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8:51:46

노무라 카츠야

노무라 카츠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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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1950 1951 1952 1953 1954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외야수
야마모토 카즈토
난카이 / 내야수
유키 스스무
난카이 / 투수
오카모토 이사미
난카이 / 내야수
오오시타 히로시
니시테츠 / 외야수
<rowcolor=#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외야수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내야수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투수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외야수
<rowcolor=#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투수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장훈
토에이 / 외야수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조 스탠카
난카이 / 투수
<rowcolor=#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 투수
요네다 테츠야
한큐 / 투수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외야수
<rowcolor=#fff> 1970 1971 1972 1973 1974
키타루 마사아키
롯데 / 투수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외야수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외야수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카네다 토메히로
롯데 / 외야수
<rowcolor=#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카토 히데지
한큐 / 내야수
야마다 히사시
한큐 / 투수
찰리 매뉴얼
킨테츠 / 외야수
<rowcolor=#fff> 1980 1981 1982 1983 1984
키다 이사무
닛폰햄 / 투수
에나츠 유타카
닛폰햄 / 투수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내야수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투수
부머 웰즈
한큐 / 내야수
<rowcolor=#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내야수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 내야수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투수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외야수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외야수
<rowcolor=#fff> 1990 1991 1992 1993 1994
노모 히데오
킨테츠 / 투수
궈타이위안
세이부 / 투수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 투수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투수
이치로
오릭스 / 외야수
<rowcolor=#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이치로
오릭스 / 외야수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투수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내야수
쿠도 키미야스
다이에 / 투수
<rowcolor=#fff> 2000 2001 2002 2003 2004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외야수
터피 로즈
킨테츠 / 외야수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내야수
조지마 켄지
다이에 / 포수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외야수
<rowcolor=#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투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내야수
다르빗슈 유
닛폰햄 / 투수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투수
다르빗슈 유
소프닛폰햄 / 투수
<rowcolor=#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투수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 외야수
요시카와 미츠오
닛폰햄 / 투수
다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투수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투수
<rowcolor=#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투수, 외야수
데니스 사파테
소프트뱅크 / 투수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내야수
모리 토모야
세이부 / 포수
<rowcolor=#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투수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외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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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rowcolor=#ffffff> 1936秋 1937春 1937秋 1938春 1938秋
나카네 스스무
나고야군 / .376
마츠키 켄지로
오사카 / .338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333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345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361
<rowcolor=#ffffff> 1939 1940 1941 1942 1943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338
키토 카즈오
라이온군 / .321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310
이시이 마사유키
도쿄쿄진군 / .286
이시이 마사유키
도쿄쿄진군 / .300
<rowcolor=#ffffff> 1944 1946 1947 1948 1949
오쿠무라 토시아키
킨키닛폰 / .369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 .347
오시타 히로시
토큐 / .315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306
코즈루 마코토
다이에이 / .36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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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362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377
니시자와 미치오
나고야 / .353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347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361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338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338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343
타미야 켄지로
오사카 / .320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34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34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53
모리나가 카츠야
히로시마 / .307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41
에토 신이치
주니치 / .323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에토 신이치
주니치 / .336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44
나카 토시오
주니치 / .343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26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45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25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20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 .329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55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32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319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355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 .358
미즈타니 지츠오
히로시마 / .348
펠릭스 미얀
타이요 / .346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369
후지타 타이라
한신 / .358
나가사키 케이이치
타이요 / .351
마유미 아키노부
한신 / .353
시노즈카 카즈노리
요미우리 / .334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랜디 바스
한신 / .350
랜디 바스
한신 / .389
시노즈카 카즈노리
요미우리 / .333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 .333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 .340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 .378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짐 파치오렉
타이요 / .326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 .340
잭 하웰
야쿠르트 / .331
토마스 오말리
한신 / .329
알론조 파웰
주니치 / .324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알론조 파웰
주니치 / .355
알론조 파웰
주니치 / .340
스즈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335
스즈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337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369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킨죠 타츠히코
요코하마 / .346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333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343
이마오카 마코토
한신 / .340
시마 시게노부
히로시마 / .337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344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351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346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코하마 / .378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322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358
초노 히사요시
요미우리 / .316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 .340
토니 블랑코
DeNA / .333
맷 머튼
한신 / .338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카와바타 신고
야쿠르트 / .336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 .344
미야자키 토시로
DeNA / .323
다얀 비시에도
주니치 / .348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 .335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사노 케이타
DeNA / .328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 .317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318
미야자키 토시로
DeNA / .326
타일러 오스틴
DeNA / .3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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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오시타 히로시
토큐 / .339
오시타 히로시
토큐 / .383
이이지마 시게야
다이에이 / .336
오카모토 이사미
난카이 / .318
래리 레인즈
한큐 / .337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32
토요다 야스미츠
니시테츠 / .325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331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14
스기야마 코헤이
난카이 / .323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344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36
잭 브룸필드
킨테츠 / .374
잭 브룸필드
킨테츠 / .335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366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20
에노모토 키하치
도쿄 오리온즈 / .351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36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36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33
나가부치 요조
킨테츠 / .333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83
에토 신이치
롯데 / .337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58
카토 히데지
한큐 / .337
하리모토 이사오
닛폰햄 / .340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백인천
타이헤이요클럽 / .319
요시오카 사토루
타이헤이요클럽 / .309
아리토 미치요
롯데 / .329
사사키 쿄스케
킨테츠 / .354
카토 히데지
한큐 / .364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레론 리
롯데 / .358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26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25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32
부머 웰즈
한큐 / .355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67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60
아라이 히로마사
킨테츠 / .366
타카자와 히데아키
롯데 / .327
부머 웰즈
한큐 / .322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니시무라 노리후미
롯데 / .338
히라이 미츠치카
롯데 / .314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 .322
츠지 하츠히코
세이부 / .319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85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42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56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45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58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43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87
후쿠우라 카즈야
롯데 / .346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340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360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358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와다 카즈히로
세이부 / .322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 .324
이나바 아츠노리
닛폰햄 / .334
릭 쇼트
라쿠텐 / .332
츠치야 텟페이
라쿠텐 / .327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니시오카 츠요시
롯데 / .346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 .338
카쿠나카 카츠야
롯데 / .312
하세가와 유야
소프트뱅크 / .341
이토이 요시오
오릭스 / .331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363
카쿠나카 카츠야
롯데 / .339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322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352
모리 토모야
세이부 / .329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요시다 마사타카
오릭스 / .350
요시다 마사타카
오릭스 / .339
마츠모토 고
닛폰햄 / .347
톤구 유마
오릭스 / .307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314
}}}}}}}}}}}}}}}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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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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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rowcolor=#ffffff> 1936秋 1937春 1937秋 1938春 1938秋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2개
야마시타 미노루
한큐군 / 2개
후루야 쿠라노스케
나고야킨코군 / 2개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4개
마츠키 켄지로
오사카 / 4개
타카하시 요시오
고라쿠엔 / 6개
버키 해리스
고라쿠엔 / 6개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10개
<rowcolor=#ffffff> 1939 1940 1941 1942 1943
츠루오카 카즈토
난카이군 / 10개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9개
핫토리 츠구히로
나고야군 / 8개
후루카와 세이조
나고야군 / 8개
후루카와 세이조
이와모토 아키라
카토 쇼지
나고야군 / 4개
<rowcolor=#ffffff> 1944 1946 1947 1948 1949
카나야마 지로
산교군 / 3개
오시타 히로시
세네터스 / 20개
오시타 히로시
토큐 / 17개
카와카미 테츠하루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25개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46개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코즈루 마코토
쇼치쿠 / 51개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32개
스기야마 사토시
나고야 / 27개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27개
아오타 노보루
요쇼 / 31개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마치다 유키히코
코쿠테츠 / 31개
아오타 노보루
타이요 / 25개
아오타 노보루
타이요 / 22개
사토 타카오
