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추어 시절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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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상원고 |
OF 상원고 |
OF 광주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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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경북고 |
2B 경북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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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 배명고 |
RHP 경북고 LHP 세광고 |
1B 선린상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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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경동고 |
경동고 시절 야구선수로 뛰는 와중에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도 활동했고, 1961년 500m 고등부 대회를 싹쓸이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보유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1] 한편으로 야구선수로서의 능력은 더욱 뛰어나서 학창시절 "원자탄 투수" 이재환과 함께 배터리를 이루며 경동고를 당대 고교야구 최강으로 이끈 주역이었으며, 특히 1960년 한해 경동고의 성적은 무려 32승 2무로 그야말로 초고교급 야구팀이었고 백인천이야 말로 그 경동고의 핵심 선수였던 것이다.
1962년의 백인천.
1959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고, 1960년 6월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이 개장한 이래 고등학생으로는 처음으로 홈런을 기록했으며, 그해 10월 일본 원정경기 때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도 홈런을 쳤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교생이 진구 구장에서 기록한 2번째 홈런이었다. 또한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최종일 필리핀과의 경기에서도 비바람을 뚫고 타이베이 송산구장 개장 이래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경동고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서 활약했으며,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뛰어난 활약으로 몇 번이나 일본프로야구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었지만 당시 강하게 남아있는 반일감정 등의 이유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타이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치하하기 위해 대한체육회에서 개최한 환영회에 선수단이 참석했는데 당시 대한체육회장이자 박정희 군사정권의 실세이던 이주일 준장이 연회 도중 백인천에게 야구하면서 애로사항이 없느냐라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으로 가고 싶은데 좀 도와주십쇼!!"라고 당돌하게 답했다.
사실 백인천은 선수권을 마치고 타이완을 떠나 일본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에, 한 재일교포 야구인의 주선으로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구단 관계자를 만나 계약금 300만엔에 가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에 당시 야구협회장이 펄펄 뛰며 반대하자 이 준장은 오히려 "이런 젊고 훌륭한 선수가 해외로 나가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며 윗선에 보고하였고 당시 차관등을 끌어오기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개선시키고 싶어 했던 정부에서 해외 진출을 밀어주자 결국 백인천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고[2] 나중에 돌아와 병역의무를 완수한다는 조건 하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병역은 1971년 초에 국내로 귀국한 후 첩보교육 등 18주간 군사교육을 받고 5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중정 특수요원으로 활동하였다. [3] 실제 1972년 일본 국회에선 한바탕 ‘백인천 스파이’ 소동이 벌어졌다. 한 일본 중의원이 국회에서 “일본 내에서 활동하는 중정 비밀요원들이 상당하다”며 대표적인 이로 백인천을 지목한 것이다. 일본 언론은 연일 백인천의 ‘중정 비밀요원설’을 기사화했다. 우익 단체에선 “중정의 스파이 백인천은 당장 일본을 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주일 대사관은 “백인천은 병역 특혜에 민감한 한국민의 정서를 고려해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는 것처럼 꾸몄을 뿐 실제 근무한 적이 없다”며 “중정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전 중정 간부로 퇴사한 직원에 말에 따르면 유명 프로야구 선수라는 명망성과 신뢰성을 활용해 일본 유력인과 접촉하고 그들로부터 얻은 고급 정보를 중정으로 보내는 업무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 00년도 이전까지 유명 연예인들을 이런식으로 요원으로 써먹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2. 프로 시절
2.1. 일본 선수 시절
개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일본 무대에 진출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유니폼에는 BAEK이 아닌 HAKU라고 적혀있었다. 그 덕에 영문으로 된 일본프로야구 관련 자료에 Jinten Haku라고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시절엔 일본에서 뛴 대한민국 선수의 이름을 다 이런 식으로 읽었었다. 애시당초 Jinten Haku가 백인천(白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을 서양식으로 성과 이름을 뒤집은 것이다.사실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우리식 발음인 이등박문으로, 장제스를 장개석으로 읽는 일이 흔했다. 한자의 일본 발음을 따르지 않은 한국 선수는 조성민이 처음이다.[4] 일본어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북아시아 한자문화권 지역 출신의 인명표기를 일본어 음독으로 표기했다. 당장 1950년대 후반에 일본으로 데뷔해서 대활약 했던 일본 출생 대만 국적 선수로의 왕전즈(王貞治, 왕정치)를 오 사다하루로 불렸고 유니폼에 OH로 표기하였으며, 1980년대 중반 ~ 후반에 일본으로 데뷔해서 맹활약 했던 대만 출생 대만 국적 선수로의 궈위안즈(郭源治, 곽원치), 궈타이위엔(郭泰源, 곽태원), 좡성슝(荘勝雄, 장승웅), 궈리젠푸(郭李建夫, 곽리건부), 뤼밍츠(呂明賜, 여명사) 등도 일본에서는 각각 카쿠 겐지(이후 일본 국적으로 귀화), 카쿠 타이겐, 소 카츠오(이후 일본 국적으로 귀화), 카쿠리 타테오, 로 메이시 등 일본식 음독으로 불렸으며 유니폼에도 곽(郭), 장(荘), 곽이(郭李)의 중국어 발음인 KUO, CHUANG, KUOLEE가 아니라 일본식 음독인 KAKU, SOH, KAKURI로 표기됐다.[5] 대만 출신으로서 일본에서 중국어 발음으로 선수 등록이 이루어진 것은 2000년 NPB에 진출한 쉬밍제(許明傑, 허명걸)에 이르러서 였고, 유니폼에도 성인 허(許)의 일본식 한자독음인 KYO보다 중국발음인 HSU로 표기 했다.[6] 이는 한어병음방안이 아닌 웨이드식 표기이다. 즉, 이는 백인천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상훈의 경우는 별명을 반영하여 SAMSON LEE[7], 김태균의 경우로는 TAEKYUN으로 적혔다.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권 선수 이름의 원어발음 존중 표기법의 효시가 조성민이었던 셈.
