알린다. 이에 카산은 조사를 해본 뒤, 이 보고가 거짓임을 확인하였다.

그래도 한희유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게되고, 급기야 원나라까지 끌어들인다. 한희유 무고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 원나라로 송환되어진다.

2.5. 무죄임이 밝혀지다

1300년에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서 한희유의 죄가 없음을 주장하였고, 원나라 황제가 용서해줌으로써 잘 해결되었다.

2.6. 무죄임이 밝혀진 이후의 행적

1300년 11월부터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305년 11월,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따라나섰으며, 7월 달에 원나라에서 생을 마감한다.
[1] 평안북도 박천군을 관향으로 삼는 성씨이다. [2] 우중찬이 수상직일 때 우중찬을 역임했다가 좌중찬이 수상직으로 바뀌었을 때도 우중찬을 역임했다. [3] 좌중찬이 수상직으로 바뀐 관제에서 좌중찬을 역임했다. [4] 아전의 또다른 말이다. [5] 육박전이 벌어지자 한희유는 맨 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쳤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손이 다쳐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적 수 명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