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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마린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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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cccccc,#323232> '''<1군> 21 요시이 마사토 [[감독#s-1.1| ★ ]] · 70
후쿠우라 카즈야 · 73
카나자와 타케시 80 오츠카 아키라 · 82 오노 신고 · 84 쿠로키 토모히로 · 87 네모토 슌이치 88 카네코 마코토 · 90 미츠야마 히데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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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72 미키 료 · 75 호리 코이치 · 76 에무라 나오야 · 77 구리하라 켄타 78 오토나리 켄지 · 81 이시미네 쇼타 · 83 모로즈미 켄지 · 86 사부로 [[감독#s-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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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잔류군> 79 마츠나가 타카히로 · 85 오타니 토모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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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1군 키쿠치 다이스케 · 네모토 준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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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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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이 마사토의 수상경력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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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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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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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19><colcolor=#ffffff> 치바 롯데 마린즈 No.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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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이 마사토 吉井理人 / Yoshii Masa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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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5년 4월 20일 ([age(1965-04-20)]세) |
와카야마현 아리다군 아리다가와정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3년 드래프트 2위 |
소속팀 |
킨테츠 버팔로즈 (1984~1994)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5~1997) 뉴욕 메츠 (1998~1999) 콜로라도 로키스 (2000) 몬트리올 엑스포스 (2001~2002) 오릭스 블루웨이브-버팔로즈 (2003~2007) 치바 롯데 마린즈 (2007) |
지도자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투수코치 (2008~2009)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군 투수코치 (2010)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투수코치 (2011~2012)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투수코치 (2015)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투수코치 (2016~2018)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투수코치 (2019~2022)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2023~) →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23/ W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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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 치바 롯데 마린즈의 1군 감독.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였다.투수코치로서는 일본 프로야구계에서는 우승청부사라고 불리며 닛폰햄과 소프트뱅크의 투수력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석사 학위를 보유한 인텔리인데다가 메이저리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시합 다음날 선수와의 면담을 통해 투구를 복기하며 디브리핑할 수 있게 한다.
2. 현역 시절
2.1. 킨테츠 버팔로즈
프로 1년차(1984년)에는 1군 등판 없이 2군에서만 기나긴 훈련을 받았다. 1985년 9월 16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 피칭을 기록하며 데뷔. 같은해 9월 18일에는 선발 등판을 하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2이닝 8실점을 기록했던 것이다. 결국 1985년, 86년 각각 2경기 등판에 그친다. 1987년 드디어 첫 승을 기록한다.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6.1이닝동안 3실점을 하면서 QS를 간신히 달성했지만 타선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프로 첫 승리투수의 감격을 맛본다. 10월 13일에는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에서 9이닝 1실점 투구를 하면서 프로 데뷔 첫 완투승을 기록한다.1988년, 요시이는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는데 이것이 대성공. 50경기 80.1이닝 ERA 2.69 10승 2패 24S를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해 퍼시픽리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좋은 활약을 보인 구원투수에게 주는 상이던 파이어맨 상을 수상했다.[1] 1989년에는 평균자책점이 2.99로 올랐지만 여전히 47경기 84.1이닝 5승 20세이브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킨테츠 버팔로즈의 리그 우승에도 기여한다.
하지만 1990년, 45경기 8승 9패 15세이브 방어율 3.39를 기록했으며 WHIP이 1.48에 달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91년 마무리 투수에서 중간 계투로 보직을 변경, 1992년에는 9경기만 등판하고 2군에서 머문다.
1993년 이후로 선발투수로 보직을 변경했다. 선발투수로 보직을 변경한 이후 초기에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1993년 6월 17일 세이부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한다. 1993년 최종 성적은 5승 5패 방어율 2.67로 선발투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1994년에는 7승 7패 방어율 5.47로 부진하였다. 이 시기 스즈키 케이시 감독과의 의견 갈등을 빚다 결국 1994 시즌 종료 후 니시무라 타츠지와의 트레이드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한다.
2.2. 야쿠르트 스왈로즈
야쿠르트로 이적 후, 요시이는 완전히 선발 투수로 정착하며 킨테츠에 있던 것보다 더 좋은 활약을 거두었다.[2] 규정이닝을 채우고 1995년 10승, 1996년 10승, 1997년 13승으로 3년 연속 선발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했으며 22완투 5완봉의 뛰어난 이닝 이팅 능력과 타자친화적인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뛰었음에도 3점대 초반의 ERA를 기록하는 안정감 역시 보여주었다. 이렇듯 좋은 성적을 거두며 야쿠르트의 90년대 전성기의 주요 일원으로 활약한다.[3]1995년에는 야쿠르트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일본 시리즈 3차전, 오릭스는 선발 투수로 좌완 에이스 호시노 노부유키를 선발로 내 보내고 야쿠르트는 요시이를 보내지만, 5회 초 스즈키 이치로에게 우익수 희생플라이를 맞으면서 1실점. 동점 상황이 되었다. 5회초 까지 마운드에서 투구하고 내려온다. 결과는 5이닝 1실점으로 호투를 보여줬지만, 5회말 이나바 아츠노리의 대타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다시 1점을 리드하여 승리투수 조건을 가까스로 채웠다. 하지만 좌완 중간계투 카토 히로토가 다구치 소에게 1실점, 다음으로 마운드에 올라온 미야모토 켄지가 다시 더그 제닝스[4]에게 2실점을 하는 바람에 요시이의 일본 시리즈 첫 승리 투수는 무산되었다.
