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오시타 히로시(大下 弘) |
생년월일 | 1922년 12월 15일 |
사망일 | 1979년 5월 13일 (향년 56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효고현 고베시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경력 | 1946년~1959년 |
소속팀 |
도큐 플라이어즈[1](1946~1951) 니시테츠 라이온즈(1952~1959) |
지도자 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타격 코치(1961) 도에이 플라이어즈 감독(1968) 다이요 훼일즈 타격 코치(1974~1975) |
도에이 플라이어즈 역대 감독 | ||||
미즈하라 시게루 (1961 - 1967) |
→ |
오시타 히로시 (1968)[2] |
→ |
마츠키 겐지로 (1969 - 1970.7.) |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붉은 배트 카와카미, 빨래장대의 호걸 후지무라와 함께 푸른 배트 오시타 라는 이름으로 1950년대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한편으로는 호탕하면서도 어린애 같이 순수한 성격 때문에 많은 뒷이야기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2. 아마 시절
고베 태생인 오시타는 1936년 가족을 따라 대만으로 이사를 가서 가오슝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야구부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소위로 육군 항공사관학교에서 복무했다. 1945년 패망 후 제대한 오시타는 메이지대학에 복학하여 계속 야구선수로 뛰었다.3. 프로 시절
3.1. 도큐 플라이어즈(세네터즈, 큐에이) 시절
전쟁이 끝나고 중단되었던 프로야구가 재개되면서, 오시타는 새로이 창단된 세네터즈에 입단하였다. 1945년 11월 동서 대항전에 출전하여 전후 최초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 아닌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기록하면서 이름을 알린 오시타는 이듬해 1946년 홈런 20개를 날리며[3] 홈런왕을 차지했는데 그 해 리그 전체 홈런 갯수는 211개, 무려 10% 가까이를 오시타 혼자 친 것이었다. 게다가 오시타는 20개의 홈런 중 마지막 1개를 빼면 전부 우측 담장을 넘긴 극단적인 풀 히터였고 워낙 변화구에 약하다 보니 속구만 노리고 공격적으로 스윙하다 무려 80개의 삼진을 당했다. 아무튼 오시타는 패전의 암울함에 젖어있던 일본 야구팬들에게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1947년 부터는 붉은 배트를 사용하던 카와카미 테츠하루에 대항하는 의미로 푸른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서면서 대결 구도를 이루었고, 그 해 수위타자와 홈런 1위로 2관왕에 올랐다. 1949년 8월 18일 삿포로 마루야마 구장에서 일본 리그 기록인 170미터의 최장거리 홈런을 기록했고, 같은 해 11월 19일 다이요 로빈스와의 경기에서는 무려 7타수 7안타 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남겼다. 그런데 이 한 경기 7안타라는 기록 이면에는 술고래였던 오시타의 뒷이야기가 숨어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아래 에피소드 참조.
1951년에는 시즌 타율 0.3831로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며 수위타자와 홈런왕을 차지했고, 그 해 오시타의 시즌 최고타율은 1970년 도에이의 장훈이 0.3834로 경신할 때 까지 19년간 일본 프로야구 사상 시즌 최고 타율로 남아 있었다. 덧붙여 그 해 타율 2위는 난카이 소속 카게야마 카즈오[4]의 0.3146로 무려 6푼 9리의 차이였고, 이것은 아직도 일본 프로야구 역대 1위의 기록이다.
그런데 1951년 시즌 후 오시타가 난데없이 도큐 플라이어즈 에서 퇴단 당하는 이른바 오시타 소동이 벌어졌다. 오시타가 구단에서 가불 받은 급여가 지나치게 늘어나며 불화를 일으킨 것이 화근이었고[5], 설상가상으로 사기 사건에 휘말린 오시타는 1952년 시즌 개막까지 훈련은 커녕 여기저기 도피할 수 밖에 없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결국 오시타는 1952년 시즌 초반 외야수 후카미 야스히로,[6] 투수 오가타 토시아키 와의 맞트레이드로 니시테츠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3.2.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
우여곡절 끝에 니시테츠로 적을 옮긴 오시타가 이적 후 처음으로 타석에 들어서자 미하라 오사무 감독은 "제발 삼진이나 당하지 말아다오" 라고 속으로 빌었다고 한다. 수 개월 동안 도피 생활로 배트조차 잡지 못한 오시타가 그라운드에 적응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는데, 오시타는 미하라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듯이 첫 타석부터 깨끗한 안타를 날렸고 미하라는 " 역시 잘 하는 놈은 다르구나" 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어찌됐든 니시테츠의 일원이 된 오시타는 이듬해인 1953년 나카니시 후토시와 신인 유격수 토요다 야스미츠와 더불어 이른바 수소폭탄 타선을 구축하며 니시테츠 왕조를 열었고, 1956~1958년 일본 시리즈 3연패에 큰 공을 세웠다. 1954년 시즌엔 타율 0.321, 22홈런, 88타점의 호성적으로 퍼시픽리그 MVP를 차지하였다.
