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5:14:36

용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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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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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KBS 대하드라마|{{{#c5b356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 (1996~1998)
龍의 눈물 / Tears of the Dragon
파일:attachment/yngennml.jpg
<colbgcolor=#123010><colcolor=#c5b356> 시청 등급 파일:15세 이상 시청가 아이콘.svg 15세 이상 시청가
방송 시간 · / 21:45
방송 기간 1996년 11월 24일 ~ 1998년 5월 31일
방송 횟수 159부작[1]
장르 대하사극
제작 KBS 자체제작
채널 KBS 1TV
제작진 <colbgcolor=#123010><colcolor=#c5b356> 연출 김재형
극본 이환경[2]
음악 김동성
원작 박종화 저,
소설 《세종대왕》
출연 김무생, 유동근, 최명길, 김흥기, 김영란, 이민우
해설 김종성[3] 이강식[4]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영상3. 특징
3.1. 철저한 시대 재현과 탄탄한 스토리3.2. 화려한 캐스팅3.3. 배우 개그
4. 줄거리5. 등장인물6. 평가
6.1. 명장면6.2. 고증 오류
7. OST8. 여담
8.1. 드라마 관련8.2. 출연진 및 제작진 관련8.3. 그 외
9. KBS Drama Classic 연속 무료 스트리밍

[clearfix]

1. 개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방영한 17번째 KBS 대하드라마.

1996년 11월 24일부터 1998년 5월 31일까지 총 159부작으로 KBS 1TV에서 방송되었다. 주연은 이성계 역의 김무생, 이방원 역의 유동근, 원경왕후 역의 최명길이다. 내레이션은 성우 김종성 이강식. 이환경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대적 배경은 여말선초기 1388년~ 1422년(총 34년)이며, 공간적 배경은 송악, 한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지역이다.

2. 영상

<rowcolor=#c5b356> 메인 테마[5] 오프닝
<rowcolor=#c5b356> 요약

3. 특징

종영한지 30년 가까이 되어가는 옛날 드라마지만, 영화든 드라마든 여말선초 시기를 다룬 모든 작품들은 이 드라마와의 비교를 피할 수가 없다.[6] KBS 대하드라마의 위상을 공고히 세운 가히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의상 제작비에만 10억, 총 160억의 제작비가 투입되었고, 이 한 작품에 출연한 출연 인원은 총 7,950명, 엑스트라는 무려 5만여 명이 투입된 웬만한 영화보다도 큰 엄청난 규모의 스케일로 ' 블록버스터 사극의 효시'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7]

건국 초기 조선의 혼란과 다수의 정변을 다뤄서 정치 드라마로서도 흥미로웠지만[8], 콩가루 집안이었던 이성계 가족의 불행, 이성계와 5남 이방원 간의 반목과 불화, 화해, 그리고 아버지의 골머리를 썩인 태종 이방원 역시 장남[9] 양녕대군 때문에 한껏 고생하고 고뇌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등, 인간적인 드라마로서의 면모도 뛰어났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화질도 그렇고 배경 자체가 굉장히 어둡다는 거다. 첫방송인 1화 때부터 비가 오는 밤이었고, 그 뒤로도 정치극의 특징인 어두운 방 안에서 밀실정치를 나타내다 보니 세트장 안에 촛불 하나 정도의 얕은 불빛에 최소한의 조명만으로 연기를 하다 보니 오래 보다 보면 눈의 피로가 생긴다. 후속작 왕과 비 역시도 이런 어두운 조명 속에서 연기를 했으나 점점 시대가 바뀌면서 밝은 조명으로 촬영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처음으로 제대로 쓰인 사극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조선왕조실록은 1993년 처음 완역되었으나 엄청난 분량 탓에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5년 CD-ROM으로 조선왕조실록이 발매되면서 쉽게 필요한 부분을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게 되자 작가들은 필요한 부분을 검색해가며 관련 내용을 빠르게 살펴볼 수 있게 되면서 사극 작법에 혁명이 일어난다. 특히 이환경 작가는 이 조선왕조실록 CD-ROM을 적극 활용하여 집필했다. # 그러나 이야기의 재미, 그리고 당시 사극 특유의 방대한 분량이라는 점 때문에 야사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10], 정사 대신 베이스가 되었던 박종화의 세종대왕을 그대로 따라간 부분도 있다.[11]

3.1. 철저한 시대 재현과 탄탄한 스토리

파일:attachment/tearsofdragon.jpg

1~2회에 나오는 위화도 회군의 한 장면. 왼쪽부터 조민수[12], 이성계, 이지란(퉁두란).[13] 의상뿐 아니라 역사적 재현에도 충실했기에 요즘 나오는 어지간한 사극보다도 시대적 재현이 훌륭하다.

파일:external/image.munhwa.com/19970321240004011_b.jpg
잠저[14] 시절의 원경왕후.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저고리가 팔 끝까지 내려가 있다. 역시 조선 전기를 다뤘던 사극인 《 뿌리깊은 나무》, 《 공주의 남자》에서 조선 후기식 짧은 저고리를 입었던 것과 달리 확연히 비교된다.

왕자의 난 조사의의 난이 상당히 스펙터클하게 묘사되었다. 더군다나 의상면에서는 정말 여말선초의 복식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그 역사 반영성이 철저했다. 어찌나 충실하게 잘 되었는지, 이때 만든 의상 상당수가 드라마가 방영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고려시대 배경의 방송물에 계속 재활용된다. 또한 남자 복식의 경우 '요선 철릭'이라는 상의와 하의를 주름으로 연결한 옷을 처음 선보였는데 이때 선보인 옷이 나중에 가서야 실물로 발견된 요선철릭과 그 형태가 아주 유사해 그 위엄을 보였다. 또한 창들도 여러 특이한 모양의 창과 장군들이 차고 다니는 장검 등도 대체로 역사적 사실 반영이 잘된 편이다.[15] 환도 패용의 경우 잘못된 게 많긴 하지만, 103화 초반부에서 이숙번과 이성계가 만나는 부분에서 이숙번의 환도 패용을 보면 어설프게나마 칼집을 끈으로 허리에 매어 제한적이나마 재현하고 있다. 다만 이방원이 입고 있는 갑옷이 금속으로 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패딩에 쓰는 천 조각을 이어 갑옷 모양새를 낸 것이기 때문에 좀 모양새가 빠진다.

극에서 등장하는 건물들도 현재의 세트장 건물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스케일이 상당한데 사실 경복궁실제 궁궐 건물에서 촬영한 것이다. 당시 경복궁은 강녕전 교태전 권역을 복원하는 작업이 막 끝난 뒤였는데 마침 드라마에서 한양 천도를 이야기하던 중이었던지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조사의의 난 진압 이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를 하고 나서는 창덕궁이 주요 배경으로 나와야 고증에 맞지만 계속해서 경복궁만 등장하는게 옥의 티라면 옥의 티다. 사실 태종은 본인이 직접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장소이기도 해서 살아생전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16] 태종 치세에는 창덕궁이 왕실의 주요 궁궐로 활용되다 태종 사후 세종 때부터 다시 경복궁이 법궁으로 재활용된다.이러한 점은 문화재 보호 논란 때문에 극 초반의 중요한 장면만 찍고 그 다음에는 세트장이나 화성 행궁 등으로 이동하는 2000년대 이후 사극들과는 다른 점[17]

특히나 이런 류의 사극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 주인공의 행동을 상당수 미화하여 "구국의 결단"이라는 핑계를 대고 측근들에 의해 마지못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반해[18] 이 드라마에서의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 캐릭터는 별다른 미화 없이 자신의 야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그려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왕자의 난 때 세자 이방석을 죽일 때만 해도 그래도 동생이었던지 잠깐 생각하다가 곧 병사에게 눈짓을 보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방석을 끌어내 죽인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파일:attachment/lskjdj.jpg

위 사진은 이성계 역의 김무생, 아래 사진은 정도전 역의 김흥기 신덕왕후 역의 김영란이다.

또한 원작인 《세종대왕》[19]에서는 정도전이 완전 소인배로 묘사되어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기록 고증 등을 통해 조선 왕조의 주춧돌을 닦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조명해 낸 것도 매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죽음을 맞으며 마지막으로 읊는 시[20] 폭풍간지. 실록에선 정도전 이방원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나 이환경이 종영 후 스페셜 방송에서 "조선을 건국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며 그만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사람이 그렇게 비굴하게 죽었을 리 없다" 하면서 비장한 최후로 그렸다고 한다. 태조실록을 쓴 주체가 바로 이방원 세력임을 생각하면 사료의 교차검증의 올바른 사례다.[21] 또다른 교차검증으로는 태종 초기의 업적으로 잘 거론되는 신문고 설치에 대해서도 하륜 조영무가 북을 시험삼아 쳐 보는 장면도 나오지만 내레이션으로 신문고 제도의 한계도 같이 설명하며 장단점을 같이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에선 벗어난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는 1980년대 1990년대 초반의 사극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김재형 감독의 전작인 《 한명회》마저도 한명회를 상당한 먼치킨으로 그렸을 뿐더러 한명회와 수양대군 세력에 끝까지 반대한 사육신 김종서를 폄훼한 점이 많았다. 《용의 눈물》의 후속작인 《 왕과 비》도 이점에서 자유롭지 못해 수양대군을 턱없이 미화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용의 눈물》에서는 정도전의 재조명은 물론이거니와 카리스마있고 엄격하여 아들에게 화살을 겨누지만 결국 세월 앞에 정을 끊지 못한 태조 이성계, 아버지를 쫓아내다시피하여 권력을 얻었지만 인과응보 아들의 망나니짓에 속을 썩인 태종 이방원, 남편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외척 약화 정책으로 친정이 박살나서 기댈 곳이라고는 자식들밖에 없는 외로운 어머니 원경왕후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기록상의 모습에 인간적인 각색이 덧대여졌다.

야사에 나오는 소소한 일화들도 드라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도 특기할 점. 야사에만 나오고 실록에 기록이 없는 함흥차사와 실록의 조사의의 난을 적절히 믹스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것이 실패한 뒤 돌아온 태조가 아버지를 맞이하러 나온 태종을 처음엔 활로, 다음 연회석상에서는 철퇴로 차례로 죽이려고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는 일화도 생생하게 재구성하였다.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이른 "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일화도, 그리고 한양 천도 직전 이성계의 꿈에 태조 왕건이 나타나서 "네놈이 내 후손들을 죽였으니 너 역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일갈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들 역시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이렇듯 실록에 나와 있는 정사와 따로 민담으로 전해지던 야사, 그리고 여말선초의 여러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까지 고루고루 잘 버무려진 탄탄한 각본으로 크게 히트를 했다. 어떻게 보면 작가의 주관이나 지나친 역사왜곡이나 상상력을 개입시키지 않고 정사와 야사 모두를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아울렀던 진정한 사극(史劇)이었다.

이 사극이 다른 사극들과 차별화되는 점 중 하나는 근래 사극에서 조정 대신들이나 선비들이 모여서 정책논의 하지 않고 정치 암투나 모략을 꾸미는 장면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대신들이 정치모략을 꾸미는 것도 나오지만 제대로 정사를 논하는 국무 회의를 하는 장면이 굉장히 자주 나오는 편이다.

누군가를 제거하기 위한 탄핵과정도 신하들이 모여 논의한 다음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려서 처결하고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터지는 와중에도 인사조정, 구휼이나 서적간행, 명나라 사신행 등 정치, 행정, 외교 분야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최후반부 태종의 양위와 세종의 장인 심온이 사사당하는 등 숨가쁜 정국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태종과 세종이 최윤덕 등 중신들을 불러모아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모습이 세밀하고 심도있게 그려진다. 신하들이 일은 안하고 자객과 모략으로 정치하는 요즘 사극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덕분에 과거 왕조의 일상업무에 대해 나름 참고할 만한 사극인 셈이었다.

물론 시대적 배경이 새로운 나라를 세운 후 제도를 정비하고 개혁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묘사는 당연히 있어야 할 부분이거나 별거 아닌 부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왕정 시대에는 국가라는 하나의 조직이 어떻게 돌아갔고, 그 행정 기구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최소한의 개념도 안 잡혀 있는 요즘 사극들과는 달리 국정 운영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들이다. 《용의 눈물》 이후로 어전회의는 매우 심플해져서 왕이 결정을 내리면 신하들은 그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혹은 "통촉하여 주시옵서서" 일변도로 나가게 된다.[22]

그리고 극중에서 유명한 인물이 죽으면 실록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는 어디 사람으로 언제 과거에 급제했고 무슨 벼슬을 지냈으며 무슨 업적이 있었다. 어떤 점은 장점이었으나 어떠한 것이 흠이었다"란 식의 기록인 '졸기'처럼 그 사람의 일생을 주욱 설명해주는 내레이션까지 깔아준다. 이는 주연인 태조나 태종 부자는 물론이고 정도전이나 하륜, 조영무, 정도전 등 인상깊게 묘사된 신하들에서 권근, 조준, 이화, 배극렴 등처럼 비교적 비중이 낮은 조연에 이르까지 모두 마찬가지. 특히 마지막회의 마무리는 아예 태종 이방원의 훙기(薨記)[23]다. 마지막의 "태종이 한 일이 어찌 세종보다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란 내레이션과 함께 태종의 얼굴이 클로즈업[24]되며 엔딩이 되었다.

