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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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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상 대상 | ||||||||||||||||||||||||||||||||||||||||||||||||||
하희라 (1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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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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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문희 (1995년) |
연기대상 대상 | ||||
김수미 (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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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 (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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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1988년) |
역대 | ||||
남우주연상 | ||||
제26회 ( 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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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 19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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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 1990년) |
이영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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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 (추억의 이름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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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코리안 커넥션) |
제29회 ( 19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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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 19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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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 1993년) |
이영하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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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 ( 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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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 ( 살어리랏다) |
제30회 ( 19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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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 1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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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 1994년) |
이덕화 ( 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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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 ( 살어리랏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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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 박중훈 ( 투캅스) |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 ||||
제23회 ( 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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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 19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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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 1989년) |
신성일 (레테의 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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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 (접시꽃 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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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 ( 성공시대)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5년 |
이름 | 이덕화 |
분야 | 배우 |
은관문화훈장(2등급) | |
연도 | 1993년 |
이름 | 이덕화 |
분야 | 배우 |
화관문화훈장(5등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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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24242><colcolor=#fff> 이덕화 Lee Duk-hwa |
|
|
|
이름 | 이덕화 (李德華[훈음], Lee Duk hwa) |
출생 | 1952년 5월 8일[2] ([age(1952-05-08)]세)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3]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연안 이씨 (延安 李氏) |
신체 | 174cm[4], 85kg, B형[5], 275mm |
가족 | 아버지 이예춘[6], 어머니 강원숙[7] |
배우자 김보옥(1952년생)[8] 아들 이태희[9] 딸 이지현(1984년생) |
|
학력 |
서울동신국민학교 (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 졸업) 경희고등학교 ( 졸업)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10] ( 연극영화학[11] / 학사) |
종교 | 불교 |
병역 | 대한민국 공군 보충역 방위병 상병 소집해제[12] |
소속사 | 디에이와이엔터테인먼트 |
데뷔 | 1972년[13] 동양방송 13기 공채 탤런트 |
취미 | 낚시, 골프, 축구, 검도 |
호 | 만광(滿光)[14] |
링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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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탁~해요![15]
대한민국의
배우.당대 터프가이의 대명사. 이덕화는 전성기에 반항적이고 거칠지만 여성을 목숨 걸고 사랑할 줄 아는 남성상을 연기했다. 1970년대엔 청춘스타로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엔 주연급 남자배우로서 활약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군 장성, 재벌 총수, 기업 경영자, 국가정보원장, 국회의원, 전직 대통령 등 높으신 분들을 연기한다.
2. 연기 활동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 시절 비교적 어린 나이로 동양방송 13기 공채에 합격해 연기계에 입문했으며 야성적인 이미지로 큰 인기를 모은 하이틴 스타였다. < 진짜 진짜 잊지마> 등 영화 "진짜 진짜" 시리즈에서 임예진과 콤비로 찍은 작품은 장안의 화제였다. 물론 24살의 나이에 고등학생 역을 맡았으며 게다가 당시 20대는 지금 20대보다 노안이라 지금의 30대 중반~40대 초반같이 보여 좀 괴리가 있다.[16]그 당시 임예진은 명실상부한 국민 여동생이었고, 상대역은 당연히 이덕화 아니면 전영록이었다. 영화 < 진짜 진짜 미안해>, < 진짜 진짜 잊지마>, <이런 마음 처음이야>, <이 다음에 우리는>, <첫 눈이 내릴 때>, <맨발의 청춘(1979)>등을 이덕화와 함께 찍었다. 전영록과는 <너무 너무 좋은 거야> 등을 함께 했는데 작품의 숫자로만 봐도 이덕화와 함께 한 작품이 많다.[17] 1970년대에는 TBC 공채로 간판스타였으나 1980년대 초반부터는 MBC로 무대를 옮겨 TV 드라마와 쇼프로그램 MC로 활약했다. 이 시절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이라는 대표작을 남겼는데 워낙 흥행작이라 그런지 자료가 남아서 2020년대 가끔 KTV에서 방영 중이다. TBC 시절 작품은 테이프 재활용으로 대부분 사라졌는데, 그래도 유튜브에 한두회 업로드된 작품이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복귀하여 많은 흥행 영화의 주연을 맡았고, 1989년, 1992년, 1993년에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획득했으며 1993년엔 살어리랏다로 모스크바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이 지긋한 아버지 역이나 사장님, 회장님, 혹은 조선시대 왕, 역사 유명인물 등으로 많이 출연해서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카리스마 연기를 보여주며 거물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현재는 과거와 달리 웃기면서 카리스마 있는 인물( 대조영의 설인귀), ( 샐러리맨 초한지의 진시황)이라든가, 마냥 웃긴 인물(최근 드라마에서 그의 역할)도 맡으면서 희극적인 방향으로 연기 변신을 꾀하고 있다. 물론 천추태후의 강감찬이나 근초고왕의 주몽 역처럼 고전적인 카리스마 역할도 여전하다.
당대의 탑 연기자로 청춘스타부터 액션, 멜로 등 다양한 연기를 했지만, 악역 연기까지 최고 수준이었다. 사실 악역 연기가 독보적이다. 특히 사랑의 종말의 남현필 회장은 인간이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는지를 똑똑히 알려준 배역이다.[18] 이덕화는 여기서 전무후무한 최강의 악역을 시전했다. 악역 전문 배우 지망생들에게는 사랑의 종말이 최고의 추천작이다. 그리고 제5공화국도 흑화되는 육군 장성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했다. 외모는 박용식이 갑이지만 행동은 이덕화가 갑이라는 얘기까지 있다. 악역이라면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이 그나마 맥을 이어가지만, 카리스마는 아직도 이덕화가 엄청나다.
준수한 외모로 패션 모델, 광고 모델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쌍방울의 트라이 광고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음악은 요사이나 큰 차이가 없다.
MC계에서도 대활약했으며 곽규석의 뒤를 이어 1970년대 후반, MBC의 <토요일 토요일 밤에>의 남성 진행자로 당시 인기 여성 배우 겸 MC 명현숙과 호흡을 맞추면서 처음 MC로 활동 하기 시작했다. <토요일 토요일 밤에>가 1981년에 <쇼 2000>으로 개편되면서 배우 이자 라디오 DJ 겸 TV MC 정애리와 호흡을 맞추었고, 그 뒤로 여러 여자 MC와 호흡을 맞추어 진행하면서 쇼 프로그램 MC계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였고, <쇼 2000>이 1985년 11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이란 주말 밤 초대형 호화 버라이어티 쇼로 개편되면서 송옥숙을 시작으로 1991년 김희애 와의 진행을 끝으로 토요일 저녁 생방송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 거의 1n년 동안 MC를 본 경력이 있다. 또한 1991년 민영방송국 SBS가 개국하면서 SBS로 넘어가서 개국 축하쇼를 진행하였고, SBS의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쇼 서울서울>의 초대 진행자로 1992년까지 진행한 후에 <쇼 서울서울>은 정재환과 뮤직파워가 뒤를 이어 진행하면서 그는 MC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 후 1993년 4월 11일 '93 KBS 신인탤런트쇼'에 MC를 맡았고[19] 12월 31일 93 MBC 한국가요제전을 끝으로 MC는 당분간 보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MBC의 <댄싱 위드 스타>란 동명 외국 프로그램의 한국판 리메이크 춤 경연 시리즈 프로그램을 마지막 시즌인 시즌 3까지 이소라(시즌 1), 김규리(시즌 2, 3)와 함께 진행하며 다시 MC로 복귀하여 다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에는 KBS에서 이덕화쇼를 진행한 경력이 있고, 2020년대에는 MBC Every1에서 <나는 가수다>의 트로트 가수 버전인 <나는 트로트 가수다>를 단독 진행한 MC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출귀몰한 레전드. 그때의 이덕화는 지금으로 치면 장동건과 유재석을 합쳐놓은 수준의 인물이었다. 당시 킨사이다 광고 #와 로얄디 # 광고를 보라! 금성 캐논 카메라 # 광고에서는 손도 안대고 플래시를 터트린다.
