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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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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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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모리 시게오 (1936) |
2대 이시모토 슈이치 (1936~1939) ★★ |
3대 마츠키 켄지로 (1940~1941) |
4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2~1944) ★ |
5대 후지무라 후미오 (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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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7~1949) ★ |
7대 마츠키 켄지로 (1950~1954) |
8대 키시 이치로 (1955) |
9대 후지무라 후미오 (1956~1957) |
10대 타나카 요시오 (1958~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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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카네다 마사야스 (1960~1961) |
12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2~1965) ★ ★ |
13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6) |
14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7~1968) |
15대 고토 츠구오 (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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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무라야마 미노루 (1970~1972) |
17대 카네다 마사야스 (1973~1974) |
18대 요시다 요시오 (1975~1977) |
19대 고토 츠구오 (1978) |
20대 돈 블레이싱게임 (1979~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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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나카니시 후토시 (1981) |
22대 안도 모토오 (1982~1984) |
23대 요시다 요시오 (1985~1987) ★ |
24대 무라야마 미노루 (1988~1989) |
25대 나카무라 카츠히로 (1990~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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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후지타 타이라 (1996) |
27대 요시다 요시오 (1997~1998) |
28대 노무라 카츠야 (1999~2001) |
29대 호시노 센이치 (2002~2003) ★ |
30대 오카다 아키노부 (2004~2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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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
32대 와다 유타카 (2011~2015) ☆ |
33대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
34대 야노 아키히로 (2019~2022) |
35대 오카다 아키노부 (2023~20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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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후지카와 큐지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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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 ★: 단일리그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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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야노 아키히로 矢野燿大[1]矢野輝弘란 표기명을 사용했다.] / Akihiro Ya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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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68년 12월 6일 ([age(1968-12-06)]세) |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구 (現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라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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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오사카시립 사쿠라노미야 고교 (오사카) - 도호쿠복지대학 |
신체 | 181cm, 77kg |
포지션 | 포수, 외야수[2]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0년 드래프트 2위 (주니치) |
소속팀 |
주니치 드래곤즈 (1991~1997) 한신 타이거스 (1998~2010) |
지도자 |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배터리코치 (2013~2015) 한신 타이거스 1군 작전·배터리코치 (2016~2017)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2018)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19~2022)[3] |
응원가 | 구단 자작곡[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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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코치. 데뷔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하였지만, 한신 타이거스 이적 후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주전 포수로 한신의 암흑기 탈출과 2차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은퇴 후 한신에서 코치직을 맡다가 2019년부터 한신 타이거스의 지휘봉을 잡았다.2. 데뷔 이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는데, 본래 포지션은 유격수였지만 같은 팀의 주전 포수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포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이후 중학교 때는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서 농구부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고등학교에서 다시 야구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야구부 감독이었던 이토 요시히로에 의해 1학년 때부터 주전 포수를 맡게 된다. 하지만 코시엔 출장은 단 1번도 이루지 못하였고, 은사였던 이토가 옮겨간 토호쿠 복지 대학[5] 진학을 선택한다. 대학 시절에도 일미대학 야구선수권 대회 멤버로 뽑히는 등 나름 활약을 이어갔고, 졸업시즌인 1990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곤즈의 2위 지명을 받아 양 구단의 경합 끝에 주니치가 교섭권을 얻으면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한다.3. 현역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게 된 야노였지만, 이미 주니치에는 나카무라 타케시가 주전 포수로 확고히 자리잡았기에 나카무라에 비해 뚜렷한 장점이 보이지 않던 야노는 백업 포수나 대타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출장기회를 늘리기 위해 외야수도 겸업했지만 여전히 출장기회를 많이 얻지는 못했고, 이 와중에 후배 아라키 마사히로에게 입단 당시 등번호였던 2번을 넘겨줘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주전을 차지하지 못한 채 백업 포수나 외야수로 뛰며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1997년 시즌 종료 후 거포 1루수 타이호 야스아키와 함께 당시 한신의 주전 포수, 센터 외야수였던 세키카와 코이치와 주전 유격수였던 쿠지 테루요시[6]와의 2:2 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게 되었고, 이 트레이드가 야노 자신의 야구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
한신 타이거스 시절.[7]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면서부터 야노에게 전성기가 찾아오는데, 당시 포수 포지션이 확고히 고정되지 못한 채 매년 여러 선수들이 주전을 다투던[8] 한신에서 요시다 요시오 감독에게 포수 리드를 호평받아 이적하자마자 단번에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적 2년차였던 1999년엔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하면서 3할 타율도 달성하였다.