《용의 눈물》이 또한 이전의 다른 사극과 차별화되는 점은 진정한 정치사극이라는 점도 있고 주인공의 미화가 상대적으로 이전의 사극보다 덜한 점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정된 주인공을 제대로 설정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는 점이다. 이전의 신봉승이 주로 쓴 1980년대 사극은 일단 주연은 하나이나 점차 페이크 주인공화되며 진 주인공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서 일종의 군상극 형태를 취하면서 극이 지루해지고 통일감이 없어진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나 《용의 눈물》은 주인공인 이성계, 이방원 부자를 극의 축으로 삼으면서도 주변 인물들의 분량을 적절히 조합하면서 주인공과 엮이게 하는 등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면서도 기존의 사극 방식을 절충하여 연출력 역시 스토리라인에 뒤지지 않았다.

이 사극이 또한 히트하게 된 데에는 현실에서의 데자뷔도 크게 한몫을 했다. 극중 이성계 재위기간의 이방원의 왕권주의와 정도전의 신권주의가 당시 대통령 선거의 화두였던 김종필의 내각제 이슈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다만 한국 사극답게 주인공 투구 벗기기는 여전했는데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 혼자 투구를 벗고 출전하고 있다.

3.2. 화려한 캐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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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중심 인물인 태종 이방원 역의 유동근 원경왕후 역의 최명길.

출연진도 상당히 화려했다. 당시를 제대로 재현한 점과 탄탄한 스토리에 힘입어 출연진이 하나같이 소름끼치고 무서운 후덜덜한 연기를 보여준다. 모든 것을 얻었다가 모든 것을 잃어가며 고뇌하는 태조 이성계 역에는 작고한 원로 배우 김무생이,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일 정도로 무서운 철혈군주인 주인공 태종 이방원 역에는 유동근이 열연했다. 김무생과 유동근은 이 이후로도 여러 작품에서 재회한다. 어린이 드라마 《 누룽지 선생님과 감자 일곱 개》에서 유동근은 초등교사, 김무생은 마을 이장을 맡았다. 어깨동무라는 영화에서는 유동근이 다시 한번 김무생의 아들로 등장해서, 아버지에게 파리채로 얻어맞는 굴욕을 보여줬다. 김무생이 세상을 떠난 후 빈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가 유동근이었던 정도로, 이 드라마로 인하여 서로 잘 따르고 아껴주는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남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장부, 중전 원경왕후 민씨를 열연한 최명길은 후의 KBS 드라마 《 명성황후》에서 명성황후를 맡음으로써(이번에도 민씨[25]), 흥선대원군을 연기한 유동근과 악연을 이어나갔다.[26] 거기다 약 10년 뒤에 제작된 《 대왕 세종》에서도 같은 인물인 원경왕후로 나왔다. 원경왕후로는 최명길을 따라갈 연기자가 없을 듯하다. 최명길 본인도 《대왕 세종》에서 원경왕후로 캐스팅된 이후 " 원경왕후와 무슨 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며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최명길은 《용의 눈물》 촬영 중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극이 연장되면서 출산을 위해 끝까지 촬영을 함께 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반부의 주요 사건인 양녕대군 폐세자와 심온의 죽음까지도 보고 죽은 원경왕후를 중도하차시킬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최명길이 출연하는 장면의 30회분을 미리 찍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최명길의 연기 투혼도 대단하지만, 쪽대본으로 촬영하는 요즘 드라마 환경에서 돌아보면 여기에 맞춰 따로 대본을 준비한 이환경 작가도 대단하다. 그 후 최명길이 출산하자, 상궁 역으로 출연한 배우들이 "중전마마의 아기씨 순산을 경하드립니다. 상궁 일동"이라고 적힌 꽃바구니를 보냈다고 한다.[27]

한편, 냉정한 천재 재상 정도전 역에는 김흥기가 맡았으며 광기 넘치는 양녕대군을 훌륭하게 연기한 이민우[28]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김흥기는 개국에서도 정도전 역할을 맡았었는데, 단순히 정도전 역할을 많이 맡은 정도가 아니라 정도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전문가 수준으로 깊게 이해하고 있어서 후배 배우들로 하여금 역사 공부를 충실히 하고 역할에 임하는 모습의 모범이 되는 배우였다. 실제로 그는 1997년에 국민대학교 에서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한 특강까지 진행하였고 경희대학교에서도 '정도전 나도 할 말 있다' 라는 특강을 했다. 당시 신문기사, 당시 특강 내용

또한 충녕대군, 즉 세종대왕을 연기한 안재모, 이방번을 연기한 정태우, 나인 노씨[29]를 연기한 하지원, 이숙번의 부인 역을 맡은 송윤아[30], 세자 이방석의 세자빈으로 들어왔으나 내관이랑 간통하다가 목을 매고 자살한 폐세자빈 유씨 역의 이재은 등 유명 배우들의 신인 시절 연기도 지금보면 색다른 볼거리이며, 그 연기력도 매우 볼만하다.

이외에도 신덕왕후 강씨 역에는 김영란, 정종 역에는 태민영, 익안대군 이방의 역에는 최동준, 회안대군 이방간 역의 김주영, 남은 역에는 사망전대 이영후, 태종의 장인이자 원경왕후의 아버지로 부원군(국왕의 장인)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결국 아들들의 몰락을 병석에서 지켜보는 민제 역에는 송재호[31], 민제의 장남 민무구 역에 신동훈[32], 차남 민무질에는 나한일, 태종의 심복인 조영무 역에는 장항선[33][34], 하륜 역에 임혁, 이숙번 역에 선동혁, 양녕의 부인 김씨 역엔 안연홍, 원경왕후 옆을 지키는 중궁전 김 상궁 역에 김을동[35], 태종의 후궁들 중 효빈 김씨 역의 김혜리, 선빈 안씨 역의 이보희 등 알려진 배우들도 많이 나왔다. 이 밖에도 양녕의 궐 밖 친구와 조사의의 난 당시 여진 추장 중엔 구마적 이원종[36]도 있고 주인 정몽주를 따라 사지로 가는 줄 알면서도 충직하게 말을 몰다 함께 변을 당하는 하인 역에 이상인 등, 이 당시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선 많이 알려진 배우들도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사족으로, 유동근이 맡았던 태종 역은 이덕화가 한때 거론되기도 했지만 본인이 거절했었다고 한다.[37]

3.3. 배우 개그

의외로 이 사극도 배우개그적 요소가 충만한 드라마다. 특히 방영 당시보다 10여 년 더 일찍 방송한 적이 있던 《 조선왕조 5백년》과 《 개국》의 배우들이 상당수 나와 다른 역할을 맡았고 일부는 아예 똑같은 역할을 다시 도맡았다. 일단 주인공인 태조 이성계 역을 맡은 김무생은 《조선왕조 5백년》에 이어 다시 이성계 역을 맡아 아들을 향한 극한의 분노를 보여주었다. 신덕왕후 강씨 역의 김영란도 《조선왕조 5백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신덕왕후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원경왕후 민씨를 연기하였다. 동생에게 완전히 털리던 이방간 역의 김주영 역시 이전에 《조선왕조 5백년》에서 같은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또한 《조선왕조 5백년》에서 나약하지만 이방원과의 우애가 좋았던 정종 이방과 역의 이영후는 이 드라마에서는 이방원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은 남은을 맡다가 끔살당했다. 《개국》에서 공민왕 역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임혁 하륜 역을 맡아 고려를 끝장내는 데에 공헌하였고 역시 《개국》에서 정몽주 역을 맡은 송재호는 이번엔 이방원의 장인 민제 역을 맡아 사위의 정몽주 암살에도 깊게 관여했다. 송재호는 후속작인 《 왕과 비》에서는 아예 태종의 외척 제거의 최대 수혜자이자 민제의 외손자 세종대왕 역까지 맡는다.

한 가지 우연인 건 이민우와 유동근은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에 연산군 연기를 한 적이 있으며, 안재모와 정태우는 이 드라마 종영 후에 연산군 연기를 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민우의 경우 이 드라마 방영 2년전인 1994년에 KBS 드라마 《 한명회》에 출연하여 연산군 역할을 맡았으며, 드라마 주인공인 유동근 역시 한명회의 후속작인 《 장녹수》에서 연산군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안재모는 이 드라마의 후속작인 왕과 비에서, 정태우는 왕과 나에서 연산군 역을 맡게 된다. 즉, 이 드라마는 연산군이 4명이나 등장한 셈이다.[38]

한편 양녕대군과 함께 놀던 거러지 임금을 맡은 이원종은 《 대왕 세종》에서는 세종대왕의 측근인 윤회 역을 맡아 충녕대군 시절부터 그를 왕재감으로 지지한다.

그리고 2014년 드라마 《 정도전》은 아예 제작진이 작정했는지 한술 더 뜬다. PD가 용의 눈물 당시 연출부 막내였던 그 강병택 PD인 것을 시작으로 해서 여기서 이방원을 연기한 유동근은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을 맡았고 세종대왕을 연기한 안재모는 이방원 역, 이숙번을 연기한 선동혁 이지란 역, 이방원에게 패배하는 회안대군을 연기한 김주영은 여기서는 이성계에게 밀려나는 조민수 역을 맡는다. 그리고 《 용의 눈물》에 등장했던 배우가 10여년 후 똑같은 역으로 《정도전》에서 등장하게되는 유일한 경우도 생겼는데 박병호가 다시 한 번 무학대사 역을 맡았다. 거기에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은 아예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와 함께 회군했던 조민수의 후손이다. 그 외 정도전에서 조준을 연기한 전현은 <용의 눈물> 조사의의 난 부분에서 단역으로 등장했다.[39] 이성계 악몽의 태조 왕건과 방간의 아들 이맹종으로 1인 2역 출연한 김경응은 정도전에서는 김저를 맡아 유동근에 반항하다가 실패하는 역할을 이어갔다.

여기에 최명길이 이성계의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로 출연했더라면 그야말로 용의 눈물 시즌 2가 되었을 테지만, 여기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의왕후 자체가 극에서 언급만 될 뿐 직접 등장하는 장면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전 46회에선 이숙번이 이지란과 대면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지란이 ' 이숙번?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라며 대놓고 배우 개그를 했다.

이후 《 태종 이방원》에서는 이숙번을 연기한 선동혁이 정도전에 이어서 또다시 이지란 역으로 출연했고, 용의 눈물에서 무안대군 이방번을 연기한 정태우가 이숙번으로 분했으며, 이 작품에서 흥안군 이제가 심효생으로 등장했는데 함께 세트로 죽던때와는 반대로 여기서는 직접 찔러죽인다.

4. 줄거리

원작은 박종화의 소설 《 세종대왕》이지만, 극중 세종[40]의 비중은 거의 없고,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시작된 조선 개국부터 태종 이방원의 사망까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이성계 이방원이 주인공인 작품이다.[41] 처음에는 100부작으로 위화도 회군부터 조사의의 난까지 다룰 계획이어서 이성계와 이방원의 비중이 비슷하게 설정되어 기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반에는 시청률이 저조하다가 이방원의 비중이 올라가면서 시청률도 급상승하자 무려 59회나 연장하여 태종의 생애를 전부 다루게 되면서 결국에는 태종의, 태종에 의한, 태종을 위한 드라마가 되었다.

이에 대해 메인 시나리오가 용비어천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목도 '용'의 눈물이고. 좀 더 정확하게 파고들면 <용의 눈물>은 조사의의 난까지 다루려 했던 초기 기획을 감안하면 신덕왕후, 정도전, 이방석 등을 떠나 보낸 이성계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제목이다. 이방원의 진주인공화와 연장 이후로 따져도 이성계와 화해할 때나 승하했을 때, 양녕의 폐세자 때의 울음이나 마지막에 지난 날을 참회하며 비를 기원한 '태종우' 등 이방원의 일생과 심경도 상징한다.

1화부터 159화까지 다루는 시대는 고려 우왕 말기이자, 이성계, 조민수의 주도로 이루어진 1388년(우왕 14년) 위화도 회군부터 태종 이방원이 숨을 거두는 1422년(세종 4년)까지 만 34년의 기간이다. 역사의 시간에서 34년은 짧디 짧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무인정사, 조사의의 난, 민씨 4형제의 죽음. 세자 양위파동. 사병혁파. 호패법 제정 등 굵직한 사건이 모두 일어났으며, 이를 세세하게 다뤘다. 극중 나레이션의 인물소개 하나하나가 조선 건국의 파란만장한 면모를 보여줄 만큼 나직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음성으로 다뤄 극의 몰입에 크게 이바지를 했다.

