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4 21:24:28

리용무

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리용무
李勇武 | Ri Yong Mu
파일:정치국원 리용무.jpg
출생 1925년 1월 25일
평안남도 평성시
사망 2022년 1월 27일 (향년 97세)
평양시
국적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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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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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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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직업 군인, 정치가
정당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숙청과 복권2.3. 말년
3. 경력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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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2.1. 초기 이력

1925년 1월 25일, 평안남도 평성시에서 출생했다. 김일성의 사촌여동생인 김정순과 결혼하여 성분이 매우 좋은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1947년 6월에 중앙경위대에 입대하였으며 이후 제2중앙정치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정치학교 졸업 이후 군사정치일군으로 총정치국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

이후 사단 정치부장, 사단장, 총정치국 조직부장, 조직부국장을 거쳐 1964년 6월에 민족보위성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 임명, 중장으로 진급했다.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총정치국 부국장 재임 시절 김창봉, 허봉학, 김정태 숙청에 매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및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8월, 군 상장으로 진급, 총정치국 국장으로 진급했다. 1974년 6월에는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권의 최상층부로 진입하였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창광산에 호화저택들을 지어놓고 김정일에게 군악단의 미녀들을 바치면서 아부하였으며 사석에 있을때 김정일과 말을 놓을 정도로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고 한다. 이한영 역시 리용무가 김정남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을 정도로 김정일과 가까웠다고 증언했다.

2.2. 숙청과 복권

하지만 1977년 10월 즈음에 총정치국장에서 전격 해임당했다. 이에 대해 박병엽은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정일의 승계에 제동을 건 김동규의 편을 들다가 숙청당했다고 증언하였다. 하지만 정말로 김정일 후계자 반대를 하다가 숙청된 김동규 편이라서 숙청됐다면 김정일의 용서를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인데 나중에 복권 후 오히려 김정일 체제의 거물로 행세한 것을 보면 김동규 연루설은 신빙성이 낮아 보인다. 자세한 것은 김동규 사건 문서 참조.

다른 고위급 탈북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군부를 장악하려는 김정일과 인민무력부장으로 군에서 버티고 있던 오진우의 기싸움에 휘말려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있는데 역시나 검증은 불가능하다. 조선인민군 상좌 출신의 탈북자 최주활의 논문에 따르면, 김정일의 막강한 신임을 받고 있다고 너무 오만해져서 아예 인민군 병사들을 사적으로 동원하여 서해바다에서 갯벌흙을 실어와서 마당에 깔고 감나무를 심었으며 일제 가구들을 집에 도배하였고 김일성 시계를 멋대로 돌리는가 하면 인민군 협주단 여배우들을 성적으로 유린하였다고 한다. 이에 참다못한 오진우가 이를 김일성에게 보고하였고 대노한 김일성은 그를 정치위원회 위원 및 총정치국장에서 쫓아내고 량강도 임산사업소 부지배인으로 하방시켰다는 것이다. 후임 총정치국장은 검열위원장이며 전에 총정치국장을 지낸 바가 있는 서철이 임명되었다. 탈북자 강진에 따르면 량강도 농근맹위원장으로 좌천됐는데 이때 자신의 아버지와 리용무가 친하게 지냈고, 리용무가 강진에게 김일성, 김정일에게 선물받은 각종 진귀한 물건들을 자랑했다고 한다. 강진은 이 인연으로 이후 김정일을 호위하는 974부대에 입대하게 된다. #

1985년에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재기하기 시작했고 1988년 11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어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으로 사업했다. 1989년 6월 8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현무광의 뒤를 이어 중앙인민위원회 국가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조선로동당 6기 16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국가검열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91년 12월 18일, 교통위원장 리길송이 경질되면서 후임 교통위원장 겸 교통위원회 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기 전까지 교통위원장 겸 정치국장으로 사업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2월 11일, 전병호와 함께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9월 8일, 국방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공동결정으로 김룡연과 함께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하였다.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3일,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9년 4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2009년 4월, 홍성남 장의위원,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거되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2년 2월 김정일훈장을 받았고 김정은이 집권한 후에도 유임되어 2014년 4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2.3. 말년

하지만 나이가 90대가 넘어가는 노인인지라 은퇴단계에 접어들었고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선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물러났다.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2016년 6월,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가 폐지되면서 국방위원회에서 물러났다. 이후 인민무력성 고문, 토지지휘경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뒷방 늙은이가 되었고 2019년에는 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당선되지 않았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났다. 물론 고령으로 인하여 8차 당대회 이전에 이미 중앙위원회에서 소환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군 원로로써 이런저런 추모대회, 보고대회에 돌아다녔으며 말년에는 전국로병대회에 많이 다녔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과 경축 대공연에 나온 것이 마지막 행보였고 2022년 1월 27일, 급성심근경색으로 8시 40분에 9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의위원회 구성은 되지 않았으나 김정은이 직접 조문을 오는 등 군원로로써 아주 초라하게 죽은 김영주에 비해서는 좋은 대접을 받았다. 당중앙위원회와 국무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리용무동지는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과 국가,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분투하였으며 투철한 혁명적원칙성과 소탈하고 호방한 성품으로 하여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을 간직하고 혁명임무수행에서의 높은 책임성과 헌신적노력으로 국가의 발전과 인민의 복리에 이바지하는 큰일들을 많이 하여온 리용무동지를 잃은것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가슴아픈 손실로 된다. 리용무동지는 비록 서거하였으나 당과 혁명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친 그의 공적은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추억속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1월 28일, 김정은이 조용원, 김덕훈, 박정천, 리일환, 리영길, 권영진을 거느리고 직접 조문하였다. 로동신문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충직한 혁명전사이며 우리 당의 혁명사상과 위업을 굳건히 이어나가는데 공헌한 로혁명가 (...) 인민군대안에 당의 유일적령군체계를 철저히 세우고 주체적군건설사상과 로선을 관철하는데 특출한 기여를 하였으며 우리식 사회주의위업의 승리적전진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리용무동지 (...) 조국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헌신적복무정신을 지니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과 국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분투해온 귀중한 혁명동지."라고 리용무를 아주 좋게 말해주었다.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1973년 1977년 한익수의 후임으로 임명
숙청
조선로동당 5기 정치위원회 위원
1974년 1977년 임기 중 숙청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
1989년 6월 8일 1991년 12월 18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교통위원장으로 조동
교통위원회 위원장
1991년 12월 18일 1998년 9월 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조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0, 11, 12, 13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1998년 9월 5일 2016년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위원
2010년 9월 28일 2016년 5월 9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7차 당대회에서 은퇴

4. 참고문헌

  • 강명도,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서울: 중앙일보사, 1995).
  • 최주활, 북한 체제에서의 당-군 관계 연구(경희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1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