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01:53:24

최익성

최익성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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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9

파일:KBO 퓨처스리그 엠블럼.svg
1994 KBO 퓨처스 남부리그 타격왕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6번
유정민
(1993)
<colcolor=#008bd2> 최익성
(1994)
안윤호
(199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7번
김인철
(1990~1994)
최익성
(1995)
하춘동
(1996~200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3번
유명선
(1989~1995.5.9.)
최익성
(1996~1998)
스미스
(1999~2000.7.22.)
한화 이글스 등번호 33번
이종운
(1998)
최익성
(1999)
김종석
(2000.6.1.~2004)
LG 트윈스 등번호 46번
신국환
(1995~1999)
최익성
(2000)
심성보
(2001~2003.7.7.)
해태/ KIA 타이거즈 등번호 23번
조남기
(1997~1999)
최익성
(2001)
조민철
(2002~2003)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46번
장정석
(1996~2002.6.15.)
최익성
(2002.6.16.~2002)
조지현
(2003)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33번
이대환
(2002)
최익성
(2003)
신동민
(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4번
라이언
(2003.7.10.~2003)
최익성
(2004)
신동주
(2005~2005.7.24.)
SK 와이번스 등번호 22번
정상호
(2004)
최익성
(2005)
이한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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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니폼 수집러 최익성.jpg
{{{+2 최익성}}}
崔益城 | Choi Ik-sung
출생 1972년 2월 11일 ([age(1972-02-11)]세)
경상북도 경주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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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경주중학교 - 경주고 - 계명대[1]
포지션 외야수[2]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4년 신고선수 (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4~1998)
한화 이글스 (1999)
LG 트윈스 (2000)
해태- KIA 타이거즈 (2001~2002)
현대 유니콘스 (2002~2003)
삼성 라이온즈 (2004)
SK 와이번스 (2005)
지도자 저니맨 외인구단 감독 (2016~2017)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논란5. 평가6. 여담7. 서정환 前 감독 과의 악연8. 연도별 성적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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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소속 외야수로. KBO리그의 대표적인 저니맨이자, 연습생 출신 선수계의 레전드 중 한명이다. 現 ㈜저니맨스포츠그룹 대표 겸 저니맨 외인구단의 구단주 겸 한국독립야구연맹 사무총장.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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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부친의 강력한 권유[3]로 중학교 시절 무명의 후보선수로 시작하여 온갖 설움을 이겨내고[4] 힘겹게 프로야구선수가 되었다. 경주고등학교 계명대학교 사회체육학과(1990학번)를 졸업하고 지명을 못 받자, 입단테스트를 거쳐서 1994년 삼성 라이온즈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5]. 그리고 이때 2군 시절 눈에 띄기 위해, 1루에서 리드를 길게 잡고 있다가 견제구에 귀루할 때마다 슬라이딩을 해서 흙범벅이 되게 했다고 한다. 경기 시작 전 선수단 집합 때 한마디 해보라고 하자 '최익성 최익성'을 외쳐달라고 했다고. 이걸 하술할 백인천이 좋게 본 거 같다고 한다.