원래 <용의 눈물>은 100부작으로 기획되었고, 사건도 위화도 회군에서 조사의의 난까지만 다루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시청률이 저조하여 SBS의 사극 《 임꺽정》에 밀리고 있었으나,[42] 《임꺽정》의 종영 이후, 시청률이 올라가고 대박을 치면서 KBS가 이례적으로 59부작의 분량을 연장하면서, 양녕대군의 비행과 태종의 죽음까지 다루게 되었다.[43] 오히려 시청자들이 PC통신 등으로 <용의 눈물>의 연장을 바랐다고 하니, 요즘 드라마가 조금만 시청률이 높아져도 윗선이나 제작진에서 임의로 연장하는 것과는 다른 이례적인 사례였다.

한 때 연장해서 세종 재위기 전체를 다룬다는 보도도 있었다. # 실제로 이렇게 했다면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을 원작으로 한 것에 부합한 방향이 되었겠지만,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이방원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아마도 링크된 기사에 나온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나, 세종 재위기가 사극으로 재미있게 다루기는 힘들다는 점이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는 훗날 대왕 세종으로 다뤄졌으나, 이 작품에 비하면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이다.[44]

2014년에 방영된 정도전이 비슷한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다 밑에 보다시피 겹치는 배우들이 여럿 되는지라 종종 같이 언급되기도 한다.

5.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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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

"천하의 대작이고, 대단히 좋은 작품입니다." - 박동진
"<용의 눈물> 한 편이 무수한 학자들이 상당한 기간을 걸쳐 한 그 이상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 신명호 ( 정신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저도 그 시대를 다뤄봤습니다[45]만은, 굉장히 제작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것을 그야말로 나이가 많이 드신 김재형 연출자께서 열과 성을 다해서 아주 빛나게 재현해 내신 그 연출솜씨, 그 연출의 열정!" - 이병훈 ( MBC 드라마 제작위원)[46]
"김재형 PD라는 위대한 PD와 함께 위대한 촬영감독 위대한 스탭들이 전부 동일하게 했기 때문에, 이것은 김재형의 승리만이 아니라 <용의 눈물> 스탭진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 임웅균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한국 사극 역사상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작품. 종영한 지 20년도 넘게 지난 작품이지만 영화든 어떤 방송사에서 나오는 드라마든 간에 여말선초 시기를 다룬 모든 작품은 꼭 이 드라마와의 비교가 되는 게 일상이다.[47][48] KBS 대하드라마의 위상을 공고히 세운 가히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당시까지 KBS 정통 사극을 넘어 시청률 관측 이래 사극으로서는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며,[49] 당시 사극은 KBS가 잘 만든다는 인식을 심어준 작품이다. 이 작품 이전에 KBS 사극은 조선왕조 500년을 완성한 MBC의 그늘에 놓여 있었다. 사극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사극 중에서도 1위를 가장 많이 차지한 사극.

6.1. 명장면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들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1회 59분~64분대, 2회 1분~2분대[50]. 위화도에서 회군한 태조가 궁궐로 들어서자 최영이 궁문을 닫고 태조와 조민수와 홀로 마주한다. 자신에게 아버지뻘이자 평생 존경하던 최영을 제거해야 하는 태조의 고뇌와 최영의 카리스마를 볼 수 있다[51].
  • 7회 41분~43분대.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하여가를 읊고 정몽주가 단심가로 화답한다. 다른 별다른 말 없이 서로 시조를 읊는데, 깔끔하고 비장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또 같은 7회의 46분~48분대에서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는다. 정몽주의 비장함과 충심을 볼 수 있다.
  • 12회 32분~38분대. 정안군이 태조의 명에 따라 조상들에게 묘호와 시호를 올리고 제례를 올리러 함흥으로 간 사이, 태조는 막내아들인 의안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이에 분개한 정안군은 즉시 개경으로 올라와, 태조와 신덕왕후 앞에서 세자 책봉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 25회 45분~47분대. 신덕왕후가 정안군을 제외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불러다 주안상을 벌이는데, 사냥을 나갔다 돌아온 정안군이 진짜 노루를 등에 짊어지고 들어와 신덕왕후 앞에 냅다 내려놓으면서 "여색에 빠져 몸져 누운 아버지에게 고아 먹이라"라고 일갈한다. 실제로 제작진은 신덕왕후 역의 김영란이 최대한 리얼하게 놀라는 장면을 찍기 위해 정안군 역의 유동근이 시체나 박제도 아니고 잠시 마취되었을 뿐인 노루를 짊어지고 온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동근은 그 노루를 짊어지고 궁 입구에서부터 방까지 낑낑거렸으며, 유동근이 내던진 게 뭔지를 본 김영란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서 자지러졌다. 이 장면 촬영이 끝나고 엄청 놀란 김영란이 펑펑 울었고 유동근이 커피를 타 주며 달랬다는 후문이 있다.
  • 32회 7분~15분대.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정안군의 사병까지 몰수하려 하자 정안군은 정도전의 집을 찾아가고, 두 사람은 왕권과 신권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다. 정안군은 조선은 전주 이씨의 나라이지 봉화 정씨의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정도전은 전주 이씨도 봉화 정씨도 아니고 백성들의 나라라고 반박한다. 두 배우의 카리스마가 폭발한다.
  • 39회 34분~39분대. 정도전과 조준이 왕권과 신권에 관해 논쟁한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있으면 그만이고 정치는 재상을 비롯해 유능한 중신들이 하면 된다는 정도전의 사상에 대해, 조준은 그러다가는 권력 다툼이 일어나고 파벌이 생기며 지금도 정도전을 중심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느냐고 일갈한다. 상술했듯이 본작은 이전까지는 간신 정도로 취급되었던 정도전을 재조명한 것에서도 의의가 있는데, 그러면서도 마냥 띄워주기만 하지 않고 조준의 입을 빌려 문제점도 지적한 것은 탁월한 부분이었다.
  • 41회 45분~48분대. 신덕왕후는 정안군 세력과의 갈등이 계속됨에 따라 병에 걸리고, 점점 더 심해진다. 이것이 중병으로 발전하여 이윽고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정도전이 병문안 차 인사를 오는데, 신덕왕후는 정도전에게 자신이 없더라도 세자를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 이윽고 '방원이를 죽여 주십시오!' 라며 한 맺힌 오열을 한다. 이 장면은 신덕왕후를 연기한 배우 김영란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해 생중계된 KBS 신인연기자 공채에서 지겹게 우려먹혔다.
  • 52회 42분~49분대, 53회 1분~6분대. 제 1차 왕자의 난 도중 경복궁을 장악한 정안군은 정도전의 행방을 찾다가 송현방에 위치한 남은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직접 송현방으로 향해 남은과 심효생을 제거한 후 함께 있던 정도전을 설득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를 거부하고 자조(自嘲)[52]를 남기고 최후를 맞는다. 덧붙여 이 장면은 유독 NG가 많이 났었다는 후일담이 있는데, 정도전을 맡은 김흥기의 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어딘가에서 염소가 울거나 비행기가 지나가며 소리를 내거나 어디에서 파리가 날아들거나 하는 등 외부적인 문제들 때문이었으며 김흥기 자신도 답답하고 짜증이 난 나머지 "저 염소 X끼!" 라거나 사극체 그대로 "비행기가 떴구나..." 하는 식으로 드립을 치기도 했다.
  • 53회 6분~12분대. 정도전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한 태조가 "방원이 그 놈이!" 라고 호통친다. 앞뒤 상황을 보면 분명히 굴욕적인 장면임에도 제왕의 포스가 느껴진다. 이후 정안군 세력이 세자를 끌고 가는 것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던 24분~27분대, 무안군과 부마 이제마저 보내야 했던 29분~31분대, 도승지로부터 이들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놈들 마음대로 세자 자리도 이 옥좌도 다 가져가라 하라...!" 라고 한탄하는 40분~42분대도 태조를 맡은 김무생의 명연기가 돋보인다.
  • 56회 49분~56분대. 1차 왕자의 난으로 혈육들을 잃은 태조와 경순공주는 무학대사가 머물고 있던 흥천사를 찾는다. 이 때 경순공주는 절에 머무니 마음이 편하기도 하거니와 비구니가 되어 형제들과 남편을 비롯해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싶다는 이유로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하며, 태조가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뜻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경순공주를 무척이나 아꼈던 태조는 그녀가 비구니가 되는 날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잘라 주며 눈물을 흘린다. 덧붙여 경순공주를 연기한 배우 김나우는 불교 신자며, 이 장면에서 실제로 삭발했다. 태조가 머리를 간단히 정리하고 승려가 경순공주의 머리를 삭발하는 장면에서 잘린 머리카락이 화면에 비치는데, 이것은 김나우 자신의 머리였다. 56회의 맨 마지막 부분에 자막이 나오듯이 이 장면은 전남 순천시 조계산 선암사에서 촬영했으며, 절의 승려들이 직접 출연했다.
  • 57회 28분~37분대. 정안군에게 환멸을 느낀 태조는 새로 세자가 된 영안군에게 보위를 물려주려 한다. 정안군은 "이것은 아바마마께서 당신의 불만과 진노를 그대로 드러내시려는 것" 이라고 파악하고, 이를 만류하기 위해 태조를 알현한다. 이것은 1차 왕자의 난 이후 처음으로 부자간에 마주한 것이었으나, 당시 태조는 경순공주의 출가 의식에서 돌아온 직후라 정안군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결국 태조는 정안군의 머리에 벼루를 집어던지고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자 어검을 찾으며, 정안군부인 민씨가 정안군을 부축하며 나간다. 분노가 극에 다다른 태조와 피를 흘리고 군부인에게 부축당해 나가면서도 부왕에게 용서를 구하는 정안군의 포스 둘 다 후덜덜하다. 이 부분은 사극 정도전에서도 오마주되었는데, 정몽주가 정안군의 수하에게 제거된 이후로 앞당겨졌으나 정안군이 맞은 위치나 피를 흘리는 묘사, 태조가 검으로 정안군을 베려고 하는 모습 등은 깨알같이 모사되었다.
  • 74회 6분~8분대. 회안군은 2차 왕자의 난에서 참패하고, 정안군에 의해 가택에 연금되는 신세가 된다. 한편 정종은 동생의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 정안왕후를 정안군의 집에 보내고, 자신은 회안군의 집에 행차하여 회안군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정종은 회안군에게 구명을 요청하라고 설득하나, 회안군은 형인 자신이 동생인 정안군에게 목숨 구걸을 할 수는 없다고 버틴다. 결국 정종은 울부짖으며 "방간아! 그 놈의 전하 소리 좀 집어치우게! 지금 난 네 형으로서 이 자리에 온 게야! 어떻게든 형제간의 참극을 피해 보고자 이 자리에 온 게야! 방간아, 이 형의 간절한 소원이다. 빌어라, 빌어! 차마 네가 죽는 것을 어찌 볼 수 있단 말이냐!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실 어머님을 생각해 봐 방간아!" 라고 설득한다. 말 그대로 큰형님의 고뇌[53]가 느껴지는 대목이었으며 회안군도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설득하는 형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결국 마음을 바꾼다.
  • 77회 43분~48분대. 세자가 된 정안군은 사병 혁파에 반발하는 자신의 측근들을 유배 보내고, 불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처남인 민무질과 함께 술을 마신다. 그리고 크게 취한 민무질은 정안군의 측근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들을 자신들에게 달라는 실언을 하는데, 이에 격분한 정안군은 한 손으로 술상을 쓸어 버리고는 권력 앞에서는 형제끼리 죽고 죽이고 가까운 동지들마저 헌신짝 버리듯이 버릴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처남들이겠느냐며 꿈 깨라고 경고한다. 이 장면의 포인트는 술상을 쓸어버린 다음인데, 정안군을 연기한 배우 유동근이 이 과정에서 실제로 손을 크게 베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대로 연기를 이어갔기 때문이며, 실제로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화면에 그냥 보이고, 유동근이 자신이 얼마나 다친 건지 은근슬쩍 확인하는 것 같은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유동근의 연기력도 연기력이거니와, 부상을 당했음에도 태연하게 연기를 이어가는 모습이 빛난 장면이었다.
  • 81회 50분~60분대. 정안군은 드디어 즉위식을 치르고 태종으로 즉위한다. 본작에서는 태조와 정종, 태종, 세종까지 즉위식 장면이 네 번 나오는데, 그 중에 태종의 즉위식이 절차와 과정이 가장 상세하게 묘사되었으며 제일 웅장하고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특히 이 장면의 백미는 태종이 옥새를 받고 수창궁까지 나아가면서 그 동안 겪은 고난과 자신의 행적들을 회상하는 대목이었다. 이 바로 앞인 49분~50분대에서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가 분개하며 한탄하는 장면도 볼 만 하다.
  • 106화 55분~59분대, 107화 1분~17분대.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이후, 태조는 마지막으로 태종을 직접 제거하려 한다. 그는 태종과 마주하자 우선 활을 쏘나, 태종이 미리 일부러 굵게 만들어 놓은 기둥 뒤에 숨는 바람에 맞히지 못한다. 이에 옥새를 내어주어 안심시킨 뒤, 주안상이 차려진 자리에서 품 안에 숨겨두고 있던 작은 철퇴를 꺼내 휘두르려 한다. 그러나 태조의 의도를 간파한 하륜이 태조에게 다가가려는 태종을 막아서자 좌절감을 이기지 못한 태조가 철퇴로 술상을 때려부순 뒤[54] "천운이로고"라 탄식하며 태종에게 술을 받고 뒤이어 술을 따라준다. 초기의 기획으로는 이것이 마지막 장면이 될 예정이었지만, 열렬한 인기 때문에 한참을 더 연장하게 되었다. 애초에 피날레로 기획한 장면이라서 그런지 배우들의 미친 듯한 열연이 돋보이며, 바로 아래의 114회 장면이 아니었다면 이 드라마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 114화 21분~30분대. 한양 천도 이후, 양주에서 머물던 태조는 훗날 양녕대군이 되는 세자의 가례를 계기로 궁으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태조와 만난 태종은 부왕에게 잠시 안마를 해 주다가 그가 노쇠했음을 새삼 실감하고[55], 어떻게든 그의 무료함을 풀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 임금의 신분으로 몸소 춤을 추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태종과 얽힌 모든 악연과 미움을 주마등처럼 되새김질한 태조는 마침내 태종에 대한 악감정을 온전히 털어 버리며, 피도 눈물도 없었을 터인 철혈 군주 태종은 태조가 용서를 암시하는 말을 건네자마자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면서 무너져 내린다. 수많은 명장면 중에서도 이 장면이 최고로 꼽히는데, 태조 역의 김무생은 드라마 종영 후의 특집방송에서 이 장면을 찍을 때 '역시 피라는 것은 사상이니 뭐니 하는 것을 다 떠나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다고 술회했으며[56] 태조가 태종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방원이 이성계의 안 좋은 점을 가장 닮은 아들이었기 때문' 이었던 것 같다고 배역에 대해 해석하기도 했다. 태종을 연기한 유동근은 김무생에게 안기는 순간 정말 아버지를 만난 것 같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또 원경왕후를 맡은 최명길은 산전수전 다 겪은 중견 연기자임에도 이때 두 사람의 연기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눈물 조절 실패했다.[57] 한풀이와 용서라는 정서를 전통 가락과 춤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명장면이다.
  • 127화 2분~8분대. 태조가 마침내 승하하고, 상복을 입은 태종은 빈 용상을 바라보며 태조와 겪었던 여러 갈등들과 자신이 춤을 추며 이를 해소하는 순간을 회상하다 주저앉고 급기야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 라며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한다. 드라마를 주욱 보면서 태조와 태종의 애증어린 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시청자들로서는 전율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 135화 49분~59분대. 경회루가 완공되었으나 아직 현판이 달리지 않은 상황에서, 도승지 김여지는 태종에게 세자의 글씨가 뛰어나니 현판을 맡기자는 것이 신하들의 생각이라고 고한다. 세자가 비행을 일삼는 통에 마음 고생을 하고 있던 태종은 반신반의하면서 세자를 불러 글씨를 써 보라고 명하고, 그가 명필을 선보이자 국왕으로서의 체통도 내려놓고 기뻐하며 칭찬한다. 아래의 139화 장면과 함께,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군주인 동시에 아들바보였던 태종의 면모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묘사된 장면이었다.
  • 139화 1분~9분대, 12분~18분대. 세자가 비행을 계속하는 가운데, 태종은 그를 불러다 엄하게 꾸짖는다. 하지만 세자는 잘못을 빌기는커녕 부왕의 면전에서 조선의 역사를 힘으로 누르고 폭군처럼 피로써 이루어놓은 역사라며 '진정 위대한 것은 덕치가 아니겠느냐' 고 치열하게 비판한다. 이에 태종은 출중한 왕재(王材)를 지니고 있음에도[58] 계속하여 방황하는 세자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은 채 눈물, 콧물을 흘리며 제발 정신을 차려 달라고, 왜 이 아비의 마음을 몰라주냐고 빌다시피 부탁한다. 이 무렵의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제거하고 원경왕후의 실권을 빼앗는 것을 비롯해 태조실록을 편찬하는 일을 주도하는 하륜에게 곡필을 하라는 압력을 넣고 하고 싶은 말은 시원하게 하는 성격인 이숙번[59]도 긴장하게 만드는 등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군왕으로서의 포스를 내뿜는 장면들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또 이렇듯 부정(父情)이 넘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준 것은 그야말로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 147화 14분~24분대. 태종의 가장 충성스러운 왼팔이었던 하륜은 《 고려사》를 개수하다가 자신의 목숨이 다했음을 알고 "인생무상 제행무상(人生無常 諸行無常)" 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쓰러진다. 하륜을 연기한 임혁은 여러 사극에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인 배우인데, 이 장면에서의 모습은 그가 지금까지 맡아 온 여러 역할의 수많은 장면들 중에서도 포스가 넘치기로 몇 손가락 안에 들 만 하다.
  • 147화 24분~38분대, 39~40분대, 148화 1분~7분대. 하륜과 함께 태종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이 왕권 강화를 위해 조용히 제거된다. 이숙번은 태종으로부터 '세자가 자네를 잘 다룰 수 없을 거 같다'며 따라주는 마지막 술잔을 받고, 충성과 원망, 허탈함이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귀양길에 오른다.
  • 151화 33분~41분대. 세자가 올린 편지의 내용을 되새겨 본 태종은 마침내 세자를 폐해 양녕대군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내리고, 명령을 받든 도승지가 나가자마자 대성통곡한다. 도승지에게 세자를 폐한다는 명을 내리면서 국왕으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애써 참다가 혼자 남게 되자 통곡하는 것이 핵심 포인트로, 태종의 부정과 고뇌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 155화 51분~분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은 태종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집안을 박살내려 하고, 이에 세종은 태종에게 장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대해 태종은 모든 악업은 자신이 질 것이라며 꾸중을 내린다. 실제로는 왕의 부모라 해도 왕에게 존대를 해야 했기 때문에 태종은 처음에는 세종에게 주상께서 어찌 눈물을 보이시냐고 점잖게 존댓말로 나무라지만, 세종이 계속 빌자 "주상 울음을 그치지 못하겠소? 내 말하지 않았소! 임금은 눈물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고!"라고 반말로 불호령을 내린다. 왕조차 혼나는 어린애에 불과하게 보일 정도로 엄청난 카리스마.
  • 158화 60분~72분대. 남편을 왕으로 만들었다는 죄로 4명의 남동생이 모조리 횡사하고 친정이 산산조각이 난 원경왕후는 속병을 얻는다. 이에 그녀는 태종이 상왕이 된 후 요양차 궁에서 나와 사가(私家)를 떠돌다 죽음을 맞이한다. 태종은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야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모두가 왕실을 위한 것이었노라고 변명하면서 용서를 빈다. 원경왕후는 태종을 용서한다는 유언을 남기며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이 두 사람을 조명하는 가운데 태종이 숨죽여 운다.
  • 159화 45분~68분대. 세종의 치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극심한 가뭄이 들고, 이에 태종은 등창이 퍼져 죽어 가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기우제[60]를 지내면서 그동안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뇌들을 피를 토하듯 고백한다. 마침내 비가 내리고, 태종은 세종에게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갈 테니 부디 성군이 되어라"는 당부를 남기고 마지막 순간에 양녕대군과 태조를 그리며 눈을 감는다. 이후 이 작품의 주인공인 태종의 일대기가 정리되는 것을 끝으로, 장장 159회 대단원의 막이 내려진다.

