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1:57:00

메탁사스선

1. 개요2. 배경3. 계획4. 건설5. 규모6. 특징
6.1. 장점6.2. 단점
7. 실전8.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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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탁사스선 (Γραμμή Μεταξά, Metaxas Line) 1936년부터 1941년까지 그리스 왕국 불가리아 왕국의 침공으로부터 동부 영토를 지켜내기 위해 그리스 - 불가리아 국경선 일대에 건설한 요새 방어선이다.

메탁사스선의 이름은 요새선의 설계자 겸 건축자였던 당시의 그리스 왕국 총리인 요안니스 메탁사스 (Ioannis Metaxas)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그리스 침공에서 요새 정면으로 밀고 내려오는 독일 국방군의 공세를 막아냈으나 독일 국방군이 정면에서 견제하는 한편 서쪽으로 우회하여 유고슬라비아를 돌파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는 전략을 펼치면서 그리스의 다른 영토와 고립당하게 만드는 우회공격에 당한 후 결국 항복했다. 따라서 마지노선과 비슷한 운명을 맞고 말았다.

2. 배경

그리스 왕국의 동부 영토인 동마케도니아 트라키는 동(東)마케도니아와 서(西)트라키아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의 손에서 발칸 반도에 있는 국가들이 결성한 발칸 동맹이라는 동맹군이 빼앗은 곳이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빼앗은 영토를 분배하는 문제로 발칸 동맹을 구성하는 국가들끼리 전쟁이 붙은 것이 제2차 발칸 전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불가리아 왕국의 외교력 결여 문제로 인해 불가리아 혼자서 주변국 전체와 상대하는 것도 모자라서 선제공격까지 했다가 결국 중과부적으로 사면초가 신세가 되는 바람에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영토의 대부분을 도로 상실해버렸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그리스 왕국의 테살로니키 동쪽 영토였다. 원래 불가리아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곳이고 에게해로 직접 나갈 수 있는 해상 출구였기에 해당 지역을 상실한 후에는 흑해 방면의 항구밖에 없어서 튀르키예가 점유하는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야만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상실한 영토를 다시 재수복하겠다는 의지가 넘쳤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주도하는 동맹국에 불가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협상국 세르비아 왕국을 일시적으로 붕괴시켜서 망명정부를 만들게 하고 뒤늦게 협상국에 가입한 루마니아 왕국에게도 승리해서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남(南)도브루자를 재탈환하는 등의 행적을 보였다.

그리스 왕국의 경우에도 국론 분열 (Εθνικός Διχασμός) 사태로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1세가 친독일적인 중립국을 주장하는데 총리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협상국에 가입하자는 의견을 내면서 국왕이 총리를 해임하고 총리가 협상국까지 동원해서 대규모 압박을 넣어서 국왕을 퇴위시키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결국 그리스 왕국이 협상국에 가입했지만 국내가 혼란하고 전쟁준비가 안된 상황을 이용해서 불가리아 왕국이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 재탈환하고 테살로니키까지 노리려고 하자 협상국의 군대가 테살로니키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그리스를 침공한 동맹군과 대치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이러한 대립은 동맹국의 패배가 임박하면서 테살로니키 교두보에 여태까지 증강된 50만 협상군이 불가리아로 침공하기 시작하고 결국 불가리아 왕국이 가장 먼저 동맹국에서 탈퇴하면서 항복하고 뇌이 조약으로 빼앗은 영토를 모두 포기하면서 서트라키아도 그리스에 반환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제1차 세계 대전을 발칸 반도에서는 해당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국한하여 제3차 발칸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왕국은 동부 영토를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가리아 왕국이 아직 영토 재탈환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데다가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함으로서 이전의 세브르 조약으로 얻은 동트라키아를 로잔 조약으로 상실하고 국력이 하강한 그리스 왕국은 남은 동부 영토를 경제적으로 수비할 수단이 필요하였다.