방위 복무를 마치고 이듬해 백인천 감독을 만나 기량이 한층 성장하게 되는데, 1997년 122경기에 출전하여 .296/.394/.494의 3-4-5를 아깝게 못찍은 비율스텟에 22홈런 33도루로 20-20 클럽에 가입하며 부동의 리드오프로 자리매김했다.[6] 완전히 1992년 이순철의 시즌2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순철과 비교하면 타율이 1푼3리 낮은 대신 출루율은 5리 높고 장타율은 거의 같다.[7], 20-20에 도루수도 많고[8] 홈런치는 1번타자에다가 그팀이 700득점을 올렸다는 점. 97삼성은 92해태에 이어 두번째로 700득점을 기록한 팀이 되었다.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팀이 탈락했다는점 역시 같다. 이순철과 비교하면 도루수가 11개 적은데, 그해 도루자가 최익성이 5개고 92 이순철이 16개를 기록했던 것을 보면, 도루의 순기능은 최익성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9] 2승 2패로 맞선 1997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기선을 제압하는 선두타자 홈런을 쳐내기도 했다.[10] 어쨌든 1997시즌의 최익성은 스탯티즈 기준 리그 5위의 WAR[11]을 기록한 신성으로 떠오르면서 향후 삼성의 외야를 계속 책임져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998년에도 110경기 출전하면서 .262/.372/.406의 비율스탯에 13홈런과 20도루를 기록했었고 특기할 사항으로 홈런 중 절반 가까이가 1회 선두타자 홈런이었다. 강동우와 번갈아가며 출전하였지만, 1998년에 새로 부임한 서정환 감독과의 궁합이 문제였다. 1998년 서정환 감독이 부임한 후 신인 강동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출장 기회를 조금씩 잃어 가면서 저니맨 인생이 시작되었다. 훗날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서정환과 궁합이 전혀 맞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서정환은 1996년 2군 수비코치로 최익성과 처음 만났던 시절부터 최익성에게 특유의 타격폼을 놓고 간섭을 하다가 최익성이 응하지 않자, 훈련때마다 대놓고 자주 악담을 퍼부었고, 심지어 참다 못한 최익성이 폭발하여 대놓고 말다툼[12]까지 벌여본 적도 있을 정도로 원수같은 사이였었는데, 서정환이 1군 감독까지 되어버리자 완전히 악연의 효과가 최대치로 터져버린 것. 백인천 쉴드가 없어지자 트레이드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13]

결국 1998 시즌 종료 뒤 당시 성장세가 멈췄다고 판단된 노장진과의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한화 이글스로 팀을 옮기게 됐다. 이 트레이드는 당시 한화 이글스 사장이 과감한 팀 컬러의 변경 목적으로 진행시킨 것이었는데, 1998 시즌 도중 임명된 이희수 감독은 현장에 대한 프런트의 월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결과 초반 이영우의 부상으로 최익성이 활약했지만 이희수 감독이 고집한 의견인 "트레이드를 실패시켜야 현장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익성은 대타 아니면 2군으로 한정된다. 직접 코치들에게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서 이 때부터 선수 인생이 꼬인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주전으로 활약해 팀의 우승에 기여하는 등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1차전에서 역전 결승 홈런을 쳐 시리즈 전체 분위기를 한화가 주도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6803496.1.jpg
LG 트윈스 시절.

하지만 1999시즌 종료 후 선수협 결성에 적극 동참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구단에 의해 투수 송유석, 내야수 신국환과 맞바꾸는 형태로 LG 트윈스에 트레이드 됐다. 초반에는 맹타를 휘두르다가 부상 등이 겹치며 부진해 214타석 소화에 그쳤고 무주공산이 된[14] 우익수 주전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15]

2000 시즌 종료 후에는 홍현우의 FA 이적에 따른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그냥 잠깐 스쳐지나간 이적생으로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타이거즈에서 굵직굵직한 이정표를 많이 남긴 선수이다. 일단 2001년 7월 29일에 벌어진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2번 타자 겸 9회 마지막 타자이다.[16] 또한 2001년 8월 2일에 벌어진 첫 KIA의 경기에서는 인천 SK전에서 KIA 타이거즈 역사상 1호 홈런을 친 타자.

파일:external/ilyo.co.kr/1071328803160570.jpg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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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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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시절.

