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6:15:22

이전(삼국지)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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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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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민후(愍侯)
최종직위 파로장군(破虜將軍)
성씨 (李)
(典)
만성(曼成)
생몰기간 181년? ~ 216년?[1]
고향 연주(兗州) 산양군(山陽郡) 거야현(鋸野縣)


[clearfix]

1. 개요

후한 말의 호족이자 조조 휘하의 장수로 는 만성(曼成). 연주 산양군 거야현 사람.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이전의 숙부 이건은 영웅다운 기상이 있었으며, 빈객 수천명을 모아 승씨현에 주둔시켰다. 초평 연간( 190년 ~ 193년)에 군사들을 이끌고 조조를 따라 수장에서 황건군을 무찔렀으며, 또 조조를 따라가 원술을 공격하여 서주를 정벌했다. 여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이건을 승씨로 돌려보내 각 현을 위로하도록 했다. 여포의 별가 설란과 치중 이봉은 이건을 불러 함께 조조를 모반하려고 했는데, 이건이 듣지 않자 죽였다.

조조는 이건의 아들 이정(李整)을 보내 이건의 군대를 지휘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설란, 이봉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정은 설란과 이봉을 무찌르고, 이정이 조조를 따라 연주의 각 현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청주 자사로 약간 승진했다. 이정이 죽은 후, 이전은 영음의 현령이 되었고, 중랑장을 겸임하여 이정의 군대를 통솔하고, 이호 태수로 승진했다.

《위서》에 따르면 이전은 어린 시절 학문을 좋아했지만, 군사와 관련있는 일은 싫어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가서 《 춘추좌씨전》을 읽었으며 독서를 광범위하게 했다. 조조는 그의 학문을 좋아함을 좋아하였으므로 백성을 다스려 보도록 한 것이다.

2.2. 관도대전

그 당시 조조는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고, 이전은 일족과 부하들을 인솔하고, 곡물과 비단을 수송하여 군대에 공급하였다. 원소가 패한 후, 이전은 비장군으로 임명되어 안민현에 주둔했다.

2.3. 여양 전투

조조가 여양에서 원담 원상을 공격할 때, 이전과 정욱 등을 보내 군량미를 수송하도록 했다. 마침 원상은 위군 태수 고번에게 병사를 이끌고 황하 근처에 주둔하도록 명령하고, 물길을 끊도록 했다. 조조가 이전과 정욱에게 명했다.
만일 배가 건널 수 없으면, 내려와 육로로 운송하도록 하시오.
이전은 장수들과 상의하여 말했다.
고번의 군대는 무장한 자가 적고 물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게으른 마음이 있어, 그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국가를 이롭게 한다면 독자적으로 결단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니, 응당 빨리 적을 공격해야만 됩니다.
정욱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고번을 공격하여 그를 무찔러 물길이 통하게 되었다.

2.4. 박망파 전투

유표 유비를 보내 북방을 침략하도록 하고 섭(葉)현에 이르렀다. 조조는 이전을 보내 하후돈을 따라가서 유비와 대항하도록 했다. 유비는 하루아침에 군영을 불태우고 떠났으며, 하후돈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고 하는데 이전이 말했다.
적군이 이유도 없이 물러났으므로 틀림없이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의심됩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좁고 초목이 우거져 있으므로 추격할 수 없습니다.
하후돈은 듣지 않고 우금과 함께 그를 추격하였고, 이전은 남아 군영을 지켰다. 하후돈 등은 과연 적군이 매복해 있는 가운데로 들어가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전이 구하러 가자, 유비는 구원병이 도착한 것을 보고 흩어져 물러났다.

2.5. 하북 평정

또 조조를 따라 업성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업성이 평정된 후, 악진과 함께 호관으로 가서 고간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며, 장광에 이르러 관승을 공격하여 모두 승리했다. 포로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도정후에 봉해졌다.

그의 종족과 부하 3천여 명은 승씨로 이주했지만, 위군으로 이주하기를 자발적으로 청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후한의 경순을 본받을 셈이오?
이전이 대답했다.
정벌하고 아직 휴식을 취하지 못했으므로 응당 수도 이외 지역을 충실히 하여 사방을 제어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경순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침내 이전은 부하와 종족 1만 3천여 명을 업성으로 이주시켰다. 조조는 그것을 가상히 여겨 파로장군으로 승진시켰다.

2.6. 형주 정벌

<조엄전>에 따르면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조엄에게 장릉 태수를 겸임하도록 하고, 도독호군으로 바꿔 임명하고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해 등의 7군을 통솔하게 했다.

