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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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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FA5> 비정통 초대 제2대
콘스탄티노스 테오도로스 1세 요안니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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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로스 2세 요안니스 4세 미하일 8세 }}}}}}}}}}}}
니케아 제국 제4대 황제
로마 제국 제121대 황제
미하일 8세
Μιχαὴλ Η΄
파일:미하일8세.pn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미하일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Μιχαὴλ Δούκας Ἄγγελος Κομνηνὸς Παλαιολόγος
출생 1224년
니케아 제국
사망 1282년 12월 11일 (향년 58세)
동로마 제국 파코미온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261년 8월 15일 ~ 1282년 12월 11일 (21년)
전임자 요안니스 4세
후임자 안드로니코스 2세
부모 아버지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어머니 : 테오도라 앙겔리나 팔레올로기나
배우자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자녀 안드로니코스 2세
종교 그리스도교( 정교회)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다사다난한 치세
2.2.1. 영광의 치세 초기2.2.2. 수도 재건 작업2.2.3. 아나톨리아에 대한 홀대2.2.4. 분열의 시작2.2.5. 다중전선 형성2.2.6. 외교 공작과 교회 통합2.2.7. 위기의 절정2.2.8. 시칠리아의 만종, 제국의 숨통이 트이다2.2.9. 말년
3. 평가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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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121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잔존국 니케아 제국 라스카리스 왕조 제4대 황제, 팔레올로고스 왕조 초대 황제.

2. 생애

2.1. 즉위 전

아버지는 니케아 제국 총사령관(Megas domestikos)을 지낸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Ανδρόνικος Δούκας Κομνηνός Παλαιολόγος)로, 알렉시오스 1세의 동서로 당대에 활약한 요르고스 팔레올로고스의 후손이다. 증조모가 요안니스 2세의 손녀인 안나 콤니니, 어머니는 알렉시오스 3세의 외손녀인 테오도라 앙겔리나 팔레올로기나였다.[1] 즉, 4차십자군이 없었고 정상적으로 알렉시오스 3세의 황위가 이어졌으면 자연스레 강력한 정통성을 가지고 황제에 올랐을 것이었다.

젊어서부터 능력을 드러내서 용병들의 지휘관을 맡았으며 막 30살이 된 1253년에는 이미 제국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동년 요안니스 3세의 종손녀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결혼하기까지. 군대에서도 인기가 좋았으며 잘생기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엄친아.

때문에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로스 2세에게 많은 견제를 받았다. 사서에서는 황제가 그를 질투했다고 하지만 사적인 감정 이전에 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유능하고 인기있으며 혈통도 좋은 고위직 인물은 견제를 받는게 당연했다.[2] 문제는 테오도로스 2세가 아버지처럼 간질 환자인데다 주변의 정세가 불투명한 와중에 미하일을 대체 할 만한 유능한 인물이 적다는데 있었다.

일단 1256년에 미하일은 반역죄로 몰려 룸 술탄국으로 망명했었다.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을 다시 불러들여 총사령관직에 복직시켰으나, 대 이피로스 전선에 500여명의 병력만을 주고 투입시켰다. 이때 몰려오던 적은 수천에 달했다. 그러던 1257년에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궁정 관료들의 불합리하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차 투옥시켰다. 선조 이순신의 관계가 떠오르지만, 여러 차례 의심을 샀고 후일 실제로 반역을 저지른 것을 보면 테오도로스 2세의 시기 섞인 의심은 미하일의 역심이 본인의 것이든 주변의 것이든지 간에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물론 추방에 하옥같은 남들은 상상도 못할 엄청난 견제에 계속 당했으니 없던 역심이 주입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황제와 미하일파의 갈등이 격화되던 1258년 테오도로스 2세가 덜컥 죽어버리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 섭정으로 테오도로스 2세가 지명한 요르요스 무잘론과 그의 형제들이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귀족층의 지지와 군사적인 기반이 너무나 부족했다. 때문에 섭정 형제들은 테오도로스 사후 8일만에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치러진 테오도로스의 장례식 도중 참살당했고 차기 섭정으로 미하일이 등극하게 되었다.[3]

정황상 의심스러웠으나 선황제에게 부당하게 의심받았다는 여론과 마그니시아의 재무성에 있던 자금을 뿌리고 국유지를 하사한 덕분에(미친듯이 뇌물을 뿌려서) 미하일은 사회 각층의 지지를 받았다. 귀족층은 물론이고 윤리적으로 까다로운 교회, 일반 신민, 심지어 요안니스 4세에게도 말이다.