코쿠테츠 / 22개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29개
쿠와타 타케시
타이요 / 31개
모리 토오루
주니치 / 31개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후지모토 카츠미
오사카 / 22개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28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8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0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55개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2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8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7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9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4개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7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9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8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51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9개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타부치 코이치
한신 / 43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9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50개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44개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48개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44개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43개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35개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36개
오오시마 야스노리
주니치 / 36개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37개
우노 마사루
주니치 / 37개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랜디 바스
한신 / 54개
랜디 바스
한신 / 47개
릭 란셀로티
히로시마 / 39개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 33개
래리 패리시
야쿠르트 / 42개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34개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37개
잭 하웰
야쿠르트 / 38개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 34개
타이호 야스아키
주니치 / 38개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 39개
야마사키 타케시
주니치 / 39개
드웨인 호지
야쿠르트 / 38개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34개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44개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42개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39개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50개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40개
타이론 우즈
요코하마 / 40개
터피 로즈
요미우리 / 45개
타이론 우즈
요코하마 / 45개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 43개
타이론 우즈
주니치 / 47개
무라타 슈이치
요코하마 / 36개
무라타 슈이치
요코하마 / 46개
토니 블랑코
주니치 / 39개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49개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31개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31개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60개
브래드 엘드레드
히로시마 / 37개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38개
츠츠고 요시토모
DeNA / 44개
알렉스 게레로
주니치 / 49개
네프탈리 소토
DeNA / 41개
네프탈리 소토
DeNA / 43개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31개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39개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39개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56개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41개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33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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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43개
오시타 히로시
토큐 / 26개
후카미 야스히로
토큐 / 25개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6개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1개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5개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29개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0개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23개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 25개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 32개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29개
나카타 요시히로
한큐 / 29개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44개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52개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41개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42개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4개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5개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8개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41개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44개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41개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41개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43개
클라렌스 존스
킨테츠 / 38개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도이 마사히로
타이헤이요클럽 / 34개
클라렌스 존스
킨테츠 / 36개
레론 리
롯데 / 34개
바비 미첼
닛폰햄 / 36개
찰리 매뉴얼
킨테츠 / 37개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찰리 매뉴얼
킨테츠 / 48개
토니 솔레이타
닛폰햄 / 44개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4개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2개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0개
부머 웰즈
한큐 / 37개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52개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50개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 43개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4개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49개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42개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39개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41개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42개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35개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코쿠보 히로키
다이에 / 28개
트로이 닐
오릭스 / 32개
나이젤 윌슨
닛폰햄 / 37개
나이젤 윌슨
닛폰햄 / 33개
터피 로즈
킨테츠 / 40개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 39개
터피 로즈
킨테츠 / 55개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55개
터피 로즈
킨테츠 / 51개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44개
페르난도 세기놀
닛폰햄 / 44개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 46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32개
야마사키 타케시
라쿠텐 / 43개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46개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48개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T-오카다
오릭스 / 33개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48개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27개
미첼 아브레우
닛폰햄 / 31개
나카무라 타케야
에르네스토 메히아
세이부 / 34개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37개
브랜든 레어드
닛폰햄 / 39개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소프트뱅크 / 35개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47개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43개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아사무라 히데토
라쿠텐 / 32개
스기모토 유타로
오릭스 / 32개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41개
아사무라 히데토
라쿠텐 / 26개
그레고리 폴랑코
롯데 / 26개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26개
야마카와 호타카
소프트뱅크 / 3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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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다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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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rowcolor=#ffffff> 1936秋 1937春 1937秋 1938春 1938秋
후루야 쿠라노스케
나고야킨코군 / 23점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47점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37점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31점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38점
<rowcolor=#ffffff> 1939 1940 1941 1942 1943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75점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67점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57점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60점
아오타 노보루
도쿄쿄진군 / 42점
노구치 아키라
세이테츠군 / 42점
<rowcolor=#ffffff> 1944 1946 1947 1948 1949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25점
츠루오카 카즈토
그레이트링 / 95점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71점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108점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142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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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코즈루 마코토
쇼치쿠 / 161점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105점
니시자와 마치오
나고야 / 98점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98점
스기야마 사토시
주니치 / 91점
와타나베 히로유키
오사카 / 91점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79점
미야모토 토시오
요미우리 / 69점
미야모토 토시오
요미우리 / 78점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92점
모리 토오루
주니치 / 87점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후지모토 카츠미
오사카 / 76점
쿠와타 타케시
타이요 / 94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85점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12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19점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04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16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07점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25점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15점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05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01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20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14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07점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96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23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24점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18점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113점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112점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103점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95점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 103점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 102점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랜디 바스
한신 / 134점
랜디 바스
한신 / 109점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 98점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 102점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116점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102점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 99점
래리 시츠
타이요 / 100점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 94점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94점
타이호 야스아키
주니치 / 107점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 106점
루이스 로페스
히로시마 / 109점
루이스 로페스
히로시마 / 112점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100점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153점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108점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127점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107점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124점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 113점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이마오카 마코토
한신 / 147점
타이론 우즈
주니치 / 144점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122점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125점
토니 블랑코
주니치 / 110점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129점
아라이 타카히로
한신 / 93점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 104점
토니 블랑코
DeNA / 136점
마우로 고메스
한신 / 109점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하타케야마 카즈히로
야쿠르트 / 105점
츠츠고 요시토모
DeNA / 110점
호세 로페스
DeNA / 105점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131점
네프탈리 소토
DeNA / 108점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97점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113점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134점
마키 슈고