1959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오시타는 현역에서 은퇴하였고, 14시즌 간 1547경기 출장, 1667안타, 201홈런, 861타점, 타율 0.303의 통산 성적을 남겼으며 수위타자와 홈런왕을 각 3회 수상하였다.
4. 은퇴 이후
유니폼을 벗은 오시타는 NHK 해설가를 거쳐 1961년 한큐 브레이브스의 1군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 1년만에 해임당하고[7] 이후 간사이 TV와 후지 테레비의 해설가로 활동했다.1968년 미즈하라 시게루의 후임으로 친정팀인 토에이 플라이어즈 감독에 취임[8]하여 야구사상 유례가 없는 3무주의, 즉 사인, 벌금, 통금 세 가지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는데[9], 벌금이나 통금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인 없는 야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그 해 토에이는 최하위로 추락하며 결국 오시타는 시즌 도중 2군 감독 이이지마 시게야 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퇴단하고 말았다. 감독 시절의 오시타는 선수들을 "OO씨(さん)"라고 존칭으로 불렀고 기용하지 못한 선수에게는 일일이 면목없다며 사과하는 당시 야구 감독으로서는 드문, 아니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좋은 사람 스타일의 지도자였다.
도에이 감독에서 물러난 오시타는 1974~1975년 타이요 훼일즈의 1군 타격 코치를 맡아 나가사키 케이이치, 야마시타 다이스케 등의 선수들을 주전으로 도약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고, 현장을 완전히 떠난 이후로는 치바현으로 이사하여 직접 지역 소년들을 모아 팀을 만들고 감독을 맡는 등 유소년 야구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1978년 6월 도쿄에서 소년 야구팀을 지도하던 중 뇌혈전으로 졸도하여 반신불수가 되었고 이듬해인 1979년 5월 23일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사인은 뇌혈전에 의한 심근경색으로 알려졌지만 나중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198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 여담
- 오시타는 평소 말술에 호색(好色)으로 유명했으며, 조카뻘 되는 후배 선수들에게 여자 후리는 법을 알려주고 술값에 화대까지 모두 대불할 정도로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편으로 기생집에 배트를 맡겨놓고 술을 마시는 와중에 틈틈히 스윙 연습을 하면서 야구선수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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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시타였지만, 외야 수비는 아주 형편없었다. 통산 79실책으로
일본프로야구
외야수 부문 최다 실책 기록을 보유한 것은 물론, 한 시즌에 무려 14개의 실책을 기록한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그래서 경기 중에 어이없는 실책을 연발하며 상대 팀 팬들을 폭소시키고 같은 팀 팬들은
뒷목잡게 만드는 일이 허다했다.
- 1948년 6월 1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 때 대나무를 쪼개어 붙여 만든 배트를 들고 출장하여 5타수 3안타를 기록했는데, 정해진 재질의 나무가 아닌 배트로 타격하면 안된다는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벌금 100엔을 부과당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부정 배트로 인해 실제로 처벌받은 사례는 오시타가 유일하다.
- 1949년 11월 18일, 다이요 로빈스와의 경기 전날 저녁 때 단골 술집에서 한잔 하고 있던 오시타는 다음 날 경기를 위해 조금만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려 했으나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자 '내일 시합은 취소되려니' 하고 발길을 돌려 밤새도록 부어라 마셔라 하고 새벽녘에 꽐라가 되어 숙소로 들어와 뻗어버렸다. 그런데 몇 시간 후 선수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비가 그쳐서 시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오시타는 수돗가로 달려가 냉수 몇 동이를 뒤집어 썼지만 뼛속까지 스며든 취기가 달아날 리는 없었고 결국 비몽사몽 간에 선발 출장 했는데, 놀랍게도 그날 오시타는 7타수 7안타를 기록했다. 그날 다이요 포수의 증언에 따르면 "마지막 타석 까지 눈이 풀려서 술냄새를 푹푹 풍기고 있더라"[10][11]
- 니시테츠로 이적한 첫 해인 1952년 7월 16일,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열린 마이니치 오리온즈와의 홈 경기 때 4대 9로 뒤지던 마이니치가 마침 비가 오던 상황을 고려하여 우천과 일몰 노게임[12]을 노리고 고의적인 경기 지연행위를 벌여 결국 5회초에 노게임 선언이 되자 분노한 니시테츠 팬 수천명이 그라운드에 난입한 이른바 헤이와다이 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 오시타는 팀 메이트인 노구치 마사아키와 함께 팬들의 주먹과 발길질에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관객들을 저지했고 결국 이날 소동은 3300명의 경찰 기동대가 투입되어 겨우 진정되었다. 이날 관객들의 소란을 저지한 공으로 오시타와 노구치는 연맹 표창을 받은 반면 지연 행위를 조장했던 마이니치의 유아사 요시오 총감독은 해임, 와카바야시 타다시 감독은 2군 감독으로 강등당하는 조치를 받고 벳토 카오루가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 도에이 감독 시절 팀의 주축 선수인 장훈에게 선수단 운영에 대해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장훈은 시즌 초 이를 받아들여 몇 번 조언을 해줬지만[13] 언론을 통해 "도에이에는 두 명의 감독이 있다" 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후 오시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자 어느 날 숙소에서 장훈의 방을 찾아가 칼로 자신의 팔을 베어 피를 철철 흘리면서 "이게 내 마음이다! 제발 알아주게!"라고 통사정 했다고 한다. 장훈은 후일 자신의 저서에서 "그는 인간적으로 아주 순진무구한 사람이었고, 절대 감독을 맡아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라고 서술한 바 있다.