이후 주니치 시절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한신 감독에 부임한 후로도 계속 주전포수 자리를 맡았고[9] 2003년부턴 FA로 이적해 온 카네모토 토모아키의 영향으로 오프 시즌에 신체 단련에 집중하며 맹훈련을 한 것이 톡톡히 효과를 보아 장타력 상승을 포함한 공격, 수비에서 크나큰 성장을 이루며 이 해 한신 타선의 하위타선(주로 7번타자)의 주축으로써 타율 .328/OPS .897, 14홈런 79타점의 커리어하이를 찍고 한신의 18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면서 데뷔 이래 처음으로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 수상은 당시 첫 수상으로썬 최연장인 만 35세에 달성한 것이었다.
다음 해인 2004년에도 전경기 출장을 달성하고 꾸준히 공수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타율 .285/OPS .747 11홈런 65타점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2005년에도 타율 .271/OPS .760, 19홈런(개인 최다) 71타점을 기록하면서[10] 또 다시 한신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고 2번째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후 일본시리즈에선 당시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투타 양면에서 일방적으로 압살당하면서 4전 전패는 물론이요 최소 득점, 무홈런, 방어율 8점대를 비롯해 3경기 연속 10실점, 총 스코어 33-4라는 온갖 흑역사를 창조해낸 한신 선수단 가운데 히야마 신지로와 함께[11] 유이하게 3할 이상의 타율이었던 .417을 기록. 감투선수상[12]을 수상했다.
이후 2006년에도 타율 .274/OPS .766, 17홈런 78타점[13]을 기록하며 3번째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다가 2007년에 노쇠화가 시작되면서 타율 .236/OPS .639, 6홈런 42타점이란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2008년에 2008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멤버로 뽑히는 등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14] 결국 노쇠화를 이기지 못한 채 2009년부터 카노 케이스케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내주며 출장기회가 급감하였고, 거기에 죠지마 켄지가 들어오면서 입지가 더욱 좁아지며 2010년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성적은 1669시합 출장, 4921타수 1347안타, 112홈런 570타점 16도루, 103희생타 29희생플라이, 464사사구 1089삼진, 타율 .274/출루율 .335/장타율 .395/OPS .730이다.
4. 은퇴 이후
5. 한신 타이거스 1군 감독
5.1. 2019년
전임 감독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선호하고 있다. 스프링캠프만 봐도 스파르타식 강훈련을 중시하던 가네모토와는 달리 자율적인 훈련 방식을 도입한 걸 보면... 그리고 피드백 질문에 대한 답변도 차이가 명확한데 가네모토는 선수들에게 책임을 묻는 스타일이었던 반면에 야노의 경우 본인이 책임을 짊어지는 스타일이다. 국내 야구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SK 와이번스의 두 전임 감독인 김성근과 이만수 정도의 스타일 차이로 보면 될 듯하다.그리고 야노 감독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라, 경기 내내 표정변화가 매우 극심하다는 것. 누가보면 조울증이 의심될 정도.
어찌됐건 자율성을 중시한 스프링캠프의 부작용으로 시범경기를 뒤에서 2등인 11위로 마감하고 말았다. 여러 의문점과 불안감을 가지고 1군 감독으로서의 첫 시즌을 맞이했다. 시즌 초반에는 아니나 다를까 투타의 부조화 속에 센트럴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며 허덕였지만, 점차 시즌이 지나갈수록 엇박자였던 팀 전력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해[17]교류전 개막 전까지는 리그 2위 자리를 넘볼 정도로 그 상승세가 대단했다. 기껏해봐야 B클래스권을 맴돌것이라는 시즌 전 전망을 보기좋게 뒤엎은 선전이었다.
하지만 교류전을 망치면서[18] 3위 자리도 간당간당한 위치로 다시 추락했다. 결국 7월 3일 기준으로 B클래스인 4위까지 떨어져버렸다. 아직 요코하마와의 시리즈를 치르는 중이기에 순위가 바뀔 수 있지만 팀이 급격하게 하향세를 타고 있는지라 부진이 장기화 될 수도 있다.