롯데 시절, 장훈(오른쪽)과 함께 |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62~1974년까지 토에이 플라이어즈, 1975~1976년까지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1977~1980년까지 롯데 오리온즈, 1981년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19년간 현역으로 뛰며 오랫 동안 활약했고, 이후 한국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에 MBC 청룡에 감독 겸 선수로 입단했다.
입단 초기엔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는 가혹한 포지션인 포수로 플레이했는데, 항상 일본어 사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투수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백인천은 일본어를 익히려고 선수 기숙사에서 전화 당번을 자청하여 서툰 일본어로 더듬더듬 선배들에게 오는 용건을 받아서 전달해주며 일본어에 익숙해졌는데 당시 주전 선수들의 여자친구들이 그런 백인천에게 종종 고마움을 담은 선물을 보내줬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토에이의 에이스 도바시 마사유키가 "(백인천)이 녀석은 한국에서 와서 이렇게까지 노력한다. 한번 본받아 보라!" 며 선수들에게 일갈했다. 이를 계기로 백인천에 대한 일부 선수들의 괴롭힘은 사라졌다고 한다.
토에이 입단 초기 백인천은 주로 불펜 포수 역할이었는데, 투수들의 연습 투구를 받아주던 도중 짬이 날 때마다 잠시 스윙 연습을 하다가 다른 투수가 부르면 배트를 내려놓고 얼른 뛰어가서 공을 받아줘야 했다. 그러던 중 이를 보다못한 팀 선배 장훈이 어느 날부터 백인천이 스윙 연습을 하면 옆에 떡 하니 서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기 시작했고, 다른 투수들은 감히 백인천을 불러 투구를 받아달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덕분에 백인천은 제대로 배팅 연습을 할 수 있었다.
1963년 시즌 중반, 주전 포수이던 타네모 마사유키, 안도 준조가 줄줄이 부상으로 쓰러지며 펑크난 배터리를 메꾸기 위해 백인천이 1군으로 올라왔고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눈에 들며 주전 포수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5년 시즌 후반부터는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당시 2군에서 백인천이 가끔 외야수로 뛰면서 좋은 플레이를 보이자 2군 감독이 미즈하라에게 외야수 전환을 건의했는데 처음에 미즈하라는 "발 빠른 포수가 어디 흔한 줄 아느냐?"[8] 라며 일축했으나, 그 해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 도중 장훈이 부상으로 빠지자 백인천이 백업 좌익수로 교체 투입되었고 시기 적절하게 까다로운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하는 파인 플레이를 시전했다. 이는 포수로 뛰면서 분석해 두었던 당시 타석에 있던 상대방 선수의 타격 스타일과 타구 방향 등을 염두에 두고 미리 공이 떨어질 만한 위치에 이동해 있었는데 그 예측이 적중한 것이었다.
결국 미즈하라 감독도 "오늘부터 외야수를 하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9] 그 이후 백인천은 주로 중견수로 뛰면서 타자로서의 재능을 더욱 꽃피우게 되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이유로 포수 출신 외야수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이택근이라든가, 브라이스 하퍼라든가.
백인천이 중견수를 볼 때 좌익수는 주로 절친한 선배인 장훈이 맡았는데, 백인천은 빠른 발과 넓은 수비범위, 포수를 보던 강견을 바탕으로 리그 정상급의 외야수비를 자랑한 반면, 장훈은 백인천 못지않게 발은 빨랐지만 어릴 적 입은 화상으로 불편한 오른손과 고등학교 시절 부상으로 약해진 어깨 때문에 빠른 수비는 영 자신이 없었던지라 좌중간을 향해 날아오는 타구는 으레 백인천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래서 장훈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안타 제조기(...)라는 농담도 있었다. 물론, 장훈은 약한 수비력 따윈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경이로운 장타 슬러거 능력이 뒷받침을 해줬기 때문에 경기력에서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장훈의 약한 수비 범위를 커버하기 위해서 백인천은 먼 거리를 헐레벌떡 뛰어와서 타구를 잡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정도였다.[10] 그래서, 어느 날 백인천은 장훈의 수비를 커버해주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지 우스갯소리로 장훈에게 "장이형, 형님 연봉 중에서 수비 몫은 나한테 줘요." 라고 농담을 했고 장훈은 백인천에게 장난으로 꿀밤을 가볍게 쥐어박으면서 "이놈아, 내가 너 수비 연습 시켜준 건 생각 안 해?" 라고 껄껄 웃으면서 받아쳤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백인천은 장훈과 절친한 사이라서 '장이형' 이라고 불렀다.