일본에서의 커리어 하이였던 1997년에는 28경기 174.1이닝 13승 6패 방어율 2.99로 팀을 리그우승과 일본시리즈까지 올리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일본시리즈 3차전에 등판해서 4이닝 3실점. 야쿠르트는 마나카 미츠루와 도바시 카즈유키가 3점을 얻었지만 오오토모 스스무의 적시타, 다카키 다이세이의 희생플라이로 도합 3실점을 하게되어 승리투수 요건을 채우지 못하고 동점 상황에서 강판되었다. 결국 일본시리즈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야쿠르트의 주축 선발로 두 번의 일본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2.3. FA, 그리고 메이저리그로
1997년 시즌 종료후 요시이는 FA 자격을 취득했다. 여러 일본 구단의 오퍼가 있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고 메이저리그로 이적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다.[5][6] 뉴욕 메츠와 1년 20만 달러 계약 + 성과금 지급으로 메이저리그로 이적했다. 이는 FA 제도를 통한 NPB → MLB로의 첫 이적 사례였다. 참고로 1960년대의 첫 일본인 메이저리거인 무라카미 마사노리는 원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가 야구 유학 격으로 마이너리그에 보낸 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메이저로 콜업시키며 메이저리그 데뷔를 하였고, 노모 히데오는 일본프로야구 은퇴 선언 뒤 LA 다저스와 계약하는 일종의 제도상의 헛점을 통해 메이저로 진출한 경우이다. 같은 오프시즌에 요시이와 같은 에이전트를 둔 이라부 히데키 이적[7]등 일본 선수의 메이저 진출을 둘러싸고 여러 마찰이 일어났고 이는 포스팅 시스템의 제정과 국제 FA 제도 정비의 계기가 된다.2.4. 뉴욕 메츠
일본통을 자처하던 바비 발렌타인이 감독을 맡던 메츠에 입성한 요시이는 1998년 4월 5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하며 메이저 데뷔전을 치렀다. 피츠버그 타선을 상대로 7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메이저리그 데뷔전은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었다. 한편, 5월 21일에는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면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써 전반기에는 16경기 4승 4패 평균자책점 3.42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13경기 선발 등판, 2승 4패 평균자책점은 5.02로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29경기 171.1이닝 ERA 3.93 6승 8패를 기록하며 선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11월 12일에는 2년 간 500만 달러로 뉴욕 메츠와 재계약을 맺었다.1999년, 요시이는 오른쪽 무릎 부상에 시달려 전반기에는 6승 7패, 평균자책점은 5.02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1999년 8월에만 2승, 평균자책점은 2.51를 기록하여 월간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 그 이후 9월 5일에는 10승을 달성하였고, 31경기(29선발) 174이닝 12승 8패 평균자책점 4.40을 기록한다. 한편 팀은 포스트시즌에 진출 하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1차전에서 상대팀 선발 투수 빅 유닛 랜디 존슨을 만났다. 팀은 5회까지 4득점을 하는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요시이도 5.1이닝 동안 4실점으로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첫 승리투수는 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팀은 3:1로 디비전 시리즈에서 승리하면서 메츠는 챔피언십 시리즈로 올라갔다. 상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였다. 당시 1차전 선발은 그렉 매덕스가 등판했는데, 요시이는 1차전 선발로 나서게 되는데, 4.2이닝 동안 2실점을 한다. 결국 패전투수가 되고 팀은 2승 4패로 패하면서 브레이브스에게 월드시리즈를 내줘야했다.
참고로 이 시절 메츠 산하 마이너리거였던 서재응과 인연이 생겼다. 스프링캠프나 시범경기 중 요시이에게 서재응이 포크볼을 배우기도 했다.
2.5. 콜로라도 로키스
2000년, 요시이는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된다. 2000년 4월 26일 피츠버그전에서는 메이저 첫 홈런을 기록했고 6월 24일에는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도루를 기록하기도. 7월 20일에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한-일 선발투수 맞대결이 있었는데, 상대는 LA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던 박찬호[8]. 결과는 박찬호가 6이닝 3실점, 요시이가 6이닝 4실점을 하면서 요시이가 시즌 11패를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5일 뒤의 쿠어스 필드 경기는 이 두 투수들간의 리턴매치[9]가 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박찬호는 7이닝 4실점(2자책)을 기록해 7이닝 2실점의 요시이에 비해 아쉬운 피칭을 보여줬지만 8회초 터진 팀 타선의 도움 속에 승리를 따내는데 성공했다.전반기 성적을 보면 6월에 3연승 행진을 달려 기대감을 올렸지만. 난조를 보인 경기가 많아 전반기 17경기 4승 9패 평균자책점 5.55를 기록하였다. 오프시즌에 팔꿈치 뼈조각 제거수술을 받았다.