대내적인 지지와 대외적인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자 그는 주변을 설득하여 1258년 12월 섭정 명의로 니케아 제국의 공동황제로 즉위했다.

2.2. 다사다난한 치세

2.2.1. 영광의 치세 초기

국내의 정치판도가 변하는 와중 국외의 상황 또한 급변했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트레비존드 제국, 룸 술탄국, 불가리아 제국 등이 차례로 약체화되어 가는 와중 니케아 제국이 두각을 드러내자 나머지 경쟁국들이 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피로스 군주국을 중심으로 아카이아- 아테네 공국, 테살리아, 세르비아, 시칠리아 왕국 등이 연합하였고 미하일은 동생 요안니스에게 야전군을 보내 출정시켰다. 1만 수천여의 니케아군과 2만여의 반니케아 연합군은 마케도니아 서부에서 격돌했고 이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니케아 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1259년 9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리며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경쟁자들을 모두 탈락시킨 미하일은 옛 수도만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라틴 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1260년의 공성은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라틴 제국의 후원자인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막혔으나 결국 1261년 7월 25일에는 총사령관 알렉시오스 스트라티고풀로스가 수비군이 떠난 틈을 타서 입성에 성공하였고, 보두앵 2세를 쫓아내고 황도를 수복했다.

1261년 8월 15일 미하일 8세는 환도식을 거행하였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와 함께 수복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파일: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jpg
미하일 8세의 정식 대관식(1261년 수복 직후 대관식).[4]

여기까지가 미하일 8세의 가장 빛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를 회복하였다고 제국이 정상 궤도를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라틴인들의 오랜 지배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만신창이 상태였고, 서방에서는 라틴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린 로마인들에 대한 보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제국은 적에 둘러싸여 있었다.

2.2.2. 수도 재건 작업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미하일은 1204년 이전으로 제국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먼저 그는 수도의 방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환도했다지만, 서방에서는 라틴 제국의 붕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고, 제국은 적대적인 세력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미하일은 4차 십자군 때 털린 적이 있었던 황금뿔의 둑을 보강하였고, 거대한 해상 쇠사슬을 다시 설치했으며, 수도의 성벽을 수리했다.

또한 해군을 재건하는 데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미 알렉시오스 3세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허무하게 점령당했던 것도 해군이 유명무실해져 제국이 해상으로 방어할 길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리하여 미하일의 치세에는 80여척의 해군이 재건되는 중 그럴듯한 모양새를 취하게 되었다. 아들 대에 이르러 허무하게 해체 수순을 밟긴 했지만...

라틴인들의 지배로 훼손된 성당과 수도원들을 재건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미하일은 복원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시 정교회의 권위를 세움으로써 민심을 바로잡으려 했다. 공공건물과 병원 등이 정화되었고, 라틴인들의 지배로 떠나갔던 그리스인들이 다시 수도에 정착할 수 있게끔 지원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를 재설립하는 등 문예 부흥의 첫걸음을 내딛었는데, 이를 통해 후대에 '팔레올로고스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 부흥의 근간이 마련될 수 있었다. 미하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시금 유럽령 영토가 제국의 중심부로 기능하게끔 복원하는 것이었다.

