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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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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우중 (1967~1999) |
회장 대행 장병주 (1999~2001) |
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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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c479c><colcolor=#fff> 대우 초대 회장
김우중 金宇中 | Kim Woo-cho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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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12월 19일 |
경상북도 대구부
봉산정[1] (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22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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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9년 12월 9일 (향년 82세) |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아주대학교병원 | |
신체 | 170cm, B형 |
본관 | 광산 김씨 (光山 金氏)[3] |
호 | 주산 (宙山) |
종교 | 개신교 → 가톨릭 ( 세례명: 바오로) |
학력 |
경성수송공립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 52회)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 경제학 / 학사) |
가족 |
아버지
김용하, 형
김덕중 배우자 정희자(1940-)[4], 장남 김선재(1967-1990)[5], 차남 김선협(1970-), 삼남 김선용(1975-), 장녀 김선정(1964-) |
병역 | 전시근로역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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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대우그룹 창업주로 한때 정주영, 이병철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재벌 신화 중의 하나이자 이명박과 더불어 샐러리맨 신화의 대명사로 불리던 인물이었다.[6]자본금 500만 원을 20조 원으로 불리고[7] 포춘지에도 대서특필된 기업가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성공 신화는 자그마치 21조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분식회계를 통해 일궈낸 허황된 신화였고 17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추징금을 받았다. 참고로 전두환이 2013년에 납부할 미납 추징금이 1,672억 원, 전두환의 100배이며 사망 당시 국내 최고 갑부였던 삼성그룹의 전 회장인 이건희의 재산은 약 23조 7,100억 원이었다. 즉, 개인 자산으로는 내고 싶어도 절대 낼 수가 없다.
1999년 12월, 중국 옌타이를 시작으로 베트남에서 3년 6개월 동안 거처로 삼다 영국을 경유해 프랑스에서 정부의 도움으로 임시 국적을 만들어 2005년까지 있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인터폴의 압박으로 2005년 6월 14일에 귀국했다. 이후 신장섭 교수 등과 만나 대우 해체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대우는 살 수 있었으나 김대중 정부 관료들이 사실상 기획 해체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부 당국자들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우중 회장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쓰면서 대우를 살리려 했지만 결국 대우는 무너졌다.
2. 생애
2.1. 성장기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도지사를 지낸 아버지 우당 김용하와 어머니 전주 전씨(全州 全氏) 전인항(全仁恒, 1902. 3. 19 ~ 1981. 3. 26) 슬하 6남 1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부친이 대구사범학교(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 김용하가 박정희의 만주 군관학교 입학을 크게 도와준 인연이 있다.경기고등학교 52회 졸업동기생으로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고건 전 대한민국 국무총리,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회장, 배우 신구 등이 있다. 학창시절 선도부장이었으며 이종찬과는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 주먹도 잘 쓰지만 배짱이 남달랐다고.
6.25의 혼란기와 본인의 방황속에 1년을 유급해 195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다.
2.2.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이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서 바이어로 근무하다 1967년 독립해 자본금 500만원으로[8] 대우실업을 창립했다. 창업 초기에는 과거 자신이 바이어 일을 하던 동남아시아의 의류 원단 및 자재 공급 관련 사업을 주로 하는 그저 그런 중소기업이었지만, 창업 이후 유창한 영어 실력과,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때 돈을 갚는 독특한 자금 동원 능력,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맥[9]과 경기고 인맥 등을 잘 활용해 창업 5년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다. 이후에는 사업 범위를 공격적으로 확장했는데, 특히 중동붐으로 엄청난 대박을 터트려서 불과 10여년만에 대한전선, 동명목재, 쌍용그룹 등 여타 쟁쟁한 기업들을 제치고 현대그룹, 삼성그룹, 럭키그룹에 이은 4대 재벌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전두환, 손영길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경기고등학교 동기생 이종찬이 중앙정보부에 근무중인 덕분에 큰 화를 면하였다.
이후 신군부의 비호를 받아 동양증권,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 대우전자),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며 더욱 몸집을 불렸다. 기사1 기사2 특히 자동차 회사 인수 후에는 독일 만( MAN) 사와의 기술 제휴로[10] 잔고장이 적은 MAN 엔진을 개발, 이전까지 우리나라 운수업계의 골칫거리였던 차량 정비 관련 비용을 크게 줄이는데 기여하게 된다.
또한 각 영업소별로 '자동차 판매 후 관리'(A/S) 비용이 제각각으로 바가지를 쓰는 피해를 줄이고자, "영수증 환불제"를 실시한다. 내용인즉 수리비용을 많이 덤터기 쓴 경우 => 영수증만 확실히 가져오면 그 비용 그대로 환불해드리고, 바가지 씌운 차액은 해당 영업소에 청구한다는 것. 이 정책을 실시한 후 대우차 소비자들의 수리비 부담이 줄어 고객 충성도를 늘리는 효과까지 볼 수 있었다는 후문.
이후 1980년대 중 ~ 후반부터는 동유럽의 민주화, 시장 개방 바람 등에 편승해 현지 진출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1990년대에는 세계 경영을 주창하며 구 공산권 국가에 진출해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대우의 수입차 생산 거점기지였던 폴란드는 지방 공무원의 관용차가 대우차 구종이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까지 있다고 한다.
다른 책으로는 도올 김용옥[11]이 대우측에서 모든 경비를 제공하여 김우중의 출장에 동행하고 난 후 쓴 기행문인 "대화"가 있다. 이 저서에서 김용옥은 상당히 김우중을 좋게 서술했는데, 실제로 당시 김우중은 다른 재벌 회장에 비하면 매우 이미지가 좋았다. 그러나 IMF 이후에 김우중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 책은 김용옥의 흑역사가 되었다. 다만 그룹 이미지 개선 작업의 일환으로 보기에는 이 책은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소명의식으로 기업을 하며 대우는 비생산적인 서비스업은 절대로 손 안대고, 자기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실제 김우중은 자신을 전문 경영인이라고 자처하고, 대우 사태 직후에도 2~3년 안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없이 물러날 것을 채권단에 약속했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의미로 사실이 되었다(...).
이 책은 대우그룹의 해체가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방영한것으로 보이는 KBS의 한 시사풍자 프로그램의 가공의 패러디 베스트셀러 서적을 소개하는 꼭지에서 <세계는 넓고 꾼 돈은 많다; 내 사랑하는 채권자들에게>(...)라는 제목으로 패러디되었다.[12]
이명박 대통령과 더불어 대한민국 샐러리맨의 신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작 자체를 샐러리맨으로 시작해서 재벌 총수까지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명박은 현대건설이라는 한 기업의 정점이 되었을 뿐 최상부에는 왕회장이 있었던 것에 비해 김우중은 자신이 창업하고 최상부에 있었으니 오히려 정주영에 가까운 인물이다. 엄청난 워커홀릭인 만큼 본인의 노력과 집안 배경, 인맥, 언플 등 자신이 가진 수단을 적극 활용하여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다고 보면 된다.
2.3. 패착과 대우 부도
독보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뛰어난 수준의 대인관계 능력과 돈 될만한 무언가를 찾는 상업적 안목, 근면함으로 대재벌의 반열에 올랐지만, 김우중 회장은 기술은 사서 쓰면 된다며 자체적인 R&D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당시 대우조선공업 기술연구소장이 기술 개발을 중시해야한다고 했으나, '기술이라는 건 필요할 때 밖에서 사오면 되는 건데 왜 쭈그려 앉아서 기술 개발이나 하냐'며 반박했다. 물론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기업이 무섭게 성장하며 기술을 사오기가 쉽지 않아지자, 1989년부터는 김우중 본인도 연구 개발의 중요성을 어느정도 깨달았기 때문에 전자 부문에서 브라운관용 고강성 CRT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과, 영국 워딩 기술연구소, 독일 뮌헨 연구소를 인수해 독자 플랫폼을 개발하는 등의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13] 자동차도 자체엔진도 개발하고 부평 연구소를 세워 기술 개발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하지만 개발의 중요성을 너무 늦게 알은 탓에 타 경쟁 기업들도 비슷한 시기에 경쟁력 있는 제품을 꾸준히 시연하고, 결정적으로 1997년 IMF 국제금융사태가 발생하면서 은행 돈을 빌려 큰 판을 벌이는 대우의 경영 스타일은 발목을 잡게 되었고, 김우중 1인 독점 시스템 및 학연 중심 인사 시스템 등 '정실주의'도 문제가 되었다.[14] 더군다나 군정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역대 정부와의 유착으로 인해 1993년 율곡비리, 1994년 전 한전 사장 뇌물수수 사건,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에서 뇌물수수 혐의로 각각 법정에 서기도 했다.