하지만 서정환과의 악연이 해태에서도 이어지면서 그의 인생은 계속 꼬이게 된다. 이유는 서정환이 남들 앞에서 모욕감을 준 것이라지만[17], 그 20수년전쯤 엄청나게 군기 강한 해태에서 감히 김성한[18]이 있는 감독실을 독단적으로 찾아간 것도 그가 최초라고 한다. 물론 김성한 본인은 그의 실력을 알기 때문에 쿨하게 넘겼지만[19], 그 다음해 서정환이 계속 악소문을 퍼뜨리면서 더이상 타이거즈에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태-기아때 그의 성적은 대타로써는 쓸만했다. 완전히 못써먹을정도로 박았던 홍현우보다는 좋은 활약을 했다. wrc+ 89.5

2002 시즌 도중에는 장정석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됐다가 2003년에 방출됐다. 2004 시즌을 앞두고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가 방출됐고, 2005 시즌을 앞두고는 SK 와이번스로 이적하는 등 롯데, 두산 유니폼만 빼고 다 입어 봤다.[20][21] 그리고 2005 시즌 후 SK 와이번스에서 방출되었다.

방출된 후에는 마이너리그 입단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22] 실패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SK 와이번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23] 입단은 불발되었고 결국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강남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MBC 주말 드라마 2009 외인구단에 출연했으며[24], 2010년 3월 자신의 자서전격인 저니맨이라는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미국, 일본에서도 출간될 예정이다.오오 익성甲. 참고로 저 책을 출판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자, 스스로 출판사를 세웠다.

현재는 IPTV 스포츠채널인 IPSN/I Golf(둘다 같은 계열채널임)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중. 그리고 대놓고 편파중계라는 채널의 특성상 삼성 라이온즈를 위한 편파해설 작렬! 그러나 IPTV다 보니 해설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지못미.

2011년 9월 14일 맞선 프로그램 에 출연했다.

2012년 9월부터 이숭용 XTM 해설위원, 재활전문가 어은실 박사와 함께 프로야구에서 방출됐거나 입단에 실패한 선수들을 위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저니맨 야구 육성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숭용과 최익성은 친구이다.[25]

압구정에서 소주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름이 <꼬추>다. 검열삭제?

여담으로 2009년에 사사방과의 인터뷰에서 서정환을 공개 디스한 적이 있다. 아예 직접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돌직구를 꽂고 있는데, 그만큼 서정환에게 원한이 많았던 것 같다. 감독 서정환의 만행을 목도했던 삼성 팬들과 KIA팬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다

2015년 12월부터 김용민과 함께 지식라디오 김용민, 최익성의 스포츠인물평전을 진행하고 있다. 링크

1편은 최익성 본인의 이야기이고 2편인 12월15일자 방송에서는 스승이었던 백인천이 출연해서 최익성과 서정환과의 불화를 증언, 확인시켜 주었다.

2016년 5월 독립구단인 저니맨 외인구단 창단을 발표했다. 연천 미라클의 운영 모델을 따라갈 것이라고 밝혔으며, 2017년 4월 24일 한국독립야구리그가 창설되면서 이에 참여하였다.

2017년 12월 20일 한국독립야구연맹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임됐다.

4. 논란

4.1. 저니맨 외인구단 관련 논란

독립야구단 창설 계기와 다르게 말이 바뀐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본인의 페이스북에 저니맨에 있는 선수 가족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이러한 댓글이 달기 시작했는데...

파일:53635.jpg

2017년 한해 동안 고작 삼성 라이온즈 한 군데만 테스트 받았고 그것도 알고 보니 그 쪽에는 이미 합격자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들러리 하러 애들을 먼 곳까지 보냈냐는 질타가 나왔고 테스트를 제대로 준비할 환경조차 조성되지 않으면서 독립야구단만 유지에 급급하느냐는 비판적인 여론이 점점 조성되기 시작했다.

파일:54363.jpg

그러나 이 글을 쓴 댓글자에게 최익성 대표의 응답은 독립야구단은 프로구단 테스트 받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며 반박한다. 하지만 어느 분이 최익성 대표는 처음 선수를 모집할 때 이렇게 홍보를 했었다면서 선수 모집 때 쓴 글을 가지고 반박하면서 더욱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파일:52454.jpg

결국 2019년에 연천 미라클 파주 챌린저스 경기도독립야구연맹리그로 옮겨 버리고 의정부 신한대학교 피닉스마저 경기도에서 주관하는 경기도리그에 참가하면서 저니맨 외인구단과 경기를 갖지 않는 등 한국독립야구연맹과 KIBA 드림 리그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최익성 자신은 침묵 중이다.