2.2.3. 아나톨리아에 대한 홀대

그러나 이러한 사업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것이 당연지사. 기존의 중심지였던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지역으로부터 인력과 자원이 유럽으로 빠져나가자 아나톨리아 주민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구 제국령 수복을 위한 군비확장 때문에 중과세가 이어지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라스카리스 황실에 대한 처우도 불만을 키웠다. 11살의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는 눈이 뽑혀 폐위당했고,[5] 니케아 제국은 지방정권[6]으로 격하되었다. 섭정 명의로 황제가 된 자가 정통 황제를 하극상했음은 물론, 영웅 테오도로스 1세와 명군 요안니스 3세, 그리고 그들의 후손 테오도로스 2세 요안니스 4세의 가계가 부정당한 것이다.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은 시점에서 라스카리스의 정통성을 잃었고, 어차피 욕 먹을 동네의 자원을 쪽쪽 빨아다 유럽 영토에 쏟아부어 마지막 지지까지 상실했다.

결국 다양한 요소가 결합한 끝에, 이러한 불만은 요안니스 4세의 후견인이었던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 세계 총대주교의 황제 파문으로 폭발했다. 명목상으론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키고 폐위시킨 것이 이유였으나, 아나톨리아의 주민들은 니케아 제국에 대한 향수와 현정부에 대한 실망을 가진 차에 중과세까지 이어지자 아르세니오스 세계 총대주교에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2.2.4. 분열의 시작

파문당한 황제는 세계 총대주교에게 '양해'를 구하고, 파문을 거두어 달라 청했다. 이에 꼬장꼬장하고 금욕적인 세계 총대주교는 황제가 굽히고 참회할 것을 -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했던 알렉시오스 1세가 거친 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자며 40일 동안 사죄했던 것처럼 - 요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세계 총대주교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과 결탁한 것이라 의심해 버렸고, 4년간이나 대립각을 세웠다. 1265년에서야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회의(Synod)를 열어 아르세니오스를 면직시켰으나 후임 세계 총대주교도 황제와 대립하여 파문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1267년 새로이 세계 총대주교가 된 요시포스가 파문을 거둠으로서 공식적인 갈등은 해소되었으나 여론은 악화 될대로 악화되어 아나톨리아 주교들은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근간에 깔린 종교계의 아르세니오스 분열(Arsenite Schism, Arsenian schism)은 50여년 간이나 이어져 극심한 사회적 분열을 초래했으며, 말기 제국사에 큰 그림자를 남기게 된다.

2.2.5. 다중전선 형성

'집토끼'인 아나톨리아가 극심한 여론 악화와 사기저하로 흔들리는 와중, 동쪽으로부터 튀르크의 침식이 시작되었다. 미하일 자신이 1261년에 수복한, 요안니스 3세 시절 부터 시작한 마지막 동방 수복의 마무리가 된 라오디키아(Laodikeia) 지역이 튀르크 부족들에 의해 넘어간 것이다. 라오디키아 자체는 경제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동부 최전방에 불과 하였으므로 제국 측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중요한 것은 유럽의 전선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베네치아 공화국이 후원하는 라틴 제국을 무너트렸으므로 제노바 공화국과 연합하여 해전이 주가 되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에게해의 섬과 베네치아 조계지를 수복하기 위한 이 전선은 엄청난 예산을 잡아먹으며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1277년까지 이어졌고, 평화조약 이후에도 베네치아가 적대적으로 돌아서는 등 제국의 골치거리가 된다.

남은 망명정권인 이피로스 군주국과의 전쟁은 유럽에서 주 전선이 되었다. 제국군 총사령관이 패하자 동생 요안니스가 대타로 나갔고 미하일 본인도 친정하는 등 관심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이피로스는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거기에 남부 그리스에 대한 원정도 이어졌다.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포로가 된 기욤 공작을 교황의 중재로 풀어주기로 하고 영토 할양을 약속받았으나, 이단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교황의 허가를 받은(...)약 주고 병 주고 기욤 공작이 영토 할양을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피로스 전선이 비교적 쉽게 풀려 사실상의 주 전선이 된 남부 그리스 전선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1264년이 되자 당분간의 진격은 정지되었다.