백인천이 츠유자키 심판을 폭행하는 장면.
한국인 선수인지라 투수에게 종종 빈볼성 공을 맞기도 하고 심판 판정에 있어 불리한 점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1970년 5월 23일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시합 때 주심이었던 심판 츠유자키 모토야[11]가 존에서 한참 벗어난 투구를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며 백인천에게 삼진을 선고했고, 이에 발끈한 백인천이 츠유자키에게 이게 왜 삼진이냐고 버럭대자 츠유자키가 "심판이 삼진이라면 삼진이지 말이 많다"라며 조롱하는 투로 들이댔는데 이에 화가 폭발한 백인천이 츠유자키의 죽빵을 날리는 바람에 퇴장 처분을 받는 사건이 터졌다. 이후 백인천은 츠유자키에게 폭행죄로 고소당했지만, 며칠 후 서로 화해하고 츠유자키가 고소를 취하하면서 무혐의 처리되었다.
또한 자신에게 빈볼을 던진 투수는 세이프티 번트를 시도하면서 1루에 커버 플레이를 들어오는 그 투수의 발을 스파이크 날로 가차없이 밟아버릴 정도로 당한 게 있으면 반드시 되갚아주는 파이터 기질도 있었다. 한편으로 팀 선배인 장훈의 후광도 있었고[12] 소속된 파벌 자체가 일본프로야구계의 성골이라고 할 수 있는 미즈하라 시게루 계열이었기 때문에 한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서 크게 손해본 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미즈하라가 토에이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트레이드를 거부할 만한 힘까지 있을 정도였다.
1975년 히가시다 마사요시와의 트레이드로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에 이적하였고, 히가시오 오사무, 도이 마사히로, 카토 하지메 등과 함께 팀의 간판으로 활약하며 그 해 타율 .319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해 라이온즈는 수위타자 백인천, 홈런왕 도이 마사히로[13], 다승왕 히가시오 오사무[14]를 배출해냈으나 종합순위 3위의 루징 시즌에 그치며 리그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 해의 수위타자 경쟁은 상당히 치열했는데 백인천과 타격왕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던 상대가 공교롭게도 백인천을 트레이드시킨 전 소속팀 닛폰햄 파이터즈의 오다 요시토였다. 자신을 버린 전 소속팀에 대해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백인천은 세이프티 번트까지 동원하면서 타격왕 경쟁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 정확히 규정타석(403타석)을 채워서 5모(0.0005) 차이로 극적으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따냈다. 규정타석을 정확히 채우고 수위타자 타이틀을 수상한 것은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15][16] 이 타이틀 경쟁이 자신을 버린 전 소속팀에 대한 극적인 복수로 인식되면서 당시 상당히 임팩트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백인천이 라이온즈에 활약한 것은 불과 2년밖에 안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팀의 응원가 우리들의 우상 라이온즈(僕らの憧れライオンズ)의 가사에 나오는 선수들 중에서 백인천의 이름이 짧게나마 언급될 정도이고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전신 구단인 타이헤이요 시절 스타들을 초청해 팬미팅을 가질 때 백인천도 직접 참석했다.
1976년 오프시즌에 팀 동료 야스키 쇼지와 같이 하세가와 카즈오, 쿠라모치 아키라[17]를 상대로 트레이드 되고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하며 1980년 시즌까지 롯데 소속으로 활약했고, 1981년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하여 1년간 활동하고 이듬해인 1982년에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되었고, 모국에서 새로 문을 연 프로야구에서 뛰고 싶었던 그는 1981시즌을 끝으로 한국으로 귀국하며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1969경기에 출장하여 1831안타, 209홈런, 212도루를 기록했다. 현재 이 기록은 명구회 가입 조건인 2,000안타, 200홈런에 가장 가까운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 기록한 135안타를 더한다고 해도 2000안타가 되지 않는다. 2006년 WBC 이후부터는 일본에서도 대한민국에서 세운 기록을 인정해 주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승엽의 한일 통산 400호 홈런도 방송에서 직접 언급을 했었다.
만약 귀국하지 않았다면 2,000경기 출장은 확실히 이루었을 것이 분명한 바,[18] 영광 대신 조국을 선택한 선수 백인천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수 중 알렉스 라미레즈에 이어 2번째로 안타를 많이 친 선수로 언급되나, 실제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출생 당시에는 일본 국적이었다는 유권해석 때문에 일본인 선수와 동등하게 간주된다.[19] 일본 기준으로 외국인 선수는 성장기 및 학창 시절 및 학교 선수생활을 외국에서 보낸 선수를 말하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국적만 외국이고 실제 성장 및 학창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장훈이나 오 사다하루(왕정치) 같은 선수도 일본인 선수와 동등하게 간주된다.