이 외에도 명장면은 수없이 많지만,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한 마디로 대작(大作)였다. 또한 의외로 개그신도 있었다. 그것도 제작진들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웃음을 유발하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
  • 60회 36분~40분대. 정종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의 생일이 다가오자, 정안군부인이 태조가 좋아하는 약식을 손수 장만해서 알현한다. 하지만 태조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정안군에 대한 분노가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고, 배꼽 정도 높이로 정안군부인이 손에 든 약식을 높이차기로 걷어차 버린다. 그리고 포인트는 이 다음인데, 하늘 높이 붕 뜬 찬합이 나뒹굴지도 않고 그대로 바닥에 착지한다. 지금은 저작권 문제로 삭제되었으나 한 때 유튜브에 이 장면만 잘라낸 영상이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그 영상의 제목이 "동양무술의 정수를 보이는 이성계" 였다.
  • 74회 39분~40분대. 2차 왕자의 난에서 패한 박포는 결국 참수형을 당하는데, 이 때 망나니 역을 맡은 문창근이 박포 역의 서영진의 얼굴에 막걸리를 뿜는 장면이 있다. 문제는 막걸리를 너무 많이 뿜었다는 것. 이 때문에 서영진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연기해야 했으며, 장면을 자세히 보면 입꼬리가 떨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대목에서 박포는 의연하게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 더욱 웃음을 유발한다. 후에 코미디빅리그에서 개국공신이라는 코너로 패러디했다.
  • 97회 45분~50분대. 태조는 함흥에서 조사의를 앞세워 태종을 칠 군사를 모으고, 이에 조정에서는 박순의 뒤를 이은 함흥차사로 누구를 보낼지를 의논한다. 이때 조영무는 '우리는 전하(태종)의 신하[61]이니 가면 죽을 텐데, 그럼 누가 가야겠소...?' 라며 동석한 관료들을 주욱 훑어보다가 성석린에게 시선을 고정하는데, 그러자 다른 관료들도 일제히 그를 바라본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성석린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하지만, 성 대감은 태상왕 전하께 미움 받을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적임자라는 조영무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62]. 조영무는 물론 이 과정에서 크게 당황하는 성 대감의 표정도 볼 거리.[63]
  • 119회 1분~5분대. 태종은 민씨 형제들을 제거하기 위해 양위 소동을 일으키고, 대신들은 이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태종은 급기야 옥새를 가져와서는 도승지 황희에게 이것을 세자(훗날의 양녕대군)에게 전하라고 명하는데, 백미는 이 다음. 황희가 옥새를 받으려 하자 조영무가 밀치고, 그를 다시 태종이 밀어내고 한 손으로는 럭비 공 끼듯이 옥새를 끼고 다른 손으로는 황희를 질질 끌다시피 데려다가 편전에서 내보낸다. 분명 심각한 장면인데도 연출된 분위기는 몸개그에 가깝다. 태종이 점잖게 이야기하다가 중신들이 말을 안 듣자 "비켜!"라고 반말로 소리치며 밀쳐내고, 궁녀들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확 열어서 황희를 내보내는 장면도 볼 거리다.
  • 138회 26분~34분대. 조영무는 하륜, 이직 등과 함께 기방에 들렀다가 기방 어미의 자매라는 여자에게 한 눈에 반하고, 결국 관계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대전 궁녀임이 드러나고, 조영무는 경황 중임에도 이 궁녀를 아예 자신의 집에까지 데려가서 첩실로 삼아 버린다. 이 문제로 사헌부와 사간원이 뒤집어지고[64], 얼마 뒤 태종은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경계령을 해제하면서 조영무 등 삼정승을 따로 부른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태조실록 편찬을 주도하고 있던 하륜에게 곡필을 지시하고, 궁녀를 데려다 첩실로 삼은 조영무를 꾸짖는다. 포인트는 이 다음으로, 태종은 조영무에게 "그게 정승이 할 짓이냐, 그 궁녀도 참형으로 다스려야겠다"며 호되게 혼내며 "지금이라도 돌려보내라"고 한다. 그러자 태종의 호통에 쩔쩔매던 조영무는 그 와중에도 안면을 몰수하고 "내놓지 못하겠사옵니다. 살펴 주시옵소서!"라고 대응한다. 태종은 어이를 상실하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봐주겠다"며 "할 말 없으면 그저 '망극하옵니다'만 나오네"라고 투덜거리며, 눈 감고 넘어가기로 한다. 앞선 다른 개그 신들과 달리 이 장면만은 제작진 측에서 코믹하게 의도했을 가능성이 다분한데, 조영무 자신이 사병 혁파에 뒤따른 유배 이후로는 상당히 푼수스러운 인물로 변하는지라 그가 나온 장면 중에 개그 신이 많았다[65]. 이 장면은 작가의 창작이 아니라 실록의 내용을 변형한 것이기도 한데, 조영무가 첩실로 삼은 사람은 현직이 아니라 전직 궁녀였다는 것, 안면 몰수가 아니라 바짝 엎드려서 용서를 구했지만 태종이 불문에 붙여주었다는 것 등이 조금 다르다. 바로 다음 화인 139화 27분~33분대에서는 조정 회의 중에 유정현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데, 조영무가 태종에게 용서를 받은 사항이라며 용서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안면몰수하고 이 모습에 어이를 상실한 유정현이 입을 닫고 마는 장면도 볼 만 하다.