9월 26일 기준으로 현재 센트럴 리그 4위 (66승 68패)를 기록하고 있는데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를 탈 수 있는 리그 3위 히로시마 도요 카프 (70승 70패)와는 딱 한 경기 차이가 난다. 한신은 3경기, 히로시마는 1경기를 남겨두고 있는데 한신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히로시마가 남은 한 경기를 비기거나 지고 한신이 남은 3경기를 모두 이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히로시마가 진짜로 최종전에서 주니치에게 1-4로 패배하면서 한신이 남은 요코하마와의 한 경기, 주니치와의 두 경기를 모두 승리한다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정말로 남은 3경기를 모두 잡아내며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극적으로 진출했다! # 마지막 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위 도전하던 주니치 선발 투수 오노 유다이를 만나 고전하고 있었지만 오노가 규정이닝을 채우기 위해 3.1이닝만을 막고 내려가면서[19] 4회말 바뀐 상대 투수 미츠마 타쿠야에게 점수를 뽑아내면서 리그 막판 6연승을 달성, 히로시마를 가까스로 끌어내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합류했다. 한신 감독으로 첫 해에 A클래스로 진입한 사례는 구단 역사상 1982년 안도 모토오(3위) 이래 37년 만의 일.[20]
힘들게 진출한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선 정규 시즌 16승 1무 8패로 압살했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를 만나게 됐는데 1차전 초반 믿었던 선발 니시 유키가 최악의 투구를 펼치며 이대로 기적의 행진이 종료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하지만 상대 감독 알렉스 라미레스의 연이은 투수 교체 실패와 7회부터 펼쳐진 호죠 후미야의 대활약으로 역전승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결국 2차전을 오토사카 토모의 끝내기홈런 끝에 내줬지만 3차전을 투수전 끝에 2-1로 잡으면서 승리, 시즌 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까지 성공했다. 한신의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은 2014년 이후 처음.
파이널 스테이지 상대는 2019년 센트럴 리그 우승팀이자 전통의 일전 상대인 하라 타츠노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두 팀의 전력차가 현재 워낙 큰 데다가 정규 시즌에도 상대 성적 10승 15패로 열세였던 탓에 승리를 기대하기는 좀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2014년의 기억이 아직 양 팀 팬의 뇌리에 강력하게 남아있어 기대치는 높은 상황이다. 그러나 전력 열세와 투수진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1승 4패(어드밴티지 1패 포함)으로 탈락, 2014년의 기적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5.2. 2020년
2020년 시즌을 앞두고 반강제적인 로스터 개편이 기다리고 있는데 토리타니 타카시, 랜디 메신저 등 팀 내 베테랑들이 줄줄이 팀을 떠나거나 은퇴하는 상황이 된 것. 2019년 10월 17일 있었던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고교 빅4로 분류되는 선수 중 오쿠가와 야스노부를 1차 지명했다가 중복지명으로 독점 교섭권을 야쿠르트에게 내줬지만 대신 니시 준야를 지명하는 데 성공했다.코로나로 인해 미뤄진 2020년 개막전부터 교진에게 피스윕 등 6월에만 3승 8패를 당해 리그 꼴지로 시작하였다. 극악의 팀타격 부진과 5연 연장시리즈, 15타석 연속 무안타의 저스틴 보어의 부진이 있었지만 연패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없었고 시즌 중에는 선수들을 모아 몇 시간동안 설교를 했다고 했다. 망가진 팀케미와 극악의 성적으로 간사이권 언론에서는 오치아이 히로미츠 선임설까지 나오는 등 각종 찌라시들이 난무해 자리 또한 위태해졌었다.
그러나 7월 4일 마츠다 스타디움 히로시마전 4연승을 필두로 팀 분위기가 살아돌아왔고 보어의 부활과 팀타격의 부활, 투수진의 역투가 지속되면서 7월 21일 기준으로 리그 3위로 올라왔다. 그 이후에도 부진했던 치카모토 코지를 빼고 1번에 이토이 요시오를 넣는 등 적극적으로 타순 변화를 가져갔고, 최종적으로 2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다만 코로나로 인한 단축시즌이라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열리지 않으면서 그대로 가을야구 없이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지었다.