연기에 집중하느라 예능계에선 한동안 볼 기회가 없었지만 2008년부터 다시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 녹슬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덕화가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 출연하면 시청률이 5~7% 정도 오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3개의 고비가 있었다. 그것은 젊은 나이에 찾아온 탈모와 오토바이로 인한 교통사고, 총선 출마였다.
2001~02년 여인천하 윤원형 이래 2003~04년 무인시대 이의민과 금쪽같은 내 새끼 송민섭 - 2005년 제5공화국 전두환과 황금사과 박병삼 - 2006~07년 대조영 설인귀 - 2008년 애자 언니 민자 한범만과 강적들 강민국 - 2009년 천추태후 강감찬 - 2010년 전우 사단장과 자이언트 황태섭 회장과 근초고왕 동명성왕 - 2011년 마이더스 김태성과 스파이 명월 주회장 - 2012년 샐러리맨 초한지 진시황과 메이퀸 장도현 - 2013년 야왕 백창학과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인조과 비밀 조한일 - 2014년 호텔킹 이중구 - 2015년 내 마음 반짝반짝 이진삼과 빛나거나 미치거나 왕식렴과 하이드 지킬, 나 구명한과 장사의 신 - 객주 2015 신석주 - 2016년 몬스터 황재만과 38사기동대 왕회장 - 2017년 피고인 2460과 수상한 파트너 변영희와 최고의 한방 이순태와 이판사판 도진명 - 2018년 착한마녀전 오평판 테크를 밟으며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2010년부터는 두개 이상 동시에 하고 있다. 착한마녀전이 끝난 뒤로 드라마는 잠시 휴식기를 가졌으며 2022년부터 다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 대배우이다.
3. 예능 MC 활동
MC로써의 능력은 탁월하며 타고난 달변가이다. 작정하면 낚시라는 소재 하나로 2시간 짜리 예능 프로그램을 꽉 채울 수 있다. 원로배우답게 여태까지 삶의 경험으로 쌓인 각종 썰의 양도 어마어마한데, 타이밍을 조절하며 썰을 풀어내는 능력까지 탁월하다.대표적인 취미이자 소재거리는 낚시다. 앞서 말했듯이 낙선 뒤에 무인도에 가서 낚시를 하며 지냈다는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전부 뒤로 자지러질 수준으로 재미있는데 지금까지 한 방송에서 똑같은 소재의 낚시 얘기를 겹쳐서 한 적이 거의 없다. 한 예시로 무릎팍도사(2008년 8월 27일)에 출연했을 때는 방송 분량의 상당량을 그냥 낚시 이야기로 채웠다. 진행자인 강호동과 유세윤, 올밴이 다른 이야기도 넣어서 진행해야 되는데, 낚시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MC들이 빵터지고 당황하며 중간에 끊지도 못하고 계속 이덕화의 얘기에 끌려다녔다. 실제 내용은 낚시 이야기라기보단, 낚시하러 갔다가 갑툭튀해서 생포한 다른 야생동물들 이야기라 월척은커녕 물고기도 아닌 이야기들이 많았다. 유명하고 인증샷도 있는 상어 낚시 말고도, 낚시하다 야생 오리, 갈매기, 노루, 거북이, 고슴도치를 우연히 생포했던 이야기를 무릎팍도사에서 털었다. 여기에 낚시 이야기에 맞는 장면을 합성하다가 포기했는지 제작진들이 '이젠 어떻게 합성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라는 자막을 올릴 정도였다. # 도시어부에서 자녀들한테도 낚시를 상당히 권유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이 좋은거를 왜 안하냐는 푸념은 덤.
다른 주력 소재로는 가발 이야기로 수십분을 채운적도 있었는데 이때도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은게 허다하다. 나이차이가 굉장히 많이나는 이하늘과 낚시와 대머리를 소재로 하여 접근하자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사실 가발이나 낚시썰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걸 재밌게 풀어내는 이덕화의 언변이 대단한것. 무슨 썰을 풀던 엄청 흥미있게 말할 수 있는 달변가이다.
유행어는 그의 리즈시절에 "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MC시절 선보인
"부, 타아악~ 해요~"
특히 이 멘트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들을 소개하면서 곁들인 최고의 멘트였다. 당시 무대에서 최고의 카리스마로 인기를 얻었던 전영록이나 김완선을 소개하는 순서에서는 이 멘트가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아니, 이 멘트가 붙여지지 않으면 인기가수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멘트였다.[20]그리고 하이모 광고에서 나온[21]
아~야~
모발~ 모발~
부[22]와 타악이 키 포인트. "해요~"는 말미에 살짝 붙이듯 하면 된다. 최대한 느끼하고 목소리를 최대한 깔면서 허스키하게 해야한다.[23] 이 느끼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붙어서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을 때도 자신을 돕던 행인이 "어? 이덕화 아니야?"라고 하자 "맞~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992년에 SBS 쇼 서울서울을 마지막으로 정규 프로그램 MC를 은퇴하고 간간이 특집프로그램 위주로 가끔 나오다가 1993년 MBC 한국가요대제전 MC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2009년 KBS 연기대상의 MC를 맡은데 이어서 2010년 추석, SBS 추석특집으로 ' 추석특집 스토리쇼 부탁해요'를 했다. 이덕화쇼에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선보였던 마이크 뜯어먹기 같은 것을 다시 보여주었다. 보조MC들로 신봉선, 아이유, 이홍기, 이수근, 주현미였다.
2011년 설날에는, 설날특집으로 MBC ' 아이돌 7080'을 호란과 진행한다고 한다. MBC 쇼프로 MC를 맡는 것은 거의 20년 만에 맡았다.
2011년 6월 MBC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후속으로 정규 프로그램인 댄싱 위드 더 스타의 진행을 맡았다. 시즌 1의 파트너는 이소라. MC를 그만둔지 20년이 지났지만, 20년만에 녹화방송이 아닌 생방송 진행을 잘 소화했다. 그리고 시즌 2~3의 파트너는 김규리였다. 반응은 극과 극인 듯. 어떤 이는 그의 진행을 반기는 이도 있고, 신선하다는 평이 있지만, 촌스럽다는 평도 있다.
2010년대에 KBS에서 <이덕화 쇼>를 진행하였으며, 2020년에는 MBC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나는 가수다의 트로트 가수 버전인 MBC Ever1의 나는 트로트 가수다를 단독 진행하였다. 나는 트로트 가수다 에서 그는 "보여주세요~!"라는 또 다른 유행어 겸 전설적인 MC 멘트를 남겼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 프로그램인 도시어부에 고정으로 출연하며 진정한 덕업일치 중이다. 도시어부에서 열정적인 낚시 모습과 꿀리지 않는 예능감을 보여주며 올드 세대는 물론 젊은 세대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4. 정치 활동
4.1. 정치 경력
1995년 김진명 원작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대통령으로 나왔으나 흥행과 평에서 아주 쫄딱 망해서 타격을 받았던 이덕화는 오래가지 않아 1996년에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24] 경기도 광명시 갑 선거구에 신한국당 후보로 나가 동교동계의 중진인 새정치국민회의 남궁진 후보와 붙어서 근소한 차로 졌다. 당시 남궁진 25,852표, 이덕화 24,405표로 불과 1,447표 차이였다.사실 이덕화가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그를 위해 충고를 한 사람도 있었는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경기도 구리시에서 출마해서 당선된 정주일 의원, 즉 코미디언 이주일이었다. 이주일은 평소 이덕화, 조용필과 나이를 초월하며 자주 어울려 놀던 절친 관계였는데 선거 유세 기간에도 인기 연예인으로서의 체면만 살리고 인기에만 연연하며 돌아다니는 이덕화를 보자 이주일이 "너 그러다 진다"며 최대한 불쌍해 보이도록 물도 마시지 말고 마른 입술에 다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덕화가 이주일의 이 충고를 안 들었다고 한다. 만약 이덕화가 이때 이주일의 충고를 들었다면 연기가 아닌 실제 정치인 이덕화가 탄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이덕화는 이 선거에 워낙에 많은 돈을 부어서 거의 재기불능상태가 되었다.[25] 결국 이 때문에 연기 활동 등을 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무인도에서 한동안 혼자 짱박혀 살았다. 국회의원 낙선 후부터 가발 CF를 찍기 전까지 전혀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낚시하면서 물고기랑 이야기(...)하고 지냈다고 한다. 이덕화는 1997년에 잠깐 돌아왔고, 1998년 초부터 드라마를 통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다.
