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4:00:06

진궁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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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宮
진궁
파일:attachment/b64543a98226cffcbe4eeacab9014a90f603ea66.jpg
성씨 (陳)
(宮)
공대(公臺)
생몰기간 ? ~ 199년 2월 7일[1]
고향 연주(兖州) 동군(東郡) 무양현(武陽縣)
義釋曹阿瞞(의석조아만) : 의리로 조아만(조조의 아명(兒名))을 풀어주고,
中牟解印來(중모해인래) : 중모에 관인을 버리고 따라나서네.
誰知白門下(수지백문하) : 어찌 알았으랴 백문 아래에 버려질 줄이야,
真個負公臺(진개부공대) : 아깝고도 아깝도다 공대여.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연주 구원전2.2. 연주에서의 반란2.3. 군주와 반목하는 참모2.4. 여포의 몰락2.5. 죽음
3. 두 번 배신한 이유4. 삼국지연의5. 평가
5.1. 정사5.2. 연의
6.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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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조조, 장막, 여포를 섬겼던 모사이다. 는 공대(公臺)로 연주 동군 무양현 사람이다. 《 정사 삼국지》 <여포전>에 주석으로 열전이 실려있다.

2. 정사 삼국지

2.1. 연주 구원전

진궁의 성격은 강직하고 장렬했으며 어려서부터 나라 안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과 모두 서로 교우했다.[2]

조조가 막 거병하였을 때 모사(謀士)로서 그와 함께 일했다. 연주 구원전에서 진궁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3] 당시에 연주 자사 유대 연주를 공격한 황건적에 의해 죽으니, 진궁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조조를 연주으로 삼아 황건적으로부터 연주를 구원하자고 하였다. 진궁의 설변을 들은 포신 등은 이를 옳다고 여겨 조조를 맞이해 연주목을 겸하게 했다. 조조는 황건적을 격파했지만 포신은 전투 중에 죽었다.

조조하면 떠오르는 도시인 허창 진류가 연주에 속해있다. 연주를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조조에게 가져왔으니 조조가 진궁과 포신에게 얼마나 고마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2.2. 연주에서의 반란

조조가 거병하였을 때 진궁은 모사로서 조조와 함께 일했다. 여포의 아내 엄씨의 말에 따르면 조조는 진궁을 어린아이처럼 귀하게 대했는데도 진궁은 조조를 떠났다.[4] 진궁이 조조를 떠난 이유에 대해 여포전 주석에는 "스스로 의심을 품었다."라고만 되어있다.

진궁이 조조를 떠난 원인에 대해서 김경한은 불편한 삼국지에서 조조의 서주 대학살에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고, 이중톈은 삼국지강의에서 조조가 변양을 죽인 일 때문이라고 추측했다.[5]

조조의 2번째 서주 침공 무렵에 동료 모사였던 왕해, 허사, 그리고 장막의 동생이던 장초와 함께 장막을 설득해 여포를 연주목으로 내세워 조조를 공격하자고 설득했다. 연주의 인사들이 여포에게 귀의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실상은 이름값이 높은 여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이고, 장막과 여포의 연합 관계였다고 봐야 타당하다.
"작금에 천하가 갈라지고 무너져서 영웅호걸들이 나란히 일어나고 있는데, 그대는 천리나 되는 지역의 무리를 거느리고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맡고도 칼자루를 쥔 채 사방을 둘러보고만 있으니, (다른 제후들과 같이) 충분히 호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연주의 군대는 동쪽으로 정벌을 간 탓에 (연주가) 비어있습니다. 여포는 장사이므로 그와 싸워서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를 임시로 맞이하여 함께 연주를 다스리고 있다가, 천하의 형세를 보아 때에 따라 사태가 변하기를 기다려 응대한다면 이 역시 한 시대를 종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무렵 연주에서 저지른 학살과 서주 대학살 때문에 조조의 악명이 워낙 높았던 데다가 장막과 여포 같은 거물들이 합세하여 조조를 공격하였더니, 연주 전지역이 이에 호응하여 조조는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순욱 정욱의 활약으로 인하여 조조는 연주의 일부 지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포군은 조조를 거듭 공격하여 몰아세웠으나, 그 해 메뚜기떼가 극성을 부려 군량이 부족해졌으므로 결국 결정타를 가하지 못한 채로 군사를 물리어 두 군세가 대치한 채로 싸움은 장기전이 되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를 수습한 조조는 이듬해부터 점차 반격을 거듭하여 군현을 되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정도에서 여포를 대파하여 전세는 조조에게로 기울었다. 비록 연주 전지역이 장막에게 호응했다지만, 맹주의 확고한 지휘력이 미치지 못하는 연합체의 특성상 단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6]