김 회장은 IMF시절 쌍용자동차를 추가로 인수하고[15][16] 폴란드, 베트남 등지의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대우 상표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공격적인 경영을 하였다. 하지만, 팔리지 않는 제품을 해외 법인으로 밀어내 수출 실적으로 잡고 당시 화두로 떠오른 구조조정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였다. 현대, 삼성에서도 부채율 감소에 힘을 기울이던 상황이었지만, 대우그룹은 일본 증권가나 외국 평가 기관의 경고가 사전에 있었음에도,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던 것. 실제로 구조조정 계획을 초과 달성한
그렇지만 대우가 청산 회사를 세우고 나서도 한동안 기업 청산을 못한 데에는, 상기한 팔리지 않는 제품들과 정부에서 빚으로 본 사업 건들이 뒤늦게 빛을 봐 그것들의 흑자가 청산법인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등 장기적인 성과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한다. 일례로 2001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레간자와 라노스가 합리적인 가격대와 성능을 갖춘 차량으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한때 북미 고객만족도 평가 부문에서 현대・ 기아를 제치고 BMW의 뒤를 이어 4위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잠재력 좋은 학생도 중요한 시험대(위기)를 통과하고 극복해야 비로소 세간의 인정을 받는 법인데, 몸집만 불리기에 성공하며 LG그룹과 삼성그룹까지 앞선 2위 재벌이 된 대우의 내실은 부실해졌고, 결국 1999년 8월 26일, 어음 만기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공을 들이던 대우자동차 또한 부도 이후 2000년에 북미와 유럽에서 최대 실적을 거두며 좋은 수익을 거두었음에도 결국 2002년에 청산되었다.[17]
동유럽을 비롯한 제3세계시장은 소련 붕괴 직전~직후부터 개척에 들어가 2010년대에도 현지 주민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호감을 산 대우를 그리워하는 시장 반응이 있었을 만큼 그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중국에서는 절경으로 알려진 구이린(桂林) 지역에 대규모 호텔을 건립하는 한편, 탁월한 접근력[18] 및 홍보 능력으로 현지의 관민(官民)들과 원활한 관계를 형성했지만, 모기업인 대우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GM의 브랜드 일원화 방침으로 대우 브랜드의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19]
그룹 해체 이후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 대출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자 베트남으로 도주하였고 인터폴에 수배되었다. 이후 5년 8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 인천국제공항에 나온 노동자들과 대우 피해자들이 몰려와서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하였다. 한때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해외 도피자 명의로 공개수배를 받기도 하였다.[20]
귀국 이후 구속기소되어 2006년, 재판에서 사기, 재산 국외도피 등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의 형을 선고받았으나 2007년 말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되어 풀려나왔다. 참고로 추징금이 전두환의 100배 가까이 된다. 물론 사면은 사면이지, 추징금은 계속 내야 한다. 전두환의 추징금이 화제가 된 2013년에는 김우중 추징금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전두환의 경우 은닉 재산이 있는 것이 너무나도 뻔했기에 추징금 환수가 빠르게 진행되었지만[21], 김우중의 경우 17조 원을 그의 전재산을 털어도 나오지 않을 돈임이 뻔해서인지 금방 묻혔다. 결국 2019년 12월 9일에 사망함에 따라 추징금 환수도 더이상 불가능해졌다.[22] 그러나 검찰은 김우중와 함께 공범으로 재판받은 대우그룹 전 임원들에게서 추징금을 계속 받아내겠다고 밝혔다. #
2000년 10월호 <월간중앙>에서 김우중 전 회장의 프랑스 니스 은둔사실이 특종 보도되었고, 현재도 김우중 개인의 세금 체납액이 상당하다고 한다. 아들이 유령 회사를 통해 600억원대 해외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도 떴다.
2.4. 사망
2018년부터 알츠하이머로 투병하며 본인이 발전시킨 아주대병원에서 투병하다가[23] 2019년 12월 9일 밤, 숙환으로 사망했다. 관련 기사 83세 생일이 고작 열흘 앞이었다. 주요 언론사들에서 건강 악화를 이유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보도를 한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유언은 따로 없었다고 하며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는 천주교식으로 치러지며 12일 발인이 진행되었다. 장례식 당시 수많은 정치인들과 수많은 기업인들이 조문을 왔지만, 막상 김우중의 유족 측은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내 주는 부조금을 단 한 푼도 받지 않은 것이 소소하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9년 12월 12일, 자신의 생애를 바친 곳 중 하나인 아주대학교에서 영결식을 진행하고, 고인의 모친인 전인항 여사의 묘소가 있는 충남 태안군 선산에 매장되었다. 김우중이 후원하고 운영한 아주대학교에서는 그를 기리며 아주대학교의 본관인 율곡관 앞에 그의 1주기인 2020년 12월 9일에 동상을 제작, 공개하였다. 그 후 2021년 5월 7일에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도 그를 기리며 그가 후원해 건립한 건물인 연세대학교 서울캠퍼스의 대우관 1층 출입구에 흉상이 세워졌다.
3. 후일담
2014년 8월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를 출간하고 출판기념회에 잠깐 참석해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악연이 대우를 해체한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일부에서 제기하는 김우중 회장이 대북 사업에 소극적이어서 DJ 정부에서 피해를 봤다는 음모론에 대해서는, 자신이 김일성, 김정일을 수십 번 만나서 독자적 커넥션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밝혀 부정하였다. 전반적인 인터뷰의 요지는, "대우라는 기업의 낙관적 전망을 통해, 결국 투자나 추가 대출을 설득"하는 CEO의 그것이다.[24]
몰락 후에는 추징금을 피해 사실상 재산의 대부분을 가족-친척들에게 분산시켜 놓은 상태다. 아들들에게는 유럽에서부터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는 대규모 골프장 운영을 맡겨놓은 상태며, 아내와 딸은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있는 아트선재센터의 운영권을 맡겨놓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닉 재산 추징을 위한 전두환법이 나오면서 김우중 전 회장의 재산 추징도 가능한 게 아닌가하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전두환법은 어디까지나 비리 공무원을 위한 추징법인지라 김우중 전 회장은 법의 적용을 벗어났다.
사실상 완전히 대우그룹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구 대우그룹 계열사들과는 끈끈한 커넥션을 보유 중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계열사 대우개발이 소유 중이던 호텔 서울힐튼을 대우그룹이 정리하는 과정에서 김우중 전 회장과 임대차 계약을 맺었는데, 꼭대기 최상층 집무실을 25년 동안 1년에 12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계약을 맺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기 때문이다.[25]
사망 전까지 주로 회고록 등의 출판과 경영자 교육을 하며 베트남을 중심으로 주로 동남아권에서 활동했는데, 국내에서는 수입이 발생하면 바로 추징이 진행되므로 사망 전까지 조국에서 사업을 못했다.
참고로 미국에서 김우중급의 분식회계를 지시한 엔론 전 회장 케네스 레이는 24년 형을 받았으나, 복역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6] 이 사람은 매출액만 터무니없이 부풀렸을 뿐 순이익을 부풀린 건 단 20%다. 아예 손해를 이익으로 부풀린 김우중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케네스 레이는 사실 바지 사장 수준에 가까웠고 실제로는 그 밑의 CEO가 벌인 일이다. 무관심했던 케네스의 문제도 크지만 실제로 죄를 저지른 CEO는 더 큰 잘못이다. 당연히 이쪽이 더 많이 떼어먹었고 이쪽도 케네스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3.1. 정부가 대출을 도와줬더라면?
사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드물다는 말이 있듯, IMF 사태 전까지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분식회계를 저지른 의혹을 받는 건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절세 또는 금융 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 고로, 그 시절 분식회계는 대기업들의 관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27]하지만, 1998년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에서 이헌재 금감원장을 통해 기업 부채율을 200%로 감축하도록 30대 그룹에 강공 드라이브를 건 것은, 첫째,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같이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기세를 보이는 30대 그룹도 평균 부채율이 387%로, 1997년부터 1998년 2년 동안 재계 100위귄부터 상위 30대 기업까지 매월 도산 소식이 들려오는 현실이었다.
부채율 300% 초반의 거평그룹 임원이 부도 6개월 전까지 "우리는 평균보다 낮은 양호 수준"이라고 인터뷰했을 만큼, 기업인들이 은행 빚의 무서움보다는[28], 과감한 투자에 시선을 돌려 앞만 보고 달린 후유증이 경제 전반을 덮은 상태였던 것.[29] 둘째, 처음부터 예외를 두면 추후 빠져나갈 수 있는 허점으로 악용될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물론 "계열사 업종 고려 없이 200%로 감축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자동차, 조선업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부채율 200% 유지는 실현할 수 없다는 반발이 있었지만, 이 역시 이헌재 금감위장이 악역을 맡았을 때 이미 얘기가 나와, 이 회사 사정, 저 회사 사정 감안하지 않고 예외 없이 30대 그룹 구조조정안 일괄 제출이 통보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떤 기업은 추가 대출 특혜를 받고, 또 다른 기업은 대출을 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준다면, 30대 기업이 시행을 전제로 제출한 구조조정안은 휴지조각이 될 뿐이다.
그리고, "구조조정 작업에 소홀히 하며, 오히려 막대한 부채를 빌미로 배짱을 보였다." 고 말한 강봉균 전 경제 부총리, 과거 대우통신 상무 직위로 일하던 시절 한국반도체 인수 실패로 계약금 회수에 몰두하다 자진 퇴사한 후배 이헌재[30]가 한국신용평가 사장으로 취임한 후 당시 다른 5대 그룹보다 재무 평가에서 계속 불리하게 레이팅 되었다는 대우맨의 증언,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국민의 정부 경제 관료들에게 반기를 들며 밉보여 꼬투리를 잡혔다는 의견, 투자신탁기관에 MMF 상품을 맡겼던 투자자분들의[31] 의견 등이 있다. 여담으로 이헌재는 국민의 정부에서 금융감독원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단, 이중 이헌재와는 퇴사시절부터 악연이 있었다고는 한다.
결정적으로, 대우그룹의 부채가 대한민국 정부의 예산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규모였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어도 도저히 손을 대지 못한 것에 더 가깝다. 다만 반론으로는 같은시기 34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현대그룹이 있다. 그러나 10조 지원을 요구했으나 고작 4조를 지원받았던 대우와 달리 34조를 지원받고도 왕자의 난으로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를 날려먹은 현대그룹의 케이스를 봤을때,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는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적어도 대우보다는 구조조정에 집중했다.
- 김우중 회장 및 조선일보의 주장 : 수출을 조금만 더 하면 흑자를 내 빚을 갚을 수 있으니 수출을 도와달라는(=무역금융을 완화해 달라는) 얘기를 강봉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수석이 이제 시장경제 중심이기에 정부가 나서서 도와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한 일화를 들며 대우그룹이 김대중 정부의 경제관료들에게 미움을 샀다는 주장을 펼쳤다.
- 반론 : 그러나 DJ는 80년대에 김우중의 여당2 : 야당1 자금지원의 수혜를 입은 사람이다. 1987년 통일민주당 분당과 삼당합당의 여파로 호남을 제외한 지방의 정치조직이 지리멸렬하게 된 상황[32]에서, 가뭄의 단비와 같은 자금지원을 해준 기업인을 정권 차원에서 미워하고 무너뜨릴 이유가 전혀 없었고, 대우전자 사장인 배순훈과 형인 김덕중을 장관직에까지 올려놓았을 정도였다. 일례로, 김대중의 야당 총재 시절 신문에 연재되는 무협지면까지 빌려 교묘하게 DJ를 깎아내리고 92년과 9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이회창을 노골적으로 밀어주던 중앙일보와[33] 그 상관격인 삼성그룹에게도 대통령 측근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34] 여소야대 국면, 당시 경제적 상황을 감안하면, 아무리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해도 자신을 기술자로 여겼던 이헌재의 행동 반경이 결정적인 보복 수준에 이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 본디 이헌재는 김우중과는 사적으로 악연이나 김우중과 매우 친밀했던 김종필의 가신이었다.[35]
3.2. 만약 99년 위기를 넘겼다면?
