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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2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59년 6월 19일 |
충청도
해미현 서면 사기소리 (현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사성리 검드락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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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4년 5월 10일 (향년 74세) |
충청남도 서산군 | |
본관 | 전주 이씨[1]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455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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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59년 6월 19일 충청도 해미현 서면 사기소리(현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사성리 검드락골)의 양반가에서 광평대군의 14대손인 아버지 이택연(李宅淵, 1840. 9. 2. ~ ?)과 어머니 신 안동 김씨(1841 ~ 1882. 6. 12.) 김병귀(金炳龜, 1808 ~ ?)[2]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서산군 정미면(현 당진시 정미면) 산성리로 이주했다.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1888년( 고종 25) 충익위장(忠翊衛將: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1890년 군산진 수군첨절제사(群山鎭水軍僉節制使:종3품) 등을 거쳐 1892년 부호군(副護軍:종4품)에 제수되었다.
갑오개혁 후 1894년 내부에서 시행한 과시에 합격한 그는 1897년 자인군수(慈仁郡守)에 임명되었으나 1898년 12월 업무 평가에서 하(下)를 맞았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그리고 몇 달 지난 1899년 3월 징계가 해제되었다.
그 뒤 그는 귀향하였고, 1908년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해미군 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경술국치 후 1914년 4월 1일 초대 서산군 대호지면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사무소 심부름꾼 송재만은 대호지면 유지 남계원(南桂元) 등과 협의 하에 이인정의 직인을 사용해 도로보수를 위한 부역이란 명목으로 면사무소 광장에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이때 이인정은 400~500명의 면민 앞에서 "여러분은 도로수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모인 것이오. 각자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행진하시오."라고 연설하였다. 이후 그는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송재만 등이 마련한 태극기와 애국가를 군중에게 배포했다.
같은 날 정오, 그는 주민을 이끌고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한 뒤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엽총, 권총, 탄환 등을 획득했다. 이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 송재만 등이 확보한 총기와 탄약, 일본 경찰의 칼을 숨기라고 지시했다. 이에 송재만은 대호지면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적서리 덤불 숲속에 숨겼다.
얼마 뒤 한운석·송재만· 남상집· 남상직·이상락(李相洛)·장기환(張基煥) 등과 함께 체포된 이인정은 대호지면장에서 해임되었고, 1919년 10월 23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공문서 위조 행사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여 1919년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 중 이인정 본인에 대한 부분이 취소되어 공문서 위조 행사 혐의와 소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이끌어내어 다소 감형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그 뒤 상고하였지만 1920년 2월 7일 고등법원에서 위 혐의들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2월 24일 출옥한 그는 서산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4년 5월 10일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