4.2. 몸에 맞는 공 발언 논란

2022년에는 스포츠서울에 기고한 사설인 '때린자와 맞은자, 사과하지도 받지도 말자'이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는 사설에서 몸에 맞는 공에 대한 사과를 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비판하는 측은 미국과 한국, 일본의 문화 차이가 엄연히 있는데다 최근에 몸 맞는 공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장기이탈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선수가 부상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사과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되어 팬심과 동업자 정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과도하게 사과를 강요하는 현 야구 문화에 대해서 지적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 만큼 그러한 부분에서의 호소로도 해석될 수 있기에 의견이 갈리고 있다.

5. 평가

수차례의 부상을 이겨낸 호타준족형이자 장종훈 못지않은 연습벌레 스타일로 그 성장이 기대되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가서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일찍 떠나야 했던 비운의 선수. 정확히 말하면 외국인 선수 제도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시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사라진 선수는 정말 많고 뛰어나다고 평가 받았지만 재능을 온전히 터트린 경우도 많지 않긴 하다. 그걸 뚫고 결국에는 장성호의 누적기록을 넘어선 성공한 이호준의 사례도 있다. 최익성은 그런 선수를 대표할 수 있는 예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S-급 시즌을 한차례 보냈고 잠재력은 인정 받았지만 자리잡지 못하고 각 구단을 떠돌게 된.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당시 삼성 코치였던 서정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98년 서정환이 감독이 되자 잠깐 1번타자로 뛰더니 여지없이 신인 강동우에게 1번타자를 내주었다.[26] 그리고는 1998 시즌 후 바로 노장진과 트레이드. 한화 시절 불성실한 태도 등으로 인해 만년 유망주에 머물렀던 노장진도 이적 직후 1999년 15승을 찍으며 삼성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고 2002년에는 중무리 투수로 뛰며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하긴 했지만 이후 음주와 숙소 이탈 등으로 인해 롯데로 트레이드되었으나 다시는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그래도 1999년 한화에서 우승반지는 한 번 껴봤다. 그리고 1차전 사직 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한 번의 스윙에 투런 홈런을 때리면서 한국시리즈 역사상 4번째 대타 홈런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다만 현대 시절이었던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에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자신의 야구관이 확고하고,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 연습하고 고민하며 해결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인지 처세술은 그닥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이종범이 일본으로 건너간 상황에서 최고의 1번타자로 2할대 중후반의 타율에 15-20개 이상의 홈런과 25개 이상의 도루는 계속 할 수 있는 기량임에도 늘 어떤 이유에선지 보이지 않았다. 부상[27]이 잦기도 했고. 해태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의 기대[28]에도 그 성적을 못 낸 게 한이라고 할 수 있다.

6. 여담

  • 스톡킹에서 회고에 따르면 야구를 중학교 입학 이후로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했다고 하며, 당시에는 야구부가 없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가야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주에서 같은 시내 중학교로 전학이 안 돼서 잠깐 타지로 전학을 갔다가 다시 경주로 전학을 오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때 무작위 배정으로 그 당시 경주 시내에서 유일하게 야구부가 있는 경주중학교에 배정되지 않으면 야구를 시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경주중학교에 배정되어 중2에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29]. 늦게 시작하니 시작은 주전자와 배팅볼 포수, 기록 담당.
  • 2002 시즌 도중 KIA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되었을 때, 하도 갑자기 된 트레이드여서 최익성을 본 KIA 선수들이 "너 왜 현대 유니폼 입고 있냐?"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당시 최익성은 정작 야구보다는 새집 구하러 부동산 찾아다니고, 전입신고하러 동사무소 들락거리느라 더 바빴다고. 그런데 하필이면 현대로 옮겨오자마자 2군 경기 도중 오른쪽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원당 기숙사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그 와중에 트레이드되기 전날 밤 광주 집에 있는 세탁기 속에 빨래를 담아놓고 그 상태로 벌써 한 달이 넘어서 나중에 가보니 빨래가 물에 퉁퉁 불어 다 썩었다고 한다(…).
  • 엄청난 상체 근육을 가졌다. 당시 하일성 해설 위원의 말로는 상체 근육은 후배 심정수보다도 대단했다고.. 저 몸에 20-20을 했으니 젊은 시절에 몸에 무리가 빨리 왔을지도
  • 선수들 사이에서도 몸짱으로 유명했다. 밴드테라피 관련 책을 발간한 적도 있다. 관련기사
  • 마구마구에서는 97년에 엘리트가 하나 있는데 전력포인트가 1495로, 이 수치가 같은 타자로는 96 양준혁[30], 83 장효조[31]정도이다. 상당히 많이 좋은 카드로 재조명한 것.[32]