3. 계획

이미 동부 영토에 루펠 요새 (Οχυρό Ρούπελ)가 있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1915년 가을에 협상국의 군대가 테살로니키에 교두보를 만든 것을 이유로 독일 제국군 불가리아군이 침공을 개시하여 카발라(Kavala), 드라마(Drama) , 세레스(Serres)를 점령하고 루펠 요새도 1916년 5월 13일에 점령하여 그리스 제4군단이 항복하고 7천명 이상의 군인이 포로로 잡혀서 괴를리츠(Görlitz)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사실이 있었다.

이렇게 쉽게 루펠 요새가 항복한 것은 당시 국왕편이었던 그리스 육군참모부의 전투불가 및 저항금지 명령이 해당 지역을 방어하던 그리스 제3군단과 제4군단에게 전달된 것이 주요 원인이었으나 애초에 전투를 진행하더라도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인 열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새 몇 개 가지고는 동부 영토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가능했다.

따라서 동부 영토 전체를 방어할 수 있는 방어선이 필요하였으며 해당 방어선은 일렬로 연결된 요새로 구성되어야 했다. 그리고 방어선의 주요 목적은 지속적으로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격군의 엄호를 담당함과 동시에 적이 기습을 가했을 때 효과적으로 방어하여 적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는 반격군은 원정군으로 변모한 후 보복을 위해 진격하여 적에게 톡톡한 댓가를 치르게 할 것이었다. 그리고 국경선의 다른 곳에서 적의 침공이 있을 경우에는 동부 국경에서 일부 병력을 증원군으로 이동시키더라도 요새 방어선이 충분하게 해당 지역의 방어를 담당할 수 있을 것이었다.

메탁사스선 건설 계획을 위해 조직된 요새화 연구 위원회 (Επιτροπή Μελετών Οχυρώσεων)에서 구체적으로는 아래의 4가지 목표가 있었다.
1 적의 갑작스런 침입을 즉각적으로 격퇴한다.
2 국경 거주 국민의 원활한 피난처를 보장한다.
3 국경 지역에 반격군의 신속한 집중을 보장한다.
4 원정군을 위해 특정 전선을 엄호하는 방어군을 확보한다.

그리고 현실을 고려한 항목도 존재했다. 그리스 왕국의 약한 국력을 감안하여 마지노선같이 전체가 탄탄한 방어선 건설은 곤란하며 중요 지점에 한해서 강력한 요새를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반격군의 은엄폐가 가능할 수준으로 요새화 수준을 줄이는 것이다. 실제로도 요새화 연구 위원회는 메탁사스선의 일부 구간에서 반격군이 방어의 중핵이 될 것이며 현재 시점에서 계획된 요새화 수준으로는 제대로 된 방어를 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요새화 수준을 늘리고 증설하는 것은 그리스 행정부가 판단할 일이라고 언급했다.

4. 건설

워낙 거대한 건설이기에 그리스 왕국의 총리 겸 국방장관인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직접 설계과 건설의 총괄 책임자로 부임하고 건축가, 공학자, 지리학자, 지형 전문가가 모인 요새화 연구 위원회뿐 아니라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의 교수와 학생도 참가하고 수도인 아테네와 외항인 피레아스에 위치한 관련 업체의 협조도 받았다.

그리고 건설에 필요한 시간도 부족했고 기밀도 유지해야 했기에 요새화 연구 위원회가 직접 메탁사스선을 건설할 예정 지역에 가서 실제 건설을 할 부지를 선정 및 사전에 필요한 작업을 진행한 후 국방부에 보고서를 제출하면 회의 후에 실제로 건설을 할 지 결정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메탁사스선에 설치할 요새와 지하 터널망, 관측소를 설계하고 각종 대전차 장애물을 개발하고 철강과 철근 콘크리트의 대량 양산도 진행하는 등 대규모의 국가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1936년 11월에서 1940년 7월까지 3년 6개월 동안 15억 그리스 드라크마의 비용과 3백만 그리스 드라크마의 인건비를 사용해서 21개의 요새를 중심으로 한 155km의 요새 방어선을 중마케도니아의 벨레스(Beles) 산부터 서트라키아의 주도인 코모티니 (Komotiní)까지 건설할 수 있었다. 원래는 튀르키예의 에디르네 근방이며 튀르키예와 국경선을 이루는 마리차강에 인접한 오르메니오 (Ormenio)까지 도달하는 300km의 전체 구간에 메탁사스선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시간 및 비용과 자재 문제로 하지 못했으며 메탁사스 선 동쪽 끝에서 마리차강까지는 몇 개의 소형 요새를 건설해서 불완전하게나마 방어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건설과 인프라 공사의 경우에는 새로운 도로를 115km 개설하고 기존 도로의 활용 및 수리를 92km 진행했다. 굴착공사는 지표면 굴착은 16,000㎥, 지하 굴착은 291,000㎥, 도로 건설용 굴착은 927,000㎥를 진행했다.