훗날 KBS 해피투게더 3의 사투리 상황극 코너인 '웃지마 사우나'에 출연해서는 " 이장선거 나갔다가 새됐어~", "논, 밭떼기 다 날라가고~(선거 때문에 재산을 많이 썼다는 의미)" 라는 드립을 쳐서 MC들을 당황시키는가 하면,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는 "정치자금법에 무지했던 탓에 알거지가 됐다."라고 언급하는 등 여러모로 총선 출마는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회고하고 있다.
은둔 생활 중에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몇 주년 특집 프로가 나갔다. MBC에서는 원조 MC인 이덕화를 초청하려고 했는데 무위로 돌아가고 대신에 낚시터에서 걸으면서 시청자들에게 인사하는 동영상으로 대체했다. tvN에서는 실패한 연예인 중 한 명에 꼽혔으며 멘트가 "대선은 연기로만 하면 될 껄 그랬다"라고 말했다. 도시어부에서도 "다들 당선 된다고 그러다가 떨어지니 다들 모른척 했다면서 그거 왜 했나..."라는 언급을 한적이 있다.[26]
그런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덕화가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이유는 이덕화와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의 장녀 김혜영은 이덕화와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안면이 있었는데, 1992년 LA 폭동이 터지고 나서 한인 교민의 피해가 막심했기에 이주일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교민을 위한 위문공연차 LA를 방문했다가 김혜영과 만났고, 이 인연으로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까지 만나 곧 있을 제14대 대통령 선거 지원을 부탁받았다. 이덕화가 김영삼을 처음 만났을 때 김영삼은 이덕화에게 친근한 말투로 "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 아빠를 잘 알고 있으모 연락을 해야지 내한테 와 연락을 안 하노? 연락 좀 하고 살재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덕화 자신은 단지 친구의 아버지가 잘 되라고 별 생각 없이 지원 유세에 참가했고 # 실제로 김영삼의 대선 후보 TV 광고의 단독 모델로도 출연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김대중 걸음걸이 비하 논란이 일자 국회에 방문하여 해명하는 일도 생겼다. #
그렇게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덕화는 김영삼의 힘으로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광명시 갑[27] 선거구 국회의원에 도전했지만 상술했듯 낙선하고 그때부터 정치에는 다시 뛰어들지 않았다. 낙선 이유는 아무래도 친서민적 이미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연기자로 재기하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공식 지지했으나 공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28] 다만 관청 주도의 영화제라는 충무로국제영화제[29] 집행위원장을 맡은 적은 있으나 영화제가 막장이 되면서 이것도 그에게 별로 안 좋은 기억이 됐다.
이명박을 지지했음에도 이명박이나 박근혜의 정책에 부정적 의견을 보이기도 했으며, 정계 입문 계기와 함께 생각해 보자면 보수정당의 열성 지지자가 아니라 생활 보수 정도지만 친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4.2.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신한국당| |
1996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6 - 현재 |
탈당 정계 은퇴 |
4.3. 선거 이력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24242><tablebgcolor=#fff,#1c1d1f><rowbgcolor=#424242><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광명 갑 |
[[신한국당| |
24,405 (33.30%) | 낙선 (2위)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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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대 총선 ( 경기 광명시 갑) | }}}}}}}}} |
5. 특징
탈모 때문에 현재 그의 머리는 가발이다. 밑에 후술할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머리가 타버려서 그랬다는 루머도 있으나 그의 탈모는 사고 전부터 있었다. 1980년대 초반에 찍었던 킨사이다 광고들을 보면 이미 탈모증세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의 부친 이예춘도 탈모가 있었고, 가발을 착용하거나 일제 발모제를 쓰다가 냄새 때문에 상대 여배우한테 면박도 받는 등 2대가 탈모로 고생했다.탈모가 시작되고도 한참을 가발을 쓰지 않아서 다들 대머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동안은 본인이 컴플렉스가 있어서 쉬쉬하였다. 한 마디로 전부 다 알고 있는 그런 공공연한 비밀이었을 뿐. 하지만 본인이 가발회사 모델이 되어 크게 기사회생에 성공한 후로는 대놓고 대머리와 가발을 개그 소재로 쓰고 있다.
힐링캠프에 나온 바에 의하면, 처음에는 가발 CF가 들어온 것은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나서 일이 뚝 끊긴 뒤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꾹꾹 눌러참으면서 거절한 뒤 부인에게 속상한 자신의 심경을 위로 받고자 그날 일을 하소연했으나, 이미 대머리인 남편과 10년을 살며 적응한 부인의 입장에서는 굴러 들어온 일을 발로 차는 뻘 짓거리로 느껴졌고 그래서 이덕화에게 "그게 어때서 그래?!?!!!!"라고 한심하다는 듯이 일갈했다고 한다. 그래서 와이프 때문에 등떠밀려 한 CF 덕분에 그 후 재기에 성공하였다. 현재 24년째 같은 회사 모델을 하고 있다. 이쯤 되니 가발 회사에서 이덕화를 반쯤 명예 이사급으로 챙겨준다는 농담이 있다. 실제로 자기가 어떤 배역을 하면 아예 그 회사에서 TF팀을 짜서 그 배역에 어울릴 가발을 만들어 보낸다고 한다. 특히 제 5공화국 드라마 촬영 당시, 일반적으로 굳이 수요가 없는 반 대머리가발을 배역에 맞게 커스텀해서 만들어준것도 이 회사이다. 따지고 보면 가발회사와 상부상조하고 나서 이덕화 본인에게 배우로서도 상당히 이득이다. 배역에 어울릴 헤어스타일을 미리 준비만 해뒀다면 즉석에서 교체가 가능하고 흐트러지거나 손상의 걱정도 다른 배우에 비해 거의 없다시피 한다.
아예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도 가발 언급이 있는데 이쯤 되니 가발 회사에서 가발을 선택하는 메뉴얼에 별다른 설명도 없이 "덕화형 가발" 이라는 상품명이 떡하니 대표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옵션으로는 운도형 가발도 있다고...
처음에는 탈모가 와도 가발을 쓰지 않았기에 고뇌하는 장면에서 남들은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데, 이덕화만 하늘을 쳐다보는 등 탈모를 숨기려 노력했다. 가발을 처음 착용한 때가 1987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인데, KBS2 <상상플러스> 시즌2 2008년 8월 5일 방송분 '대박대담' 코너에서 본인이 증언하길, 김수현 작가가 "그 머리로 어떻게 주인공을 하느냐?"라며 가발을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 촬영 중에 땅바닥에서 구르는 장면에서 가발이 180도로 돌아가서 다시 같은 장면을 서너번 찍었단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매니저의 가장 큰 업무가 가발을 가지고 다니면서 맞춰주는것이라는데 만에 하나 기자들 앞에서 대머리가 공개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90년대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개인적인 일로 멀리 있던 매니저가 기자보다 빨리 다가와서 황급히 환자의 머리에 가발을 씌워주었다 고 한다. 당시 자료 화면에도 침대 위에서 아파하는 이덕화의 머리 부분은 카메라 화면이 잘려있다.