6.2. 고증 오류

분명 작품 자체는 엄청난 대작이지만 사실과 다른 부분 또한 여러 부분 있다. 작품 자체가 정사를 뼈대로 야사와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태종연의이기 때문이다. 《 삼국지연의》가 그렇듯, '7할의 사실, 3할의 허구' 정도로 보는 게 바람직하다.
  • 본작에서 고려 왕조는 전반적으로 유약하고 노쇠한 모습으로 단순화되어 묘사된다. 그저 최영 정몽주에게만 의지할 뿐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왕조 스스로도 저항을 시도했지만 본작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극이 시작하는 시점이 위화도 회군인데, 이 무렵 이성계 일파의 세력은 이미 커진 상황[66] 이었고 마지막 저항만 제압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실질적인 주인공인 이방원의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고려의 이야기는 배경 설명 정도로 충분하기는 하다.
    그러다 보니, 우왕과 그 가족들에 대한 묘사도 허술한 편이다. 먼저 우왕의 어머니로 나오는 정비 안씨(안대비)가 지나치게 늙게 나오는데, 정비 안씨는 자세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으나 1366년에 공민왕의 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당시 15세 전후였던 혼인 적령기를 고려하면 위화도 회군 당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40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안대비 역을 맡은 한은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미 극단 생활로 잔뼈가 굵었던 1918년생의 원로 영화배우로, 1997년 당시 이미 80세였다. 어째서 나이가 맞지 않는 노배우가 캐스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망해가는 왕조의 마지막 주춧돌의 이미지와 대궐에서 쫓겨나면서 신덕왕후에게 저주를 퍼붓는 장면은 극적인 효과의 측면에서 보자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우왕의 부인은 최영의 서녀인 영비 최씨만이 등장하며, 영비가 마치 우왕의 유일한 비이자 창왕의 생모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우왕의 정비이자 창왕의 생모는 근비 이씨이며, 근비는 본 작품에서는 생략된다. 그 외에도 우왕에게는 근비와 영비를 제외하고도 10명의 부인이 더 있었다. 사실상 극적인 연출에 필요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모두 생략된 것. 이러한 부분들은 2014년 정도전의 고증이 더 정확하다.
  • 개국 초 이방원이 정도전에 의해 수세에 몰리자 권근을 자기 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 이방원과 민씨 부인의 수양딸이 권근의 아들과 결혼하여 사돈이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권근의 아들과 결혼한 것은 이방원과 민씨의 친딸(3녀 경안공주)이다. 극에서는 양녕대군이 이방원과 민씨가 결혼 후 10년만에 어렵게 가진 첫 아이로 묘사되는데, 이때문에 실제로는 양녕의 친누나인 경안공주를 친딸로 등장시키면 스토리가 꼬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듯. 참고로 양녕대군은 위로 친형 3명(모두 요절)과 친누나 3명이 있다.
  • 조사의의 난의 진압과정이 묘사되었는데 조사의 군대와 여진족이 연합할 것을 걱정한 태종이 하륜 명나라에 보낸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는 영락제. 조선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데다[67] 하륜을 마음에 들어 한 영락제는 여진족이 조사의 군대의 편을 들면 100만 군대를 보내어 여진을 박살내겠다고 공언한다. 이 소식을 들은 여진족은 즉시 조사의에게 그만 돌아아야겠다고 통보하고 돌아가 버리며 이로 인한 손실을 끝내 메우지 못한 조사의군은 결국 진압당한다. 하지만 반란이 평정된 실제 이유는 태종이 직접 친정을 감행하여 진압군의 사기가 올랐고 청천강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이지 명나라의 입김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당시에 요동 지역에 명나라의 영향력이 그렇게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도 않았던데다가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시점은 1402년인데 이때 영락제는 갓 황위에 올라 親 건문제 신하들을 숙청하기에 바빴다. 이건 원래 이 작품이 조사의의 난을 끝으로 막을 내릴 예정이어서 조사의에게 최종 보스 보정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 하륜 이숙번을 상당히 띄워주었다. 실제의 하륜은 상당히 경박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세종조차 '아버지가 안 봐줬다면 진작에 옥황상제 곁으로 갔을 인물' 이라고까지 평했다. 하지만 강직한 대신 전문 배우인 임혁 배우 보정으로 오히려 탐욕스런 노신에서 지략가, 책사 이미지로 변모한 것. 이 덕분인지 이후 하륜의 비리에 대해서는 묻어가는 감이 있었다.[68] 이숙번 역시 선동혁의 연기와 각본 덕분에 정사에 기록된 탐욕스럽고 오만한 모습이 줄어들고 왕을 위해 악역도 불사하는 신하로 변모했다.
  • 양녕대군의 경우 아예 실제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양녕대군에 대한 미화는 조선 중·후반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뿌리가 깊고, 이 드라마의 원작이었던 《세종대왕》과 상당한 부분의 위인전마저도 이 설을 수용하고 있으니 비단 이 드라마만 탓할 일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오늘날 양녕의 '호쾌하고 왕재도 있었으나 스스로 권력을 버리고 쾌락을 즐긴 왕자'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된 것의 상당 부분은 이 드라마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양녕이 명나라로 떠나 영락제를 만나 황제 즉위 과정을 까는 후덜덜한 장면까지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민우의 배우 보정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 오히려 이민우가 양녕대군에게 매력을 느끼고 자신이 작가에게 양녕을 풍류객 캐릭터로 묘사하고 싶길 원해서 사실과 다르게 간지나게 나온 것. 이 드라마에서는 권력의 비정함에 실의에 빠지면서 점점 비뚤어져 가는 양녕이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미치광이스러운 막장짓을 어느 정도 뚜렷히 보여주긴 하지만 이를 마치 전부 양녕이 여러가지를 계산해서, 백성을 생각해서, 동생을 생각해서, 왕실의 미래를 생각해서 하는 일인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미치긴 제대로 미쳤는데, 뒤로는 혼자 자조하고 한탄하며 "아버지를 이해하라"고 충녕에게 조언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앞뒤 자체가 맞지 않아 보일 정도다. 심지어 하루종일 여자를 끼고 술마시고 북치고 꽹과리치고 놀다가 배고파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고 왕실의 죄라면서 한탄하는 씬도 있는데 지켜보기 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 중요한 건 덕치(德治)가 아니겠냐며, 내가 막나가는 건 고뇌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양 부르짖지만 정작 패악질을 부리는 건 자신 뿐이라[69] 모순과 자가당착이 두드러진다. 문제는 양녕대군의 뛰어난 면모, 즉 양녕대군에게 왕재가 있었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것이다. 실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한 사극임에도 이런 방향으로 간 것은 <용의 눈물> 최대의 옥의 티라는 평가가 대다수. 실제 역사에서의 양녕대군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노년에 들어 종손인 단종을 무시하고 야심많은 조카 수양대군에게 붙어 단종을 죽이라고 강권하는 등 아버지 못지않게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었다. 옛날 작품이라 실록을 찾아보기 어려워서 이런 오류가 났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정작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어 궁을 나설 때의 내레이션을 보면 "실록을 보면 세자 시절은 물론 폐위가 된 뒤에도 양녕대군의 비행(非行)은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다" 라며 이런 기록들이 있다는 것은 소개했다. 다만 문제는 그러고 나서 바로 다음에 "그는 풍운아였다!" 라고 읊으며 양녕대군을 자유를 갈망했던 인물로 묘사해 버렸다.[70] 그러나 오류이긴 했지만 드라마적으로는 유동근, 이민우의 불꽃 튀는 연기대결이 용의 눈물 후반부 인기를 견인한 것은 분명하다.
  • 양녕대군의 여성 편력에 대해 잘못 그려지기도 했다. 극 후반에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양녕대군이 세자빈이었던 김씨와 기생 어리 두 명을 데리고 사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실록 기사를 찾아보면 어리는 광주로 쫓겨갔던 양녕이 몰래 도망친 것[71]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자 근심과 분을 이기지 못해 자결한 것으로 나온다. 또 어리가 등장하기 이전에 양녕과 관계를 맺다가 제주도로 귀양에 처해진 기생 봉지련이 도중에 자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록에는 세종 5년에 봉지련이라는 관비(官碑)가 등장한다. 물론 한 쪽은 기생이고 이쪽은 관비이니 동명이인이라 볼 여지도 있는데, 이렇게 보면 봉지련이 자진했다는 실록 기사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 정도전을 띄워주면서 지나치게 왜곡, 미화된 부분이 있는데, 요동 정벌을 '대조선 제국'이라는 거창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삼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가 '황제'국을 추구했다는 기록은 없다.[72] 그리고 후반부 하륜과 이숙번의 대화에서 " 고려의 자주적인 역사를 그대로 남겨준 정도전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고려국사》 편찬하며 고려가 사용한 황제국 용어들을 전부 제후국의 것으로 고쳐놓은 장본인이 정도전이고 그걸 원래대로 돌린 사람이 세종이다. 또 이방원이 정도전이 개인적으로 지은 《조선경국전》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작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한 조선의 첫 번째 성문법전 조준의 《경제육전》은 묻혔다. 그러면서 정작 정도전이 황제국을 추구하면서 제후국 조선이라는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 1차 왕자의 난의 진행 과정에서 다소 오류가 있었다. 그 이전 사극의 1차 왕자의 난의 묘사에 비해 용의 눈물에서는 크게 진보한 모습을 보였으나 지적되는 것은, 왕자의 난 당시 남은의 첩실 집에,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포함해 대략 수어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난 발생 후 심효생 등 상당수는 현장에서 죽음을 당했고, 남은은 일단 피신했다가 자신감에 넘쳐 다시 돌아왔다가 살해되는 등의 과정이 무시되었으며, 남은의 첩실 집에는 정도전, 남은과 심효생만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나머지는 궁성을 이미 장악한 이방원 일파가 작성한 살생부대로 입궐하는 대로 한 명씩 철퇴로 때려 죽이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사실 대신들을 불러서 살생부에 따라 살해하는 장면[73] 계유정난 때 일어난 일이지 왕자의 난 관련 기록에선 찾아볼 수 없다.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과정에서 지붕 위에 노비로 변장해 올라가 살았던 이직을 죽여버리는 오류가 일어났고, 이후 실록에서 이직이 다시 등장하므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벌어졌다.
  • 일부 사형 집행 장면에는 오류가 있다. 박포의 처형 이후, 조사의의 난부터는 더 이상 극중에서 참형 등 다른 처형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오늘날의 총살형 비슷하게 사형수를 기둥에 묶어서 활을 쏘아 죽이는 처형 방식이 등장하는데, 그러한 형 집행은 조선시대에 없었다.[74][75] 조선의 사형은 기본적으로 참형과 밧줄로 목을 옭아매는 교형으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 최고형인 거열형과 그나마 명예를 지키게 해주는 사사 정도가 있었다. 극중에서 궁살형에 처해진 사형수들 가운데 양녕대군과 놀아난 구종수·이오방에 대해서 의금부에서는 능지처사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임금은 참형[76]을 선고하였고, 심온 사사 사건 당시 처형된 강상인은 거열형에 처해졌다. 다만 방송대본 데이터베이스에 실려 있는 <용의 눈물> 대본에는 실록대로 이오방과 구종수는 참형, 강상인은 거열형에 처해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작자가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하여 촬영시에 순화한 모양. 다만 참형 자체도 실제 사실과 다르게 연출되었으며, 그 외 인물들의 처형 등의 사소한 묘사는 오류가 꽤 많은 편이다.
  • 고려 말, 조선 태조, 정종 연간까지 병졸들도 갑주를 잘 갖추고 창을 들고 나오다가 태종이 즉위하자마자 군제개혁이 되면서 병사들이 전원 포졸복으로 뒤바뀌고 당파를 드는 모습으로 나왔는데 이는 시대상으로 잘못된 연출이다. 이것은 조선군에 대한 일반적인 클리셰로 인한 것으로, <용의 눈물>에서도 이를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 한양 재천도(1405년) 후로 실질적으로 시즌 2[77]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110화가 언제쯤인지 애매하다. 일단 화가 시작될 때는 '한양천도 후' 라는 애매한 자막이 뜨며, 17분 30초 즈음 나오는 나레이션에서는 '그의 치세 10여년이 가까운 오늘' 이라 언급한다.[78] 또한 22분 30초 즈음에는 극중에서 처음 나오는 명국의 칙사가 태종을 이미 한 번 이상 만난 적이 있다면서 '세월은 가도 전하께서는 여전하시다' 운운하며, 양녕이나 효령, 충녕 등을 맡은 배우가 아역에서 성인 역으로 바뀌었다. 즉 이런저런 정황을 보면 천도 이후 여러 해가 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양녕대군이 아직 가례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 실제로 양녕의 가례는 1407년의 일이다.
  • 참수형을 집행하는 장면에서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전문적인 망나니를 불러서 참수한 건 맞지만, 청룡언월도 같은 긴자루가 달린 칼을 사용하지 않았고, 조선시대 참수형은 술 마시고 칼춤을 추다가 목을 베어버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용의 눈물에는 이러한 장면이 있다.
  • 양녕대군은 폐세자 이후에 주어진 군호인데, 100화에서 원경왕후가 원자가 된 어린 양녕대군을 끌어안으며 '양녕' 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다. 99화의 예고편에서도 '첫째 아들 양녕' 이라 나오는 걸 보면 원경왕후 역을 맡은 배우의 실수도 아니고 그냥 연출상의 오류다.
  • 이성계가 즉위한 이후 아들들의 호칭이 '군', '대군'을 혼용하고 있다. 가령 이방원은 '정안군', '정안대군'이라고 모두 부른다. 조선 초기에 호칭이 확립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당시엔 '대군'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군이라는 호칭은 태종이 즉위한 뒤 고려 시대의 오등작 제도를 폐지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태종 즉위 이전의 '정안대군'과 같은 호칭은 실제 시대상과 어긋난다.
  • 왕실의 인물들이 곤룡포를 자유자재로 입는데, 일부 곤룡포의 경우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는 형상의 보를 찬 후기형 곤룡포를 차고 있다. 조선/왕사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곤룡포의 보는 측면으로 바라보는 용으로 새겨진 전기형 곤룡포와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으로 새겨진 후기형 곤룡포가 있는데, 여말선초에서 후기형 곤룡포를 입는 것은 시대상으로 잘못된 것이다. 특히 이성계 양녕대군이 옷을 이렇게 입는데, 이성계의 경우 청색/홍색 곤룡포를 여러벌 돌려입다 보니 간간히 후기형 곤룡포를 입는 장면이 나오고, 양녕대군 같은 경우 대군 시절 용포가 후기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소품을 잘못쓴 오류인듯 하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모든 역사적 사실에 따라 극본을 쓰면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된다. 역사적 사실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해서 이 사극의 가치는 전혀 떨어지지 않음을 기억해두자. 뼈대는 거의 사실 그대로 전달한 편이다. 후속작 《 왕과 비》처럼 왜곡이나 각색이 너무 심할 경우 비판을 듣기는 하겠으나 <용의 눈물>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물론 각색 역시도 훌륭해서 크게 문제시 된 것은 없다.[79]