상황이 불리해지자 여포는 달아나 서주의 유비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진궁을 비롯한 장막의 수하들 또한 서주로 달아났다. 장막은 원술에게 구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수춘으로 떠났고, 장초는 장막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는지 옹구[7]에 남는다. 하지만 장막은 수춘에 다다르기 전에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장초는 조조의 군세에 포위되어 아무런 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수 개월간 항전하다가 결국 성이 함락되자 자살했다. 이 과정에서 여포는 영지를 잃어버렸고 진궁은 자연스럽게 여포군 소속이 되었다.

2.3. 군주와 반목하는 참모

땅을 잃은 여포군은 유비군의 뒤통수를 쳐서 성공적으로 서주의 하비성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여포는 유비군을 말살시키지 않고 원술군의 뒤통수를 쳐서 유비군의 생존을 보장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진궁은 여포를 위해서 여러 계책을 냈지만 여포는 매번 그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8] 그리고 조조처럼 막나가자 조조와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진궁은 학맹, 조성 등과 반란을 계획했는데, 학맹의 부장인 조성이 학맹을 배반하는 바람에 학맹과 조성이 싸우다가 함께 상처를 입었다. 학맹은 고순에게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여포 앞으로 나아간 조성이 "사실 학맹은 원술의 계책을 따랐을 뿐이고 진궁도 같이 일을 공모했다."라고 말하자 진궁은 얼굴을 붉힐 뿐 반박하지 못하였다. 대장이었던 진궁을 제거할 경우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을 우려한 여포는 학맹의 반란 사건을 불문에 부쳤다.[9]

2.4. 여포의 몰락

그 후 정치적 상황의 흐름을 읽지 못한 여포가 조조와 연합하는 최악의 자충수를 두었다. 조조와 여포의 연대에 원술이 크게 패했으나 결국 논공행상에서 여포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었고, 여포가 말이 약탈당한 것을 이유로 유비를 치자 조조는 여기에 개입해 여포를 공격하였다. 조조군이 팽성에 이르자 진궁이 여포에게 즉시 편안히 쉰 군으로 지쳐있는 조조군을 공격하기를 청했으나 여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10] 이때 진등 부자는 조조에게 붙어 반기를 들었으며, 여포는 뒤늦게야 원술과 연합하여 요격을 시도했지만 패하여 성렴이 사로잡히고 하비는 포위되었다. 조조는 여포에게 편지를 보내서 여포의 투항을 유도하였다. 편지에 설득당한 여포가 투항하려고 했으나, 진궁 등이 자신들의 죄가 크다며 저지했다.

물론 진궁이 아무 대책 없이 반대한 것은 아니었고, 진궁은 자신이 성을 지키고 여포는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기각지세를 이루면 조조를 격파할 수 있다고 제안했고 여포도 이를 받아들였지만, 여포의 부인 엄씨가 진궁은 의리가 없을 뿐더러[11] 고순과 서로 불화하여[12] 제대로 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지적하자 계책을 포기했다.

결국 여포는 하비성에서 고립된 채 농성하며 그저 원술의 원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최악의 수를 선택했다. 이미 쇠락한 지 오래였던 원술군은 싸움에서 맥없이 무너졌고, 여포 스스로는 내부 결속을 이유로 농성을 선택해놓고도 오히려 제장들 간의 불화를 가중시켜 후성, 위속, 송헌 등이 조조와 내통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후성 등은 진궁을 사로잡은 채 성문을 열어 휘하 군대를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여포는 남은 군사들과 백문루에서 저항하다가 끝내 투항했다.