사진의 탈모 상태가 엄청나 보이지만 실제로 사진만큼 벗겨진 것은 아닐 것이고 가발 착용을 위해 뒷머리와 윗머리 상당 부분을 삭발한 걸로 보인다. 자세히 보면 M자형으로 옅게 머리를 민 흔적이 있다. 2002년 5월 1일 수원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한일 연예인 친선 축구대회에서 헤딩을 선보이다 카메라 앞에서 모자가 벗겨져 실제 머리가 공개 된 뒤로는 대머리를 숨기는 컨셉에서 벗어났다. 위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다.
그 후 2005년 제5공화국에서는 주인공역으로 출연하는데, '이덕화가 가발을 벗고 TV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 물론 다 깐게(?)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전두환의 대머리 스타일을 맞추기 위해 위를 살짝 가리는 반 백가발(부분가발)을 쓰는 등 오히려 스타일링에 신경썼다. 어쨌든 연기는 대단했는데다, 이땐 오히려 대머리라는 점이 장점이 되어 악역으로서의 굉장한 시너지효과를 발휘해서, 이덕화의 전두환 연기는 그야말로 전설로 남았다.[30] 외모로는 박용식이 더 닮았지만 카리스마 담긴 연기에 본방 방영 후로는 일부에서 제기하던 미스캐스팅 이야기가 쑥 들어갔다.[31]
설운도와 함께 연예계 대머리 투톱이다. 이덕화와 호형호제하는 개그맨 최병서는 나중에 그의 조카딸과 결혼했는데, 신혼여행을 갔다가 수영장에서 누가 아는 척을 했다. 최병서가 누구시냐고 묻자, "나야, 나! 설운도!"라고 대답했다. 그걸 본 새색시가 깔깔 웃으면서 "어머, 우리 아저씨[32]보다 심해!"라고 말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2012년 연말시상식에는 반 백가발을 쓰고 나왔다. 이때 이미 환갑을 넘었으며 그때부터 반 백가발을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서 쓰고 있다. 1999년 가발회사 '하이모'의 광고를 찍으면서 총선 실패의 후유증을 이겨내고 다시 화면에 나올 수 있었는데, 그때부터 당당한 탈모인으로써 20년이 넘도록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하이모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하이모 회사 측에는 아예 이덕화에 대응하는 가발 전담팀이 있으며, 드라마나 영화에 이덕화가 캐스팅되면 대본부터 연구해서 극중 캐릭터에 가장 잘 맞는 가발을 맞춤 제작한다고 한다.
또한 이덕화에게는 가발에 대한 슬픈 에피소드가 있다. 코미디언 이주일과는 살아생전에 나이를 초월해서 거의 절친에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는데[33] 말년에 그만 이주일이 폐암 진단을 받고, 병세가 너무 심각한 수준이라서 그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할 것이라는 통보를 듣는다. 이 사실을 이주일 본인에게는 알릴 수 없었으나 가까운 주변인인 이덕화는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주일은 가발 모델로 활동하던 이덕화에게 맞춤 가발을 부탁했고, 이덕화는 퇴원하고 나서 가발 맞추면 되지 않겠느냐고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결국 이주일이 원하는 대로 가발을 맞춰줬다. 이주일은 이덕화가 맞춰온 가발을 써 보더니 매우 흐뭇해 하면서 "내가 완치되면 이 가발을 쓰고 미국을 다녀온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때 이덕화는 눈물이 핑 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주일이 2002년 월드컵을 산소 튜브끼고 관람했던 게 바로 이 시기이며, 그로부터 2주일 뒤 이주일은 사망했다. 이덕화는 이를 회고하면서 "그 가발 쓰고 미국이나 한번 가 보고 돌아가시지..."라고 아쉬워했다.
김하균이 모발이식을 성공적으로 받고나서 절친한 선배인 이덕화에게도 모발이식을 권유 했지만, 이덕화는 가발회사와의 24년간의 전속모델 관계를 생각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6. 출연 작품
자세한 내용은 이덕화/출연작 문서 참고하십시오.7. 음반
- 1983년 4월 1일 이덕화 & 황신혜 시낭송 1집 (정규)
8. 수상 경력
- 1983년 MBC 연기대상 MC 부문 특별상
- 1985년 제21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인기상 ( 사랑과 진실)
- 1987년 제23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인기상 ( 사랑과 야망)
- 1987년 MBC 연기대상 대상 ( 사랑과 야망)
- 1988년 제2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접시꽃 당신)
- 1989년 제28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추억의 이름으로)
- 1990년 MBC 연기대상 MC 부문 특별상
- 1991년 제2회 춘사대상영화제 남우주연상 ( 개벽)
- 1992년 제30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 개벽)
- 1992년 제2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인기상 ( 개벽)
- 1993년 제18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은게오르기상(남우주연상) ( 살어리랏다)
- 1993년 제31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 살어리랏다)
- 1993년 제4회 춘사대상영화제 남우주연상 ( 살어리랏다)
- 1993년 화관문화훈장 수훈
- 1994년 KBS 연기대상 대상 ( 한명회)
- 2005년 MBC 연기대상 연기자 부문 특별상 ( 제5공화국)
- 2007년 KBS 연기대상 남자 최우수 연기상 ( 대조영)
- 2010년 SBS 연기대상 특별기획 부문 조연상 ( 자이언트)
- 2011년 제49회 영화의 날 배우 부문 자랑스러운 영화인상
- 2012년 MBC 방송연예대상 쇼/버라이어티 부문 인기상
- 2012년 MBC 연기대상 남자 황금연기상 ( 메이퀸)
- 2012년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 부문 남자 특별연기상 ( 샐러리맨 초한지)
- 2014년 SBS 연기대상 단막특집극 부문 특별연기상
- 2015년 은관 문화훈장 수훈
- 2015년 SBS 연기대상 공로상
- 2017년 제6회 대한민국 톱스타상 시상식 특별 공로상
- 2018년 제24회 연예예술상 대상
- 2019년 고객브랜드충성대상 남자배우 부문
- 2021년 MBC 연기대상 공로상 ( 옷소매 붉은 끝동)
9. 사건 사고
무려 2번이나 큰 교통사고를 당한 인물이다. 특히 첫번째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 했다.9.1. 오토바이 사고
청춘스타로 잘 나가던 1977년 4월 7일, 오토바이를 몰고 가던 중 현재의 한남동 타워호텔 앞 고가차도 부근에서 시내버스와 충돌하여 수십미터를 끌려가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이 부상으로 인해 3년 넘게 투병해야 했는데, 이덕화 본인 말로는 처음 10달 정도는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아침에 비명으로 깨서 저녁에 비명에 잠든다고 표현했을 정도. 그도 그럴것이, 이 교통사고로 인해 무려 53번에 달하는 대수술을 받았으며, 사고 직후 첫 2주 동안 혼수상태였던 것도 모자라, 기적적으로 깨어난 뒤로도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는 10개월 동안 이덕화는 툭하면 위독해져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덕화 때문에 긴급호출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렇게 위독할 때마다 이덕화는 '아, 이제 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운 좋게 버텨냈고 살아남아서 일반병실로 옮겨져 2년 정도 더 치료를 받았다. 당시 영화 상대역으로 자주 호흡을 맞추었던 임예진이 문병을 갔는데, 사고를 당한 몰골이 너무 처참한지라 사람이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있어서 마치 시트와 매트리스 사이에 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너무 무서워서 가까이 못 가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어야 했다고 술회할 정도.[34]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고였냐 하면 이덕화는 엉덩이살이 아예 없어져서 다른 부위의 살을 이어 붙여 엉덩이를 새로 만들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무려 4,000바늘이나 꿰매는 초대형 수술을 받았다.그리고 수술 후에도 이 사고로 인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았고, 2009년에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무려 13시간에 달하는 대수술까지 받았다고 한다. 본인이 장애가 있음에도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식 석상에서 상대 후보였던 김대중과 정주영을 장애인에 빗대 비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이로 인해 비판받았지만 본인은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애초에 저 두 사람은 각기 친구 아버지와 애증의 관계이거나 정치에도 뛰어든 지인을 직접 영입한 입장이니 타격만 받을 일이다. 사고 당시에 생긴 흉터가 있기 때문에 그 뒤로는 대중목욕탕을 갈 수 없다고 한다.