2.6. 몬트리올 엑스포스
로키스 구단 측은 시즌 개막 전 요시이를 트레이드하려 시도했으나 풀리지 않았고, 결국 2001년 3월 스프링캠프 도중 로키스로부터 방출된다. 4월 13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1년 30만불 계약을 맺어 메이저 잔류에 성공했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스윙맨/롱 릴리프로 활동했으나 2002년 시즌 종료 후 논텐더로 풀리게 된다.[10]2.7. 일본 프로야구로 복귀 & 오릭스 블루웨이브/ 오릭스 버팔로즈
2003년 1월 오릭스 블루웨이브와[11] 계약하며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했고 2003년 개막전 선발을 맡았다. 이 때 상대는 친정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였는데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왼쪽 발목을 수술하는 등 부상 등으로 인해 6.51 ERA로 부진했다. 여담으로 이 해 오릭스는 요시이 외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또 한 명의 일본인 투수 스즈키 마코토[12]도 함께 영입했는데, 이쪽은 아예 7점대 ERA로 더욱 폭주했으며[13] 오릭스는 당연히 꼴찌[14]로 추락하며 2004년에도 부진과 부상으로 3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하며 방출 대상에 올랐다.하지만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합병 구단 오릭스 버팔로즈의 새 감독으로 취임한 오기 아키라 감독의 요청으로 입단 테스트를 다시 보게 되었고 팀에 잔류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3년간 더 오릭스에서 뛰게 된다.
2007년 시즌 중에 당시 감독인 테리 콜린스와의 불화로 인해 구단에 트레이드 요청을 하게 되었다.
2.8. 치바 롯데 마린즈
결국 2007년 시즌 중 롯데의 외야수 히라시타 코지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지만 트레이드된 이후 4경기에서 13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괴멸적인 피칭을 보였다. 시즌 종료 후 전력외통보를 받았고 독립리그 등에서 현역 속행을 희망했으나 결국 은퇴했다.3. 은퇴 후
은퇴 후 2008년 닛폰햄의 투수코치를 맡아 2012년까지 투수를 키웠다. 이후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과 야구관 차이로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 2013년부터 2014년까지 NHK와 폭스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을 맡으면서 쓰쿠바대학에서 스포츠건강시스템 매니지먼트 석사과정을 밟았다.이후 쓰쿠바대 석사과정 동기인 구도 기미야스의 요청으로 2015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불펜투수 코치를 맡아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201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여 또다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
2019년 현역생활의 마지막을 함께한 롯데에 투수코치로 돌아왔다. 투수코치 성향은 이닝책임제를 좋아하고 있다. 어지간하면 퀵후크와 연투, 이닝 쪼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2019년 롯데는 오프너 전술도 간간히 보여주었음에도 NPB 12개 구단들 가운데 가장 적은 연투(86회)와 3연투(6회)를 기록했다. 기사 문제는 불펜 투수의 경우, 홀드, 세이브 요건에서는 역전당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내린다. 이렇다 보니 주자를 쌓은 투수들이 멘탈이 나가서 4-5타자 연속 안타를 처맞고 블론한 후에 역전까지 당해서 패배하는 일이 비일비재.
결국 시즌 최종전에서도 후타키가 1.2이닝 5실점을 하면서 개털리는 동안 5실점을 할 때까지 팔짱끼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올린다는게 세이부 상대로 3패를 떠안은 와쿠이 히데아키. 결국 와쿠이도 털리면서 시즌을 이렇게 말아먹었다. 2020년에는 후쿠오카를 위협하면서 리그우승을 노리는 중이었으나 아깝게 실패했다.
4. 지도자 경력
4.1.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2023년부터 성적부진으로 사의를 표명한 이구치 타다히토의 후임감독으로 확정되었다. 감독으로서 사용하는 등번호는 선수때 사용하던 21번으로 내정됐다.4.1.1. 2023 시즌
타자 성향은 고정 주전 몇 명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플래툰을 돌리며 무한경쟁을 시키는 편이다. 특히 시즌 초반 한 달을 보면 플래툰으로 나오는 특정 선수가 유의미하게 잘 한다고 해도 플래툰을 고정시키고 있다.투수의 경우는 투수코치 시절보다도 더 아끼는 편이다. 전임 이구치 타다히토 감독은 불펜을 최대한 아껴줬지만 선발은 필요에 따라서 120~130구 투구도 꽤 자주 시켰는데 요시이는 정말 길게 시켜도 100~105구 정도에서 끊고 일반적으로 80~90구에서 계속 선발을 내려주고 있다.[15] 또한 마무리 투수나 셋업맨의 경우도 이구치 타다히토는 최대 3연투까지만 시키는 한에서 관리를 해 줬다면 요시이는 그것보다 더욱 극단적으로 투수를 아껴서 접전 차인 8회라고 해도 체력관리 목적에서 세컨더리 셋업맨을 내거나, 접전 차인 9회에 전날에 마무리가 휴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셋업맨을 일일 마무리로 내는 등의 행동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모든 투수들을 엄청 아끼는 편. 그래서인지 4월에는 투수가 그냥 못 해서 털리는 것이지 체력이 고갈돼서 털리는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고도 팀은 현재 1위를 질주 중이었다.