DeNA / 103점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86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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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105점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87점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86점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86점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97점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99점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95점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100점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 85점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 95점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 103점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 112점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04점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35점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15점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10점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97점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00점
조지 알트만
도쿄 오리온즈 / 100점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101점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129점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120점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01점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101점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109점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96점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카토 히데지
한큐 / 97점
카토 히데지
한큐 / 82점
레론 리
롯데 / 109점
바비 마르카노
한큐 / 94점
카토 히데지
한큐 / 104점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찰리 매뉴얼
킨테츠 / 129점
토니 솔레이타
닛폰햄 / 108점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99점
미즈타니 지츠오
한큐 / 114점
부머 웰즈
한큐 / 130점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146점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116점
부머 웰즈
한큐 / 119점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125점
부머 웰즈
한큐 / 124점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106점
이시미네 카즈히코
오릭스 / 106점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92점
짐 트라버
킨테츠 / 92점
부머 웰즈
다이에 / 97점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107점
이시이 히로오
킨테츠 / 111점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이치로
오릭스 / 80점
타나카 유키오
닛폰햄 / 80점
하츠시바 키요시
롯데 / 80점
트로이 닐
오릭스 / 111점
코쿠보 히로키
다이에 / 114점
나이젤 윌슨
닛폰햄 / 124점
터피 로즈
킨테츠 / 101점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 110점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 132점
터피 로즈
킨테츠 / 117점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123점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120점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 121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100점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100점
야마사키 타케시
라쿠텐 / 108점
터피 로즈
오릭스 / 118점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122점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코야노 에이이치
닛폰햄 / 109점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116점
이대호
오릭스 / 91점
아사무라 히데토
세이부 / 110점
나카타 쇼
닛폰햄 / 10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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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124점
나카타 쇼
닛폰햄 / 110점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소프트뱅크 / 103점
아사무라 히데토
세이부 / 127점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12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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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 쇼
닛폰햄 / 108점
시마우치 히로아키
라쿠텐 / 96점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90점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87점
야마카와 호타카
소프트뱅크 / 99점
}}}}}}}}}}}}}}}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역대 포수 베스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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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tablewidth=100%> 1940년, 1947년 ~ 1949년
<rowcolor=#ffffff> 1940 1947 1948 1949
타나카 요시오
한신군
도이가키 타케시
오사카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아라카와 쇼지
쇼치쿠
노구치 아키라
나고야
히로타 쥰
요미우리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히로타 쥰
요미우리
후지오 시게루
요미우리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도이 키요시
요미우리
모리 마사히코
요미우리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모리 마사히코
요미우리
키마타 타츠히코
주니치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키마타 타츠히코
주니치
타부치 코이치
한신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타부치 코이치
한신
키마타 타츠히코
주니치
오오야 아키히코
야쿠르트
키마타 타츠히코
주니치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오오야 아키히코
야쿠르트
야마쿠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나카오 타카요시
주니치
야마쿠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타츠카와 미츠오
히로시마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야에가시 유키오
야쿠르트
타츠카와 미츠오
히로시마
야마쿠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타츠카와 미츠오
히로시마
나카오 타카요시
주니치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무라타 신이치
요미우리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니시야마 슈지
히로시마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니시야마 슈지
히로시마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타니시게 모토노부
요코하마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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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야노 아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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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야노 아키히로
한신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나카무라 유헤이
야쿠르트
이시하라 요시유키
히로시마
아이자와 츠바사
DeNA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오오시로 타쿠미
요미우리
나카무라 유헤이
야쿠르트
오오시로 타쿠미
요미우리
야마모토 유다이
DeNA
<rowcolor=#ffffff> 2025 2026 2027 2028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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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도이가키 타케시
마이니치
마츠이 아츠시
난카이
찰리 루이즈
마이니치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찰리 루이즈
마이니치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오카무라 코지
한큐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무라카미 키미야스
롯데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카토 토시오
닛폰햄
나카자와 신지
한큐
나시다 마사타카
킨테츠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나시다 마사타카
킨테츠
나카자와 신지
한큐
카가와 노부유키
난카이
후지타 히로마사
한큐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이토 츠토무
세이부
야마시타 카즈히코
킨테츠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이토 츠토무
세이부
타무라 후지오
닛폰햄
요시나가 코이치로
다이에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나카지마 사토시
오릭스
요시나가 코이치로
다이에
이토 츠토무
세이부
죠지마 켄지
다이에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죠지마 켄지
다이에
이토 츠토무
세이부
죠지마 켄지
다이에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죠지마 켄지
소프트뱅크
사토자키 토모야
롯데
호소카와 토오루
세이부
타노우에 히데노리
소프트뱅크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시마 모토히로
라쿠텐
호소카와 토오루
소프트뱅크
츠루오카 신야
닛폰햄
시마 모토히로
라쿠텐
이토 히카루
오릭스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스미타니 긴지로
세이부
타무라 타츠히로
롯데
카이 타쿠야
소프트뱅크
모리 토모야
세이부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카이 타쿠야
소프트뱅크
모리 토모야
세이부
카이 타쿠야
소프트뱅크
모리 토모야
오릭스
사토 토시야
롯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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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카츠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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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cc800><tablebgcolor=#fcc800>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엠블럼.svg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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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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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1935년~
초대
다카스
파일:일본 국기.svg
(1938~1939)
2대
미타니
파일:일본 국기.svg
(1939)
3대
다카스
파일:일본 국기.svg
(1940)
4대
미타니
파일:일본 국기.svg
(1941~1942)
5대
가토
파일:일본 국기.svg
(1942)
6대
다카다
파일:일본 국기.svg
(1943)
7대
가토
파일:일본 국기.svg
(1943~1944)
8대
츠루오카
파일:일본 국기.svg
(1946~1965)
9대
카게야마
파일:일본 국기.svg
(1965)
10대
츠루오카
파일:일본 국기.svg
(1966~1968)
11대
이이다
파일:일본 국기.svg
(1969)
12대
노무라
파일:일본 국기.svg
(1970~1977)
13대
히로세
파일:일본 국기.svg
(1978~1980)
14대
블레이싱게임
파일:미국 국기.svg
(1981~1982)
15대
아나부키
파일:일본 국기.svg
(1983~1985)
16대
스기우라
파일:일본 국기.svg
(1986~1989)
17대
타부치
파일:일본 국기.svg
(1990~1992)
18대
네모토
파일:일본 국기.svg
(1993~1994)
19대
오 사다하루
파일:대만 국기.svg
(1995~2008)
20대
아키야마
파일:일본 국기.svg
(2009~2014)
21대
쿠도
파일:일본 국기.svg
(2015~2021)
22대
후지모토
파일:일본 국기.svg
(2022~2023)
23대
고쿠보
파일:일본 국기.svg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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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73180><tablebgcolor=#073180> 파일: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원형 엠블럼.svg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000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1950년 ~ 현재
초대
니시가키 토쿠오
(1950~1953)
2대
후지타 소이치
(1954~1955)
3대
우노 미츠오
(1956~1960)
4대
스나오시 쿠니노부
(1961~1962)
5대
하마자키 신지
(1963)
6대
하야시 기이치
(1964~1965)
7대
이이다 토쿠지
(1966~1967)
8대
벳쇼 타케히코
(1968~1970)
9대
미하라 오사무
(1971~1973)
10대
아라카와 히로시
(1974~1976)
11대
히로오카 타츠로
(1976~1979)
12대
타케가미 시로
(1980~1984)
13대
도바시 마사유키
(1984~1986)
14대
세키네 쥰조
(1987~1989)
15대
노무라 카츠야
(1990~1998)
16대
와카마츠 츠토무
(1999~2005)
17대
후루타 아츠야
(2006~2007)
18대
타카다 시게루
(2008~2010)
19대
오가와 준지
(2011~2014)
20대
마나카 미츠루
(2015~2017)
21대
오가와 준지
(2018~2019)
22대
타카츠 신고
(2020~)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efe01>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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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35년 ~ 현재
초대
모리 시게오
(1936)
2대
이시모토 슈이치
(1936~1939)
3대
마츠키 켄지로
(1940~1941)
4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2~1944)
5대
후지무라 후미오
(1946)
6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7~1949)
7대
마츠키 켄지로
(1950~1954)
8대
키시 이치로
(1955)
9대
후지무라 후미오
(1956~1957)
10대
타나카 요시오
(1958~1959)
11대
카네다 마사야스
(1960~1961)
12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2~1965)
13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6)
14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7~1968)
15대
고토 츠구오
(1969)
16대
무라야마 미노루
(1970~1972)
17대
카네다 마사야스
(1973~1974)
18대
요시다 요시오
(1975~1977)
19대
고토 츠구오
(1978)
20대
돈 블레이싱게임
(1979~1980)
21대
나카니시 후토시
(1981)
22대
안도 모토오
(1982~1984)
23대
요시다 요시오
(1985~1987)
24대
무라야마 미노루
(1988~1989)
25대
나카무라 카츠히로
(1990~1995)
26대
후지타 타이라
(1996)
27대
요시다 요시오
(1997~1998)
28대
노무라 카츠야
(1999~2001)
29대
호시노 센이치
(2002~2003)
30대
오카다 아키노부
(2004~2008)
31대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32대
와다 유타카
(2011~2015)
33대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34대
야노 아키히로
(2019~2022)
35대
오카다 아키노부
(2023~2024)
36대
후지카와 큐지
(2025~)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 : 단일리그 우승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50><tablebordercolor=#900000><tablebgcolor=#900000> 파일: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엠블럼.svg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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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fcc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2005년 ~ 현재
초대
타오 야스시
(2005)
2대
노무라 카츠야
(2006~2009)
3대
마티 브라운
(2010)
4대
호시노 센이치
(2011~2014)
5대
오쿠보 히로모토
(2015)
6대
나시다 마사타카
(2016~2018)
7대
히라이시 요스케
(2019)
8대
미키 하지메
(2020)
9대
이시이 카즈히사
(2021~2023)
10대
이마에 토시아키
파일:일본 국기.svg
(2024)
11대
미키 하지메
파일:일본 국기.svg
(2025~)
:일본시리즈 우승 / : 퍼시픽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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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nomura-katsuya.com/profile.jpg
이름 노무라 카츠야 (野村克也)
출생 1935년 6월 29일
사망 2020년 2월 11일 (향년 84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교토 부 쿄탄고시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75cm / 85kg
프로입단 1953년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 (1954~1977)
롯데 오리온즈 (1978)
세이부 라이온즈 (1979~1980)
지도자 난카이 호크스 플레잉 코치 (1968~1969)
난카이 호크스 감독 (1970~1977)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1990~1998)
한신 타이거스 감독 (1999~2001)
시덕스[1] 감독 겸 GM(2003~2005)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06~2009)