비록, 호시절에 다른 5대 기업보다 기술 개발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긴 했지만,- 동유럽 및 동남아시아 시장을 선발적으로 개척한 상태였던 것,
- 조선소와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며 축적된 고급 인력[36]
등을 감안할 때, IMF 시기에 있었던 위기를 단지 신정부의 군기 잡기로만 치부하지 않고, 좀 더 심각하게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1999년의 대우그룹 사태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대우그룹이 자체 회생방안을 99년 1/4분기가 아닌, 98년 1/4분기에 발표했더라면, 진통을 겪었을지언정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오히려 도약을 이뤄낼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결정적으로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3조원대 규모의 어음부도 처리를 넘겼으면, 1999년 12월까지는 당해 7월에 시행한 3차 구조조정 안으로 6개월 이상의 채무변제 연장을 받았기에 비교적 1999년 8월까지의 상황과는 다르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후 대우의 청산법인이 2000년부터 엄청난 흑자를 기록해 청산을 고민할 정도였고, 주력 계열사들이 워크아웃을 3-5년만에 모범적으로 졸업하며 대우가 구조조정에만 더 기민하게 움직였더라면 사세는 줄었을지언정 재기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대우그룹이 외환위기 당시에 위기를 잘 타개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현대를 제치고 삼성과 재계 서열 1~2위를 다투는 대기업이 되었을 것이며,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휘청거렸다 해도 재계 4위 안의 재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이 있다. 또한 LG나 삼성에게 전자 쪽이 밀렸다 하더라도 다른 사업인 국방이나 자동차 생산 쪽에서는 한화, 현대와 경쟁하며, 한국경제에 큰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1999년 당시 대우가 80조원대 가량의 대내외 부채[37]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될 경우에만 해당되는 '망상적인 예측' 에 불과하다. 부채 규모가 한 기업이나 당시 IMF 외환위기 체제하에서 국가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38] 결국 무조건적인 대출로 규모만 늘려서 사업만 확장하다 나라의 경제가 휘청이고 자신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서 망한 것이니, 어찌 보면 자업자득인 셈. 다만 위 단락의 주장과 링크의 당시 기사를 보면 사세는 줄더라도 단기 유동성 차입이 많았고, 그 이외 채무들은 2000년부터 대우의 자구적인 노력으로 상환이 대부분 가능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기사
미국 GM은 쉐보레 통합 이전 GM 대우 시절 경영 정상화에 대한 자금 지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다가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방관하는 모습을 보여 대우자동차는 GM에게 단물만 빨리고 "제 2의 쌍용차"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제기된 바 있었다. 실제로 대침체 당시 미국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Government Motors라 불리기까지 했던 제너럴 모터스의 위기탈출 1등 공신도 바로 대우가 보유한 소 형 차 기 술이었지만[39], 그 직원들은...
전 세계 6개 연구소, 16개 생산기지, 19개 현지법인, 78개 해외판매망을 거느렸던 대우자동차가 GM의 생산기지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대우는 r&d를 소홀히하고 기술은 사오면 된다식의 마인드로 운영해봤던지라 imf 이후에 살아남았다고해도 회사 자체가 현재의 쌍용자동차의 수순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세계 6개의 연구소, GM이 대우자동차 소형차 기술로 위기를 넘겼다라는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우중은 1980년대 후반부터는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엄청난 투자를 했다. 사실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1992년 GM과의 일시적 결별 이전에는 자체 기술 개발을 안한게 아니라 못한 것이었는데, 당시 지분의 절반을 가지고 있던 GM이 대우자동차를 자신들의 생산기지 정도로 계속 종속시켜야 했기 때문에 대우자동차의 자체기술 개발을 계속 반대하고 저지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GM과 결별하고 자체기술을 축적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 비용이 스노우볼처럼 굴러서 커진데다, IMF 외환위기 이후 높은 이율로 인해 빚은 폭증했으니.
관련 기사(김우일 前대우그룹 구조본부장 대행 단독 인터뷰):
기사 1
기사 2
4. 어록
칭찬을 하니까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되고 그러면 더 큰 상을 주고 또 칭찬을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공신화를 써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칭찬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좋은 동기부여라고 생각합니다.
2016년 10월 11일, 2017년도 GYBM 연수생과의 대화”
2016년 10월 11일, 2017년도 GYBM 연수생과의 대화”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저나 여러분이 함께 추구했던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시장 개척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고 매우 중요한 비결이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 그 자체가 경쟁력이었습니다. 그러니 미래에도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사람을 더 많이 키우고 이를 통해 발전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과 국가가 항상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015년 10월 29일, 세계한인경제인대회 개회식 특별강연”
2015년 10월 29일, 세계한인경제인대회 개회식 특별강연”
평생동안 앞만보고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국가와 미래세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였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과거보다 나아진 미래를 만들어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실수가 미래에 다시 반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014년, 제45회 대우특별포럼 인사말
2014년, 제45회 대우특별포럼 인사말
기아-아시아자동차가 현대에 낙찰된 것은 매우 잘 된 일이다. 자동차 산업이 2사 체제로 재편되면 양사가 과당경쟁을 지양하며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업계가 이원화하면 비용절감을 위해 (현대와) 부품의 공동개발 및 공동이용도 추진하겠다.
1998년 10월 20일, 기아-아시아차 인수전에 현대그룹이 낙찰된 직후 관련 인터뷰 中 #[40]
1998년 10월 20일, 기아-아시아차 인수전에 현대그룹이 낙찰된 직후 관련 인터뷰 中 #[40]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우리 세대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했습니다. 무엇이 있었습니까? 선생이 있었습니까? 돈이 있었습니까? 기술이 있었습니까? 그 속에서도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은 다 있어요. 지금은 없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주저앉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정신만 차리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1998년 4월 21일, 재외공관장회의 경제연찬회, “IMF 금융위기와 해외공관장의 역할”
1998년 4월 21일, 재외공관장회의 경제연찬회, “IMF 금융위기와 해외공관장의 역할”
삼성은 남에게 피해를 안주고 자신이 충분히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남을 죽이는 형태는 아무리 자유경제 아래에서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공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1997년 9월 9일,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에 관한 생각. #
1997년 9월 9일,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에 관한 생각. #
김회장은 한국자동차 산업을 위해 힘쓴 분이다. 그런식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안된다. 기아가 잘못된 것은 대한중기를 인수했을 때부터다. 자동차만 열심히 했으면 됐는데
기아특수강, 기산을 합치는 과정에서 무리가 생겼다.
1997년 9월 9일, 기아그룹 사태와 김선홍 회장의 퇴진 문제에 관한 인터뷰 中. #
1997년 9월 9일, 기아그룹 사태와 김선홍 회장의 퇴진 문제에 관한 인터뷰 中. #
인간의 능력과 힘은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1996년 3월 31일, 세계경영 국제 대토론회
1996년 3월 31일, 세계경영 국제 대토론회
저는 총체적인 협력체가 무너졌을 때 오는 것, 그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독일이 통일됐을 때 비용이 얼마가 들어갔느니 어쨌느니 하고 떠들었지만, 만약 독일이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국제적인 부담이 오히려 커졌을 겁니다. 독일 입장에서 보면 외국에 원조해야 할 것이 엄청나게 세이빙(saving)된 겁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동유럽 시장이 넓어져 거기서 벌어들인 게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와 북한 사이의 문제도, 통일이 되면 좋겠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걱정하는데, 우리 세대로 봐서는 할 수 있으면 빨리 해야 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해야 됩니다. 지금과 같은 고통을 후세들에게 넘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1995년 7월 4일, 외교안보연구원 초청특강, “세계경영으로 본 경제외교의 과제”
1995년 7월 4일, 외교안보연구원 초청특강, “세계경영으로 본 경제외교의 과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지, 머리가 쉬고 있으면 절대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에 가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바다를 보고 있으니까 아이디어가 척 걸렸다” 그러는데, 제 경험에 의하면 몸은 쉬고 있어도 머리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아이디어가 안 나옵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1994년 2월 5일, 내무부 공무원 연수교육 초청특강 中
1994년 2월 5일, 내무부 공무원 연수교육 초청특강 中
기업은 항상 가능성을 추구하는 창조의 집단이었습니다. 기업은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인류의 번영에 기여해 왔으며, 때로는 외부환경의 변화를 수용하여 더욱 큰 발전을 이룩하는 개척과 도전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길게 회고해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민간 차원에서 기업들의 교류와 협력이 이념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세계평화의 길잡이가 되었던 사례들을 얼마든지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1993년 9월 21일, 비즈니스위크 주관 아시아 최고경영자 심포지움 기조연설 中
1993년 9월 21일, 비즈니스위크 주관 아시아 최고경영자 심포지움 기조연설 中
압록강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까 다리가 두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부서져 복구가 안 된 상태로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가보고 싶었던 마지막 남은 시장이 여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1976년 수단을 시발점으로 해서 많은 나라를 개척하고 이제 마지막 남은 시장을 개척하러 들어간다는 기분이 저에게 굉장히 큰 의의를 느끼게 했습니다.
1992년 1월 31일, 신문편집인협회 금요조찬회 초청강연 中
1992년 1월 31일, 신문편집인협회 금요조찬회 초청강연 中
여러분 알다시피 우리 역사를 보면 한 번도 해외로 진출해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경제활동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큰 변화입니다. 밖에 나가 경쟁해서 이기고 여기서 자신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서양 사람들이 좀 나은 것 같이 느꼈는데 막상 해보니까 서양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게 없다 이겁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물론 많은 노력이 숨어 있지만 아무튼 우리가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낸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범을 보이게 되니까 모든 사람들이 해보려고 나서기 시작했고 자신을 갖게 되고 또 나가서 성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91년 7월 23일, 신입사원과의 대화 中
1991년 7월 23일, 신입사원과의 대화 中
꿈이라고 하는 것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꿈을 꾸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꿈을 성취하게 되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이란 성취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전도 해보지 않은 채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꿈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꾸는 것입니다.