7. 서정환 前 감독 과의 악연




4분 57초부분 (감독과 불화)



3분 22초부분( 더 깊어진 감정의 골 )

8. 연도별 성적

역대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삼성 1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1995 3 3 .000 0 0 0 0 0 0 0 0 .000 .000
1996 57 131 .252 33 7 0 4 16 18 3 19 .397 .344
1997 122 480 .296 142 25 2 22 65 107
(2위)
33
(5위)
79 .494 .394
1998 110 374 .262 98 15 0 13 42 74 20 66 .406 .372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9 한화 68 163 .288 47 10 0 9 26 31 11 18 .515 .357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LG 64 183 .257 47 13 1 2 30 21 7 30 .372 .36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KIA 60 143 .252 36 8 1 4 9 24 6 26 .406 .365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2 KIA / 현대 45 75 .280 21 1 0 1 8 10 2 15 .333 .391
2003 현대 33 47 .191 9 2 1 1 5 9 0 9 .340 .31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4 삼성 18 16 .125 2 1 0 0 3 2 0 3 .188 .26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5 SK 40 70 .214 15 1 1 4 12 13 3 13 .429 .333
KBO 통산
(12시즌)
621 1686 .267 450 83 6 60 216 309 85 278 .430 .369

9. 관련 문서


[1] 사회체육학과 (1990학번) [2] 외야 전 포지션이 가능하지만, 주 포지션은 중견수. [3] 부친 쪽에서 최익성을 야구부가 되게 하려고 전학을 두번이나 보내서 야구부가 있는 경주중학교로 전학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전학한 것은 당시에는 관내에서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바로 전학할 수 없었기 때문. 경주 관외 중학교로 전학 갔다가 다시 경주 관내로 전입하면서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 배정되길 기도했다고 한다. 결과는 성공. [4]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가던 연말에 학교 야구 감독 역할인 야구 부장 선생님이 부친을 따로 학교에 불러 면담을 하면서, 최익성에게 야구 재능이 없으니 야구를 그만 시키고 성인이 돼서 먹고 살 기술이라도 가르치라고 종용한 적도 있다고 한다. 부친은 집에 돌아와서, 본인이 시킨 야구인데 학교감독이 생각하는게 이 지경이면 아들이 너무 힘들어 할거라는 생각에 최익성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힘들면 그만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부친에게 들어버린 최익성은 분개하여 "아버지 내가 꼭 야구 실력을 발전시켜서, 나중에 야구를 그만두더라도 못해서 나가는게 아니라 내가 그만두고 싶을때 내 발로 그만두고 나갈 수 있는 선수가 되겠어요. 그러니 그런 말 듣지 마시고 한번만 나를 믿어주세요."라고 강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친은 최익성을 계속 응원했는데, 안타깝게도 4개월 뒤, 최익성이 고2가 되자 돌아가셨다고 한다. 최익성은 그래도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미친듯이 훈련하여 고3때는 잘하는 선수가 되었다고 한다. [5] 본인 曰, 2군에서 제일 발이 빠른 선수와 60m 달리기를 시켰다고 한다. 