2.7. 2차 합비 공방전

<장료전>에 따르면 조조는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온 뒤, 장료를 보내 악진, 이전 등과 함께 7천 여 명을 이끌고 합비에 주둔케 했다. 조조가 장로를 정벌할 때 호군 설제에 교서를 주었는데 서신의 겉봉에는 적이 도착하면 뜯어보라고 적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손권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자 함께 뜯어보았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약 손권이 오면 장료, 이전 장군은 출전하고 악진 장군은 수비하고 호군(설제)은 싸움에 참여하지 마시오.
제장들이 모두 의심스러워 하자 장료가 말했다.
공께서는 원정하느라 바깥에 계시므로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린다면 적군이 우리를 깨뜨릴 것이 분명하오. 이 교서의 뜻은, 적이 미처 집결하기 전에 요격해 그들의 예기를 꺾어 군심을 안정시켜야 지켜 낼 수 있다는 것이오.
이전 또한 장료와 의견이 같았다.

이전은 장료, 악진과 함께 합비성에서 주둔했는데, 손권이 병사를 이끌고 합비성을 포위하자, 장료가 조조의 출전 지시를 받들려고 했다.

악진, 이전, 장료는 평소에 화목하지 않았는데, 장료는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자,[2] 이전이 분개하여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 당신의 계책이 옳은지 틀린지를 볼 뿐이지, 내가 어떻게 사사로운 원한으로 공의를 돌아보지 않겠소!
그리고는 군사들을 인솔하여 장료와 함께 손권을 무찔러 내쫓았다. 이전은 식읍 1백호가 늘어나 이전 것과 합쳐 3백호가 되었다.

2.8. 죽음

이전은 학문을 숭상하고 유가의 단아함을 숭상하며, 여러 장수들과 공을 다투지 않았다. 그는 재주와 덕망이 있는 사대부들을 존경하고, 예의를 잃을까 두려와하는 공손함이 있었으므로 군중에서는 그를 장자(長者)라고 불렀다.

36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이정(李禎)이 작위를 계승했다.

<장료전>에 따르면 225년, 조비는 장료와 이전의 합비에서의 공을 추념하며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합비 전투에서 장료와 이전은 보졸 8백으로 적군 10만을 깨뜨렸으니 예로부터 용병함에 있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장료와 이전의 식읍 중 각각 1백 호를 떼어내 그들의 아들 한 명 씩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리도록 하라.
조비가 제위에 오른 후, 이전이 합비성에서 세운 공적을 추념하여 그의 식읍을 1백호 증가시키고, 이전의 한 아들에게 관내후라는 작위를 주었으며, 식읍 1백 호를 주었다.

이전의 시호를 민후(愍候)라고 했다.

제왕기에 따르면 조방은 조서를 내려 고인이 된 공신들을 조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 중에는 이전도 포함되어 있다.

3. 삼국지연의

이전이 부장급으로만 딸려서 나오지만 여러번 적의 책략을 간파해 상관에게 진언하는 지장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숙부 이건과 사촌 이정의 이야기가 생략되어서 이전이 그들의 역할까지 떠맡아 조조군 거병 초기부터 합류한 장수로 나온다. 황소를 포로로 잡는 전공이 추가되었다.

206년, 조인이 유표의 객장으로 신야에 주둔 중인 유비를 공격하겠다고 하자 부하 이전은 조조에게 원군을 요청해야 한다고 신중책을 말해 조인과 대립했다. 이전의 걱정대로 조인은 유비의 군사인 서서에게 '팔문금쇄의 진'이 깨트려지고 격퇴당한다. 이 전투는 정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207년, 하후돈이 부하로 우금, 이전을 데리고 신야 부근의 박망파를 공격한다. 이전은 여기서도 유비군의 퇴각하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 하후돈의 추격을 말렸지만 하후돈은 듣지 않고 추격하다가 제갈량의 화계에 당한다. 이전은 하후돈을 말렸던 것에 대해 조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연의에서 박망파 전투의 주역이 제갈량으로 나오지만 정사에서 승리를 이끈 사람은 유비였고 시기도 더 앞이다.

장판파에서 유비를 추격하던 도중 장비가 먼지를 일으켜 복병이 있는 것처럼 한 뒤 장판교에서 우레같은 소리를 질러 조조군을 물리게 한다. 다시 조조가 장판교로 향하니 장비가 다리를 끊어 놓았다. 이를 보고 사실 복병이 없었다고 눈치챈 조조는 추격을 재개하지만 도중 이전이 제갈량의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진언하자 조조는 이전의 말을 듣고 퇴각했다.