전선 자체는 3중(...) 전선이었으나, 외교적 적대 관계는 불가리아의 북, 룸 술탄국과 튀르크계 공국 및 부족의 동, 베네치아의 남, 이피로스와 주변의 테살리아, 아케아-아시나, 세르비아, 그리고 바다 너머 시칠리아가 개입한 서부까지... 동서남북으로 고립된 희대의 다중 전선이었다. 물론 동로마는 그 경제력 탓에 사방에서 약탈자들이 몰려오는 게 일상이었고, 4면전선은 전통이었다. 그러나 사방의 적을 거꾸러트리며 패권을 외치던 1025년, 1180년의 제국과 막 지역 강국을 벗어난 1261년의 제국은 달랐다는 점을 미하일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벅차긴 해도 어쨌든 전선은 유지되고 있었고 최대한 국력을 기울여 전선 그 자체를 없애는 정책 자체도 타당해 보였으며 제국의 물적, 인적 기반인 아나톨리아 영토가 유지되었기에 아직까지는 할 만 해 보였다. 그러나 한계가 오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2.6. 외교 공작과 교회 통합

1260년대의 제국은 베네치아와 겨루는 해군을 운용하면서 지역 수비를 담당하는 지방수비군을 두었고, 전선에 나갈 야전군을 따로 운용하면서 1만 미만 수천 단위로 3개의 전선에 동시에 파견했다. 거기다 펠라고니아 전투나 남부 그리스 원정에서 보듯, 제국이 작정하고 원정군을 조직하면 1만 수천을 넘겼다. 정예함이 예전만은 못했고 쉬이 집중하기 힘든 여건이었으나 어쨌든 군사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한계가 왔다. 아나톨리아의 활기가 떨어지고 제국 정부의 관심이 유럽으로 쏠린 사이 튀르크 공국과 부족들이 1261년의 라오디키아 함몰을 시작으로 동부 국경을 본격적으로 넘어오기 시작한것이다. 유럽 영토가 아직 복구 중이었고 심지어 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제국의 인적·물적 기반은 아나톨리아 지역이었기에 이는 중대한 사태였고, 미하일은 아나톨리아로 군대를 보내 방어선을 정비하고 튀르크족을 몰아내면서 국경너머로 응징원정을 가했다. 그러나 이들을 통제할 룸 술탄국은 통제력을 상실한채 분해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일 칸국의 위협에 튀르크인들은 비교적 만만한 서쪽으로 재차 넘어왔다. 유럽의 전선을 유지한 채로 동방에 전력을 투입할 여력은 없었고 사실상 제국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미하일은 외교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일단 1265년부터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동년 룸 술탄국의 상위 군주인 일 칸국의 칸에게 미하일의 딸을 시집 보냈고 1266년에는 불가리아의 상위 군주인 킵차크 칸국의 칸에게 다른 딸을 시집 보냈다.[7] 튀르크족을 억제하기 위한 이러한 일련의 외교는 이후 불가리아의 북방 전선을 안정시켰고 칸국들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내는 등의 결실을 보았으나 당장 급한 동부 국경의 위기를 진압하는데는 별 효과가 없었다.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도 진행되었다. 이단으로 규정되어 서유럽과 단절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회 일치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으나, 시칠리아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비테르보 조약(1267년)이 체결되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적인 시칠리아,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외에도 세르비아 제국, 헝가리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이 참여하였고 '이단 황제를 내쫓고 정통한 라틴 제국의 황제를 복귀시키기 위한 십자군 원정'이 계획되었다. 에게해에서는 베네치아와, 남부 그리스에서는 아카이아 공국과의 소모전이 다시 일어났다.