요새화 공사의 경우에는 철근 콘크리트는 108,000㎥를 투입하고 그냥 콘크리트는 68,000㎥을 투입했다. 그리고 외부 해자는 74km를 파고 요새와 중요 거점을 보호할 내부 해자는 14km를 팠다. 통신의 주요 수단인 전화선은 요새 외부에서 요새로 연결되는 구간은 1,216km을 깔았고 요새 내부 전화선은 약 70km를 깔아놓아서 통신에 지장이 없게 만들었다. 식수를 공급하는 급수관은 88km를 배치했으며 지하 통로의 경우에는 24km를 파놓았으며 지하 대피소와 연결통로는 13km를 파놓아서 병력과 주민의 대피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요새 전방과 요새와 요새 사이를 연결하는 방어선의 경우에는 철조망은 90km를 설치하고 각종 방어물에 소모된 시멘트는 66,000톤이며 철근 콘크리트는 12,000톤을 투입하였다.

5. 규모

메탁사스선은 기본적으로 방어선에 설치된 21개소의 요새가 방어력의 중점이 되며 요새 전면과 요새와 요새 사이에는 대전차호를 비롯하여 용치, 체코 고슴도치등의 각종 대전차 장애물로 3중 방어선을 깔아놓았다.

21개소의 요새는 서쪽의 벨레스 산부터 동쪽의 코모티니까지 일렬로 배치되었다.
1 Οχυρό Ποποτλίβιτσα 포포틀리비차 요새
2 Οχυρό Ιστίμπεη 이스티베이 요새
3 Οχυρό Κελκαγιά 켈카이아 요새
4 Οχυρό Αρπαλούκι 아르팔루키 요새
5 Οχυρό Παληουριώνες 팔리오리오네스 요새
6 Οχυρό Ρούπελ 루펠 요새
7 Οχυρό Καρατάς 카라타스 요새
8 Οχυρό Κάλη 칼리 요새
9 Οχυρό Περσέκ 페르세크 요새
10 Οχυρό Μπαμπαζώρα 바바조라 요새
11 Οχυρό Μαλιάγκα 말리아가 요새
12 Οχυρό Περιθώρι 페리토리 요새
13 Οχυρό Παρταλούσκα 파탈루스카 요새
14 Οχυρό Ντάσαβλη 다사블리 요새
15 Οχυρό Λίσσε 리세 요새
16 Οχυρό Πυραμιδοειδές 피라미드 요새
17 Οχυρό Καστίλλο 카스티요 요새
18 Οχυρό Άγιος Νικόλαος 아기오스 니콜라오스 요새
19 Οχυρό Μπαρτίσεβα 바르티셰바 요새
20 Οχυρό Εχίνος 에키노스 요새
21 Οχυρό Νυμφαία 님페아 요새

각각의 요새는 모두 독자적으로 전투가 가능하도록 건설되었다. 기본적으로 1개 이상의 지하진지가 포함된 밀폐된 건축물이며 지상에는 철근 콘크리트와 중장갑으로 보호되고 위장된 포안구와 총안구 및 관측시설만이 존재한다. 야포, 산포, 대전차포, 박격포, 기관총등의 화기는 요새 내부에 거치되며 병력들이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비밀 출입구를 포함한 여러가지 출입구가 존재한다. 요새 화기는 고정 배치된 것이 아니라 요새 소속이긴 하나 기본적으로는 야전군 소속이므로 유사시에 요새의 포곽에서 탈거해서 외부로 꺼내서 사용이 가능하다.