1991년 1월 1일, YPO 서울지회 초청강연 中
1991년 1월 1일, YPO 서울지회 초청강연 中
한국을 포함한 ‘네 마리 용’이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성장과 발전이 국제적으로 ‘위협적인 수준’에 도달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성장과 발전 속도가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협적인 속도’였기 때문입니다.
1990년 2월 22일, 미국 MIT 초청연설 中
1990년 2월 22일, 미국 MIT 초청연설 中
오늘날 같은 경쟁사회에서 현상 유지란 곧 퇴보를 의미합니다.
1990년 1월 3일, 그룹 신년하례식 신년사 中
1990년 1월 3일, 그룹 신년하례식 신년사 中
내 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 나보다 남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6·25 때는 집안을 먹여 살렸고, 기업도 나보다는 남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피곤하고 죽을 지경인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무슨 강박관념,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 눈에 안약을 넣으면서 일어나 출근합니다. 출근 때 직원들 쏟아져 들어오는 것 보면 가슴이 막힐만큼 답답합니다. 직원이 월급쟁이만 8만 명, 일용근로자까지 합치면 자그마치 12만 명입니다 식구들까지 계산해 보면 50만 명이 나한테 매달려 있구나 하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 사람들이 나 믿고 회사 믿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억누를 때가 많아요. 그래서 뛰고 또 뛰는 거죠.
1985년 5월 1일, 월간조선 5월호 인터뷰 中
1985년 5월 1일, 월간조선 5월호 인터뷰 中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합니다. 장사꾼도 자기 분야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분야를 커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과 달라서 지금은 장사를 초월한 곳에서 사업이 이루어집니다.
1985년 4월 8일, 신입사원 교육 회장과의 대화 中
1985년 4월 8일, 신입사원 교육 회장과의 대화 中
흔히 “기업 하는 사람의 목표는 이윤 추구다”라고 하지만 기업의 목표는 이윤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윤은 기업가의 창조·도전에 대한 대가일 뿐입니다.
1985년 1월 16일, 대한교육연합회 연구대회 특강 中
1985년 1월 16일, 대한교육연합회 연구대회 특강 中
나는 1년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지냅니다. 해외에 나가면 항상 느끼는 것이 나라가 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라가 강하지 않으면 차별대우를 받고 사업도 아주 불리한 여건에서 하게 됩니다. 나라가 강하지 않으면 기업도 생존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1984년 4월 8일, KBS 김우중 회장과 100명의 대학생 자유토론 中
1984년 4월 8일, KBS 김우중 회장과 100명의 대학생 자유토론 中
역시 리더라는 것은 자기희생을 할 줄 모르고는 리더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 대해서도 정말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최고 점수를 주어서 결정하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살 줄 모르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할 것 다하고 어떻게 리더가 되겠습니까. 물론 참모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장, 차장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고의 리더는 자기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 때만 조직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1984년 2월 27일, 관훈토론회 中
1984년 2월 27일, 관훈토론회 中
비즈니스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히 변화가 있기 때문에 재미가 있어요. 사람들이 골프나 운동 등 여러 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일하는 것도 하나의 취미로 생각하면 고달프거나 하질 않고 재미있습니다.
1977년 1월 1일, 동아방송 신년특별대담 中
1977년 1월 1일, 동아방송 신년특별대담 中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는 인재가 귀하고 자원이 없는 땅에서는 우수한 인재가 배출됩니다. 이는 하느님의 공평한 섭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수한 인재를 많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좋은 두뇌로 열심히 노력하여 오늘의 서구처럼 풍요한 사회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도록 합시다.
1975년 8월 1일, 간부사원 교육 中
1975년 8월 1일, 간부사원 교육 中
5.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대우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관련 일화
6.1. 기업인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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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은 전용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인식
그 크기의 회사 회장에 전용기가 사치로 보였을 것 같진 않다마는등의 문제로 체코의 어느 공항 어딘가에 있다가 유럽 다닐 때만 사용했다고. 사실 매번 전용기를 타고 날아가기에는 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전용기를 굴릴 여력 자체는 되었어도 한번 굴리는데 억 단위는 우습게 깨지는 전용기를 탈바에 약간 불편해도 일반비행기 1등석을 타는것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에 직항편이 없거나 긴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용기를 쓰지 않았던것이었다.
- 극성 축빠였다. 사원 체육대회에서 축구 경기가 열리면 선수로 몸소 출전해 풀타임을 뛰었다고 하고, 축구단 창단을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여자 실업배구단까지 해체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만든 부산 대우 로얄즈는 상당히 잘 나갔다. 현재 센텀시티 부지에 대우 로얄즈의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계획도 세워놨을 정도였다.[41] 삼성이나 럭키금성이 야구 단을 창단하자 우리도 야구단을 창단하자는 간부의 제안을 즉각 거부할 정도였다. 이런 축구 사랑으로 아낌없이 축구에 투자하니 대한축구협회장도 역임했을 정도다. 다만 대한축구협회에서 물러난 계기가 좀 거시기한데, 김우중이 축구협회에 자금줄을 대 주면 당시 실무 진이 다 떼먹고 일처리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었다.[42] 이걸 보고 분개한 김우중이 "내가 두 번 다시 족쟁이들과 상종하면 인간이 아니라 축생이오"라는 명언을 남기고 축구협회 일선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그리고 2023년 대한축구협회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사건이 터지며 이 발언이 재조명 되고 있다. 안정환의 이탈리아 진출도 김우중이 힘을 실어줘서 가능했다.
- 광산 김씨라는 것 외에는 광주와 특별한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등경기장 건립 기금으로 향토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보다 많은 액수를 출연해 지역사회에서 큰 화제를 모은 적 있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활약으로 호남에서 야구붐이 일면서, 홈구장 건립에 1등으로 기여한 대우그룹의 이름이 호남 야구팬들에게 자연스레 인식됨에 따라 막대한 홍보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43]
- 공무원과 동일하게 노조를 극렬히 반대하는 삼성그룹& 현대그룹 등과는 달리,[44] 동시대 재벌들과 비교하면 노조에 대해 진보적이고 관대했다고 한다. 대우가 FSO를 인수했을 때 조건이 3년 동안 자의적 퇴사를 제외한 모든 사원들의 안정적 고용이었다. 덧붙여서, 이에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 현재 인천시 부평구 을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과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사태 때 노조[45]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공장 노동자들 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홍영표 의원과 노민추 소속 노조 중심 인물들을 시청에 불러다가 즉석에서 직접 임금 협상을 했다고. 그 결과 노조 측에서 요구한 임금 인상률 18%까지 아니어도 16.5%까지 인상시켜주었고, 노조와 노동자들의 복리후생을 철저히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진보 노동운동에 참여한 홍영표 의원을 당시 경찰에서 예의주시하며 체포할 수 있는 것을 알아채 그를 자신의 자동차 트렁크에 숨겨 경찰이 둘러싼 시청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영표 의원은 그 후 대우자동차 공장의 지하 프레스실에 숨어 프레스실을 점거하고 대정부 농성을 계획하다 노동자로 위장한 경찰에 잡혀 결국 체포됐다고 한다(...). 그 후 그의 대범함을 높게 산 김우중 회장은 그가 대우자동차판매에 복직할 때 영국 시장에 고위직으로 파견시켜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룹 차원에서 나이가 들어서 운동을 접고 취업을 하려던 운동권 인재들을 대거 특채하기도 했다. 김우중의 논리로는 "그 사람들 자기 영달을 위해 싸운 게 아니라 방향은 다르지만 공익을 위해 싸운 거 아니냐"는 것. 사실 운동권에는 명문대 출신들도 많고, 조직관리나 선전 등의 노하우도 있기 때문에 김우중은 그룹의 이미지도 개선하면서 좋은 인재를 쉽게 획득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분규 진압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고, 1984~1985년 대우어패럴 노조 활동 탄압[46]이나, 1987년 8월 대우조선 파업 강제 진압 및 이석규 노동자 사망 사건 등의 노동운동 해산 충돌 등의 사례가 있었다. IMF로 인해서 잘 알려지지 않기도 했으나, 대우자동차 노조 측에서 1997년에도 파업을 잠시 진행하기도 한 바 있었다. 한편으로는 여느 재벌 회장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입장에선 비판 일변도였다는 시각도 적지는 않은 편이다.[47] 특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뜨던 1989년, 당시 수배 중인 노동시인 박노해가 <월간 노동해방문학> 9월호(통권 5호)에 원고 400매 분량의 논평(오픈아카이브 기준 p261)을 실어 이 책과 김우중의 철학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 논평은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란 책으로도 나왔다( 오마이뉴스에 소개된 내용 일부). 다만 박노해도 출소 이후 새천년 NHK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알려지면서 이중잣대적인 행보를 보이고 만다는 점에서는 비판이 퇴색되기도 했다.
- 1990년대 초반에 북한의 " 김일성" 부자와 면담 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임동원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따르면, 김일성이 우리나라 관료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우중 회장과 같은 사람 5명만 있으면 그 나라가 일어설 수 있다."고 상찬을 했을 만큼 마음에 들어했다는 후문.