1. 개요2. 선수 시절3. 은퇴 후4. 사망5. 가족 관계6. 여담7. 대중문화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겸 감독. 포지션은 포수.

2. 선수 시절

파일:external/members2.jcom.home.ne.jp/nomura.jpg
난카이 선수 시절. 이렇게 호남인 시절도 있었다.[2]

일본의 이만수로 불리는 역대 최강의 공격형 포수. 단순히 포수라는 포지션을 넘어 NPB 역대 최고 타자 수준의 성적을 올렸다. 총 3017경기 출장 10472타수 2901안타 657홈런[3][4] 1988타점을 기록하여 NPB 최다 경기 출장 2위,[5] 통산 타석 1위, 통산 타수 1위, 최다 안타 2위,[6] 최다 홈런 2위, 최다 타점 2위를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도루 117개, 볼넷 1374개, 삼진 1478개, 통산 타율 0.277을 기록하였다.
희생플라이 역대 1위, 포일 역대 1위,[7] 병살타 역대 1위[8] 기록도 보유 중.

17년 연속 20홈런 이상, 퍼시픽리그 역대 최다인 21차례의 올스타전 출전 및 통산 끝내기 홈런 1위(11차례)와 끝내기 안타 1위(19차례) 기록도 가지고 있다.

야구를 하고 싶어도 야구용품이 없어 하지 못했던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태평양 전쟁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본 위키의 노무라 문서에서는 아버지의 사망원인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홀어머니 밑에서 노무라는 신문배달 등의 잡일을 하면서 집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명학교인 교토 미네야마고교 시절, 여러 프로팀에 테스트 신청을 했으나 1954년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이 있는 난카이 호크스에서만 연락이 왔고[9] 테스트를 받아 합격해 입단했으나 계약금은 0엔. 그리고 초기 2년 동안은 주전으로 발탁되지 못한 채 변화구에는 타격도 못하고 불펜 포수만 하다가, 전력 외 통보를 받기까지 했으나,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난카이 전철에 뛰어들어 자살해버리겠다.(!!) 라고 말해서 협박이잖아 이거 겨우 난카이에 남을 수 있었다. 생각해 봐라. 당장 손님이 자기 회사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도 곤란한데 자기네 산하 야구단 선수가 그렇게 하면 얼마나 곤란하겠나 주전 포수의 교통사고, 백업 포수의 트레이드, 벤치 포수가 부상을 당하는 등의 안 좋은 일로 인해 난카이 호크스가 2009년 당시의 삼성 라이온즈를 연상케 하는 포수난에 시달리게 되자, 1956년부터 주전으로 발탁하여 맹활약했다. 약점인 약한 어깨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에도 공을 기울였고 타격에도 눈을 떴다.

이후 1957년 30홈런으로 호크스의 불구대천 라이벌 니시테츠 라이온즈 나카니시 후토시를 누르고 홈런왕이 된 그는 1961년, 그리고 1968~1975년까지 8년 연속 홈런왕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퍼시픽리그 최다 시즌 연속 홈런왕 기록이다. 그 외에도 1963년에는 52홈런을 기록하며 2001년 터피 로즈가 55홈런을 칠 때까지 퍼시픽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고, 1965년에는 156안타, 42홈런, 110타점, 0.320의 타율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사상 처음으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였다. [10][11]

그렇다고 홈런만 친 타자일 뿐만 아니라 포수로서도 리드능력이 뛰어났는데, 투수를 이끄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작은 소리로 옆의 타자에게 속삭이는 일종의 트래쉬 토크 스킬을 사용하여 타자의 심리 상태를 흔들어 놓는다든가[12][13], 혹은 상대 팀의 스탯을 집요하게 분석하여 이에 맞추어 야구를 한다든지... 이러한 포수로서의 경험은 후에 감독 시절 데이터 야구(ID=Import Data)를 만드는 귀중한 토대가 된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트래쉬 토크가 통하지 않던 선수가 3명 있었는데, 그 선수들이 바로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이라고 한다. 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14], 나가시마는 웃으면서 더 심한 음담패설로 맞받아쳐서 되려 자기를 질리게 했고[15], 장훈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어느날 참지 못한 장훈이 결국에는 헛스윙을 하는 척하면서 노무라의 뒤통수를 갈겨버렸고(!) 크게 혼이 난 노무라는 결국 장훈에게 더는 트래쉬 토크를 걸지 못했다(...)[16] 그러니까 사람 잘못 골랐다[17].

이 트래쉬 토킹이 통하지 않았던 상대로는 노무라가 직접 말한 셋(왕정치,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다. 에노모토 키하치라는 롯데 오리온즈의 레전드 좌타자인데 이 타자는 172cm의 작은 체구로 1루수를 봤으며 통산 볼넷 대 삼진 비율이 1 : 0.6에 달할 정도로 극강의 선구안을 가진 선수로, 검객에 가까운 이미지를 지녔다고 한다. 노무라 본인도 선구안만큼은 왕정치보다 위라고 인정했으며, 그 아우라에 눌려 트래쉬 토크를 할 엄두도 못 냈다고 고백했다.[18]

하지만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9년 연속 센트럴리그-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인 나가시마 시게오 왕정치보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가 해바라기라면, 나는 쥐 죽은듯이 '일본해'에 피는 달맞이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스스로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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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 플레잉 매니저 시절.

이후 1970년부터는 감독을 겸임하며 4번타자, 포수, 감독이라는 3가지 중책을 맡으면서 팀을 이끌었으며, 1973년에는 난카이의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안겨주었고,[19][20] 1976년 한신에서 1973년 퍼시픽리그 우승의 주역 에모토 타케노리와 트레이드되어 난카이로 이적한 에나츠 유타카가 이적 첫해 지병으로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자 마무리 투수로 전향해 볼 것을 권유해 에나츠가 후일 대스타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이후 1977년 시즌 2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애인 노무라 사치요[21] 막장행각[22]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해임당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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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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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시절.

이후 롯데 오리온즈에서 1978년 1년간 뛰고[24], 그 뒤 세이부 라이온즈의 창립 멤버로서 1979~1980년까지 뛰며 최다 연속 시즌 출장 기록인 26시즌[25]과 전인미답의 300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하고 1980년 은퇴하게 된다.

이러한 퇴단 과정에서의 불상사 때문에 난카이 호크스의 레전드였음에도 난카이 구단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호크스 구단이 다이에에게 팔린 이후로는 사망 몇년 전 OB 경기나 기념 행사에 출석하는 등 간간히 교류를 했었으나 난카이 전기철도가 건립한 난카이 호크스 기념관엔 노무라에 관한 자료가 부인 사치요와 카츠야 본인이 모두 사망할 때까지 하나도 기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생전에 난카이에서 함께 배터리를 짰던 에모토 타케노리 등이 기념관에 자료를 제공할 것을 열심히 설득했고, 결국 부부가 모두 사망한 후인 2021년에 아들 노무라 카츠노리의 허가 아래 생전 사진과 본인이 실제 사용한 유니폼과 포수 미트 등을 기념관에 제공하면서 비로소 카츠야의 기념물들이 팬들에게 공개되었다.

3. 은퇴 후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1989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에 임명되면서 그 유명한 데이터 야구를 구사하면서 후루타 아츠야 같은 명포수를 발굴해내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 3번(1993,1995,1997년)과 센트럴리그 우승 4번을(1992,[26]1993,1995,1997년) 기록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로 인해 야쿠르트 팬들이 노무라 감독을 선호할 정도.

이후 1999년 롯데 자이언츠 8888577와 맞먹는 암흑기를 지내던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이 되나 결과는 처참했다. 3년 연속 꼴찌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게다가 아내 사치요가 탈세 혐의로 구속 크리까지 겹치면서 노무라 감독에 있어서는 최악의 흑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 한신이 말그대로 개막장 시기였고, 이후 한신의 강팀 도약에 있어 노무라 한신의 선수육성이나 운영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재평가도 존재하여 최근 들어서는 한신 감독 시절의 평가도 크게 나쁘지는 않은 편. 사실 원래부터 강팀을 맡았던 적이 드물기에 감독으로서 승률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난카이 시절을 제외하면[27] 야쿠르트, 한신, 라쿠텐 등 약체팀의 토대를 만드는 능력은 가히 최고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2003년 일본의 사회인야구단 시덕스의 감독 겸 GM으로 부임해 2005년까지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2003년엔 팀을 사회인 야구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그가 괜히 명감독으로 불리는 게 아니란 걸 증명했다. 결론 : 한신은 그냥 개노답 신이었던 거다.

2006년 7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28] 그 후, 2008년 7월 15일 세계 최초 선수-감독 3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으며, 2009년 팀을 창단 후 첫 A클래스와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았지만 시즌 종료 뒤 그 라쿠텐 병신 프런트에게 해임되었다. 감독 통산 성적은 1565승 1563패 1무로 1500승과 1500패를 모두 넘겼다. 자세한 내용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 항목을 참조할 것.

이후 산케이 신문의 전속 평론가로 일하고 있었으며, TBS에서 해설로도 활약하고 있으나 현대야구와 맞지 않는 지론 때문에 심각하게 까이는 편이었다.

2018년 소프트뱅크-요미우리 OB전에서는 무려 난카이 유니폼을 다시 입고 나왔다(!!!). 기사 노무라는 난카이 감독에서 물러난 뒤 호크스가 난카이-다이에-소프트뱅크로 소유자가 변화하는 동안 교류를 하지 않았다가 호크스 75주년, 80주년 행사에 난카이 시절의 유니폼을 입을수 있게 되고서야 참석했다.

4. 사망

2020년 2월 11일 급작스럽게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다. 이 날 새벽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 가정부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지만 결국 명을 달리 했다고 한다. # 사인은 허혈성 심부전. 향년 84세. 2017년 부인 사치요가 세상을 떠나면서 몸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2019년까지 야쿠르트 창단 50주년 OB경기에도 나왔고 1월에 있었던 가네다 마사이치 추모회와 고인이 생전 몸담았던 사회인야구팀 시닥스의 OB회에도 참석했었다. 비록 거동이 불편하긴 하였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21년 3월 28일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한신과의 홈경기에서 추모시합을 가졌다. # 이날 시합전 양 팀 선수들은 고인에 대한 묵념후 시합을 진행했다. 참고로 시합 결과는 한신의 승리.

