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19:17:53

양주(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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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揚州3. 涼州4. 梁州

1. 개요

고대 중국 행정구역들. 우리 발음으로는 다 같은 양주이지만 한자가 다른 양주가 3개나 있다. 마지막 양주는 거의 언급되는 게 없다시피 하고,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삼국시대에 공존 한 적이 있었기에 이 두 개의 구분이 중요하다. 그래서, 강동 지역 손오의 근거지인 양주(揚州)와 구별하기 위해서 '서쪽의 양주' 로 부르는 별칭으로 '서량' 이라고 표기한다.

2. 揚州

임금이 세웠다는 구주의 하나로 장강 하류 유역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장쑤성 남부, 안후이성 남부, 저장성, 장시성 그리고 푸젠성 지역에 해당한다. 물론 실제로 우 임금이 양주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단 하나라 자체부터가 실존이 불확실할 뿐더러 하나라가 실존해 있다고 쳐도, 그저 허난성 일대에서 힘 좀 쓰는 나라였을 뿐, 장강유역은 춘추시대까지 황하와 정체성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왕의 구주는 행정구역이 아닌 지리적인 구분이었다.

춘추시대에는 오나라, 월나라가 있던 지역이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나라가 초나라에 망한 뒤로는 초나라의 땅이었다. 전국시대에는 진나라에게 계속 밀리던 초나라가 마지막 수도로 삼은 곳이 양주 지역의 수춘이었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형산군(衡山郡), 구강군(九江郡), 회계군(會稽郡), 민중군(閩中郡)이 설치되었다.

전한 시기에 양주가 설치되었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소속 군은 후한 기준 구강군, 단양군(丹楊郡), 여강군(廬江郡), 회계군(會稽郡), 오군(吳郡), 예장군(豫章郡) 6개 군이었다.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는 초기에는 호족들이 난립했으나 손책에 의해 장악된 이후 손오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장강 이남에 대한 개발이 시작되었고, 손책이 194년 여릉군(廬陵郡)을 예장군에서 분리한 것을 시작으로 손권 시기에 파양군(鄱陽郡), 팽택군(彭澤郡)이 예장군에서 분리되었고 신도군(新都郡)이 단양군에서 분리되었다. 손권 사후 고장군(古鄣郡)이 단양군에서 분리되었다.

서진 시대에도 양주 자체는 유지되다가 291년, 남부가 강주(江州)로 분리된다. 이후 유송 시기에 남은 양주에서 남부가 다시 동양주(東楊州)로 분리되어 나온다.

이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수나라는 한나라 때의 교주 지역까지 포함해 다시 양주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 양제는 수나라 말기에 "3수도제"[1]를 시작하면서 이 곳을 세번째 수도로 삼았었다. 당시 양주가 수도로 지정되었을 때의 명칭은 "강도"(江都). 강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물론 수나라는 이후 몇년만에 망해서 수도로 오래 가지는 못했었지만. 이후 당나라 때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주 위에 (道)가 신설되었고, 양주 지역의 북부(회수와 장강 사이의 회남 지방)는 회남도(淮南道)에 속하게 되며 남부는 형주의 남부(이후의 상주(湘州))와 합쳐져 강남도(江南道)에 속하게 된다.

이 양주의 이름은 양저우시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3. 涼州

후한 13자사부 중의 하나. 현재의 간쑤성 서부에 해당한다.[2] 옹주와 분리와 합체를 자주 반복했다. 전통적으로 진(秦)나라의 근거지. 동탁, 마등 세력의 본거지였으며 서역 지배의 중심지였으며, 오나라의 양주와 구별하기 위해[3] 에 흔히 서량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일부 삼국지 배경의 서브컬처에서는 아예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량주'라고 써서 구분하기도 한다.

4. 梁州

우 임금이 세웠다는 구주의 하나로 현대의 쓰촨성 지역. 물론 우 임금의 추정 연대(서기전 23세기)에는 쓰촨 지역 역시 중국과는 따로 노는 독자적인 문명이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촉나라 및 파나라가 있었다가 전국시대 진나라 혜문왕 말기인 기원전 318년에 진나라에 정복되었다. 진시황의 36군 중에서는 한중군(漢中郡), 촉군(蜀郡), 파군(巴郡) 3개 군이 해당된다.

초한쟁패기에는 한고제 유방의 근거지였으며, 이후에는 익주(益州)가 설치된다. 삼국시대에는 촉한의 근거지였다.

이렇게 양주라는 이름은 잠시 묻혀 있다가, 263년 가 촉을 멸망시키고 난 후 익주의 동북 절반을, 즉 익주를 구성하는 큰 줄기인 파(巴)와 촉(蜀) 중에서 파 지역을 분할하여 양주를 설치했다.[4] 치소는 처음에 면양현에 두었다가, 서진 시기에 들어서 남정현으로 옮겼다.

구체적인 설치 시점은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삼국지』 「삼소제기」에 나오는 것으로 264년 2월 5일이다.

다른 하나는 『진서』 「지리지」에 나오는 것으로 태시 3년, 즉 267년이다.


[1] 그전에도 즉위 초반에 이미 2수도제를 실시하였다. 기존의 1수도 장안에, 낙양이 두번째 수도로 추가되었다. [2] 간쑤성 동부는 사례교위부나 익주에 속했다. [3] 표준어에서의 두음법칙으로 인해 한글로 쓰면 구별할 수 없다. [4] 이엄 한중을 지키게 되었을 때에, 제갈량에게 익주를 분할하여 파주(巴州)를 만들고 자신을 파주 자사로 삼아 달라는 요청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와 비슷하다.