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17:49:34

하츠시바 키요시

파일:m_hatsushiba03.jpg
이름 하츠시바 키요시 (初芝清/Kiyoshi Hatsushiba)
생년월일 1967년 2월 26일 ([age(1967-02-26)]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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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도쿄도 도시마구
출신학교 니쇼가쿠샤 대학부속 고등학교
포지션 3루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8년 드래프트 4라운드
소속팀 롯데 오리온즈-치바 롯데 마린즈 (1989 ~ 2005)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일본의 전직 야구선수. '미스터 마린즈'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롯데의 치바현 이전 초창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강타자 3루수이자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마쿠하리의 판타지스타'라는 별명도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로 치면 공필성의 '화약고'와 비슷한 맥락으로, 열심히는 하지만 좋다고 보기는 힘든 그의 3루 수비가 관객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마린 스타디움 특유의 바람때문에 플라이를 자주 낙구하기도 했고, 위태로운 플라이 처리와 오버 액션으로 팬들을 흥분시켜 마린 스다디움의 명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야구선수라기보단 마치 교수님같은 푸근한 체형과 인상의 외모도 팬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왔던 선수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좀 웃긴 아저씨 정도로 오해할 수 있는데, 두자릿수 홈런을 11시즌이나 기록하며 통산 200홈런 이상을 때려낸 강타자였다. 특히 1995년 80타점으로 퍼시픽리그 타점왕[1] 을 차지했고, 치바 롯데 마린즈 시대의 선수로써는 역대 최다이자 유일한 200홈런 기록인 202홈런(통산 홈런은 232개)을 기록한 바 있다. 또한 마린즈 구단 역대 최초 1억엔 연봉을 돌파한 선수이기도 하다.

현혁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5년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함께 했고, 우승을 확정지은 고시엔의 마운드에서 동료들의 헹가레를 받으며 은퇴하는 최고의 결말을 누렸다.

2. 선수 경력

고교시절 통산 30홈런을 기록했고, 이후 사회인야구로 진출해 토시바 후추에서 활약하며 세 번이나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출전하는등 나름 주목받는 타자였다. 그 결과 높은 드래프트 순번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기대를 받으며 롯데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이후 아리토 미치요 감독의 지도 아래에 빠르게 프로 1군에 정착했다. 1990년엔 치바 마린 스타디움의 구장 역사상 첫 홈런을 기록했다. 본격적으로 치바 시대가 시작된 이후부턴 팀의 프렌차이즈 스타로 자리잡으며 판타지스타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비는 아쉬웠지만, 준수한 장타력을 바탕으로 주전 3루수로 활약했다.

1995년 팀이 신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효과로 간만에 리그 2위를 차지했는데, 하츠시바 본인 또한 이 시즌이 커리어 하이로 .301의 타율과 25홈런 80타점으로 팀 순위 상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며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이 시즌 80타점으로 타점왕을 기록하며 타이틀 홀더가 되었다.[2]

발렌타인이 GM과의 마찰로 1년만에 팀을 떠나버리자 팀 성적은 다시 B클래스를 전전했는데, 이 암흑기를 지탱했던 선수 중 한명이 매년 20홈런 80타점 안팎을 때려주던 하츠시바였다.[3] 1999년엔 시드니 올림픽 야구 예선전에 일본 국가대표로 뽑혔고,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이 시즌에는 1루 유망주 후쿠우라 카즈야 대신 주전 1루수로도 자주 나왔다. 이후로도 2002년까지 팀의 간판타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200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노쇠화가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주전에서 물러나 대타 및 백업 야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대타로 나와 7타석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우는 등 알토란같은 활약을 펼쳤다.


2005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정규시즌 마지막 홈경기였던 9월 22일 소프트뱅크 전을 은퇴 경기로 치렀는데, 명색이 은퇴경기인데 위 영상 3분 10초처럼 데드볼을 맞아 출루하는 진귀한 장면를 보여줘 팬들에게 대폭소를 안겼다. 게다가 이 날 성대한 은퇴식까지 치러 이 날이 현역 마지막일 줄 알았건만... 갑작스럽게 주전 3루수 이마에 토시아키가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어 은퇴식 다음날인 9월 23일부터 치러진 라쿠텐과의 3연전 내내 선발 3루수로 출전했다.(...) 은퇴 세리머니 다음날부터 붙박이 주전으로 출전하는 전례없는 모습이 또 한번 팬들에게 즐거움을 안겼다. 일각에선 은퇴식 보면서 흘린 눈물 돌려내라는 농담을 하기도.