5.3. 2021년
거포 좌타자 사토 테루아키, 전년도부터 중심타선을 지킨 제리 샌즈, 마무리 투수 로베르트 수아레스 등의 활약에 힘입어 교류전까진 센트럴리그 1등을 사수했다. 그러나 교류전 이후 팀 성적이 주춤했으며, 올림픽 휴식기 전까지 심각한 행복수비[21]에 시달리고 치카모토 코지가 사인 훔치기 의심을 받는 등[22] 전반기 막판 내내 바람 잘 날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으나 다른 팀들도 영 못나가서(...) 어부지리로 1등을 사수했다.결국 후반전 개막 후에도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2020 도쿄 올림픽 이후 한 때 요미우리에게 선두를 뺏기기도 했으나, 9월 3~5일 고시엔 교진 3연전을 2승 1무로 마감하며 한 숨 돌리는 데 성공했다. 특히 9월 4일 주장이 끝내기 홈런을 치자 자신이 제일 앞장서서 기뻐하면서 표정변화를 제대로 보여줬다.
이후엔 9월 이후 급격하게 하락세를 탄 요미우리가 무너지는 반대로 상승세를 타고 올라온 야쿠르트와 1위 경쟁을 벌였고 14년만에 교진전 상대전적 우세를 확정하기도 했으나, 야쿠르트의 기세를 막지 못한 것에 겹쳐 중요한 승부처에서 센트럴리그 하위권 팀들에게 연달아 고춧가루를 얻어맞아 버리는 바람에 결국 시즌 최종전이었던 주니치와의 홈경기에서 패하고 같은날 야쿠르트가 승리하면서 야쿠르트에게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23]
결국 가을야구는 요미우리와의 퍼스트 스테이지부터 치르게 되었고, 요미우리가 시즌 후반 극악의 부진에 빠졌던 데다 대전 성적도 우위였기 때문에 무난히 파이널로 진출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너무나 허무하게도 시리즈에서 2연패를 당하며 광탈. 한때 리그 우승까지 바라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었지만 후반기 들어서 시작된 야쿠르트의 대약진으로 1위를 뺏기고 가을야구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씁쓸히 시즌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5.4. 2022년
오키나와로 스프링캠프를 떠나면서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퇴임하겠다는 말을 했다. 저러고 2월 스캠 중엔 헹가래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 설레발과 함께 팀은 와장창 무너지기 시작했다.2022시즌 시작부터 카일 켈러의 작가짓과 함께 팀이 급격히 폭망을 했다. 켈러의 작가짓으로 날아간 2경기 포함 기어이 3월 내내 단 1승도 못 올렸다. 4월 1일 요미우리와의 3연전 첫 경기에도 끝내 연패 탈출에 실패, 4466566664 시절에도 나온 적이 없었던, 구단 역사상 최초로 개막 7연패 기록을 만들었다(...).
4월 5일, 니시 유키의 완봉과 함께 드디어 22시즌 첫 승을 거뒀다. 하지만 그 뒤로 다시 1무 포함 6연패를 기록하였다. 요코하마전 1경기[25], 히로시마전 1경기[26]를 제외하면 죄다 1~3점차 승부였고 나름 접전으로 끌고 갔지만 타선이 끝내 안 터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미 1승 1무 15패라는, 고양 오리온스의 대구시절 승률 또는 느그가 프로가 수준의 기록이 나오고 말았다.
4월 15~17일 요미우리 3연전에서 시즌 첫 연승과 위닝시리즈를 거뒀다. 덕분에 1할승률에 진입했으나 4월 19~21일 요코하마 3연전을 모두 지면서 세리그 역사상 최단경기(23경기)에 상대 5개팀 스윕패 허용이라는 굴욕을 만들고 말았다.
결국 팬들도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조기 사퇴를 촉구하고 있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시즌 후 사임 발언이 굳이 필요없던 레임덕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그나마 4월 말에 6연승을 달려 나락수준의 여론이 조금은 좋아졌으나, 5월말까지도 5위와 3게임차 정도로 계속 최하위에서 머물고 있다. 2022 시즌이 리그 전체적으로 투고타저가 심해 점수를 짜내는 벤치의 역량도 꽤 중요해졌는데, 다소 이해할 수 없는 기용을 계속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교류전에서 12승 6패[27]로 한신 구단 역사상 최고 성적을 거두면서 분위기 반전에 성공, 타격부진으로 급격히 무너지는 주니치와 일요일만 되면 지는 요코하마를 제치면서 교류전 종료 시점에 리그 4위까지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히로시마가 교류전 내내 극한의 부진에 빠지면서 3위 히로시마와도 2게임 차이로 좁혔다.