이 당시 이덕화의 아버지인 원로배우 이예춘은 투병 중이었는데,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그만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덕화의 아내인 한국무용가 김보옥의 말에 따르면 병실 앞에서 이예춘이 선 채로 의식을 잃어 실금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최불암 등 MBC 소속 탤런트들이 이덕화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이덕화에게 성금을 보냈다. 이덕화 본인은 훗날 방송에서 여러 번 아버지를 언급하였는데, 위독해진 아버지를 자신(이덕화 본인도 부상이 심각하니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과 어머니 등 주변 사람들이 병원의 다른 층으로 침대를 밀며 이동시키는 중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덕화 본인의 손을 잡고 운명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사고를 당한 충격 때문에 아버지가 사망한 것에 큰 죄책감을 느낀다고도 언급하였다. 이예춘은 사망 직전까지도 아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사고가 난 오토바이는 가수 겸 배우 전영록의 오토바이였다고 한다. 전영록의 부친 황해는 아들이 오토바이를 절대로 못 타게 막았고, 이덕화가 빌려 타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사실 이덕화는 당대 기아(기아-혼다)[35]에서 판매하던 오토바이 광고 모델도 하는 등 오토바이를 매우 좋아하였다.
후에 이덕화는 방송에서 이 당시에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 김보옥이 3년간 힘들게 자신을 돌봤다고 밝혔다. 그것도 자신의 대소변까지 다 받아주는 수준으로. 자기 만나지 말고 다른 사람 만나라고 하는 이덕화를 정말 헌신적으로 돌본 모습에 감동받아 결혼했으며, 자신의 인생은 내인생이 아니라 이제 부인이 만든 인생이다 생각해 재산 전부를 부인 명의로 해놨다고 한다. 이덕화 본인이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2019년 2월 26일 시작한 1인방송 티비의 1화 에피소드의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아내가 아들을 임신했을 때는 자신도 병원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몸이 욱신거린다는 느낌은 들었었지만, 아내가 자신이 입원했을 때 3년을 이러고 살았었다는 걸 회고하면서 꾹 참아냈었다고 한다.
9.2. 자동차 충돌
관련 기사: #1, #21990년 6월 24일에 전라북도 정주시(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일동의 한 삼거리에서 이덕화가 몰던 지프가 대한고속 버스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다행히도 첫번째 사고만큼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아서 치료 도중에도 영화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치명상만 입지 않았을 뿐이지 이 사고도 대단히 위험했다. 두시탈출 컬투쇼 2015년 8월 4일 방송에서 당시 정황을 언급했는데, 낚시를 하러 가다가 당한 사고였다고 한다. 자동차 전방 유리를 뚫고 보닛까지 상반신이 나왔지만 갈비뼈는 유리 사이에 끼어 버린 상태였다.[36] 근처에서 가게를 하던 어느 아주머니가 수건을 갖고 나와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돌봐 주었는데, 이덕화가 나중에 그 여성에게 따로 찾아가 감사인사를 했다고 한다.
10. 여담
- 자타공인 연예계의 대표적인 낚시광이다. 낚시꾼으로서의 내공은 방송에서도 자주 발휘되는데 최병서 등 주변인들의 말에 의하면 예능에 출연해서도 낚시와 관련된 내용 하나만으로 좌중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7년 들어서는 이경규와 함께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라는 낚시 전문 예능 프로그램을 하기에 이르렀다.[37] 이 점은 똑같이 대배우인 아버지를 두고 2세대 원로배우로 성공했던 일본의 마츠카타 히로키와 매우 비슷하다. 둘 다 중증 낚시광[38]이라 낚시 이야기만으로 자기 분량을 확실히 뽑아내는 입담, 오랜 방송생활에서 체득한 특유의 내공과 카리스마 연기 & 이와 정 반대되는 미칠듯한 예능감과 순발력을 겸비한 점, 호방하면서도 자상하다는 후배들의 평가[39], 사극과 현대극을 막론하고 연기 스타일이나 맡은 역할이 대부분 높으신 분들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접점이 많다. 워낙 비슷하다 보니 한일 양국의 드라마에 정통한 팬들 중에서는 이덕화를 한국의 마츠카타 히로키라 칭하는 이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차이점도 많다. 나이는 이덕화가 10살 더 어리고 2남 중 장남인 마츠카타와 달리 이덕화는 외동이다. 마츠카타는 심각한 여성편력으로 평생 세간에서 악평이 자자했지만, 이덕화는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40] 거기다 마츠카타는 자녀 복[41]조차도 최악이어서 매스컴에 수시로 오르내리는 사고뭉치들로 악명이 높은 반면에, 이덕화는 자녀 문제로도 구설수가 없어서 정말 깨끗하다.[42]
- 일생동안 수없이 많은 배역을 맡아봤지만, 이덕화가 지금까지도 못해서 안타깝다고 하는 배역이 바로 연산군이다. 실제로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에서 제의가 들어왔었지만, 당시 바쁜 스케줄로 고사하였고 그 뒤로 단 한번도 제의가 없어서 결국 맡지 못하였다. 만약 맡았더라면 설중매 그리고 그 후속작인 풍란까지 엄청난 포스로 연기해내면서 그 인기를 더욱 더 살려나갔을 것이다. 수많은 사극을 출연했지만 이 인물을 맡지 못해서 두고두고 아쉬워해서 방송에서 늘 언급하곤 한다. 실제 연산군은 30대 초반에 사망했기에 보통 배우의 나이를 적게는 20대 후반부터 정말 동안이어도 40대 정도에서 끊기 때문에 앞으로도 맡기가 어려울 것이다.
- 위 서술에서 보듯 과거의 예능 MC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2000년대 이후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묵직한 예능 존재감을 구사한다. 유재석의 공감토크쇼 놀러와, 김승우의 승승장구 등에 게스트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분명 메인 게스트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예 프로그램 후반부가 이덕화 위주로 흘러갈 정도였다.[43] 방송분을 자세히 보면 토크의 호흡이나 깨알 재연 같은 부분에 연기력 내공이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승우의 승승장구 출연분 1 출연분 2
- 1980년대 쇼프로그램MC 인기를 바탕으로 현장 MC, 밤무대에도 많이 출연했다고 한다. 이때 후배인 강남길이 한양대 영어영문학과 출신이라서 영어 멘트를 작성해 줬다고 한다. 강남길이 이덕화같은 TBC 출신에다 임예진과도 절친해서 강남길을 많이 시켰다고 한다.
- 20대 때도 사고를 당해서 죽을뻔했지만, 사고를 피할 운이 없는지 50대 때에도 사고로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드라마 대조영 촬영 중의 큰 사고로 전치 8주의 치명적 부상을 입었고 아래턱을 다치면서 아래 앞니 5개[44]를 모두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전부 임플란트를 했다고 한다.
- 최수종과는 10살 차이지만 함께 축구도 하며 자주 어울리고, 목욕탕도 함께 다니는 절친이나 같다고 한다. 물론 최수종이 "형님"이라고 부르며 예의를 갖춘다. 최수종은 이덕화를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고 하였고, 이덕화 역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후배하면 가장 떠오르는 게 최수종이라고 할 정도로 친하다. 그만큼 이덕화가 최수종을 챙긴다. 최수종-하희라 부부가 난임을 겪자, 지인들을 동원해 월척 붕어를 잡아다 약으로 달여 줬을 정도. 하지만 최수종 특유의 하희라를 향한 애정 표현은 못 마땅해한다고 한다. 심지어 최수종이 해외에 나가있을 때 그의 부탁으로 하희라에 대한 이벤트를 대신 해준 적이 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이다. 이덕화 본인은 처음에는 "아니 그걸 왜 날 시키냐."라며 당황하면서도 "그래 뭐 내가 해줄게." 하면서 하희라의 연극 공연이 끝나고 편지를 읽어주는 임무를 맡았는데, 내용이 너무 오글거려서 읽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 의외의 일이지만, 이용식과는 동갑내기 친구이다. 한쪽은 악역 배우로 명성을 날리는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그 반대로 코미디언으로 명성을 날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둘이 절친이라는 게 이질감이 상당하다.