더 이상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던 미하일은 유럽의 전선을 안정화 시키고 동부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교황청에 굽히는 자세를 취했다.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의 원정이 태풍으로 좌절되고 신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올라 교회 일치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자 미하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협상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거룩한 로마 교회는 전체 가톨릭교회 위에 최고의 충만한 수위권과 우선권을 가졌다. 로마 교회는 이러한 권한을 사도들의 으뜸이요 대표인 복된 베드로의 존재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그리고 겸손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진리를 수호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앙에 관해서 야기되는 논쟁들은 로마 교회의 결정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


-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읽혀진 미하일 8세 팔레올로스의 신앙 선서

그렇게 1274년에 겉으로나마 교회 일치가 달성되어 외교적인 지위가 격상되었다. 시칠리아 국왕은 침공 명분을 잃어버리고 교황의 압력으로 휴전을 약속해야 했다. 로마 제국은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이러한 여력을 바탕으로 다시 알바니아의 시칠리아 세력을 밀어 붙였고 남부 그리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이 실시되었다. 지상전의 경우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와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는 정도로 그쳤으나, 해전이 대체로 승리로 끝나서 1277년에는 베네치아와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2.2.7. 위기의 절정

먼저 외교적인 이익을 위해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해치운 교회 일치였기에 1274년의 통합 당시부터 국내의 반발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하일의 파문을 거두었던 요시포스 총대주교를 필두로 교회 일치 반대파가 생겨났으며 황제에게 적대적이던 아르세니오스파 역시 교회 일치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내부의 분열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동쪽에서는 다시 튀르크의 침입이 이어졌다. 1260년대 중반 잠시 잠잠했던 동부국경은 1270년을 전후하여 파플라고니아, 카리아, 도리아 지역의 붕괴로 재앙의 막이 올랐으며 제국 정부 측은 일단 중요도가 높은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지역이나마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팽창 된 군비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었고 지방 수비군이 와해 되었으며 튀르크를 쫓아낼 전투력과 기동력을 갖춘 야전군은 유럽에 묶여 움직이지를 못했다.

국외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10세가 1276년에 죽자 후임 교황들은 동로마 종교계의 분열된 여론을 인식하고는 겉으로만 일치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미하일 8세가 외교적인 이득을 위해 자신들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교회 일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으며 알바니아 지역에서는 다시 카를루 1세의 시칠리아군이 침략해왔다.

1280년 여름부터 시작된 베라트 공방전이 1년의 지루한 공성전 끝에 지쳐 나가떨어진 시칠리아군을 제국군이 추격하면서 승리로 막을 내렸으나, 이미 제국 내부의 분열은 극심했고 제국의 대외관계는 카를루 1세의 앙주 가문 편을 드는 신임 프랑스인 교황 마르티노 4세의 파문으로 다시 고립 상태가 되었다. 이미 1279년 교황청- 시칠리아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8]이 합의한 오르비에토 조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한 해로 원정 계획으로 발전해 있었고, 카를루 1세는 아카이아 공국을 합병하여 원정로를 확보하고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를 사위로 들여 명분까지 확보했다. 동서남북으로 고립된 악몽의 재래였다.

2.2.8. 시칠리아의 만종, 제국의 숨통이 트이다

1282년의 제국은 더 이상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재정의 근간인 아나톨리아가 튀르크의 침입으로 붕괴되는 와중 유럽의 전선은 한계까지 확장되어 야전군이 묶인 상태였고, 베네치아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어 해군도 줄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계의 분열로 내부의 혼란이 계속되었고 재정은 이미 파산직전인데다 외교적으로는 다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이 중 가장 큰 위협은 제일 공격적인 스탠스를 취한 시칠리아 왕국 카를루 1세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하일은 대규모 군사원정을 반복하는 시칠리아 왕국도 국력의 소모가 심할 것임을 간파했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 미하일은 시칠리아에 몇년에 걸쳐 공작원을 잠입시켜 귀족과 민중의 반프랑스 감정을 선동하였고,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명분을 가진 아라곤 왕국 페드로 3세를 충동질했다.[9] 전쟁을 위해 반복 된 물적·인적 수탈로 불만이 쌓여있던 시칠리아 인들은 동로마 요원의 공작으로 더욱 불만을 키워갔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동로마의 자금을 밑천삼아 함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대망의 1282년 3월 30일, 팔레르모에서 축제를 즐기던 시칠리아 인들에게 마침 파견되어 있던 프랑스 군인이 다툼을 벌이다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팔레르모 전역에 저녁기도를 위한 종이 울렸다. 만종 소리를 시작으로 시칠리아 섬 전역에 동시다발적인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인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살해당했고 4월 28일에는 마지막으로 버티던 메시나까지 점거당해 원정을 위해 주둔 중 이던 함대까지 불타버렸다.