5. 가족 관계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나, 사치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츠노리, 사치요가 이전에 미국인 사업가 앨빈 엥겔(Alvin Engel)와의 사이에서 낳은 혼혈 아들 두 명 합쳐서 총 넷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 중 사치요의 아들 셋은 모두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 선수로서 그나마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것은 노무라 카츠야의 친아들이자 막내아들인 노무라 카츠노리. 주로 백업 포수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0여년간 선수생활을 했는데, 프로 지명을 아버지가 감독을 하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받은 것으로 시작해 역시 아버지가 감독을 맡은 한신 타이거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등 프로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아버지가 감독한 팀에서 보냈다. 수비력은 그럭저럭 나쁜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타격이 안 되고 어깨가 약해서 선수로서 대성하지 못했는데[29], 2006년 롯데와의 은퇴 경기에서 6개의 도루를 허용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30] 은퇴 이후에는 라쿠텐, 요미우리, 야쿠르트 등 여러 구단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았고 현재는 한신 2군배터리코치로 재임중이다.

사치요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인 도널드(단)과 케니(카츠히코)[31] 역시 70년대 말~80년대 초에 드래프트되어 프로야구 선수로 뛰었으나, 1군 시합에 나서지도 못하고 2군에서만 머무르다가 얼마 못가 은퇴했다. 도널드 노무라('돈 노무라'로 더 유명하다.)는 선수로서 은퇴한 뒤 미국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다가 마이너리거 맥 스즈키 선수의 대리인이 된 뒤 선수 에이전트로 유명해졌는데, 주로 일본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하거나 그 반대의 길을 택하는 선수들의 에이전트로 활약했다. 특히 지금처럼 포스팅 시스템이나 국제 FA 제도가 정리되기 전인 1990년대 초중반, 노모 히데오, 이라부 히데키, 요시이 마사토[32], 알폰소 소리아노 등의 미국 진출 과정에서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엄청난 활약을 펼쳐 구단들, 특히 그와 격렬한 대립을 겪은 일본 구단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후 인터뷰에서 본인은 당시 선수들에 대해 비합리적인 관리나 구시대적 대우를 하던 일본 구단들에 맞서 선수의 권익을 최대한 대변하느라 그러한 대립이 발생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현재도 과거의 악명(?)만큼은 못하지만 여전히 여러 선수들의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2년 다르빗슈 유가 미국으로 진출할 때 에이전트를 맡기도. 참고로 케니 노무라는 돈 노무라와 노무라 사치요와 절연 상태였다고 한다. 노무라 사치요와는 그녀가 죽기 전에 결국 화해했다고 하나 형 돈과의 화해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6. 여담