2.5. 죽음

조조는 진궁을 대면하였다. 그때 그들이 나눈 대화가 남아 전해져 내려온다.[13]
고순이 처형당한 후 진궁이 군사들의 손에 이끌려 왔다. 이에 조조는 반가움과 비웃음이 뒤섞인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조조: 공대, 오랜만이로구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소?
진궁: 그대가 간악하고 불충하여 그대를 버리고 떠났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14]
진궁이 매섭게 말하자 조조는 정색하고 진궁에게 물었다.
조조: 경은 평소 스스로의 지모가 남들보다 낫다고 말했소.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된 것이오?
이에 진궁은 여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진궁: 다만 이 사람[15]이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만일 이 자가 제 말을 들었다면 오늘날 이렇게 사로잡히는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조: 경에겐 노모와 자식이 있지 않소. 그들은 어떻게 하려 하시오?
이에 진궁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결연히 말했다.
진궁: 무릇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고, 인정을 베풀려는 자는 남의 후사(자손)를 끊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허니 노모와 처자의 생사는 단지 명공에게 달려있을 뿐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조조의 갈등을 알아챈 진궁이 말했다.
진궁: 청컨대 제 목을 베어 군법을 밝혀주십시오.
진궁은 그렇게 여포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진 후 스스로 형장을 향해 걸어갔다.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몇 걸음 따르다가 주위에게 그를 붙잡으라 하였다. 하지만 진궁은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형장으로 계속 걸어갔다. 조조는 계속 몇 걸음 뒤따르다 눈물을 흘리며 명령을 내렸다.
조조: 진궁의 노모와 가족을 허도로 모셔서 극진히 받들라. 이를 어기는 자는 목을 베리라.
주위 사람들과 병사들 역시 조조의 제안과 진궁의 당당한 죽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래저래 말은 많지만 최후의 일화만큼은 멋지다. 끝까지 유비를 탓하다가 추하게 죽는 여포와 더더욱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여포는 사로잡히자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부하들을 후하게 대했지만 일이 위급해지니 모두 나를 배반했다' 라는 헛소리를 한다. 조조가 '부하들의 부인을 희롱한 주제에 후하게 대했다는 말이 나오냐?' 라고 일침을 날리자 아무런 말도 못한다. 정작 갈 곳이 없던 여포를 받아주고 잘 대해준 유비를 뒤통수치고 서주를 빼앗았으면서[16] '귀큰 놈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라고 했으니 적반하장도 참 수준급이다. 이렇게 찌질하게 남탓이나 하는 여포 때문에 묵묵히 죽음을 택한 진궁이 더욱 빛나보이는 것이다.

진궁도 '여포가 내 말 안 들어서 진 거다' 라고 여포 탓을 하긴 했는데, 진궁의 계책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여포의 승리 시나리오였음을 감안하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진궁 본인도 원술이랑 손잡고 여포를 뒤엎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나름 실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포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다음부터 남의 말 안 듣고 스스로 적을 만들면서 계속 패망의 길을 걸었다.[17] 즉 여포가 망한 책임은 전적으로 여포한테 있으므로, 진궁의 지적은 단순한 자기변명이라기보다 객관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가족까지 상기시키며 어떻게든 회유하려 드는 조조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같이 통수를 친 장막은 가족 후대 그딴 거 없고 삼족을 멸한 것과는 대조적.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조에게 있어 진궁은 자신의 첫 영토인 연주도 갖다 바쳐 주고, 한때는 아이처럼 아끼던 창업 파트너들 중 1명이었으니, 옛정을 봐서라도 살려 줄 생각이었던 것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18]

3. 두 번 배신한 이유

진궁의 행적의 기본 바탕은 조조를 대적하기 위함임을 진궁의 말과 행동에서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세히 드러나진 않는다. 확실한 건 매우 본질적인, 어떠한 혐오감을 주는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수년 동안 맞지도 않는 인물의 밑에서 분투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궁의 행적을 살펴보는 데에 이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멋진 마지막 일화를 가지고 있지만 진궁이 주군인 조조와 여포를 죽이려 한 것은 사실이다. 배신 2연타는 삼국 시대에도 흔치 않다.

