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1:02:12

허저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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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虎痴) 호후(虎侯)
許褚
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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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장후(壯侯)
작위 관내후(關內侯) → 안창정후(安昌亭侯)[1] → 만세정후(萬歲亭侯) → 모향후(牟鄕侯)
최종직위 무위장군(武衛將軍)
성씨 (許)
(褚)
중강(仲康)
신체 190cm, 115cm(허리 둘레)
생몰 기간 ?년 ~ ?년[2]
고향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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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조조) 도위(都尉) → 교위(校尉) → 무위중랑장(武衛中郞將)
→ 중견장군(中堅將軍) → 무위장군(武衛將軍)
조위( 조비 조예) 무위장군(武衛將軍) }}}}}}}}}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양 전투2.3. 관도대전2.4. 하북 평정2.5. 관중 평정2.6. 장로 정벌2.7. 조조 휘하2.8. 죽음
3. 삼국지연의4. 평가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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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는 중강(仲康)으로 예주 패국 초현 사람.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신장이 8척(약 190cm)이고, 허리 크기가 10위(약 115cm)이고, 용모는 위엄있고 강인하며, 용맹함과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고 한다.[3]

후한 말, 청년과 종족 수천 명을 모아 함께 단단한 벽을 쌓아 도적들을 막았다. 당시 여남군 갈피(葛陂)의 적 1만여 명이 허저의 성벽을 공격했는데 허저의 무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었지만 목숨을 다해 싸워 피로가 극도에 달했다. 그들은 화살을 모두 사용했으므로, 성안에 있는 남녀에게 돌을 모아 간두(杆斗)처럼 만들어 성의 사방에 놓도록 명령했다. 허저가 돌을 날려 적을 맞추면, 맞는 것은 모두 부서졌으므로 적은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성벽 안에 양식이 다 떨어지자 허저는 거짓으로 적과 강화를 맺어, 적에게 소를 주고 식량과 바꾸었다. 적이 와서 소를 가지려 하자, 는 놀라 도망쳐 돌아왔다. 그래서 허저는 진영 앞으로 나가 한 손으로 소꼬리를 거꾸로 하여 끌어당겨 적군이 있는 쪽으로 백 보 남짓 걷도록 했다.[4] 적군은 그의 용맹스러움에 매우 놀랐으며, 결국에는 소조차도 감히 달아나지 못했다. 때문에 회(淮), 여(汝), 진(陳), 양(梁) 일대에서는 이 사실을 듣고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조조가 회수와 여수를 함락시키자, 허저는 병사를 이끌고 조조에게 귀순했다. 조조는 허저를 보고 용맹함을 느껴 말했다.
이는 나의 번쾌로다![5]

그날로 도위로 임명하여 조조를 호위하도록 하고, 허저를 따르는 협객들을 모두 조조의 호위를 맡은 근위병 '호사(虎士)'로 임명했다. 참고로 호사의 구성원들은 전위의 부하들이 중심이었다. 즉 조조는 허저에게 전위가 했던 일을 맡긴 것이다. 허저를 보고 죽은 전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렇게 호사는 전위의 부하들과 허저의 부하들로 이루어지게 된다.

2.2. 양 전투

허저는 조조를 따라 장수를 정벌하러 가서 앞 진영에 섰으며, 10,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므로 교위로 승진했다.[6]

처음, 허저가 호사로 임명된 사람들을 인솔하여 조조를 따라 정벌하러 갔는데 조조는 그들이 모두 장사(壯士)라고 생각하고 동시에 장수로 임명했다. 이후 공에 따라 장군이 된 열후가 몇 사람 있었고 도위, 교위가 된 사람이 100여 명 있었는데 모두 검객이었다.