  • 현재 일본 프로야구에서 퀵모션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난카이 시절 감독에 재임하던 당시 리그 베이스를 탈탈 털던 후쿠모토 유타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당시 투구폼이 작은데다가 셋 포지션에 능숙했던 호리우치 츠네오를 보고 만들어 낸 것 이였는데 캐치까지 1.1초, 2루로 송구까지 1.8초 도합 3초 이내면 육상선수가 와도 아웃 시킬 수 있다는 지론[33]으로 퀵 모션이라고 하는 동작을 개발해냈다.[34] 당시 투수진은 주자를 못 잡는건 포수 탓 이라고 굉장히 반발이 심했으나 포수 겸 감독이였던 노무라는 권력으로 찍어눌렀으며 까라면 까 퀵모션을 최초로 도입한 난카이 호크스는 1973년 그 해 퍼시픽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후쿠모토 유타카와 노무라 카츠야 시대 이후부터 일본 주자들은 투수의 쿠세를 찾아 어떻게든 베이스 하나 더 가려고 기를 쓰게 되었고 투수와 포수는 어떻게든 준비시간을 줄이고 쿠세를 없애 그 주자들을 잡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현재의 일본야구의 기반이 되는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본 야구 역사에서 꽤 굵직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현역 시절에 포구가 살짝 빠진 틈을 타 몰래 2루로 가려던 주자를 발견하자, 자신이 직접 2루까지 달려가서 아웃시키는 기행을 선보인 적도 있다. 8분 9초부터 주자가 노무라가 자길 잡으려고 뛰는 걸 미처 못 본(...) 본헤드 플레이를 저지른 것. 어느 누가 포수가 2루로 가는 주자를 뛰어가서 잡는다는 상상을 하겠냐만
  •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 음반을 발매 한 적이 있다. 장르는 엔카. 한신 감독시절 재발매 되었으며 이후 2009년 라쿠텐에서 앨범을 또 한장 발매하는데 가사를 부인이 써 주었다고 한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어렸을 때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장래희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일 처음으로 가진 장래희망이 미소라 히바리의 영향을 받아 가수였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고음을 낼 수가 없어서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 야구선수라고 한다. 결국 야구로 대성하고 음반까지 냈으니 어찌보면 소시적의 꿈을 성취했다고도 할 수 있다.
  • 부인이 막장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공처가로서 가계부 관리는 부인이 하고 본인은 신용카드를 사용하는데 신용카드의 결제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해서 "사인을 할 뿐 인데 어째서 물건을 주는걸까?"라고 고민을 하긴 했지만 일단 주니까 쓰자 걱정없이 쓰다가 신용카드 명세서가 부인에게 전달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나중에 부인이 추궁하자 "나를 미행하는거야? 징그러운 여자네"라며 부인과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상술했듯 다소 불명예스럽게 난카이 호크스를 떠난 뒤 죽을 때까지 난카이와는 절연하다시피 했는데,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2009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사상 첫 A클래스로 이끌었음에도 프런트가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해임을 결정하고 대대적으로 퇴임 소식을 발표해버렸다. 이에 팬들에게서 반발이 일자 궁여지책으로 노무라의 등번호인 19번을 영구결번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에 "내 차라리 난카이에서 영구결번을 받으면 받았지, 라쿠텐에서 영구결번을 왜 받냐? 라쿠텐 따위에 무슨 자부심을 느끼라고?"라는 발언을 날리며 프런트를 비판했다. 난카이랑은 사이도 험악한 데다 이미 구단이 팔렸기 때문에 호크스에서 영구결번을 받는다면 소프트뱅크에서 해줘야 되는데, 이미 팀이 후쿠오카로 떠난지 30년이 넘어서 예전 난카이 색채가 완전히 없어졌기에 이제와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해도 후쿠오카의 팬들에게는 뭔가 와닿지 않을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표현을 쓸 정도로 당시 라쿠텐 프런트의 막장행위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는 점과, 그리고 난카이 구단에 대해서도 이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점을 엿 볼수 있다. 결국 라쿠텐의 19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지 않은 채 비워두다 2017년부터 신인 투수 후지히라 쇼마에게 주어졌으나 2021시즌 종료 후 후지히라가 등번호를 46번으로 바꾸며 다시 결번이 되었다가 2023시즌부터는 쇼지 코세이가 19번을 물려받았다.
  • 호크스의 등번호 19번은 노무라가 떠난 뒤 한동안 결번 상태였다가 1981년 신인 투수 야마우치 타카노리[36]에게 주어진 것을 시작으로 노무라가 감독을 맡았던 사회인야구팀 시닥스 출신의 모리후쿠 마사히코 투수 전용 등번호로 계승되다가[37] 2020년 카이 타쿠야가 달면서 다시 호크스 주전포수의 등번호로 부활했다.
  • 영구결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면 본인의 등번호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10이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것 같다. 신인 시절 첫 두해를 제외하면 감독시저까지 평생 달았던 번호는 각 자리의 숫자를 합하면 10이 되는 숫자였다. 현역시절과 라쿠텐 감독시절은 19, 야쿠르트 감독시절은 73, 한신 감독 시절에는 82번을 달았었다. 정작 본인의 야구인생에서 등번호 10을 단 적은 한번도 없다.
  • 현역시절 소문난 골초였다. 하루에 3~4갑 정도를 아무렇지않게 피웠다는 듯. 하지만 야쿠르트 감독 재임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말년에는 금연을 하였다.
  • 라이벌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도쿄 긴자, 오사카 기타신치 술집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노무라는 (관찰대상) 선수가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타석에서 그 선수에게 말하면 상대방은 놀라고 집중력을 잃었다고 한다.
  • 노무라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생각의 과정이다. 노무라가 말하는 생각의 과정이란 분석 - 관찰 - 인사이트 - 판단 - 기억의 사이클이다. 데이터는 어디까지나 분석을 위한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심리 상태까지 통찰한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처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결과를 기억하고 다음으로 연결한다. 생각의 과정을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팀은 강한 조직으로 변해간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 근데 위의 방법은 야쿠르트에서는 성공했지만 한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왜 성공과 실패로 엇갈렸는지. 노무라는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기 위해 스프링캠프에서 매일 저녁 미팅을 가졌다. 야쿠르트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선수들은 처음에 "이런 이야기가 야구의 실전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아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지만 점차 노무라의 생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38] 물론 한신 감독 시절에도 미팅을 가졌다. 그러나 선수들의 해석 방법이 달랐다.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는 화이트 보드에 써가면서 설명하고 선수들 자신이 스스로 메모장에 필기하는 방법이었다면, 한신 시대는 텍스트를 프린트물로 선수들에게 나눠졌던게 화근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한신 선수들이 노무라의 생각을 취하지 않고 흘려 들었기 때문에 생각을 침투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야쿠르트에는 후루타 아쓰야라는 중심을 확실히 잡아주는 선수가 있었지만 한신에는 그런 선수가 없었던 것이 실패 요인이다. 애초에 강의 방법이 화이트보드든 프린트물이든 당시 한신의 분위기는 노무라의 교육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막장분위기였는데 선수들은 스프링캠프 때부터 훈련 끝나고 나면 저녁에 후원회를 자처하는 자신의 개인 스폰서들[39]하고 술마시러 다니기 바빴고 술자리에서 감독 뒷담화나 하는 게 일이었다. 이런 개인 스폰서들은 팀의 스타급 주력선수들뿐만 아니라 조금만 싹수가 보이면 유망주 시절부터 들러붙는데 그런 자리에서 아직 기량도 제대로 못 갖춘 주제에 감독 뒷담화나 하는 선수들의 비위나 맞추면서 맞장구를 치는데 열심이었고 또 이런 선수들의 스폰서가 이른바 슈퍼팬의 형태[40]로 구단 프런트와도 친분관계를 맺고 구단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외부에서 초빙한 지장의 말이 먹힐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신의 고질적인 문제를 통감한 노무라가 물러나는 자리에서 구단주에게 "이 팀은 카리스마형 감독이 선수들의 기강부터 잡아야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면서 강력하게 추천한 후임이 철권제재의 대명사인 호시노 센이치였다. 호시노는 부임하자마자 선수들의 개인 스폰서들을 아예 구장 및 훈련장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런 스폰서들의 유혹을 못이기고 만년 유망주 수준에 머물렀던 어정쩡한 기량의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는 것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강하게 나오면 타성에 젖은 기존 선수들이 반발해서 팀 분위기가 더 시궁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자기에게 반기를 들면 어떻게 될지 몸소 행동으로 보여줬고 직전해까지 4년 연속 최하위에 "노무라 감독마저도 이 팀을 구할 수 없단 말인가"라는 위기의식에서 그 때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의 상징이었던 사람을 삼고초려까지 해서 모셔온 감독이라 철권통치에 감히 반기를 들만한 분위기가 아닌 덕분에 호시노의 개혁작업이 성공할 수 있었다.[41]
  • 혈액형과 선수의 실력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는 듯하다. 일본웹에서 검색하면 이 사람의 혈액형에 관한 어록이 꽤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은 'B型O型は一流選手になれるが、A型は1流になれない (B형과 O형은 일류선수가 될 수 있지만, A형은 1류가 될 수 없다)'