진궁이 장막에게 여포를 맞아들이자고 한 이유는 여포가 싸움을 잘하니 일단 그를 연주목으로 추대하여 조조를 물리친 뒤 일정 지분을 주어 떼어내고, 연주를 기반으로 패업을 이루자는 구상이었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장막이 형식상으론 여포를 연주목으로 추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포를 명목상의 주군으로 내세워 그 권위와 군사 지휘력을 이용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어느정도 주고서 몰아내자는 말이었다. 진궁은 장막의 충실한 심복이라면 몰라도 여포의 심복이라 보긴 어려웠다.

2차 창작물에서야 여포의 충신 혹은 유일한 이해자로까지 그려지는 모습을 보이나, 애시당초 진궁이 선택한 주군은 장막이며 여포는 용병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장막이 부하의 배신으로 죽고 장초마저 성이 함락된후 자살하자 장막 사후에는 갈 곳이 없으니 완전히 여포에게 편입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여포는 진궁을 소외시켰고, 진궁도 원술과 연계해 반란을 도모하는 등 그마저도 상호 견제에 가까웠다.

여포는 동탁을 죽인 뒤로 장안 조정에서 명예직이지만 삼공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당시 장안 조정을 장악했던 이각, 곽사 등도 슬슬 여포를 회유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던 상황이었다. 반면 조조는 연주자사 유대의 죽음으로 자사가 공석인 상황에서 연주 호족들의 추대로 연주자사 대리를 맡아 혼란을 수습하고 조정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는 것이 정사의 서술이지만, 실상은 정식 연주자사 금상을 내쫓고 연주를 점거한 것을 관동의 실력자였던 원소가 연주자사라 인정해준 것으로 대놓고 불법적이다. 조정에게서 이를 추인받는 것은 그 이후의 일.

다만 진궁을 비롯해 장막을 중심으로 뭉친 연주 호족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인 연주에서의 영향력을 잃고 쫓겨난 데다, 그 구심점이었던 장막까지 사망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여포 휘하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포도 이런 진궁 등을 예쁘게 볼 리 없다. 이 때문인지 여포가 서주를 점거하고 세력 구성이 다양해지자[19] 진궁 등은 점차 발언력을 잃고 괄시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입지의 불안을 느꼈는지 원술의 사주를 받고 학맹 등과 공모하여 여포에게 반란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무력 봉기에 나선 학맹이 여포를 죽이는 데 실패하고 여포가 고순의 활약에 힘입어 학맹의 난을 조기 진압한다. 이때 진궁은 모르는 척 회의에 참가했으나 조성의 증언에 의해 그 자리에서 공모 사실이 드러나는 수모를 겪는다. 여포는 후폭풍을 두려워했는지 진궁이 일군을 이끄는 대장이라는 이유로 이 사실을 불문에 부쳤지만 이후 진궁의 입지는 추락한다. 다만 반란 모의가 사실로 밝혀졌음에도 불문에 부칠 정도로 여포군 내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은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4.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여백사 일가를 죽일 때 동행했다거나 도겸을 공격하는 조조를 설득하려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조조의 비정함을 표현한 짧은 일화의 등장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20]

연의에서는 본래 중모현의 현령을 지내고 있었는데,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도망치던 조조가 중모현을 지나다가 암살자 조조를 찾는 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다. 진궁은 십상시 건석의 아비를 때려 죽인 조조의 높은 의기와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는, 밤 늦게 조조와 은밀하게 대면하였다. 평소부터 맹덕의 의기에 감동받아왔던 그는 벼슬은 물론 가족까지 버리고[21] 조조와 뜻을 함께하여 같이 도망가게 된다.