한편 등장인물이 워낙에 많아서 그런지, 주연이든 조연이든 병든 티를 전혀 내지 않다가 역사상 죽을 때가 되면 갑자기 기침을 하거나 뒷목을 잡는 등 아픈 티를 팍팍 내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죽는다는 문제가 있다. 설장수 같은 경우 한양에서 개성으로 천도한 직후에 갑자기 조정 회의에서 뒷목을 잡더니 쓰러지며, 이화 같은 경우 민무구, 민무질 형제 사건을 처리하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연출도 있다. 조영무처럼 인상 깊었던 조연도 어느날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하기는 매한가지.[80]

이 밖에 극의 내용 가운데 다소 감정적이거나 정도전이 조선제국을 주장하는 부분과 같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작가 개인의 감정을 실은 부분도 있다. 왕씨 몰살을 가리켜 세계사상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비극이라 하는 것이나[81], 정도전이 조선 제국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칭기즈 칸처럼 서역까지 진출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장면이 있다거나, 2차 왕자의 난을 '차마, 차마 일어나서는 안 될' 이라 한다거나, 정종대에 불꽃놀이를 본 일본 사신이 크게 놀라는 장면이 있는 등.[82] 이 부분은 1990년대라는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참작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환경 사극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형님전하 혹은 형님저하라는 국적불명의 호칭남발 또한 빼먹을 수 없는 흠인데, 사실 태조 왕건 못지 않게 이 작품에서도 저 호칭을 시도때도 없이 남발하는데, 문제는 저 호칭이 중요한 장면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와서 작품에 대한 몰입을 깨는데 은근히 일조했다. 실제로 유튜브 스트리밍에서 해당 용어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면 또님전하 혹은 또님저하 라고 비꼬는 댓글들이 태반일 정도이며, 그리고 이 괴상망칙한 호칭은 이환경 작가의 후속작인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에서도 명맥을 이어간다.

159화나 되어서인지 극의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가령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그를 알현한 명의 사신이 '선황(홍무제)께서는 전하를 내심 탐탁지 않게 보셨으나 지금의 폐하(영락제)는 전하를 좋아하시니 다행이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정작 홍무제는 정도전의 요구로 인해 사신으로 파견되어 온 정안군을 만나 보고 크게 감탄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극에서 다시 출연하지 않다 보니 1차 왕자의 난 이후에 반감을 드러내는 등의 묘사는 전혀 없었다.

7. OST


OST가 굉장히 훌륭하다. 장중하고 격조 있는 분위기를 관현악으로 잘 담아냈으며, 덕분에 장면들을 메우는 음악의 퀄리티가 여타 다른 사극들과 눈에 띄게 비교될 정도이다. 《용의 눈물》 종영 이후에도 《 왕과 비》나 《 태조 왕건》에도 꾸준히 재활용되며, KBS 사극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대 이후의 사극 음악이 미디음 느낌이 가시지 않은 관현악이나 상투적이고 몰개성한 곡조 및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점철된 것을 생각해 보면 《용의 눈물》 OST의 성공적인 선례는 더더욱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드라마의 서브 메인 테마인 〈왕조의 세월〉. 메인 테마의 느린 템포 버전이다.

위에 올려진 메인 테마를 포함한 OST 수록곡 전곡은 작곡가 김동성이 작곡했으며, 이 사람은 그 전에 애니메이션 《 아기공룡 둘리》(KBS판, 1987-1988)의 OST 전곡도 작곡했다. 위와 같은 웅장한 느낌의 곡을 작곡한 분이 이전에는 《아기공룡 둘리》에서 동요보다 더욱 동요스런 '오프닝 타이틀곡'이나 코믹한 스타일의 〈 라면과 구공탄〉을 작곡했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충공깽 수준.

이 OST가 가지는 의의는 한국 역사상 거의 최초로 많은 인원의 교향악단에 의해 연주된 곡이라는 점이다. 그 이전에는 제작비 등 기타 문제 때문에 소규모로 음악작곡을 한 경우는 있어도 관현악단을 동원한 대규모 음악은 없었다. 단순히 신시사이저 등을 이용한 기계음이나 다른 영화 또는 드라마에 이미 쓰인 주제곡이 삽입되기도 했다.[83]

이 작품의 음악 감독을 맡았던 임택수 감독(1941~2006)[84]이 작품의 대본을 보고나서 꼭 관현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음악이 완성될 수 있었다.

연주는 의외로 KBS 교향악단이 아닌 우크라이나 키이우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했고, 합창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라디오 합창단이 했는데 그 이유가 이러하다. 처음엔 KBS 교향악단이 《용의 눈물》 OST의 연주 요청을 받았으나, 드라마 주제가를 연주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85] 우크라이나에서 연주, 녹음을 하고 온 것. 당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권이 경제적으로 사정이 안 좋았던 시절이라서 훨씬 값 싸게 음반제작이 가능했으니,[86] 인건비로만 따진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었다.

그러나 지휘자 테오도어 쿠차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교향악단은 지속적인 낙소스 음반 녹음으로 실력이라면 이골이 난 오케스트라였고, 결과적으로 이는 가성비 면에서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교향악단은 특유의 둔탁한 타악기 음과 감성적인 현악기 선율로《용의 눈물》OST를 훌륭하게 연주해냈고, 이는 시청자들로부터 명곡이라는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연주를 거절했던 KBS 교향악단은 그야말로 멘탈 붕괴가 되었고, 《 태조 왕건》 때부터는 KBS 교향악단에서 KBS 대하드라마의 주제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곡들의 반응이 좋았고 후속작인《 왕과 비》에서까지 이 곡들을 계속 사용하면서 1996년 11월 24일부터 2000년 3월 26일까지 4년 5개월 동안 주말 9시 40분에 흘러나오는 곡이 되었다.

8. 여담

8.1. 드라마 관련

  • 인기를 등에 업고 ' 용의 국물'이라는 에로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기사. 조선일보 박광수 화백의 광수생각에서 언급되었는데 <용의 눈물> 스페셜 방송에서 유동근이 이걸 보고 "<용의 눈물> 신드롬입니다, 근데 시중에 <용의 국물>이라는 그런 비디오 테잎이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사품에 속지 마십시오."라고 일침을 가하였다. 또한 이름이 같은 에로 연극이 나오기도 했다.

  •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드라마 종영 직후 1시간 30분 동안 뒷이야기와 제작과정, NG 등을 다룬 스페셜 방송이 방송되기도 하였다.
  •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현재 본 작품의 마스터 필름이 KBS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방송자료 자체는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 케이블 쪽에서 간간히 방영하고 있는 중. 그러다가 2020년 3월부터 KBS 드라마 클래식이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보기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화질은 480p까지가 최대라서 고화질 리마스터를 원하는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많다. KBS Drama Classic 채널의 하이라이트 요약본 영상들은 1080p까지 화질 지원을 하고는 있지만, 1차 왕자의 난 부분까지만 나와있는 상태다. 다른 사극들인 태조 왕건[87], 대조영, 불멸의 이순신, 무인시대, 추노 등이 무료 스트리밍을 해준 적이 있는 반면, 용의 눈물은 아직 그 기미가 없었으나, 시청자들의 염원에 힘입어 2020년 12월 16일 오후 3시부터 실시간 스트리밍이 확정되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 이 드라마의 인기가 대단하여 1990년대 학습만화에선 인기 있는 드라마 얘기 할 때마다 <용의 눈물> 혹은 패러디인 지렁이의 눈물(...) 드립이 나오곤 했다.
  • TV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으로 한국능률협회 1998 히트상품 본상을 수상하였다.

8.2. 출연진 및 제작진 관련

  • 드라마의 인기로 인해 1997년 KBS 연기대상에서 많은 배우들이 중요한 상을 받았다. 아래는 그 명단(괄호 안은 배역).
    • 유동근(태종 이방원) : 대상
    • 김무생(태조 이성계) : 남자 최우수 연기상
    • 최명길(원경왕후 민씨) : 여자 최우수 연기상
    • 김흥기(정도전) : 남자 우수 연기상
    • 선동혁(이숙번) : 남자 조연상
이외에도 한국방송대상에서도 2년 연속으로 상을 받았다.[88]
  • 주요 인물들의 연기로 인해 몇몇 공식들이 지금도 성립되고 있다.
    • 유동근의 태종 연기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고, 이는 이후 《대왕 세종》과 《장영실》에서 '태종' 역할을 한 김영철[89]보다 태종 이방원= 유동근이라는 공식이 압도적으로 성립되고 있다. 물론 유동근 본인도 이 때문에 다른 사극에 등장해도 '태종 이방원'의 꼬리표가 조금 따라 붙었기 때문에 2014년 《정도전》에서 태조 이성계 역을 맡을 때 나름 고심했었다고 한다.
    • 원경왕후= 최명길의 공식도 사실상 이때부터 성립되었는데, 대왕 세종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다 보니 더더욱 시청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90] 최명길 스스로가 " 원경왕후와 무슨 인연이 있는게 아닌가" 라고 할 정도였다.
    • 이 외에 태조 이성계= 김무생, 삼봉 정도전= 김흥기의 공식도(특히 장/노년층에서) 유동근 못지 않은 막강한 공식이 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2000년대 이후로 세상을 떠난 상태[91]라서 명연기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이 매우 안타까운 일[92]이다.
  •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작품에는 연산군을 연기한 배우들인 유동근, 이민우, 정태우, 안재모가 나왔다. 이 때문에 연산군 미러전 드립이 유튜브 스트리밍이 시작된 2020년대에 새로이 발굴되었다.
  •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 세자빈이었던 수성부부인 김씨 역을 맡은 안연홍은 용의 눈물 종영 후 도전 지구탐험대 촬영차 하와이로 갔는데 때마침 하와이 현지 방송사에서 용의 눈물이 방영 중이어서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 한동안 용의 눈물 실내 세트 촬영일과 체험 삶의 현장 스튜디오 녹화일이 겹쳐서 체험 삶의 현장에 일꾼으로 참여한 용의 눈물 출면 배우가 부득이하게[93] 출연 복장 그대로 스튜디오 녹화장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정종, 정안왕후 김씨 역을 맡은 태민영, 박윤선은 세트 녹화 도중 왕과 왕비 차림 그대로 체험 삶의 현장 녹화장에 나와서, MC인 조영남, 이경실이 "체험 삶의 현장 사상 가장 높으신 분들께서 나오셨다"고 말을 했고, 일당이 담긴 봉투[94]를 모금함에 넣으러 갈 때에는 같이 출연한 이용식, 지누션이 즉석에서 임금 행차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 이 드라마의 작가 이환경과 PD 김재형은 후에 태조 왕건에서 작가-연출자로 재회할 예정이었지만, 담당 PD로 낙점된 김재형이 수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어 결국 감독 자리를 내려놓게 되었다.