주민들은 자신들을 교황에게만 충성하는 자유민으로 선언하였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카를루 1세가 군대를 보내자 '마침' 가까운 튀니지에 주둔하면서 '해적을 소탕하려 한다'며 교황의 추궁을 회피하던 페드로 3세의 함대를 받아들였다. 결국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페트루 1세' 타이틀을 추가하는데 성공했고, 나폴리로 도망친 카를루 1세는 이후 잃어버린 시칠리아를 되찾는데 주력하게 되면서 동방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시칠리아의 만종은 미하일 8세의 외교적 승리였다. 제국을 위협했던 카를루와 그 후원자인 교황은 빅 엿을 먹었고, 동로마 제국은 임박한 재앙에서 벗어나서 일시에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 황제 자신도 이 성과에 대해 크게 자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0]

2.2.9. 말년

서쪽의 복잡한 외교관계가 그럭저럭 단순해지고 위협도 사라지자, 그제서야 미하일의 관심은 동쪽으로 향했다. 야전군과 지휘관이 부족하여 실시하지 못했던 방위선 점검과 응징원정을 행하며 아나톨리아의 상황을 살폈고 유이민들을 불러모았으며 더 나아가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프리기아 지역에 대한 원정도 계획했다.

그러나 58세의 황제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했다. 군을 이끌던 미하일은 쓰러져 트라키아의 파코미오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지를 못했고, 동서남북의 적과 23년간 쉴새없이 싸웠던 황제는 그렇게 죽었다.

3. 평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엇갈리는 논쟁적 인물이다.[11] 시각에 따라서 제국의 재건자로도 제국의 찬탈자로도 볼 수 있고, 외교 천재로도 외교 재앙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숱한 명군을 배출한 라스카리스 왕조를 찬탈함으로서 그는 숱한 증오를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경쟁 세력들을 제압하고 무사히 수도를 복원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무사히 수도 재건 사업을 완수하였다. 그 사이 라틴 제국의 붕괴로 인해 증오심으로 가득찬 서방 세력들로부터 막 재건되어 취약한 로마 제국을 방어해야 하는 과중한 책임도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미하일은 바득바득 카드를 쪼개 새로운 연대세력을 찾아나갔으며, 교회 통합 등으로 화두를 돌리면서 시간을 벌었다. 이러한 기민한 외교 책략을 바탕으로 (여러 행운의 결과이긴 하지만) 결국 로마인들의 적들을 분쇄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제국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여러 측면에서 무리수를 벌인 것이 결점으로 지적된다. 당장 재정 악화만 보아도 군사 활동을 줄였으면 아나톨리아 영토를 보전하여 충분히 극복 가능한 수준이었다. 중앙군도 전대 황제들 덕분에 충실했고 지역 방위를 위한 요새와 이를 지킬 수비군 역시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여[12] 사방으로 적을 만들었고 나중엔 군사활동을 줄이고 싶어도 상황 자체가 악화되어 그러지를 못했다. 멀쩡한 방어선의 자원을 유럽 수복한다고 쪽 빨아냈으니 그게 무너지는 건 당연지사.