2.3. 관도대전

조조를 따라 관도에서 원소를 토벌하였다. 그 당시 항상 조조를 호위하던 병사 서타 등이 음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허저가 항상 좌우에서 호위했으므로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행동하지 못했다. 허저가 항상 쉬러 갈 때를 기다렸다가 서타 등은 칼을 품고 조조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허저는 아래 진영에 있었는데 마음이 불안하여 즉시 돌아와 모셨다. 서타 등은 허저가 돌아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장막 속으로 들어와 허저를 보고 매우 놀랐다. 서타는 아연실색을 했고, 허저는 그들의 음모를 발각하고는 즉시 그들을 죽였다. 조조는 이 때문에 허저를 더욱 아끼고 신임했으며 나가고 들어올 때 그와 동행하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2.4. 하북 평정

조조를 따라 업성을 포위하여 공격 할 때, 용맹을 떨쳐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웠으므로 관내후라는 작위를 받았다.

2.5. 관중 평정

조조를 따라 동관에서 한수 마초를 토벌했다. 조조는 북쪽으로 가기 위해 황하를 건너기 전에 먼저 군대를 건너가게 하고, 허저와 호사 백여 명을 남쪽 해안에 주둔시켜 뒤를 끊도록 했다.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자, 허저는 오른손으로 배를 저어 나아가게 하여 가까스로 황하를 건넜다.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이후 조조는 한수, 마초 등과 단독으로 회담하였는데 좌우에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오직 허저 한 사람만을 데리고 있었다. 마초는 그의 힘에 의지하여 사사로이 앞으로 나가 조조를 죽이려고 했으나, 평소 허저의 용맹함을 듣고 조조를 수행하는 기병이 바로 허저라고 의심하며 조조에게 물었다.
조공에게는 호후(虎侯)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조조는 고개를 돌려 허저를 가리켰고, 허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초 등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각자 진영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쌍방이 교전을 하였다. 허저는 마초 등을 크게 무찌르고 무위중랑장으로 승진했다. '무위(武衛)'라는 호칭은 이로부터 나타났다. 군중에서는 허저의 힘이 호랑이 같고 용모가 백치 같았기 때문에 호치(虎癡)라고 불렀다. 때문에 마초가 허저를 호후라고 지칭하였으며, 천하가 모두 이와 같이 그를 일컫고 그의 성명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2.6. 장로 정벌

장로전 주석 위명신주에 따르면 양평산 위의 둔영들을 공격하는데 있어 제대로 이기지도 못하고 상처 입은 병사들이 많았다. 조조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군대를 데리고 후방을 막으면서 돌아가고자 하후돈과 허저를 보내 산 위의 병사들에게 소리쳐 돌아오도록 하였다. 전군이 다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밤중이라 길을 잃어 적의 군영으로 잘못 들어갔고 적들은 기습이 있는 줄 알고 모두 퇴산하였다.

시중 신비 유엽 등이 군대의 후방에 있으면서 하후돈과 허저에게 말했다.
관병이 이미 적군의 둔영을 점거했고 적들은 퇴주했습니다.
그 둘은 믿지 않았다. 하후돈이 나아가 친히 이를 보고 마침내 돌아와 조조에게 아뢰니 병사를 진군시켜 평정했으므로 운이 좋게 이긴 것이다.

2.7. 조조 휘하

허저는 성품이 신중하고 법령을 엄수했고, 질박하고 무겁고 말이 적었다. 조인이 형주에서 조조를 보러 왔는데, 조조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인은 들어간 후 허저와 궁전 밖에서 만났다. 조인이 허저를 불러들여 곧 말을 하려는데, 허저가 말했다.
왕(조조)께서 곧 나오십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와 어전으로 들어갔으므로, 조인은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했다. 어떤 사람이 허저를 질책하며 말했다.
정남장군(조인)은 조공(조조)의 종족이고 조정의 중신인데, 낮추어 존경하며 그대를 불렀거늘 당신은 무엇 때문에 거부했소?
허저가 말했다.
그는 비록 친족의 중신이지만, 결국은 외번(제후)입니다. 저는 조정 신하의 일원이므로 일이 있으면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방으로 들어가 속삭이겠습니까?
조조는 듣고 더욱 그를 좋아하였으며 중견장군으로 승진시켰다.