이리 저리 잘 도망다니던 중, 조조는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해 부친의 의형제인 여백사의 집에 들렀다. 여백사는 그들을 융숭히 대접하기 위하여 술동이를 사오려고 시장으로 가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진궁과 조조는 손님을 위한 방에서 쉬고 있던 중, 칼을 가는 소리와 함께 묶어서 죽일까 아니면 그냥 죽일까라는 대화를 엿듣게 된 조조와 진궁은 함께 여백사의 가족을 먼저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집안의 종들이 돼지를 잡으려던 것뿐이었다.

이에 조조와 진궁은 실수를 자책하며 집을 떠났지만, 시장에서 술항아리를 사서 돌아오던 여백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여백사가 단순한 오해로 인하여 그의 가족들을 죽인 조조와 진궁에게 역정을 내며 관가에 신고할 것을 두려워한 조조는,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여백사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린 사이에 곧장 그를 베어버렸다. 평소 조조의 의기를 신망하고 있던 진궁은 이와 같은 광경에 조조의 무자비함을 책망하지만 조조는 자신이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자신을 저버리게 할 수는 없다며 자신을 변호하였다.

진궁은 조조와 함께 어딘가에서 자다가 조조가 세상의 만민을 구원할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야망에 불타는 간웅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그래서 조조가 잠든 틈을 타 죽여버릴 마음까지 가졌다가 자신은 나라를 위해 조조를 따랐는데 지금 죽인다면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22] 그냥 떠난다. 정사에선 진궁이 왜 조조의 곁을 떠났는지 명확한 이유가 없지만 연의에선 나름대로의 명분을 만들어 준 셈.

이후 진궁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조조가 조숭의 죽음을 기화로 서주 대학살을 일으키며 도겸을 정벌하려 하자, 진궁이 나타나 조조에게 가서 그를 대면하여 군사를 돌리라고 설득한다.
조금만 더 신중히 생각하시오. 도겸 어르신은 그대와 같은 자가 아니오. 그대와 같이 온정을 베푼 자를 죽이지도 않을 뿐더러 탐욕 때문에 인의를 지는 자가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조조가 벌컥 화를 내며 거절하자, 물러나온 후 장막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후 사방에서 쫓겨다니던 여포를 거두는 방책이 세력 확장에 좋다고 설득하여 장막에게 여포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여포의 모사가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정사와 흡사하다. 단 정사에서 원술의 사주를 받고 학맹과 공모한 사건은 연의에서 짤렸다. 이때문에 연의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궁이 여포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충성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진궁이 조조에 대한 반감으로 여포를 이용하려 했다는 점은 연의에서도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 나온다.
고순이 대답하지 않자 조조가 노해서 베라 한다. 서황이 진궁을 압송해온다.
"공대, 나와 헤어진 뒤로 별 일 없었소?"
"네가 마음을 쓰는 게 바르지 못해 너를 버렸다!"
"내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서 어찌 여포를 섬겼소?"
"여포가 비록 꾀가 없지만 교활하고 음험한 너와는 다르다."
"그대가 스스로 슬기롭고 꾀가 많다 하더니 지금 어찌 이리 됐소?"
진궁이 여포를 돌아보며 말한다.
"이 자가 내 말을 듣지 않은 게 한스러울 뿐이다! 내 말을 따랐으면 분명 이렇게 잡히진 않았을 것이다."

위 대화에서 보다시피 여포에 대한 진궁의 호칭[23]은 존경심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충신이 주군에 대한 태도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24]