- 경영 스타일은 친화력 9단 + 일 중독 + 독불장군형으로, 대우그룹의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한창 때는 비서진도 일부러 체력이 좋은 남자 비서들을 골라서 선발했는데도 비서들이 김우중의 스케줄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몇달에 한 번씩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48] 식성도 이를 따랐는지 빨리 준비하고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이나 설렁탕을 즐겼다고. 하지만, 이렇게 상부에서 중요 정보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나보니 그룹 실상조차 제대로 모르더라."( 강봉균 당시 경제 수석비서관)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협력사였던 GM의 밥 루츠 부회장도 이 점을 비판하였지만[49], 당시 GM은 법정관리에 들어간 대우자동차와 지분 매각을 놓고 협상 중이었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비판적인 정보를 입수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을 지나치게 믿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것보다는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했던[50] 연유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김대중을 믿었던 건 군사정권 시절, 신문에 이름 좀 오르내린다는 기업들은 여당에 후원금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여당 2, 야당 1의 비율로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야당 인사들과도 친분을 다졌던 데서 연유한 것. 그리고 경기고등학교 후배로 대우그룹 임원을 지냈던 박정훈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내정간섭 수준의 각서까지 요구할 정도로 기세등등한 국제통화기금 하에서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과의 자리를 마련, 1997년 외환 위기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부탁하였지만, 회의가 끝나고 김우중의 후배인 타 재벌의 총수가 김우중에게 "어떨 것 같습니까?"하고 묻자[51] 김우중은 "뭐 별일 있겠어. 다 들어서고 나면 처음엔 저렇게 군기를 잡잖아. 이번에도 별 탈 없을 거야."라 말하며, 상황을 낙관하였다.[52]
- DJ가 중국을 방문할 때도 수행하면서 동행한 재벌 총수들에게 " 나만 믿으라"고 자신있게 말했다는 후문. 다른 30대 그룹이 이헌재의 애정어린 독려(?) 후 5일만에 시행을 전제로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했지만,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오히려 당시 경영난에 처한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며 정부의 호감을 사는 한편, 추가 대출을 기대하는 대담한 발상을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당시(1998년) 대우그룹의 모기업이었던 (주)대우 한 회사의 부채만 22조 원(...). 참고로 당시 국가 예산의 30%에 달하는 금액으로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98년 예산이 70조 정도였다. 그러니까 정부 차원에서 정부 출범에 대한 보은 차원에서 부채를 다 보전해주고 싶어도 해주기 힘든 상태였다는 말.(...)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역시 김우중의 현실 인식이 매우 낙관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53]
- 대한민국에서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로 이미지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베트남에서의 평가는 현재까지도 매우 높다. 이는 대우가 베트남 진출할 때에 라이따이한에 대한 복지 지원, 현지인 대우 등에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존경하는 한국인으로 김우중을 꼽는 경우가 많다.[54]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이 선전한 것도 사실 대우가 에서 만들어 놓은 이미지의 수혜를 받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방식은 다른 다국적 기업들도 본 받을 만한 것인데 많은 다국적 기업이 미성년자 노동, 개판인 직원 복지, 고용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등으로 현지에서 욕을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에 가서는 "너희는 노조라는게 없냐?"고 욕을 엄청 먹었다고 한다(...). 김우중이 한국기준으로 본다면 그나마 노조에 관대했던 축에 들었지만 동유럽 기준으로 꽤 꽉막힌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노조를 중심으로 주축을 이루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당시 고용 안정을 이끌어 낸 것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2017년 초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에서 차별 대우 때문에 일어난 노동자 시위로 인해 현지에서는 김우중 회장의 현지인 대우와 복지 능력이 재조명받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 북한의 김일성과 남포공단 합작 및 전두환 정부 시절부터 북한에 특사로 드나들며 인연이 생긴 이후, 김일성의 죽음 및 북한체제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김일성이 김영삼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아들 김정일과의 갈등으로 인해 망명을 고려했고, 리비아아의 카다피나 스위스의 유력 정치인과 친분이 깊던 김우중에게 망명 주선을 요청했다는것. 음모론이라 보기 어려운것이, 서울신문의 사장이 당시 안기부 요원들과 교차검증하며 직접 취재한 내용이다. 영상 또한 2017년 김우중 생애 마지막 공식 인터뷰에서 NCND의 자세를 표하면서도 김우중 본인이 기억이 안난다고 회피했으나, 그 즉시 다른 세세한 일화들을 나열한 것으로 볼 때, 사실상 인정했다. 김우중과 김일성간의 당시 대화를 요약한 텍스트 이후 김정일이 집권하고 남포공단을 방조하며 김우중을 적대시하고 김우중이 방북해도 잘 만나주지 않았으며, 뒤이어 출범한 국민의 정부에서 현대그룹과 개성공단을 출범하고 금강산 관광을 강행하며 대북사업을 했으나, 대우는 김정일 시기부터 대북사업이 지지부진하며 내심 정부당국에서 석연치 않게 여겨다는 후문도 있다.
- 형 김관중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장교였고, 아버지 김용하가 박정희의 은사였듯 전두환, 노태우는 형의 절친이었다. 윤필용 사건때 김우중 회장이 신군부측 인사들에게 자금을 대준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5공이 들어선 이후에도 많은 혜택을 보았으나, 그 와중에도 12.12 군사반란으로 곤궁해진 처지의 정승화 총장의 아들을 자신의 형 김관중이 한때 상사로 모셨다는 점을 들어 구명을 요청하자, 위험을 감수하고 정승화 총장의 아들을 대우의 런던지사로 발령보내기도 했다. 기사 또한, 전두환과 노태우의 비자금 조성을 도와 법정에 선 흑역사도 있지만, 대체로 정부가 주는 답례 특혜를 비교적 공익사업에 사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아주대학교와 산하 중증 외상센터.
6.2. 개인적인 일화
- 완성차 사업까지 거느렸던 기업인이였던지라 개인 자가용으로 르망을 탔었고, 92년 국민차 티코가 나왔을 때는 티코를 타고 다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의전차량으로 과거 로얄 시리즈, 아카디아, 그리고 쌍용차 인수 직후 그룹이 해체되기 전까지 체어맨을 사용했었다. 자사의 자동차만을 꼭 탈정도로 애착이 대단했었으며 90년대 초중반엔 그룹사 사장단 전원에게 당시 대우의 플래그십 세단 아카디아를 지급한 바 있다. 대우그룹 해체 후 다시 귀국하기 전까지는 베트남에서 대우 매그너스를 개인 의전차량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재벌 총수라는 무게감에 걸맞지 않게 매우 간단한 식사를 즐겼다. 임원들과 중국음식점에 갔을 때는 짜장면 한그릇을 뚝딱 비우는데 10분도 채 안 걸려서 주변을 당혹스럽게 했으며, 곰탕집에서는 5분여만에 식사를 끝냈다고 한다. 해외 출장 때는 호텔 등에 있는 번듯한 레스토랑보다 사업장 인근의 허름한 식당을 애용했다고. 유럽 출장 때는 작업복 차림으로 공장을 둘러보다가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햄버거를 먹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는데, 훗날 도피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검사가 어떤 식사를 하겠냐고 묻자 라면사리를 넣은 김치찌개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는 해외 체류 기간 동안 한식을 거의 못 먹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언플이라는 논란도 있는데, 해당 일화는 검찰 쪽에서 직접 언급한 것이라서 애초에 언플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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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실, 김우중 회장이 소년기와 청년기 시절였을때의 대한민국은
6.25 전쟁도 있었고 아직 경제개발이 제대로 진행되기 이전이었으며 따라서 가정식에서 외국음식의 유입도 비교적 적을수밖에 없기 때문에 비싼음식의 기준이 많이 달랐다. 가령 19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은 짜장면같은 음식도 아무때나 못먹는 번듯한 외식메뉴였지만,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일반 건설인부들도 전화로 시켜먹을 정도의 평범한 한끼 메뉴가 되었다. 그리고,
돈가스,
햄버거,
치킨,
피자도 1980년대에는 중산층 집안에서도 1달에 한두번 먹는 수준이던 제법 비싸게 취급되어서 아무때나 먹는 음식이 아니었지만 90년대에는 비교적 평범한 외식메뉴 취급을 받는 것이 그 예다. 게다가 대우그룹의 회장으로 일했던
1980년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새마을운동같이 경제 개발하던 시절이라 아무리 대기업 회장처럼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매일같이 귀족들마냥 비싼 음식만 먹고 살았을 것 같은 상류층들도 그렇게 많았던 때도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성공한 대기업 총수들은 대부분 소탈하고 검소한
구두쇠같은 사람들도 정말 많은데다
흙수저 출신이었던 경우도 많아서...[55] 또한, 아래에 나오듯이 김우중은 일 중독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을 도맡아하는 성향이 강했는데, 식성도 이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비싸다고 무조건 더 맛있는것도 아니다.
몸에 안 좋을 수록 맛있다. 가격도 아주 비싸지도 않다라면의 맛은 라면만 낼 수 있고, 짜장면 맛은 짜장면만 낼 수 있지 않는가? 대우그룹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중 김우중 회장의 출근길이 나온 적 있는데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출근하는 차 안에서[56] 보온 도시락에 싼 아침을 먹는데 정말 소박하다 못해 이렇게 먹고 다녀도 되나 싶게 김치 썰어넣고 끓인 밥이 아침 고정 메뉴였다. 심지어 김우중 본인도 아침메뉴를 개죽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음식은 대구/경북 지역의 전통음식인 갱시기를 말하는 것 같다.
- 부인 정희자 여사는 부군의 창업 초기부터 음식을 만들어와서 사원들과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고 한다. 현대 그룹 정주영 창업주의 부인 변중석 여사는 한술 더 떠서 직접 만든 메주를 사원들에게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부부의 고향댁(강원도) 근방에 콩이 많이 났기에 상부상조를 하자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재벌가 창업주들이 세간의 시선과 달리 검약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와 더불어 유이하게 한국에서 아직까지 생존한 재벌 기업 창업주였으나... 2019년 12월 9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신격호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지만 신격호 회장마저 2020년 1월 19일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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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생으로, 2019년 사망 당시 82세였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가 노태우 정부 시절 북한에 비공개 특사로 파견 갔을 때 80대였던
김일성이 이미 50대에 접어든 김우중 자신과 40대 중반의
김정일을 두고 '젊은 사람'이라 불렀다고.(...)