2.8. 죽음

조조가 세상을 떠나자 허저는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선혈을 토했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허저를 만세정후로 봉하였으며 무위장군으로 승진시켜 중군의 숙위(宿衛)를 담당하는 근위병을 지휘하게 하고, 측근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도록 했다.

조예가 즉위한 후, 허저를 모향후로 봉하고 식읍 700호를 주었으며, 그의 아들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으며 얼마 안되어 허저가 죽자, 시호를 장후(壯侯)라고 했다. 아들 허의가 작위를 계승했고, 허저의 형 허정은 군공으로 인해 진위장군의 관직을 받아 행차하는 길을 순시하는 호분(虎賁)을 지휘하였다.

태화 연간(227년 ~ 232년)에 황제는 허저의 충효를 생각하고 조서를 내려 칭찬했고, 또 허저의 자손 두 명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했다. 허의 종회에게 살해되었다. 태시 초(265년), 아들 허종이 작위를 이었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주군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인정을 받아서인지 조조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일대일 대결 장면이 여럿 추가되는 등 상당한 푸쉬를 받는다. 물론 연의에서 허저가 벌이는 일대일 대결은 모두 픽션이다. 그리고 허저가 조조군에 들어온 시기가 상당히 앞당겨졌는데 정사에서 허저가 조조군에 들어온 시기는 전위가 완성 전투에서 사망한 이후이다. 반면 연의에서는 조조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연주의 황건적을 토벌할 때 조조군에 들어온다.

조조군이 연주에서 황건적의 잔당과 싸웠을 때, 하의라고 하는 황건적의 총대장이 나와, 조조에게 단판 승부를 도전해오는 장면이 있다. 조조는 전위에게 명령하여, 하의를 붙잡는 것을 행하도록 하였다. 그때 허저가 나타나 하의를 붙잡아 데리고 가려고 했다. 전위는 허저를 뒤쫓아 하의를 내놓으라면서 맞대결을 벌였지만 박빙으로 싸우게 되었다. 이 허저의 용맹을 들은 조조는 "그 정도의 사내를 죽이는 것은 아깝다."라고 생각하여, 부하들에게 올가미를 놓게 하고 붙들어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그 뒤 전위가 허저와 싸우고 있는 곳에서 신호를 받아 전위는 일부러 달아났다. 허저는 전위를 쫓아갔지만, 도중에 허저는 덫에 걸려 조조의 아래로 끌려갔다. 조조는 다른 적장과 같은 취급을 받는 허저를 보면서 "누가 이런 대접을 하라고 했나."라고 말하며 곧 줄을 풀어주어 허저에게 사과를 하고, 부하가 되는 것을 권유하였다. 허저는 자신을 부하로 삼아준다면 기꺼이 맡아 모신다고 하였다. 연의에서의 이런 케미 때문인지 흔히 전위와 허저가 오랫동안 같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사에서 허저는 전위가 사망한 후에 조조군에 들어왔으니 실제로 그들이 서로 만난 적은 없다.

조조군이 여포와 싸울 때 여포와 단기접전을 벌여 20합을 겨루기도 하였다. 실력에서 밀렸다는 묘사는 없지만 여포의 실력을 잘 아는 조조는 혼자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서 휘하 맹장들을 죄다 출격 시킨다.

그 유명한 논영회 장면에서도 잠깐 등장하는데, 유비에게 조조의 초청 소식을 전하는 사자 역할로 등장한다.

정작 관도대전에서는 관우를 띄워주기 위해 활약 장면이 없다. 관도대전이 종료된 이후에는 조조의 친구라는 위세를 믿고 방자하게 허유의 태도에 격분하여 홧김에 허유를 죽여버린다. 하지만 허유의 오만한 태도에 내심 질색했던 조조는 허저에게 가벼운 벌만 내리는 것으로 그친다.