종교계 건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신중하고 더 자존심을 굽혔다면 파문 사태는 막을 수 있었고, 통합건 역시 외교적인 이득을 위해 섣불리 진행하다 더 큰 손해만 봤다. 주교들이 당시에는 지역민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뼈아픈 실책이었다. 얼마나 교회의 신망을 잃었는지, 사망 당시에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일단 암매장했다가 나중에서야 이장할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은 사실 미하일 8세가 소산드라 쿠데타로 무리하게 집권한 순간부터 이미 예측된 일이었다. 알다시피 아나톨리아는 테오도로스 1세- 요안니스 3세를 거치며 라스카리스 왕조의 영향력이 강력한 곳이었고, 이러한 아나톨리아 세력들이 어린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으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한 미하일 8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자연스레 미하일 8세는 없다시피 한 자신의 정통성 및 새로운 기반을 얻어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아나톨리아가 아닌 유럽쪽의 고토 회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아나톨리아는 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회 통합은 종교계의 동의 없이 무작정 진행된지라 반감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방식도 교황에게 무릎꿇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밝혀져 종교계뿐 아니라 전 대중에게 있어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내부건 외부건 미하일 8세의 적을 더 늘릴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국력은 계속 빨아먹히는 악순환이 지속된 것이다.

결국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신의 치세 동안 군비 축소 및 해군 해체, 교회와의 관계 개선, 대외 관계 재정립 등 아버지와 반대되는 기조로 나아감으로써 정책 전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시기가 되면 다시 적극적인 군사원정을 나설 수 있을 정도로 제국은 국력을 추스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조정의 시기 동안 세르비아 제국 오스만 베이국 등이 성장해버렸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사후 일어난 내부 분열과 흑사병의 시대가 찾아오자 제국은 약소국으로 굴러떨어지게 되고 결국 멸망의 순간 일개 도시국가 수준으로까지 떨어지고 만다.

결론적으로 명과 암이 교차하는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니케아 제국 시기에 반 니케아 연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복원하였으며, 외교적 책략을 발휘하여 동로마 제국이 다시 뿌리를 내리는 데에 성공한 것은 그가 유능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무모한 일들을 벌이고, 무리한 교회 통합 등 신민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통치 태도는 악평을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시작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4. 창작물에서

코에이 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등장했다. 보통 쿠빌라이 칸이 중심인 시나리오에서 등장. 3편인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에서는 중년의 일러스트였는데, 징기스칸 4에서는 어쩐지 준수한 일러스트로 환골탈태. 징기스칸 4에서의 능력치는 정치, 전투, 지모 순으로 각각 63, 57, 68. 상업, 외교, 화공 특기를 소유하고 있고 병과적성은 보병, 궁병, 기병, 수군 순으로 각각 B,D,C,D다. 이만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능력치지만 썩 좋은 것은 아니다. 등용 특기는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2세가 지니고 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문화치가 사기급이라 그 부자보다 우수한 가공장수들이나 후계자는 얼마든지 등용 가능하다. 플스판에서는 전투 66, 지모 79로 대폭 상승했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등장. 시나리오는 따로 없지만, 1261년 7월 25일의 콘스탄티노플 수복일로 맞춰놓으면 황제로 등장한다. 제위 등극과정과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 때문인지 최고의 음모계 교육 특성인 환영의 그림자(elusive shadow)가 달려있고 전반적인 능력치 역시 준수하다. 가문원들도 많아 후계걱정도 없고 동맹을 물색하기도 쉬우며, 제국 데쥬레의 알짜배기 공작령을 직할로 가지고 있어 영주-황제로서는 최고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실제 역사처럼 튀르크 유목민의 위협이 없는 대신 아바스 칼리프가 아나톨리아에 지하드를 때려버리는이슬람의 침공이라는 면만 보면의외로 고증? 일이 종종 있으며, 몽골인의 시대인데다 일 칸국이 스택을 그대로 들고 있어 주의해야 한다. 게다가 주변의 적이 고만고만한 대신 게임 종료 시점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위협 수치에 신경안쓰고 확장하다간 로마 제국 수복 디시전 활성화 전에 실제 역사처럼 외교적으로 고립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동로마의 황제로 회귀하다에서는 주인공이 요안니스 4세인지라 일종의 중간보스 포지션.[13] 미래를 다 아는 주인공 때문에 소산드라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관직이 왕창 깎인 뒤에도[14] 일신의 뛰어난 용병술과 대귀족들의 지도자라는 무시할 수 없는 정치력 때문에 숙청만은 피한 채 살아남는다. 하지만 세력이 점점 깎여나가다 못해 아내, 남동생, 심지어 맏아들까지 그를 손절하자 끝끝내 폭주해 쿠데타를 기도하며, 그마저 휘하 병력의 배신으로 온몸이 난도질당해 고깃덩이가 되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비잔티움 쇠망사에서 로마의 주요 영웅중 하나로 등장한다. 쉴드 리젠이 달린 아칸 영웅으로 중반까지 오스만의 대공세를 막아서는데 필수적인 영웅이다.