은퇴 시즌에 비록 출전 기회는 크게 줄어 정규시즌에 고작 34경기에 출전해 .220의 타율과 1홈런 6타점에 그쳤지만, 풍부한 경험 덕택에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특히 일본시리즈 진출이 걸린 소프트뱅크와의 플레이오프 2스테이지 최종 5차전에서 대타로 출전해 팀 역전승의 발판을 놓기도 했다. 팀이 1:2로 뒤진 8회초 선두타자 대타로 출전해 소뱅의 마무리투수 마하라 다카히로를 상대로 3루수-유격수 방면 땅볼을 쳤는데, 당시 소뱅의 3루수 토니 바티스타와 유격수 카와사키 무네노리 서로 타구를 쫒다가 충돌하는 바람에(...) 송구가 늦어져 행운의 내야 안타로 출루했고, 결국 이 출루가 발판이 되어 롯데가 2점을 내어 3:2로 역전승을 거두고 일본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하츠시바 본인 말로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여태껏 야구를 해오면서 3루수와 유격수가 그렇게 충돌하는 장면은 처음 봤다고 한다. 대타 출전 후 경기 종료 때까지 3루 수비도 맡으며 롯데가 31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을 그라운드에서 함께 했고,[4] 우승이 확정된 후 외야를 돌며 롯데팬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후배 선수들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혀 마린즈 올드팬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마린즈 홈팬들 앞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던 일본시리즈 2차전에서도 대타로 교체 출전하며 # 팬들에게 현역으로서의 마지막 플레이를 보여줬다.[5] 결국 팀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현역 마지막 시즌에 일본시리즈 우승반지까지 획득하며 커리어를 마감하는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사회인 야구팀 코치를 거쳐 2013년부터는 세가 사미 사회인 야구팀 감독을 맡아 2019년까지 활동했다. 또한 꾸준히 해설위원 및 평론가를 겸직해왔다.

2019년 7월 6일 마린즈 핀스트라이프 기념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팀은 패배.

2020년부터 개인 유튜브 채널 미스터 롯데 하츠시바 키요시 채널을 개설해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파일:하츠시바키요시2.jpg
투수 친화적인 구장을 쓰면서 매 시즌 20홈런을 넘겼을 정도로 준수한 장타력을 가진 선수였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완전한 슬러거는 아니었고, 중장거리 클러치 히터에 가까웠다. 비교적 좌투수들에게 강했으며, 좌측으로 날아가는 타구가 많은 것으로 보아 당겨치기에 능숙한 선수였던 걸로 보인다.

2루타도 많이 기록했지만, 발은 상당히 느린 편이다. 통산 11도루 26실패로 주루센스도 리그 최하급. 수비 역시 좋지 못했지만 타격에서 충분히 밥값을 하기도 했고, 특유의 엉성함과 과장된 리엑션이 재밌었던 덕에 팬들도 그러려니 했다.

5. 마쿠하리의 판타지스타

개요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특유의 엉성한 플레이와 의도치 않았던 개그 센스로 팬들에게 재밌는 이미지로 사랑받은 선수였다. 대표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출처
  • 데뷔 초창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카와사키 구장 홈경기에서 2루타를 쳐내어 2루에 도달하던 와중 다이에의 유격수 오가와 히로시(小川史)[6][7]의 2루 송구에 어깨를 직격당하는 황당한 해프닝을 겪었다. 당시 영상은 현재까지도 프로야구계의 온갖 플레이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에서 개그 플레이를 상징하는 간판 영상으로 종종 써먹힌다.
  • 1995년에 타점왕을 차지하며 본인의 커리어하이 성적을 기록했지만 다음해인 1996년엔 극도의 부진에 빠져 버렸다. 원인은 극도의 난시 때문에 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시력 문제를 고쳐보기 위해 안경을 착용하자 성적이 회복되었고 이후 안경 쓴 모습이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하츠시바도 안경을 쓴 뒤 "공이 이렇게 보이는구나"라고 휘둥그레졌다고.
  • 어느 해의 개막전 때, 단골 이발소에서 "하츠시바 씨 오늘은 브릿지( 탈색)라도 해 볼래요?"라고 묻길래 "파마의 일종인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맡겼다가 본인의 머리를 금발로 만들어 버렸다. 딸은 금발을 하고 집에 돌아온 아빠를 보며 통곡을 했고(...) 팀 동료들에게 안 어울린다는 뒷담화까지 들은 데다 신인 시절 감독 겸 롯데 OB회 회장이었던 아리토 미치요의 분노까지 사 버렸지만, 정작 하츠시바 본인은 금발로 염색된 머리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 상술했듯 워낙 엉성했던 플레이 탓에 수비는 좋다고 평가하긴 어려운 선수였는데, 특히 3루 수비 때 치바 마린 스타디움의 세찬 바닷바람 때문에 공이 떨어지는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워서 뜬공이 날라왔을 때 허둥지둥대다 놓쳐 버리거나 그나마 잡았을 때도 버벅이는 건 물론, 심하면 코치에게 달려들거나 3루에 있는 상대팀 벤치로 돌진해서 처박혀 버리는 등(...) 온갖 개그 플레이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오히려 팬들에게 큰 재미와 친근한 인상을 남기면서 치바의 명물로 불릴 만큼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다. 90년대 세이부 라이온즈의 주축 중간계투로 활약했던 데니 토모리[8]는 하츠시바의 이런 플레이를 일컬어 "치바에 가는 즐거움의 하나"라고까지 말했을 정도.
  • 2001년, 코시엔에 출장한 와카야마현의 본인의 성씨와 같은 이름인 하츠시바 하시모토 고등학교에 마찬가지로 성씨와 학교 이름이 같은 팀 동료 하시모토 마코토와 함께 '친근감이 넘친다'라는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 타석에 들어설 준비를 하던 도중 바로 앞 타자의 파울볼이 하츠시바를 강타했는데, 엉겁결에 타구를 맞고 아프다고 크게 외치는 바람에 타자, 포수, 심판이 모두 하츠시바를 바라보는 해프닝도 있었다.
  • 뭐니뭐니해도 가장 압권은 앞서 말한 본인의 은퇴시즌이었던 2005년. 은퇴 시합에서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하는 황당한 광경으로 관중들은 폭소케 한 건 물론, 성대한 은퇴 세리머니를 치뤘음에도 주전 3루수 이마에 토시아키가 부상당하는 바람에 바로 다음 경기에서 선발 3루수로 출전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주역이 되면서 팬들에게 마지막까지 웃음을 남겼다.