참고로 일본과 대한민국 양쪽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한 최초의 선수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외국 리그로 진출한 선수 중에 최초로 타이틀을 획득한 선수이기도 하다. 2012년 이전까지는 유일했었지만, 2012년에 이대호가 퍼시픽리그 타점왕을 차지하면서 유일한 선수라는 타이틀은 사라졌다. 2019년에는 MLB에서 류현진이 평균자책점 1위 타이틀을 따내기도 했다.
다만 일본 시절엔 단 1번도 20홈런을 넘긴 적이 없어서 파워형 선수라고 보기엔 확실히 무리고, 출루율이 통산 0.316으로 0.276의 높은 통산타율 치곤 다소 낮았는데, 이유는 통산 379사사구/471삼진 기록에서 보듯 배드볼 히터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였기 때문. 실제로 일본 시절엔 40사사구/40삼진을 단 1번도 넘긴 적이 없다. 즉 선구안이 나빴다고 보긴 힘들지만 사사구를 얻어 출루하는 것보단 공을 치고 나가는 걸 선호한 컨택 위주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20] 박용택이 상당히 유사한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 통산 200-300의 기록을 세웠지만 단일 시즌 20홈런을 찍은 적이 없고, 선구안은 무난하지만 배드볼 히터 유형에 가까워서 볼넷이나 출루율이 크게 높은 선수도 아니었고 호타준족 스타일이라는 것이 공통점. 다만 백인천보다는 평균 타율이 높고, 볼넷이나 삼진 개수도 백인천보다는 많았다. 일본에서 백인천은 이병규보다도 더한 배드볼 히터였다. 당장 3할 치고도 출루율이 .350을 못 넘긴 시즌이 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화려한 선수생활에 걸맞지 않게 일본시리즈 우승은 커녕 일본시리즈 진출 및 리그 우승도 못한 콩라인이기도 했다. 신인시절이던 1962년에 토에이 플라이어즈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그 때는 2군에만 머물렀고, 1군에 정착한 시점부터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가 도래하면서 우승과는 거리가 먼 선수생활을 보냈다. 그나마 퍼시픽리그가 전후기리그제로 운영하던 시절 롯데 오리온즈 소속이던 1977년 후기리그, 1980년 전기리그 우승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으나 리그 통합우승팀 겸 일본시리즈 진출팀을 결정짓는 플레이오프에서 번번히 롯데가 패퇴하며 결국 일본시리즈와 리그 우승은 단 1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21]
2.2. 한국 선수 시절
40대가 되어 모국으로 돌아온 백인천은 첫 경기부터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백인천은 프로 원년 개막전인 1982년 3월 27일 동대문 삼성전에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해 6회말 추격의 중월 솔로 홈런을 치면서 팀 승리의 기반을 마련했고 연장 10회말 고의사구로 걸어나간 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 때 홈을 밟았다. 경기 종료 후 그는 방송 인터뷰 때 일본프로야구 선수 시절 당했던 멸시와 서러움이 생각났는지 연신 눈물을 흘렸다. 이때 극적인 역전승에 감격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눈물의 인터뷰를 하는 백인천을 둘러싸고 티비에 출연했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프로야구 역대 레전드 인터뷰로 회자되고 있다...
히스토리 03 '불멸의 기록' 4할타자 백인천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인천은 1982년에 단일 시즌 타율 0.412(72경기[23] 250타수 103안타[24])를 기록하게 되는데, 현재까지도 KBO 리그의 유일한 4할 타율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4할을 친 선수는 없고 일본프로야구 최고 타율 기록은 1986년 한신 타이거즈의 랜디 바스가 기록한 0.389이다. 미국에서도 1941년에 테드 윌리엄스가 4할을 친 이후로는 4할 타자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기에 이는 한미일 프로야구 최후의 4할 기록이기도 하다.
장타율 또한 0.740로서 2015년 에릭 테임즈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33년 동안 1위를 유지하였다. 원년에는 타자가 본업인 해태 김성한이 투수로 나와서 10승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할 정도로 원년은 아직 실업야구의 티를 벗지 못했던 시절이고, OB의 에이스 박철순이 224이닝(80경기중 36경기)을 던질 정도로 선수층이 빈약했기에 나이 들고 한국에 와서도 4할이 가능했던 것. 출루율 역시 0.502로[25] 2001년 펠릭스 호세가 0.503으로 기록을 갈아치우기 전까지 역대 1위는 이 시즌 백인천의 몫이었다.
결과적으로 백인천의 82년 타율/출루율/장타율은 KBO 리그 한 시즌에 나오기 힘든 전설적인 수치다.
