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네그로 주교후국의 군주에 대한 내용은 페타르 2세 페트로비치-네고시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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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1세 | 알렉산다르 1세 | 페타르 2세 | |
세르비아 공국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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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f0000><colcolor=#fff> 유고슬라비아 왕국 제3대 국왕
페타르 2세 Петар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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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3년 9월 6일 | ||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베오그라드 구왕궁 | |||
사망 | 1970년 11월 3일 (향년 47세) | ||
미국 콜로라도 덴버 | |||
재위기간 | 유고슬라비아 국왕 | ||
1934년 10월 9일 ~ 1945년 11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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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f0000><colcolor=#fff> 가문 |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 |
아버지 | 알렉산다르 1세 | ||
어머니 | 루마니아의 마리야[1] | ||
형제자매 | 토미슬라브, 안드레이 | ||
배우자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 1944년 결혼) | ||
자녀 | 알렉산다르 | ||
종교 | 세르비아 정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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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국왕, 세르비아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다. 루마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미하이 1세의 고종사촌이다.[2]2. 생애
아버지인 알렉산다르 1세가 1934년 10월 9일에 암살당하자 11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아직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당숙인 파블레 왕자[3]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파블레 왕자가 독단적으로 1941년 3월 25일 추축국에 가담하자 페타르 2세와 반독 성향의 측근들은 영국의 후원을 받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축출했고, 이틀 후 친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페타르 2세의 친위쿠데타는 파블레 왕자의 독단에 질려서 일으킨 것으로 독일에 반대한 것은 아니았다. 그래서 추축국과 계속 함께하려고 했지만 그의 쿠데타는 히틀러의 분노를 초래하여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되었다.[4]
독일군에 대항할 계획도 없었고 영국의 지원도 기대하기 힘들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독일군에게 속전속결로 11일만에 항복했다.[5] 페타르 2세는 그리스 왕국을 통해 탈출해 영국에 망명 정부를 세웠고, 추축국의 점령하에 떨어진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개의 나치 괴뢰 정권들로 찢어졌다.
조국에 전쟁을 초래하고, 추축국의 끔찍한 탄압을 받도록 만들었음에도 왕가가 국외로 망명하자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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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의 페타르 2세 |
1945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유고슬라비아에 귀국할 수 없게 되었다. 페타르 2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 권토중래를 위한 여러 활동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당시 제3세계 노선을 천명하며 동구권과 거리를 두고, 서방권과의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는 티토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높아 페타르 2세는 소외되었다. 결국 말년에는 간경변으로 투병하다가 1970년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사망, 미국 땅에 묻힌 유일한 유럽 군주가 되었다.
이후 1980년대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미국TV 드라마 다이너스타가 인기를 끌면서 페타르 2세에 대한 재조명이 일게 되었다.[6] 때마침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발흥했던 시기였고, 이때부터 페타르 2세 일가와 세르비아 당국은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7] 그래서 미국에 묻힌 페타르 2세의 유해를 귀환시키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다만 1990년대에는 세르비아가 유고 내전의 여파로 전범 국가로 악명이 높던 시절이었고, 2000년대 중반까지 몇 차례씩이나 대선 투표가 투표율 미달로 무효가 되던 혼란기라 이장 결정이 미뤄졌다. 2007년에 이장이 결정되었으며, 2013년에 와서야 자신의 모국인 세르비아의 카라조르제비치 왕실 영묘로 이장되었다.
3. 가족
1944년에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8]와 결혼하여 슬하에 외아들 알렉산다르 왕세자를 낳았다.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유고슬라비아의 왕세자 알렉산다르 (Alexander, Crown Prince of Yugoslavia) |
1945년 7월 17일 |
슬하 3남 |
|
카테리나 바티 |
페타르 2세의 증손주는 2명이며 모두 알렉산다르 왕세자의 차남 필리프의 소생이다.
4. 대중매체
- Hearts of Iron IV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의 왕으로 등장시킬 수 있다. 유고에서 쿠데타가 발발하면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보스포루스 DLC 이후로는 '대관식' 중점으로 파블레 왕자를 몰아내고 즉위할 수 있게 되었다.
-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세르비아에서 백수단 쿠데타가 발발하면 디미트리예 료티치나 페타르 지브코비치가 왕국을 재건하여 페타르 2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섭정으로 집권하는데, 나중에 친위 쿠데타로 섭정 체제를 종결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할 수 있다. 이 때 세 번의 선택지에서 한 번은 섭정의 뜻을 따라줘야만 섭정 체제를 종결할 수 있다.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주인공 유진 킴이 짧게 언급한다. 원 역사보다 티토와 서방 간의 관계가 돈독해지면서, 파멸 수준으로 인생이 꼬였다고.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원 역사처럼 파블레 왕자를 축출한 후 그리스를 끌어들여 알바니아를 침공하는 짓을 벌인다. 이에 독일이 당장 알바니아에서 손 떼라는 최후통첩을 날려오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려 했으나, 왜곡된 보도 탓에 다 이긴 전쟁이 독일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시위대가 베오그라드의 독일 대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결국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시작되자 루마니아로 도피한 후 원 역사처럼 미국으로 망명한다.
[1]
페르디난드 1세와
에든버러의 마리의 차녀.
[2]
외삼촌
카롤 2세의 아들, 한편으로 미하이 1세는 페타르 2세의 부인
알렉산드라 공주의 고종사촌이기도 하다.
[3]
페타르 1세의 막내 조카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올가 공주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파블레의 외손녀 중 한 명이
미국의 배우 캐서린 옥센버그라고 한다.(외동딸 옐리사베타의 장녀)
[4]
원래 나치 독일은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을 벗어나지 않으면 침공할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이탈리아 왕국의 침공시도를 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쿠데타가 영국의 지원을 받은 데다 반독일 성향 시민들이 독일 대사관을 공격하는 등 히틀러의 심기를 충분히 자극할 만한 일이 연이어 일어나 결국 침공을 불러왔다.
[5]
전쟁에서 독일군 전사자는 151명에 불과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체면을 구기게 만들었던 세르비아군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수도 베오그라드는
프리츠 클링겐베르크를 위시한 고작 6명의 친위대에게 함락당했다.
[6]
출연 배우 중에 페타르 2세 재위기에 섭정을 맡은
파블레 왕자의 외손녀인 캐서린 옥센버그(파블레의 딸 옐리사베타 공주의 장녀)가 있었다.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5촌 조카(에드워드의 어머니 마리나가 외할머니 올가 공주의 여동생)이자, 페타르 2세,
찰스 3세,
소피아 왕대비,
미하이 1세에게는 7촌 조카(외할머니
올가 공주가 찰스 3세의 아버지 필립 공, 소피아 왕대비의 아버지 파블로스, 미하이 1세의 어머니 엘레니 공주와 친사촌사이),
펠리페 6세와
윌리엄 왕세자와는 8촌간이다.
[7]
동생 토미슬라브는 1992년 세르비아로 영구 귀국한 뒤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과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세르비아 병사들을 위문지원하는 활동을 벌이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한 자리를 얻으려는 시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지만 중간에 틀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에서 계속 지내다가 2000년에 세르비아 땅에서 사망했다. 아들 알렉산다르는 1991년 한 차례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였으나 밀로셰비치 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여 귀국하지 못했다. 이후 밀로셰비치가 실각하고 2001년에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일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률이 통과되면서 영구 귀국하였다.
[8]
외할머니
에든버러의 마리와 알렉산드라의 친할머니
프로이센의 조피가 사촌이라서 팔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