8.3. 그 외

  • 방송 당시가 제15대 대통령 선거 시기였는데, 이방원의 백마에 있던 DJ라는 머리글자가 화제가 되었다.[95] 당시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은 이 해프닝을 '하늘의 계시'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이후에 촬영장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에 당시 연출 감독이던 김재형 감독은 당시 정치인들이 매일 촬영장에 방문해서 고맙다고 하는데 곤란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정치권에서도 워낙 이슈였던 사극이라 나중에 드라마가 끝난 후 종방연이 열렸을 때 그 당시 15대 국회 문광위원장이었던 이세기 국민신당이었던 이만섭이 출연 배우진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 당시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많은 광고가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휴대폰 광고였다. 사극과 당시 최신 문물인 휴대폰 광고라는 것이 상당히 깼지만, 공개된 것도 아주 약을 빨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9. KBS Drama Classic 연속 무료 스트리밍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용의 눈물/유튜브 스트리밍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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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기획 당시 104회 방영 예정이었으나 당시 대선정국과 맞물려 시청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자 159회로 막을 내렸다. [2] 당초 정하연 작가가 집필할 예정이었으나, KBS 2TV 월화 드라마 조광조를 끝낸 지 얼마 안 돼 사극을 쓰는 건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고사했다. [3] 스펀지와 태조 왕건, 그리고 긴급구조 119등의 나레이션을 맡았다. [4] 후에 야인시대의 나레이션을 맡았다. [5] 그야말로 포스가 철철 넘쳐흐른다. OST에 대해서는 하단 참조. [6] 심지어 용의 눈물이 끝나고 자사가 만든 16년 후의 정도전과 23년 후의 태종 이방원조차도... [7] 사실 그 전의 《 삼국기》나 《 찬란한 여명》 같은 블록버스터 대하드라마들이 나왔었다. 그러나 저조한 시청률과 함께 묻혔다. 앞선 실패에도 불구하고 용의 눈물에 이 정도 예산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판관 포청천 때문이라고 한다. 판관 포청천에서 주인공 포청천 역의 한국어 더빙을 열연한 노민 성우가 홍시호 성우의 유튜브 채널 홍시호의 홍SHOW에 출연해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판관 포청천이 시청율 45%라는 엄청난 수준으로 시청률 1위에 등극하자 언론사에서 우리도 저런 사극을 만들어야 한다고 대서 특필해 KBS에서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었다고 한다. 6:58초부터 참고 [8] 당시 15대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경선 분위기와 엮여서 비교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신문 만평에서는 《용의 눈물》에 빗댄 정치 패러디가 종종 등장하기도 하였다. [9] 말이 장남이지 정확히는 4남이다. 다만 위의 형들이 모조리 요절한 통에 장성하고 잘 알려진 자녀들로만 한정하면 사실상 장남이 맞다. [10] 곳곳에 정사와 야사를 종합해 큰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했던 40대 이환경의 야심이 보인다. [11] 특히 양녕대군 부분이 그렇다. [12] 2차 요동출정 당시 우군도통사는 이성계였고, 좌군도통사가 이 사람이었다. 이성계와 의기투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이 사람 또한 곧바로 이성계에 의해 숙청당한다. 사실 이성계의 정치적 역량을 만만히 보고 창왕을 옹립시키는 등 이성계에게 개겼으나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의 탄핵으로 박살난다. [13] 본래 여진족인데, 젊은 시절 이성계의 의형제가 된 사람이다. 본 작품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오래 등장한다. [14] 潛邸. 국왕이나 그 일족이 궁궐에 들어가기 전에 살던 집. [15] 위화도 회군 장면을 찍을 때 이성계가 황금으로 도금된 경번갑을 입었는데, 이 옷은 무려 80kg이나 나갔다. 그래서 촬영이 끝난 후 김무생이 꽤나 고생을 했다. [16] 주로 경복궁이 가장 많이 나오긴 했지만, 창경궁도 굉장히 많이 나왔다. 창덕궁은 대한제국 황실이 거주하던 궁궐이라 배수구나 서양식 전등도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여말선초 시기를 재현하는 궁궐로서는 썩 어울리는 공간도 아니다. 다만 창경궁의 경우 극 중 개경 수창궁으로 둔갑되어서 나왔다. [17] 2000년대 사극 중 실제 궁궐에서 극의 대부분을 찍었던 사극은 SBS 여인천하, KBS 명성황후 장희빈 정도다. [18] 가령 여러 사극[96]에서 수양대군이 무력사용을 망설이는 것을 측근들에 떠밀어 쿠데타를 일으키는 걸로 그리는데, 실제로는 주저하는 인간들 윽박질러가며 주도한 게 세조다. [19] 이 책도, 제목만 세종대왕이지 조선 초기 태정태세 시기가 다 들어있다. 그래도 이쪽은 세종 치세도 여러 권에 걸쳐 나오기 때문에 태종 원탑주연인 이 드라마와는 결이 다르다. [20] 자조시, 실제 정도전의 문집 《 삼봉집》에 그의 남긴 마지막 시로 기록되어 있다.30년 고난 속에 이뤄온 사업이 송현방 술 한잔에 허사가 되었구나 사실 정도전의 죽음에 대한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태종보고 살려달라고 빌면서 죽었다고 전해지기는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태종 측의 기록이므로 정도전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갔을 수 있다. [21] 실제로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의 비굴한 최후 일화 다음에는 정도전의 사뭇 비장한 최후 기사도 실려 있는데, 정도전의 아들 정담이 ' 정안공에게 빌어야 한다' 고 한 것을 거부한 일화가 그것이다. [22] 이환경 작가 본인조차도 이런 모습을 이후 사극에서는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 당장 " 태조 왕건"만 보더라도, 어전회의 장면은 신하들 중 수장인 시중이 "허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라고 하면, 주요 인물들이 "그러게 말이외다", "이거야 원", "이런 일이 어찌...", "허허... 참..." 정도로 대강 때우는 일들이 다반사이며, 대부분의 사극은 신하들이 하라는 정치는 하지 않고 모략과 협잡에만 더 공을 들이는 식으로 나온다. 그나마 사료가 부족한 고려시대 이전은 이러는 것이 그래도 납득이 되지만, 누가 무슨 발언을 했는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상세히 남은 조선시대. 특히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은 용서가 안 된다. [23] 유교사회에서 천자의 죽음은 붕(崩), 제후의 죽음은 훙(薨), 대부의 죽음은 졸(卒), 선비의 죽음은 불록(不祿), 백성의 죽음은 사(死)로 표현했다. 조선왕조는 어쨌건 제후국을 표방한 나라이므로 태종 이방원의 죽음은 훙(薨)이 맞다. [24] 새로 찍은 장면이거나 태종이 최후를 맞는 순간은 아니고, 2차 왕자의 난 당시 싸움에 져서 생포된 회안군과 마주할 때의 모습이다. [25] 둘 다 여흥 민씨다. [26] 심지어 정안대군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얘길 민씨 부인 앞에서 하는 장면이 본작에 나온다. [27] 실제로 후반 30화에서 원경왕후가 나오는 장면만 모아 보면 야외 신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28] 천민들과 어울려 상주놀이를 하는 모습, 어머니 원경왕후가 아들을 위해 열어 놓은 굿판에 뛰어들어 무당의 칼을 빼앗아 들고 자신이 무당춤을 추는 모습 등 광기 어린 양녕의 기행을 신들린 듯 연기하여 방영 당시에도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29] 궁궐에서 밥상 나르다가 태종 이방원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되는데 이에 분노한 원경왕후에 의해 죽을 뻔하고, 태종의 흥미도 잃게 된 채 조용히 극중에서 사라진다. [30] 원래 경순공주 역으로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당시 영화 촬영 중이라 삭발이 불가능해서 거절했다. [31] 극중에서는 학문과 인품을 겸비한 당대의 대학자로 등장했다. 중전이 된 딸과 권세를 차지하는 장/차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이 사위 이방원과 함께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 가담하는 등 강한 권력의지를 드러낼 때 민제가 이를 강하게 만류, 경고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민제 자신이 권력에 초연한 학자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외척정치에 대한 방원의 경계감을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32] 태조 왕건》에서 배현경 역을 맡은 배우. [33] 극중에서 이성계 여진족 의형제 이지란의 부하 장수 출신으로 등장한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비롯해 초반부에는 고지식하고 용맹할 뿐인 무사였는데, 방원이 즉위하여 중신으로 정계에 본격 등장하면서 나름 학문과 유머를 구사하는 개그 캐릭터로 변모한다. 조영무가 죽은 직후, 그의 상갓집에 조문 온 중신들 중 황희가 "우리에게 많은 웃음을 주신 분"이라고 인증까지 했을 정도이다. [34] 제2차 왕자의 난 직후 이방원이 사병 폐지의 일환으로 측근들을 귀양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데(그래도 즉위 직전에 대부분 복귀시켜 중신에 임명함), 조영무가 귀양 생활하면서 뒤늦게 공부에 심취하는 모습이 나온다. [35] 이 사람은 이후 KBS 드라마 《 장희빈》에서도 희빈 장씨의 처소 권 상궁 역을 맡았었다. [36] 거지패 두령으로도 출연한다. 1인 2역. [37] 이 같은 미안함 때문에 유동근은 이덕화, 임동진 등 선배 탤런트들과 함께 2005년 7월 8일 열린 김재형 PD 고희연을 마련했다. [38] 사실 이민우는 원래 충녕을 제안받았고, 양녕은 안정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무산되면서 안정훈의 성년 사극 연기는 1999년의 "어사 출두"( 박문수의 어사보-조수격)에서의 단역과 3~4년 뒤인 《 태조 왕건》의 혜종 역으로 미뤄지게 되었고 이후 안정훈은 현대극 중심의 배우가 되었다. [39] 전현은 무인시대에서는 이성계의 조상인 이린 역도 맡았다. [40] 이후 대왕세종으로 남은 부분을 다루었으나, 본작에 비하면 극의 스케일도 줄어들었고, 고증 면에서도 크게 뒤떨어진다. [41] 사실 원작 《세종대왕》 도 여말선초 전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중반부까지는 태종이 진 주인공이다. 태종 사후에는 온전히 세종 시대를 다루지만, <용의 눈물>은 이방원의 죽음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원작의 중반 정도까지만 다룬 셈이다. [42] 용의 눈물에서 정도전 역을 맡은 김흥기는 임꺽정에서 악역 남치근 역을 맡고 있었다. [43] 그래서인지 태종이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고 한양으로 환도하는 장면 이후 태종의 왕자들이 장성하는 기간을 건너뛰며, 태종의 양위 파동이나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숙청하는 장면은 내레이션으로 '사실 여러 번 있었던 일이나 한 번만 다룬다/짧게 다룬다' 정도로 소개한다. 후속작인 《 왕과 비》도 원래는 주인공인 인수대비가 대비로 책봉되어 궁에 들어가는 것까지만 다루기로 하였으나, 그 다음 작품인 《 태조 왕건》의 제작이 더디어지자 폐비 윤씨와 연산군 파트도 다루었고, 그동안 시청률이 높지 않았던 왕과 비는 그제서야 시청률이 대폭 상승했다. [44] 후속작 《 왕과 비》는 단종/세조실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역사왜곡 논란이 일어났을 뿐 전반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였으나, 《 대왕 세종》은 아예 허구의 사실을 만들어 그를 중심으로 드라마를 전개하여 정통사극이라고 할 수 없다. [45] <조선왕조 오백년>의 추동궁마마. [46] 조선왕조 오백년, 대장금, 허준 등의 PD. [47] 오죽하면 아주 오랜만에 정통 사극을 표방하면서도 스피디한 진행으로 각계의 호평을 받은 드라마 < 정도전>조차도 용의 눈물의 후계를 자처할 만하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사실 <정도전> 자체가 <용의 눈물> 당시 스탭진이었던 PD의 작품인데다 적잖이 겹치는 여말선초 시대를 다루고 있어 비교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작비 등의 여건 차이도 존재했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48] 수십년 뒤 2021년 KBS 대하드라마를 재개하며 방송된 < 태종 이방원>은 다루는 배경 주인공이 본작과 완벽히 겹치는 포지션이라 더더욱 비교가 되었다. <정도전>과는 달리 극본 작가의 부족한 필력으로 인하여 <용의 눈물>보다 훨씬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49] 역대 사극 시청률 1위는 MBC의 허준이다. KBS 대하드라마 중에선 《 태조 왕건》 이 1위이며, 이 작품이 2위이다. 세 작품 모두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작품이다. [50] 이하 분대는 유튜브 KBS Drama Classic 채널이 업로드한 영상을 기준으로 삼는다. [51] 여담으로 최영을 연기한 김성옥(1935)은 몇 년 뒤 완전히 반대되는 캐릭터인 강 장자 배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52] 양조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에 담긴 성현의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네. 삼십년 긴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길에서, 송현방 벗님네에서 한 잔 술 나누는 사이 모두 다 허사가 되었구나.(操存省察兩加功 不負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 덧붙여 이 시에 대한 해석은 요즘에는 많이 다르다. 특히 兩加를 <용의 눈물>에서처럼 '두 왕조'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것으로 보이며, 유가의 수양 방법을 뜻하는 操存과 省察에 힘을 다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동시대를 다룬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조존과 성찰 2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라고 해석했다. [53] 정종 위에 진안대군이 있었으니 정확히는 둘째 형님이 맞다. 