[1] 근친혼을 한 개족보이나, 혈통에서 제위의 정통성을 찾자면 그럴 수도 있는 태생이었다. 무엇보다 테오도로스 1세 알렉시오스 3세의 둘째사위였고 요안니스 3세가 그 테오도로스의 사위였는데, 미하일의 외할아버지는 알렉시오스 3세의 큰사위였다. [2] 특히 로마 제국의 제위는 능력과 인기가 갖춰진 인물만 있으면 다른 군주국에 비해 수월하게 바뀌었으니... [3] 이 사건은 소산드라 쿠데타라 부르며 물증은 없지만 미하일 8세가 배후에 있었다는 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 출처: ΑΠΑΝΤΑ ΟΡΘΟΔΟΞΙΑΣ, Τρίτη, 15 Αυγούστου 2017, Coronation of Michael VIII Palaiologos in Hagia Sophia - 1261) [5] 이 사건으로 요안니스 4세의 누나인 불가리아의 황후 이레네와 불가리아의 차르 콘스탄틴 아센 1세가 분노해 불가리아 제국과의 관계도 악화되고 결혼동맹도 끊어졌다. [6] Despotate. 군주국, 전제군주국, 친왕부 등으로 번역된다. [7] 다만 2명 모두 양녀 혹은 사생아였다고 한다. [8] 1277년에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통상조건에 불만족하여 파기해버렸다. [9]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사생아로서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을 놓고 카를루 1세와 겨뤄 패배한 만프레디의 사위이다. [10] 한편 나폴리로 도망친 카를루 1세의 '시칠리아 왕국'은 편의상 나폴리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공식적인 이름은 여전히 '시칠리아 왕국'이었고 따라서 2개의 '시칠리아 왕국'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나중에 아라곤이 나폴리까지 차지하여 두 '시칠리아 왕국'이 같은 군주를 섬기게 되었음에도 변하지 않았는데 빈 회의 이후 다시 정식으로 합쳐져 양시칠리아 왕국이 되었다. [11] 대체로 서양 역덕계에서는 높은 평가를, 한국 역덕계에서는 박한 평가를 받는다. [12] 또한 미하일은 전대 황제들에 비해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우대해 주고 많은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당시 주변 세계에서 굉장히 민감한 존재로, 너무 우대해주면 '유대인 국가'라며 비판당했고 그렇다고 너무 탄압하면 또 그걸 꼬투리 삼아 역시 비판당할 정도였다. 이러한 유대인 우대정책은 미하일의 외교적인 고립에 한 몫 했다. [13] 최종보스로는 베네치아 본국이나 훗날 미하일 8세를 괴롭혔던 앙주의 샤를 정도가 꼽히고 있다. 하지만 앙주의 샤를은 예루살렘 왕이 되면서 아군화 되었고 베네치아도 끝까지 제국의 우방으로 남았다. 이후 최종보스가 된 존재들은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파의 잔당인 소 테오도로스 필리스로 밝혀졌다. [14] 12위 직급인 대군무관에서 34위 직급인 대호군으로 23계단 내려간다. 물론 펠라고니아 회전이 다가오면서 서열 15위인 시위관으로 어느정도 복직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