[1]
1946년 세네터즈로 창단했으며, 오시타가 재적하는 동안 팀명이 세네터즈-도큐 플라이어즈(1947년)-큐에이 플라이어즈(1948년)-도큐 플라이어즈(1949년)로 여러 차례 바뀌었다.
[2]
시즌 도중 해임. 잔여경기는 이이지마 시게야 감독대행 체제로 치렀다.
[3]
당시 친 20홈런은 리그 최초 기록이었다.
[4]
카게야마는 그 해
퍼시픽리그 초대 신인왕을 수상했다.
[5]
사실 오시타가 급여를 가불받은 이유는 오시타의 어머니가
필로폰 중독에 빠져있었고, 그 치료비를 대려고 오시타가 급여 가불을 요구한 것이었다.
[6]
당시 후카미는 니시테츠 소속으로 2개의 홈런을 기록한 상태에서 트레이드 되었는데, 그 해 도큐 유니폼을 입고 23개의 홈런을 추가하여 도합 25개로 퍼시픽리그 홈런왕을 획득, 지금까지
NPB 역사상 유일한 2구단 소속 홈런왕으로 남아있다.
[7]
원래는 2년 계약 이었는데 코치 해임 후 남은 1년은 기술고문 이란 직책을 받았지만 팀내에서 전혀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차 끓이기 같은 잡일까지 했다고 하니.
[8]
이 때 왕년의 강타자
후지무라 후미오를 1군 타격 코치로 영입했다. 참고로 후지무라는 전임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 휘하에서도 타격 코치를 맡아
오오스기 카츠오를 발굴한 바 있다.
[9]
이는 오시타가 아니라 구단주인
오카와 히로시의 아이디어였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10]
1949년에 미국 트리플A 팀인 샌프란시스코 실즈가 내일하여 일본 팀 및 주일미군 팀과 친선 경기를 가졌고, 그 통에 2주 이상 시합 일정이 지연되어 리그 마지막 경기는 11월 29일에 열렸다. 참고로 친선 경기에서 일본은 고르고 고른 최정예 멤버로 출전하였으나 6경기 중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당시 양 리그의 수준 차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실즈는 주일미군 팀과도 4경기, 일본 대학야구 팀과 1경기를 가졌는데 주일미군 공군 소속 장병으로 구성된 팀이 실즈 상대로 한 경기를 승리했다.
[11]
비슷한 일화로
빙그레 이글스의
이강돈이 있다. 다음 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만 믿고 밤새 술을 마셔댔는데, 경기 당일은 일기예보와 다른 맑은 날씨여서 정상적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숙취에 고통스러워 하던 이강돈은 대충 휘두르고 죽자는 생각으로 출장했지만 무려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였다. 나중에 이강돈은 사이클링 히트에 대한 소감으로 술기운이 남아서인지 공이
수박만하게 보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외
선동열도 과음을 하고도 다음 날 완봉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75년 후,
나균안이 이를 따라하다 망했다
[12]
당시 헤이와다이 구장은 조명시설이 없었다.
[13]
당시 도에이의 대타 요원으로 좌타자 쵸난 츠네오와 우타자 고레히사 유키히코 두 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경기 막판 끝내기 찬스에서 오시타가 장훈에게 누가 대타로 좋겠냐고 묻자 장훈은 "지금 투수가 우완이니 (좌타자인)쵸난이 낫겠다" 라고 답했는데 오시타는 바로 대타를 정하지 못하고 쵸난과 고레히사에게
가위바위보를 시켜 이긴 쵸난을 대타로 기용했다고 한다. 그래도 쵸난은 결국 끝내기 안타를 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