다만 작중에서 진안대군은 조선의 건국에 항의하는 의미로 세자 자리를 포기하고 은둔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극 초반에 퇴장해 버린다. [54] 이때 신하들이 피하라고 소리치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는지 닥치라고 일갈하는 태종의 모습도 명연기라고 평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55] 태조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돌아온 영의정 성석린으로부터 거동하기도 불편할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안타까워하는 장면도 있었다. [56] 또 이 때 태조는 자신의 품에 안겨 눈물을 터뜨리는 태종의 등을 연신 쓸어 주는데, 원래 대본에는 없는 김무생의 애드리브였다. [57] 태종이 태조에게 다가가는 장면의 한쪽 구석에 원경왕후도 비친다. 극중에서도 잠저 시절에 이성계를 위해 준비한 약식이 하이킥 당하는 등 마음 고생이 꽤 심했었고 107화에서 태종이 없는 자리에서 태조와 따로 만나 화해하는 장면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는 것이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 [58] 어디까지나 극중에서의 설정이다. 다만 태종이 신하 앞에서 양녕대군을 걱정하며 눈물지었다는 내용은 실록에 나온다. [59] 정안군 시절의 태종과 정도전 사이에서 어느 쪽에 붙을까 간을 보던 시절부터 정도전의 측근인 남은이나 심효생 등에게 “젊은 사람이 어른들 어려워할 줄을 모른다” 라는 평가를 받았었으며, 작중에서 “전하는 성군은 못 되신다” 라는 말을 했으며 그것도 태종 자신의 면전에서 내뱉은 유일한 인물이다. [60] 야사에 나오는 태종우 전설을 각색한 것. 야사에만 나온다지만 이순신도 《난중일기》에서 언급할 정도로 제법 널리 퍼진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61] 정확히는 1차 왕자의 난에 참여했거나, 당시 정안군이었던 태종의 뜻에 따라 태조에게 폐세자를 주청했거나, 그도 아니면 공신으로 책봉되어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다. [62] 심지어 진중하고 양심 있고 상식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민제나 권근 같은 인물들도 곁에 앉아 있었는데도, 깐족대며 성석린을 차사로 몰아 가는 조영무를 제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63] 그로 인해 함흥으로 가는 내내 "난 망했다. 곧 죽겠지..." 라는 듯한 얼굴로 울상을 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실제로 조영무 말대로 미움받을 짓을 한 게 없어서 차사로 온 게 아니라 문안 인사를 온 것이라는 거짓말을 쳐서라도 살아서 돌아올 수는 있었으며, 이후 조금 더 출연하다가 태조가 궁으로 완전히 돌아온 이후에 극에서 퇴장한다. [64] 조영무가 관계를 한 여자가 대전 궁녀임을 미처 몰랐던 하륜과 이직은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가볍게 흘렸는데, 유정현이 "내가 그 기생집을 조금 아는데, 그 사람 아마 대전 궁녀일 텐데..." 하는 식의 대사를 치고 만다. 하륜은 깜짝 놀라지만 한 번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조사에 착수한다. [65] 예를 들면 112회 16분~21분대에 나오는, 권희달과의 내기 장기 에피소드. 대표적인 개그 신이라고 부르기에는 한끗 부족한 감이 있지만, 시청자들 사이에서 간간이 회자된다. 덧붙여 이 장면도 실제와 조금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원전이 되는 것은 실록에 실려 있다. [66] 위화도 회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있었던 저항이래봤자 개경을 지키고 있던 최영과 전투를 벌였던게 전부이다. 반란군이 족히 열흘은 걸리는 길을 오는 중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이성계의 세력이 빈약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67] 실제로 영락제는 즉위 이전에 사신으로 온 정안군을 직접 만났었고, 직접 화면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본작에서도 영락제의 입으로 설명되며 꽤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또 내레이션으로 영락제의 어머니가 고려 출신 후궁이었다는 카더라를 언급하기도 한다. [68] 다만 하륜이 비리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나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행정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륜의 탐욕스러운 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했던 세종도 그가 재상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던 점은 인정했다. 그의 탐욕이나 비리가 묘사되지 않아 다소 미화된 것은 맞지만 명민한 지략가이자 책사로 묘사한 것은 정확하며, 양녕대군을 미화한 것에 비하면 넘어가 줄 만 하다. [69] 태종의 숙청은 공신과 외척 등에 한정되었고 백성에겐 너그러웠다. 용의 눈물에서 그 일화가 일일이 소개되진 않았지만 태종우 마무리도 그렇고 어느정도는 나왔다. [70] 요약하자면 (1)역사 속의 양녕대군의 비행은 정당화할 구석도 명분도 없는 악행에 불과했다. (2)용의 눈물에선 이를 흑화한 왕재, 풍류객으로 미화하고자 했다. (3)동생인 성녕이 죽었는데도 놀러 다니는 등 정말로 인간쓰레기임을 보여주는 일화는 생략. (4)그럼에도 느껴질 만한 괴리를 커버하기 위해 나레이션으로 옹호적인 멘트를 해 주고 아버지 태종과의 갈등을 명연기로 그려내는 식으로 눈길을 돌렸다. [71] 작중에는 천하를 주유하자는 거러지 임금의 권유를 받아들여 떠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72] 다만 현대적 의미로 제국이란 황제가 통치하는 국가라는 뜻과 함께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국가라는 뜻도 있으며, 전성기 시대의 고대 아테네를 '아테네 제국' 이라고 부르기도 하거나 공화정 시대의 로마도 로마 제국이라 일컫는 경우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국이라는 말 자체도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작중에서 정도전이 칭제건원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73] 1990년 방영된 <파천무>의 살생부 씬을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써먹었다. [74] 다만 조선시대 사형 집행 때는 중대한 사건이 있을 때 궁수를 배치시키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75] 활을 쏘아 죽이는 처형 방식은 천추태후에서도 재활용 하였다. 다만 용의 눈물이 화살을 한두발 정도 쏘아서 죽이는 거였지만 천추태후에서는 화살을 여러발 쏴서 죽이는 방식이었다. [76] 실록에는 처참(處斬)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능지와 처참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처참은 문자 그대로 참형에 처했다는 뜻이고, 실록에도 의금부의 주청보다 강등하여 처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거열형이 말 그대로 생사람을 잡아다 사지를 찢는 형벌이라면 참형의 경우 한 번에 목이 날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어쨌든 거열형에 비해 빠른 죽음이었기에 강도가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77] 태조와 태종 두 명이 주인공이었던 부분이 시즌 1이라면, 태종의 치세가 다루어지는 부분. 실제로 110화는 시즌 1과 2의 간극을 잇기 위해 나레이션이 풍부하게 사용되었다. [78] 태종은 1400년에 즉위했으므로, 10여 년이 지났다면 1410년 전후가 된다. [79] 사실 《 왕과 비》도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지나치게 그대로 인용한 것이 문제였지, 역사적 흐름을 작가 마음대로 바꿔버린 건 아니다. 요즘 제작되는 질 떨어지는 사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작이다. [80] 마찬가지로 등장인물이 많았던 무인시대에는 중요한 인물이 아닌 이상 해설로 사망처리했다. [81] 비극이지만 세계사상 예를 적잖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인데 당장 칭기즈 칸 같은 경우 유언으로 서하의 황족을 몰살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서하인은 씨를 말리라고 하기도 했다. [82] 일본 사신이 놀라는 장면 자체는 역사적 사실이나, 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남재가 이 자리에서 정안공을 세자로 책봉하자 하지는 않았다. 이 장면에서 포인트는 일본 사신이 아니라 실제로는 반년쯤 뒤에 있었던 남재의 발언이었으므로, 일본 사신이 딱히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83] 본작에서도 중요한 장면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OST가 등장했는데, 본작의 초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선죽교 장면이나 세자빈 자진 장면 등이 있다. 일본 문화 개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 국내로서는 '참신한 음악' 정도로 여겨졌지만, 다케미쓰 도루의 대표적인 영화 음악 트랙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던 국제적 상황에서 보자면 상당히 흑역사인 부분이다. [84] MBC 뉴스데스크의 시그널 음악(1991년 4월 22일부터 1998년 초까지)과 드라마 장녹수의 작곡가이다. [85] 이 당시까지도 클래식이나 국악, 가곡이나 격조있는 음악으로 취급하고, 대중음악을 저급하다고 저평가하는 취급하는 관념이 팽배해있었다. 예술계 관계자들이 우린 고급음악을 한다며 스노비즘을 드러내면서 텃베를 부린 것인데, 21세기에 한류 열풍이 부니까 그제서야 바뀐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이 오랫동안 대중음악 공연을 거절한 이유도 같다. [86] 당시 발트3국을 제외한 나머지 구소련권 국가들의 급여수준이 월 100달러 받으면 잘번다고 할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현대문명진단같은 책에서도 이 당시에 서구권에서도 음반제작사들이 클래식 음반을 내놓을때 서구권 교향악단 대신에 동유럽 교향악단을 고용해서 음반제작비를 크게 절감한 사례들이 나왔기도 했다. [87] 심지어 해당 스트리밍을 연속으로 3번씩이나 한 적도 있었다. [88] 1997년 김재형 PD-TV 프로듀서상. 1998년 TV 드라마 부분 대상, 이정구-우수 미술상, 유동근-남자 탤런트상 [89] 일부에서는 김영철의 태종 연기가 더 낫다는 말도 나오지만, 카리스마나 포스로 보면 유동근보다 떨어진다. 연기력이야 두 사람 모두 출중하지만, 유동근의 태종은 주인공인 반면 김영철의 태종은 어디까지나 세종의 아버지로서 조연이다. 특히 《대왕 세종》에서는 일부 신하들에게 휘둘리고 작중 창작인 '고려부흥세력'에게 시달리고 자신의 치세에 대해 (폭정이니 학정이라면서) 비난하는 백성들 때문에 고생하는 등의 나약한 모습이 두드려졌기 때문에, 작품의 모습을 보면 '용케도 고려 왕이 아니라 세종이 뒤를 이었구나' 싶을 정도다. 실제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고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은 외척이나 공신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숙청해버리는 등 매우 강력한 왕권을 세워 놓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수많은 업적을 세운 명군이다. 또한 그의 칼끝은 어디까지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이들에게만 향했기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어진 왕이었다. 게다가 태종은 양위 쇼 등으로 신하들의 충성도를 시험하는 등 정치적 감각도 매우 뛰어나 오히려 신하들을 쥐락펴락했다. 태종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건국 초기까지 이어지는 난잡한 권력 싸움과 왕위 투쟁에서 모두 승리한 정치 9단이자 행동력이 뛰어나고 가차 없으면서도 명민한 인물이었다. 또한 상왕이 되어서도 군권을 자신이 쥐고 세종의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그의 처가를 박살내고 국정의 일부를 세종과 나눠서 담당하는 등 실권을 갖고 있었기에, 대왕 세종에서처럼 왕위를 내려놓고 뒷방 늙은이가 되는 모습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권력을 나눠 가진 다른 왕들과 달리 세종과 태종은 사이가 좋았다. 용의 눈물에서 태종이 상왕이 되어서 심온의 집안을 박살낼 당시 왕인 세종이 장인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장면이 있는데, 태종은 처음에는 부드럽게 존댓말로 타일렀지만 세종이 계속 심온의 구명을 요청하자 벌컥 화를 내며 꾸짖는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상왕이 되고 난 뒤에도 그 정도의 권위는 지니고 있었다. [90] 물론 작품이 다르다 보니 같은 인물이라도 이미지가 다른데, 용의 눈물에서는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숙청된 이후로는 실권을 잃은 채 태종을 상대로 발악하는 면모만 남았지만, 대왕 세종에서는 민씨 4형제가 모두 불귀의 객이 된 뒤로도 중전으로서의 위세를 잃지 않았다. 실제로는 용의 눈물 쪽이 역사적 반영이 훨씬 잘 된 편이다. [91] 김무생은 SBS 드라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마지막으로 2005년 4월 16일, 지병인 폐렴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으며, 김흥기는 KBS 사극 무인시대 이후 연극 《에쿠우스》 공연 과정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후 5년간의 투병 끝에 2009년 3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92] 이후 두 사람이 같이 출연한 마지막 작품은 2002년에 나온 제국의 아침으로, 당시 김무생은 왕규, 김흥기는 왕식렴으로 대립 구도를 형성하였다. 유튜브 KBS Drama Classic 채널에서 2020년 12월 28일(월)부터 스트리밍되었으며 이후 2023년 현재까지 5번 스트리밍되었다. [93] 사극 복장과 분장은 한 번 하는데 손이 엄청 많이 간다. [94] 체험 현장이었던 옥수수밭 주인이 봉투 겉봉에 상감마마, 중전마마라고 적었다. [95] 방송사 측에서는 해당마의 DJ 이니셜이 말 목장(외국쪽 목장이라는 이야기가 있다)의 소유주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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