원년 팀당 경기수가 고작 80경기로 적었던데다 선수 겸 감독으로서 스스로 기록관리를 했기 때문에 4할타율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선 반박이 존재한다. 80경기가 적긴 했어도, 80경기 시즌이라고 딱 잘라서 KBO 리그를 볼 경우 백인천을 제외하고 4할을 치고 있었던 것은 1994년의 이종범(104경기)과 2012년의 김태균(89경기) 그리고 2021년의 강백호 단 세 명 뿐이다. 기록관리를 했다는 주장에 대한 김은식 기자의 반박을 보자. 그리고 백인천의 기록을 폄하하려는 사람들은 그가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가 나올 경기는 일부러 결장한 듯이 주장하지만, 백인천은 그해 한 팀이 소화하는 80경기 중 8경기에 결장했는데, 그중 5경기는 몰수게임에 따른 출장정지이므로 그가 자발적으로 빠진 경기는 3경기뿐이다. 감독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어려운 투수가 나오면 결장할 수도 있었음에도 거의 전경기 가깝게 출전했다고 봐야한다. 게다가 출장정지 받은 5경기 중엔 투수진이 붕괴된 최약체팀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시리즈도 있었다. 오심이 없었거나, 몰수패 경기까지만 끌고 가지 않았어도 오히려 삼미 등을 통해 타율을 더 올릴수도 있던 상황. 본인은 4할에 대해 신경도 안썼다고 한다. 마지막 경기 때 코치가 타율이 4할이니 오늘 경기는 쉬고 다른 선수를 내보내자고 하자 백인천은 자기는 4할 신경도 안쓴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기록관리설 정리[27]
기록관리에 대한 확실한 반증은 홈런과 타점 기록이다. 기록 관리를 하려면 타석에서 빠져야 하는데, 누적 기록인 홈런과 타점에서 2위에 올랐다는 건 오히려 기록관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당해 타격 10걸 선수 중 백인천보다 타수가 적었던 선수도 3명이나 된다. 백인천은 만 4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50타수나 소화했다. 21세기 144경기 체제하에 만 40세의 박용택은 195타수를 소화하는데 그쳤고 불혹의 나이에도 1군에서 활약중인 김강민도 만 40세에는 178타수를 소화했을 뿐이다. 철저하게 관리 받으며 장기간 선수 생활을 하는 현대야구에서 장수했다는 선수들이 만 40세에는 200타수도 버거운데, 규정타석을 넘겼을 뿐만 아니라 80경기 체제에서 250타수나 소화하며 OPS 1.237를 찍은 선수를 폄하하는 주장은 기록으로 반박되고도 남는다.
물론 일본에서 3할을 넘긴 시즌이 딱 3번, 장타율 5할을 넘긴 시즌도 3번, 출루율 .350을 넘긴 시즌이 2번에 불과한 선수가 한국에 와서 만 40세에 타율 0.412를 치고 장타율 0.740을 넘겼다는 것은 분명히 KBO 리그 초창기에서나 가능한 이례적인 기록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백인천이 일본에서 그저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던 것도 아니었다. 통산 타율 0.278, OPS 0.746, 통산 홈런 209개, 통산 도루 212개 그리고 리그 정상급의 중견수 수비능력을 보여줬던 그는 일본에서도 상위급 선수였다. 특히 호타준족의 상징인 통산 200홈런 200도루 클럽에 가입해서 이름을 확실히 남겼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현재(2018년 3월)까지 200-200 클럽 가입자는 17명에 불과하다.[28]
한국에 올 때 만 39세였으니 그의 전성기인 30대 초중반에 한국에 왔다면 아예 초토화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장 만 37세이던 1979시즌까지만 해도 리그 수위급 타자로 활약하며 타율은 본인의 커리어하이인 .340을 기록하였다. 그 해 141안타를 기록하였고 홈런과 타점도 커리어하어 시즌인 1972 시즌과 비슷한 성적이었다. 리그 수준이 낮다고 해서 그의 기록을 폄하하면서 당시 그의 나이는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4할 기록을 폄하하기 위해 '만약에 리그 수준이 높았다면'이라는 전제를 하려면 '만약 그의 전성기 때 KBO 리그가 창설되었다면'이라는 전제도 이야기해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어찌되었든 4할 타율의 기록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가 나중에 백골퍼라는 조롱을 듣게되자 MBC팬들이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애초에 백인천은 문제의 롯데 감독 시절만 제외하면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29]
다만 이 시절 선수로서는 훌륭했지만 감독으로서는 부족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또한 감독으로 KBO 몰수게임 1호라는 불명예를 기록하기도 하는데 5경기 출장정지와 100만원 벌금을 부과받는다. 감독으로서의 백인천은 백인천/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
화려한 원년 시즌을 마친 백인천은 구단과의 연봉조정 과정을 거쳐 1983년 선수 계약을 추가하게 된다. 본래 1년 짜리 선수 계약이었기에 기존 선수 계약이 종료되면서 KBO 최초의 자유계약 신분이 된다.
그러나 1983 시즌은 감독으로서도 선수로서도 그다지 출발이 좋지 못했다. 결국 시즌이 한 달도 지나지 않은 4월 말 본인의 요청에 의해 휴식기간을 갖기로 했다. 당시 .162로 매우 부진하기는 했으나, 그 보다는 신문 지상을 통해 짤막하게 언급되는 사생활 문제로 인해 그만두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숨고르기를 하면서 복귀를 시도했으나 구단에서 감독대행을 내리고 아예 김동엽 감독을 정식 선임하면서 MBC 복귀는 무산된다.