하지만 교류전에서 이닝책임제가 대실패한데다 타선 부진까지 겹쳐 5연패와 4연패를 한 번씩 하면서 팀은 3위로 추락하였다. 다만 그 이닝책임제 실패에 사와무라 히로카즈의 지분이 커서 실질적으로는 감독보다는 사와무라랑 타선 문제가 더 크다. 오죽하면 2군 강등을 이구치보다 안 시키던 요시이가 하루만에 실점한 투수 3명을 전부 2군으로 강등시켰을 정도.
호불호는 갈리지만 적어도 강점은 확실한 투수 운용에 비해서 야수 운용은 애매하다. 수비 면에선 실책은 덜 나오지만 대타 성공률 양리그 합쳐서 .148로 꼴찌[16], UC타율[17] 리그 10위(파리그 5위)로 좋지 못하다.[18]
전반적으로 홈런이 적고 도루와 번트가 많다는 점에서[19] 스몰볼 야구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 스몰볼 선호는 워낙 파워히터가 없고 파워히터 육성도 잘 못 시키는 롯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팀 상황에 맞춰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고도 여전히 우승 경쟁을 진행 중이었으나 8월 들어서 1위와 7경기차 이상 벌어지며 사실상 물 건너갔고 오히려 4위 라쿠텐과 5경기 차까지 따라잡히며 B클래스 가능성이 1위보다 높아졌다.
8월에는 투수진 붕괴 속에서 7선발제를 시전하며 신조 감독마냥 2군에 있는 투수들을 죄다 선발로 올려 쓰는 짓을 하더니[20] 7월 30일 이후 19경기 중 타네이치 아츠키가 등판한 3경기에서만 전승하고 타 선발 투수가 나온 경기에서는 3승 13패를 기록했다.
결국 9월 20일 접전 차에서 필승조와 추격조 사이 애매한 요코야마 리쿠토가 흔들리는 것을 방치하고 그 후에도 비슷하게 애매한 입지를 가진 이와시타 다이키를 올리는 바람에 1이닝에만 6점을 내주며 오릭스 버팔로즈의 우승 헹가래를 눈 앞에서 보도록 만들고 말았다. 결국 강점도 분명하지만 약점도 분명한데, 강점에만 신경쓰느라 약점을 거의 보완하지 않는 성향이 강해서[21] 현재의 상태만 보자면 전임 이구치 감독과 비슷하게 2~3위 만들라면 곧잘 해도 우승을 노리기에는 한계가 있는 감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얇은 뎁스+기존 1군 전력도 그다지 특출나지 않음이라는 문제도 있긴 하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캠프 스케줄을 영 좋지 않게 짜서 부상자가 더 속출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 만큼 부상자 속출 문제 역시 요시이의 책임이 0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는 상황. 물론 야수들의 타격부진 문제는 요시이 탓을 할 수는 없다지만, 롯데가 현재 투수진도 리그 꼴찌만 면할 정도로 안 좋은 것을 생각하면 요시이가 그렇게 투수진을 아껴서 큰 이득을 봤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러 커뮤니티를 보면 요시이 감독에 대한 팬들의 의견은 전반적으로 통일되지 않았다. 일본 사이트에서도 전력이 이 모양이라 감독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과중하다는 팬들도 좀 있으며 이로 인해서 요시이를 비판하는 팬들과의 키배도 벌어지고 있다.[22]
안 그래도 실속하고 있는 마당에 9월 하순부터는 팀내에 코로나까지 들이닥치면서 실속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걸린 선수만 해도 사사키 로키, 야마구치 코키, 오기노 타카시 등등 주력 선수들만 족족 걸려서 빠지는 상황. 결국 소프트뱅크와의 홈경기에서 2연패를 기록하여 순식간에 4위로 추락했다.
이후 막판에 이겨야 할 경기를 다 이기고 호크스의 최종전 패배도 받아먹으며 어찌저찌 2위는 확보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는 3차전 때 사와무라 히로카즈를 냈다가 0.2이닝 3실점을 하며 질 뻔한 것을 빼면[23] 적절한 선수 운용으로 2승 1패 승리를 거두며 파이널에 진출했으나 파이널에서는 전력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1승 4패로 영봉패만 면하면서 탈락했다.