여남에서는 조운과 30여 합을 싸운다. 서황, 방덕과도 50합을 싸웠다. 이외에 하후연이 정공법으로 잡지 못한 양임을 양앙과 함께 2vs1 상황에서 털어버렸다. 또한 한당 주태를 한꺼번에 상대하면서도 안 밀리고 30합을 버티는 등 여러 번 용맹을 떨쳤다.

마초 조조의 회담 중 조조를 호위하던 허저는 마초를 노려보는 것도 모자라 "내가 바로 초군의 허저다! 무슨 일로 날 찾느냐!"라고 외쳤다. 거기에 눌린 마초가 진영으로 돌아갔으며, 양군 모두 "마초도 허저만은 두려워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마초와의 결투에서는 2라운드까지 하다가 땀을 많이 흘려서 갑옷을 벗어버리고 웃통으로 마초와 싸우고, 그 와중에 창을 너무 크게 휘둘러 마초의 창에 찔릴 위기에 처하자 얼른 자기 창을 버리고 마초의 창을 뺏으려 하다가 기합과 함께 창을 분질러버리는 장면도 나온다. 그야말로 남자의 로망이었다.

한중 공방전에서는 잠시나마 장비 띄워주기의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군량 수송 임무를 맡았다가 부하들이 건네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장비가 기습을 걸어오자 취한 상태로 맞서 싸우다 부상당하고 후퇴했다.

조조 사후 조비의 명으로 조식과 그의 부하를 사로잡은 이후 어째서인지 언급되는 일이 없다. 사실 연의에서 허저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부분 무렵은 여러 네임드들이 사망하는 전개가 계속 나오다보니 따로 챙겨줄 여유가 없기도 하고, 실제로도 조조 사후 기록에 종군 내용이 없기도 하다.

몇몇 삼국지연의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조조가 중병에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가던 중 조조가 죽인 사람들의 귀신 무리나 관우에게 의해 공격받아 낙마하고 역시 중병에 걸려 조조와 같은 시기에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4. 평가

여러 전장에서 종군하였지만 지휘관이라기보다는 조조의 보디가드 역할, 또는 근위병을 지휘하여 군사적인 재능을 요하는 직책을 맡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용력과 무예가 뛰어났다는 사실만은 명백한데, 정사에서도 일신의 무예가 최강급임을 밝히고 있다. 애초에 보디가드나 근위병은 중요 인물을 지키는 직책인 만큼 용력과 무예가 뛰어나지 않으면 결코 이름을 남길 수 없다.

허저의 시호인 장후(壯侯)는 일반적으로 군공이 많지 않으면 내려지지 않는 칭호다. 서황, 장합, 문빙, 방덕, 조휴 등 삼국시대의 이름 높은 명장들이 받은 칭호이며 군의 요직이나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받지 못하는 시호다.[7] 시호로 미루어 봤을 때 허저의 역할은 친위대를 이끌며 조조를 호위하는 역할만이 아닌, 때로는 군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투입되었을 확률이 높다.[8]

근본도 없는 무식쟁이 취급하는 사람도 있는데, 처음 등장했을 때 독립 세력으로 종족 수천을 거느리고 이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한데다 조조에게 항복할 때도 부하들을 거느렸던 것을 본다면 어느정도 집안이 되는 호족에 해당되지 않나 추측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보통 근본이 없는 사람은 전위처럼 자도 없다는 것이 근거.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호치(호랑이 + 백치)라고 불렀다는 점과 조인과의 일화를 보면 이런 사람에게 붙는 치(痴) 자는 보통 무식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강직한 사람, 우직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9] 그리고 호족처럼 묘사가 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수천의 종족은 당시 인구상 불가능하며, 그저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이끌었다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옳다. 또한 반드시 호족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일반적인 지방 유력자 가문의 일원이었다면 기록이 풍부하고 끝도 깔끔했던 허저인 만큼 그에 관련된 기록이 안 남을 수가 없다. 또한 뒤에 나타나는 여러 일화에 나타난 질박한 성품, 예의 따지기 좋아하던 당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행동들을 보면 전통적인 호족층으로 간주하는 것이 쉽지 않은 면이 있다. 호족이 그냥 지방에서 돈많아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대의 호족은 귀족 계층이었다. 당시의 기본이 유학이며, 학문을 통해 중앙에 나가는 것 또한 노리는 사람이 다수였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유교적 의례에 충실한 면모를 보였는데 허저에 대한 기록은 이와 너무 상충하는 것. 결정적으로 당시에는 호족이 아니라도 힘 꽤나 쓰는 친구들은 지방에서 세력을 가질 수 있었던 난세였고, 특히 허저가 종족을 모아 지역을 지키던 시기는 해당 지역이 황건적에 의해 한번 휩쓸리고 난 뒤였다는 것도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핵심은 지방 호족이 아니라 협객층이었을 수 있다는 말. 더욱이 호치의 이명에 걸맞게 허저는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싸움에 결코 물러남이 없는 위인이었다.