5. 평가

5.1. 정사

진궁의 성향 자체가 여포와는 딴판이었고, 본인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었으니 여포의 충신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반란을 모의하기도 했으니 연의에서 충신으로 묘사된 진궁은 무리수가 있는 셈.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여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일차적으로 여포는 조조 원술이 대립할 때 조조를 지지하여 천하의 판세를 읽음에서 커다란 헛다리를 짚었고, 진궁을 대신한 인선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부하들의 처를 함부로 희롱하는 등 어리석은 언행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상황이었다. 이런 꼴을 진궁이 좋게 볼 리는 없으니 솔직히 충성심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양심이 없지만, 그래도 반 조조 성향이라는 큰 공통점은 공유하고 있는데다 책사답게 세태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 여포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포가 정말 크게 낭비한 인재임은 분명하다.[25] 조조는 길길이 날뛰며 여포를 시샘하였지만 원술은 동맹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여포는 끝끝내 조조를 선택하였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당대로서나 현대로서나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여포가 제 주군을 여러 번 갈아치웠던 것도 모자라 살해까지 일삼은 소인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포는 궁리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손익을 따져본 결과 조조가 점차 유리해진다고 판단하였고, 이어 자신과 조조의 세를 비교해 보아 자신은 조조를 이기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자 차라리 깨끗이 항복하고 '사람 중 여포'라는 무장으로서의 자신의 명성과 능력을 어필해 허울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하였던 조조에게 맡기는 계획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포는 실상 조조와 거의 접촉이 없었기에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진궁은 한때나마 조조와 함께 연주 지방의 여러 고을을 설득하여 조조의 영향력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나라 땅에 모여 있던 조조의 기반을 다진 공로가 있는 인물이었다. 여포의 이러한 결정에서 비춰 볼 때 여포는 조조의 서주 침공 중 여포가 조조의 많은 고을을 점령하는 등 민폐를 끼친 행각들을 망각한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진궁의 출신이나 처신을 생각하면, 여포에게 신임을 얻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여포가 어떤 위인인지는 당대에도 너무나 명확했기에, 결국 굳이 여포를 택했던 진궁에게도 책임이 없지는 않은 셈.

진궁의 행보 자체도 미스터리한 점이 많다. 어떤 의미에선 배신의 아이콘처럼 느껴지는 점도 있는데, 장막을 설득해서 조조를 배신하게 만들고, 여포 휘하에서도 학맹을 주사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지막 주군이 배신의 아이콘 여포라는 것도 흥미로운 점. 확실한 것은 진궁이 연주와 서주에서 반(反) 조조 세력의 대표자였다는 점이다. 조조의 친한 친구였던 장막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킨 점, 여포와 반목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여포 아래에서 반(反) 조조 노선을 견지한 점을 보았을 때 진궁이 조조를 몹시 싫어했던 것은 분명하다. 원래 조조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궁이 반(反) 조조 인사가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서주대학살 또는 변양 사건이 계기가 아닐까 추측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후대인들의 추측의 영역이고 명백하게 밝혀진 사료가 없기에 진궁이 조조를 싫어하게 된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사와 연의를 불문하고 일정 시점 이후로 조조를 굉장히 혐오하게 되었다는건 확실하다.

5.2. 연의

연의에서도 기구하긴 마찬가지인데 목숨을 건 도주라는 극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가능성을 생각하고 여백사를 죽인 조조의 행위를 도덕적 기준에서 혐오해서 조조를 떠나 놓고 선택한 게 자기 양아버지 둘의 목을 딴 데다 취미가 배반이었던 성 셋 가진 종놈 여포였다는 것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도 많다. 이문열같은 경우는 유비의 뒷통수를 치자는 계책을 진언하는 진궁이 난세에 쓸려 씁쓸하게도 타락했다고 해석했다.[26][27]

다만 적어도 당시에 큰 악행을 저지른 군웅은 동탁 그리고 연의에선 유비의 조력자로만 나오지만 본래는 진짜 막장이었던[28] 공손찬 정도를 제외하면 조조가 유일하였고 학살의 규모로 따지면 조조가 1위였다.[29] 또한 진궁이 원술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기 전부터였다. 대강 정리해보면 악인 조조를 처리하기 위해 차악인 여포, 원술을 택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정작 여포군에선 살벌한 동거를 하며 지냈고 결국 계책을 간언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이후 조조군에 잡혀서 죽게 된다.