2023년 드래프트에서는 1, 2순위에서 즉전감 타자와 투수를 1명씩 뽑은 것 외에는 고졸 강속구 유망주 투수 위주로 뽑았다. 요시이 감독은 원래부터 체격이 크고 강속구를 던지는 선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24] 요시이의 요구대로 드래프트를 진행했다는 말이 많다.
4.1.2. 2024 시즌
작년과 비슷한 운용을 보여주며 큰 문제는 없고 성적도 나름대로 2-3위권을 유지하고 있다.하지만 특유의 이닝책임제를 시전하다 사와무라 히로카즈가 2번이나 3점차에서 블론세이브를 저지르게 만들었고, 오지마 카즈야를 이닝쪼개기를 하지 않겠다고 놔두다가 상대팀 투수 포함 9명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2이닝 11실점을 할 때까지 방치하는 등 임팩트있게 욕 먹을 짓을 몇 번 하며 성적은 높지만 전임 감독보다 딱히 좋은 평을 받고 있지는 않다. 물론 뎁스가 얇은 팀인 롯데의 전력을 가지고 중상위권을 유지해주는 만큼 당장 나가라 할 정도로 까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6월 12일, 리드하는 상황에서 아즈마 유스케가 1이닝 6실점을 하는 것을 방치하면서 대역전패+3연패를 허용하며 이닝책임제에 대한 불만이 드디어 대세가 되었다. 가뜩이나 작년에도 야기 아키라가 1이닝 39구 4실점 하는 것을 방치해놓고 바로 2군으로 내려버린 전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큰 말이 없었으나 이번의 아즈마의 6실점이 논란이 되며 작년의 야기 건도 언급되는 중이다.
일본 인터넷에서는 ”1이닝 6실점을 해서 경기를 역전당하더라도 투수 관리를 할 수 있었으니 됐다.“는 등 비꼬는 말이 대놓고 나오는 등 반응이 험악해졌으며[25], 이날 해설을 맡은 '미스터 롯데' 아리토 미치요 역시 1/3이닝이든 뭐든 중간에 교체라도 했어야 한다며 감독의 운용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결국 팀 OB이자 유명 해설가 사토자키 토모야에게도 운용을 지적받는 등 6월이 되자 엄청난 혹평을 받고 있다. 투수코치로는 그놈의 이닝책임제 덕에 호불호가 있어도 강속구 투수 육성이라는 강점이 확실해서 능력있다는 평을 많이 받았지만 감독으로는 무능하지는 않을지언정 전임자 이구치보다 아쉽다는 평가가 주류가 되어가는 중.[26][27]
투수 관리 역시 오히려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2023년만 해도 순위 경쟁팀인 소프트뱅크, 라쿠텐은 오히려 9월에 팀 ERA가 개선되었으나, 롯데는 팀 ERA가 여름과 비교해서 9월에 동일했다. 즉 불펜을 딱히 휴식시키지 않았던 다른 팀들보다 오히려 투수들의 체력이 더 빠르게 떨어진 거 아니냐고 생각할 여지도 있는 것. 실제 일본 사이트에서는 2024년 들어 이런 말이 꽤 많이 나오고 있다.
8월 이후 승률 4할을 찍기 시작하여 9월 중순에는 결국 4위 라쿠텐과의 2연전을 앞두고 2경기 차까지 줄어들고 말았다. 이제는 팬들 사이에서도 작전코치 카네코와 손잡고 나가라는 말이 대세가 되었다.[28] 일부 요시이를 쉴드치는 팬들도 요시이가 잘해서 쉴드를 치는 것이 아니고 단장을 위시한 팀 프런트부터 구단주(…)가 막장이라 감독을 바꿔봤자 답 없다는 이유로 쉴드를 쳐주고 있는 수준이다.
9월 17일 4위 라쿠텐과 2경기 차이인 상황의 맞대결에서 11회 초 1점차 리드에서 쿠니요시 유키가 0.2이닝 4피안타를 허용하고 패전투수가 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서 여론이 더욱 나빠졌다. "투수를 아꼈으니까 경기에서는 졌지만 나는 상관없다."라고 할 거라면서 비꼬는 발언도 등장하고 있다. 그래도 라쿠텐이 시즌 막판에 추락한 덕에 어찌저찌 3위를 사수했다.
낫폰햄과의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1차전에서 사사키 로키의 호투로 승리를 거뒀으나 2차전에서 파이널 직행까지 2아웃 남겨두고 마스다 나오야]가 만나미 츄세이에게 동점포를 얻어맞은 데 이어 연장전에서 사와무라 히로카즈가 방화를 저질러 끝내기 역전패를 당하는 바람에 분위기를 내줬고, 결국 3차전에서 선취점을 얻었음에도 흔들리는 타네이치 아츠키를 내리지 않는 믿음 야구를 보여주다 미즈노에게 역전 3루타를 얻어맞고 패배하면서 가을야구를 허무하게 마감했다.