- 엄청난 프로정신의 소유자로 짐작된다. 수많은 그리고 색다른 연기자를 보고 자란 아역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평하길 이덕화, 고두심 선배님들 앞에서는 열심히 한다는 말을 도저히 못하겠다고, 또 <물 위를 걷는 여자(1990)> 크랭크인 전에 커다란 교통사고가 나서 도저히 정상적으로 연기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연기를 해냈고, 또 그걸 예능 프로그램에서 희화화시켜서 얘기한다.
- 부인 김보옥과는 어린 시절부터 한 마을에서 함께 자란 사이라서, 마을 어르신들이 "이쁜아"라고 불러서 자신도 따라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직까지 그렇게 부를 정도로 버릇되어서 아직도 "이쁜아"라고 부른다고 한다. 한때는 이걸두고 당사자인 '이쁜이'의 증언이 없어서 사실인지 미심쩍어 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2015년 9월 6일에 SBS 일요일이 좋다의 하위 프로그램인 아빠를 부탁해에 이덕화 부녀가 캐스팅되고, 이덕화의 집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된 결과 사실로 밝혀졌다. 이덕화가 카메라가 돌아가는데도 수차례 "이쁜이"를 연발했다. 재미있게도 그렇게 부르니 아내뿐만 아니라 딸도 반응했다는 것이다.[45] 거기에 아내가 도시어부 등 방송을 촬영할 때마다 피드백을 해 주는 듯하다.[46] 슬하의 1남 1녀 가운데, 딸 이지현은 배우로 활동한 바 있고(2016년 결혼), 아들은 현재 이덕화의 매니저를 맡고 있다.
- 자신이 출연한 모든 작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에서 철저하게 망가지는 연기를 하든, 천추태후 같이 시청자들의 평가가 최악이든, 본인 커리어에 도움이 안된 낮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작품이든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모두 자신의 소중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이덕화가 스파이 명월은 쓰레기라는 말을 했다. 이덕화는 아무리 망한 작품이더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임하며, 촬영이 무사히 끝나면 모두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문제는 스파이 명월은 촬영이 무사히 끝난 작품이 아니다. 이덕화가 친히 "망작"이라고 평할 정도니 상황이 여간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무려 주연 배우가 촬영을 거부한 것이다.
- 호텔킹 제작발표회에서 자신의 연기 인생 40년 중에 한예슬 사건을 최악의 기억이라고 밝혔다. 오죽하면, 그 말에 앞서 "나는 실패한 작품이 없는데 딱 하나 실패한 작품이 있다"면서 거론할 정도이니 말이다. 후배나 배우도 아니고, 아가씨가 도망갔던 망한 작품이라며 대차게 깎아내렸었다. 그렇지만 단순히 한예슬을 안좋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때 배우나 제작진 중 어느 편도 들수 없었기에 말을 아꼈던 것이라며 상황 자체가 좋지 않았음은 인정하는 뉘앙스를 남겼다.
- 최진실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덕화는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한다. 단막극 베스트셀러 "시진읍"(1989년 4월 9일 방영)이라는 작품에 출연할 때 자신이 불에 타서 죽는 장면을 찍을 때의 이야기이다. 불속에 있는 씬을 찍은 후 적당한 신호와 함께 밖으로 탈출했어야 하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불어 조명이 터져서 탈출을 못하고 죽을 뻔했을 때, 그녀를 구해준 것이 상대역이었던 이덕화였다고 한다. 소화기를 뿌려대면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와 최진실을 업고 탈출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이덕화가 입고 있던 고급 점퍼와 비싼 가발이 타버렸는데, 이덕화는 그 뒤로도 최진실을 만나기만 하면 농담 삼아 "가발 값, 점퍼 값 물어내"라고 했단다. 물론 최진실 입장에선 '그 은혜를 어찌 점퍼값으로 갚을 수 있겠냐'라고 자서전에서 회고하였다. # 이덕화 본인도 해피투게더에서 이 썰을 풀었다.
- 변신 자동차 또봇 15기부터 등장하는 ' 이사팔'이라는 캐릭터는 이덕화를 오마주한 캐릭터다. 목소리나 말투나 영락없이 똑 닮은 데다, 떡볶이 외상을 초장기 할부로 끊을 때 "부탁~~해요" 드립을 친 것도 그렇다.
- 아이돌 마스터 드라마의 프로듀서로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 여러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배역이 회자되지만 사회적으로 가장 많이 주목받은 건 제5공화국의 전두환 역할이다. 사실 이 둘은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지만 대화는 못 해봤다고 한다. 여태 두 번 정도 대면한 적이 있는데, 실제 5공 시절에 청와대로 불려가 그의 생일파티 MC를 본 적이 있으며, 두번째는 2002년 원로 코미디언 이주일이 사망했을 때 빈소에서 봤었다고 한다.
- 어마어마한 경력과 인지도를 갖춘 배우지만 홍콩의 어느 배우와 이름이 비슷해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헷갈려한다. 두 사람 모두 덕 덕(德)자에 빛날 화(華), 한자까지 똑같다. 그리고 하희라의 부친도 존함이 하덕화라고 한다.
- 순풍 산부인과에서 박영규가 맡은 '미달이 아빠' 배역은 본래 박영규가 아니라 이덕화에게 먼저 제의가 들어올 예정이었다고 한다.[47] 나중에 밝히길, 이덕화는 코믹한 연기를 해야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데다가 다른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어서 거절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순풍산부인과가 대박을 터뜨리자 '미달이 아빠' 배역을 거절한 것에 땅을 치면서 후회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덕화가 '미달이 아빠' 배역을 거절하고 들어간 작품이 SBS의 경찰특공대와 여인천하였고 둘 다 대박을 쳤다.
-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했을 때 밝혀진 것이 그 특유의 굵직한 보이스는 다름 아닌 이순재의 보이스 톤을 따라하다가 생긴 거라고 한다. 이순재가 키는 작지만 웅장해보이는 이미지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다가 답이 나온 것이 그 특유의 보이스 때문이라는 결론 끝에 그 보이스 톤을 따라하다 보니 자신의 보이스로 자리잡혀 버렸다고 한다. 물론 그 때 이순재의 보이스 톤을 따라한다고 해서 이순재에게 혼도 많이 났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이순재가 제일 많이 찾고 사적으로도 자주 만나는 후배가 이덕화가 되었다고. 사실, 이보다도 십여년 전 이미 KBS 상상플러스에 출연했을 때 같은 내용을 이야기한 바 있다. 따지고 보면 방송에서 이 사실을 구술한 게 그것 또한 최초가 아닐 지도. 도시어부에서 '이순재'를 호칭하는 것을 보면, 평소 사적인 자리에서 "오야붕"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듯 하다.
- 90년대 초 교포 출신 양준일이 리베카를 이덕화로 개사해서 불렀는데 참 웃기면서도 훈훈한 장면이 연출됐다. 그것 때문에 양준일이 방송 정지를 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방송국의 요청으로 본인이 불렀다고 한다.[48] #
- 예능이나 토크쇼 등의 방송을 보면 나이나 선후배 문화에 대해 굉장히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띠동갑을 넘어, 아들, 딸이나 손자뻘 연예인들한테도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라면서 자연스럽게 상대 연예인에게 말을 놓게 유도하는데, 48세 차이가 나는 김새론이 낚시를 좋아해 도시어부에 같이 나올 때 자신이 망가지면서 김새론을 띄워주고, 선후배 사이에 말도 편하게 놓게 한다. 집사부일체나 힐링캠프에 나올 때도 자신보다 10년 이상의 나이차가 나는 연예인들에게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라면서 격식없이 토크를 펼치는 것을 보면 나이차가 아무리 나도 방송 시청률과 기본적 예의만 지키면 격식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다. 나이 어린 후배가 다소 짖궃게 나와도 크게 웃어주며, " 야~ 너 재미있다." 라며 잘 받아주고, 리액션을 잘해준다. 실제로 도시어부를 보면, 아들뻘인 이태곤이 말을 놓는 상황이 종종 노출된다.