조조의 만행에 학을 뗀 인물이, 정작 조조보다 나을것 없는 여포를 섬겼다는 게 비합리적이라 여겨졌는지, 연의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에서 여포의 막장성을 희석시키고, 여포와 진궁의 관계를 완화시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여포를 의리없는 후레자식이지만 한편으로 순수한 인물로 그리고, 진궁이 여포를 따르는 이유가 그 만큼 순수한 인물도 없기 때문이었다고 묘사한 <신삼국>이라든가. 혹은 또 조조가 어째서 여포를 섬겼나는 말에 진궁이 "여포는 띨띨해도 너처럼 교활하진 않다!" 라며 여포도 좋은 놈은 아닌데 조조가 더 나쁜 놈이기 때문에 섬겼다는 식으로 구성한다든가. 이도저도 아니면 둘다 나쁜 놈이지만 조조는 너무 잘나서 자기가 막을 수 없는 인물이고 여포는 나쁘긴 해도 나중에라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어서 섬겼다는 둥 나름의 정당성은 확보하고 있다. 서주 대학살을 원인으로 보는 작품은 여포는 오히려 성격상 약탈을 했으면 했지, 조조마냥 아무 이유 없이 민간인 학살하고 그럴 인물은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납득이 되며, 이도저도 아니면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운다는 마인드로 조조만은 죽인다는 일념으로 흑화해서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같은 식으로 전개하기도 한다.