다만 조방 시대에 전위 위나라 공신으로 배향되는데도 불구하고 허저는 조조의 묘당에 배향되지 못 했다. 배송지는 이를 비판하며 동관의 위기는 허저가 아니면 구하지도 못 했을 것이며 전위보다도 그 공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여담으로 정사《허저전》에서 묘사된 성격은 용맹하고 두려움을 몰랐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하면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쑥쓰러워했다고 하는데, 전장에서의 용맹한 모습과는 달리 평소에는 순박하고 내성적인 면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조군의 정예 부대라고 볼 수 있는 장패 청주병, 조순 호표기는 유명해서 대중매체에서 잘 등장하는데, 어째 허저의 호사(虎士)가 나오는 대중매체는 찾아볼 수가 없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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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존호주(上尊號奏)의 기록 [2] 230년경으로 추정. [3] 허리 둘레와 신장이 이 정도이니 체중은 적어도 120kg 이상으로 추정된다. 신체 시뮬레이터로 측정해보면 133kg으로 추정된다. 쉽게 말하자면 ' 근육돼지'. 이 정도로 큰 덩치를 가진 사람은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한 거구인 만큼,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현대보다 평균 신장이 더 작았던 당대에는 거의 거인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근육질의 거구를 가진 영화배우 드웨인 존슨의 신장이 193cm에 체중은 130kg 정도이니 허저 역시 그와 비슷한 수준의 체격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이점은 사서 기록으로도 제갈량이나 조운(조운 별전) 등 8척 장신으로 표현된 사람들은 여럿 있어도 구체적인 허리둘레를 언급한 이는 거의 없다. 심지어 죽을 당시 비대하다는 묘사가 나오는 동탁도 허리둘레 얘기는 없다. 그만큼 허저가 눈에 띌 정도의 엄청난 거구였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비만의 의미가 아니라 덩치가 크고 힘이 매우 센 장수였다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4] 물론 이 역시 엄청난 괴력이지만 고대는 품종개량이 되어있지 않아 현재의 소보다 덩치가 작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지금의 한우는 700kg을 넘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1970년대만 해도 18개월 기준 평균 290kg 정도였다. [5] 번쾌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의 개국공신이자 맹장이기도 하다. 순욱 장자방이라 일컬은 것처럼 허저를 번쾌에 비유한 건 조조의 야심을 은연중에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6] 허저가 혼자서 10,000명을 죽인 게 아니라 허저가 장군으로서 군을 이끌고 앞장서고, 조조군이 적병을 10,000명 죽였다는 의미다. 이것도 수사적인 묘사이고 실제로 1만명을 죽이진 않았을 것이다. [7] 환가처럼 군공이 없는데도 시호로 받은 예외가 있다. [8] 예로부터 정예 친위대는 그 자체가 전략 예비대로 절체 절명의 순간에 전세 역전을 위해 투입되곤 했다. 단순히 군주 주변에 병풍처럼 서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 [9] 애초에 현대로 따지면 사단장급까지 올라갔던 사람이 싸움만 잘 하는 단순 무식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