4.1.3. 2025 시즌
팬들은 물론 사토자키 토모야나 아리토 미치요같은 롯데 OB 출신 해설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투수혹사 없이[29] A클래스를 2년 연속 사수했다는 점 덕분에 재계약에 성공했다. 애초에 재계약 전부터 오프시즌에 팀 투수에 대해 이런저런 코칭을 할 것이라고 밝혔으니 잘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그래도 재계약과 함께 오프시즌에는 사사키 로키의 투구를 다시 한 번 손댄다고 발언했으니 일단 사사키 로키를 1년 더 팀에서 볼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은 긍정적 전망. 사사키 로키가 미국에 가기 전까지는 요시이가 감독을 계속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5. 여담
- 통산 251승을 자랑하는 히가시오 오사무와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 때문에 요시이는 히가시오의 현역 시절 등번호인 21번을 희망하는 경우가 많았고, 말년에 잠시 거쳐간 롯데를 빼면 소속된 적이 있는 모든 일본프로야구 구단(킨테츠, 야쿠르트, 오릭스)에서 21번을 달았다.
- 코치로서의 롤 모델은 킨테츠 시절의 은사 곤도 히로시라고 한다. 오기 아키라 감독 아래에서 요시이는 마무리 투수로 처음 두각을 나타냈지만 1988년의 10.19 더블헤더나 다음 해의 리그 우승이 달린 중요한 경기[30] 등 중요한 장면에서 오기 감독은 요시이가 아닌 좌완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31]를 등판시키는 등 요시이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고, 이에 단단히 삐진 요시이는 1989년 리그 우승 행가레의 와중에도 참가하지 않고 실내 연습장에 있었다고. 이미 투수 기용 등의 문제로 오기 감독과 의견대립이 있던 곤도 히로시 코치가 이 때 요시이를 달래 주었는데 시즌 종료 뒤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곤도는 코치직을 사임한다. 요시이는 이를 통해 선수를 지킨다는 것이 어떤 자세인지를 배웠다고 한다. 오기 감독과 요시이는 2005년[32]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다시 재회한다. 이 때문에 곤도 히로시의 코칭 스타일인 혹사를 자제하고 최대한 투수를 돌려쓰는 것과[33] 자신이 전문성을 갖고 있는 투수 위주로 개입을 하는 식의[34] 운영을 보이고 있다.[35]
- 오지마 카즈야에게 트윈 터보를 예시로 들어 이야기한 것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카즈야를 감독실로 불러 "이 말을 알고 있나?"라며 보여준 것이 바로 트윈 터보의 사진이었다고. 그리고 트윈 터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며 마지막으로 "트윈 터보가 되라"라고 했다는데 오지마는 경마를 잘 모르다 보니 처음엔 벙 쪘지만 감독에게 들은 말과 대충 알아본 내용을 바탕으로 "쓸데없이 페이스 배분에 신경쓰다 자멸하지 말고 처음부터 전력투구로 밀어붙여라 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3차전에 나서서 초반부터 전력투구로 맹공을 펼쳐 6과 3/1이닝 96구 무실점을 기록했다. 개인 마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37]
6. 관련 문서
[1]
야스다 생명보험이 협찬했고 1981년부터 2002년까지 상을 수여했다. 포인트 산출방법은 (구원승리 + 세이브 수)*2 - 구원 패전 수
[2]
노무라 카츠야 감독 시절 다른 팀에서 잉여 자원으로 판정된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노무라 재생공장'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3]
하지만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순위를 나열하면 5-3-1-1-4-1-4-1-4-4-4-1인데 압도적 강팀이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애매하다. 팀 뎁스가 얇아서
후루타 아츠야나
카와사키 켄지로 등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당하면 4위로 꼴아박는 시즌이 많았기 때문. 물론 1위를 찍은 시즌의 포스는
김성근 감독 시절
SK 와이번스만큼이나 어마어마했다.
[4]
NPB 등록명은 D・J였다.
[5]
재미있게도 이 때 요시이의 에이전트는
노모 히데오의 메이저 진출을 주도한 돈 노무라(노무라 단)로, 당시 요시이의 소속팀이던 야쿠르트의 감독
노무라 카츠야의 아들이다. 친아들은 아니고 후처인 노무라 사치요가 전 남편인 미국인 사업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결과적으로 아들이 아버지 팀의 전력 약화에 일조한 셈. 덤으로로 이 때 야쿠르트에는 노무라의 친아들인 노무라 카츠노리가 백업포수로 뛰고 있기도 했다. 자세한 가족사에 대해서는 노무라 카츠야 항목 참조.
[6]
돈 노무라와 함께 메이저 이적을 경험한 킨테츠 시절의 동료이던
노모 히데오의 조언이 미국 진출 결심에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7]
이쪽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의 트레이드 형태였지만, 이라부 본인의 땡깡과 이라부에게 베팅하고자 한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반발에 힘입어 많은 마찰이 있었고 결국 파드레스가
뉴욕 양키스에 이라부를 트레이드하는 형태로 이라부는 양키스에서 뛰게 되었다.