6.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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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8년 12월 25일. [2] 출처: 여포전 주석 전략. [3] 연주 구원전에 관한 내용은 《정사 삼국지》 <여포전>에 달린 주석이 아닌 《 정사 삼국지》 <무제기>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4] 출처: 여포전 주석 위씨춘추 [5] 다만 조조가 변양을 죽인 것은 연주의 반란을 제압한 뒤의 일이다. [6] 바로 직전에 한조부흥과 동탁 토벌을 목적으로 일어났으나 실상은 제후들이 모이지도 못하고 간만 보며 따로 행동하다가 용두사미로 끝난 반동탁 연합군이나, 관중 십장을 규합하면서 폭발적인 위세를 보였지만, 전세가 장기화되자 구성원들 간의 내분으로 인하여 지리멸렬하다가 패한 마초와 비슷한 맥락이다. [7] 연주와 남양주의 경계 지역이다. [8] 출처: 여포전 주석 전략. [9] 출처: 여포전 [10] 출처: 여포전 주석 헌제춘추. [11] 연의에서는 충의지사인 진궁의 말을 여포가 부인의 말만 듣고 무시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만, 정사에서의 행적을 보면 이미 한 번 여포와 반목했으니 진궁을 신뢰할 리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진궁은 여포에게 정나미가 다 떨어졌는데도 결국 끝까지 여포를 배신하진 않았다. 그러나 여포에 대한 의리라기보단 조조에 대한 혐오감이 그만큼 컸으리라 볼 수 있다. [12] 상술했듯 학맹의 반란 모의를 저지한게 고순이고 진궁은 그 모의의 주도자였으니 여포가 불문에 붙인지라 일이 커지지 않았을 뿐 둘의 사이가 좋을 순 없었다. 다만 두 사람 다 공과사는 명백히 구분하는 성격이니 만큼 설령 진궁의 계책대로 갔더라도 둘은 이 전투 한정으론 악감정을 접고 함께 행동했을 것이며 혹여 불안했다면 고순을 여포가 데리고 나가 둘을 떨어뜨려놓는 방법도 있었다. [13] 조비의 《전론》에도 나오는데 내용이 완전 다르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여백사 때의 일을 떠올리는 부분이 추가되었다. [14] 삼국지연의에선 이 말에 조조가 내 마음보다 여포의 마음이 바르다고 보시오?라고 묻자 진궁은 여포가 미련했을진 몰라도 너처럼 음험하고 교활하진 않았다라고 받아친다. [15] 정나미가 완전히 떨어졌는지 주군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16] 이 일 때문에 유비는 소패에서도 떠나야 했고 원술한테도 쫓겨나서 결국 조조의 객장 신세가 된다. 유비가 정사/연의를 통틀어 가장 섬뜩하리만큼 싸늘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여포를 죽이라고 말한 이 때가 처음이다. [17] 부하의 부인들을 탐하고, 충신인 고순의 피같은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를 받아준 유비를 저버렸고, 정작 원술을 마다하더니 조조의 손을 잡고 등등 [18] 다른 야사에서는 수십년뒤에 순욱과의 위공 즉위와 구석 문제으로 대립한 이후 조조는 진궁이 살아있었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없었다고 했으며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나 생각이 나면 슬퍼했다고 한다. [19] 하진(정확히는 하진의 부하인 정원의 휘하) 휘하 시절부터 함께했을 고참 부하들과 진궁을 비롯한 연주 호족들의 잔당, 그리고 그 외의(여포가 각지를 방랑하면서 확보한)여러 무뢰배들이 여포의 기존 세력이였다. 그런데 서주 점령 후 장패 같은 객장에, 유비에 반기를 들며 여포를 추대한 조표, 왕해, 허탐 등 단양 출신의 구 도겸파 인사들과 진규, 진등 부자 등 기존 서주 토호들이 합류했다. 고순은 배경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진궁과의 갈등을 근거로 여포의 고참 수하로 추측하고 있다. [20] 낙양에서 동쪽으로 가면 여백사의 집이 있는 성고를 거쳐 더 동쪽으로 중모현이 나온다. 따라서 시간 순서 상 여백사 사건 후에 중모현에서 조조가 잡혔다가 공조가 알아보고 풀어주는 일이 나와야 하지만 연의에서 진궁을 넣으면서 사건을 극적으로 만들고 조조의 비정한 면모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 순서를 바꾸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도 낙양탈출과 중모현 사건 사이에 여백사 사건이 주석으로 들어가있다. [21] 다만 다음에서 서술할 여백사 일가 살인사건 직후 조조를 떠났다는 서술이 나오기에 다시 중모현으로 돌아간 걸로 추정된다. [22] 즉, 조조가 악인이긴 하지만 그를 죽이면 동탁 타도가 물건너가기 때문에 차악 또는 필요악으로 남겨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훗날 진궁이 여포의 힘을 빌려 조조와 맞선 행적과 일맥상통한다. [23] 당시에는 피휘 문화의 존재 때문에 상대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건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상급자도 가급적이면 부하를 호칭할 때 자로 불렀다. 이 장면조차도 조조가 포로로 붙잡힌 진궁을 공대라고 나름 존중해서 부르고 있다. [24] 항우를 수자라고 욕한 범증의 사례도 있지만, 범증은 항우에게서 아부(亞父: 아버지에 버금가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 어르신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25] 사실 196년 이후 조조와 원술의 대립 구도에서 이미 원술은 불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결 홀가분해진 조조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포가 조조에게 붙었다 한들 목이 달아나는 시간이 늦춰지는 정도였던 반면, 원술이 유독 여포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함과 동시에 스스로는 칭제라는 무리수까지 두었던 이유는 내부의 결속과 우방 군벌 확보를 위한 몸부림이었으므로 차라리 원술에게 협력하고 함께 조조와 대적하면 서로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26] 다만 본인도 만화 삼국지에서는 진궁의 최후에 대해서 여포가 너보다 비열하지는 않다고 디스하는 것으로 좀 쉴드쳐주긴 했다. [27] 도덕적 기준에서는 그놈이 그놈이지만 꾀 같은건 전무한 여포와는 달리 조조는 비열할 정도로 꾀가 많았다. 당장에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왕후의 목을 치기도 했다는걸 떠올려보자. [28] 역경이라는 큰 요새를 짓고 틀어박혔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현대까지도 토목공사는 사람을 갈아넣는 일이다. [29] 사실 조조가 도겸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라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서주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엄연히 폭군이라 해도 할 말 없는 만행이다. 정말 복수을 실행하고 싶었다면 서주를 침공해 관리들만 죽여 서주를 차지하는 선에서 끝내야했다. 실제로 서주 시민들이 도겸이 사망하자 유비가 서주목이 되기를 빌었을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이 서주 대학살은 두고두고 조조의 발목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