다만 히로시마 상대 전적이 영 나빠서 기껏 4위까진 올라왔지만 3위 히로시마를 추격 사정권에만 놓고 역전을 하진 못하고 있다...[28] 그러나 올스타전 직전에 만난 요코하마와의 3연전을 싹쓸이하면서 5할 -16에서 기어이 5할 승률을 회복하고 전반전을 마무리했다.
비록 3승 1무 19패라는 최악의 스타트를 끊었지만, 그것을 꾸준히 만회해 가며 시즌 A클래스 막차탑승이란 훈훈한 마무리로 정규시즌을 끝냈다. 재임기간 내내 3위-2위-2위-3위로 한신 타이거스의 우승 갈증을 해결해주지는 못했지만 주전 선수들의 평균 나이를 낮추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29] 꾸준히 팀을 A클래스에 올려놓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결국 야노의 리빌딩 성공은 2023시즌 38년만의 우승이라는 결실로 돌아왔다.
힘겹게 합류한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만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를 상대로 정규 시즌 상대성적 열세를 뒤엎고 투수력을 바탕으로 업셋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스윕패로 무릎을 꿇었다. 정규 시즌 우승팀과의 전력차도 여실했지만, 한신 스스로 실책을 양산하면서 자멸한 측면이 컸다.
시즌 종료 후 당초 선언대로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직에서 퇴임했다. #
5.5.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9 | 한신 타이거스 | 143 | 69 | 68 | 6 | .504 | 리그 3위 | CS2 탈락 |
2020 | 120 | 60 | 53 | 7 | .531 | 리그 2위 | -[30] | |
2021 | 143 | 77 | 56 | 10 | .579 | 리그 2위 | CS1 탈락 | |
2022 | 143 | 68 | 71 | 4 | .489 | 리그 3위 | CS2 탈락 | |
총계 | 549 | 274 | 248 | 27 | .525 | 1CS1, 2CS2 |
6. 기타
- 은퇴경기 파괴자로 유명한 무라타 슈이치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2010년 9월 30일 야노의 은퇴 세레머니가 열린 코시엔에서의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홈경기에서, 야노는 당시 한신이 앞선 상황일 때 9회 말 2사 상황이 되면 죠지마 켄지와 맞바꿔 포수로 나올 예정이었지만, 이 경기에서 무라타 슈이치가 9회 노아웃 때 역전 3점 홈런을 때리는 바람에 결국 출장이 무산되고 은퇴 세레머니만 하고 말았고, 무라타의 그 홈런이 결승타가 되어 경기도 4 - 3으로 한신이 졌다. 그것도 모자라 한신은 그 경기를 지면서 당시 아슬아슬하게 1위를 지키던 주니치 드래곤즈에 매직넘버 1을 점타시켜 줬고, 끝내 다음날 경기마저 지면서 주니치에게 우승을 내주는 참사를 겪었다.
- 주니치 시절인 1991년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 때는 아직 입단하고 얼마 안 된 시점으로 팀에서는 나카무라 타케시가 확고하게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아직 1군보다 2군에 있는 시간이 더 긴 때였지만 한일 슈퍼게임의 주최가 주니치 신문이었기 때문에 출전을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장종훈이 장외홈런을 때렸던 기후 나가라가와 구장에서 열렸던 5차전에 선발 포수로 출전했었다.
- 2006년 이승엽이 한일통산 400호 홈런을 달성하는 모습을 상대팀 포수로 지켜봤다. 여기에 위에 써져 있는 대로 4강전에서도 선발 포수로 나와서 이승엽이 결승 투런포를 치는 모습을 봐야했다.
- 동안에 미중년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자신보다 열 살 넘게 어린 노미 아츠시와 비교당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는 1993년생 아오야기 코요와 비교당하는 경우까지 있다. 물론 아오야기 코요가 비정상적으로 탈모가 심해서 그렇게 보이는 면도 있지만...
- 감독 취임 기념으로 나온 야노 아키히로 야구인생에 대한 칼럼. 총 48편으로 되어 있다.