마침 전기리그에서 2위로 살짝 아쉬운 성적을 냈던 삼미가 그의 이적을 요청하여 타격코치 겸 선수로 삼미 슈퍼스타즈로 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다지 성적이 나지 않았는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시즌 중인 8월 말 간통죄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30] 참고로 삼미 이적 후 후기리그에서도 타율은 겨우 .202에 그쳤다. 시즌 .190의 성적에도 무려 타점을 17개 올리는 점은 고무적이었으나, 낮은 타율에 지명타자로만 활용할 수 있고 작전 구사를 할 수 없어 코칭 스탭에서는 계륵으로 보기도 했던 모양이다. 연말 석방되면서 백인천은 구단과의 계약을 청산하게 된다.
그렇게 현역에서 은퇴하는 줄 알았으나, 지난해의 좋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전기리그 탈꼴찌 싸움을 하던 삼미가 백인천을 선수 겸 타격코치로 재영입한다. 영입 초반 효과를 보는 듯 했으나 또 한 번 코칭스탭과 마찰을 일으키며 선발출전에서 배제된다. 이 시즌은 .281에 안타 9개를 기록하는데 그치지만, 이 나이에도 장타력과 타점 생산 능력은 여전해서 32타수에 3홈런 10타점 및 장타율 .625를 기록한다. 그러나 사건과 사고로 얼룩진 노장을 더 이상 받아주는 곳은 없어 은퇴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백인천은 코칭스태프 뿐만 아니라 기자들과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8년 11월 휴가를 얻어 한국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김포공항에서 벌어진 일명 나니(何, 뭐야) 사건이었는데, 그 해 시즌 컨디션 난조로 1군과 2군을 오가며 심기가 불편하던 백인천에게 한 기자가 "아직도 2군에 있소?"라며 묻자 발끈한 백인천이 무심결에 "나니?!"라는 일본어로 받아치며 물의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 건으로 백인천은 한동안 세간의 비난을 사야 했다.[31] 그리고 MBC 감독 취임 후 원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강릉에서 전지훈련 도중, 한 사진기자가 좋은 그림을 잡는다며 위험하게 타자가 타격연습 하는 뒷쪽으로 접근하자 이를 본 백인천은 혼비백산 하며 "썩 꺼져버려! 사진 찍으려면 딴데서 찍어 이 자식아!!"라고 고함을 쳐서 그 기자를 머쓱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나마 백인천은 야인으로 지내던 동안 성격이 유해지고 기자들의 생리도 이해하면서 1990년 LG 트윈스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에는 기자들과의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의 혼인 관계 또한 불명예스러운 퇴장과 관련이 깊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일본에서 결혼한 재일교포이고[32], 두 번째 부인은 간통사건의 상대방이었던 여자이다. 이 사건으로 1983 시즌은 완전히 날아간다.
백인천은 KBO에 만 39세에 입성하여 3시즌 통산 .335의 타율을 남기며 1984 시즌 후 조용히 은퇴했다. 그렇게 백인천의 영광스러운 현역 시절은 끝났다.
MBC 청룡 시절 종합비타민제 'Gevral T' 광고에 출연했다. 다만 우리말로 '게브랄 티'로 소개된 상품명 때문에 모델인 백인천까지 덩달아 조롱받기도 했다. 백인천이 타석에 나오면 관중들이 일제히 '개부랄티!'를 외치며 조롱 또는 비난했을 정도. 심지어 일부 MBC 팬들조차 말이다. 광고영상[33] 미국에선 '지브럴 티'로 읽는데 왜 한국에서 '견공 고환'을 연상시키는 요상한 한국이름을 붙였는지 의문.
3.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푸른 글씨는 KBO 리그 역대 최고 기록.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출루율 | 장타율 |
1962 | 도에이 | 1군 기록 없음 | ||||||||||||
1963 | 20 | 19 | .158 | 3 | 0 | 1 | 0 | 5 | 0 | 0 | 0 | .158 | .263 | |
1964 | 92 | 250 | .252 | 63 | 12 | 1 | 6 | 23 | 25 | 9 | 8 | .284 | .380 | |
1965 | 116 | 356 | .267 | 95 | 14 | 2 | 14 | 44 | 43 | 9 | 11 | .294 | .435 | |
1966 | 126 | 363 | .262 | 95 | 13 | 1 | 4 | 23 | 42 | 18 | 12 | .284 | .336 | |
1967 | 128 | 396 | .280 | 111 | 17 | 4 | 10 | 51 | 43 | 13 | 15 | .313 | .419 | |
1968 | 117 | 382 | .296 | 113 | 13 | 3 | 15 | 51 | 52 | 9 | 9 | .316 | .463 | |
1969 | 109 | 454 | .291 | 132 | 17 | 9 | 12 | 46 | 68 | 13 | 13 | .314 | .447 | |
1970 | 127 |
496 (2위) |
.276 | 137 |
30 (1위) |
2 | 18 | 64 | 67 | 28 | 36 | .325 | .454 | |
1971 | 107 | 421 | .238 | 100 | 11 | 4 | 11 | 38 | 47 | 17 | 26 | .283 | .361 | |
1972 | 126 |