[8]
같은 해 4월 5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전에서
이라부 히데키와 박찬호가 맞붙은 것에 이은 메이저리그 사상 두 번째 한-일 선발투수 대결이다.
[9]
이자 세 번째 투수 한일전.
[10]
이 때 한국인 투수
김선우와 같은 팀에서 뛰었는데, 김선우가 오카 토모타카와 주먹다짐이 있었던 걸 알고는 그를 격려해줬다고 한다.
[11]
구대성이 뛰던 시기이다.
[12]
미국 시절에 줄여부르던 이름인 '맥 스즈키'로 더 잘 알려진 선수. 고교야구 시절 폭력사건 등에 연루되어 야구부에서 뛸 수 없게 되자 일본을 떠나 마이너리거로 프로 선수생활을 시작한 선수로, 앞서 언급된 에이전트 돈 노무라가 처음으로 대리인을 맡은 선수이기도 하다. 상술했듯 미국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기에
G.G.사토처럼 오릭스에 신인 드래프트로 입단했다. 메이저에선 6년간 뛰면서 고정 선발도 맡은 시즌이 있을 정도로 나름 버텼으나(6시즌 통산 117경기 67선발 16승 31패 ERA 5.72.) 일본에서는 3년 만에 방출했다. 이후 중남미 윈터 리그, 멕시칸 리그, 독립 리그 등을 떠돌아다니면서 거기서는 준수하게 던지면서 2년간 대만에서 뛰기도 했고(첫 해는 대체용병으로 들어와 불펜으로 나름 잘 했으나 2년차에는 ERA 11점대로 광속퇴출) 2007년에는 라쿠텐의 입단테스트도 받았으나 불합격. 2011년 독립 리그를 끝으로 파란만장한 선수생활을 마쳤다.
[13]
이 해 오릭스는 당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상대로만 20점 이상을 내주고 패배한 경기만 4번이라는 치욕적인 성적을 남겼으며, 이 중 요시이(7월 27일, 26-7 패배)와 스즈키(8월 1일, 29-1 패배)가 선발로 나선 경기가 한 경기씩 있다.
[14]
그냥 꼴지가 아니라 팀 실점, 자책점, 피안타, 평균자책점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기록을 찍은 역대급 약팀이었다.
[15]
일본야구는 6선발이라 일본의 120구=한국의 100구 정도 느낌이다. 즉 요시이의 야구는 한국으로 치면 선발을 짧게는 70-80구, 길게는 80-90구 정도만 던지게 하고 쉬게 해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시즌 후반에는 120구 정도까지는 던지게 한 걸 보면 시즌 초반에는 선수들의 몸이 덜 풀렸다고 생각하여 이런 것으로 보인다.
[16]
전임자 이구치는 4-1-5-1-3위를 기록하며 5년간 2.8위로 대타 작전을 꽤 잘 진행했고, 대타 타율이 낮았던 해조차 최소한 2할 이상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17]
타석에서 홈런을 칠 시 동점이나 역전이 되는 접전 차 패배 상황을 말한다.
[18]
단 UC타율의 경우 롯데의 고질적인 약점으로 2016년 이래 8년 연속 UC타율은 하위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UC타율 1위를 기록한 2014년엔 정작
클라이맥스 시리즈조차 가지 못했고, 2016, 2020, 2021년에는 UC타율 하위권을 기록했음에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19]
다만 2년차인 2024년에는 도루를 확 줄이며 오히려 도루가 가장 적은 구단 중 하나가 되었다. 감독 스스로도 도루보다는 진루타를 내는 것을 선호한다고 밝혔고. 스몰볼이든 빅볼이든 발이 빠른 선수는 곧장 도루를 시키고자 했던 전임 이구치 감독과의 차이인듯 하다.
[20]
그 와중에 2군에서도 5점대에 1승 9패인
사토 쇼마는 다행히도 올리지 않았다.
[21]
애초에 나무위키
퀵후크 문서에서 투수의 잦은 교체를 어떤 시각으로 썼는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막상 일반인보고 고르라고 하면 이닝 쪼개기보다는 이닝책임제를 고르는 사람들이 많으며, 실제로 이닝책임제 덕분에 기회를 더 얻고 1군에 정착한 투수들도 있긴 있다.
[22]
참고로 롯데의 경기 스코어와 5ch 반응을 긁어오고 팬들이 의견을 다는 마토메 롯데 사이트는 타 팀에서는 응원구호로도 등장하는 '쿠타바레'만 나와도 운영자가 지워버릴 정도로 말 통제가 매우 심해서 이런 곳에서 감독 비판을 하거나 키배를 뜬다는 것은 팬들이 굉장히 화가 났다는 것이다. 평범하게 지는 경기에서는 팀이 노답이라는 자조만 하는 수준이다.