- 드라마 촬영시 같이 찍었던 배우 중에 군입대를 하는 남자 배우가 있으면 직접 면회도 다녀왔다고 한다.[50] 자칭 '나이 칠순이'라고 말하면서도 방송에서는 '영원한 덕화 형님', '덕화 오빠'라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51]
- 후배 황덕재는 "덕화형님은 100원을 벌면 50원을 후배들에게 다 쓰는 스타일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 외에 "배우 김기복도 선배들이라고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고, 안좋은 기억이 있는 선배들도 있는데, 덕화형님은 정말 자신이 본 선배들중에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라고 언급하였다.
- 2020 SBS 연기대상 프로듀서상을 수상하면서 "머리가 안자라서 수염을 길렀다."라는 농담을 했다.
- 위키백과에서 출처도 없이 이덕화를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로 기재하였는데, 도시어부에서 본인이 직접 연안 이씨라고 밝혔다.
- 1994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을 맡았으나 총선 출마를 앞두고 사임했다. 동시기에 한국영화배우협회 부회장도 겸했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직까지 역임했다.
- 연기 중의 입버릇은 "이놈아!"로 이덕화가 분한 배역의 대부분의 대사에 "이놈아!"가 들어가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개신교 목사이자 제5공화국에서 정적 김대중을 연기한 임동진의 언급으로는 자신을 만날 때마다 이덕화 특유의 억양으로 할렐루야~(...)라면서 인사를 한다고. 크리스천이 아닌데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친구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대조영 시절 사고로 중앙병원에 입원했을 때 임동진이 병문안을 와서 "덕화야 괜찮니?"라고 묻자 형, 하나님이 이만큼 봐주신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다행이지?라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임동진은 감동했었다고 한다.
- 수상커리어 중 TV드라마 시상식은 MBC 연기대상 대상, KBS 연기대상 대상을 모두 각각 1번씩 받아봤지만, SBS 연기대상 대상 수상경력은 아직 전무하고, 영화제 시상식은 대종상 남우주연상 3회,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에 해당하는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1회 수상했지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아본 적은 없다. 그래도 2000년대 이후로는 TV드라마에 주력하고 있어서 연기대상을 또 받을 가능성이 있으나 영화는 1997년부터는 커리어가 뚝 끊겨 남우주연상을 받을 가능성이 낮아졌다.
-
좌우대칭 굴욕짤로 유명하다.
후방주의
- 젊었을 때, Tbc 시절 사회인 야구단 세븐에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포지션은 유격수에 1번 타자. 물론 1번타자는 본인 언급으론 당시 감독보다 나이 많아서 "나이로 밀어붙였다."라는 너스레를 쳤다.
- 이주일과는 절친이었지만, 정작 이주일은 이'덕화'의 발음을 못해서 "더과야~"(...)라고만 불렀다고 한다. 이덕화가 "형님, 더과가 뭐예요. 따라해보세요, 덕화"라고 지적을 해도 사투리가 엄청 심해서 개선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 학창시절을 회고한 인터뷰는 이 곳에서 볼 수 있다. 링크 서울사대부중의 연계학교인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경희고를 졸업했다. 경희고 연예인 후배들로 배철수, 박준규, 김용만 등이 있으며 지금도 절친한 사이다.
[훈음]
클 덕 빛날 화
[2]
음력
1952년
4월 15일생. 조기입학으로
1958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3]
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4]
[제5공화국] 제22부에서 183cm인 배우
김성겸보다 확연히 작아보였다.(8분 7초)
[5]
네이버 프로필 기준.
[6]
이와 비슷하게 대를 이어 배우로 활동한 사람들로
전영록,
최민수,
독고영재,
박준규,
허준호,
하정우가 있다.
[7]
2003년 별세
[8]
무용가. 배우
김진규의
부인 김보애의 동생. 따라서 김진규와는 동서-형님간의 사이지만 둘의 나이 차이는 무려 29세로 김진규가 이덕화의 아버지 뻘이다. KBS 공채 1기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알고 지낸 소꿉친구다.
결혼생활은 40년이지만, 알고 지낸 건 무려 60년이라고 한다.
[9]
자신의 소속사 대표이자 매니저이다.
[10]
성우 겸
배우인
장광과는 대학 동기. 이 때 장광과 같이 다른 학교 무용과 여학생들과의 집단 미팅을 주선했다고 한다.
[11]
연출 전공
[12]
도시어부 2에서 밝혀졌다.
[13]
2015년 인터뷰에서 본인이
정정을 요청했다.
[14]
이덕화 본인 낚시 별명으로. 세상 가득한 빛이라는 뜻. 유래는 당연히 본인의
이것
[15]
1980년대 최대의 인기를 누렸던 MBC의 주말 프라임타임대의 버라이어티 '쇼 2000' →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MC를 10년 넘게 맡으면서 그야말로 최고의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당시 인기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전영록,
김완선과 같은 스타들을 소개할 때 냈던 이 멘트는 그야말로 명MC의 표본을 보여주는 최고의 멘트였으며, 꽤 오랫동안 여기저기서 패러디되었다. 이 멘트를 만든 사람은 이덕화가 아니라 조카사위인
최병서다.
[16]
24살이지만 대략 30대 정도로 보인다. 이미 당시 탈모가 조금 진행되어 더 그런 면이 있다. 현재도 24살 배우가 고등학생 역을 맡는 경우는 많아도, 남자 기준 고등학생과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30대로 보이는 그 당시라면 괴리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개발도상국인 1980년대까지와 그 잔재가 있는 1990년대 중반까지는 10대 후반~30대의 남자 청년들의 외모가 겉늙어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까지도 현재보다 겉늙어보이지만 그 전보다는 젊어보인다.
[17]
제목이 비슷한 <
진짜 진짜 좋아해>는 이덕화, 전영록이 아닌 김현이란 이름의 남자배우와 함께 한 작품.
[18]
그리고 이때 이덕화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원미경 역시 최고의 악녀역으로 맹위를 떨쳤다.
[19]
이로써 방송 3사 MC를 다 본 셈이다.
[20]
반대로 자신에게 예의없게 대한 가수 등 좋게 평가할 수 없는 가수를 소개해야 할 때는 "(목소리 내리깔고) 한번 보시죠."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해피투게더에서 이를 밝히자 다른 출연자들은 단체로 충격을 받았다.
[21]
광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탈모의 신성 배우
이진우가 가발이 얼마나 좋은지 만지자 (또는 잡아당기는) 그에 반응하면서 친 대사다.
[22]
최대한 짧게 발음한다.
[23]
일부에서는 "부탁해여~"라고도 한다.
[24]
공교롭게도 김진명 역시 15대 총선 시기
새정치국민회의 서울
송파구 을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맹형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5]
지금은 당선 시, 후보자 사망 시, 그리고 낙선 시에도 득표율이 15% 이상이면 법정선거비용 전액을, 10% 이상 15% 미만 득표율이면 반액을 돌려주지만, 이때는 이 환급 제도가 도입되기 전이었기에 낙선한 후보는 그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26]
낙선후에 한동안 낚시만 다녔다고 한다.
[27]
이 지역에
그 유명한 교회촌이 있다.
[28]
하지만 이 때문인지 아들이 이명박 대통령 임기 기간동안 청와대에서 근무하였다.