  • 타격 기록 1위였다가 2위로 밀려난 적이 많다. 출장경기(3,017), 안타(2,901), 홈런(657), 타점(1,988) 모두 2위다. 1963년 한 시즌 최다홈런(52개)를 기록했으나[42] 1964년에 오 사다하루가 55개를 치며 갱신, 1973년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2주간 보유하고 있었으나 왕정치에게, 1978년에는 하룻밤 사이에 통산 최다 타점을 역시 왕정치에게, 통산 최다 안타를 장훈에게 타이틀을 내줬다. 노무라는 "나는 침착한 척했지만, 질투의 폭풍으로 마음이 격렬했다. 그래도 라이벌 왕정치가 있었기 때문에 매일 노력할 수 있었다."는 말을 남겼다. 장훈과 노무라도 호적수였으며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량을 향상할 수 있었다고 둘 다 밝히고 있다. 노무라는 의외로 나가시마를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천재이고 그는 내가 노력할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이길 수 없었어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자신의 인생은 비록 늘 2등이었지만 괜찮다고 한다. 1975년 왕정치가 NPB 최초 600홈런을 먼저 기록했고 본인이 그 다음에 뒤따랐으며, 인기가 많은 센트럴 리그에서 왕정치와 나가시마는 늘 주목을 받고 인기가 없는 퍼시픽 리그에서 뛰는 본인은 야구기록을 갱신해도 그늘진 존재라고 느낀 경우가 많았다.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조용히 피는 노란 작은 꽃이 노무라의 고향인 교토에서 많이 폈는데 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에 꽃들을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본인의 모습과 겹친다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센트럴 리그가 아닌 퍼시픽 리그에서 열심히 뛰고 비록 관객수는 적을지언정 관객들을 위해 꽃이 피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생각이 일본프로야구 생활을 뒷받침했다고 술회했다.
  • 세이부 시절이던 1980년 9월 28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1사 만루 동점 상황에서 노무라는 본인이 외야 희생플라이를 쳐서 주자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나 대타로 교체되었고 대타는 땅볼 아웃(병살타)당하고 말았다. 게임이 끝나고 노무라는 "팀이 승리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고 하며 그동안은 "항상 개인 성적보다는 팀의 승리가 먼저였으며 (난카이) 코치 때도 늘 이 점을 강조했는데 그것을 잊고 타자의 실패를 원했다"고 했으며 게임 다음날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에 본인의 은퇴 의사를 밝혔고 시즌 종료 후 은퇴하였다. 팀의 승리는 개인의 성공 전에 절대이며, 그것을 잊는다면 끝났다고 강조하고 있다.
  • 코치는 선수에게 단순히 야구기술만 전수해줄 것이 아니라 사고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수는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코치는 선수들의 질문을 유도하게끔 하여 사고 기술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치의 열성적인 지도도 선수는 흡수할 수 없다고 하며, 선수가 스스로 얻어낸 것들은 지도자가 가르치는 대답보다 여러번 확신할 수 있으며, 스스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르치지 않고 인도하는 것 그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 노무라가 프로 3년차에 접어드는 봄에 난카이 호크스는 하와이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바로 지난 해에는 2군에서 뛰었지만 불펜 포수 역할로 1군에 합류했는데 하와이 도착 환영 파티에서 난카이 구단 대표가 훌라댄스를 추는 사진이 일본의 스포츠 신문에 실리자 난카이 본사는 분노했다. 선수들도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고 놀러다니는 동안 노무라는 묵묵히 공을 받았고 연습 종료 후에는 사용된 공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매일 밤 당시 감독인 츠루오카 카즈토의 방에 가서 "오늘은 충분하지 않았다"고 꼼꼼히 보고했다. 주전 포수였던 마쓰이 아츠시 대신 경기에 출전할 때 포수 리드를 잘했으며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하는 공항에서 츠루오카는 "이번 전지훈련에 대해 이야기할 게 없다"고 말하며 등을 돌렸지만 "노무라만 수확했다"고 회상했으며 이것이 노무라의 미래를 열였다. 츠루오카는 메이저리그 야구 전술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츠루오카의 '뇌야구'를 노무라는 철저히 배웠다.
  • 노무라는 감독 뿐만 아니라 책 집필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야구팬들이 노무라의 책을 읽었지만, 점차 사업가, 기업인, 회사원들이 노무라의 책을 찾기 시작했다. 노무라의 야구 이론에 의하면 뛰어난 천재 선수들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매우 평범한 선수들을 움직여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평범한 직원으로 구성된 회사를 운영하는 총괄 매니저의 기업 경영에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그것은 아무거나 칭찬하거나 친절하게 치료하는 사랑이 아니라 할 말을 똑바로 말하고 상대방을 가혹하게 대하고, 때로는 꾸짖는 것도 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비난과 칭찬이 종종 언어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선수 앞에서 화부터 내는 건 금하고 있는데 분노는 지도자가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통제 할 수 없다는 증거이며 개인의 감정과 욕망만으로는 선수를 양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팀은 더 강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노무라가 난카이 현역 선수 시절 츠루오카 감독은 군대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어서 늘 선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라이벌팀과 지속적으로 비교하는 게 일상이었으며 이런 날이 지속되면 라이벌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소속팀에 대한 반감이 자란다고 말한다.
  • 시장 경쟁에서 라이벌에게 이기려면 자신의 약점을 분석하고 강화하기 위한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쿠르트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 야쿠르트는 늘 하위권을 전전했으며, 야구는 상대방을 무득점으로 묶으면 승리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팀 재건의 첫 방법으로 투수진 강화를 택했다. 이토 토모히토, 오카바야시 요이치, 이시이 카즈히사 등 선발 투수진들을 키워냈고 야쿠르트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1992년 드래프트 회의 당시 투수 이토 토모히토냐 타자 마쓰이 히데키냐를 고민했는데 야구는 투수라는 믿음이 있어 이토를 택했다.
  • 요즘 일부 코치들은 선수와 친구들만큼 가까운 것 같지만, 코치는 여전히 선수들에게 경외심을 심어야 한다. 즉, 당신은 무서운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지도자가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팀에 긴장감이 없을 때 그 팀은 끝났다고 말하며 이는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 포수 포지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투수가 퍼펙트 게임이나 완봉승을 달성하는 것도 포수의 힘이며 노무라는 현역 시절 승리 투수가 인터뷰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어보았다고 한다. 야구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를 쓰는 사람들, 그가 바로 좋은 포수라고 말한다. 도루 저지 뿐만 아니라 전략의 계산, 타자의 심리 분석, 투수 리드 등 화려한 무대 뒤에서 포수는 역할을 수행하며 같은 포수인 모리 마사아키와도 생각을 공유했다. 특히 후배 포수들을 양성할 때 강조했던 점이 구종 사인을 하나하나 낼 때는 신중하게였다. 특히 포수는 타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타자의 표정과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 포수는 항상 입을 다물었다가 오른쪽 눈으로는 캐칭한 미트를 보고 왼쪽 눈으로는 (우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표정을 보라고 지도했다. 투수를 알고 싶으면 포수를, 포수의 감각을 타격에 활용하고 싶다면 포수에 대해 알 것을 말한다. 이를 잘 소화한게 후루타 아츠야였다. 감독도 외야수보다는 내야수, 내야수보다는 포수 출신이 제격이며 야구가 점점 세밀하게 진화하는 시대에 포수는 작은 것까지 관찰하며 이에 반해 외야수는 대략적인 것만 보는 시야가 생긴다고 말한다.
  • 포수 시절 타자를 아래의 4가지 유형으로 정리하고 각 유형별 상대법에 대해 생각했다.
A. 패스트볼에 초점을 맞추면서 변화구에 대응하려고 하는 유형
B. 인코스 또는 아웃코스와 같이 스트라이크 코스를 미리 결정하는 유형
C. 타격 방향(좌익/우익)을 결정하는 유형
D. 타자 각 개인이 가장 치기 좋아하는 공을 타격하는 유형
  • 선수들의 적성과 능력, 문제점을 알아보고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잘했기 때문에 "노무라 재생공장"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백업포수였던 이이다 테츠야의 빠른 발을 활용하기 위해 외야수로 전환시켰고(포수 겸임) 여러 포지션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포지션 변환과 같이 매우 중요한 변화를 말할 때 동기를 부여하는 단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예가 바로 구원투수로의 전환을 망설였던 에나츠에게 했던 말, "혁명"이었다. 난카이 감독에서 해임 후 현역 생활을 지속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평론가인 구사나기 다이조(Daizo Kusanagi)가 "노무라 당신은 아직 젊다. 인간은 평생 학생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고 "평생포수"라는 단어를 늘 품에 안고 살았다고 한다.
  • 꿈과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둔감해지며 요즘 야구선수들을 보면 플레이에 너무 의욕이 없다고 느낀다고 하다. 특히 불감증을 싫어했는데 감독 당시 의도적으로 벤치 앞에 공을 흘려두면 수비에서 돌아온 선수들 중에 공을 줍는 선수가 있고 공을 그대로 두고 지나가는 선수도 있으며 후자의 경우 야구에 대한 태도가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꼬집고 있다. 코치도 꿈과 철학을 갖고 선수들을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어렸을 때 가난으로 고생하여 부자가 되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가수나 영화배우가 되려고 했으나 꿈을 접었고 결국 그에게 남은건 야구였다. 야구에도 도구 구입비가 들어서 도구를 사달라고 할 수 없었고 중학교 야구부 단체사진을 보면 한 명만 유니폼을 입지 않았는데 그게 노무라였다. 노무라는 후배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갔다고 한다.[43]
  • 어린시절 가난하게 자랐기에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명품수집을 취미로 하고 있다. 주로 수집하는 품목은 베르사체의 넥타이와 시계로 넥타이가 약 400개 시계가 수십개에 다다랐지만 야쿠르트 감독시절 도둑을 맞아 시계를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모으고 있다는 듯. 현역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리 마사아키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전력 분석 차, 한큐와 같은 퍼시픽 리그 소속인 난카이의 노무라를 찾아와 밤새 야구를 이야기를 나눈 뒤 노무라의 양복을 꼭 한 벌씩 가져갔다고 한다.[44]
  • 생전에 조지마 겐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에게 "넌 일단 인간부터 되거라."란 소리까지 할 정도로 매우 사이가 나쁘다. 이유인 즉슨, WBC 1라운드 당시, 일본이 한국에 0:1로 밀리자 노무라 감독은 조지마의 볼배합 문제를 지적하자 조지마는 "그러는 감독님은 선수생활 할 때 한 번도 실점 안 하셨나 보네?"라며 곧바로 직격탄을 날려 버린 것이다. 결국 이 이후부터는 서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는다고 한다.[45]