말년에 김일성이 노망이 난 징조라 카더라근데 80대인 김일성 시선에서 보면 50대인 김우중과 40대의 김정일은 젊은 사람 맞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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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스타 이병헌의 양아버지이다. #와전된 정보이다. 다만 그만큼 친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90년 11월에 아들 선재[58]가 미국 유학 도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스물셋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부인 정희자가 당시 데뷔 초의 이병헌을 TV에서 보고서 "선재와 닮았다"고 하면서 호감을 느껴 이병헌과 친분을 맺었고, 노조의 반발로 접기는 했지만 이병헌을 위해 신형 세단 아카디아를 선물하려 했다고 한다.그럼 회장님 개인 돈으로 선물하시면 됐잖아요?나중에 이병헌의 결혼식 때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재벌가 3세들이 꽤 있었는데 바로 김우중 부부와의 친분으로 이어진 인맥이다. 다만 법적인 양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김우중 부부가 진지하게 양자로 들일 고민을 했을 정도로 서로를 어머님,아버님과 아들, 병헌이로 호칭하며 김우중 회장의 자녀들과도 교류를 이어나갔다. 김우중 회장이 도피를 마치고 귀국 후에도 만났고, 2012년 이병헌이 글램의 모 멤버와 50억 협박사건이 터졌을때는 이병헌이 미국에 체류중이던 김우중-정희자 부부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죄했고, 셋이 같이 울며 김회장 부부가 "우리한테 너가 뭘 잘못했냐? 앞으로 행실에 주의하고 이민정에게 네 아내이니 더 잘해줘라." 라고 했다고 한다. 링크김우중 회장이 2019년 별세했을때도 상당히 오랜시간 유족들과 머무르며 장례 절차를 돕기도 했고, 김 회장 사후에도 유족과 교류한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병헌의 여동생 이지안에게도 김우중 회장 부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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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59][60],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운동을 할 시간이 없을 때는
무협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고, 훗날 대우전자 내에
비디오 사업부를 설립해[61]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등의 작품을 수입하고,
1995년
케이블 방송 사업자 선정 때 세간의 예상을 깨고 영화 채널 부문에 응모할 정도였다. 이것이 현
OCN의 모태가 되었다. 심지어 1995년 우진필름으로부터 강남 씨네하우스까지 인수하고 멀티플렉스 '메가플렉스'를 준비했으나,
1999년
동양그룹에 팔려 '메가박스씨네플렉스'와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로 분사됐고, 2001년
오리온그룹으로 분가될 때 합류했다가 2009년에 CJ에 사업을 다 처분해서 현재는
CJ E&M 산하에 있다.
그런데 말년에는 골프 예찬론자로 바뀌었다고. #
- 경기고 재학 당시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반에서 꼴찌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걸 카더라라고 치부하기에는 당시 경기고등학교의 위상을 고려해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단 당시의 경기고는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무조건 서울대로 진학하는 게 일반적일 정도로 당대 최강의 명문 고등학교였다. 비슷한 경우로 이건희 삼성그룹 前 회장 역시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별 뜻을 두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당시 재학하던 서울사대부고 기준이었을 뿐, 대학은 연세대 상학과로 진학했다.
-
연세대 졸업 이후 동문회장을 역임했고, 상경대학 건물 신축시 기부금을 내면서 이 때문에 연세대 상경대학 본관의 명칭이 대우관[62]이다. 또한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부지[63]를 기증하는 등 여러모로 연세대를 도왔다고 한다.
고려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도 김우중 혹은 대우그룹이 기증한 건물[64]이 있다는...아주대학교나 제대로 도와주지.한때 강연을 하려 연세대에 가자 학생들이 몰려와서 악덕 기업주라고 시위를 벌이자 굳은 살이 박힌 자신의 손을 보여주면서 '나는 이렇게 굳은 살이 박힐 정도로 일해서 돈을 벌었다. 학생들 중에서 나 정도로 고생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해서 학생들에게 일장연설을 했다고 한다. 확실히 김우중이 워커홀릭으로 평가받는 것은 사실이다.
- 대우 사태 이후 도피 루트가 굉장히 파란만장(...) 하다. 1999년 10월 중국 옌타이에 신설된 대우자동차 중국 공장[65] 개소식 때 참여해 중국에 계속 머무른 것을 시작으로, 미얀마 - 라오스를 거쳐 베트남에서 3년 동안 은거해 지냈다. 이 때 한국 정부에서 김우중을 넘기라고 베트남 정부에 요청을 했더니 베트남 공산당 부서기가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국으로 치면 국무총리급 인물이다. 공산 국가 특유의 당이 행정부보다 우위인 특성상 일반적으로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국가 최고 지도자를 겸한다. 이 때는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유감 표명을 하기도 했고, 베트남 측에서도 한국과의 경제 협력에 많은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양국 관계가 매우 좋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우중 송환을 베트남측이 즉각 거부했다는 것은 그만큼 김우중이 베트남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는 방증. 그 후 프랑스에서 임시 국적을 얻어 2005년까지 지내다 결국 서울로 돌아와 자수하고 검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다만 언론에 알려진 옌타이 공장 방문이후 해외 도피했다는 관료들과 수사당국의 발표와 달리, 실제로는 귀국 후에 정재계 유력인사들과 접촉후 갑작스레 다시 도쿄로 출국했다. 대우 해체에 정부 개입설이 나도는 이유중 하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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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베트남과 돈독한 관계 덕분에 베트남에서
청년 사업가 양성 사업 GYBM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베트남빠조선일보 기사 한국경제 기사
- 1985년, 김우중과 형인 김관중(대창기업 회장), 김덕중(전 교육부 장관) 등의 형제들이 모여,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에 도서관을 짓고 이를 제주도에 기증했는데, 그 도서관이 아버지 우당 김용하의 호를 딴 우당 도서관이다. 본적지가 애월읍 하귀리로 되어 있다.
- 1998년에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더불어 개인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도메인이 ' https://kimwoochoong.com'이었다. 현재 이 도메인은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관리 중이나 대우 출신만 로그인이 가능하다.
- 아버지가 납북될 때 둘째 형도 납북되었는데 2003년 제8차 이산가족 상봉 당시 둘째 형이 살아있음이 알려졌다. 당시에는 김우중은 도망 다닐 때라서 만날 수는 없었지만.(...)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 대우그룹 경영 약 30년 동안 해외에 있던 시간이 17년이라고 하며 총 이동한 거리가 954만 km로 지구 240바퀴를 돈 양이라고 한다.
- 前 전라북도지사였던 유종근과 매우 친분이 깊었다. 현재 KBS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방영되는 모던코리아라는 프로그램에도 나왔었는데 실제 영상으로도 나와 김우중과 함께 동행하며 동고동락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일단 유종근 본인도 기업인 출신인데다가 이후 정치인으로써도 직무에 힘써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서로 협력해야 되는 그런 분위기가 강했던지라(...).
- 자서전의 제목이자 그의 격언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2016년 한 언론 매체에서 조사한 '기업인들의 명언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1위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보기나 했어?", 2위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였다. 여담이지만 대우그룹, 삼성그룹, 현대그룹은 IMF가 터지기 직전인 1980-1990년대 한국을 대표했던 Top 3 재벌 그룹이였다.
- 2012년부터 싱가폴 대학교의 신장섭 교수가 그와 극비리에 2년 동안 나눈 비공개 대담록을 엮어 만든 '김우중과의 대화'가 2014년에 출판되어 잠시 동안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대중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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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의 '근대법학교육백주년기념관'의 대강당 이름이 '주산기념홀'인데, '주산(宙山)'이 바로 김우중의 아호이다. 그와 같이 이름을 붙인 까닭은, 위 기념관을 건립할 때 공사비를 가장 많이 대어 준 사람이 바로 김우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
태영그룹 회장
윤세영도 출연을 하였다.
그런데 왜 자기 모교도 아니고 자기 전공도 아닌 곳에 기부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카더라.부친이 서울법대의 전신 중 하나인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인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다만 부친의 세부전공은 철학이다.
-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으로써 명성이 커서 가려진 감도 있는데, 부친의 영향을 받아 바둑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1983년 한국기원 2대 협회장을 지내기 시작하면서 프로 기사들을 대우그룹 임직원들의 바둑 선생으로 위촉하면서 그룹 차원에서 바둑에 소양을 쌓도록 했고, 홍익동 한국기원 기증과 국제기원 창설 등 바둑사업에 큰 공헌을 해 한국 바둑의 중흥기를 이끈 공헌자라는 높은 평을 받는다.
-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1990년대 파산 지경에 놓였던 시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대우그룹과의 합작 사업인 뉴욕 트럼프월드를 성공하게 하면서 부동산 개발업자로서의 명성을 회복하는 데 김우중 회장은 상당히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빚더미에 올라있던 트럼프의 상황을 배려해서 대우는 트럼프라는 브랜드 사용료만으로 매년 수백 억을 지급했으며 이는 아무리 영화 출연 등으로 이미 명사였던 트럼프의 인지도를 고려한다 해도 과한 것이었다.[66] 외환위기 직후에는 김우중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거제 조선소와 대우차 공장 등을 둘러보고 대우 그룹 소유의 골프장에서 골프도 같이 쳤다. 서울과 대구, 부산 등에 여러 군데 남아 있는 트럼프 월드는 이때 대우그룹과 트럼프의 인연이 남긴 유산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 당선이 되면서 이 일화가 재조명받기도 한 바 있었다.
- 동산 박정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사돈관계이다. 박정구 회장의 장녀인 박은형씨는 김우중 회장의 차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과 혼약을 맺은 사이다. 이러한 인연 덕분인지 동생 박삼구 전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이 각각 김 전 회장의 빈소를 찾아 고인의 마지막 길을 기렸다. 또 다른 여담이지만 대우그룹 사태 이후 2005년 귀국길에 오른 김우중 전 회장이 탑승했던 항공사도 아시아나항공이였고, 박삼구 회장 역시 당일 항공편을 맡은 기장, 승무원들에게 "편안하게 잘 모셔오라"고 각별하게 부탁했다.