이후 장료, 악진, 이전이 합비의 수비를 함께 맡는데 악진을 쫓아가던 오의 무장 송겸을 이전이 활로 사살한다. 참고로 정사에서 송겸은 이 때 죽은게 아니다. 215년 합비공방전에서 이전은 장료, 악진과 함께 활약하고, 그 뒤 유수구 전투에 참전하는 장수로 언급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문열은 평역에서 이전을 심술쟁이 같은 성격이라고 디스했는데, 이전이 인성 칭찬을 받는 일이 많았지 험담을 받는 일이 없었다.

4. 기타

이전李典 - 문무예지를 겸비한 조조의 양장良將

각종 삼국지 창작물에서는 연의의 이미지가 많이 반영되어 조조 거병 때부터 활약한 고참 무장으로 묘사되지만, 상술되었듯 이전은 조조 거병 초기 멤버가 아니라 조조 세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합류한 장수다. 정사의 본인 열전도 초반에는 숙부인 이건의 일대기가 묘사되다가 이건이 여포군에 죽게 되며 본인 열전의 주인공 자리를 되찾는 느낌으로 서술되어 있다. 합비 공방전 이후 36세에 사망했으니 조금 더 살았다면 조비, 조예 치세까지도 활약할 수 있었던 차세대 인물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생몰년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활약 연대로 유추해 보면 대략 사마의(179년생)나 제갈량(181년생), 손권(182년생), 육손(183년생)과 동년배였을 가능성이 높다.

장료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게 이전의 숙부 이건이 여포군에 의해 사망했는데 그 여포군 출신인 장료가 곱게 보였을 리 만무하다. 어쨌든 같은 조조군 소속이니 죽이네 살리네 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이전은 대놓고 장료를 싫어하는 티를 내고 다녔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말 필요하다면 미움을 잠시 접어두고 협력을 하기도 했다. 합비공방전 때가 대표적.

자신의 일족, 종족과 함께하는 기록이 많아서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이전과 장패는 조조에게 가솔들을 이주시킨다고 하여 조조의 환심을 산 바 있다. 이들은 조조가 일방적으로 부리는 부하 장수보다는 세습되어 내려오는 사병을 이끌고 조조를 따르는 유력 호족으로 보이며 이전이 업성에 가솔을 이주하는 것은 세습되어오는 자주적인 군권을 버리고 조조에게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위나라 자체가 조조라는 강력한 군벌세력이 연주, 여남 일대 호족세력과의 연대와 지지를 기반으로 성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봤을 때 이전 역시 숙부인 이건과 함께 산양 지역의 호족세력으로 추정된다.[3]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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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년 35세. 여담으로, 217년에 중국에 역병이 크게 퍼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래서 217년에 건안칠자 중 5명이 죽음을 맞거나 사마랑, 노숙도 이 해에 죽었고, 능통도 이 해에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쩌면 이 해에 퍼진 전염병에 걸려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2] 소설 비열한 성자 조조에서는 장료가 이전의 숙부인 이건을 전쟁에서 죽였는데 이후 장료가 항복하자 조조가 용서하라고 이전에게 강요해서 이전이 장료에게 한을 품고도 복수할 수 없어서 슬퍼했다고 한다. 감녕, 능통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야기인 듯하다. 정사상으로는 이건이 장료에게 직접 목숨을 잃지는 않고, 설란 이봉에게 뒤통수 맞아 죽은 거로 나온다. 다만 설란과 이봉이 여포의 부하가 됐으니 결국에는 여포 세력의 장수에 의해 숙부를 잃은 건 맞다. 그렇기에 원래 여포와 동맹관계였던 장료와 이전 간의 관계도 꽤 서먹했을 것이다. 악진의 경우에는 장료와 그다지 접점이 없지만, 정황상 조조군 초기부터 활약해 온 인물로 조조가 여포/장료 연합과 박터지게 싸웠을 때 조조 휘하 무장으로서 여포군을 무찌르기도 했었다. 요컨대 적이었던 사람을 상전으로 모시게 된 격. [3] 애당초 삼국지에 등장하는 어지간한 모사나 장수들은 각종 현대 창작물에서 조조, 유비, 손씨 일족 등의 가신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호족이거나 호족 집안 출신이다. 당장에 조조의 조씨 일족부터가 고향 초의 호족 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