[1]
2009년까진
[2]
주니치 시절 출장기회를 늘리기 위해
외야수도 겸업했으나 한신 이적 후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면서 은퇴 때까지
포수로만 계속 뛰었다.
[3]
이번 시즌까지 팀을 맡고 퇴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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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湧き立つ大地に 輝る男 猛虎の要矢野 狙い打ち(피어나는 대지에 빛나는 사나이 맹호의 주축 야노 노려치기다)
[5]
카네모토 토모아키,
사사키 카즈히로,
사이토 타카시,
카도쿠라 켄의 모교다. 사사키와 동기, 카네모토와 사이토는 야노의 1년 후배로(카네모토는 야노, 사사키와 동갑이지만
재수로 입학했기 때문에 야구부는 1년 후배.) 함께 뛰었다.
[6]
1992 시즌 신인왕이자 역사상 최초 무홈런 야수 신인왕이었다. 주니치로 간 그는 유격수였던
이종범을 외야수로 보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정착하는 듯 했지만 끝내는 정착하지 못하였고 주니치의 유격수 자리는
이바타 히로카즈가 들어올 때 까지 랜덤으로 돌아갔다.
[7]
야노가 한신으로 오기 직전 시즌인 1997년에는 일본야구 역사상 희대의 먹튀
마이크 그린웰이 저 등번호의 주인이었다.
[8]
야노 이전에 한신의 주전 포수였던
세키카와 코이치는 나름 정교한 타격을 보유한 교타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당시 역대 최저 도루저지율 신기록(1994년 .125)을 기록할 정도로 수비력에선 크게 평가받지 못했고, 그 뒤를 받치던 야마다 카츠히코는 수비에선 세키카와보단 나은 평가를 받았지만 타율이 1할대를 넘나들 정도의 빈타로 악명높았어서(다만 97년엔 238타석에서 타율 .262 4홈런으로 커리어하이를 마크했다.) 두 명 모두 쓸만한 포수라고 하기엔 다소 애매했다. 세키카와 이전에는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이던
키도 카츠히코가 있었으나 이쪽도 노쇠화 등으로 85년 당시만큼의 존재감을 드러내진 못했고 이외에도
시오타니 가즈히코,
키타가와 히로토시 등 유망주들이 꽤 있었으나 이들은 끝내 주전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백업에만 머물렀다. 이 상황에서 야노가 한신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오타니와 키타가와는 모두 내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으나 끝내 2000~2001 시즌 사이에 저 두명은 각각
오릭스와
킨테츠로 트레이드되었고 그곳에서 뒤늦게나마 포텐을 터트려 주전으로 도약했다.
[9]
다만 야노 본인은 호시노가 한신 감독에 부임한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과거 주니치 시절 때의 트레이드 때문에 "또 버림받겠지" 라고 생각하여 실망했다고 한다.
[10]
이 시즌엔 .279, 29홈런, 147타점을 기록한
이마오카 마코토와 .327, 40홈런, 125타점을 기록한
카네모토 토모아키 덕분에 하위타선에 있던 야노도 혜택을 꽤 보았다.
[11]
이쪽은 정확히 3할.
[12]
일본시리즈 패전팀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선수에게 주는 상.
[13]
여담이지만 이 78타점이
카네모토 토모아키(98타점)에 이은 팀 내 타점 2위이었고, 그것도 중심타선을 맡았던 외국인 타자였던
앤디 시츠(75타점)보다도 많았다!
[14]
4강 한국전에서 선발 포수로 출장했다. 당시 일본 선발 투수는
스기우치 토시야.
[15]
한신 타이거스에서 OB 출신이 감독으로써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건 2차
요시다 요시오 체제의
1985년,
오카다 아키노부 체제의
2005년 뿐이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까지 포함할 경우
와다 유타카도 추가된다. 그마저도 요시다는 팀을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그 뒤 2년만에 역대 최저 시즌 승률을 찍고 최하위로 추락하면서 해임됨과 동시에
2002년까지 계속된 암흑기의 막을 열었고, 1차와 3차 체제에서도 끝이 좋지 못했다.