7. 대중문화


[1] 일본의 사회인야구단, 2006년 해체. [2] 하지만 본인은 선수시절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했다. 이 분 닮았는데? [3] 참고로 메이저리그에서 포수로서 가장 많은 홈런을 때린 선수인 마이크 피아자의 다른 포지션 홈런 기록까지 합한 것이 427홈런이다. 이 657홈런은 일본에서는 왕정치가 넘사벽이지만 메이저리그 랭킹에 넣어본다면 역대 홈런왕들 중 4위 윌리 메이스에 불과 3개 뒤진 5위다. [4] 또한 토종 선수들 중에서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함께 1시즌 최다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 1963년 난카이 시절 때려낸 52홈런이 일본인 NPB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며, 이 위는 죄다 외국인이다. 이 기록은 무려 60년이 지나 노무라의 사후 2022년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이 기록을 깨게 된다. [5] 이 기록은 노무라가 은퇴한 후 35년 동안 계속 1위였으나, 35년 뒤인 2015년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경신했다. 물론 감독으로써의 역량은 비교가 금지다. [6] 스즈키 이치로는 기록 대부분을 메이저 리그에서 달성하여 NPB 통산 기록엔 못 들어간다. 참고로 최다안타 1위는 당연히 그 분. [7] 단일시즌 최다 포일(17개)와 통산 최다 포일(132개)를 둘 다 보유하고 있다. [8] 최다 포일과 병살타도 그다지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오랫동안 1군에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 당장 알버트 푸홀스, 이대호도 각자 리그 통산 병살 1위이다. [9] 난카이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적절한 포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교토현 미네야마에 있는 본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카이에 불합격하면 히로시마 도요 카프행도 고려했다고 한다. [10] 노무라 때문에 홈런,타점 부문에서 계속 콩라인에 머물렀던 선수가 있었다. 바로 장훈 [11] 다만 수위타자를 수상한 것은 이 해가 유일. 수위타자를 놓고 늘 경쟁하던 장훈과 에노모토 키하치가 동반으로 부진했던 그 시즌이다. [12] 초창기에는 "다음 공은 머리, 맞으면 아플텐데" 이런 식의 토크였으나, 나중에는 "타격폼이 이상한데?" 이런 식으로 폼을 흐뜨러뜨리는 말로 바뀌었다. [13] 이 트래쉬 토크에 대한 방책으로 백인천은 귀마개를 끼고 타석에 섰다고 한다. [14] 다만 한큐 브레이브스의 1975-77시즌 일본시리즈 3연패 당시의 주전 포수였던 나카자와 신지의 트래쉬 토크엔 노무라 때와는 달리 된통 당했다고 한다. 오 본인의 언급에 의하면 자신이 타석에 설 때마다 나카자와가 뜬금없는 타이밍에 이상한 구호를 외치는 등의 기행을 저지르는 통에 집중을 하기 힘들어서 계속 흔들리게 되었다고. [15] 타격폼이 이상하다고 노무라가 말하자 나가시마는 폼을 다시 가다듬고 홈런으로 노무라에게 보답했다. "고마워"말에 노무라는 기절 직전. 역시 기행이 많으신 분이다(...) [16] 참고로 학생 시절 축구부 주장과 말싸움하던 중 축구부 주장이 자신을 조센징 이라고 모욕을 주자 곧장 배트로 머리를 참교육을 시켜준 것이 장훈 옹이시다. 당시 장훈은 머리를 쥐고 고통스러워 하는 축구부 주장을 일으키고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조센징이 왜 나오나?" 그리고 점잖게 조언했다고 한다.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라고... [17] 노무라 본인은 책 「プロ野球重大事件 誰も知らない”あの真相”」(프로야구 중대사건 아무도 모르는 "그 진실")에서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며 "장훈에게 속삭임 전술을 걸면 장훈이 너무 섬세하게 배터 박스에서의 위치를 조절하는 바람에 시합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 [18] 에노모토 키하치와 왕정치는 와세다 실업고 선후배 사이로, 노무라는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워서 그런가 왕정치를 상대하는 건 에노모토보다 오히려 더 쉬웠다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19] 정확히는, 전기리그 1위/후기리그 3위를 기록 후 플레이오프에서 후기리그 1위인 한큐 브레이브스와 싸워 우승. 이 시기에 1973~1982년까지 퍼시픽리그 단독으로 플레이오프가 시행되어 전기/후기 리그로 나뉘어 진행되어 전기/후기 1위 팀이 싸워 이기는 팀이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는 제도로 시행했다.(전후기리그 전부 1위팀은 일본시리즈 직행.) 이 제도는 한국프로야구의 초창기 운영과 매우 비슷하다. [20]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하필이면 V9 시대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1승 4패로 깨졌다. 참고로 이게 V9 시대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 그 뒤 1981년에야 요미우리는 다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1] 1932~2017,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신진당 공천을 받아 도쿄도 제5구 선거구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선 후 정계를 은퇴했다. [22] 선수 부인들을 갈군다든가, 선수 기용에 간섭한다든가 등등 [23] 잔여 경기는 당시 난카이 2군감독을 맡고 있던 아나부키 요시오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아나부키는 후에 1983~1985년 난카이 감독을 맡게 되지만.. 그 당시는 20년간 비밀번호 찍던 시대였고 당연히 성적에 관해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4] 그러나 이 시기에 감독인 가네다 마사이치와는 물과 기름같은 관계였다. 자세한 내용은 가네다 마사이치 문서를 참조. [25] 이 기록은 후에 쿠도 키미야스가 경신한다. 쿠도 옹이 2010 시즌까지 뛰어 29시즌 출장기록을 세웠다. 과연 굇수. [26] 일본시리즈에서 3승 4패로 아쉽게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년후 다시 만나 똑같이 4승 3패로 그 수모를 갚았다. [27] 노무라가 떠난 후 호크스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거치며 1998년 리그 A클래스(1~3위권)에 오르기 전까지 단 한번도 리그 우승은 커녕 A클래스에도 오르지 못하며 무려 20년간(1978~1997년) 리그 하위권인 B클래스(4~6위권)에만 머물렀다. 일명 노무라의 저주라 불리는 호크스의 암흑기. [28] 이것으로 2005년 시즌 종료 후 폐암으로 사망한 오기 아키라 오릭스 버팔로즈 초대 감독으로써 기록한 최고령 감독 기록 을 갱신했다. [29] 통산 222경기에서 타율 .185, 4홈런을 기록했다. 통산 66안타. [30] 그래도 코칭 스탭들 에게는 성실함은 인정받았다.연습량과 공부하는것에 비해 성적이 안나와서 안타깝다고 입을 모아 말했을 정도 [31] 괄호 안이 일본식 이름. [32] 재미있게도 자기 아버지가 감독하던 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주축 투수였다. [33]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이긴 하다. 송구가 아무리 빨라봐야 시간상으로는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기에 되도록이면 공을 던질 때 까지의 준비시간을 줄이는게 투수와 포수 모두에게 이득이지만 메이저리그의 경우 도루를 그렇게 많이 하는 주자도 없는데다가 타자를 우선적으로 잡고 본다는 시각이 있어서 퀵모션을 안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드물게 아예 안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34] 원래 '세트 포지션에서 투구폼을 더 줄인다'라는 발상은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이미 주장하긴 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35] 당장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이나오 카즈히사의 등번호인 2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할 때도 후쿠오카 시절 선수에게 사이타마 구단이 영구결번을 줘도 되는 거냐며 반대 의견이 나온 바 있었다. [36] 난카이 말기의 에이스 선발 투수로써 1992년 은퇴 때까지 통산 100승 125패를 기록했으며, 데뷔 초엔 동성의 투수 야마우치 카즈히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일명 야마우치 트리오라 불리는 선발진을 형성하기도 했다. [37] 여담으로 1993~1996년까지 이 등번호를 달고 있던 오오코시 모토이는 성적 부진 때문에 입단 5년차인 1997년에 등번호를 51번으로 바꾸고 외야수로 전향했으나, 타자 전향 후에도 이렇다할 성적은 내지 못한 채 2003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38] 이걸 벤치마킹한 게 김성근이다. 김성근도 sk시절 선수들에게 이런 식의 미팅을 매일 가졌다. 노무라 쓴 id노트를 선수들에게 보게 하고 이후 김성근이랑 노무라가 대담을 한 적도 있고 김성근 스스로가 노무라의 책을 보고 야구인생이 바뀌었다고 할정도 김성근이 소위 자기 스스로 데이터야구를 한다고 하는데 이 데이터 야구의 원조가 노무라의 야쿠르트 감독 시절 주창한 id야구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8/2010011801597.html [39] 이를 일본 속어로 '다니마치'라고 하는데 원래 스모에서 나온 말이다. KBO 리그에서도 선수 팬클럽 문화가 있기는 한데, 일본처럼 정식으로 단체 세워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팬카페 만들고 단관하거나 돈 모아서 조공하는 정도. 물론 선수가 못하면 가차없이 깐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일본프로야구의 선수 개인 스폰서는 KBO의 선수 팬클럽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데 일단 스폰서로 나서는 사람들은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정재계의 유력자이나 유명인사들이고 이들이 선수들에게 주는 금일봉의 규모는 선수가 구단에게서 받는 연봉은 몽땅 저축하고 금일봉으로 받는 돈만 가지고도 생활비로 쓰고도 남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 [40] 참고로 노무라가 한신에 부임한 초기에 승승장구할 때 오사카의 한 귀금속점에서 순금으로 만든 노무라 감독상을 만들어서 팔았다. 당시 한국돈으로 수천만원이나 하는 물건이었는데 이런 걸 만든 것도 기가 막힐 판에 더 기가 막힌 건 이걸 진짜로 산 사람이 있었다는 것(...) 이런 걸 돈 주고 지르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이다.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19 사태에서 문제가 됐던, 후지나미 신타로가 참석한 유흥 파티도 이런 스폰서가 연 것이다. [41] 정작 호시노 본인도 일본프로야구 후원회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게,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요미우리의 이승엽에게 X털린 직후 자기 후원회 모임에서 애꿎는 한국 징병제, 심판 탓을 했다(...). [42] 이전 기록은 1950년에 기록한 코즈루 마코토(쇼지쿠 로빈스)의 51개였으며 노무라가 갱신 후 "내 기록은 10년 이상 깨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코즈루는 참고로 NPB 1시즌 최다 타점(161개) 기록 보유자다. [43] 홀어머니 가정에서 가난과 싸우며 성공한 점은 장훈, 도이 마사히로와 동일하다. 고생하는 어머님을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이들에게 강했으며 그런 생각이 프로에서의 성공 밑바탕이 됐다. [44] 구두쇠 모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절약을 잘했는데 절약에 관한 일화는 모리 마사아키 문서 참조. [45] 그래서 노무라 카츠야는 포수로써의 실력은 조지마보다 호소카와 토루가 더 뛰어나다는 발언까지 한 적도 있다. 호소카와도 수비력은 매우 좋지만 사토자키 토모야에게 국대 백업포수 경쟁에서 밀려 국가대표 승선 경험이 없는 걸 감안하면 명백하게 조지마가 싫어서 호소카와를 밀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46] 연재 시작인 1973년부터 2009년까지 카게우라는 은퇴도 못하고 무려 63세까지 현역 선수로 뛴다는 설정이다. 작가 미즈시마 신지도 이렇게 길게 끄는 건 좀 그랬는지 노무라가 라쿠텐 감독에서 해임된 해에 같이 카게우라를 은퇴시켰다.. 그러나 연재는 그 이후로도 계속 하다가 2013년 완결. 그건 그렇고 카게우라 저 인간, 아무리 만화라지만 난카이부터 시작해 다이에-소프트뱅크 시절까지 현역선수로 뛴 무서운 인간이다. 현실에서 그걸 실현한 선수는 난카이 말기에 신인으로 입단한 오미치 노리요시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