486 (5위) |
.315 (4위) |
153 (2위) |
33 (1위) |
3 | 19 | 80 | 67 | 20 | 35 | .362 | .512 | |
1973 | 닛타쿠홈 | 96 | 291 | .247 | 72 | 13 | 0 | 6 | 20 | 27 | 8 | 16 | .290 | .354 |
1974 | 닛폰햄 | 114 | 418 | .261 | 109 | 20 | 1 | 15 | 42 | 63 | 24 | 22 | .310 | .421 |
1975 | 다이헤이요 | 102 | 379 |
.319 (1위) |
121 | 18 | 2 | 16 | 53 | 57 | 13 | 17 | .349 |
.504 (3위) |
1976 | 121 | 469 | .288 |
135 (5위) |
17 | 2 | 17 | 59 | 54 | 15 | 23 | .321 | .441 | |
1977 | 롯데 | 126 | 452 | .281 | 127 | 11 | 2 | 16 | 56 | 50 | 6 | 30 | .327 | .420 |
1978 | 58 | 171 | .257 | 44 | 7 | 0 | 3 | 11 | 19 | 5 | 7 | .289 | .351 | |
1979 | 124 | 415 |
.340 (4위) |
141 | 25 | 4 | 18 | 71 | 47 | 3 | 21 | .378 | .549 | |
1980 | 76 | 167 | .216 | 36 | 1 | 2 | 5 | 21 | 11 | 0 | 7 | .253 | .335 | |
1981 | 긴테쓰 | 84 | 194 | .227 | 44 | 11 | 0 | 4 | 23 | 19 | 2 | 14 | .292 | .345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출루율 | 장타율 |
1982 | MBC | 72 | 250 |
.412 (1위) |
103 (1위) |
23 (1위) |
1 |
19 (2위) |
64 (2위) |
55 (공동 1위) |
11 | 45 |
.497 (1위) |
.740 (1위)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출루율 | 장타율 |
1983 | 삼미 | 35 | 121 | .190 | 23 | 6 | 1 | 1 | 17 | 6 | 1 | 12 | .261 | .281 |
1984 | 10 | 32 | .281 | 9 | 2 | 0 | 3 | 10 | 6 | 1 | 3 | .343 | .625 | |
NPB 통산 (20시즌) |
1969 | 6579 | .278 | 1831 | 283 | 43 | 209 | 776 | 801 | 212 | 322 | .316 | .430 | |
KBO 통산 (3시즌) |
117 | 403 | .335 | 135 | 31 | 2 | 23 | 91 | 67 | 13 | 60 | .418 | .593 | |
개인 통산 (23시즌) |
2086 | 6982 | .282 | 1966 | 314 | 45 | 232 | 867 | 868 | 225 | 382 | .317 | .439 |
[1]
이런 경험 때문인지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은
쇼트트랙 선수로 키우려 한 적도 있었다.
[2]
백인천을 일본식으로 읽은 Haku Jinten으로 활동했다.
[3]
스프링 캠프도 참가하지 못해 몸이 덜만들어진 상태에서 시즌 중 팀에 합류해 그 해 최악의 부진을 한다.
[4]
선동열도 조성민과 같은 시기에 일본에 진출했지만, 계약시기는 조성민이 더 빨랐다.
[5]
로 메이시의 경우로는 중국어/일본어 구별없이 유니폼에 RO로만 붙였으며, 2006년부터 데뷔한 양중서우(陽仲壽, 양중수)를 요 쵼쇼(일본식 음독), 선수 개명 이후
양다이강(陽岱鋼, 양대강)을 요 다이칸(일본식 음독)으로 불리고 유니품을 YANG(중국어식)보다 YOH(일본어식)로 표기, 또한 일본식 선수등록명으로 완전히 다르게 사용하는 (형제 격식) 대만 선수 중으로는 천다이펑(陳大豊, 진대풍) 대신
타이호 야스아키, 그의 동생 천다이순(陳大順 , 진대순) 역시 타이준 마사히로로 표기하였다.
[6]
이후로 양다이강과 달리하여 양야오쉰(陽耀勲, 양요훈,
양다이강의 친형)의 유니폼에는 YOH(일본어식)보다 YANG(중국어식)으로 표기하였다.
[7]
장발이라서 별명이 삼손이었는데, 문제는 삼손이 일본의 유명한 게이 잡지 이름이라(...)
DQN네임으로 유명했다.
[8]
실제로 백인천은
경동고 시절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를 겸업하면서 하체를 탄탄하게 단련한 덕분에 엄청난 순발력과 스피드를 가질 수 있었다.
[9]
한편으로 미즈하라는 백인천 특유의 격한 성격이 냉철함을 유지해야 하는 포수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를 외야수로 전향시켰다는 설도 있다.
[10]
참고로
지명타자는
퍼시픽리그에서 1975년부터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런 불편한 수비력에도 장훈은 계속 수비에도 나서야 했다.
[11]
참고로, 프로야구 심판을 보기 전에는 다른 직업도 아니고 무려 권투선수로 활약했던 경력도 있었다.
[12]
장훈도 차별을 받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당시 프로야구의 슈퍼스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학생 시절부터 성깔 있고 싸움을 잘하는 선수로 소문났던데다 재일교포 야쿠자인
정건영의 지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감히 장훈을 건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포수가 계속
트래쉬 토킹을 한다고
실수인 척 방망이로 뒤통수를 갈겨버렸다는 카더라까지 있었을 정도.