그 선수를 이기면서 눈도장을 찍고 입단하게 된 것 같다고 [6] 그 덕에 시즌 1 때의 마구마구에서는 97 최익성 카드가 11 배영섭의 등장 이전까지 삼성 올스타 덱의 무려 6~7년 간 부동의 중견수 자리를 차지했다. [7] 사사구 수치도 거진 비슷한데, 최익성은 사구가 많았다. 그리고 장타율은 1모차이로 이순철 우세!! [8] 물론 97년에는 이종범과 정수근 때문에 최익성의 도루랭킹은 5위. [9] 도루성공률이 무려 86.8%, 이종범보다(81.0%)보다 높았다!! 물론 80도루를 시도하면 누가 높았을지는 모르겠지만.. [10] 그러나 삼성은 투수층이 얇아 결국 그 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11] 무려 7.10의 WAR을 쌓았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종범, 양준혁, 정민철, 김기태 다음이었다. 심지어 바로 밑에 구원 20승의 김현욱과 32홈런을 쳐내며 처음으로 홈런왕에 오른 이승엽이 있었을 정도. 다만 선수 커리어 WAR의 절반을 1997년 이 시즌에 기록했다는 점도 특기할 사항.(...) [12] 최익성이 타격 연습을 하는데 뒤에서 서정환이 다른 선수에게 "저 새끼 안 돼. 저렇게 쳐가지고 공이나 제대로 맞추겠냐. 쟤는 저래서 성공 못해"라고 악담을 반복하자, 분노한 최익성이 방망이를 놔 버리고 다가가서 "코치님 제가 왜 성공을 못합니까?"라고 따지면서 언쟁이 시작되어 서정환은 "니 폼이 잘못되었다. 타격에 예쁜 폼들이 많은데 엉망인 폼으로 치는 너는 선수로 답이 없다.", 최익성은 "이 폼으로 성공할 수 있다."로 수십분이나 계속 서로 열이 올라서 다퉜다고 한다. 나중에는 서정환이 "너 임마 니가 1군 올라가서 그딴 폼으로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까지 말하고 최익성이 "그럼 코치님 집에 장 준비해 놓으십시오."라고 답하고서야 언쟁을 종료했을 정도. 그야말로 원수 중의 원수가 되어 버렸고, 이게 삼성 뿐만 아니라 전구단에 소문나서 "최익성은 2군에서 코치한테 덤빌만큼 싸가지 없다"는 이야기가 전구단 2군에 돌았다고 한다. 그나마 1군 감독 백인천은 그걸 들었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최익성의 근성과 헝그리 정신을 높이 사서 그 사건을 무시하고 97년에 최익성이 1군에서 활약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다른 코치나 감독들은 어느 정도는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3] 그러나 이후 홍현우의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자 하필이면 새로 해태가 영입한 수비코치가 서정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4] 1999 시즌 도중 주니어 펠릭스를 퇴출하고 투수에서 다시 타자로 되돌아온 심재학은 현대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김상호는 노쇠화로 사실상 전력외로 분류됐다. [15] 경쟁자였던 신인 최경환도 우익수 자리에서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우익수를 보는 외국인 타자 쿡슨이 잠시 왔다가 퇴출되었다. 급기야 본 포지션이 1루인 찰스 스미스 양준혁, 서용빈을 다 쓰기 위해 좌익수였던 김재현을 우익수로 바꾸고 좌익수로 쓰기도 했다. [16] 사실 해태의 마지막 예정경기는 그해 7월31일 인천 SK전이었으나 우천으로 취소되면서 마지막 선발 2번타자가 되었다. [17] 전지훈련에서 빠져서 국내에서 훈련 중이었는데 선수단들 앞에서 '너가 실력이 없어서 못 간거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18] 본인이 선수시절 호타준족이었고, 홍현우가 LG로 FA 이적을 한 상태에서 직접 힘 좋고 잘 뛰는 타자(=최익성)을 원했다고 한다. [19] 환자 명단에 있어서 전지훈련 명단에서 뺐는데 최익성이 독대하면서 아픈 것 없다 얘기하니까 전지훈련 보내라고 했단다 [20] 두산은 원래부터 화수분 야구로 외부 선수 영입이 적었고, 롯데는 알다시피 비밀번호를 찍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만 롯데로 갈 뻔하긴 했는데 본인 자서전에 따르면 KIA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되지 않았다면 삼성 시절 감독이었던 당시 롯데 감독 백골프 백인천이 트레이드해 오려고 했다고 한다. [21] 키움 히어로즈, NC 다이노스, kt wiz는 모두 최익성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 창단된 팀들이기 때문에 거론되지 않는다. 