특히 3차는 아예 5위-최하위로 폭망 오카다는
2005년 일본시리즈에서
33-4라는 굴욕적인 흑역사를 기록했고, 비록 성적은 괜찮았지만 구단의 많은 투자와 기대에 비하면 거기엔 못 미치는 성적을 내온 끝에 결국 2008년에 전반기에
매직넘버를 발동시켰으나 숙적
요미우리에게 13게임차를 뒤집혀서 리그 우승을 내주는 참사를 일으키면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나머지 OB 출신 감독들은 제대로 된 성적을 못 내거나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좋지 않은 모습만을 보였다. 앞에서 언급한 와다 유타카의 경우 일본시리즈까지 가는 과정은 2005년 다음으로 좋았으나(2005년엔 리그 우승팀만 일본시리즈로 직행이었으므로), 일본시리즈에선 소뱅에게 시리즈 스코어 1-4로 박살났다. 것도
니시오카 츠요시의
3피트 라인위반과 함께.
[16]
이때
각동님의 공을 받아본적이 있다.
[17]
신인 중견수
치카모토 코지와 유격수
키나미 세이야 /
이토하라 켄토가 나름 자리를 잡았다.
[18]
6승 2무 10패를 기록하면서 센트럴 및 퍼시픽리그 12개 팀 중 10위에 그쳤다.
[19]
3.1이닝을 막아 평균자책점을 2.58까지 내리면서
규정이닝을 충족시키면서 평균자책점 1위를 히로시마
크리스 존슨(2.59)으로부터 뺏어 왔다.
[20]
정작 안도는 이후 2년 연속 4위에 그치며 3년 만에 쓸쓸히 감독직에 물러났고, 후임 감독으로
요시다 요시오가 취임해
그 해 일본시리즈를 우승했다. 참고로 2000년대
한신 타이거스 프랜차이즈를 부활시킨
호시노 센이치 감독도 부임 첫 해였던 2002년에는 리그 4위(B클래스)에 그쳤다.
[21]
전반기 한신은 팀 실책수 57개로 세리그에서 다른 팀들과 차원이 다른 막장수비를 보여줬다. 신인 유격수
나카노 타쿠무가 13개, 3루수
오오야마 유스케도 7개, 심지어 좌익수
제리 샌즈도 5개나 기록했다. 외야수는 실책을 어지간하면 잘 주지 않는단 걸 감안하면 확실히 수비가 나사빠진 셈. 시즌 최종 실책수는 86개.
[22]
이 때는 덕아웃을 박차고 나가
상대팀의
감독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23]
다만 주니치와의 경기를 이겼다고 해도 그 시점에 야쿠르트가 아직 3경기가 남아 있었고, 그 3경기 중 하나라도 이기는 순간 한신의 우승은 좌절되는 상황이었다.
[24]
그래도 빅보스의 닛폰햄은 시즌 전부터 최하위 후보로 분류되기라도 했다. 실제로도 2021년에 5위였고. 그러나 한신은 2021년에 양대리그 최다승을 획득했던 팀이었다. 그 팀이 저렇게 되었으니 더더욱 팬
한신아재들의 실망이 클 수 밖에 없다.
[25]
0-1로 이기고 있다가 9회초
마키 슈고에게 동점타 허용, 12회초 5실점으로 6-1로 졌다.
한신아재들의 관중석 난동은 덤.
[26]
상대 선발
모리시타 마사토에게 싹쓸이 3루타 포함 4타점이나 허용했고 9-1로 졌다.
[27]
교류전 전체 2위
[28]
이번 시즌 세리그는 상대전적이 극단적으로 벌어진 매치업이 몇 있는데, 히로시마는 야쿠르트에 1승 10패 1무인 대신 요코하마에 11승 1패, 한신에 10승 2무 1패를 거두고 있다. 3위 함락 위기에 빠질 때마다 적절히 만났던 한신과 요코하마 덕분에 3위를 계속 지킬 수 있는 상황. 요코하마는 히로시마에 1승 11패한 것을 주니치에게 8승 1무 1패로 메우고 있다.
[29]
카네모토 토모아키 시절엔 선발 라인업에
후쿠도메 코스케와
이토이 요시오가 거의 고정이었으며 팜내 유망주는 거의 없었다. 야노 재임시기엔 주전 라인업 대부분이 20대가 되었으며, 제일 나이 많은 주전이 포수
우메노 류타로였을 정도.
이토이 요시오는 비슷한 시점에 거의 대타요원으로 전락했으니 제외.
[30]
코로나로 인한 단축시즌이라 클라이맥스 시리즈 미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