[13]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도이의 선수생활 중 유일한 타이틀 수상이었다.
[14]
마찬가지로 히가시오도 이해 다승왕이 첫 타이틀 수상이었다.
[15]
센트럴리그에선 1981년에
후지타 타이라(.358)가 규정타석을 정확히 채우고 수위타자를 수상했다. 참고로 당시 규정타석은 센트럴, 퍼시픽 모두 동일하게 403타석이었다.
[16]
여담으로 이듬해인 1976년 시즌엔 같은 팀의
요시오카 사토루가
퍼시픽리그 수위타자를 수상했는데, 당시 요시오카의 타율은 불과 .309로 현재까지
퍼시픽리그 역대 최저 타율 수위타자 기록이다.(
센트럴리그 최저기록은 1962년
모리나가 카츠하루의 .307) 참고로 요시오카는 이 시즌과 다음 해인 1977년 시즌 이외엔 백업급으로만 뛰었던 그저 그런 선수였고, 결국 통산 300안타만 간신히 넘기고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17]
AKB48의 전 멤버
쿠라모치 아스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78년 오프시즌 트레이드로 롯데로 복귀하며 백인천과 같이 한솥밥을 먹게 된다.
[18]
특히 한국 프로야구 출범 전 잠시 귀국했을 때 중앙일보와의
인터뷰(1981.11)에서 백인천 본인은 2,000경기 출장이 목표라고 직접 밝혔을 정도였다.
[19]
그 때문에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통산 안타 2위는
터피 로즈가 기록한 1792안타로 간주된다.
[20]
이 당시에는 출루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타자들이 현대 야구에 비해 타율대비 출루율이 낮은 편이다.
[21]
1977년엔
한큐 브레이브스, 1980년엔
킨테츠 버팔로즈한테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다.
[22]
이때 마지막까지 감독 선임 못하는 팀으로 가자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으며 MBC가 마지막까지 감독을 선임하지 못하자 MBC로 갈 것을 결심했다한다. 본디 MBC측에선 백인천에게 나이도 있고 하니 감독만 해줄 수 있겠냐고 요청을 했지만 백인천은 한국 야구팬들에게 선수로서의 백인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결국 계약 기간 3년 중 첫 시즌은 선수 겸 감독으로 뛰고 그 다음 나머지 2시즌은 순수 감독으로서 근무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23]
1982년 시즌은 팀간 16경기, 총 80경기를 40경기 씩 전기/후기 리그로 나누어 치렀으며, 그가 출장하지 않은 8경기 중 5경기는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수겸 감독이었던 백인천이 오심에 대해 항의를 하고 경기 속개를 거부해서 몰수패를 당했는데 그로 인해 출장 정지를 받았다.
[24]
이후 KBO 타격왕 중 가장 적은 타수를 기록한 경우는 1987년
장효조의 88경기 284타수 110안타 0.387이다. 1987년 팀당 경기수는 108경기였다.
[25]
당시 규정으로는
희생플라이를 분모에 포함하지 않았기에 0.502였지만, 현재 기준으로는 0.497이다. KBO에서는 예전 선수는 예전 출루율을 따른다.
[26]
비결을 묻자 당시 프로야구를 경험한 사람이 없었고 수준이 낮아 가능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27]
실제로 신경을 안 썼을 확률이 높은 것이 다음 시즌 장명부가 30승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을 봐도 당시에 이미 46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일본과 이제 갓 프로야구가 출범한 한국 간의 프로야구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이미 일본에서 준수한 커리어를 보낸 백인천이 굳이 선수단이나 팀 수도 간신히 채워 출범한 신생리그의 기록을 욕심낼 이유가 없다. 물론 현재 한국프로야구는 당시에 비해 규모도, 수준도 크게 성장해 바로 메이저리그로 건너갈 수도 있는 수준의 리그가 됐지만, 당시로서는 일본에서 전성기가 한참 지난 노장이 건너와도 맹활약을 할 정도로 경기 수준이 높진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마지막 경기에서 4타수 무안타 이상만 아니면 4할 확정이었고, 오히려 마지막 경기에서 타율을 더 올렸다.
[28]
이치로와
마츠이 카즈오는 MLB 합산 기록
[29]
달리 말하자면 1년만의 트롤링으로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 중 한 명이 트롤링 뒤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조롱받는 것이다.
[30]
1983년 삼미가
장명부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김진영 감독의 이단 날아차기 방송사건.
[31]
씁쓸하고 불편한 사실이지만 1968년이면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된 지 23년이 된 시점이다. 당시 언어습관에 일본어의 잔재가 흔하게 남아있었고, 무엇보다 일본어 회화가 가능한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다.
[32]
훗날 백인천은 첫 번째 결혼이 자신이 원해서 했던 결혼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33]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이 드립이 등장한다. "여자가 ○○○이 뭐냐?"는 감사용 어머니(
김수미 분)의 한마디. 시대
고증이 그래도 잘 되었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