- 김선홍 前 기아그룹 회장과 친분이 있었다. 1994년 2월 18일, 대우자동차가 서울 남산의 힐튼 호텔에서 대형세단 ‘아카디아’를 발표한 날, 김선홍 회장이 기꺼이 경쟁업체의 신차 발표식에 참석, 덕담을 건넸으며, 기아그룹 사태가 터진 직후인 1997년 9월, 두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김우중 전 회장이 기아차 전시장을 찾아갔으며, “기아차가 삼성으로 넘어가면 대우차가 위험할 수 있다, 기아차를 지원하겠다”고 말했지만 기아차는 결국 현대차로 넘어갔고, 대우그룹도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2005년에는 김선홍 전 회장이 김우중 회장의 병문안을 찾아갔다. 검찰 조사를 받던 김우중 전 회장은 심장혈관 수술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었으며, 김선홍 회장은 쾌유를 비는 덕담과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던 시절을 회고했었다고 한다. # 우연히도 두 노장은 같은 광산 김씨집안. 단 김우중 전 회장의 항렬이 더 높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대우그룹, 기아그룹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현대자동차와의 경쟁구도가 더 재밌었으리란 결과론도 있다.
- 죽기 전까지 공개적으로 유언이나 재기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작은 없으나 부인과 자녀들의 명의로 골프장 사업을 벌이거나 이전 대우그룹 계열사와 임차 계약을 맺는 등 재기에 대한 의지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부인인 정희자 씨에 따르면 치매로 와병 중에 "엄마 어디서 2천만원만 빌릴 수 없을까? 사업을 하려면 금전이 필요한데..."[67]라는 말을 수시로 했던걸 보면 대우의 몰락이 정말로 한에 사무쳤던 모양이다.
7. 대중매체에서
- 1983년작 MBC 드라마 <야망의 25시>에 나오는 '박기우 회장'은 그를 모티브로 했는데, 배우 조경환이 연기했다.
- 2005년작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 제5공화국>에선 노태우 비자금 사건 공판 장면에 등장하는데, 배우 이영이 연기했다.
- 과몰입 인생사 시즌2 2화에서 대우그룹과 김우중에 대해서 다뤘다. 대우 창업과 세계경영부터 시작해서 부도와 관련된 상반된 평가 등 다양한 내용들을 다뤘다.[68] 대우의 세계경영과 성과에 대해선 호평하면서도 여러 한계점이나 대우 해체 당시 보였던 해외 도피 등의 행적 등은 철저히 비판하는 등 상당히 잘 구성된 에피소드이다.
8. 수상 경력
- 철탑산업훈장 (1970)
- 동탑산업훈장 (1971)
- 금탑산업훈장 (1972)
- 한국의 경영자상 (1973)
- 대통령 표창 (1977)
- 수단 오더 오브 투 나일 훈장 (1980)
- 국제기업인상 (1984)
- 마로니에 기업문화상 (1987)
- 국민훈장 모란장 (1988)
- 벨기에 대왕관훈장 (1991)
- 독일 십자공로훈장 (1992)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1996)
- 우즈베키스탄 듀스트리크훈장 (1996)
- 97아시아기업인 (1998)
-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1999)
- 원광대학교 명예박사(2007)
- 자랑스러운 방산인상(2024, 사후 수상)
9. 저서
- 김우중 어록: 나의 시대, 나의 삶, 나의 생각 - 북스코프. 2017.
- Every Street is Paved With Gold: The Road to Real Success - William Morrow & Company. 1992.[69]
-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 김영사. 1989.
10. 관련 자료
- 도서
- 김우중과의 대화: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 북스코프. 2014.
- 김우중 비사: 대우그룹 자살인가 타살인가 - 한국경제신문사. 2013.
- 대우는 왜? - 북스코프. 2012.
- 김우중: 신문배달원에서 세계최고경영자까지 - 이지북. 2005.
- 세계 최대의 파산: 김우중 오디세이 - 홍익출판사. 2005.
- 대우가 있다 - 쉬즈북닷컴. 2000.
- 다큐멘터리
- 다큐인사이트: 대망 (2019.11.07. KBS1)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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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영진 | 김우중 | 장병주 | 김덕중 | 이재명 | 추호석 | |
* 현재 대우 상표 유지중
|
[1]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과거에 대구 중구의 도로명 명칭을 두고 비화가 있었다.
링크
[2]
#
[3]
문정공파-문간공파 36세. 본래는 36세손인데 조부 대부터 3세 아래의 항렬을 써서 39세손 중(中)자 항렬을 쓰게 되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4]
다른 재벌가 부인들과는 달리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업인으로 호텔 힐튼 운영사인 대우개발을 맡았다.
[5]
미국 유학 도중인 1990년 11월에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6]
다만 자산 규모는 1980년대 당시 10억 달러를 넘기지 못했다. 1987년 당시 포춘지에 나온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에 정주영, 이병철은 있지만 김우중은 없다.
[7]
1960년대 후반 시점에서 500만 원이다. 이때 500만 원은 2020년 기준으로 억대 자금이다.
[8]
그 당시 500만원은 현재 가치로 약 1억 7천만원이 넘어가는 제법 큰 액수이다. 500만원은 처가에서 지원받았다.
[9]
아버지가 교장일 당시 대구사범학교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학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은사였던
박능후와 같은 상황
[10]
명문대 출신 또는 현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대우의 젊은 과장급 기술자들이 이때 독일로 산업 연수를 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중요한 경험을 쌓게 된다.
[11]
본래 항렬자로 보면 김용옥이 김우중의 삼촌뻘으로 착각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김우중이 김용옥의 할아버지뻘이다.
[12]
출판사는 담보사라 되어있고 이름은 '김우충'이라 되어있었다. / 해당 장면은
모던코리아 대망 편 t. 47:45에서 재인용됨.
[13]
출처: 신장섭 저, '김우중과의 대화'
[14]
김우중 회장과 대우 창업을 함께한 개국공신들이 대부분 경기고 출신이라 대우 안에서도 자연히 경기고 출신들이 잘나갔다.
#
[15]
다만 이것에 대한 변을 하자면, 정부의 요청과
SUV 쪽이 부실했던 대우차의 라인업을 보강하고자 하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이루어진 것이다. 대우차가 보기에는 쌍용차의 부채비율을 자사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기도 했고... 실제로 쌍용자동차 인수로 풀라인업을 갖춘 대우 측에서는 1998년에 국내 자동차 판매 점유율 1위를 기록하며, 대우자동차 인수 이래 처음으로 현대자동차를 제치기도 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또
벤츠 엔지니어링의 후광에 힘입어 쌍용 측의 SUV 라인업이 해외 판매에서도 나름대로 괜찮은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16]
여기에 더해 쌍용차가 보유한 공장부지와 설비, 부동산 등을 담보로 정부로부터 추가대출을 받으려 했다는 설도 있었고 무엇보다 쌍용차로 인해 막장화되고 있던 쌍용그룹의 내부 사정을 간파한 김우중이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면서 인수대금을 엄청나게 후려쳤다고 한다.
[17]
다만 북미에서는 퇴출당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하다. 왜나하면 당시 대우는 적자가 난 상황이었고, DMA(대우차 미국법인)가 대우차를 인수한
GM에 대우차 브랜드 사용 허가와 딜러쉽 유지를 요구했지만 GM이 이를 냉혹히 거절한 것도 대우차보다 더 나은 인지도의 자회사가 있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 자회사가 많은 GM과 기아밖에 없었던 현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대우자동차도 부도가 나지 않았다면 분명 미국 시장에 신경을 썼을 것이 분명하다.
[18]
정치계에선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전부터 여당 : 야당 = 2 : 1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도 무사했으며, 1990년대 초반에
김일성을 만나 독자적인 대북 연결선을 구축하고도 별 탈없이 넘어갔을 정도다.
[19]
다만
포스코인터내셔널 주도로 사우디를 시작해서 대우자동차의 부활을 다시 이루고자 했었지만, GM이 사우디 정부를 상대로 한 악랄한 로비와 쌍용차의 참여로 인해 결국 쌍용차가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포스코 본사 입장에서도 쌍용차에 자사 철강을 납품하고 있어서, 대우를 앞세워 자동차 개발에 착수하지 않아도 되다보니 내부에서도 대우 출신 인사들과 포스코 본사 간부들간의 알력 다툼이 심했다. 포스코에서는 계속 자동차 사업을 진행하겠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전술한 대우-포스코 간의 보이지 않는 파워 게임으로 인해서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세한 건
포스코인터내셔널 문서로. 결국 사우디 국민차 사업은
쌍용자동차와의 계약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20]
여담이지만 당시 대우자동차 노조 측에서 현상금으로 500달러(...)를 걸기도 했다. 또 해외 노조와 공조해 김우중 회장이 은신해 있던
프랑스에 체포조를 파견하기도 했다.
[21]
하지만 2021년 11월 23일에 전두환이 사망함에 따라 추징금 환수가 더이상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22]
추징금은 상속 대상이 아니다. 당사자가 사망하면 남은 추징금은 그대로 소멸된다.
[23]
이전까지는 정확한 병명이 알려지지 않아서 병원에 들락날락하는 것이 단순한 노령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24]
김우중은 차입으로 성공해서 차입으로 망했다라고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차입을 바탕으로 기업을 운영한 인물이다. 심지어 기술 개발도 빌려오면 되지않느냐라는 식으로 생각할 정도로 인맥을 통한 경영에 집착했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과도한 차입으로 회사에 큰 타격을 준 이후에도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5]
주변 인프라가 탄탄하고 더군다나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힐튼 호텔 최상층 집무실쯤 되면 1년이 아니라 한달에 수천만원 단위로 계약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해당 계열사가 서울힐튼을 싱가포르 CDL에 매각하면서 이 기묘한 계약이 수면 위로 드러났고, 법원 소송까지 갔으나 결국 계약 당시의 하자를 찾지 못해 CDL의 패소로 끝났다.
[26]
사실 김우중급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 게, 엔론의 분식 회계 규모는 15억 달러(우리나라 돈으로 약 2조 원) 정도였지만, 대우의 분식 회계 규모는 41조 원+사기대출 10조 원을 포함해 50조 원이 넘었다. 엔론의 수십배 규모로 분식회계를 저지른 것이다. 엔론은 김우중의 대우그룹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다.
[27]
다만 대우의 분식회계 규모는 다른 대기업과 비교해봐도 남다른 규모긴 했다. 자기자본 대비 비채비율이 400%에 달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차입 경영을 선호했던 김우중은 당시 한국의 경영자들 중에서도 특히나 분식회계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알려져있다.