내부시설의 경우에는 지휘소, 장교 숙소, 내무반, 전화 교환기, 식당, 조리실, 물탱크, 위생시설, 15일 정도의 식량을 저장가능한 식량고, 탄약고, 수술까지 가능한 병원과 약국, 환기시설, 조명시설등이 존재하였다. 조명의 경우에는 전기로 작동하는 백열등과 석유로 작동하는 램프가 있었으며 손전등도 구비하였다. 전기는 외부로부터 공급받지만 발전기도 설치하였으며 식수의 경우에는 외부에서 수도관으로 공급된다.

만일 포위당하더라도 요새는 독자적으로 방어 및 전투가 가능하도록 외부 해자와 내부 해자를 요새 주변에 파놓았고 기본적으로 요새의 건설 위치가 감제고지등 중요 거점이라서 함락시키기가 까다로웠다. 가장 큰 요새인 루펠 요새의 경우에는 전체 방어선 길이인 155km 중에서 6.1km를 관할하며 해발 322m 고지에 만들어져서 정공법으로 상대하기가 힘들어졌다.

6. 특징

전술적으로는 가격 대비 성능이 높은 튼튼한 요새 방어선이지만 전략적으로는 주변 정세와 우회공격을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있다.

6.1. 장점

그리스 왕국의 미약한 경제력과 불충분한 군사력을 감안해본다면 메탁사스선은 불가리아 왕국이 다시 침공하더라도 효율적으로 방어하면서 증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했으며 동부 영토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물론 비용, 자재, 시간의 문제로 원래 생각하던 수준의 절반만 요새화를 이룰 수 있었지만 불가리아군의 입장에서는 메탁사스선을 무시하고 얻을 수 있는 영토는 극히 적으며 에게해까지의 출구를 확보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메탁사스선을 우회하자니 서쪽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산악지대로 인해 불가능하고 동쪽의 미완성된 구간으로 가는 것도 힘든데다가 메탁사스선의 방어병력이 이미 그런 수준의 우회는 생각해놓고 메탁사스선의 동쪽 끝에서 해안선까지 참호를 비롯한 야전방어시설을 만들어놓아서 역시 무리다.

결국 전면전으로 메탁사스선의 요새를 정면에서 공격해야 하는데 불가리아군의 능력으로는 요새를 포위공격하더라도 화력의 부족으로 끝장을 내지 못할 수준이었으며 실제로는 불가리아가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의 소탕도 제대로 못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결국 그리스군이 증원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6.2. 단점

주변 정세를 생각해본다면 딱 불가리아 방면 국경만 막아놓은 셈이라 전략적 우회에 취약하다. 만일 불가리아 왕국에 나치 독일같은 강력한 동맹국이 협력하면 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스 왕국의 방어체제를 보면 서쪽은 이탈리아령 알바니아를 차지한 이탈리아 왕국으로 인해 산악지대의 방어선을 잘 짜놓았고 동쪽은 메탁사스선으로 방호되는데 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중부 국경지대는 국경을 경비하는 소수 병력밖에는 없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실제로 중부 국경선을 사용하려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해야 하는데 불가리아 왕국이 강력한 동맹국이 없는 상태에서 만만치 않은 적을 더 늘리는 모험을 할 리가 없었고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에도 굳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해서 그리스의 본토에 상륙 작전을 할 확률이 높으므로 중부 국경선을 건드리지 않을 것으로 그리스 왕국이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과거의 세르비아 왕국처럼 단합되고 튼튼하며 끈질긴 왕국이 아니었다. 영토는 넓어졌으나 크로아티아같은 이민족으로 구성된 독립국을 억지로 합친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가진 문제가 그대로 발생하여 다민족에 분열상태인 국가를 세르비아가 억지로 강제 통합한 허우대만 멀쩡하고 내실이 없는 속 빈 강정같은 국가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무너진다면 그리스 왕국의 중부 국경선을 돌파하고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메탁사스선은 증원군을 못받고 고립당해서 전략적으로는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마지노선과 비슷한 문제가 터지는 것이다.