[23]
직후에 등판한
츠모리 유키,
오츠 료스케를 상대로
후지오카 유다이가 3점 홈런으로 동점을 만든 다음
야스다 히사노리가 끝내기 2루타를 터뜨리며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두 선수 모두 롯데전 성적이 안 좋았음에도 분위기만 믿고 스탯도 제대로 안 본 채 등판시킨 호크스
후지모토 히로시 감독의 실책이자 어째서 2023년 호크스가 거액의 투자에도 이런 성적밖에 낼 수가 없었는지를 증명한 최악의 지휘였으며, 결국 후지모토는 경기 종료 직후 날짜가 지나기도 전에 해임되었다.
[24]
피네스 피쳐보다는 파워피쳐를 좋아하는 스타일. 실제로 요시이가 잘 성장시킨 투수들은 체격이 큰 파이어볼러들이었다.
[25]
이 글의 83번 댓글을 보면 상대였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팬이 와서 왜
아즈마 유스케를 교체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는다. 91번 댓글에서 요시이는 이닝 도중 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저럴 때 절대 안 바꾼다고 답을 단 것이 백미.
[26]
요시이는 드래프트에도 1라운드를 제외하면 본인 마음대로 뽑을 정도로 전임에 비해서도 권한이 많은 편이었다. 당장 전임 이구치 감독은
마키 슈고를 뽑자고 했다가 묵살당하고
스즈키 쇼타를 억지로 뽑은 전적이 있는 판.
[27]
다만 그 이구치도 능력은 있었지만 돈 없는 약팀을 우승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대세였다. 그리고 이구치는 선수를 은퇴하고 바로 감독이 되어서 초반에는 정말 뻘짓을 많이 하다가 연차가 쌓이면서 성적을 낸 성장형 감독인데, 요시이는 코칭스태프 일을 하면서 감을 쌓아와서인지 감독 초반의 성적을 보면 오히려 이구치보다 낫긴 했다.
[28]
투수 등판일정 관리해주는게 최고의 목표라는 말도 나온다.
[29]
팀에서 가장 많이 나온 선수가
스즈키 쇼타인데, 그 스즈키도 49.1이닝밖에 안 던졌다. 그러니까 모든 계투를 풀시즌 50이닝 미만으로 썼다는 것.
[30]
10월 12일 더블헤더에서
랄프 브라이언트가 두 경기에 걸쳐 4연타수 홈런을 때리며 세이부의 에이스
궈타이위엔,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박살내고 세이부를 따돌리는데 성공했고, 그 다음 최종전 바로 직전 시합인 10월 14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5 - 2로 승리하며 2위(
오릭스), 3위(
세이부) 팀과 불과 1, 2리 차로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다.
[31]
그러나 오기 감독의 다소 무리한 혹사 기용으로 아와노도 이후에 부상에 시달리며 선수생명이 꼬여 버렸다. 아와노는 이후 곤도가 감독을 맡고 있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중간계투 요원으로 활약하며 1998년의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에 일조하나, 이미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로서의 실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32]
오기는 이 해를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난 후 지병인
폐암으로 같은 해 12월 사망하며 이 해가 본인의 생애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33]
2024년은 그러한 요시이식 투수운용의 끝판왕을 보여준 해로, 팀 중간계투 전원이 50이닝 미만을 투구했다. 필승조로 가장 많이 나온
스즈키 쇼타가 55경기 49.1이닝을,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온
마스다 나오야가 44경기 41.2이닝을,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온
요코야마 리쿠토가 43경기 42이닝을,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온
쿠니요시 유키가 41경기 41.2이닝을 던졌다. 이 4명 외에는 40경기/40이닝을 기록한 선수가 전무하며 그나마 많이 나온
사와무라 히로카즈가 39경기 35이닝을 던졌다.
[34]
야수의 경우는 요시이가 코칭이나 조언을 하기 어려운 만큼 수석코치나 타격코치, 혹은 선수 본인들에게 맡기는 듯하다. 이 때문에
후쿠우라 카즈야 코치가 거포를 못 키운다고 타격코치로 평판이 썩 좋지 않다(...). 다만 후쿠우라는 컨택도 장타도 부족한 선수들에게 똑딱질을 해서 타율을 높이는 법은 나름 잘 가르치는 편.
[35]
이 외에도 요시이는 투수의 저격등판 등을 잘 안 시킨다는 것도 투수코치로서의 특징. 이 때문에 유독 약한 팀 상대로 등판시켰다가 투수가 털리면 그거로도 까인다.(다만 야수의 저격성 대타는 종종 낸다. 예를 들어
로베르토 오수나가 등판하면 꼭
카쿠나카 카츠야를 대타로 낸다. 오수나가 롯데 상대로 블론을 3번 했는데, 그 중 두 번이 카쿠나카 상대로 블론을 허용했기 때문.)
[36]
도쿄돔.
[37]
우라와에서 5전 5승중인
리진이란 말을 소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