#
[28]
물론, "이자는 휴일도 없다"는 격언이 당시에도 있었으나, 대출액수가 큰 대기업들이 은행이 주시할만한 거액을 빌리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장면도 많았던 게 성장경제 당시의 풍경이었다고 한다. 물론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에는 외채망국론이 나왔고, 1990년대에 경상수지 적자가 장기화되면서 1996년부터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징조를 보이고 있었지만, 당장 경제성장률이 7~8%씩 나오던 상황이니 매출이 잘 나온다는 상황만 믿고 과잉투자를 했던 것이었다.
[29]
대표적으로 1997년 초 한보그룹의 부도가 임박한 상황에서 임창열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을 찾아가 부도가 불가피하다고 통보하자 정태수 회장이 "생이빨을 뽑으면 몸 전체가 부작용이 나서 죽을 수도 있다"며 협박을 한 일이 있는데 당시 재벌 총수 대부분은 차입과 대출을 통한 몸집불리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30]
김우중, 이헌재 모두 경기고 동문이다.
[31]
전원이 원금 80%만 겨우 건지며 손해를 봤다. 이분들 중에는 제2의 IMF 위기가 올 뻔한 일이라는 비판까지 서슴치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손해를 안긴 김우중 회장에게 일단 비판적일수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32]
87년 대선 야권단일화 협상 당시 DJ측이 지분을 요구한 명분이기도 했다.
[33]
단, 남북관계에 관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관심과 공부가 깊었던
홍석현 사장의 영향으로 장기적인 관점을 유지. 의견 일부만 떼놓고 보면 DJ의 주장과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34]
5대기업 회장단과의 만찬에 참석하기 前,
이건희 회장이 직원들에게 "대기업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었지만, 만찬이 끝난 후 이례적인 밝은 표정으로 나오는 장면이 포착돼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문화일보에서는 아예 1면 사진 밑에 "환한 모습의 이 회장"이라 써놨을 정도. 포니 정으로 잘 알려진 고
정세영 현대자동차 전 회장의 자서전에는 5대그룹 회장단과의 만찬에서 "수출 잘 하는 기업은 업고 다니겠다."는 말을 대통령 당선자가 했다고 한다.
[35]
특히 창당 후 대부분의 세월을 강한 야당으로 일관했던
한나라당에서 가만 놔두질 않는다.
[36]
미국의 로켓 발사대를 뜯어다 조선소 시설로 개조하는 능력과,
현대자동차처럼 신차 개발시 부품까지 통째로 바꾸기보단, 기존 것에 개량한 부품을 넣는 방식으로 결과적으로 소비자 부담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들이다. 비록 자금 사정으로 인해 이런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뒷받침해줄 자동차 기술진들은 김우중 회장이 의욕적으로 독일로 연수를 보내 배우게 했던 이들이었다. 즉 대우차를 보유하고 관리만 잘 하면, 후속 신차 발표 및 업그레이드 모델에 적용된 신부품을 구해 끼워넣기만 해도 새차 산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미국차들처럼 튼튼하게 차체를 만든다는 강점이 있었기 때문에, 세일즈 포인트로서도 유용.
[37]
1999년의 정부 예산이 84조원이다.
[38]
KBS,
MBC 양사 보도에 나온다.
[39]
밥 루츠 전 부회장의 자서전인
빈 카운터스에도 나오지만, 석유가 풍부한 미국의 여건상 힘좋고 튼튼한 차량이 호황기의 주력상품으로 개발되고 소형차 개발은 등한시해, 1970, 80년대에 일본 제조사들이 치고 들어올 빈틈을 내주었다. 다만 이 책이 지적하는 정확한 내용은 상황이 안팎으로 안 좋아질 때 미국 업체들, 특히 제너럴 모터스에서 배기가스 및 연비 규제와 당장의 시장 변화, 그리고 비용 절감을 통한 이익 극대화에만 눈이 앞서 모든 라인업을 급히 소형화, 앞바퀴굴림화하다가 회사의 평판을 말아 먹은 건에 가깝다. 참고로, 그 책에서는 자신에게만 충성하는지 신경쓰다가 회사를 말아먹은 독재자로 까였다.
[40]
사실 김우중도 호시탐탐 기아를 노리고는 있었지만 97년에 이미 쌍용차를 인수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98년 말부터 유동성 위기가 심해져서 인수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41]
다만 인프라 투자에는 소홀해서 다른 기업구단들이 전용 클럽하우스를 만들 때, 로얄즈는 클럽하우스를 짓지 않아 용인 대우그룹 연수원, 부산 동아대 운동장 등을 떠돌며 비효율적으로 훈련했다(...)
[42]
최근
축사국을 중심으로 축협 개혁가라면서 이들을 축구협회장으로 미는데 정말 실소가 나온다.
[43]
금호그룹은 한동안 이 일로 기업 평판에 타격을 입었다. 원래 금호그룹에게 1순위로 광주의 프로야구단 창단 제의가 들어갔었다.
[44]
다만 최근 2022년 기준 현재는 삼성그룹&현대그룹 등 역시 노조를 허용하고 있다. 공무원도 법적으로는 노조가 불허되지만 실제로는 노조가 운영되고 있다.
[45]
당시 대우차 노조 집행부는 현재의 강성 노조가 아닌 친기업 어용 집행부였다.
[46]
이는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의 발단이 되었다.
[47]
하지만 김우중 회장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그 자신이 거제도 옥포조선소에 근무하면서 회사 안정과 노조 문제를 직접 해결했다. 또 노동자의 집에 방문해 같이 식사를 하며 문제점을 경청하는 등의 일들을 생각하면 그는 다른 총수들과는 유별난 부분이 있었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라도 할 생각은 있었던 것.
[48]
비서 업무를 마친 남직원들을 미국의
MIT나
미시간 대학교
MBA 과정으로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
[49]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것은 최악이다. 많은 이들이 과거 대우 회장이 그런 독재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직원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지만 신경을 쓰다가 회사를 말아먹었다고 한다." →
밥 루츠,
빈 카운터스, p.311. 해당 서적에서는 폭스바겐 회장을 비롯한 "유능한 독재자"의 사례를 소개하기 전에, 이런 식으로 자신이 생략하겠다고 했던 "무능한 독재자"의 사례로 김우중 회장을 살짝 언급한다.
[50]
대출을 더 받을 수 있으면 틀림없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경제난 와중에도 오히려 공격적인 경영으로 세(勢)를 불렸다.
[51]
정황 상 현대그룹의
정몽헌 회장 또는 LG그룹의
구본무 회장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 모두 연세대 상경대학 출신으로 김우중의 대학 후배이다.
[52]
공병호, 대한민국 기업흥망사, 해냄, 2011.
[53]
사실, 총부채가 140조에 육박하는
소프트뱅크 같은 기업도 멀쩡히 존재하고 있듯이 부채 규모가 꼭 회사 존속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1998년 10월 일본
노무라 증권이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을 만큼, 쌍용자동차 인수 후 국내 2위의 재벌이 된 대우는 시장의 평가가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그 직후에 대우가 집중적으로 투자한 중국과 제3국 시장의 성장이 상황을 반전시킬수도 있었기에[70] , 김우중 회장이 사안을 좀더 심각하게 바라보고 구조조정에 착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4]
할아버지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지금은
박항서 감독이다.
[55]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대그룹의 회장
정주영이 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의 흙수저에서 성공한 인물이다. 정반대 사례로는
삼성그룹의
이병철. 그리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한국 재벌 1세대 대부분은 가난하게 성장한 적이 많았고, 또 당시엔 넉넉히 썼다고 해도 지금 기준으로는 대단하지 않아보이는 것들도 많다. 2세대도 그런 부모 세대를 어느 정도 보고 자라기도 한다. 1, 2세대가 닦아놓아서 평안히 길을 가는 재벌 3세 쯤은 되어야 금수저의 생활을 누릴 수 있다.
[56]
물론 운전은 기사가 한다.
[57]
다만 신격호 회장도 말년에는 건강이 너무 나빴다. 치매 증세가 심각해서 자기 회사의 이름도 잊어버렸다는 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다만 이는 롯데 가의 언플이란 말도 있다.
[58]
서울 북촌 인근에 있는 '선재아트센터'가 바로 김선재의 이름을 딴 곳이다. 이곳의 관장은 지금도 김우중 전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 씨이다.
[59]
원래 일이 취미다라고 말할 만큼
일 중독자였다. 밥도 초 스피드로 폭식 + 과식 스타일로 먹었는데도 소화불량에 걸린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나. 식사도 전투적
[60]
골프 애호가들은 삼성, 현대와 달리 대우가 망한 이유가 이병철, 정주영과 달리 김우중이 골프를 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골프라는 것이 의욕이 앞서면 오히려 경기를 그르치게 마련인 운동인데, 김우중이 골프를 통해 그 점을 체득했더라면 의욕이 앞선 나머지 무리한 경영을 하는 우를 피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
#
[61]
대우 비디오 클럽이 이때 만들어졌으며 우일영상을 거쳐 훗날 '시네마트'라는 브랜드로 독립되었다.
[62]
김우중관으로도 불렸으나 대우 부도 이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63]
現 원주시
흥업면에 있는 매지캠퍼스
[64]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제2과기대 건물이 있다
[65]
현재는 상하이 GM 산하로 운영주체가 바뀌어 운영된다.
[66]
특히 트럼프에 대한 인기는 대체적으로 북미에 한정적이었다. 국내에도 트럼프의 신간이 나오자 홍보하는 수준 정도였고, 업계에서나 알법한 사람이었다. 어프렌티스를 통해 미국에서 연예인급 반열의 인지도가 있었을때에도 한국에선 WWE에서 빈스회장과의 내기에서 이겨 빈스의 머리를 삭발한 사업가정도로만 알고있었다.
[67]
참고로 여기서 엄마는 아내인 정희자 씨를 부르는 말이다.
출처
[68]
특히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된 파트에서는
장병주 전 대우 사장과
김태동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을 인터뷰한 내용을 교차검증 형식으로 내보내 대우 해체에 대한 여러 의견을 중립적인 시선에서 내보냈다.
[69]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영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