7. 실전

그리스 침공으로 그리스 왕국의 주력군이 서쪽 알바니아 전선에 집중된 사이에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순식간에 붕괴되자 메탁사스선을 우회하는 길이 열려버렸다.

메탁사스선을 공격한 군대는 독일 국방군 빌헬름 리스트 원수 휘하의 제12군으로 그 중에서 제18 산악군단, 제30군단, 제40 기갑군단에 속하는 기갑사단 2개, 보병사단 5개, 증강편성된 독립보병연대 2개가 650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메탁사스선을 공격했다. 이들은 전면에서 메탁사스선을 공격해서 견제하는 사이에 유고슬라비아 국경을 돌파하고 서쪽으로 우회해서 테살로니키를 점령하고 메탁사스선과 동부 영토를 그리스로부터 분리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여기에 대응하여 그리스군은 동부 마케도니아 야전군 사령관인 콘스탄티노스 바코플로스 중장의 지휘하에 5개 보병사단과 야포 188문, 대전차포 76문, 대공포 30문과 탱켓 40대로 구성된 65,110명으로 메탁사스선에서 전투에 돌입했다. 예정된 증원군이 오지 못한 상태에서 기갑전력은 이탈리아 왕국군에게서 노획한 L3이라 방어력이 미약하고 대전차용 화력이 없다시피하므로 답이 없었다.

그 외에도 유고슬리비아 국경선에 유고슬라비아군 제20사단이 있어서 1개 보병사단급 전력이 있었으나 전투력이 미약했다.

나치 독일군은 1941년 4월 6일부터 벌어진 3일간의 전투에서 메탁사스선의 전면을 돌파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제18 산악군단에 속한 제2 기갑사단이 유고슬라비아 국경선을 돌파하고 서쪽으로 우회해서 4월 9일에 테살로니키를 점령했다. 그래서 본토와 분리당해 포위당한 메탁사스선의 수비군이 4월 10일에 항복함으로서 전투가 마무리된다.

그래도 원래 나치 독일군이 생각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메탁사스선이 붕괴되지 않았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에 빌헬름 리스트 원수는 메탁사스선이 항복한 후에도 그리스군을 포로로 잡는 것을 자제하고 그리스군이 항복의 표시로 무기와 보급품을 현장에 남겨놓는다면 군기(軍旗)를 들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명예로운 항복에 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장교와 병사들에게 그리스군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는 그리스군을 포로로 잡지 않고 그리스의 군인들이 그리스의 민간인으로 스스로 자유롭게 돌아가도 좋다는 이야기지만 나치 독일군치고는 적에게 좋은 대접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메탁사스선 전투를 요새 전투 (Μάχη των Οχυρών)라고 기념하고 있다.

그리스 침공 이후에 불가리아 왕국 추축국으로 참여한 댓가로 자신들이 원하던 영토를 대부분 얻었으며 테살로니키와 아토스 산 근처까지 영토를 확보함으로서 영토 야욕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패배하면서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으로 국가가 바뀌고 같은 추축국인 루마니아에게 확보한 남도브루자를 제외한 모든 획득 영토를 포기한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에 국한해서 제4차 발칸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8. 현황

메탁사스선 자체는 1945년에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메탁사스선에 배치된 모든 요새는 2024년의 시점에도 외관과 내부시설이 모두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며 상당수의 요새는 여전히 그리스군이 군용으로 사용중이며 일부 요새는 관광객을 위해 개방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불가리아가 다시 한번 서트라키아를 포기하였으나 여전히 영토에 대한 야욕이 남아 있고 그리스 내전을 통해서 그리스 공산당을 지원하는 등 그리스에 혼란을 주었으며 특히 공산국가와 국경선을 마주한 북부 국경지대가 난장판이 되었는데 메탁사스선이 있는 동부 영토 지역이 특히 혼란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메탁사스선의 요새들은 그리스군에게 훌륭한 거점이 되었고 그리스 내전이 끝난 후에도 냉전시기에 공산국가의 침공을 방어하는 방어선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계속 현역상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