최익성이 뛴 구단 중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단을 비롯한 인적 자원을 물려받은 키움 히어로즈는 말 그대로 인적 자원만 물려받았을 뿐, 계보나 우승 기록 같은 건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엄연히 다른 구단이다. [22] 코치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23] 이 당시 베테랑을 선호하는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직후라서 테스트를 받아 현역 연장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24] 원래는 배우 윤태영과 과거부터 친분이 있어서 야구에 대한 자문을 윤태영에게 요청받아, 야구 관련 자문을 해줬는데, 중간에 자문비용 250만원을 주겠다는걸 최익성이 거부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윤태영에게 최익성이 자문비용 250만원을 안 받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작자가 최익성을 찾아와 "혹시 연기하시는 데에 관심있으신거에요?"라고 물었고 최익성이 충동적으로 그렇다고 답변하는 바람에, 제작진 측이 원작에도 없고 계획에도 없었던 역할을 만들어서 최익성을 출연시켰다고 한다. 최익성의 역할은 마동탁과 친한 선배 야구선수. [25] 90학번, 94 프로 입단 [26] 97년의 최익성과 98년의 강동우를 비교하자면 그동안 (보통 수비부담 때문에 8~9번을 맡는 포지션인)유격수 류중일이 1번을 맡아야 했을 만큼 1번타자 기근에 시달리던 삼성이 확실하게 얻은 1번타자이면서 호타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익성과 강동우 모두 1990년대 말 포스트 이종범을 노릴정도로 장타력과 정확도, 도루능력과 수비능력 모두 갖춘 1번타자였다. 타팀이 보기에는 매우 복에 겨운 케이스였다. 특히 비슷한 타율(.296 vs .300)에 누적스텟은 최익성의 우세였다. 게다가 최익성의 1998년 성적은 주전이 아닌 대타, 대주자, 대수비 등등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262에 13홈런 20도루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강동우가 펜스에 부딪혀 다리 골절상을 입은 뒤 다시는 신인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후 박한이를 1번 리드오프로 내세웠지만 출루에 강점을 갖는 타입의 유형이 다른 리드오프였다. 이후 삼성에서 스피드를 내세우는 유형의 리드오프는 2011년 배영섭이 등장하기 전까지 없다시피 했다.박한이가 잘 해서 그렇게 필요도 없었다 [27] 스톡킹에 나와서 얘기했는데, 삼성-한화-LG 시절엔 어깨부상으로 수술이 필요했는데 참고 뛰었다고 한다. 해태에 간 뒤 수술을 받는다 [28] 김성한 감독은 해태-KIA 감독 시절 장타력이 있는 타자들을 많이 영입했던 바 있다. 한 때 두산 김동주를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려고 시도한 바 있고 신동주, 이동수에 최익성까지. [29] 옆에 있던 심수창도 비슷한 이유로 전학을 갔었다고 말을 보탰다 [30] 타격왕, 최다 안타왕, 장타율왕을 달성한 시절. 그 외에도 3루타와 도루를 제외하고 모든 기록에서 순위권에 들어온 시절. [31] 첫 해에 타격왕, 출루율왕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던 시절. [32] 또, 퀵스랑 스피드안정감이 있어서 수비가 망할일이 없고, 엘리트이기 때문에 베테랑으로 어느 덱에도 갈 수 있기에 삼성덱이면 대부분 들어가있는 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