[29]
이 영화제는 묻혀졌다. 관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영화제치곤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만 준다면 된다고?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
바르셀로나 항목에 나오는 바르셀로나 국제영화제를 참조할 것. 그리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관이나 정치인이 주도하려다가 말아먹을 뻔 한 바 있다.
[30]
정작 전두환 역의 아랫사람들 중 두 명이 유명한 가발인이다.
허화평역의
이진우,
이학봉역의
이재용. 이 두 사람도 평소에 가발을 착용하고 있으며, 작중에서 두 사람은 정상적으로 가발을 쓰고 연기.
[31]
다만 다른 의미로 미스캐스팅이다. 원래 제5공화국 자체가 전두환의 부정적 면모를 드러내는 작품이어야 하는데 전두환 역할을 연기한 이덕화가 너무 카리스마 있어서 팬 층을 형성하면서 전두환 미화 논란까지 나오고 말았다.
[32]
'아저씨'가 현재는 혈연 관계가 없는 사이에 쓰는 말로 거의 정착됐지만, 본래는 한 항렬 위의 남성 친척(백부, 숙부, 당숙 등)을 통틀어 일컫던 말이다.
[33]
이 술꾼 멤버가 이덕화, 이주일,
조용필,
최병서
[34]
덕화티비 1화 참조(2019.2.26 방영분)
[35]
기아-혼다는 당시 브랜드 명칭이었고 법인명은 기아기연이었다. 1962년 기아산업과 일본
혼다가 2륜차 기술도입 제휴를 맺은 것이 그 시작이며 그 후
대림자동차로 기아기연이 넘어가면서 대림혼다가 되었다.
[36]
이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슈퍼주니어의
규현이 당한 사고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규현은 자동차 창문 밖으로 무려 30m를 튕겨져 나가는 끔찍한 교통 사고를 당했고, 이 사고로 생긴 다발성 늑골 골절과 혈흉으로 위독한 상황까지 갔다. 그나마 갈비뼈 골절에서 끝나서 다행인 수순이지, 최악의 경우 규현처럼 생명을 잃을 만한 큰 부상을 입을 뻔했다는 얘기이다.
[37]
호가 만광이라고 한다
[38] 종류에 상관없이 낚시란 낚시는 다 좋아한다. 차이점이라면 마츠카타가 매년 남태평양 한 가운데로 어선 타고 가서 첨단장비를 동원한 참치 낚시 기록을 갱신하는 등 좀 더 스케일이 크다는 점이다. [39] 실제로 마츠카타는 여성편력과 별개로 화끈한 큰형님 스타일에다 씀씀이가 크고 배포가 넓어서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선배였다. 이건 이덕화에 대한 후배 연예인들의 평가들이 일치한다. [40] 일례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국민여동생 임예진과 작품을 함께 하며 서로 호감을 갖기도 했지만, 이덕화가 감정을 절제한 덕분에 관계가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41] 특히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차남, 니시나 마사키의 악평이 유명하다. [42] 앞의 사고와 병수발 이야기 건만 해도, 그렇게 가장 아름답던 20대 시절을 병수발하며 바쳐줬고, 스스로 나 잊고 다른 남자 만나라는 말까지도 싹 거부하고 3년을 간병으로 헌신한 아내에게서 어찌 눈이 돌아가겠는가? [43] 남궁연이 쓴 표현. 물론 신해철을 두고 한 말이다. [44] 당시 신문기사에는 4개나 2개로도 나왔으나 오보였고, 훗날 본인이 해피투게더라는 방송에서 5개라고 고백했다. [45] 그런데 정작 딸을 부를 때는 그냥 이름 부르거나 "지지배"라고 부른다고 한다. [46] 도시어부 시즌 2 41화에 따르면, 도시어부에서 낚시에 집중하다가 이수근의 칭찬을 잘못 알아들어, 이수근에게 버럭한 장면이 나간 뒤 부인에게 "인간이 방송도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라고 호되게 혼났다고 한다. [47] 그리고 개그맨 이봉원에게도 제의가 왔었지만, 시트콤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했다고 한다. [48] 양준일이 방송 정지를 당한 이유는 1993년에 보그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49] 오로라 블랙 펄 색상에 9인승 노블레스 트림 [50] 지창욱이 이덕화와 같이 드라마를 찍었는데, 이덕화가 친히 입대식과 면회식때 왔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51] 앞서 최수종과의 친분도 그렇고 이렇게 나이차가 많은 후배들과 친분이 많은 데에는 이주일과의 친분이 영향을 끼친 듯 하다. 이덕화 본인이 1952년생이고 이주일이 1940년생으로 두 사람은 띠동갑이다. 나이에 관해서는 엄격한 한국 사회에서는 정말 파격적인 인간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 점은 상술한 마츠카타 히로키와도 똑같이 겹치는데, 문란한 사생활과 별개로 대단히 화끈하고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대인배 마인드라서 따르는 후배들도 많았다. [52] 앞의 두 작품에선 서인석이 상급자, 이덕화가 부하로 나왔지만, 제5공화국에선 상하관계가 역전되었다.
[38] 종류에 상관없이 낚시란 낚시는 다 좋아한다. 차이점이라면 마츠카타가 매년 남태평양 한 가운데로 어선 타고 가서 첨단장비를 동원한 참치 낚시 기록을 갱신하는 등 좀 더 스케일이 크다는 점이다. [39] 실제로 마츠카타는 여성편력과 별개로 화끈한 큰형님 스타일에다 씀씀이가 크고 배포가 넓어서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선배였다. 이건 이덕화에 대한 후배 연예인들의 평가들이 일치한다. [40] 일례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국민여동생 임예진과 작품을 함께 하며 서로 호감을 갖기도 했지만, 이덕화가 감정을 절제한 덕분에 관계가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41] 특히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차남, 니시나 마사키의 악평이 유명하다. [42] 앞의 사고와 병수발 이야기 건만 해도, 그렇게 가장 아름답던 20대 시절을 병수발하며 바쳐줬고, 스스로 나 잊고 다른 남자 만나라는 말까지도 싹 거부하고 3년을 간병으로 헌신한 아내에게서 어찌 눈이 돌아가겠는가? [43] 남궁연이 쓴 표현. 물론 신해철을 두고 한 말이다. [44] 당시 신문기사에는 4개나 2개로도 나왔으나 오보였고, 훗날 본인이 해피투게더라는 방송에서 5개라고 고백했다. [45] 그런데 정작 딸을 부를 때는 그냥 이름 부르거나 "지지배"라고 부른다고 한다. [46] 도시어부 시즌 2 41화에 따르면, 도시어부에서 낚시에 집중하다가 이수근의 칭찬을 잘못 알아들어, 이수근에게 버럭한 장면이 나간 뒤 부인에게 "인간이 방송도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라고 호되게 혼났다고 한다. [47] 그리고 개그맨 이봉원에게도 제의가 왔었지만, 시트콤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했다고 한다. [48] 양준일이 방송 정지를 당한 이유는 1993년에 보그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49] 오로라 블랙 펄 색상에 9인승 노블레스 트림 [50] 지창욱이 이덕화와 같이 드라마를 찍었는데, 이덕화가 친히 입대식과 면회식때 왔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51] 앞서 최수종과의 친분도 그렇고 이렇게 나이차가 많은 후배들과 친분이 많은 데에는 이주일과의 친분이 영향을 끼친 듯 하다. 이덕화 본인이 1952년생이고 이주일이 1940년생으로 두 사람은 띠동갑이다. 나이에 관해서는 엄격한 한국 사회에서는 정말 파격적인 인간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 점은 상술한 마츠카타 히로키와도 똑같이 겹치는데, 문란한 사생활과 별개로 대단히 화끈하고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대인배 마인드라서 따르는 후배들도 많았다. [52] 앞의 두 작품에선 서인석이 상급자, 이덕화가 부하로 나왔지만, 제5공화국에선 상하관계가 역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