6. 기타

  • 치바 롯데빠들 사이에서는 하츠시바의 플레이를 본적 있느냐 없느냐 혹은 아느냐 모르느냐가 2005년 이후 뉴비와 올드비를 가리는 척도가 된다.
  • 야구계에서 알아주는 헤비메탈 음악의 팬으로 팀의 외국인 선수이던 에릭 힐만과 메탈을 함께 들으며 친분을 다졌고 메탈 전문지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고. 역시 락음악에 조예가 있는 만화가 해롤드 사쿠이시의 야구만화 '스토퍼 부스지마'에서는 이것이 소재가 되어 작중에서 호크스 소속의 포수로 설정된 캐릭터와 하츠시바가 타석에서 메탈을 소재로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 비행기 타는 것을 별로 안좋아해서 장거리 원정때도 신칸센을 이용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1] 퍼시픽리그 사상 최소타점의 타점왕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스즈키 이치로 닛폰햄 파이터즈의 다나카 유키오와 공동 수상했다. 이 해 이치로는 3개 차이로 고쿠보 히로키에게 내준 홈런왕 빼고 타격 부문 전관왕을 가져갔다. [2] 시즌 후인 11월에 개최된 한일 슈퍼게임 1차전에서는 일본대표팀의 3루수로 선발출장하기도 했다. 참고로 1차전 당시 유격수는 하츠시바와 공동타점왕이었던 다나카 유키오, 2루수는 리그홈런왕이었던 고쿠보 히로키이다. 말 그대로 황금내야진. [3] 이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마린즈의 암흑기를 함께 지탱한 선수들은 투수쪽에선 쿠로키 토모히로 코미야마 사토루, 야수쪽은 코사카 마코토가 있다. [4] 아웃카운트 1개를 남겨두고 하츠시바의 상기된 표정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5] 팀이 일찌감치 승기를 잡아 10:0으로 대승을 거뒀기 때문에 발렌타인 감독이 팬서비스도 겸해서 하츠시바를 교체 출전시켰다. [6] 본래는 1979년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드래프트 번외로 데뷔했으나 거의 2군에만 머무르다 1983년 다이에의 전신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어 난카이 말기~다이에 초창기의 주축 내야수로 활약했다. 현역 시절 커리어는 공격이 약한 전형적인 수비형 내야수긴 했지만 통산 1000시합 출장을 달성하며 어느 정도 족적을 남겼던 선수로, 1996시즌 이후 은퇴한 뒤 호크스, 오릭스에서 프런트, 코치를 역임했고 2023년부터는 이 해부터 신설된 호크스 4군 감독을 역임 중이다. [7] 여담으로 하츠시바의 팀메이트 중 이 선수와 한자 표기만 다른(小川博) 동명이인 투수가 있었는데, 현역 시절엔 1988년에 10승과 탈삼진 1위를 기록한 걸 빼곤 그저 그런 성적에 그친 평범한 투수였고 은퇴 후엔 구단에서 코치 및 직원을 역임했으나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고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 구단에 찍혀 해고된 데 이어 나중엔 강도살인을 저질러 무기징역수가 되어버리면서 롯데를 넘어 야구계 최악의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8] 본명은 토모리 유이(友利結)로, 미국인 아버지와 오키나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선수였으며 데니라는 등록명 역시 본인의 미국식 이름(로렌스 프랭클린 데니)에서 따왔다. 본래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투수 유망주였으나 만년 노망주로만 머무르다 1997년 세이부로 트레이드된 후 뒤늦게 포텐을 터뜨려서 2001년까지 주축 중간계투로써 활약했다. 이후 노쇠화가 찾아오면서 현역 말년엔 데뷔팀 요코하마,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마이너, 주니치 드래곤즈를 거쳐 2007년에 은퇴했고, 이후 주니치와 요코하마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